330화 환영 (10)
레안드로는 안으로 점점 더 깊게 들어갔다.
길은 계속 이어졌다.
동굴에는 밤낮이 없었고 레안드로는 지금까지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안으로 얼마나 깊게 들어갔는지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밖에서 비가 내리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희미한 습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들숨과 날숨이 섞인 탁한
습기 였다.
곧 습기의 원천이 눈앞에 보였다. 거대한 가시 울타리였다.
끈적거리는 공기가 울타리 사이를 빠져나왔다.
몸을 확장하고 수축하며 움직이는 길쭉한 덩어리가 시야에 가득했다.
다양한 크기의 애벌레들이 울타리 안에서 바닥에 몸을 미끄러트리며 시체를 먹고 있었다. 동굴 바닥이 몸에서 쁨는 진액으로 흥건했다.
썩은 냄새는 없었다.
끊임없이 입을 오물거리는 왕성한 식욕을 보니,시체가 오면 썩기 전
바로 먹어 치우는 모양이었다.
레안드로는 걸음을 멈췄다.
지금껏 수많은 마물을 봐 왔지만 저런 애벌레는 본 적이 없었다.
벌레들은 작은 발로 땅을 디디고, 앙증맞은 손으로 인간들을 꽉 잡고 꼭꼭 씹어 먹고 있었다.
가장 작은 것은 10센티 정도였고, 큰 건 1미터 정도였다.
크기가 커질수록 손발이 길어졌고, 밋밋한 얼굴에 인간의 이목구비도 서서히 나타나고 있었다.
“끄어어?”
들고 레안드로를 바라봤다.
미끌미끌한 혀가 밋밋한 주둥이를 핥았다.
갓 만들어진 것 같은 혀였는데, 혀가 있는 애벌레는 그 하나밖에 없었다. 끈적거리는 점액이 혀에서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신. 선. 해.
애벌레는 말을 할 줄 알았다.
귓속까지 끈적거리는 둣 질척한 소리였다.
레안드로는 차가운 눈으로 벌레를 바라봤다.
같은 눈으로 그를 보다가,고개를 처박고 부르르 멸며 얌전히 시체만 먹었다.
혹시 애벌레가 자라서 플라스크에 담기는 건가 싶었지만,그렇다기엔 플라스크 안에 있던 육체들은 너무 완벽했다.
인간의 이데아라고 생각될 만한 존재들이었다.
그에 비해 가장 큰 개체가 1미터 정도인 애벌레는 대충 형태만 잡혀 있었다. 인간과 닮으려 했지만 아주 허물어진 인간에도 미치지 못했다.
검은 즙.
피.
점액을 몸 곳곳의 구멍으로 울컥울컥 홀리는 그들은 몸이 계속해서 허물어 졌다.
차라리 애벌레일 때는 안정감이라도 있었지만,인간 형태를 유지하는 건 무리인 듯했다.
애벌레의 자세가 무너져 바닥에 철퍽거리는 소리가 불쾌했다.
칼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중요한 증거들.
앞뒤 사정도 모른 상태로 무작정 없앨 수는 없었다.
레안드로는 그들을 지나쳤다. 비슷한 애벌레 성체들이 앞쪽에서
계속 더 나타났다.
어떤 벌레는 얼굴이,어떤 벌레는 몸이 점점 더 사람을 흉내 내며 정교하게 닮아 갔다. 하지만 이들이 자라서 플라스크 속의 인간들처럼 된다는 생각은 역시 들지 않았다.
끈적끈적한 공기를 한참 지났다.
점점 넓어지는 동굴은 동굴이라는 겉치레마저 벗어 버리겠다는 둣이 인공적인 느낌이 강해지고,몹시 넓어졌다.
삼십 분 정도를 쭉 걸어가자 앞이 막혀 있는 게 느껴졌다.
끝부분에 다다른 것 같았다.
어둡고 커다란 홀 계단 앞에 인기척 하나가 서 있었다.
익히 알고 있는 기척이었다.
레안드로는 계속 앞으로 걸어갔다.
- 화르르!
홀 가운데에 도착하자마자,그를 중심에 두고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횃불이 둥글게 켜졌다.
하나,둘,셋,넷. 스물아홉.
팔짱을 끼고 서 있던 인기척은 굵은 팔을 좌우로 활짝 벌렸다.
낮고 굵은 목소리가 리듬감 있게 흔들리며 간드러진 목소리를 냈다.
“생일 축하〜 합니다H 생일 축하〜 합니다H 사랑하는 그대의〜 생일 축하합니다〜! 꺄아〜! 스물아홉 번째 생일 진심으로 축하드리어요! 여기 까지 와 주셔서 고마워요!”
익히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침묵하는 그를 향해 남자는 계속 말을 이었다.
“아아. 슬퍼라. 역시 대상조께선 자기 생일이 언젠지도 모르시어요. 꽃이 과로로 시들어 버리면,소녀는
그만 슬퍼 버리어요.”
남자는 떡 벌어진 가슴팍에 손을 넣었다. 그리고 보라색 제비꽃과 하얀 토끼가 그려진 손수건을 꺼내 눈을 홈쳤다.
레안드로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엄지로 뒤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 전체 층. 네가 만든 건가?”
공작이 손수건을 나풀나풀 흔들며 교태를 부렸다.
“소녀의 단독 작품은 아니어요. 오랜 세월에 걸쳐 수많은 사람이 노력한 결과물이어요. 꼬물거리는 귀여운 애벌레들은. 일단 소녀가 관리하고 있지만요.”
“그 애벌레가 커서 플라스크 속의 인간이 된 건가?”
공작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이리저리 몸을 뒤트는 탓에 튼실한 가슴 근육까지 좌우로 흔들렸다.
“아니요,그렇지는 않사와요. 모두 힘내 노력하지만 무리! 무리와요. 이리 와 소녀의 손을 꼭 잡으시면 사정을 자세히 말씀드리어요.”
“설명은 천천히 듣지.”
레안드로는 이야기를 끊었다. 그리고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로랑스 타르티에 공작,당신을
살인,위력에 의한 살인교사,강요, 상습 약취,유인 등의 살인/치사죄, 상습 체포/감금의 치사상죄,사체 유기 및 훼손,오욕죄,직권남용, 국헌 문란, 직권남용 및 권리행사방해 혐의로 긴급 체포한다. 진술할 시간은 많다.”
“호. 호호호..
공작은 어깨를 으쪽했다.
“바보 같은 것들은 잊어버리세요. 우리는 특별하잖아요? 법 같은 건 개돼지들이나 지키면 되는 거와요. 저들끼리 숫자를 줄이지 않게요. 제가 왜 당신을 대상조로 밀었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그런 건 상관없었다.
어떻게 임명됐건,제국 대상조는 시민의 평온을 위해 일한다.
“정〜 말 위험하여요. 소녀 혼자만 있는 게 아니랍니다. 제국 모두가 후작님을 노릴 거여요!”
공작이 드물게 진지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힘들고 위험하니까 이런 권한을 줬겠지.”
“그게 무슨 말씀이어요?”
“대상조란 직책 말이다. 어렵고 힘든 일을 파헤치라고 터무니없는 권한을 갖고 있는 거다. 공소권과
재판권을 동시에 가졌는데 해야 할 일이 순탄할 리가 없지 않나?”
“으후홋!”
공작이 엄청나게 두꺼운 목 근육을 푸들거리며 미소 지었다.
“재미있는 말씀이어요. 슬프게도 그대는 역시 이런 게 매력이지요.”
“체포하겠다. 반항하지 마라.”
“어머,짜릿하셔라. 생일을 잊은 바보에게 준비한 선물이 있사와요. 소녀가 드리는 선물을 보면 생각이 아주 확 달라지실 거여요!”
레안드로는 뻗어 나가려던 발을 멈칫했다.
그동안 본 공작의 모습 중에서도 드물게,압도적으로 자신감 넘치는 말투였다.
“소개하겠습니다!”
그때 였다.
홀의 어둠에서 긴 그림자 하나가 뻗어 나왔다.
그리고,그 끝에 실존하는 하나의 하얀 육체가 솟았다. 팔과 다리가 있고,손발이 있고,얼굴이 또렷이 새겨진 몸이었다.
애벌레들처럼 쉽게 허물어지지는 않았지만 플라스크의 육체들처럼 완고한 안정감을 갖지는 못했다.
원숙한 여자의 몸은 검고 긴 촉수 끝에서 그저 서성이고 있었다.
“짜잔!”
레안드로는 태어나 처음으로 정면을 응시할 자신감을 잃었다.
기억 속에서 이미 태워 버렸다고 생각한 환영이 그곳에 있었다.
마법인가 싶어 눈을 깜빡였다.
“아. 아아..
그림자 끝의 여자가 입을 벌렸다. 뭘 생각하는지,무엇을 느끼는지. 부푼 가슴이 흔들리며 새어 나오는
목소리에서는 알 수 없었다.
“아. 들..?”
찢어진 현실로 정신이 흥건하게 무너졌다.
목소리는 일곱 살 때 마지막으로 들었던 것 그대로였다.
칼끝이 동요로 흔들렸다.
남몰래 지르던 비명들이 어딘가 깊이 끼어 버렸다.
“후후홋,기사 데서리 바티엔느. 20년 만에 아들을 만나는 심정이 어떠신가요?”
“기. 기뻐. 요..:,
말하고 계십니다!”
여기가 지옥이라면,상상과 달리 뜨겁지 않다고 생각했다.
물론 저승은 아니다.
마음에 담은 어머니를 재현시켜 주는 마법일 리도 없다.
잘 알고 있었다.
눈앞에 나타난 어머니와 무엇이 연결되어 있는지,
- 우득. 우드득...
낮고 불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레안드로가 품고 있는 보석에서 빛이 바깥으로 강하게 새어 나왔다. 눈앞에 있는 건 기억 속 어머니.
20년의 세월이 지나지 않은. 보존되어 있는 어머니 그 자체. 그리고 마魔...
“으... 으으으.
서른세 살의 데서리 바티엔느가 빛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두 눈이 멀 것 같다는 표정으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하얀 손가락 사이로 핏덩이 같은 비명이 새어 나왔다.
뒤에 있던 공작이 손을 내저었다.
“어머,어머. 그러면 아프답니다. 어머니께서 괴로워하셔요! 그 돌을 어서 버리셔요!”
“이게. 네. 협상 카드였나?”
레안드로는 이를 악물고 일리엔의 유물을 꽉 쥐었다.
빨갛고 깊은 자국이 그의 손안에 선명히 새겨졌다.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만, 곧 가르베라에서 추출해서 준수한 개체를 별도 제작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가. 부활하시는 것이지요!”
주먹을 꽉 쥔 레안드로를 앞에서 따라하는 것처럼,공작은 반대쪽 주먹을 꽉 쥐고 흔들면서 도취해 외쳤다.
“사실은 부활 그 이상! 영생! 바로 영생입니다! 추억과 행복을 그대로 되살릴 수 있습니다. 연구가 점점 발전할수록,모습도! 습관도! 모두 복제해 낼 수 있습니다!”
영생.
레안드로는 눈을 감았다.
거대한 흘의 계단,천장,벽.
‘어머니’는 그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었다.
석조 건축물처럼 덮인 한 겹의 막을 뚫으면,레안드로가 10년 전 사냥했어야 할 거대한 마물의 기척이 느껴졌다.
공작은 이제 두 주먹을 꽉 쥐고 허공에 격하게 흔들며 외쳤다.
“사전 동의가 반드시 필요한 데다, 완벽한 개체로 하나밖에 만들 수 없는 플라스크의 모형과 달리. 애벌레 복제는 개발 중입니다만, 1년! 1년만 지나면 원하는 대로 조형도 가능합니다! 혹시 열 살 정도 어린 어머니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조금 더 나이가 들게? 취향에 금기는
없습니다! 정신 연령도 원하는 대로 맞춰서. 후후후. 꼭 가지고 싶지 않으시어요?”
공작의 말이 제대로 된 형태로 전해지지 않았다.
그는 회심의 미소를 짓더니,세계 최후의 비밀을 공개한다는 태도로 쥐었던 주먹을 쫙 펴고 외쳤다.
“게다가 숫자! 숫자입니다! 여기 계신 소중한 어머니를 다섯이라도, 열이라도 만들어 드릴 수 있습니다! 열 살의 어머니,스무 살의 어머니, 원숙미를 더한 마흔이나 쉰 살의 어머니까지 모두 당신의 것입니다! 최고! 최고가 아닙니까? 망가지는
일이 있어도 안심! 대안심입니다!”
생각도 나오지 않았다.
눈앞의 남자는 가르베라에게 먹힌 ‘어머니’를 이 아래에서 오랫동안 키워 오고 있었다.
어머니의 의식은 유지되었는가.
유지되었다면, 얼마나 오랫동안 유지되었을까.
저기에 그녀의 어떤 편린이 남아 있다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레안드로의 머리에서 법이 완전히 사라졌다.
도덕이,윤리가,의무감이 깨끗이 사라졌다.
명예도 치정도 사라졌다.
사는 일도 죽는 일도 잊었다.
심장은 오직 한 색으로 새파랗게 물들었다.
레안드로는 천천히 칼을 내렸다.
아래로 내린 검이 파랗고,파래서 투명해진 연기를 머금었다.
“.너 때문인가?”
“당신이 원한다면. 예?”
물어볼 필요조차 없었지만.
최후의 확인을 해 두고 싶었다.
“네가 어머니를 죽였나?”
공작은 부인할 생각도 없다는 둣
고개를 끄덕거렸다.
“후우. 기사 데서리 바티엔느는 너무 깊은 곳까지 와 버리셨지요. 어쩔 수 없었어요. 하지만 아들이 이렇게 훌륭하게 자란 걸 보고, 얼마나 기분이 좋으시겠습니까? 그대는 원한다면 특별히 두 종류의 영생을 누리실 수 있는데,이건 제가 설명을..!”
- 스르륵.
레안드로는 감은 눈을 다시 감았다.
- 우드득. 우득. 우드득,
집중하다 보면, 아주 작고 낮은 소리와 적의가 사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맥박처럼 일정하게 수많은 덩굴이 꿈틀거리는 소리.
가르베라의 육체.
무엇을 먹고,무슨 처리가 되어 자란 걸까.
자신이 베었던 것은 물론.
어느 책에서 읽은 것과도,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대한 그 덩굴은 홀 전체를 구성하고 있다.
밖으로 나온 것은 여자의 모습을 한 촉수뿐이지만 그를 노리는 것은 원형의 구 전체의 각도.
모든 방위에 있다.
선명한 적의와 식욕.
그리고 정면에는 제국제일검.
더할 나위 없는 죽음의 위기.
하지만 임계점을 넘은 분노,증오, 절망,탄식이 마음을 그 언제보다 깨끗하게 씻어 낸다.
- 우드득. 우드득...
감각을 다시 닫고.
마음을 열어 낸다.
극도로 집중된 오감에서,인식의 범위를 넘어서는 육감으로.
직관의 육감에서,이치와 섭리를 무시하고,스스로를 꿰뚫어 읽는 깨달음으로. 한차례 붕괴한 뒤의 마음은 그 언제보다도 청아했다.
“이런,거절하시는 겁니까..?” 대답은 없었다.
- 번뜩.
한 줄기 푸른 섬광이 공작을 향해 내달렸다.
그리고,하나,스물,사백...
만방萬方에 촘촘하게 얽혀 있는 수천의 그림자 촉수가,내달리는 섬광을 저지하기 위해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