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310화 (310/458)

332화 환영 (12)

“너희가 아는 인간들이라고?”

나냐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을의 멜로디,드라크 누아. 925년생. 유명했던 음유 시인이지. 여든셋까지 살다가 멀쩡히 죽은 줄 알았는데. 이렇게 싱싱하게 돌아가 있을 줄이야.”

그녀가 가리키는 곳에는 조각처럼 다듬어진 몸매의 남자가 있었다.

나냐우보다 좀 더 작은 키였는데, 이모저모로 예쁘장하게 생겼다는

느낌이 들었다.

감고 있는 눈가가 고왔고 투명한 액체 속으로 긴 적갈색 머리칼이 흔들렸다.

“흥. 음유 시인은 그 새끼가 그냥 혼자 우긴 거고. 멜로디가 어디 다 얼어 죽었냐?〈불협화음〉,드라크 누아겠지. 이 새끼가 튕기는 하프 소리를 들으면 일곱 구멍에서 피가 줄줄 샌다고. 너,설마 이런 애가 입맛에 맞냐?”

“그거야 어디의 누구 같은 악당을 상대할 때나 그렇죠. 나처럼 선량한 시민한테는 마음의 안정을 주고, 치유를 도와주는 음악이었는데.”

“.진짜 팬이었냐?”

황당한 듯 입을 벌리고 바라보는 까마귀를 무시하고, 나냐우가 말을 이었다.

“보자.〈건축가〉달심 가르미온, 〈우행愚行의 도박사〉니아 콜슨, 〈선지자〉엘리샤에〈알테라의 염제〉 오코즈마. 게다가 피커 린,스칼렛, 베티 뮤릭. 이건 키얀과 히이라기 아닌가? 아는 얼굴은 이 정도네.”

나냐우와 아이작이 회상에 잠기듯 가리키는 인간들은 모두 다 모르는 얼굴이었다.

당연한 이야기다.

수백 년에서 수십 년 전의 인간을 내가 알아볼 리는 없었다.

나냐우가 플라스크를 따라 걸으며 붙은 숫자를 가리켰다.

“7,906. 8,911. 앞의 숫자는 누운 순서,뒤의 숫자는 플라스크에 들어간 년도 같고. 앞에 몇 명은 빠져 있네?”

“그거야 실패 사례겠지. 그나저나 황실 놈들. 이런 재밌는 짓거리를 하면서 날 안 끼워 주다니.”

진심으로 억울한 둣 중얼거리는 까마귀를 보며 나냐우가 말했다.

만들어서 즐겼다고 들었는데. 굳이 이런 실험에 아쉬워할 필요 있어? 여든,아흔이 넘는 자들까지 다시 젊게 만든 건 어떤 기술인지 궁금하긴 하지만.”

나냐우가 가까운 쪽의 플라스크를 통통 두드렸다.

“정혈精血의 소모를 루-륨으로 충당하고,아폰티움 추출물로 골수 중간엽세포까지 조작해서 탱탱하게 버티고 있는 주제에 남 이야기는. 뭐,육체를 만들긴 했지.”

아이작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을 받았다.

“하지만 내가 만든 건 잘해 봐야

1 년짜리다.”

“•••1 년?”

“그래. 아무리 길어 봐야 1년짜리 일회용품이었지. 겉은 그럴듯해도 기한이 지나면 골조와 내장부터 연쇄적으로 붕괴되는 것들이었다.”

“그럼,몸을 항상 망가뜨렸던 건 일부러 망가트린 게 아니라..?”

까마귀가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망가질 몸. 쾌감이라도 극한까지 누려야겠지.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

“그게 대체 어디의 상식이야..?”

중얼거리는 나냐우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쭉 늘어선 플라스크를 천천히 살펴봤다.

하나같이 이상적인 육체를 가진 인간들을 감흥 없이 지나치고 있을 때였다.

그 가운데.

잊을 수 없는 얼굴이 있었다. 진득한 피비린내가 사방을 가득히 메워 오는 것 같았다.

한 발을 뒤로 내디뎠다.

잔해를 치운 차갑고 단단한 돌의 질감이 전해졌다.

그대로 칼을 내밀어 찔렀다.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 날카로운 칼끝이 플라스크로 돌진했다.

칼은 허무하게 튕겼다.

한 걸음 뒤로 더 물러나서 다시 칼을 찔렀다.

미간을 찌르고,심장을 찌르고, 목을 찌르고,배를 찔렀다.

- 파앙!

하지만 아프게 찔리는 건 기억과 마음뿐이었다.

몇 초도 지나지 않은 시간 동안 연거푸 칼이 튕겼다.

플라스크의 반동으로 몸 전체가 튕겨 나는 것 같았다.

인벤토리로 칼이 지나가는 통로를 만들고 뒤에 중량을 만들었다.

정에 대고 망치질을 하는 것처럼 닥치는 대로 플라스크를 찍었다.

- 파앙! 파앙! 파광!

투명한 망치가 연거푸 손잡이를 내리쳤다.

- 광! 광! 광!

“너,지금..!”

아이작의 뒷말이 들리지 않았다. 죽여야 했다.

플라스크에 안에 떠 있는 인간을 반드시 죽여야 했다.

하지만 플라스크의 투명한 표면은 긁히지도 않았다.

나냐우가 낫으로 공격했을 때도 반응이 없던 걸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다.

그럼에도.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이자만은 죽여야 한다.

- 광! 광! 광 •

한 점에 칼끝을 고정하고 계속, 계속,계속 칼을 찍어 댔다.

손잡이가 끝에서부터 계속 조금씩 찌그러들었다.

〈진정해라. 껍데기일 뿐이다.〉

의식으로 파고드는 아이작의 말에 문득 정신이 들었다.

무리한 충격을 가했는지 온몸에

반동이 느껴졌다. 분명 눈앞에서 일어난 직전의 행동이지만 어떻게 했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허공에서 떨어지는 칼을 손으로 잡아챘다.

칼끝은 여전히 플라스크에 담긴 인간을 겨눈 채였다.

죽인다.

분명하다.

눈앞의 거한은 분명 서큐버스님을 살해한 용사였다.

용사는 그녀의 배에 깊숙이 칼을 비틀어 박았고,토하는 피에 숨이

막히는 가는 목을 움켜쥐고 그녀가 살아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고문을 즐겼다.

내 두개골을 사뿐히 밟아 부쉈던 커다란 발이 보인다.

죽어 가며 눈에 담은 그대로다. 하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의식을 잃고 플라스크에 잠겨 있긴 해도,동일인으로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

〈진정해라. 얘기를 들어.〉

차분한 음성이 머릿속에 울렸다. 칼을 천천히 거뒀다.

“누구길래? 아는. 사람? 아이작, 당신은 재 알아? 순박하게 생겨서 덩치는 참 좋네.”

나냐우가 당황한 표정으로 어깨를 으쪽했다.

까마귀가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는 녀석이다. 그만큼 지명도가 떨어지는 녀석이겠지.”

“그래? 그런데 껍데기라니? 그건 또 뭐야?”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이었다.

플라스크 위에 사뿐히 앉아 있는 아이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음. 다 말해도 되냐?〉

상관없었다.

회귀부터 흡수까지 나냐우는 이미 대강 들었으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작은 전쟁에서 마왕,용사로 이어지는 흐름을 나냐우에게 설명했다.

그녀에게는 아직 자세히 말하지 않은 미래였다.

“등장할 영웅들을 위해 철저하게

꾸민 것 같은 시나리오다. 그리고 이게 그 영웅들이라면,모든 것이 맞아떨어진다.”

‘꾸민’ 것 같다라.

용사의 등장을.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러나 먼저 용사를 준비해 두고, 세계가 용사를 필요로 하도록 만들 었다면.

아이작의 말대로 꽤나 그럴싸한 설명이었다.

“하지만 여기 있는 애들이 마왕을 꺾을 힘을 낼 수는 없을 텐데..?”

나도 같은 의견이었다.

“아이작,이들이 너보다 강할 수 있나?”

자기 평가로도,남들의 평가로도.

주술사 벨’호멧 아이작은 최소한 최근 삼백 년 안에서는 최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아이작조차도 마왕을 이긴다고 말한 적은 없다.

오히려 세계 너머를 보기 위해 마왕의 주술사가 되었지.

“푸흐흐..

까마귀가 오만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런 것들은 한꺼번에 전부 덤벼도 상대가 안 되느니라.”

“그러면..

까마귀는 부리로 몸 여기저기를 찍으며 말했다.

“고작 인형에 불과한,”

〈이런 몸으로,이런 힘을 누구나 낼 수 있겠느냐?〉

- 화르르!

새파란 불꽃 수십 송이가 허공을 헤엄쳤다. 춤추는 불꽃은 후작의

흔적을 찾아 혼자 바닥을 파헤치는 미유의 시선마저 돌렸다.

새파란 불꽃이 검은 허공을 할아 붉게 물들이더니 하나씩 정밀하게 원을 그리며 사그라들었다.

장엄하게까지 느껴지는 시위였다.

“웬 불꽃놀이람. 하고 싶은 말은 알겠지만.”

“그렇다. 이 까마귀는 고작해야 인형에 불과하지. 이 몸이 깃들어 있음으로써 비로소 나,아이작인 것이니라.”

“들어라. 나는 세계의 뒷면/바깥을

읽었기 때문에 몸을 바꿔도 힘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 그물의 뒤에 힘을 매달아 놓을 수 있었지.”

아이작이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럼, 저들이 껍데기라는 게..?” 까마귀가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 그물을 친 자들, 세계 바깥의 존재들이 내려온다면 어떠하냐.”

“손님. 말인가?”

캐빈 애슈턴은 이 세계가 주민과 손님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나에게 보이는 특별한 푸른 창. 용사 포인트와 용사 상점.

이게 띄워지는 상태라면.

그리고 나와 달리 이걸 자유롭게 통제할 수 있다면 얼마나 강해질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나냐우는 진작 상황을 이해한 둣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잠시 긍정의 침묵이 이어졌다.

빙의가 이뤄지기 전에는 이 앞의 육체는 아이작의 말대로 껍데기.

서큐버스님을 살해한〈용사〉는.

아직 세계에 내려오지도 않았다는 결론이었다.

“얘네들이 몸을 빌려줬다는 거네. 음유 시인님,실망인걸.”

“농담도. 죽음에서 도망갈 수만 있다면 몸을 공유하는 것쯤은 오히려 달콤한 제안이었을 거다. 게다가 상대가 바깥의 존재라면.”

나냐우가 미간을 찡그렸다.

“주술사님, 이제라도 농담이라고 해 주면 안 돼? 정말 창조주 같은 걸 상대하는 거야?”

“그렇다.”

까마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치고 너무 진지하잖아.”

나냐우가 억지로 긴장을 풀려는 둣 낫을 획획 돌렸다.

“만에 하나.”

까마귀의 붉은 두 눈은 줄곧 내게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뭐지?”

“아래층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너만 살아남으면,언제가 됐건 다시 돌아와서 이걸 깨라.”

“.안 되는 거 아니었나?”

“아까 가능성이 보였다. 나냐우의 탄환보다 네가 새긴 금이 조금 더 깊었으니까.”

“맞아. 천사들을 막은 아공간을 사용한 거였지?”

나냐우가 순순히 인정했다.

있고,우리가 가정한 〈손님〉들이 세운 계획의 핵을 흔드는 행위다. 도박이지만 놓치긴 아까워.”

“그래,이런 데 언제 또 오겠어.”

문제는,방금 전 인벤토리를 써서 플라스크를 내려친 행동은 어떻게 했는지 전혀 기억해 낼 수 없었다는 거지만.

“히히힘!”

앞쪽의 잔해를 전부 뒤집어 파낸 미유는 후작의 흔적을 찾아 방향을 잡고 가고 있었다.

“.일단 가지.”

서큐버스님을 살해한 용사.

저게 진짜건 껍데기건.

그 살해는 일어나지 않은 미래.

그런 것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고 용사를 죽이려 해도,지금의 힘으로 플라스크를 찔 방법은 없다.

어쨌거나 후작을 쫓아야 한다.

처음에는 레안드로를 살리겠다는 생각으로 잠입한 황실 비역이지만.

아래로 내려갈수록 비역 자체가 궁금해졌다.

5층에는 모조된 천국.

4층에는 100권이나 되는 애슈턴의 서적들.

3층에는 과거의 강자들이 갇힌 채

영생을 누리는 플라스크.

2증.

그리고 1층,

그곳에는 대체 뭐가 있는 걸까? 나냐우는 잔해를 건드리지도 않고 후작의 흔적을 읽어서 똑바로 계속 걸어갔다.

미유는 얌전히 그 뒤를 따랐고, 아이작은 미유의 널따란 안장 위.

나는 맨 뒤에 섰다.

앞으로 한참 나아가도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나냐우는 발소리도 없었으므로, 말이 잔해를 밟으며 만드는 소음,

까마귀가 무료한 듯이 펄럭거리는 날갯짓이 아니면 동굴에는 한 가닥 바람조차 일지 않는다.

대신 팽팽한 긴장감이 시위처럼 당겨졌다.

차라리 발밑이나 천장에서 흔한 함정이라도 나오면 긴장이 풀리련만, 그런 건 흔적조차 없었다.

잔해 더미를 밟으며 나아가기를 계속 반복했다.

공간은 점점 넓어졌지만,사방에 쌓인 잔해도 함께 더 두꺼워졌다.

잔해들이 점점 까맣고 음습하게 느껴질 때.

“여기. 같은데?”

나냐우의 말이 메아리치지 않고 앞으로 넓게 퍼졌다.

전면은 탁 트여 있었다.

- 파드득!

〈위쪽도 넓다.〉

거대한 홀.

그곳에 멸어진 잔해들은 지금껏 봐 온 것보다 어둡고 치덕치덕하고 바닥 없는 악의惡意의 웅덩이에서

평생을 자란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억센 덩굴이 무너져 내린 것처럼 보였다면.

이곳의 폐허는 새까닿고 끈적한 그림자들이 굳어 부서진 광장.

“.가르베라군.”

나냐우가 작게 중얼거렸다.

“긴가민가했는데. 이렇게 큰 건 처음 본다.”

폐허를 살피던 그녀가 바닥과 벽을 하나하나 짚으며 말했다.

“타고,잘리고. 장난이 아닌데.”

“후작이군.”

“그렇지. 이야,나랑 부딪쳤을 때도

이렇게 살벌하게 했으면 솔직히 위험했겠어. 본체가 죽으면서 동굴 전체에 얽힌 덩굴이 무너진 거야.” 그때 였다.

- 까악! 까악!

거대한 홀의 돔 부분으로 날아간 까마귀가 울음소리를 냈다.

〈여기다!〉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그을린 내장을 밖으로 늘어트리고 방긋 웃는 소녀 공작의 상반신이 홀 천장에 꽂혀 있었다.

옆에 서 있던 나냐우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중얼거렸다.

“제국제일검이. 바뀌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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