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311화 (311/458)

333화 환영 (13)

“우선 그것부터 확인해 봐.”

“뭘?”

“빛 말이야. 흡수가 가능한가?” 허공을 바라봤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싹 그을린 내장에서,양념처럼 뚝뚝 떨어지는 진녹색 빛은 거의 질감이 느껴질 만큼 짙었다. 반대편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후작의 시체에서 줄줄이 뿌려지던

반투명한 옥빛과는 느낌부터 전혀 달랐다.

“.뜬다.”

- 철컥.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흡수하시겠습니까? Y/N]

당연한 이야기다.

녹갈색의 진득진득한 빛을 계속 빨아냈다.

오랫동안 짓무르고 썩어 온 것이 새어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그건 빛이라기보다 끓는 납덩이 같았고,식어 가는 용암 같았으며, 잘린 부위 탓인지 몰라도 질척하게 흐르는 내장 같았다.

물어본 아이작은 물론.

나냐우도 상황을 바로 알아챘다.

“역시. 확실히 진짜라는 거지?”

“그래.”

정수 흡수에 집중하며 간단하게

대답했다.

[누낭조영술 - 바늘 구멍 찌르기 Lv.l을 흡수합니다!]

[넘쳐흐르는 ‘찌르기’에의 욕망과 압도적인 검술의 재능이 기괴하게 결합했습니다. 자기통제가 해제된 상태에서 고속으로 하나의 극점을 찔러 꿰뚫습니다.

시각,후각,청각,촉각,미각의 피드백이 찌르는 동안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며 정확한 국소를 향해서 최후까지 칼끝을 유도합니다.]

[감각이 제한적입니다.]

[오감에 의한 피드백 유도 기능이 대부분 상실됩니다.]

[반대급부에 따른 집중력 향상으로, 고정된 대상에 대한 관통력이 대폭 증가합니다.]

[누낭조영술 Lv.2를 흡수...]

처음 레안드로를 흡수했을 때와 비슷하다.

후작은 소녀 공작을 살해했다.

그 사실은 분명하다.

여기 있는 건 가짜도,껍데기도 아니다.

[누낭조영술 Lv.3을 흡수합니다*••..]

“그래도. 가르베라까지 동원해서 싸웠는데 이게 말이 되는 결과야? 로랑스 타르티에는 무려 10년 동안 공인된 제국제일검이었는데 ..

[시간 가속 Lv.l을 흡수합니다!]

[공격과 방어, 상대와 순간적으로 거리를 좁히는 순간,당신 주위의

시간이 길게 늘어납니다.]

[Lv.l: 3초 간격으로,1초 동안 시간이 1.25배로 늘어납니다.]

“아니,잠시만.”

다시 주위를 면밀하게 살펴보던 나냐우가 말을 고쳤다.

그녀의 시선은 바닥에 형편없이 처박혀 있는 거대한 덩어리를 향해 있었다.

“둘,넷,여덟,열넷. 가르베라 테두리는 10년마다 하나씩 그려져. 140년을 살아온 녀석이야. 거기에 각종 마물들까지 이식시켰어. 근데

중요한 건 이게 아니라..

공작에게서 계속 스킬을 흡수하다 고개를 돌렸다.

마물의 핵이라는 곳에서도 질척한 녹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공작의 것보다는 빛이 덜하지만, 그렇게 큰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물론 진짜다.

처음 듣는 마물이지만,어지간히 강한 존재인 모양이다.

아니면 그렇게 만들었거나.

“가르베라가 억제된 흔적이 있어. 누가 명령을 내려서 강제로 멈추게 했던 거야.”

“일대일 환경을 조성했다는 거군. 이런 걸 냅두고.”

아이작이 끼어들었다.

“응. 누군가 명령으로 가르베라를 억제시켰다면,공작밖에 없겠지.”

[시간 가속 Lv.2을...]

[Lv.2: 3초 간격으로,1초 동안 시간이 1.5 배로...]

[히어로 스킬: 시간 가속 Lv.3의 흡수가 저지되었습니다!]

한 번 레벨이 오를 때 0.25배가 중가하는 걸까.

그렇다면 공작은 스킬 레벨이 4만 되더라도.

한 호흡마다 두 배의 시간을 길게 가져갔다는 이야기다.

실제로는 그 이상이겠지.

공작에게 부서지던 순간.

부딪치는 찰나,빠른 정도를 넘어 시간이 아예 훌쩍 삭제된 것처럼 지나간 느낌이 들었으니까.

그건,공작에게 오히려 지극히 〈느리게〉흐르던 시간이었을 거다.

이런 녀석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레안드로 후작이 놀랍게 느껴졌다.

계속 흡수에 집중하며 물었다.

“공작이 봐준 건가?”

“그렇게 말해야 될까? 일대일 한 판 결투의 참가자로서. 공작은 제대로 싸운 것 같아. 높은 수준의 검이 얽힌 흔적은 뚜렷해. 이런 걸 연기로 만들 수는 없거든. 공작이 그런 연기가 될 만큼 레안드로를 아득하게 초월한 상태라면.”

훨씬 못한 하수에게 일부러 죽을 의미는 전혀 없겠지,라고 말하며 나냐우가 고개를 저었다.

〈어머,잡스러워. 대검으로 도대체 뭘 하고 싶었던 거에요? 호호호. 되도록 검기劍氣 하나에만 집중해

보시라구요,해골 씨.〉

공작이 나를 부수며 남겼던 말이 떠오른다. 검 하나에만 집중하는 삶을 살고 싶었던 건,어쩌면 공작 자신이 아니었을까.

그는 자신의 최후를 순수한 검의 대결로 끝냈다.

[낙인 Lv.l을 흡수합니다!]

[관심을 가진 인간을 대상으로 낙인을 찍을 수 있습니다.]

[낙인이 찍힌 대상에 대한 감지 능력이 대폭 향상됩니다.]

[인간에 대한 관심이 부족합니다.] [스킬이 변형됩니다.]

[낙인을 찍은 물체에 대한 공격력이 올라갑니다.]

계속해서 여러 스킬을 흡수했다.

상당히 강해진 탓인지,배 위에서 후작의 시체를 처음 흡수할 때만큼 크진 않았지만.

최근 이만큼의 수확을 거둔 적은 없었다.

“크흐. 질척한 애정이군. 진정성은 있다고 해 줘야 할까.”

“애정이라니..?”

“뻔한 얘기지 않느냐. 기다리던 놈은 함께 싸울 같은 편도 많고,얼마든지 함정을 팔 수 있었는데 그런 짓은 단 하나도 하지 않았다. 이 덩치 큰 녀석은..

아이작이 시체를 다시 을려다봤다.

“자신의 마침표를 사랑하는 자가 찍어 주길 바랬던 거다. 이뤄질 리 없는 사랑에 빠져,타락한 혼으로 청초한 상대를 도발했던 거지.”

그 말을 듣는 순간,정수 흡수의 집중이 흐트러질 뻔했다.

“청. 초?”

받은 듯 계속 광담을 이어 갔다.

“신도 악마도 아니라 오직 그에게 심판받고 싶다! 더럽혀진 이 몸이 깨끗이 섬멸되고 싶다! 악에 빠진 나를 폭력으로 교정시켜 줘!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부서트려 줘..!”

“자신과 정반대의 정의,자신이 찍어 키운 정의에게 숨이 끊기며 녀석은 극한의 만족감을 느꼈겠지. 그동안 삶에서 결핍된 정의가 모두 한 번에 채워지는 심미적인 고조에 이르렸음이 분명하다. 어떻게 보면 부러운 죽음이군..

말을 받았다.

“도저히 그런 심리는 모르겠지만. 굳이 그렇게 본다면 말이 안 되진 않겠어. 어쨌거나,일리엔의 유물도 분명 역할을 하기는 했겠지. 근데 이건 또 뭐람?”

나냐우는 하얀 잿더미와,그 위에 꽂힌 검 한 자루를 바라봤다.

난장판이 되어 있는 사방과 달리 오직 젓더미 한 무더기와 그 위에 꽂힌 검만이 정결했다.

하지만 아이작도,나도,나냐우도 그게 뭔지는 알 수 없었다.

[화장술 Lv.l을 흡수합니다!]

[누구나 미인이 될 수 있다! 아니, 당신은 안타깝게도 무리네요. 대신 ‘마스커레이드’ 스킬의 효과가 약간 강화됩니다.]

화장술 Lv.2를 끝으로,공작에게 빛은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았다.

열네 개의 테두리가 있는 동그란 핵을 향해 손을 뻗었다.

[까스라기 - 운동성 씨앗 Lv.l을 흡수합니다.]

[가르베라의 씨앗은 홉습 변형을

통해 나선형으로 수평/수직 방향을 깊게 파고들어 갑니다.]

[가르베라는 금속에조차 부착되어 물질의 미세한 배열 사이에 씨앗을 내릴 수 있습니다.]

[당신은 식물이 아닙니다.]

[씨앗의 수명이 극단적으로 크게 단축됩니다.]

[씨앗이 올바른 상태로 발아할 수 없습니다.]

[반대급부로,씨앗이 발아할 때의 파괴력이 증가합니다.]

[운동성 씨앗 Lv.2를 흡수...]

[운동성 씨앗 Lv.5를 흡수합니다!]

[씨앗 부름 Lv.l을 흡수합니다!]

[땅에 묻힌 씨앗들이 당신의 강한 부름에 응답해 빠르게 성장합니다.] [능작물을 자라게 하는 땅의 힘을 빠르게 소모시킵니다.]

[예기치 못한 부작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씨앗 부름 Lv.2를 흡수합니다!]

[효율적인 성장이 가능해집니다. 지력 소모가 약간 줄어듭니다.]

[부작용 확률이 감소합니다.]

[씨앗 부름 Lv.3을...]

이번에는 여기에 꽂혔는지.

빛은 두 가지 스킬만을 전해 주고 끝났다. 두 번째 스킬은 루비아의 영주 레벨을 빠르게 성장시키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잘 지내고 있을까?

떨어진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지만, 워낙 끝도 없이 죽는 걸 봤던 탓에 문득 불안해진다.

기사 크리스티나도,상인 연합도, 유블람과 그라스미어도 루비아를 후원하고 있다.

별일이 생기면 이상한 거겠지.

손을 내린 나를 보며 아이작이 말했다.

“끝났느냐? 통로는 이미 찾았다.”

“내려가자고. 두 층이 남았다면, 다음 층에 루-륨이 기다리고 있을 확률은 절반이지? 순수한 원액의

루-륨이라니... 금고가 안 깨지면 통째로 들고 가야겠어.”

과연 괜찮을까.

그녀가 출동한 최정예 길드원들과 함께 살해당한 날이 떠오른다.

못해도 인간 다섯 정도는 넉넉히 들어갈 만한 크기.

어떤 틈새도 없는 매끈한 원형의 금고에는,무려 500리터에 달하는 루-룸이 가득 들어 있었다.

분명 위험으로 가득한 곳이지만, 루-륨 금고를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어떤 위험이 도사려도 갈 가치가 있다고,트로핀 나냐우는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이의는 없었다.

- 위이킹.

넓은 공간.

차가운 금속음이 위장된 평온을 깨트렸다.

어디가 천장이고 끝인지 제대로 보이지 않는 드넓은 공간에서도, 제 존재를 분명히 드러내는 육중한 금속음이 었다.

- 위이이잉. 위이잉. 위이잉.

금속음은 점점 부드러워졌다.

나중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만큼 매끄러운 소리만 남았다.

레안드로는 소리를 몸으로 느끼며 앞으로 걸어갔다.

점점 작아지는 소리는 이곳저곳에 부딪쳐 사라졌다. 하지만 어둠에 숨은 것들의 존재감은 쌓이고 쌓여 더욱 진해졌다.

주저앉아 움직일 줄 몰랐다.

레안드로는 굳이 그것을 밀어내지 않고 가만히 앞으로 걸어갔다.

한참을 들어갔을 때였다.

인간이 지내기에는 섬뜩할 정도로 높고 넓은 공간 아래. 레안드로를 기다리듯 태연히 자리잡은 것들은 거대한 기계들이었다.

마치 혈관처럼 울긋불긋한 회로를 반짝이고 있는 기계.

연합의 고위 의원들만 파일럿으로 타고 다닌다는 타이탄.

철인鐵人이라기보다, 기계공학과

생물학,연금술과 마도학의 정수를

한곳에 집결한 마법의 기계신.

마장기魔裝機라고 불리는 경외의 대상들이 한곳에 몰려 있었다.

제국에 이런 기술력이 있을 리는 없다.

이것은 기계로 절대성을 추구하는 연합의 가장 폭력적인 과업.

전쟁 병기로 쓸 수 있게 마장기를 확보했다는 정보 따윈 누구에게도 들은 바 없다.

전쟁 계획의 그 어떤 부분에서도 이들의 존재는 없었다.

선을 아득하게 넘은 사병私兵.

어떤 길을 통했는지.

누가 누구를 이용하는지는 몰라도 하나는 분명하다.

내통內通.

“로랑스 공작을 살해해 버리셨군. 푸른 사자께서,결국 돌이킬 수 없는 다리를 건너셨어.”

빈틈없이 이어진 쇳덩어리에서 흘러나오는 음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웅웅대지도, 쇳소리가 섞여 있지도 않았다.

오직〈증폭〉의 기능에 충실한 채, 모든 잡읍을 배제하고 음성을 크고 또렷하게 전해 줄 뿐.

“쯧쯧. 할 일이 많은 분이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목숨을 던져 놓고 가시다니.”

허공을 뒤덮는 목소리들.

모두 익숙하다.

명예직의 최상위에 자리한 제국 태부 리브레트릴. 군사 총무를 모두 담당하는 대사마 알테리온,궁중 제관을 통솔하는 광록훈 파이로, 지방 영주들과의 관계를 담당하는 대사농 테레스,기병을 통솔하는 종사중랑 아르고,파견 마탑주인 화인 알 굴. 제국 수뇌부가 온통 그곳에 있었다.

- 파지직 •

타이탄과의 공조 현상으로 허공에 번개가 일었다.

문무관의 최고위직들.

정치력만으로 올라간 게 아니다.

문관의 직을 얻고 있는 자들도, 장난처럼 타이탄과의 공조 현상을 일으킬 수 있을 만한 강자들.

그 모습을 보면 하나하나가 지금 타이탄에서 내려와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게다가 그 숫자가 하나,둘,셋. 열을 넘어서고 있음에야.

자가 약한 거다.”

그리고 들리는 목소리는. 3검주 크웨르티.

이명異名,〈레드 버서커〉.

피를 볼 때가 아니면 칼을 뽑지 않고, 칼을 뽑으면 반드시 칼날에 홈백 붉은 물이 들기에 생긴 이름.

“여기서 4검주까지 죽여 버리면, 제국 검주는 둘로 줄겠군.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를 2검주만 죽인다면, 이 몸이 제국 유일의 검주가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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