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312화 (312/458)

334화 환영 (14)

- 우우응!

수만의 파편이 지극히 정교하게 이어져,틈 하나조차 보이지 않는 거대한 살상 기계.

〈레드 버서커〉크웨르티의 체형을 닮은 뚱뚱한 타이탄이 들고 있는, 울퉁불퉁한 날의 톱칼에 붉은빛이 도는 검기가 맺혔다.

극복하지 못한 심마心魔의 흔적. 어쩌면 극복하지 않은,가학성과

잔혹성의 증거였다.

찾아오는 심마를 씻어내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두면,몸과 마음은 비틀린 폭력에서 향락을 느끼고.

그것은 오로지 더 높은 수위만을 요구해 간다.

상상할 수 없는 쾌감을 위해서는, 상상할 수 없는 갈증이 필요하다.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폭력에의 갈증은 그에게,전투력의 커다란 원동력이 되고 있었다.

- 끼기익. 끼기익.

열한 구의 기체가 내는 금속음이 사방에 퍼져 나갔다.

육중하고 날카로운 소리는 후작을 둘러싸지 않고도,오히려 단 한 기, 한 기의 존재감만으로 레안드로를 짓눌러 죽이려는 것 같았다.

공작의 ‘동료’들.

제국의 암막이,모조리 이 장소에 있었다.

“후후후. 반갑군,대상조.”

끈적끈적한 점액이 타이탄 위에 덧발라져 있는 기체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제에게 명예 공작의 작위를 받은 노인.

네크론 신사회의 수뇌.

마왕 보티스의 대리자.

증폭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그가 추적하던 비브리오였다.

후작은 다른 타이탄들을 하나하나 돌아보며 물었다.

“너희는. 제국을 팔아넘긴 건가?”

마왕에게 팔아넘겼는지, 아니면 연합에게 팔아넘겼는지.

그 둘 다거나.

어쩌면 그보다도 끔찍한 무언가에

팔아넘겼을지도 모른다.

성벽 같은 방패를 앞에 세운 채, 온갖 흉악한 대성對域 병기로 그를 조준하는 타이탄을 돌아봤다.

여기에 공작까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베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여럿이 덤비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고,암수를 쓰려면 얼마든지 쓸 수 있었는데도.

로랑스 타르티에는,자신과 순수한 검의 승부만을 했다는 사실을.

하지만 이곳에서 기다리는 자들은 조금도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

모든 무결無缺한 심기心機를 담아 노린다고 해도,한 번에 베어 낼 수 있는 건 고작해야 한 기체.

그 짧은 순간,공학과 마법으로 거듭 제련된 칼날들이 그를 자르고 찢어 낼 것이다.

수 톤의 중량을 실은 특수 합금이 칼날의 형태가 되어 뼈를 부수고 장기를 발라낼 터였다.

그럼에도,

그는 칼을 고쳐 쥐었다.

아직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지만 붉은 살의가 사방에 자욱했다.

고작 그딴 걸로는 큰 값을 쳐주지 않거든.”

“그러면?”

“인류를 팔아넘겼지.”

“하하하하하...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까지의 수없이 많은 심문의 경험으로 판단하건대一

자세한 사정 따윈,들을 수 없다.

저들은 설득을 위해 여기 있는 것이 아니다.

목적은 살해.

압도적인 살해.

교섭의 여지는一 없다.

분명히 말하자면.

승리의 가능성도 없다.

눈을 뜬 육감이 말한다.

썩은 새끼줄처럼 끊어진 희망의 끝에서,침묵처럼 및어 버린 통곡의 수라修羅에서 터득한 절기로조차 감당할 수 없는 상황.

“그럼,침입의 대가를 물어볼까? 대상조가 법률을 잘 지키지 않으면 누가 지키겠나? 무단침입죄가. 화형이었나? 거열? 책형? 절단형? 이것저것 다 해 버리면 되겠지?”

- 부우우우!

- 부응! 부응! 부응!

- 좌르륵!

고주파 담금질이 된 합금 칼날이 붙은 모터 시스템이 작동하는 소리, 조준된 상대를 자동으로 추적하는 본딩 와이어Bonding Wire가 테스트 알고리즘을 끝내는 육중한 소리를 뚫고,

- 우우응!

맑은 검명劍鳴이 울었다.

미약하게 떨리는 은은한 진동이 음성 증폭기를 통해 들리는 웃음을, 육중한 살육의 기계에서 나는 준비 소음을 허공에서 베어 낸다.

이미 과거의 환영까지 베어 버리고, 재로 태워 버린 검기에 주저는 없다.

깨끗하게 새파란 검기를 허공에 피워 내면,과거도 미래도 모조리 잊을 수 있다.

딛고 있는 것은 또렷한 현재.

십 분의 일,백 분의 일,천 분의 일로 나눈 또렷한 현재뿐...

- 쌔애액!

- 까강! 까강!

- 파지지직!

레안드로는 3, 4미터를 훌쩍 넘는 높이에서 초를 나눠 내리치는 공격을 가느다란 한 자루 칼로 받아쳤다.

- 퍼엉!

- 파바바박!

칼날에는 틀림없이 하늘처럼 푸른 검기가 서려 있지만,부딪는 것은

고주파 담금질과 다차원 병렬 모의 인첸트가 주어진 특수 합금.

검기조차 방어할 수 있는 재질. 타이탄의 약점은 레안드로 자신도 파악할 수 없다.

어쩌면 완벽한 이음새처럼 뚜렷한 약점 따윈 없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 까앙! 까앙!

일격에 승부를 볼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바라지 않는다.

이것은 춤...

레안드로는 자신을 공격하는 온갖 형상의 기계 장비를,탑재된 마법의 공격들을,마치 춤을 추는 것 같은 옴직임으로 파훼해 나가고 있었다.

서두르는 쪽은 레안드로를 둘러싼 열한 기의 타이탄.

어느새 레안드로의 입은 비릿한 웃음마저 띤다.

궁지에 몰리고,몰리고,몰리면서 어쩔 수 없이 입꼬리가 비뚜름히 올라가고 있었다.

- 끼기긱!

상하 팔방이 적의 벽으로 쌓여, 깊게 공격할 수는 없다.

하지만 잘리지는 않는다고 해도.

생사를 고요히 응시하는 깨달음의 검무劍舞에,타이탄의 표면은 조금씩 상해 가고 있었다.

“견제를 계속해! 적은 인간이다! 상하는 건 외측 장갑뿐이야!”

그럼에도.

열한 기의 타이탄은 의외라는 심정 조차 내비치지 않는다.

로랑스 공작을 벤 이상,명백히 제국제일검. 이 정도의 경지라도 완전히 예상 밖은 아니다.

동귀어진으로 나온다고 해 봐야 베는 것은 고작 하나에서 둘.

게다가 도망칠 장소조차 없다.

“.도망쳐야겠군.”

까마귀가 단호하게 중얼거렸다. “뭔 소리야?”

- 탈칵.

확인하고 가방을 열었다.

같은 풍경을 보고 있지만 반응은 판이하게 달랐다.

까마귀가 고개를 저었다.

“무리다. 열 기의 타이탄이라니. 도대체 어디서 저딴 게 나온 거야. 연합 쪽 전력을 전부 긁어모아야 저 정도 맞추려나?”

- 까강! 까가강!

까마귀는 한 자루 칼에 의지해, 폭풍에 휘말린 돛단배처럼 위태롭게 싸우는 후작을 보며 계속 투덜댔다.

한 번의 격돌마다 위기의 물결이 여기까지 번져 오는 것 같았다.

“그렇다고 여기 와서 도망이라니, 농담이 심하다구. 솔직히 진심도 아닌 소리를 왜 괜히 하고 그래? 빠져 있고 싶은 마음이야 충분히 알겠지만 말이야.”

- 히히힝!

나냐우가 가방을 여는 것과 함께 후작을 향해서 미유가 뛰어갔다.

멀리서 싸우고 있던 타이탄들의 시선이 동시에 이쪽을 향했다.

〈젠_ 장. 조용히 빠지긴 글렀네.〉

순식간에 애마를 인식한 후작이 훌쩍 위에 올라탔다.

발을 조이는 순간,미유는 힘이 솟는 둣 언제까지보다 높이 하늘로 솟구쳤다.

타이탄의 방패를 뒷발로 차 내는 모습을 보고 저 녀석이 지금까지 힘을 아꼈나 싶을 정도였다.

후작은 우리에게 향했던 타이탄의 시선들을 한순간 자신에게 강제로 집중시켰다.

〈보기와 달리 금방 죽진 않겠어. 버티는 건 충분히 하겠는데? 재가 저기서 시간을 끄는 동안,우리는 뒤로 빠져서 플라스크나 깨 보자.〉

“.진심인가?”

나는 확인하듯 물었다.

몇 번의 생을 거듭해서 아이작을 만나다 보니,딱히 물증이 없어도 녀석의 진심과 능담은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예 작정하고 속이는 것까지는 모르겠지만.

습관처럼 밴 농담 반 진담 반은 꽤나 익숙했다.

지금은...

정말 뒤로 빠질 생각은 별로 없어 보인다.

〈왜 자꾸 나한테 진심이 아니래?〉

“내가 널 모르나?”

〈.그래,진심 아니면. 어쩔래? 루-륨 중독자건, 칼춤 추는 놈이든 타이탄이랑 같이 자빠지면 우리는 천천히 등장하자고.〉

“그건 안 돼.”

나냐우를 그렇게 배신할 생각은 없었다.

〈안 돼? 돼.〉

〈뭐,어차피 밑천 까긴 하네.〉

- 철컥.

이중으로 잠금이 되어 있는 작은 상자가 열렸다. 나냐우가 그동안 한 번도 꺼낸 적 없는 상자.

완전히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끼기잇, 하는 금속 소리와 함께 나냐우의 가방에서 오르골 음악이 울려 퍼졌다.

- 띠링. 띠리리리링. 명명. 명 띠디 띠디디딩...

나냐우의 가방은 붉은색, 파란색, 초록색으로 된 캡슐들과 새하얀 주사기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그건. 뭐야?”

“어른을 위한 메르헨이지. 100세 이하는 사용 금지다.”

나냐우는 그렇게 말하고 작업을 시작했다.

붉은 캡술을 꺼내 코로 흡입하고,

“하아..

푸른 캡슐을 꺼내 안에 든 가루를 입에 털어 넣고,

후우우...,,

온몸으로 들이마셨다.

나냐우의 눈꺼풀이 계속 빠르게 깜빡거렸다.

“아. 아아..

그리고 하얀 주사기들을 온몸에 하나둘 꽂아 넣기 시작했다.

“ 〇 으”

그녀가 낮게 목소리를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사의 효과로 오감이라도 확장된 건지,두 눈을 감은 채 앞으로 걸어갔다.

걸어가는 걸음걸이가 차분했다. 하지만 쳐져 있지도 않았다.

뇌를 너덜너덜하게 만들 정도의

쾌락에 진하게 젖어 있으면서도, 그것을 관조할 수 있도록 차갑게 가라앉아 있는 듯했다.

앞에 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어이,아저씨.”

〈자기보다 250살은 어린 남자한테 아저씨라니. 양심은 어디다 팔아먹은 건지.〉

“아저씨,도와주러 왔다. 감사의 말이 부끄러우면 성의껏 눈짓이라도 해 봐.”

알아들은 걸까.

꽤 거리가 있었는데.

애마 위에 탄 후작은 우리를 흘끗 쳐다보고 다시 전투에 집중했다.

반응은 기계들에게서 왔다.

등 뒤에 찬란한 오각 방패를 붙인 타이탄이 말을 걸었다.

“트로핀 나냐우군. 내려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네. 이런 곳까지 끼다니 역시 악운이 대단해.”

“단번에 공격하진 않네?”

“저자를 도우러 왔다고? 어리석은 생각은 하지 말게. 지금 우리에게 협조하면 계속 수도에서 기생할 수

있도록 해 주겠네.”

“어. 태부.”

“말하게나.”

“너는 몇 살인데 나한테 말투가 그따위야?”

“전원,본래대로 계획을 시행한다. 트로핀 나냐우는 삭제 대상이다. 지금 집행하면 된다.”

“어휴. 그럴 줄 알았거든.”

- 위이이이이잉!

로봇 팔 끝에 달린 초승달 모양의 칼날이 바르르 떨리며 돌았다.

- 위이잉! 위이이이잉!

모든 복합재료의 파괴검사를 마친, 초고속 가스베어링으로 회전하는 터보 절단 유닛이 조종사의 의지에 따라 화려하게 회전했다.

- 쿠궁!

타이탄 다섯이 사방을 점유하고 들어왔다. 아무리 그녀라도 압박을

느낀 건지 한 번에 뒤로 두 걸음을 물러났다.

“아직도. 눈을 안 떴어?”

〈알아서 하겠지. 아직 약 기운이 몸에 돌고 있네?〉

나냐우의 눈과 입과,목이 동시에 파르르 떨렸다.

타이탄에게서 말이 이어졌다.

“두려운가? 덜덜 떤다고 놓아줄 생각은 없다. 이 정도에 겁먹는 걸 보니 레안드로의 꽁무니만 편하게 « 쫓아왔나 보군.”

“그런데..

나냐우는 아직 눈을 감은 상태로 말했다.

“저쪽은 여섯인데,여긴 왜 다섯밖에 없어?”

“뭐?”

그녀가 눈을 떴다.

나냐우의 동공이 모인 구름처럼 수축했다가,바깥의 흐릿한 회색이 한 번에 폭풍처럼 쓸리며 눈동자가 새카맣게 변했다.

- 타다닥!

두 걸음 뒤로 물러났던,그녀는 한 번의 도약만으로 서른 걸음은 될 법한 거리를 좁혔다.

허공에서 그림자를 밟는 것처럼 가속을 붙여 초승달 칼날에 낫을 휘둘렀다.

- 콰광!

타이탄의 몸이 틀어졌다.

한쪽에 있는 건 수 톤에 달하는 마도공학의 정수.

반대쪽에 있는 건 인간 여자의 얇은 두 팔인데도 불구하고 튕겨 난

건 놀랍게도 사람 몸 크기만 한 초승달 전동칼이었다. 충격으로 팔이 밀린 타이탄이 버둥거리며 다시 자세를 잡으려 할 때였다.

“이게 무슨..!”

옆에 있던 다른 타이탄이 무기를 휘둘렀다.

전기가 충전되어 있는 거대한 쇠구슬이 달려들었다.

빙빙 돌릴 필요도 없다. 유동장 내부 삽입에 의해 자체적인 회전 장치를 가지고 있었다.

가만히 든 상태에서도 바람 찢는 소리를 내는 쇠구슬은 곡선 궤도를 그리며 나냐우를 덮쳐 왔다.

두 번은 필요 없었다.

그녀는 한 번에 쇠구슬의 궤도를 읽고,살짝 피한 뒤 구슬에 연결된 사슬에 낫을 휘둘렀다.

특수 접점용 소결합금인 쇠사슬은 끊어지지 않았지만,나냐우는 허리 힘으로 잡아채고 그대로 쇠구슬을 뒤쪽 땅에 처박았다.

- 콰광!

“대사마! 아무래도 전력 분석이 잘못된 것 같소만..

타이탄은 벽에 박힌 구슬 쪽으로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조금만 더 균형을 잃었으면 아예 그 자리에 주저앉았을지도 몰랐다.

“분석은 대충 정확합니다.”

- 파지지직!

어깨에 뿔이 달린 황색 타이탄이 낮게 말하며 채찍을 내리쳤다.

압축된 샛노란 번개가 온 사방을 감전시키며 뻗어 나갔고,나냐우도 몸을 뒤로 피했다.

“대충은요. 그렇다고 못 이길 건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됐죠.”

음성 증폭기에서 무감정한 어조가 흘러나왔다.

“방심하지는 마십시오. 방금 측정된 전력으론... 우리 중 둘,최대 셋까지도 상대할 수 있는 여자입니다. 물론 저는 제외입니다.”

그녀에게 합류하기 위해 앞으로 한 발 나섰을 때였다.

아이작은 여전히 얄미울 정도로 여유로운 어조로 중얼거렸다.

〈빠져 있어. 나냐우가 보여 줄 거 다 보여 주고 나서 끼어들면 돼.〉

= 그럼 넌 빠져라.

〈어휴. 나 없이 되겠어?〉

어쨌거나 여기까지 같이 내려온 동료가 협공당하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T&T 간부 전체가 아닌,웃기는 떨거지 정도만 데리고 온 이상 자살은 확정이지요. 증명 완료입니다.”

〈떨. 거지?〉

아이작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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