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314화 (314/458)

336화 환영 (16)

공간을 찢고 나온 대검은 앞으로 뻗어 나왔다.

현의 튕김음처럼 빠르고 날카롭게 튀어나온 칼날이 가까이 있던 말의 목을 잘라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설의 명마처럼 곳곳을 누비며 활약하던 말은 붉은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바닥에 뒹구는 잘린 목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듯 부릅뜬 눈으로 캄캄한 허공을 바라봤다.

대검은 멈추지 않고 똑바로 위로 치켜세워진 뒤,마치 그 자리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일 정도로 빠르게 레안드로를 향해 휘둘러졌다.

레안드로는 훨씬 얇은 칼을 들어 그것을 막아 냈다. 하지만 목 없는 미유는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곧장 바닥에 쓰러졌다.

레안드로는 그 자리에 섰다.

허공에 흩날리는 미유의 핏물은, 몸에 닿는 대로 한 방울 한 방울을 마지막까지 뒤집어썼다.

13년을 함께했다.

그 시간 동안 단 하루도 떨어진 날이 없다.

자신을 놓치고 싶지 않았을까.

혹시 버리고 간다고 생각했을까.

꼭 오겠다고 약속이라도 했어야 하는 걸까.

몇 번이나 억지로 떼어 놓았음에도, 이런 터무니없는 곳까지 레안드로를 따라온 미유.

수면제라도 써서 재웠어야 한다.

혼자 두고 사라진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올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니,하지 않았다.

실수다...

자신을 탓하고,여기까지 함께 온 괴한들을 탓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건,미유를 죽인 건 눈앞의 적.

말의 잘린 목에서 뿜어진 선혈이 세차게 흩뿌려지다가,마지막 피의 방울이 바닥에 닿았을 때.

레안드로의 눈에서 푸른 불꽃이 연기처럼 일어났다.

그건 무언가를 녹여 만든 것처럼 뚜렷한 색을 가져 눈에 보였고, 사방으로 홀러나왔다.

칼끝에서부터 레안드로의 몸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어떠한 준비 자세도 없이 그냥 앞으로 칼을 찔렀다.

밖에서 보기에는 힘도 실려 있지 않은 것 같은 칼을,젓빛 기사는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받아 냈다.

하지만 레안드로는 멈추지 않고 그 자세에서 그대로 잿빛 기사의 가슴을 찔렀다.

잿빛 기사는 막고,막아 냈다.

하지만 자신의 목숨을 도외시하고 신검합일의 경지가 되어 찔러 오는 칼을 계속 막아 낼 수는 없었다.

열두 점의 빛이 한 점만을 향해 휘몰아쳤다.

새파란 칼이 찌르고,찌르고,다시 찌르고,또다시 찔렀다.

섬전처럼 찔러 오는 12번의 공격 가운데,열두 번이 모두 상대의 숨을 끊으려는 살수였다.

잿빛 기사는 1초도 지나지 않은 찰나의 순간 또 한 걸음 물러나고, 한 걸음을 다시 물러났다.

하지만 세 걸음까지였다.

열두 번의 공격이 끝나고 다시 한차례 공격이 이어지려는 순간, 젓빛 기사는 대검으로 그 이음새를

잘라 냈다.

- 파과과과광!

검붉은 기운과 푸른 번개가 얽혀 이지러졌다.

망치처럼 내리친 대검에 공격의 연쇄가 끊어졌다.

대검이 레안드로의 칼을 누르고 있는 동안,허공에서 빛나는 칼이 튀어나와 순식간에 그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호신강기로 보호되는 몸이었지만 목이 반이나 잘려 나갔다.

레안드로는 칼을 놓지 않았다.

위로 쳐올리려고 했다.

하지만 젓빛 갑옷에 새겨진 붉은 회로에서 뿜어지는 기운이 계속 대검에 더해졌고,두 손에 쥔 칼은 결국 올라가지 못했다.

새파란 검기가 옅어져 허공으로 흩어졌다.

- 화득!

허공에서 움직이던 칼이 뜯어내듯 반대편에서 후작의 목을 베었다.

목에서 흘러내는 피가 입고 있는

갑옷을 양쪽으로 덮었다.

레안드로는 잿빛 기사의 싸우는 방식을 알 것 같았다.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적이었지만 다시 싸우면 이길 것 같았다.

적어도 가슴을 한 번 이상 뚫을 자신은 있다.

레안드로는 그렇게 생각하며 작게 웃었다.

검의 극의, 살상의 극의를 향해 한 걸음 가까워져 어쩔 수 없이 새어 나온 웃음이었다.

그렇게 후작은 서서 죽었다.

“이야. 독종이네.”

나냐우가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남을 걱정할 때가 아니다.

후작의 시체에서 고개를 돌린 잿빛 기사가 나를 바라봤다.

눈앞에 보이는 미래는 몰살.

루-륨은커녕,더 이상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한 채 여기서 끝나는 미래가 서른 걸음 앞.

그때,

어깨에 침착하게 앉은 까마귀가

작게 읊조렸다.

〈바친다.〉

- 파^>삭!

선 채로 죽은 레안드로의 시체가 순식간에 말라 비틀어졌다.

양쪽 모두가 너덜너덜해진 목을 젓빛 기사의 칼이 잘라 내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피도,살도,뼈도 부스러기로 변해 허공에 흩어졌다.

마치 보이지 않는 저편에서,달고

부드럽고 고소한 무언가를 누군가 아작아작 씹고 즙까지도 빠짐없이 빨아 먹은 것 같았다.

- 화아아악!

후작의 시체와 잿빛 기사 주위의 허공에서 익숙한 마왕의 표식들이, 동굴이 끝까지 밝혀질 정도로 환한 빛을 내쁨었다.

아이작이 ‘껍질’로 연결되어 있는 인벤토리가 흔들리며 점점 더 강한 힘을 받아들였다.

〈저 건강한 녀석의 죽음을 미리 제물로 바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 빌어먹을 장소는 제사 하나에도 인과율이 소모돼서,제물을 섬세한 마음으로 골라야 했거든.〉

= 바쳤. 다고?

〈마왕의 힘이 얼마나 통할지는 몰라도,입맛 까다로운 말파스도 솔직히 이건 만족할 수밖에 없지. 무제한 잔치보다 일품요리를 훨씬 좋아하기도 하고.〉

까마귀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빠르게 뱉었다.

빛이 폭주하며 아이작의 ‘껍질’에 본 적 없는 복잡한 표식이 추가로 새겨졌다.

나냐우는 홀린 듯이 그 장면을 바라봤다.

〈흐흐. 인과율이 꽤 늘어났군. 좋아할 줄 알았지. 따라와라.〉

_ 스스스숙!

아이작이 인솔하는 막.

새롭게 온갖 표식이 붙은 껍질이 젓빛 기사를 주변에서 둘러쌌다.

〈뚫을 수 없는 막이다. 천사들을 상대했던 것처럼만 해라. 제대로 인식하기만 하면,그 공간 속에서 너는 창조주나 다름없다.〉

후작을 죽인 잿빛 기사는 대검을 쥐고 이쪽으로 걸어왔다.

툭.

다가오지 못했다.

촘촘한 투구의 회로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 콰광!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한 진동이 허공을 타고 전해지려 할 때였다.

〈간섭.〉

주기가 어긋나는 파동이 막에서 일어나며 잿빛 기사가 일으키는 진동이 전부 상쇄되어 버렸다.

발로 막을 걷어차던 젓빛 기사가 멈칫했다.

뼈 촉수로 만든 기스-제-라이의 방어막조차 얼마 걸리지 않고 쉽게 분쇄했던 존재가, 내가 만들어 낸 막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좋아. 이제 하나만 상상해라.〉

= .무엇을?

내가 만들어 낸 공간.

그곳에서 상대가 지극히 약하다고 상상하라는 걸까?

그곳을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상상하라는 걸까?

하지만 아이작에게서 나온 말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모든 아공간을 동원해서. 상대가 인벤토리를 쓰는 걸 저지해라.〉

〈네 공간을 상상할 권리는 오로지 너에게만 있다. 고유할수록 위력도 강해지...〉

- 좌르륵!

허공이 열렸다.

세 자루의 칼이 트로핀 나냐우와 아이작,나에게 폭사됐다.

- 까가가강!

상황을 보며 대기하던 나냐우가 동시에 튀어나오는 세 자루 칼을 쓸어 담듯 쳐냈다.

하지만 충격을 감당하지 못하고, 칼을 쳐낼 때 몸이 살짝 떠서 뒤로 휘청거렸다.

“으으,이거 장난 아닌데?”

가볍게 말했지만 그녀의 입에서

실 같은 핏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계속 이런 게 날아오면..

- 까강!

- 까강!

- 까가강!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폭사되는 칼을 연달아 쳐내며 나냐우가 소리 쳤다.

“감당 못 한다고!”

두꺼운 특수 합금으로 만들어진 타이탄의 목 부위를 잘라 내면서도 멀껑하던 낫이,허공에서 폭사되는

칼에 부딪힌 다음에는 이가 완전히 나가 있었다.

약 기운은 칼을 받아내면서 같이 소모됐는지 사라졌지만,나냐우는 끝까지 한 자루의 칼도 안 놓치고 전부 쳐내어 궤도를 바꿨다.

- 우우우우응!

허공이 더 넓게 찢어졌다.

그 너머로 뜬 수십 자루의 칼이 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급해! 빨리!〉

쓸 수 없다.

막는다.

뒤쪽에 늘어트린 공간으로 주위를 둘렀다.

상대의 인벤토리에 간섭하려 하는 순간,우연인지 던전에서 살해당한 서큐버스님이 떠올랐다.

떠 있던 그녀의 눈은 살해당하며 닫혔다.

어디서 알았는지 모를 이야기를 해 주던 입술도 피투성이가 되어 굳게 닫혀 버렸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까지도 그녀를 구하는 세계에

도달하지 못했다.

닫는다.

그녀의 눈꺼풀처럼,입처럼...

정확한 대상을 떠올리자 공간의 운용이 쉬워졌다.

벌어진 허공을 다시 ‘닫았’다.

- 끼기기긱...

기괴한 비명이 공기를 쳤다.

칼이 쏟아져 나오던 곳만 아니라 주위의 수십 미터가 닫혔다.

바람이 공허에 짓눌려 소멸했고, 텅 비어 버린 공간으로 주위 바람이 쓸려 들어가며 소란이 일었다.

〈좋아. 떨어져라. 떨어져라...>

아이작의 얇은 인벤토리가 막에 갇힌 기사의 발밑에 깔렸다.

그리고 기사는 딛고 선 바닥에서 아래로 자유 낙하하기 시작했다.

두 발로 바닥을 단단히 딛고 선 상태에서 어떻게 낙하가 가능한지 알 수 없었지만,

빛나는 운석이 떨어지는 것처럼 기사는 끝없이 떨어졌다.

그곳에 벌어지는 게 바로 ‘낙하’ 그 자체였다.

〈떨어져라. 떨어져라...〉

다르다.

아이작이 강요하는 개념은 도저히 자유 낙하라고 부를 수 없다.

제 무게로 떨어지는 것은 저렇게 빠르고 참혹하게 떨어질 수 없다.

그 이상.

〈떨어져라.〉

기사의 추락은 한계를 넘어 점점 더 빨라졌다.

무언가를 향해서 빨려 가고 있다는 표현이 옳으리라.

- 화르록!

아이작의 몸에서 황금빛 불길이 일어나며 날개의 반을 녹였다.

황금빛 불이 붙은 까마귀는 아예 기사가 있는 곳으로 뛰어들었다.

붉은 두 눈이,날카로운 부리가 잿빛 기사를 향해 겨눠졌다.

〈망가지는 몸. 이하 생략.〉

저런 식으로 아무렇게나 주문을 생략할 수도 있는 건가.

하지만 마치 면류관처럼 빙빙 도는 저주의 수풀은 열셋으로 분리되어 빠르게 멸어지는 기사를 긁었다.

좌우로 빙글빙글 움직이며 갑옷의 회로를 긁어내는 속도는 ‘상상’을 깨트리고 있었다.

〈.저주,개방.〉

동시에 붉은 가시나무의 수풀이 수만 개의 가시가 되어 떨어지는 젓빛 기사를 찔렀다.

냄새가 코를 찌르듯.

칼이 아니라 빛이 온몸을 찌르듯.

열두 번을 찌른 후작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무수한 공격이 잿빛 기사의 전부를 뒤덮었다.

속도,숫자,방식.

상상하던 한계를 쉽게 넘어서는 공격이었다.

저게 뭐가 됐든,내가 아공간을

봉인한 사이 아이작이 제 날개를 불사르며 해낸 것.

수만 종류의 중첩된 불행,재앙, 원망,불운, 저주는.

무력하게 낙하하는 적에게 확실히 적중했다.

이미 멸어지는 새에게 칼날로 된 쇠그물을 치고,수만 발의 화살을 쏘아 맞춘 격.

“된. 거야?”

나냐우가 비틀거리며 다시 낫을 잡고 일어났다.

그러나,

갑옷 표면의 회로가 한층 어지럽게 깜빡이는 걸 제외하면.

- 저벅. 저벅.

기사는 수만 개의 저주에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손에 들고 있는 대검도.

분리된 날개처럼 등 뒤에 전개한 수십 수백의 칼들도.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잿빛 기사는 아이작이 만들어 낸 ‘낙하’를 딛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한 발이 딛는 것은,

낙하라는 개념.

다른 발이 딛는 건,

거리라는 개념.

아이작의 붉은 눈이 흔들렸다. 그곳에 순간적으로 떠오른 것은 공포보다 흥분과 호기심이었다.

〈으음. 안 되는군. 하지만 놈에 대한 힌트는 얻었다. 이 몸은 크게 걱정하지 말거라... 재도 여기다 넣든지...〉

- 스으윽!

잿빛 기사가 아이작이 만든 추락을 딛고 올라서서 그를 베려는 순간, 아이작은 자신이 만든 ‘추락’ 속으로 요란스럽게 잠겨 버렸다.

불타는 까마귀의 몸은 그 자신이 보유한 아공간으로 사라졌다.

내가 가진 것에 비하면 1/100도 안 되는 부피.

하지만 그걸 사용해서,아이작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자유롭게 힘을 운용하고 있었다.

곧바로 아이작이 들어간 공간을 회수하고,나냐우까지 그 안으로 들어가게 하려고 할 때였다.

- 울컥.

잿빛 기사가 서 있는 문양 뒤에서 무언가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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