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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316화 (316/458)

339화 환영 (19)

나냐우는 이미 앞쪽으로 멀리 간 상태였다.

닥치는 대로 모든 병을 비워 내고 루-름을 넣은 배낭이 불룩했다.

끈적거리는 연기는 마지막 남은 은빛 액체를 마시고 있었다.

〈아무래도 불안하다.〉

갑자기 바뀐 태도가 느껴졌다.

마왕이나 여신들의 눈치 따위는 보지 않아도 되겠다느니 운운하며, 잔뜩 흥분해 있던 아이작답지 않은 반응이었다.

녀석이 진중하게 말을 이었다.

〈저 녀석 문제가 아니다. 감시의 눈길이 느껴지는군. 우리가 정말. 뿌리까지 건드린 모양이다. 가속.〉

아이작의 한 번의 강한 날갯짓으로 해골마와 나에게까지 가속의 힘이 흘러들었다.

- 파아앗!

해골마가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목표는 4층.

하는 데까지 도피해 본다.

나냐우가 이미 입구를 확보했다.

빠르게 움직인 덕에 끈적거리는 연기는 아직도 남은 루-륨을 먹고 있었다.

그때.

[해골병사는 자리에 멈췄습니다.]

〈창천의 구멍이. 떴다.〉

“이게 뭐지? 트로핀 나냐우가. 자리에 멈췄다고? 지금 뜨고 있는 글자들은 뭐지?”

당황한 목소리가 들린다.

상태창이 계속 이어졌다.

[해골병사는 자연스럽게 자리에 멈췄습니다. 해골마가 당연한 듯이 발걸음을 멈췄으므로,위에 탑승한 해골병사도 멈출 수밖에 없었죠.]

미유였던 해골마는 실제로 걸음을 멈춘 상태였다.

- 훌쩍!

하지만 멈출 수는 없다.

나는 말 위에서 뛰어내려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니. 아이작,네가 생각하는 창천의 구멍이 아니다.”

상태창이 아니다.

서큐버스님과 함께하던 까마득한

시작부터 그랬듯,상태창은 지금껏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자리에 멈췄다고?

나는 그러지 않았다.

[해골병사는 아무런 의미도 없이 앞쪽으로 걸어갔습니다. 아니,이건 앞쪽이라고 말할 수도 없겠지요. 먼지처럼 부서져 버릴 테니까요.]

“트로핀 나냐우는. 뒤늦게서야. 후회했습니다. 황실의 비역 따위에 괜한 관심을 가졌다고. 말이죠..? 그대로. 유예된 죽음에 감사하며

루-룸에 마약이나 멍청한 비율로 섞어 즐길걸 그랬다고. 말입니다? 이게 뭐야?”

“현혹되지 마! 이건 가짜다.”

강제되지 않는다.

그때 였다.

[해골병사는 자리에 멈췄습니다.] 나는 멈추지 않았다.

[자 리 에 멈 췄 습 니 다.]

멈추지 않았다. 내 말을 믿었는지 아이작도,나냐우도 함께 앞으로 나아가려 했을 때였다.

〈잠깐만,지금..!>

아이작이 무언가 말하려 한 직후 세상이 정지했고,금빛 주술사는 입만 살짝 벌린 채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자리에 멈추라고 명령한 글자들이 허공에서 찢어졌다.

그 사이로 두 명의 인간이 원래 그곳에 서 있던 것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드러냈다. “안녕하신가?”

잿빛 기사가 나타났던 홀로그램과 정확히 동일한 표식.

단순한 다섯 문양이 서로 겹쳐진 표식을 팔에 새긴 두 명의 인간이 나타났다.

아니,새긴 것이 아니다.

드러나는 층위가 다르다.

나에게는 지극히 익숙한 층위.

그건 마치 ‘상태창’처럼.

인간들의 살갗 위에 반투명하게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경계심으로 몸이 딱딱해졌다.

기이하게 익숙한 얼굴들이다.

분명 그 자리에 있는데,뿌옇게 윤곽이 흐려져 있다고 느낄 만큼 인식이 잘 되지 않았다.

시야에 제한되거나 환각인 것은 아니었다.

나란히 선 인간 둘은 그만큼이나 평범하고,아무 인상을 주지 않는 외모였다.

옷차림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도시에서나 살 수 있을 법한 낡은 튜닉을 입었고,추위로부터 보호해 줄 것 같지도 않은 누런색

코트를 위에 걸치고 있었다.

뒤에 서 있는 인간은 그마저 없이 간소한 덮개 옷과 햇렷한 아마포로 만들어진 하얀 웃옷을 걸쳤다.

앞에 선 인간이 얼굴을 찡그렸다.

쌍꺼풀이 없고 눈도 크지 않으며, 살짝 비뜰어진 균형을 가진 얼굴의 여자였다.

뒤에서 지켜보던 남자는 얇지도 굵지도 않은 눈썹을 손으로 쓱쓱 만지며,위와 아래가 살짝 어긋난 입술을 뻐끔거렸다.

언뜻 보면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하고,지나치면 기억하지 못할 것 같은 얼굴이었다.

“쯧..

여자가 플라스크를 향해 걸어가며 혀를 찼다.

찡그렸다는 표현이.

혀를 찼다는 표현이 얼굴에 그대로 구사된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한 존재가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습관이나 개성조차 탈구된 동작이 기괴하게 느껴졌다.

“으. 이렇게 망가져 버리다니.”

그 와중에도 끈적거리는 연기는 계속해서 루-륨을 탐욕스럽게 먹고 있었다.

그 연기를 보며 두 명의 인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슬며시 으쪽거렸다.

“여기까지 나타날 줄이야.”

“돌려야겠지?”

“당연하지. 문제는 그게 아니야. 이 까마귀는 우리가 나타나는 것도 눈치챘다고.”

“어떡하지?”

“뽑아내 버려.”

“하지만. 영향력이 너무 큰데?”

“우리가 알 바는 아니야. 안정이 더 중요하다. 남은 곳은 무작위로 채워지겠지. 믿어 보자고.”

농민이 검은 구슬을 꺼내 들었다.

“권한, 적출.”

반항도,반응도 없었다.

금빛 까마귀의 빛이 지워졌다.

깃털들이 하나씩 지워지면서 검은 구슬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몸은 그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 위이이잉...

느껴진다.

빨려들어가는 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까마귀의 몸만이 아니다.

섬뜩한 관념이 강요된다.

세계가,내게 아이작을 잊으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뭘 할 수 있는 거지?

보이지 않는 것.

과거를,흔적을,역사를.

아이작의 존재가 ‘아예 처음부터 없었던 것’이 되어 버리고 있다.

그런 건 없었다.

그것이 진실이며,기준.

안 돼.

필사적으로 기억을 붙잡았다.

하지만 투명하게 지워지는 존재를 막을 방법은 없었다.

“음. 용량이 부족한가?”

“어지간하네.”

아이작이 반 넘게 사라지자 뒤의 남자가 구슬을 하나 더 꺼냈다. 그곳으로,길드 T&T를 만들어 낸 트로핀 나냐우의 몸이 흩어져 빨려 들어갔다.

아이작이 빨려들어갈 때와 같은 기분이다.

나냐우의 기록이 말살된다.

과거가.

현재가.

그녀가 지금까지 해 온 선택들이, 해 나갈 무수한 선택들이.

모두 부서져 새까만 구슬 속으로 먼지처럼 빨려들어갔다.

[다시. 기회를...]

끈적거리는 연기가 다가오는 순간 몸이 조금씩 움직였다.

제대로 말을 듣지 않는 팔에 계속 명령을 내렸다.

칼을 잡은 손을 천천히 들었다. 아주 조금씩이지만 무거운 몸이 움직이고 있었다.

- 위이이잉..!

나냐우가 빨려들어가고, 아이작이 빨려들어가는 순간,발을 디디며 칼을 찔러 넣었다. 레안드로 후작과, 소녀 공작과, 무수한 자들에게서 흡수한 검기가 앞으로 터져 나갔다.

필사적인 마음으로 찔러서인지, 대검의 간격이 길어서인지 새파란 검기가 뻗는 것도 길었다.

닿는 것만으로 상대를 산산조각 낼 강렬한 기운이 튜닉을 입은 여자를 향해 폭사됐다.

여자는 칼에 배가 뚫렸고,

배 속에는 선연하게 꿈틀대는 붉은 내장이 있었다.

하지만 내장은 잘리거나 폭파되지 않았고,쩍 갈라질 만큼 넓게 찢긴 상처로 빠져나오지도 않았다.

내장은 그렇게, 칼이 박힌 채로 수축과 이완을 거듭했다.

새파란 검기는 그 자리에서 멈춰 있었다.

칼을 되돌리려 하자 여자가 배에 힘을 줬다. 선연한 내장이 2미터가

넘는 대검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왜 얘는 움직여?”

튜닉을 입은 여자가 살짝 고개를 갸웃거리며 칼을 보곤,다시 나를 바라봤다.

“권한,흡수.”

윤곽 없는 여자가 손을 뻗었다. 새까만 구슬이 나를 빨아들였다.

[스킬: 검기劍氣 Lv.4 를 적에게 홉수당했습니다.]

[스킬: 검기劍氣 Lv.3 를 적에게 흡수당했습니다.]

[스킬: 검기劍氣 Lv.2를...]

[스킬: 검기劍氣 Lv.l을...] [스킬: 검기劍氣가 사라집니다.]

여자의 내장에 억눌려 있던 푸른 불빛이 삶을 다한 촛불처럼 한순간 꺼져 버렸다.

[검술 Lv.13을 흡수당했습니다.] [검술 Lv.12를...]

[스킬: 검술이 사라졌습니다.]

칼을 들고 있는 자세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땅을 디딘 두 발을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만도 힘겨웠다.

[힘을 3 흡수당했습니다.] [힘을...]

[민첩...]

[체력...]

- 콰당!

손목에 상상도 못 할 어마어마한 무게가 가해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한 손으로 가볍게 휘두를 수

있었음에도,이제는 쥐는 것마저 불가능했다.

하지만 바닥에 흉하게 쓰러진 건 대검의 무게 탓이 아니었다.

대검의 반은커녕.

십 분의 일조차 되지 않을 무게.

걸친 갑옷이 너무나도 무거워서 감당할 수 없었다.

튜닉을 입은 여자는,칼에 꽂힌 내장으로 부드럽게 이완과 수축을 반복하면서 그라스미어의 대검을 허공에 그대로 들고 있었다.

[쌍검술 Lv.5를 흡수당했습니다.]

[스킬: 쌍검술이 사라집니다.] [뼈의 군주 Lv.3을...]

[스킬: 뼈의 군주가 사라집니다.] [.흡수당했습니다.]

[.흡수당했습니다.] [•••흡수당했습니다.]

[.흡수당했습니다.]

[스킬: 바람 발톱이 사라집니다.] [스킬: 도약이 사라집니다.]

[스킬: 불치의 꽃이 사라집니다.]

[산성酸性 Lv.5를...]

[속성: 산성酸性이 사라집니다.]

크라켄에게 얻었던 권능.

수많은 적을 녹이고,장애물을 사그라트렸던 능력이 사라졌다.

[흡착吸着 Lv.5를...]

[스킬: 흡착吸着이 사라집니다.]

전투의 온갖 곳에 응용되어 나를

승리로 이끌어 주던 스킬이 그대로 증발했다.

[스킬: 도약이 사라집니다.]

[스킬: 재료 제작...]

[스킬: 균류 채집...]

[가면 무도회가 사라집니다.]

이제 아이작도,레안드로도 두 번 다시 흉내 낼 수 없다.

[스킬: 기합이 사라집니다.]

죽은 척하기,추적,공포,명상, 숲 적응,사막 적응,깨달음,집중, 나냐우의 골동주의,푸르손의 교리, 예메라의 교리,제국 예법,동방어, 체술,아드리안 무투,누적 타격, 경갑 착용,중갑 착용,사신의 낫 마스터리,궁술,시미터,고대어, 지상 전술이 사라졌다.

힘과 지혜가 정체불명의 새까만 구슬로 빨려들어간다.

경탄하며 피워 냈던 불꽃도,

[스킬: 격발이 사라집니다.]

푸르게 어둠을 에던 권능도,

[스킬: 결빙이 사라집니다.]

[스킬: 질풍이 사라잡니다.]

[냉기 폭풍이 해체됩니다.]

모조리 사라졌다.

그리고,바닥에 쓰러진 채 간신히 시선을 돌려 옆을 봤을 때.

그곳에는 트로핀 나냐우도.

벨-호멧-아이작도 없었다.

미유는 해골마 소환이 사라지며

먼지가 되어 흩어졌다.

[스킬: 정수흡수가 사라집니다.]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입술을 작게 달싹거렸다.

“어라,아직도 안 사라집니까?”

“본체는 그대로잖아. 오류인가... 뭐,다시 시작하지.”

두개골은 무거운 투구에 보호되어 그대로였다.

여자도,남자도 나에게 발 하나 갖다 대지 않았다.

하지만 끝이라는 건 어느 때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 째깍째깍째깍...

수많은 진자들이 사방에 흔들리며 폭을 키웠다.

- 휘이잉... 고요하다.

이게 죽은. 건가?

되돌아간 걸까?

하지만.

미친 것처럼 쏟아붓던 폭풍우도, 머리가 덜덜 울리게 만들 정도로 커다란 천둥소리도 없다.

루비아도,레나도.

아니.

- 달그락.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탐. 지?’

그런 건 불가능하다.

- 딱. 딱.

이를 부딪쳤다.

‘부활. 한 건가?’

- 달그락.

팔이 이상하리만치 무거웠다. 바깥은 아무런 소리도 없고.

‘어두워..

빛도 한 점도 들어오지 않는다.

- 톡

주위를 더듬었다.

간신히 들어 올린 손 옆에 단단한 나무 판이 닿았다.

- 톡.

손끝을 모아 주위를 두드렸다. 하지만 딱 소리조차 나지 않는다.

- 톡. 톡. 톡. 톡. 콩.

주먹을 쥐어 부딪치고 나서야.

맞춘 관에 부딪쳐 조금 큰 소리가 났다.

여기는. 관.

하늘은 뚫려 있다.

- 톡.

그러나 양옆이 좁다.

- 톡. 톡.

발도,머리도 힘껏 뻗자 부딪칠

정도다.

파헤쳐진 무덤.

그 속의 관.

기억은 생생하다.

아이작도,나냐우도,황실 비역의 끈적거리는 연기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여긴. 어디지?’

관과 무덤은 영락없이 에라스트의 무덤처럼 보였지만,날씨가 예전과 전혀 달라 낯설었다.

폭풍우는커녕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고,시시각각 번개가 내리치던 하늘은 별도 달도 없이 고요하다.

같은 날이 아닌가?

지금까지 관에서 깨어난 날짜는 항상 같았다.

바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 달그락..! 달그락..!

끙끙거리다 관 옆을 짚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저주라도 당한 듯 몸이 무거웠다.

어둠 속에서 한 걸음 앞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격발.’

“.격발. 격발.”

반응은 없었다.

간절한 마음으로 중얼거렸다.

“상태. 상태창.”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상태창.”

마찬가지였다.

까만 허공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상태창!”

소리를 지르자 머리가 울렸고, 그때야 비로소.

- 띠링!

[해골병사 Lv.l(l)]

[체력-1 힘-1 민첩-1 지혜-1] [궁극 전직:〈죽음의 기사〉가 해제된 상태입니다.]

[〈파멸의 숫자〉가 적용됩니다.] [현재 구매력: 96.7%.]

상태창이 떠오른다.

“이. 게. 무슨..

그동안 쌓아 왔던 레벨과,모든 능력치가 전부 사라졌다.

그러나 기억은 그대로다.

아이작이나 나냐우를 찾아 도움을 청해야 할까.

그들이 어떻게 된 건 아니겠지. 일단은...

“스킬 확인.”

불길한 생각을 조심스레 억누르며 목록을 펼쳤다.

아니一

목록이라고 할 것조차 없었다.

- 인벤토리 Lv.?

“이게. 전부. 라고?”

- 휘이이잉..!

황량한 바람이 옆구리로 강하게 파고들었다.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 휘이이잉...

어둠 속에서 바람은 흙을 싣고, 부스러진 나뭇가지와 잡초를 싣고 날아왔다.

나는 저항하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그것들에 얻어맞으며, 일어나지도 못하고 한동안 쓰러져 있었다.

2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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