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0화 시작의 끝 (1)
‘상태… 창.’
몇 번을 확인해도 마찬가지였다.
레벨도, 스탯도,스킬도 모두 다 사라져 있다.
굳이 확인할 것까지도 없다.
몸이 말해 준다.
믿고 있던 능력치. 스킬.
숫자들이 흩어지고 감각이 몸을 빠져나갔다.
언제든 사라질 수 있다면.
상태창의 숫자들이 나에게 무슨 소용일까.
두려웠다.
내 능력을 없애 버린 ‘그들’은…….
대체 누굴까?
상태창에 개입해 마음대로 명령을 내렸다.
흘러내리는 루-름을 먹고 강해진 불세출의 주술사 아이작을 손쉽게 소멸시켰다.
세계의 이면에서 활약하는 T&T의 수장 트로핀 나냐우도 몸이 굳어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사라졌다.
생김새도,표정도,몸짓조차도.
아무런 개성이 없던 그들.
아이작은 짚이는 게 있던 눈치지만, 결국 아무 말도 남기지 못하고 검은 구슬 속으로 지워졌다.
아이작.
그를 만나야 한다.
내 능력치가 모두 사라졌다면, 구슬로 빨려 들어간 아이작과 나나우는 어떤 상황에 처해 있을까.
아이작은 석관 안에 갇혀 있던 때보다 더 좋지 않은 상황일지도 모른다.
불길하다.
- 우둑! 우두둑!
생각에만 잠겨 있을 수는 없다.
소리를 내며 몸을 풀었다.
이게 내 새로운 상황이라면 잘 적응해 둬야 하니까.
할 일이 많다.
자리에서 천천히 뛰기도 하면서, 손가락에서 팔로,어깨로 이어 가며 몸을 점검하는 순간一
一 퍼억!
풀고 있던 손이 사라졌다.
아니,연결되어 있던 팔뼈가 전부 빙그르 돌며 허공으로 날아갔다.
순식간에 균형을 잃고 몸이 날아 바닥에 처박힌다.
날아간 게 팔만이 아닌지,혹은 쓰러진 충격 때문인지 몸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눈앞에서 새하얀 뼈들이 조각조각 부서진 채로 굴러간다.
‘무슨……?’
시야가 흩어진다.
몸이 얼마나 부서진 건지 알 수 없었다.
느껴지는 기척.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뼈가 부러 졌는지 전혀 움직이지 않고.
- 달그… 락.
힘을 준 턱은 희미하게 떨리다가, 곧 다시 아래로 떨어진다.
“뭐 이런 게 있지? 여기까지 순찰을 돌아 다행이군."
낯선 목소리가 으스러진 두개골을 타고 울리다,곧 의식과 함께 빠져 나갔다.
* * ♦
- 달그락! 달그락!
발작적으로 손을 내저었다.
날아간 양쪽 팔도 다리도 그대로.
당황했던 처음과 반대로, 안도감을 느끼며 손가락뼈 발가락뼈도 이리저리 구부렸다.
별빛이 비치는 밤하늘이 보인다.
흙바닥에 머리가 처박혀 움직일 수 없던 조금 전과 전혀 다른 상황.
‘내가… 죽었던 건가?’
- 띠링!
[계승되었습니다.]
[해골병사 Lv.l(l)]
[체력-1 힘-1 민첩-1 지혜-1]
[궁극 전직:〈죽음의 기사〉가 해 제된 상태입니다.]
[〈파멸의 숫자〉가 적용됩니다.]
[현재 구매력: 96.7%.]
다시 불러온 상태창은,숫자 하나 다른 것 없이 그대로다.
날씨도,폭우는커녕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맑은 밤.
날아간 양쪽 팔도 다리도 그대로.
당황했던 처음과 반대로,희미한 안도를 느끼며 발가락뼈를 천천히 구부렸다.
회귀 능력.
다른 건 모두 잃었지만,이것만은 나에게서 빼앗아 가지 못했다.
같은 부활이라도 조금도 영문을 몰랐던 때와는 다르다.
익숙한 상황.
여기부터 시작이라는 건가.
- 뻐그덕.
목을 돌리는 소리에 새삼 깜짝 놀라며 움츠렸다.
조심해야 한다.
‘누군가… 있어.’
낯선 목소리가 아직도 머릿속에서 울리는 것 같다.
〈여기까지 순찰을 돌아 다행…….>
순찰이라고 했지.
죽은 장소는,여기서 잠깐 동안
밖으로 걸어간 지점.
- 탈칵.
조용히 관을 짚고 일어났다.
흙을 헤집고 올라와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봤다.
처음에는 확신이 없었지만, 다시 한번 차근히 둘러보니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에라스트 야산.
루비아가 찾아오던 그 무덤이다.
네크론의 졸개에게 몇 번씩이나 살해당하던 무덤.
‘그럼… 언제지?’
무덤이 파헤쳐져 있다는 건, 일단 폭우가 쏟아진 뒤.
루비아를 처음 만난 날인 1월 20일 이후.
알 수 있는 건 그 정도다.
전쟁이 시작됐는지.
마왕이 강림했는지.
왜 되돌아간 날짜가 바뀌었는지.
루비아,레나,나냐우,아이작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앞이 캄캄했다.
그괘도 회귀 능력이 남았으니 다른 건 쌓아 갈 수 있겠지.
한 번 간 길이니만큼 예전보다도 훨씬 더 빠를 거고.
전투 경험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가지고 있는 데다 경험치 6배의 특전도 있다.
일단 한 번 궤도에 오르기만 하면 속도는 압도적일 터.
‘루-름은… 어떻게 된 거지?’
나는 관에 누운 채 몸에 새겨진 루-륨 회로를 느끼려 해 보았다.
남아 있었다!
은빛 마력액이 뼈에 흐르는 것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신기하군.’
생각해 보면 뼈에 흐를 만한 양은 오래전에 추월했다.
스스로 압축되어서 흐르는 걸까.
마법의 첫 번째 전제.
신비에는 아케인 하트가 없으면 원천적으로 닿을 수 없다.
루-름은 그 상식을 무시한다.
그러니 공간 법칙 따위도 가볍게 짓밟을지도 모른다.
물론, 마력액이 아무리 몸 안에 가득 흐른다고 해도 지금 당장은
마법 하나 쓸 수 없지만.
‘안타깝군.’
무슨 마법이든 습득하기만 하면 그걸로 그냥…….
- 저벅.
발소리에 생각이 멈췄다.
상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머리를 부순 건 분명히 ‘누군가’. 바람에 날아온 돌 따위가 아니다.
순찰을 도는 녀석이라면 사냥꾼도, 산적도, 주위 영주의 병사도 될 수 있다.
근처의 큰 바위에 등을 대고 서서 잠시 기다렸다.
이미 가깝다.
무기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한 순간.
‘인벤토리.’
자연스레 그 개념이 머릿속에서 훌러 나왔다.
[인벤토리 Lv.?을 발동합니다.]
뭐로든 활용될 수 있는 공간.
손을 넣자,인벤토리에서 뻑뻑한 질감이 전해진다.
설마
- 스륵.
그곳에는,
[구출의 희망] - 캐빈 애슈턴
손에 잡힌 책 한 권이 바깥으로 천천히 뽑혀 나오고 있었다.
- 휘이이이잉!
- 파르르르륵!
들고 있던 책이 큰 소리를 내며 바람에 펄럭였다.
“이건……!”
놀란 외침이 입 밖으로 터졌다.
황실의 비역에서 뽑았던 책.
이것뿐만이 아니다.
안쪽에 꽉 들어찬 책들의 존재가 하나하나 감지된다.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비역에서 넣어 둔 애슈턴의 책이, 회귀한 뒤에도 남아 있다는 건 경악할 만한 한 가지 사실을 말해 주었다.
회귀하며 계승되는 건 루-륨뿐만이 아니었다.
인벤토리 안에 있는…….
그때 였다.
- 부응!
터벅터벅 다가온 검은 그림자가 무기를 휘둘렀다.
달빛 아래 비친 그림자의 무기는 거대한 쇠도리깨,메이스도 아닌 평범하기 그지없는 철검이었다.
검기 따위는 당연히 서리지 않고, 칼 자체도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잡는 자세도,휘두르는 자세도 모두 어설펐다.
저런 칼질로 조금 전 내 두개골을 부쉈다는 건가?
하지만,뻔한 경로로 코앞에서 휘두르는 칼을 도저히 피해 낼 수 없었다.
- 퍼억!
가볍게 휘두른 칼이 손에 쥔 책을 멀리 날렸다. 절반으로 잘린 새하얀 종이들이 허공에 흩날렸다.
책을 손에 들고 있던 덕에 던지면서
겨우 뒤로 내뗄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없었다면 한 번에 바로 끝났을 것이다.
- 스륵!
검은 그림자는 다시 아무렇게나 칼을 찔렀다.
칼끝이 팔뼈를 훑어내듯 스치고 지나갔다.
- 털썩
급하게 뒤로 넘어지면서 두 번째 공격을 피한 건 우연에 가까웠다.
검은 그림자를 빠르게 살폈다.
전혀 아는 윤곽은 아니다.
평범한 제국의 갑옷.
병사인가?
종이로 만들어진 책조차도 완벽히 못 자르는 어설픈 칼질을,
- 부응!
“언데드라니……
바로 전 생까지만 해도 검주들과
칼을 맞댄 내가 바닥을 필사적으로 구르며 간신히 피해 냈다.
강하다.
아니,내가 너무 약하다.
검은 그림자는 서두르지도 않고 느긋하게 앞으로 다가왔다.
“흐음.”
검주는커녕, 황실의 유령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어설픈 걸음걸이와 빈틈밖에 없는 공격이었다.
이런 녀석에게 정말 살해당해야 한다는 건가?
내가?
하지만 몸이 손가락,발가락 하나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잠깐! 잠깐만!”
승산은 없다.
그나마 뜻대로 움직이는 곳은一
입 하나.
대화를 시도해야 봐야 했다.
“어? 말도 하네?”
그림자는 발을 내밀어 옆구리를 걷어찼다.
- 퍽!
발길질을 정통으로 맞자 충격으로
몸이 굳었다.
반격조차 예상하지 않는 멍청한 일격에 나는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 흙에 얼굴을 처박았다.
[경고! 체력이 75% 이하입니다!]
- 퍽!
재미라도 들린 듯,연속으로 세게 걷어차인 몸이 날아 커다란 바위에 부딪혔다.
비틀거리며 일어나려 했지만,쩍쩍 실금이 간 뼈가 비명을 질렀다.
[경고! 체력이 50% 이하입니다!]
걷어차인 몸을 추슬러 어떻게든 일어나려는 사이,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혹시 근처에 흑마법사가 있는 게 아닐까? 이런 것 따위가 혼자 말을 할 리가 없잖아.”
뒤쪽 방향에서 새로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일단 이것부터 처리……
새로 나타난 그림자가 뒤쪽에서 철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다급했다.
이대로라면 또 두개골이 철검에 깨질 판이었다.
“기다리라니까!”
- 파드득!
나는 인벤토리를 펼쳐 안에 있는 것들을 아무렇게나 집어 던졌다.
〈하나의 눈〉,〈명칭과 소 의식〉, 〈관상 분석〉,〈지칭 의미론 비판〉, 〈윤리적 허용 가능성〉.
읽기만 하면 지혜 스탯이 오르는 캐빈 애슈턴의 책.
아이작의 관심마저 끌었던 놀라운 저작가의 책이다.
하지만 읽는 것도 일단 이곳을 벗어나고 나서다.
“뭐,뭐야?”
칼을 내리치려다,허공에서 책이 튀어나오는 현상에 당황한 상대가 공격을 멈췄다.
지금이다.
나는 다섯 권이나 되는 책을 마구 던져 내고 난 뒤에야,인벤토리에서
칼을 찾아 꺼냈다.
지금의 힘으로도 휘두를 수 있는 가장 얇고 가벼운 녀석으로.
[블러드 휩,종말의 번개.]
반격의 시작이다.
황실의 보물 창고에서 아이작이 골라 줬던 명검.
이름만 봐도 느껴지는 격.
세검은 조금도 익숙하지 않지만, 그동안 칼을 휘둘러 왔던 살육의 세월은 여전하다.
‘평범한 병사 따위에게 당하는 건
말도 안 되지.’
꽉 쥔 칼을 앞으로 내찔렀다.
어쩌면 경험치 6배 특전을 당장 실현할 수 있을지도…….
- 타앙!
그러나 ‘종말의 번개’의 멋들어진 칼날은 앞으로 나아가지도 못했다.
손에 쥔 세검은 자세를 취하기도 전에 보이지도 않는 수풀로 강하게 튕겨 나갔다. 어느 방향으로 얼마나 날아갔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 콰직!
어떻게 알아챌 사이도.
두 번의 기회도 없었다. 뒤에서 날아든 공격이 머리를 위에서부터 가볍게 부쉈다.
부서진 두개골로 철검이 쑤시고 들어오는 감각이 섬뜩했다.
“갑자기 칼이 튀어나오다니……
“근데 이 칼,멋진데? 손잡이에 새겨진 번개 좀 봐 봐. 이야……
새로운 목소리였다.
세 명이나… 된다고?
대체 병사들이 에라스트 무덤에서 무슨 일을 하는 거지?
그런 생각을 끝으로.
새하얀 뼈와 함께,의식이 산산이 어둠으로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