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321화 (321/458)

344화 시작의 끝 (5)

- 띠링!

나는 망연히 서 있었다.

‘실패했다.’

싯누런 황금을 보여 주며 시도한 대화도 통하지 않았다.

칼만 빼앗아 병사의 존재를 지워 보려는 시도마저 실패했다.

병사는 물론이고,칼도 그대로다.

'세계가… 개연성이… 칼을 채워 넣은 건가? 혹시……

순간 머릿속을 번뜩이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인벤토리의 물건이 새로 시작하는 세계에 남아 있다면.

같은 보물을 ‘새로 시작할’ 때마다 반복 습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애슈턴의 서적과 흔하디흔한 철검을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건 무리겠지.

칼 한 자루 빼앗았다고 통째로 인간이 사라진다는 건 역시 멍청한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동안 얼마나 아이작이나 다른 조력자들에게 의존해서 살아왔는지 느껴졌다.

녀석들에 대한 부끄러움,미안함, 고마움 같은 감정이 뒤섞여 울컥 올라왔다.

애초에 병사들을 평범한 경비병으로 생각한 것부터 철저한 오판이었다.

언데드를 보고 전혀 놀라지 않고, 황금을 내놔도 자신의 임무에 대해 털어놓지 않는다.

움직임을 전부 읽은 뒤 코앞에서 하는 공격에도 마지막까지 침착하게 대처한다.

제국군 중에서도 굉장히 뛰어난 녀석들이다. 주위 도시의 경비병 따위가 아니다.

게다가 황제에 대한 충성을 계속 운운한다.

높은 확률로一 근위대.

‘훨씬 빨리 짐작해야 했어.’

황제……. 황제…….

제국 황제의 충실한 부하가 대체 왜 이곳에 온다는 말인가?

떠올리자.

떠올려야 했다. 기억을 되돌렸다.

1월 20일. 날씨의 변화.

없었던 자들. 황제.

변화…….

퍼뜩 짚이는 게 있었다.

‘남부 순방.’

이들이 황제의 행차를 보호하는 근위대라면, 허공에서 튀어나오는 황금에도 고개를 내젓고 다짜고짜 나를 죽이는 게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날짜는… 전혀 달라.’

원래는 몇 달 뒤에나 일어날 일.

하지만 모든 힘을 잃고 처음으로 회귀한 것처럼,모종의 사정으로 세계선이 뒤틀렸다고 가정해 보자.

기스-제-라이가 암살하려 한 황제

행차가 가까운 시일에 시작되겠지.

그리고 이곳까지 근위대가 순찰을 돌고 있다면.

무덤에서 일어나고 몇 개월 뒤가 아닌,앞으로 며칠.

어쩌면 내일 행차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날카로운 긴장감이 단숨에 온몸을 조였다.

一 휘이이잉…….

바람이 불었다.

아무 기척을 내지 않은 덕분인지, 병사들은 무덤에 다가오지 않았다.

생각할 시간은 많다.

가능한 경우의 수를 정리했다.

‘크게 세 가지.’

첫 번째.

세계가 완전히 바뀌어서,알던 것과 전혀 다른 역사가 되어 버렸다. 이 경우는 정말 힘들어진다.

두 번째.

세계선의 미묘한 변동.

날씨가 바뀐 것처럼,황제의 남부 행차가 당겨졌다. 행차가 당겨지며 행차 경로와 꽤 떨어진 에라스트 무덤가에까지 순찰하는 녀석들이 나타난 거다.

기스-제-라이는 황제 암살 시간을 맞추지 못하고,조우하는 일 없이 황제는 무사히 통과.

그녀도 무사하겠지.

세 번째는...

다른 건 모두 두 번째와 같지만, 이 세계선에서도 기스-제-라이가 매복을 하고 있다는 가정.

현실적으로 이런 대규모 순방이 엠버나 연합에 전혀 알려지지 않을 확률은 낮다.

같은 암살 의뢰를 받아 매복하고 있으리라는 추측이 자연스럽다.

지금 떠올린 계획이 마무리까지

온전해지는 경우이기도 하고.

‘일단 여기 걸자.’

이 가정이 틀렸다면,그건 다시 일어났을 때 생각해 봐도 되니까.

- 달그락!

결심을 굳히고 관에서 일어났다.

커다란 바위의 여기저기 돌출된 부분을 잡고 위로 기어 을라갔다.

달빛을 받은 내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 파바밧!

익숙한 얼굴의 병사들이 곧바로 달려와 바위를 둘러쌌다.

샤피로가 허리춤에서 짧은 추를 뽑은 뒤 훌쩍 젖혔다.

정확히 머리를 조준한 쇳덩이가 차갑게 빛났다.

나는 일부러 녀석을 더 쳐다보며 소리쳤다.

“너희들은… 황제 폐하의 충실한 종복인가?”

“뭐……?”

칼을 던지려던 녀석이 손을 슬쩍

내렸다.

나는 빠르게 말을 보랬다.

“충성스러워 보이는구나. 너희를 믿으마. 페하께서… 폐하께서 지금 위험에 처하셨다!”

“응? 그게 뭔 소리야!?”

깜짝 놀란 얼굴로 내게 말을 거는 병사를 샤피로가 막아섰다.

“쉿.”

주의 깊은 녀석이었다.

정체를 모르는 상대.

무덤에서 튀어나온 언데드인 이상, 수상하기 그지없겠지.

애초에 적으로 상정되어 있다.

조금이라도 괜한 정보를 주면 안 된다는 눈치였다.

“시급한 일이다! 누군가… 누군가 폐하께 위험을 알려 드려야 한다!”

처절하게 웅변하듯 말했다.

이것마저 통하지 않는다면 정말 힘들어질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절로 온몸의 뼈가 달그락거렸다.

내가 들어도 목소리에 호소력이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남부를 행차하는 경로에,엠버메어와 연합의 의뢰를 받은 사악한 네크로멘서가 매복해 있다! 군단! 거대한 언데드 군단이

지하에서 폐하를 기다린다!”

사실이었다.

적어도 내가 아는 세계에서는.

기스-제-라이를 팔아먹는 기분이 들어 미안했다.

하지만 세계선이 반복되면 그녀는 어차피 곧 죽는다.

암살은,실패해야 한다.

“뭐… 뭐라고?”

“너는… 대체 누군데 그런 정보를 알려 주는 거지?”

놈들이 나를 다그치며 눈을 초통초통 빛냈다. 금화를 볼 때보다도 훨씬 집중하는 눈빛이었다.

더 반응을 떠볼 것도 없었다.

“내 이름은 트로핀 아이작이다. 전전대 에라스트 영주,레이 콜튼 백작의 가신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 황제 폐하의 충실한 종이었지.”

레이 콜튼은 루비아한테 들었던 루비아 조부의 이름이었다.

아버지의 가신이라고 하면 너무 일렀고,한 대 정도는 건너뛰어야 할 것 같아서 조부의 이름을 댔다.

트로핀 아이작은 물론 아무렇게나 만든 이름이다.

황제의 근위대 병사가 수십 년 전 지방 영주의 가신 이름을 알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그때,앞에 있던 샤피로의 얼굴이 순식간에 와락 구겨졌다.

다른 두 명도 마찬가지였다.

초롱초롱하게 내 말을 듣고 있던 눈빛에 의아한 기색이 떠올랐다.

“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지?”

‘이름을 잘못 댄 건가?’

하지만 분명히 아이작이란 이름에 녀석들은 별 반응을 하지 않았다.

같은 시간대의 병사들이 갑자기 역사 지식이 늘었거나, 아이작이란 이름이 희귀한 이름이 되었을 리는 없었다.

밀어붙여야 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되받았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냐?”

샤피로는 잠깐 멈칫했다.

그리고 내렸던 철추를 다시 높이 들고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왔다.

녀석이 주위의 동료들을 돌아보며 말을 꺼냈다.

“이 언데드가 대체 무슨 잠꼬대를 하는 거지? 너희는 혹시 레이 콜튼 백작이라는 자를 아나?”

병사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혀.”

“에라스트는… 4대 전부터 챈들러 가문의 영지였잖아.”

“:랜… 들러 ? 에라… 스트가?” 이런 경우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나는 할 말을 잊고 버벅거렸다.

병사들이 나를 바라보는 표정에 의심이 가득했다. 차가운 눈빛에서 기껏 잡은 대화의 주도권을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잠깐!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 챔들러 가문의 영지는 그라스미어 아닌가? 내가 죽은 사이에 세상이 어떻게 바뀐 거지?”

앞에 선 샤피로가 칼을 겨눴다.

“당연히 첸들러 가문의 영지잖아.

아니……. 우리가 뭐에 홀린 것 같군.

이런 것과 말을 섞을 필요가 없다.

함정일지도 모른다. 죽이자.”

“그래야겠지. 수상한 건 뭐든지 처리하라는 방침이니까.

“아니,내 얘기 좀 들어……!”

병사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현혹되지 않으려는 듯, 그들의 움직임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빨랐다.

- 파앗!

* * ♦

一 띠링!

‘이런 망할 새끼들……

습관적으로 욕이 튀어나왔다.

물론 뿌듯함은 있었다.

먹혔다!

황제 암살을 주제로 삼으면 분명 대화가 먹혀든다.

황제의 남부 순방이 당겨졌고.

나를 죽인 녀석들이 황제 직속의 근위대라는 사실은 명백했다.

역시 이쪽이 옳았다.

‘하지만……

이야기가 갑자기 엉뚱해졌다.

에라스트가 랜들러 가의 영지라니.

상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챈들러 가문은 주술사 아이작에게 착취당해,영주들이 대대로 자신이 어쩔 수 없는 노예에 불과하다는 주제를 강제로 파악한다.

그렇기에 야망이 없고 소탈하게 선정에 힘을 쓰는 자들이었다.

게다가 어차피 아이작이 내리는 마왕 강림의 계시를 꿈에서 보는데, 무의미하게 영지를 넓히는 일 따위

할 리가 없다.

‘모르겠어.’

느낌이 좋지 않았다.

나는 고민 끝에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상황을 조합하면 그게 가장 그럴듯했다. 하지만 태연하게 떠올리기는 힘들었다.

'사라… 졌… 어?’

아이작이란 존재가 역사 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다면.

지금까지 일어난 상황은 그럭저럭 맞아떨어진다.

물론 당장 확인할 수는 없었다.

저 병사들은 물어볼 만한 상대가

아니기도 했고,설사 아이작이라는 존재가 없다고 저들이 말하더라도, 내가 직접 그라스미어 지하에 가서 확인해 봐야 하니까.

- 달그락!

여러모로 심경이 복잡했다.

억지로 떨치듯 관 속에서 일어서 바위 위로 올라갔다.

“…첸들러 가문의 가신이었다!”

“…그래서?”

예전과 전혀 반응이 전혀 달랐다.

여기까지 그 어떤 의심의 눈초리도 없었다. 나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첸들러의 가신이기 전에, 황제 폐하의 충실한 종이었다는 건 말할 나위도 없지.”

“으음.”

두 병사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첸들러 가문은 야망이 넘치는 녀석들인데.”

샤피로가 의문을 제기하려는 것을 보고 빠르게 말을 돌렸다.

“강제로 해골로서 무덤에서 일으켜

졌더라도! 생전의 기억이… 제국의 신민으로 살던 삶의 기억이 내겐 남아 있다!”

나는 아이작을 빨리 찾을 생각에 연기에 몰입했다.

내가 들어도 꽤 그럴듯했다.

“군단에서 도망쳐 나와,어떻게든 음모를 알리려 배회하던 중 간신히 너희를 찾은 것이다.”

“으음……

고민하는 기색이 짙었다.

다시 한 번 확신했다.

이들은 황제의 남부 순찰을 위해

배치된 병력이다.

이건 믿지 않더라도 쉽게 넘기기 힘든 이야기였다.

샤피로가 내게 질문을 던졌다.

“좋아,그럼 말해 보라고. 거기가 정확히 어딘데?”

예상한 질문이었다.

나는 녀석을 바라보며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여기서 승부수를 던져야 했다.

암살은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고, 나는 기스-제-라이의 매복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다. 하지만 그냥 가르쳐 줄 수는 없다. 여기서 나를 죽이거나 묶어 놓고 간다면 의미가

사라지니까. 바위 위에서 그들을 바라보며 음울하게 말했다.

“망자의… 기억은 드문드문하다. 넓은 곳… 아래가 깊게 흑 꺼질 수 있는 곳……. 야트막한 숲이 있고… 관망하는 언덕이 있는 곳이다……

슬쩍 말꼬리를 흐렸다. 병사들이 황당하다는 듯 소리쳤다.

“뭐? 그런 데가 어디 한둘이야?”

“우리는 이 근처 지리도 제대로 모르잖아.”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편적인 이미지를 따라가야 한다. 내가… 너희를 안내해야 한다.”

- 꼴깍!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한 명에게서 난 소리가 아니었다.

녀석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머리를 맞대고 숙덕거렸다.

다행히 예상대로의 전개였다.

더 이상 내가 보탤 말은 없었고, 의논은 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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