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5화 시작의 끝 (6)
“…좋아. 그럼 넌 나와 같이 간다. 안내해라.”
샤피로가 손짓을 했다.
하필 이 녀석이라니.
금화에 쉽게 혹하는 질베르였다면 다루기가 훨씬 나을 텐데.
나와 둘이서만 가는 걸로 봐서, 아무래도 동료 두 명은 다른 곳에 보고하러 가는 것 같았다.
- 철컥.
따라오라고 말하려는 순간, 놈이 주머니에서 수갑을 꺼내서 나에게 채웠다.
고작해야 이런 놈에게 후작에게 당한 것처럼 묶이다니.
“불만인가?”
“그럴 리 없지. 나는 황제 폐하의
안전만 확보되면 언제든 무덤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호..w
협조하자.
수갑이 있으나 없으나 도망갈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수갑을 착용해서 상대가 안심하게 만드는 게 나았다.
덜 민감하게 반응할 테니까.
“언데드,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똑바로 안내해라. 네가 준 정보가 옳다면 특별히 사제들에게 말해서 정화해 주마.”
개소리가 무덤가를 진동했다.
하지만 나는 정말 감동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고맙… 다. 꼭 부탁하지.”
동굴까지 길을 안내하며 은근슬쩍
무덤가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루비아와 함께 엎드려 숨은 수풀을 확인하고,네크론 신사회의 수하 두 명을 던져 넣었던 구덩이까지 확인했다.
지형은 그대로였다.
묘하게 달라진 것 같기도 했지만, 단순히 느낌 탓으로 생각될 만큼 미미했다.
“여기다.”
직선거리보다 세 배 정도를 빙빙 돌아 미로에 도착했다.
음침하게 수풀로 가려진 자그마한 입구가 보였다.
“여기를 지나가야 한다.”
“흠……
주위를 살펴보던 병사가 께름칙한 표정을 지었다.
“먼저 들어가지.”
- 달그락!
한두 번 들어가는 게 아니었기에 어렵지 않았다.
“흐읍.”
여기까지 와서 되돌아갈 구실이 서지 않는지 병사도 동굴 입구를
비집고 들어왔다.
이런 놈과 루비아의 추억이 얽힌 동굴에 들어가게 되어 불쾌했지만,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저벅.
동굴 안은 발소리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샤피로는 한동안 말 한 마디 없이 잔뜩 긴장해서 동굴 천장과 바닥, 좌우 벽을 바라보며 걸었다.
화살이라도 튀어나을지 걱정하며
몸을 움츠리는 게 느껴졌다.
우스꽝스럽기도 했지만,아무것도
없다고 친절하게 말해 줄 생각은
물론 조금도 없었다.
친절이란 가는 만큼 오는 법.
녀석이 심력을 빨리 소진한다고 나한테 나쁠 것도 없으니까.
- 툭.
- 툭.
- •특••••••.
녀석은 나뭇가지를 조금씩 끊어 뒤편에 떨어트렸다. 그뿐만 아니라
갈림길마다 칼집으로 벽을 긁어서 길게 표시를 해 놓고 있었다.
“놀랍구려.”
“뭐가?”
“이런 경우를 대비한 훈련까지도 받으신 거요?”
단순한 아첨은 아니었다.
기스-제-라이에게 데려가 죽이면 그럭저럭 괜찮은 첫 정수 홉수가 가능할지도 몰랐다.
나는 잠시 후 먹을 도시락을 손수 배달하고 있는 셈이었다.
“흠……
아첨이 싫지 않은지 녀석이 작은
콧소리를 냈다.
“너도 길을 잘 찾는군.”
“자주 지나가던 길이라 그렇소.”
녀석과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며 동굴을 걸어갔다.
“나도 수도에 간 적이 있는데……
그사이 호감도는 조금씩 올라서 무려 7에 도달했다.
그동안은 미미한 인간들의 호감도 따위는 올릴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는데,이런 처지로 전락하니 샤피로 같은 놈의 호감도마저 제법 소중하게 느껴졌다.
안전한 질문만 주의 깊게 골라
던지면서 두 시간을 걷자 새소리가
들려왔다.
루비아와 함께할 때와 같았다.
“오호… 도착한 건가?”
그리고, 아침 햇살이 비추는 좁은 입구를 먼저 헤치고 나와도,
一 띠링!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C더블 플러스급 미로를 클리어하셨습니다!]
라는 메시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一 치직…….
- 치지직…….
상태창은.
언제나 명쾌한 평소와는 달랐다.
무언가 망가진 것처럼 치직거리고 글자가 비틀거렸다. 글자들 사이의 공백들마저 뿌옇고 흐리게 보였다.
흑백으로 진동하는 글씨와 숫자에 울렁거림마저 느낄 정도였다.
一 치지직…….
[플레이어를 파악 중입니다.]
- 치직! 치지지직……!
[연속성 불완전…….1
[기준점 손상…….]
[데이터가 파손되었습니다.]
[해당되는 ??? 경로를 영구하게 차단합니다.]
[백업 중… 이 데이터를 안전한 위치에 보관합니다.]
[무결성 검사를 시작합니다.]
[수동 복구 작업 위험성 감지.]
[자율 복구 프로세스 시작.]
‘무슨… 소리지?’
점멸하는 흑백의 점.
수많은 망가진 글자 가운데서, 알아볼 수 있는 건 그 정도였다.
기괴하게 출렁거리는 긴 띠들이 허공에 계속해서 지나간 후에야,
- 띠링!
[튜토리얼을 클리어하셨습니다!]
['첫 번째 밤에서 살아남기’ 완료.]
[보상: 시나리오 슬롯 1개 추가]
[현재 슬롯: 2/4]
[동화율이 내려갑니다.]
[54.72% - 54.19%]
[튜토리얼 클리어에 따라 스킬을 무작위로 회복합니다.]
[죽은 척하기 Lv.l]
[종족 특성이 반영됩니다!]
[모든 대상에게 죽은 척이 5배의
효과를 발휘합니다.]
[안眼 계열 스킬이 없는 대상에게 추가로 5배의 효과를 발휘합니다.]
‘…어떻게 된 거지?’
미로를 지나도 레벨이 올라가지 않는 것.
그리고 스킬이 회복되는 현상.
둘은 하나의 결론으로 수럼된다.
‘나를… 알아본다.’
예전과 지금의 나.
둘 사이의 연관성을 이 시스템은 명백하게 인식하고 있다.
연속성이 불완전하다느니.
기준점이 손상되었다느니 하는 건
스킬과 스탯을 전부 빨린 현상을
말하는지도 모른다.
아직 수련은 해 보지 않았지만, 내가 예전 세계선과 연속된다면.
잃어버린 스랫과 스킬들을 빠르게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메시지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一 띠링!
[튜토리얼 클리어에 따라 적절한
특성을 습득합니다.]
[특전: 요망한 거짓말]
[양심이 버리고 간 자리에 기만이 거미 새끼처럼 우수수 쏟아지네요.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나요?]
[거짓말을 성공시킬 확률이 약간 증가합니다.]
[거짓말쟁이는 다른 거짓말쟁이를 쉽게 알아봅니다. 거짓말을 알아챌 확률이 증가합니다.]
생각해 보면.
스킬을 무작위로 회복했다고 하고 있지만,‘죽은 척하기’와 ‘거짓말’
특성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기만이다.
병사들을 속여 살아남은 방식과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
튜토리얼 보상이 이거라면.
다른 퀘스트를 클리어할 때마다 상황에 맞춰 추가로 예전의 스킬이 회복될지도 모른다.
“어이,밖으로 잘 찾아 나왔잖아? 뭘 그리 멍하게 서 있어?”
탁 트인 주변을 살피던 샤피로는 긴장이 제법 풀린 듯했다.
“아무것도 아니오. 갑시다.”
곧 두 갈래의 길이 나타났다.
한쪽은 높고 가파른 산길이고, 다른 쪽은 평탄한 인도였다.
선택할 길은 명확했다.
산길로 가면 짝을 잃고 폭주하는 트롤을 만나게 된다.
정확한 실력을 절 수는 없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샤피로 혼자 설원 트롤을 감당하는 건 무리.
놈이 죽는 건 좋지만 나까지 함께 끝장나면 곤란하다.
게다가 험한 길로 인도하면 괜한 의심을 사게 될지도 모르고.
평탄한 길로 가면 인간들과 만날
확률이 무척 높겠지만,함께하는 녀석이 그 정도는 처리하겠지.
“유블람 쪽으로 가는군?”
넓고 평탄한 길에 접어들자마자, 샤피로가 곧바로 아는 척을 한다.
순찰에 투입된 병력이니 최소한의 지리는 숙지하고 온 것 같다.
“그렇다. 나는 망자……. 살아 있는 인간들과 생기는 문제는 너를 믿고 가겠다……
“홈홈.”
녀석이 엉뚱하게 은근한 뿌듯함을 느끼는 것 같다.
점점 유블람에 가까워졌다.
한두 번 오는 길이 아니었다.
지나가며 높지 않은 잿빛 성벽을 바라보자 궁금해졌다. 저곳은 지금 어떤 도시로 변해 있을까?
예전에는 마약이 거리에 횡행하고 여행자를 죽이는 끔찍한 도시였다.
네크론 신사회와 유착한 경비대와 영주의 합작품이다.
변화가 있다면 솔직히 거기에서 더 나빠지지는 않을 것 같은데.
병사들이 거짓말을 한 게 아니면, 에라스트는 첸들러 가문의 휘하에 있다.
그렇다면 유블람도 분명히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도시 쪽으로 빠지는 길을 슬며시 바라봤다.
루비아가 죽은 곳.
여관에라도 묵자고 하는 건 역시 무리겠지.
‘루비아는 어떻게 사는 거지.’
다시 그녀가 떠올랐다.
에라스트가 챔들러 가문의 도시라면 루비아는 무슨 상황에 놓였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시나리오가 계속 유지된다는 데 희망을 걸고는 있지만.
도시 진입을 포기하고 걸었지만,
근처에서 가 보고 싶은 곳이 또 떠올랐다.
슬라임이 운영하는 보육원.
슬라임은 아직도 인간의 아이들을 돌보며 원장 놀이를 하고 있을까?
녀석이 소속된 무리.
마왕 푸르손을 추종하며,인간이 지배하는 세계를 전복하려는 무리는 그대로일까?
‘또……
레나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
루비아도,레나도.
시나리오 슬롯은 여전히 인식되고 있는데.
궁금한 게 하나둘이 아니다.
“왜? 뭔데?”
샤피로가 나를 홀끗거린다.
“아니,그냥.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했다.”
보육원에라도 들러 자세한 사정을 알아보고 싶지만.
그곳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져서 갑자기 살해당할지 모를 일이다.
떠올리자.
벌써 몇 번이나 죽었는지.
지금은 기스-제-라이와의 만남에 집중해야 할 때다.
던전 입구에 도착한 건 해가 하늘
가운데쯤 왔을 때였다.
“여긴가?”
“근처요.”
“흐음……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
배회하다 보면 그녀가 나오겠지.
아래로 졸졸 냇물이 흐르는 작은 다리를 건넜다. 긴 나무 사다리를 쓰러트려 만든 것까지 비슷했는데, 나무 형태가 예전과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했다.
- 쏴■아아
횐 거품이 터지는 폭포가 보인다.
이곳만 통과하면 텅 비어 있는 〈메마른 지하 묘지〉입구.
“저기인가?”
“아니,그건 아니다.”
그러니까…….
‘이쯤에서 나와야 하는데.’
던전에 들어갈 생각은 없다.
샤피로가 순순히 따라서 들어가 줄지도 의문이고.
그녀가 이 근처에 매복해 있다면 지금쯤 등장해야 했다.
분명히 저번에 등장했던 장소는 지나쳤다.
너무 빨리 왔나?
시간을 끌기 위해 아직 도착하지 않은 척을 했다.
기스-제-라이가 나타나길 바라며 던전 주위를 계속 빙빙 돌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새소리나 벌레 소리마저 없는 적막함에 샤피로도 불안해진 모양이었다.
“너,지금 뭐 하는 거야?”
머리 위에 칼날이 드리워졌다.
“같은 곳을 계속 빙빙 돌고 있군.
대가리 깨지고 싶어?”
험악하게 구는 샤피로의 마음도
이해됐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었다.
왜 기스-제-라이가 아직 나타나지
않는 걸까?
주위를 이렇게 빙빙 돌았는데?
황제 암살을 이번에는 정말 관둔 것일까?
아니면一
수풀 가운데 서서 기스-제-라이와 처음 만났을 때를 떠을렸다.
〈쉬잇. 네 손은 아주 붉구나. 어떤
죄악을 저질렀지? 그런데 또 어찜 이렇게 하얗지? 되는대로 살아서 너 같은 아이가 될 수는 없는걸.〉
그리고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 힘도 없는 나.
모든 스탯이 1에 불과한 1레벨 해골병사인 나는一
이 기괴한 네크로멘서의 호기심을 전혀 자극하지 못한다.
게다가〈네크로멘서의 연인〉같은 특전도 사라진 상태니까.
‘젠장……!’
“마지막이다. 해명해라.”
샤피로가 칼을 고쳐 잡았다.
나는 녀석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주위를 향해 터트리듯 크게 소리쳤다.
“네크로멘서 기스-제-라이! 나는 미래의 당신이 보내서 여기 왔소! 포기하지 말고 린트부름의 태양과 평행하는 꿈을 걸으시오!”
그 순간이었다.
뒤에 있던 병사가 외마디 고함을 입 밖으로 채 내지르기도 전,
“끅… 끄륵……
그의 목 가운데 하얀 뼈 손가락이 박혔다.
구멍을 냈다고 할 수도 없었는데, 목을 삐 손가락이 완전히 관통해서 막아 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잔혹한 살해를 저지른 손가락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나타난 존재를 마주 보려고 했을 때,
“기스……
“쉿.”
손이 목을 잡아서 몸을 땅속으로 끌고 들어갔다.
저항할 마음도 들지 않는 세심한 손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