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화 잃어버린 세계 (1)
[시야 감소가 조정됩니다.]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가 시야가 차츰 또렷해졌다.
익숙한 동굴이었다.
기스-제-라이가 매복한 장소.
- 또
머리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고개는 움직여지지 않았다.
- 똑. 똑.
정수리를 때리는 물방울 소리가 조금씩 점점 커졌다.
- 똑… 똑… 투캉!
한참을 기다려도 기스-제-라이는 말을 걸어오지 않았다.
예전처럼 다른 해골들과 싸우게 되나 싶었지만,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설령 싸움을 붙인다고 해도, 강한 모습 따위는 전혀 못 보여 주겠지.
‘아직 관찰 중인가……
- 똑
굵고 차가운 물방울이 두개골에 떨어졌다.
나는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할 수 있는 건 그것뿐.
미로 동굴 밖으로 나을 때 스킬이 회복된 일을 되새겼다.
잃어버린 힘을 그렇게 되찾을 수
있다면.
어쩌면 명상만으로도
그때 였다.
- 스륵.
허공에 몸이 떠올랐다.
기다란 뼈 하나가 척추에 꽂힌 채 몸을 위로 을리고 있었다.
둥실 떠오른 몸이 유독 가볍다고 느껴졌다.
곧 이유를 알아차렸다.
분리되어 바닥에 차분히 개어진
팔다리가 보였다.
내 것이던 뼈들이다.
a ,,
저번과 전혀 다른 전개.
- 좌르륵!
척추에 꽂힌 새하얀 뼈가 몸통을 몇 차례 좌우로 휘둘렀다.
- 달그락! 달그락!
당장이라도 당신을 살려 주기 위해
왔다고 말하고 싶었지만,말이 아예 나오지 않았다.
[턱뼈를 분실했습니다.]
아래턱이 사라져 있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달았다.
턱뼈가 그대로라도 어차피 말을 할 수 없으리라는 기분마저 든다.
- 달,•…".
곧 작은 움직임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쉿.”
낮은 목소리가,더 낮은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낮은 목소리가 머리에서 울려 퍼졌다.
작은 숟가락으로 머리를 안쪽에서 긁어내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다만 목소리는 전처럼 연극적이지 않았다.
연출도 장난기도 없었다.
“진짜 공포는 죽음에서 오지도, 고통이나 절망에서 오지도 않아. 공포는 항상 미지에서 시작해.”
나를 허공에 띄운 기스-제-라이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 미약한 존재는 뭘까. 도대체 무엇이기에 가장 깊은 곳에 숨긴 욕망을 말하는 걸까. 오래간만에 두려워졌어.”
네크로멘서는 새하얀 뼈 촉수를 몸 위에 얹었다.
인간의 피부로 덮여 있는 부위를 단단한 촉수가 쓰다듬었다.
“아,소름 돋았잖아. 여기 봐.”
힘도 주지 않았는데 목이 저절로 돌아갔다.
나는 팔다리가 모두 분해된 채로 기스-제-라이와 정면에서 시선을 마주쳤다.
‘똑같군.’
당연할지 모르지만,그녀의 모습은 예전과 같았다.
기괴한 반인반골의 모습 그대로.
황금비로 조형된 몸,그 주위에 빙 둘러 솟아 있는 삐 촉수들까지 여전했다.
- 스륵.
그녀는 천천히 뼈로 된 한 손을 들고,살이 덮인 다른 손을 들어서 나에게 얹었다.
一 띠링!
[강력한 사령술에 접촉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레벨이 올랐습니다!]
‘왜……? 이렇게… 많이?’
한 번에 레벨이 열 단계나 올라가 버렸다.
예전과 비슷한 현상.
양손을 모두 얹는 걸 그녀와의 접촉으로 인식한다.
두 번째 접촉부터는 스랫이 전혀 오르지 않았는데.
이상했다.
‘미로가 끝날 때도 그러더니……
비역에서 나타난 존재들에게 힘을 흡수당하면서,세계가 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는 느낌이 든다.
‘뭔가 비틀려 있어.’
위험한 틈새에 끼어 있는 감각.
어쩌면 힘을 회복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좋게 생각하자.’
그렇다고 한 번에 무려 열 단계나
오르는 건 놀라웠지만.
떠오르는 메시지를 보고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특전 ‘파멸의 숫자’가 적용됩니다.]
[포인트를 분배해 주십시오: 60]
게다가 60이라는 폭발적인 증가.
‘전직 해제 특전이었나.’
[전직 해제 특전: 파멸의 숫자]
[경험치가 666%로 적용됩니다.]
[레벨이 상승할 때마다 분배할 수 있는 능력치가 6씩 증가합니다.]
[검술 스킬의 경험치가 여섯 배 빠르게 증가합니다.]
[전투 및 비전투 스킬의 경험치가 여섯 배 빠르게 증가합니다.]
레벨 업 때마다 모든 스랫 증가가 여섯 배라는 상상 이상의 혜택을 받아 버린 것이다.
당장 마법을 쓸 일은 없다.
지혜는 캐빈 애슈턴의 책으로도 얼마든지 올릴 수 있겠지.
체력과 힘,민첩에 포인트를 나눠 분배했다.
[체력: 21]
[힘: 21]
[민첩: 21]
[지혜: 1]
[팔다리가 분리된 상태입니다.]
[움직일 수 없습니다.]
이 스탯이면
20년을 구르고 무덤에서 루비아를 만났을 때 정도는 된다.
안타깝게도,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어라?”
정작 손을 댄 그녀조차 깜짝 놀라 나를 이리저리 살펴봤다.
예상외의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인식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EX 급 시나리오 ‘기스-제-라이 살리기’를 시작합니다.〉
‘…드디어!’
전에는 조건을 충족하지 않았다며 열리지 않았는데.
허공에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현재 슬롯: 3/4]
[‘어둠 속의 조력자’가…….]
[‘레이 루비아’가…….1
[‘기스一제-라이 살리기’를 진행
중입니다.(new!)]
그런데 왜 갑자기 열렸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마 튜토리얼을 클리어한 다음, 슬롯을 얻었기 때문일 거다.
동화율 문제일지도 모르고.
어쨌거나.
기스-제-라이 살리기라니.
영주 만들기도,지부장 만들기도 아닌 살리기라.
기분이 묘했다.
‘무조건 암살은 막아야 하고……
마지막 줄에서 반짝거리는 그녀의 이름을 바라보자,새롭게 상태창이 떠올랐다.
[이름: 기스-제-라이]
[사령술사 Lv.??]
[??? Lv.??]
[?? ??? Lv.??]
[??? ?? Lv.??]
[체력 ?? 힘 ?? 민첩 ?? 지혜 ??]
[호감도: ??]
흑백으로 지직거리는 물음표뿐.
스랫,스킬,심지어 호감도마저도 모두 알 수 없었다.
칭호나 특전은 아예 등장하지도 않았다.
‘호감도라도 알려 주지.’
언젠가 기스-제-라이 시나리오가 시작될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EX급 시나리오라.
레나와 루비아 시나리오를 접하며 경험하기로,앞에 표시되는 문자는 난이도를 뜻할 확률이 높았다.
말만 잘 들으면 혼자서도 가볍게 시나리오를 끝내는 레나와, 끝없이 살해 위협이 산재해 있던 루비아를 생각해 보면 얼추 맞을 거다.
그렇다면,기스-제-라이 살리기는 대체 얼마나 어렵다는 거지?
‘o으..*
하긴,처음 만남부터 잿빛 기사가 상대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납득은 간다.
물론 나야 잿빛 기사와 맞서 싸울 생각은 조금도 없고, 황제 암살을 어떻게든 포기시킬 거지만.
‘포기… 시킬 수 있겠지?’
설마 무조건 황제 암살을 한다고 끝끝내 우기는 건 아니겠지.
그녀가 제정신… 이라면.
- 우둑. 우두둑…….
희미한 불안감을 느끼는 사이에도 기스-제-라이의 하얀 촉수는 나를 샅샅이 휘감았다.
뼈로 만들어진 촉수가 거미줄처럼 뻣속과 척추에 침입하여 세밀하게 드나들었다.
일정한 간격으로 휘감으며 불길한 붉은 기운마저 번뜩이던 촉수들이 힘을 빼고 다시 내려갔다.
“의식이 있을 때도 읽어 낼 수가 없다니… 기사 오웨인.”
그녀가 입에서 귓볼까지 연결된 깊은 세 가닥 선을 당황스러운 듯 꿈틀거렸다.
- 스숙.
호명과 동시에 거대한 듀라한이 뒤에서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일단 얘 좀 맡아 봐.”
“훈련이나… 그런 건 안 시켜도 괜찮아. 그냥 데리고 있어.”
“명을 받든다.”
“아,잠깐만.”
- 꾸드끋
그녀가 바닥에 놓인 뼈를 나에게 다시 이이 주었다.
말도 한 마디 듣지 않고 갑자기 다른 녀석에게 맡겨 버리다니.
‘기스-제-라이!’
- 달그락!
물론 턱뼈가 붙어도 말은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나를 외면했다.
거대한 듀라한은 눈길 한 번 없이 나를 옆구리에 끼고 들고 갔다.
팔다리가 붙었지만,반항할 수는 없었다.
견고한 오웨인.
기억에 남는 녀석이었다.
머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신장이 2미터에 가까웠다.
넓고 두꺼운 등은 성벽 같았다.
그는 한 손으로는 나를 들고 다른 손으로는 구불구불 무늬가 새겨진 커다란 검을 어깨에 멨다.
두께와 크기로 보아 웬만한 자는 끙끙거리며 치켜드는 게 한계일 것 같았다.
약해진 탓인지,예전에는 몰랐던
녀석의 존재감이 엄청나게 느껴졌다.
‘어이,오웨인. 반갑다고.’
물론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는 기스-제-라이와 헤어진 뒤 동굴 한쪽으로 걸어가 앉았다.
- 달그락!
살짝 움직이려 했지만,오웨인은 내 버둥거림을 완전히 무시하고, 옆구리에 낀 채 가만히 있었다.
철벽을 미는 반동만 느껴졌다.
- 우우웅……!
목에서 뿜어지는 새까만 기운을 조용히 갈무리하고 있었다. 듀라한 나름의 수련법 같기도 했다.
‘너도 죽는다니까.’
말할 수도 없지만 말해도 소용은 없을 듯하다.
살아서는 이름을 떨치던 용맹한 전사들.
하지만 지금 남은 건 옛 명예와 싸울 기회를 주는 주군뿐이다.
죽음을 두려워할 리는 없었다.
그때 였다.
두꺼운 검신에 오목하게 네 곳이
들어간 무기를 들고,목구멍에서
올라온 검은 기운이 사방으로 삐죽
삐죽 솟은 누군가가 나타났다.
“여어,오웨인. 이 자식은 뭐냐? 새로 배속된 부하?”
오웨인은 말이 없었다.
나는 새로 나타난 녀석이 누군지 곧장 알아차렸다.
‘듀라한 길라우트……
이곳은 기스-제-라이의 지하 기지. 그녀와 가까운 곳에 듀라한들이 머무르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여유롭게 지내는 걸 보면 암살이 당장 내일은 아니겠지.
다행히 최소한의 시간은 남았다는 의미다.
“내가 좀 데리고 놀아도 돼?”
건방진 소리를 하고 있지만, 사실 눈앞의 길라우트는,암살 당시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황실 근위단장 정도의 실력.
‘이사벨이 살짝 윗급이었나?’
듀라한 두엇이 달라붙으면서 금방 제압되는 바람에 확실하진 않지만.
검주급에는 전혀 미치지 못한다.
그 정도의 녀석에게 이런 소리나 듣고 있다니.
‘내가 레벨만 좀 을라가면……
전직 해제 특전,파멸의 숫자가 제대로 발휘되기 시작하는 순간을 상상했지만.
일단 현실을 받아들이자.
검기는커녕 검술 레벨 1도 없는 참혹한 현실을.
“안 된다. 주군이 맡으라고 했다.”
오웨인이 완강히 거절했다.
“흠… 진짜? 민감하게 구네? 사실 네 새로운 애인 아니고?”
- 부우웅!
길라우트는 손끝으로 무기를 빙빙 돌리다 말을 멈췄다.
철퇴를 검 모양으로 제련한 듯한 육중한 무기가 동굴에 강한 바람을 일으켰다.
“•••헛소리.”
두 듀라한의 그림자가 양쪽에서 기괴하게 일렁거렸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기스-제-라이가 도대체 언제까지 이곳에 날 놓아둘지 궁금했다.
오웨인은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호기심 어린 눈길로 계속 내 쪽을 살펴보는 길라우트는 말이 통할지 몰랐다.
- 달그락.
오웨인의 두꺼운 팔뚝에서 슬쩍 빠져나왔다.
목에서 뿜어지는 검은 그림자가 나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안 도망친다고.’
녀석이 나를 못 움직이게 잡지는 않았지만, 조금이라도 수상한 일을 하면 제지하겠지.
나는 바닥에서 단단하고 날카로운
돌멩이를 하나 집이 들었다.
“어? 그거 들고 싸워 보게? 이거
재밌는 녀석이네.”
“•••으음.”
오웨인이 슬쩍 고개를 돌렸지만 큰 신경은 안 쓰는 것 같았다.
‘인벤토리.’
- 우우우웅……!
허공이 작게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