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7화 잃어버린 세계 (2)
인벤토리의 가치.
듀라한들 정도라면 알아볼 수는 있겠지.
아니면 뭐…….
최소한 놀라기라도 해라.
- 스윽!
잡은 돌맹이를 듀라한 길라우트가 정면에서 보게 한 다음,허공으로
천천히 집어넣었다.
“오오오!”
길라우트는 물론.
- 끼기긱.
곁눈질로 보던 오웨인의 목까지 이쪽으로 돌아왔다.
- 부응! 부응!
길라우트가 인벤토리 뒤로 다가가 마구 무기를 휘저어 봤지만,당연히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그저 허공만 덧없이 스쳐 갈 뿐.
- 부우우웅!
길라우트가 위아래로 주변을 마구 훑고 나서,부담스럽게 내 등짝을 후려치며 감탄했다.
“마술이다! 마술! 주군이 마술사를 데려온 거야!”
- 띠링!
[듀라한 길라우트의 호감도가 8
올랐습니다.]
[듀라한 오웨인의 호감도가 2 올랐
습니다.]
이 녀석까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지켜봤지만, 신기했던 모양이다.
“또 할 수 있어?”
- 달그락.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녀석에게 손을 내밀었다.
넣을 걸 내놓으라는 뜻이다.
* * *
- 띠링!
[듀라한 길라우트의 호감도가 2 올랐습니다.]
[듀라한 길라우트의 호감도가 20에 도달했습니다.]
그 이상은 변동이 없었다.
‘안 을라가나.’
레이 루비아를 처음 살렸을 때도 호감도는 20에서 멈췄다.
별일이 없다면,호감도 상한선은 정해져 있다.
게다가 오웨인의 호감도는 7까지 올라간 상태에서 인벤토리 마술을 반복해도 변동이 없었다.
주군에 대한 충성이라는 건가.
반복해도 호감도가 안 올라가니 별로 할 맛이 나지 않는다.
동작을 멈추자 길라우트는 대놓고 아쉬워했다.
“•••벌써 그만이야?”
그때 였다.
- 스스스스.
“재미 좋은 모양이군.”
머리 없는 세 명의 기사가 어두운 동굴 저편에서 등장했다.
잘린 목에서 쁨는 기운의 형상은 달랐지만 깊은 밤처럼 까맣다는 건 비슷했다.
‘팬리르… 하멜라인… 안드레이.’
기스-제-라이의 다섯 듀라한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갑자기 뭐야?”
“주군의 호출이다.”
“주군이?”
- 터벅. 터벅. 터벅…….
한 걸음마다 진한 여운을 만드는 발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녀다.’
발걸음 소리로 마음을 진탕시키는 존재는 여기서 하나밖에 없었다.
듀라한들이 공간을 만들었다.
그 사이로 기스-제-라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으로 옮겨지기 전 봤는데도, 다시 마주하니 그녀에게서 풍기는 음산한 위엄과 압도적인 존재감에 전율이 일어날 정도였다.
그리고 이건…….
단순히 느낌만이 아니었다.
[특성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카리스마 B플러스: 시체군단의 지배자]
- 범위 내 아군에 대한 통솔력이 크게 상승합니다.
- 범위 내 적의 사기가 매우 크게 떨어집니다.
- 언데드가 대상일 경우 위력이 300% 증가합니다.
저번에 못 본 메시지다.
기스-저卜라이가 달라진 것 같지는 않았다.
충분히 그녀가 가지고 있을 만한 특성이니까.
달라진 건…….
아마 내 쪽이겠지.
한참 하락한 동화율?
아니면 시나리오 시작?
‘원인이 될 만한 건 많지.’
내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리가 없겠지만.
어쩐지 마음속을 꿰뚫는 것 같은 눈빛으로 그녀가 나를 바라봤다.
“좋아. 기억 추출은 끝났다.”
마음이 얼어붙을 것 같은 차가운 목소리였다.
괜히 겁먹지 말자.
나는 그녀를 살리러 왔다.
끝까지 믿지 않을 경우,생각해 둔 방법도 있고.
“기억… 추출……r
기스-제-라이가 마법을 풀었는지, 입에서 말이 자연스레 튀어나왔다.
“너와 함께 온 인간을 고문해서 기억을 빼냈지.”
‘대단하네.’
분명히 손가락으로 목을 시원하게 뚫었던 거 같은데.
강제로 생명을 붙였는지,아니면 죽인 다음 노예로 만들어 기억을 털어놓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그녀답다.
옆에 안 데리고 온 걸 봐서 이미 폐기했을지도 모른다.
다른 뼈 무더기들 사이에 부하로 깊숙이 박아 놨거나.
그녀가 말을 이었다.
“대단하던데? 그 근위대 동료들이 매복 위치를 본대에 보고했다더군. 이러면 철수할 수밖에 없잖아.”
그 순간이었다.
一 띠링!
[다음 시나리오가 갱신되었습니다: 기스一제-라이 살리기(new!)]
[‘넘어설 수 없는 죽음’의 인과가 시나리오 갱신으로 소멸됩니다.]
[‘피로 물든 기계도시’의 인과가 최초로 생겨납니다.]
[마왕 바싸고가 당신이 계약자를 살려 준 일에 감사합니다.]
- 상대의 탐욕,질투,성욕을 훨씬 민감하게 읽어 낼 수 있습니다.
- 악어류 몬스터의 당신에 대한 호감도가 5 증가합니다.
메시지가 계속 떠올랐다.
[정보가 진실이라면, 암살교단은
당신에게 감사할 것입니다.]
[레드 플레이크의 호감도가 쉽게 올라갑니다.]
[연계 퀘스트: ???]
고작 말 한 마디 한 것뿐인데.
이런 결과라니.
넘어설 수 없는 죽음이라는 건 잿빛 기사를 말하는 것일 확률이 높다.
하지만,‘피로 물든 기계도시’가 뭘 말하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기스-제-라이가… 마왕 바싸고의 계약자였어?’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다.
〈숨겨진 것의 발견자.〉
〈죽은 자들의 군주.〉
그런 이명異名이,저13좌의 마왕 바싸고에게 붙어 있으니까.
‘연계 퀘스트는 또 뭔지……
처음 접하는 상황이었다.
당장 의문을 풀 방법은 없다.
어쨌거나.
‘암살 훼방은 성공.’
철수한다는 생각도 아주 바람직한 방향이다.
하지만.
기스-제-라이의 동공에서 어두운 불꽃이 이글거렸다.
“우리의 완벽한 계획을 망친 너를 어떤 식으로 괴롭힐지 생각 중이다. 이 앙큼한 예언자 꼬마……
“그… 만!”
나는 서둘러 그녀의 말을 끊었다.
뒤의 레퍼토리는 분명하다.
직관의 광기니 예언자니 하면서 나를 해부하고,더 해부하고,계속 끌고 다니면서 연구하려고 들겠지.
하지만 솔직히 여유가 없다.
당장의 죽음은 유예라도.
언제가 될지 모를 그날까지 마냥 끌려다니기에는.
‘알아야 할 게 많아.’
아이작이 어떻게 됐는지, 루비아, 레나,나냐우가 어떻게 됐는지를 알아내야 한다.
무리하더라도 속전속결이 답.
“기스-제-라이! 오웨인,길라우트, 하멜라인,펜리르, 안드레이! 나는
예언자 따위가 아니다!”
이름이 불린 듀라한들이 멈칫하며 나를 바라봤다.
“나 때문에 준비한 황제 암살을 망쳤다고? 축하한다.”
“뭐야?”
“이건,성공하면 절대로 안 되는 암살이 니까!”
- 우우우…….
검은 기운이 몸 주위를 뒤덮었다.
분위기가 험악해졌지만,이 정도는 가볍게 이겨낼 수 있다.
손을 뻗어 어딘지 모를 아래쪽을 가리켰다.
방향은 솔직히 감도 안 잡혔지만, 상관없었다.
‘대충 맞겠지.’
“저 아래 있는 네 군단병은! 무려 수십 일을 고생하며 함정을 팠다. 몇 날 며칠을 저 아래에서 황제가 오기만 기다렸겠지. 네가 아끼는 소중한 병사들일 터다.”
“네가 뭘 안다고……
기스-제-라이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정말 입을 막으려 했다면
당장이라도 권능을 발동했겠지.
듀라한들을 데리고 이곳에 온 건 내 말을 들어 보려 했기 때문이다.
그만큼,‘린트부름’이라는 단어가 커다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일 테고.
“그런 그들을 모두 희생시키는 게 황제 암살 작전이다!”
뼈 촉수가 우두두둑,하는 소리와 함께 서로를 꼬며 요동쳤다.
그 육중한 소리 사이로 효과음이 들려왔다.
- 띠링!
[기스-제-라이의 호감도가 6 올랐 습니다.]
“제대로 말해 보렴.”
하지만 상숭하는 호감도와 별개로 당장이라도 나를 으쩔 듯 조이는 촉수는 더 많고 강해졌다.
하얀 뼈 위에 살벌한 붉은 기운이 도는 촉수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 제대로 말하길 원한다면 힘 좀 풀라고 하고 싶었지만,전혀 그럴 기색은 아니었다.
“지금 황실 근위대 따위에 내가 진다는 농담을 하는 거니?”
“크하하하하!”
“하하… 하하하..
“파악한 근위대 정도로는 주군이 나설 필요도 없지.”
듀라한들이 잘린 목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아쥬라의 마법사를 포함한 황실 근위대도! 너희도! 생존자 0명! 모조리 다 죽어 버린다는 말이다.”
“웬… 미친… 소리야?”
한쪽에 팔짱을 끼고 선 듀라한이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레드 플레이크,별빛청여우, 잿빛 기사와 기스-제-라이가 직접
말한 린트부름에 대한 것까지 모두 차근차근 털어놓았다.
[기스-제-라이의 호감도가 6 올랐 습니다.]
[듀라한 하멜라인의 호감도가 3 올랐습니다.]
[듀라한 안드레이의 호감도가 1 올랐습니다.]
말을 이어 나갈수록 호감도 상승 메시지가 계속 떠올랐다.
기스-제-라이의 호감도 을리기는 상당히 쉬운 일 같았다.
아니면 내 이야기가 전부 그녀를 무척 자극하는 것들일지도 몰랐다.
다른 듀라한들의 호감도가 오르는 현상은 꽤 당황스러웠다.
그들은 연신 침음과 감탄사를 내뱉으며, 목에서 뿜어지는 새까만 그림자를 늘리다 움츠렸다.
깊은 한숨을 토하기도 했고 때로 박수를 치기도 했다.
잿빛 기사가 나타나는 부분에서는 자신들의 무기를 꽉 쥐며 홍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와 비슷한 성향의 부하들만 잔뜩 데리고 있는 건가.
암살 대가로 약속받은 영웅들의 묘역까지 언급하자 결국 삐 촉수들 에서 붉은 기운이 모두 사라졌다.
“으음……
“어떻게 그런 일이……
이미 내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건 확신한 것 같았다.
네크로멘서는 이야기를 듣는 내내 길게 침묵하다 짧게 물었다.
“…증거는?”
“주군,이자가 한 이야기는 전부 사실이지 않은가?”
“린트부름에 대한 것도 알고.”
옆에 선 듀라한들이 한 마디씩을 얹었다.
‘살짝 서운한데.’
기스-제-라이는 이 단어를 오로지 내게만 말해 준 것처럼 굴었지만, 최소한 다섯 듀라한은 전부 알고 있었다는 건가.
하긴, 내가 아무리 호감도 특전을 받았다고 해도.
오랫동안 동고동락한 듀라한들을 뛰어넘는다는 건 무리였겠지.
“좋아… 한번 믿어 보지.”
그 순간이었다.
一 띠링!
[놀라운 거짓말에 성공했습니다!]
[당신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재능이 탁월하시네요!]
[특전: 요망한 거짓말의 경험치가 크게 올라갔습니다.]
[칭호: 이야기꾼을 획득합니다.]
[모든 스탯이 3 올라갑니다.]
[진실이든 거짓이든 당신의 말을 남들이 좀 더 잘 믿게 됩니다.]
‘거짓… 말… 이라고?’
황당했다.
내가 뱉은 말 가운데서 거짓말은 단 한 마디도 없었다.
과장도 없었다.
- 달그락.
그 순간 스쳐 지나가는 기시감에 주먹을 움켜쥐었다.
‘오류다.’
힘이 흡수된 이후 반복되고 있는 현상들.
튜토리얼 클리어. 기스-제-라이와의 만남. 스킬 회복까지.
시스템의 나에 대한 인식은 분명 교차되고, 뒤틀려 있다.
‘내 과거를… 세계가 모른다.’ 최소한.
제대로는 알지 못한다. 이걸 파고들어야 한다.
'어떤 효과가 될지는 모르지만.’ 좋다.
내 과거를 세계가〈거짓말〉이라고 인식한다면.
‘그 거짓말,얼마든지 해 주지.’
추가 스탯까지 제공하는데 망설일 이유는 없다.
나는 다음 이야기를 준비했다.
“…두 번째.”
“뭐라고?”
“암살을 하지 말아야 할 두 번째 이유가 있다.”
이건 도박이다.
반쯤은 거짓이다.
하지만 과장 하나 없는 진실조차 이 세계가 거짓으로 치부한다면.
망설일 이유는 없다.
“기스-제-라이,당신은… 암살의 보상을 받을 수 없다.”
잿빛 기사에게 모두 살해당한다는 근거는 내 말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물증까지 있다.
일단 믿는다고는 했지만.
더 확실하게 가자.
나중에 조금씩 말하는 것보다는, 분위기가 잡혔을 때 전부 털어놓고 가는 게 좋겠지.
“…계속해 봐.”
예상대로다.
혹시 마음이 변하기 전에 빠르게 말을 이었다.
“혹요석 언덕 공원.”
기스-제-라이가 흠칫 놀랐다.
“쐐기돌 기념 공원.”
“그것까지 내가 말했어?”
물론이다.
예전에는 호감도 특전까지 가진 상태였으니까.
“당신,그 영웅 묘역들의 내부는 확인하고 임무에 착수하는 건가?”
“무슨 소리… 너, 설마?”
내가 이 네크로멘서를 지금까지 한두 번 만난 것도 아니고.
금방 알 수 있었다.
역시 짚이는 게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 그 안에 있는 건 당신이 원하는 영웅들의 시체가 아니야!”
준비한 두 번째 이야기였다.
거짓말은 아니지만,추측.
‘꽤 오래 생각했지.’
암살 실패를 믿어 주지 않을 때를 대비해 준비한 수다.
물증이라면 이쪽이 풍부하고.
“뭔데? 뭔데?”
길라우트가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그림자를 꿈틀거린다.
듀라한들의 호감도는 대부분 10이
훌쩍 넘어간 상태.
더 깊은 이야기를 시작하자.
“나는 너희의 실패한 황제 암살만 목격한 게 아니다. 황실 비역에도 내려갔다 왔지.”
“너처럼 약한 녀석이?”
“말도 안 되는 소리!”
“주군이 가만히 있는데 왜 다들 중간에 끼어드나.”
네크로멘서가 조용히 물었다.
“중거는?”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기스-제-라이.”
언제 그녀의 변덕이 발동해 내가 여기서 허무하게 죽을지 모르지만.
“당신에게 약속받고 싶다.”
“•••말해 보렴.”
“내가 앞으로 보여 주는 물건들을 빼앗지 않겠다고 약속해라.”
“보여 주는… 물건……?”
“아! 주군에게는 안 보여 줬었나? 이 친구 마술사야! 마술사!”
길라우트가 끼어들었다.
기스-제-라이는 잔뜩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안 빼앗을게. 해 봐.”
‘인벤토리.’
- 우우우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