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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326화 (326/458)

349화 잃어버린 세계 (4)

직접 움직이며 알아보고 싶지만, 지금의 힘으로는 무리다.

조용히 그녀 옆에서 힘을 쌓는 게 최선이겠지.

“네 말대로 세계선이 변동했지만, 혹시라도 흔적이 남았을지 모른다. 알고 싶은 걸 전부 적어 봐.”

세심한 배려였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에라스트의 상황,루비아, 레나, 유블람 근처의 보육원부터 시작해

아이작과 ‘트로핀 여단’의 근황까지 모조리 적어 냈다.

트로핀 라즐로라는 남자에 대한 정보까지도.

혹시나 실마리가 될 만한 건 전부 알아보자.

가까운 곳은 직접 가서 확인하고 싶었지만,근위대에 매복 위치를 알려 준 상황에 그건 무리겠고.

“좋아. 이건 달리아크에서 알아봐 주도록 하지.”

달리아크?

고위 정보상과 암살자들의 임시 평화지대.

그곳은 역시 그대로인 건가.

“〈꺼지지 않는 등불〉달리아크를 말하는 건가?”

“맞아. 레드 플레이크에서 그곳을 관리하고 있거든.”

레드 플레이크라.

“그렇다면… 혹시……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직 정체를 밝히지 못했던 장막 뒤의 남자.

“정보 경매상이 레드 플레이크의 일원이오?”

“…큭큭.”

기스-제-라이는 나를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보며 낮게 웃었다.

“글쎄다.”

그녀의 말투에서 짐작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역시 그랬던 건가.’

레드 플레이크.

베일에 싸인 암살 교단이지만, 이걸로 내가 아는 녀석들의 수는 눈앞의 네크로멘서를 제외하고도 총 셋이었다.

늑대인간 루멘 발도프.

풍뎅이를 타는 엘윈 에사우.

이름 모를 경매장 뒤의 남자.

나는 질문을 이어 갔다.

“그 경매상은 내가 캐빈 애슈턴의 정보를 요구했을 때 단번에 잘라 거절했지. 혹시 레드 플레이크와 캐빈 애슈턴의 관계는……

“그건 더 친해져야지.”

네크로멘서가 말을 끊었다.

“친해… 지자고? 우린 충분히……

말이 멈췄다.

나 혼자만 친하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회귀를 거듭하며.

어쩌면 정수 홉수를 사용할 때마다 기스-제-라이와 조금씩 친해지는

기분이었지만,그건 내 일방적인 감정에 불과했다.

기스-제-라이의 입장에서는 처음 보는 기괴한 해골병사일 뿐이다.

잠시간 말을 잇지 못하자,그녀가 낄낄대며 웃었다.

“나 말고. 나는 레드 플레이크의 손님일 뿐이야. 레드 플레이크의 정식 단원은 언제나 일곱 명이고, 나는 거기에 끼지 않아.”

“게다가 단원이 갖고 있는 정보가 꼭 공유되는 건 아니거든. 내 말은, 달리아크의 경매상과 친해지라는 소리였어.”

“알겠소.”

하지만 어떻게 친해지지?

인벤토리에 있는 캐빈 애슈턴의 책들을 떠올렸다.

‘그거라도 갖다줄까.’

아이작에게 말한 것처럼 상태창이 보인다고 고백해야 하나.

너무 많은 걸 말하는 건지도.

어떤 녀석인지도 모르는데.

“세 번째.”

기스-제-라이의 차가운 목소리가 잡념을 끊어 냈다.

“암살 의뢰자들을 조사해야겠다.

영웅 묘역에 시체가 있는지 직접 확인하겠어. 그자들이 정말 나를 속인 거라면……

- 쿠구구궁!

붉은 기류가 동굴에 휘몰아쳤다.

“대가를 치러야겠지.”

“왜,꺼림칙한 부분이라도 있어?”

“아니오……

사실 내가 넘겨짚은 거니 그렇게 흥분하지 말라고 말하면,절대로 좋은 반응은 안 나오겠지.

나는 빠르게 말을 돌렸다.

“한데,이제 어딜 갈 생각이오?”

근위대가 언제 올지 모른다.

빠르게 이동하는 게 정답.

“당연히 엠버로 가야지. 거기서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볼 거다. 레드 플레이크 전체가 이 보복에 참여해야 하기도 하고.”

반 정도는 예상하던 대답이다.

중립도시 엠버메어.

‘드디어 그곳에 가게 되나?’

나는 루비아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전 사실 엠버 (Ember) 에 가 보고 싶었어요. 갑옷을 사고 나면,같이 거기로 가 보지 않을래요?〉

‘같이 가면 좋을 텐데.’

하지만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해골에겐 국가가 없으니 그곳이 어울릴지도 모르겠어요.〉

혼자서 가 보긴 했다.

마왕군의 일원으로.

멸망 이후였기^,실제로 그곳이

어떤 도시인지는 전혀 모른다. 무정부주의자들의 도시.

수천 개의 자치령이라 했던가. 루비아에게도 그녀만의 자치령을

만들어 주고 싶었는데.

‘결국 못 해 주고, 먼저 가는군.’

나를 무덤에서 깨운 사령술사의 쾌활한 미소를 떠을리다가, 눈앞에 서 있는 기스-제-라이를 의식하고 질문을 던졌다.

“엠버까지는 어떻게 갈 셈이오? 아니… 애초에 군단을 다 데리고 이곳까지는 어떻게 온 거요?”

묻고 보니 정말 궁금했다.

이만한 군단이 움직이는 모습을 누가 못 볼 리도 없으니까.

내 물음에 네크로멘서는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상인 연합에 운송을 의뢰했지. 차곡차곡 쌓아서 여기까지 뼈들을 보내 달라고.”

의아해서 물었다.

“상인 연합이… 언데드 군단까지 거래 상대로 친다는 말이오?”

하지만 뱉고 보니 우스운 소리.

그 상인들은 심지어 나와도 직접 거래했으니까.

네크로멘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레드 플레이크가 얼마나 핵심 고객인데 나를 거절하겠어? 이번 암살은 그 녀석들도 찬성하는 일이었고.”

황제 암살.

이만한 일을 같이 벌인다면 물론 끈끈한 사이일 터.

거래 상대도 웬만한 거래 상대가 아니겠지.

“…그럼 같은 방식으로 엠버까지 이동할 거요? 당신의 군단을 모두 수레에 실어서?”

‘상인 연합을 호출하려나.’

이번에 새로운 상인 연합의 회원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스-제-라이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라고?”

“이번 암살,의뢰 중개자가 상인 연합이다. 의뢰한 자유 연합 의회 수뇌부와 상인들의 관계가 굉장히 긴밀하다는 이야기지.”

암살교단 레드 플레이크.

금을 쫓는 상인들.

자유 연합 의회.

상인들은 과연 어느 쪽에 기울어

있을까.

단순히 생각해도 암살교단보다야 연합 의회 쪽과 훨씬 가까울 것 같았다.

“제국의 적인 의회 수뇌부에서 그 상인들을 통해서 황제 암살을 의뢰했고. 암살을 거절하고 의뢰자를 처치하러 가는 당신 입장에서……

“껄끄럽지.”

도움을 받기가 껄끄럽다.

“정보가 샐 수도 있겠군.”

암살을 철회했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걸 유추할 수 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철제 침대’의 모든 상인이 전부 중립을 지킨다고 생각할 수는 없으니까. 의회 수뇌부와 끈적하게 결탁한 녀석이 하나둘 있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거든.”

상도덕을 중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인 연합이지만.

‘내가 본 것 같은 자들만 있지는 않겠지.’

유베. 블랙베리. 넥스몬드.

정작 그들도 이런 민감한 문제가 걸리면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고.

한창 생각에 빠진 내 옆에서, 기스-제-라이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 순간 동굴이 환하게 빛을 발했다.

- 차드드득……!

작은 황동색 풍뎅이 한 마리가 빛을 내뿜으며 동굴을 날아다녔다.

“이건……!”

“익숙하지? 여우를 봤다면 이걸 알 거야.”

기스-제-라이는 즉석에서 편지를 썼다. 그리고 풍뎅이의 배를 열어 편지를 집어넣은 다음, 다시 날려 보냈다.

- 차득! 차드드득!

작은 풍뎅이는 얇은 칼날이 겹쳐지는 소리를 내며,허공으로 날아갔다. 반짝이는 금빛이 점점 멀어졌다.

“별빛청여우에게 연락한 거요?”

여우와 함께 있던 이야기는 이미 털어놓은 상태였다.

소명수녀 엘윈 에사우.

“그래. 안식 기간임에도 근방에서 입회 중이라며. 얼마나 감동적이야. 알았으니 바로 연락해야지.”

‘연락 수단을 갖고 있다니.’

두 여자는 실제로 친밀한 관계일 확률이 높았다.

그러니 별빛청여우가 기다리기도 했을 터고.

내 몸에 새겨진 기스-제-라이의 흔적을 애타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별빛청여우가 떠올랐다.

풍뎅이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쯤, 네크로멘서가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황제 암살도 없으니, 후작이라는 아이도 안 오겠지?”

“물론.”

그럴 거다.

암살 시도 자체야 시끄럽겠지만.

이사벨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상태다.

근위단장 이사벨에게만 별일 없으면 레안드로 후작은 움직이지 않는다.

황제야 죽건 말건.

“자,길라우트,오웨인, 하멜라인, 안드레이, 펜리르. 구덩이로 군단을 인솔해.”

- 팟!

네크로멘서의 손짓과 함께 허공에 불이 밝혀졌다.

“존명.”

다섯 듀라한이 어두운 동굴 곳곳으로 흩어졌다.

기스-제-라이가 나를 바라봤다.

“너는 날 따라와.”

- 달그락!

보이지 않는 힘이 나를 잡아서 그녀 옆에 바싹 붙였다.

“이제 엠버로는 어떻게 갈 거요?”

“어떻게 가긴? 걸어가야지.”

“걸어… 간다고?”

“응. 잊힌 길로 갈 거다. 천년 전

사용되다 이제는 잊힌 길로…… 그녀는 터덜터덜 천천히 동굴을 걸어갔다.

이 결계를 만들어 낸 본인과 함께 있어서인지 주위 상황이 파악됐다.

구역과 구역을 분리하는 철창.

천장에 박힌 야광주.

허공에 매달린 양초들까지.

‘〈메마른 지하 묘지〉로군…… 확실했다.

레나와 함께 왔던 그 공간이었다.

오직 기스-제-라이에 의해 진지로 점거되었다는 것만 달랐다.

내부 구조는 동일.

곧 심층부에 도달했다.

거대 홀을 직경만 수 미터인 석조 기둥들이 받치고 있었고,천장에는 까맣게 녹슨 철제 새장 수십 개가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수백에 달하는 스켈레톤 군단이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며 정렬해 있었다.

동굴의 끝.

장엄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네크로멘서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네크로멘서를 향해 물었다.

“여기가 막다른 길 아닌가? 이제 어디로 가려고……

“귀엽군……

네크로멘서가 큭큭대며 웃었다.

- 구구구구……!

기스-제-라이의 몸 끝에서 붉은 마력의 기류가 솟아났다.

잿빛 기사와 싸울 때만큼 붉어진 마력의 기류는 허공에 거대한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 고오오오

붉은 마력으로 만들어진 원들이 각자 다른 궤도로 순환하면서 점점 더 진하게 물들기 시작했다.

까맣게까지 물든 기이한 원들은 한 가닥 한 가닥 세밀하게 허공에 각인을 그려 나갔다.

움직이는 마력의 원은 2차원에서 3차원의 구로 변했고,가만히 있지 않고 빙빙 움직이면서 시간이라는 하나의 차원을 더했다.

- 쿠구… 쿠구구

어쩌면 시간도 그 진홍빛 속으로 새빨갛게 빨려드는 것 같았다.

“알아들을수 없는 외국어"

- 퍼엉!

알아들을 수 없는 음성이 허공에 폭발하듯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네크로멘서가 공들여 만들어 낸 정밀한 문양의 구도 함께 산산이 터져 버렸다.

힘뿐 아니라 세밀한 아름다움마저

품은 거대한 마력의 구가 그렇게

터지자 허망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때 였다.

- 쿠구구구구……!

붉은 구가 터진 거대한 홀 중앙이 아래로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다.

- 쿠구… 쿠구구…….

전체 훌 넓이에 비해 얼마 되지

않는 너비였지만,돌이 움직이는 소리는 한동안 계속 울려 퍼졌다.

- 쿵.

소리가 멈췄을 때,기스-제-라이는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새롭게 생긴 구덩이 가까이 다가갔다.

슬쩍 내려다본 아래쪽은 얼마나 깊은지 아예 감도 잡을 수 없었다.

그저 새까맣고 까매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는…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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