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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328화 (328/458)

371화 틈 (3)

“후후……! 반가운 얘기군. 혹시, 네 뼈를 길게 늘일 수 있다든가……. 그런 걸 하는 건가?”

“아니. 좀 다른 방법이다. 확답은 못 주겠지만,해 보지.”

“오… 시도만으로 고맙군!”

녀석은 들떠 보인다.

어쩌면 내게 좋지 않은 마음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슨 짓을 해도 나에게 크게 손해될 건 없다.

저 벽을 누르면 악의적인 함정에 빠지게 되는 거라고 해도.

어딘지도 모른 채 기괴한 철창에 갇힌 지금보다 상황이 나빠질 것 같지는 않다.

회귀할 각오마저 되어 있다면, 두려울 건 전혀 없다.

“고마워! 고마워!”

전갈이 킥킥거린다.

녀석이 가리킨 벽.

거리는 대략 10미터.

뼈의 군주로 닿을 수는 없었고, 애초에 빠져나가려는 순간 철창이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여서 나를

저지한다.

벽을 향해 아공간을 뻗어 갔다.

이걸로 승부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고체화한 투명한 공간은 5미터 조금 넘게 뻗어 나가다,중간에 무너져 버렸다.

나는 전갈을 보고 물었다.

“빛을 더 강하게 할 수 있겠나?”

“오호? 그래? 이걸 조절하면 일이 더 쉬워지나 보지?”

날 보는 눈빛에 진득한 호기심이 드러난다.

뭘 하고 있는지 무척 알고 싶어 하는 모양새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공간이 가 닿는 곳이 시각화가 더 뚜렷하게 되면 좋을 것 같다.

“아마도.”

“얼마든지 해 줘야지!”

녀석의 꼬리에서 나오는 불빛이 한층 더 강해졌다.

“됐다. 집중이 필요하니 한동안 조용히 있어 줘.”

“하하… 나야 셀 수도 없는 날을 여기 갇혀 있었는데 며칠이라도 기다려 줄 수 있지.”

주변이 밝아지자 움직이기 좀 더 편해졌다.

뻗어 나가는 아공간의 흔들림이 잠잠해졌다.

‘조금더……

거친 생각의 덩어리들을 쳐냈다.

다른 감각을 빼앗아서 아공간에 보내는 느낌으로 조용히 집중했다.

‘이미 알고 있다……

이 정도는 아이작과 있을 때 초기에 움직여 본 영역이다.

흐트러질 이유가 없다.

묵묵히 허공을 바라보며 공간을 앞으로 뻗어 나갔다.

‘한 걸음 더.’

집중이 점점 깊어졌다.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없었다.

비대칭으로 뻗어 가는 곳이 있으면 반대편을 움직였고,굳어진 곳이 있으면 이완시켰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팔이나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처럼 물리적인 작용과 반작용이 세밀히 느껴지기 시작했다.

[인밴토리 (Lv.?)…….]

[숙련도가…….]

숙련도가 올라간다는 메시지가 연달아 떠올랐다.

절박한 상황이라서일까.

일은 신기할 정도로 잘 진행되고 있었다.

[…숙련도가 올랐습니다.]

[특수 공간입니다.]

[인벤토리 작동…….]

[불이익 무시…….]

[각성은 그대로 유지됩니다.]

어느새,

- 쿵!

끝까지 움직인 아공간이 강하게 뻗어 벽을 두드렸을 때였다.

- 쿠구구구구!

- 끼리릭! 끼리릭!

- 콰광!

서늘한 금속의 화음이 사방을 메웠다. 석벽 뒤에 설치된 복잡한 기관장치의

버튼을 내가 누르기라도 한 것 같았다.

“크흐흐! 정말 멋지군! 엄청나게 빠른데……

어지럽게 엉킨 화음의 마지막에 낮은 웃음소리가 얹혔다.

“빠르… 다고?”

“아무것도 아니다……. 하하……

- 철컹! 철컹!

기관장치랑 연결되어 있었는지, 전갈이 갇혀 있던 감옥의 창살이 바닥으로 빠지듯 쑥 들어갔다.

- 콰광……! 쾅……!

그 외에도 작은 폭음이 연달아 바닥을 찢을 듯이 울려 퍼졌다.

마법적인 장치라도 풀리는 듯한 소리였다.

“해방이야! 우후후… 고맙다구!”

전갈이 앞으로 다가왔다.

구속하듯 얼굴을 뒤덮던 갑각이 옆으로 쫙 벌어져서 얼굴 전체를 드러냈다. 앞으로 구부정한 몸은 똑바로 펴지고 몸의 형태 전체가 개편되었다. 마치 이족보행 동물로 바뀐 것 같은 형상이었다.

“크크크……

그가 손을 흔들었다.

꼬리에만 달려 있던 빛이 지금은 양손,양발에서도 은은히 뿜어 나오고 있었다.

‘원래 이런 모습이었나.’

뭔가 엄청난 녀석을 풀어준 게 아닌가 싶었다.

- 화악.

다가올수록.

녀석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빛으로 좌우 수십 미터의 공간이 밝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어둡다.

위는 보이지도 않았고,내가 갇힌 감옥은 폭 십여 미터의 길 위에 놓여 있었다.

“좋아요. 바깥으로 나오시죠.”

모습이 바뀌며 말투도 또다시 묘하게 바뀐 것 같았다.

다가온 녀석이 슬쩍 손을 댔다.

- 까가강.

살아 움직이던 모든 철창이 힘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다.

허무할 만큼 간단히 풀린 철창을 바라보며 나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안 나오십니까?”

“아……

끌리듯 밖으로 나와서 바닥에 떨어진 철창을 만졌다.

뭘 어떻게 했는지 이제 손으로 건드려도 움직이지 않는다.

“이렇게 쉽게 풀리다니… 뭔가… 이상한데……

녀석이 꼬리를 저었다.

“나 참… 제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원래 세상일이라는 게 다 해 놓고 보면 간단하지요. 알 만한 이야기 아닌가요?”

옳은 말이다.

“뭐… 그렇기야 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모하게 마계로 들어왔다.

그 탓에 갇힌 기괴한 장소에서 탈출하게 해 준 은인이다. 녀석을 의심한 게 미안해졌다.

무척 호의적인 녀석이다.

“그래. 널 만난 게 운이 좋았군. 고맙다.”

“하하! 맞습니다. 맞아요.”

그가 갑자기 나를 와락 끌어안고 토닥거렸다.

“뭐… 하는……

“탈옥입니다! 탈옥! 함께 감격을 나누는 게 상식적인 반응이죠!”

그거야 그렇다만.

왠지 엉거주춤 녀석에게 안겨서 잠깐 서 있었다.

“그럼 가실까요?”

- 타닥!

나는 그의 뒤를 따라갔다.

바람이 일어나고.

환한 빛이 어둠을 밝힌다.

폭은 십여 미터에,층고는 보이지 않을 만큼 높은 통로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감옥이 놓여 있던 장소와 비숫한 모습이었다.

탐지 스킬을 계속 활성화하면서 나아갔지만 발판 함정도 없었고, 화살 함정도 없다.

천장이 무너지는 함정도.

벽이 무너지는 함정도.

폭발 함정도 전혀 감지되지 않고 있었다.

회복한 레벨이 낮아 탐지 범위가 좁기는 해도,이만큼이나 아무것도 없으니 허전할 정도다.

“좀 부실한데……

“으응……? 부실이라니?”

“그냥. 탈출하는 길에 함정이라곤 전혀 없어서. 미녹… 이라고 했나? 이곳 영주라는 작자는 생각 외로 좀 허술한가 보군.”

- 탁.

녀석이 갑자기 자리에 멈췄다.

“부실? 허술? 그렇지 않습니다. 이곳의 주인은 아주 대단하지요. 제가 사는 길만 기막히게 찾아서 그런 것이지요. 제가 아니었다면 그 우리에서 나올 수나 있을까요? 생각을 그렇게 하시면 곤란하죠.”

“음… 그래… 뭐•"…

“마계에 이 정도의 중립 구역을 가질 수 있는 존재는 손꼽힙니다. 마왕과의 단절이 보장되는 곳인데, 그곳 주인을 우습게 보다니요.”

하긴,이 녀석은 여기에 엄청나게

오래 갇혀 있었을 텐데.

자길 가둔 존재를 무시하는 건.

어쩌면 자기를 무시하는 걸로도 여겨졌을지도 모르지.

“알았다……. 그런데 여길 나가면… 어떻게 되는 거지?”

“글쎄요? 지상으로 통하는 통로가 나올 겁니다.”

“지상,이라고?”

“우후후… 그렇습니다.”

반신반의하면서도 나는 녀석을 계속해서 따라갔다. 일정한 너비를 유지하던 길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계속해서 좁아지고 있었다.

“균형을 잘 잡으시지요.”

아래쪽은 끝없는 어둠.

10미터,7미터,3미터로 점점 더 좁아지는 길이 급기야 나란히 갈 수 없을 정도로 변했을 때였다.

“여기입니다.”

앞쪽에는 네 모퉁이에 뿔이 나온 제단이 있었다.

숯이 담긴 커다란 향로가 제단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우흐흐… 여기로 나가면 되죠.”

앞서간 녀석이 향로 속에 꼬리를 넣고 비비자 하얀 연기가 진하게 피어오른다.

“자…….,,

자연스럽게 옆에 놓인 그릇에서 검은 나무 조각을 집어 향로 안에 흩뿌렸다.

일정한 간격으로 세 번 반복하자, 새하얀 연기가 커다란 향로 위로 가득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전갈이 손으로 진한 연기 중앙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에 스스로 머리를 넣으세요. 홈뻑 연기에 젖는 겁니다. 그러면 밖으로 나아갈 수 있지요.”

향 내음이 곳곳에서 튀어 오른다.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오호. 망설이시는 겁니까?”

“저… 그런데… 린트부름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기로 하지 않았나?”

주저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허언은 않는 녀석이다.

정말 이 길이 지상계로 향한다면, 헤어지기 전에 린트부름에 대한 정보를 더 얻어내야 했다.

생각을 털어놓자 그가 유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걱정 마시지요. 저도 같은 곳에 갈 겁니다.”

“같은… 곳이라고?”

“그렇습니다만,안심을 위해 먼저 답해 드리기로 하죠.”

그가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예언이 있습니다. 마계가 멸망할 거라는 예언이지요. 예언의 시기는 어떻게 계산해도 다가왔습니다만, 누가 감히 마계를 멸망시킬까요? 천계는 기생하는 차원으로 전락해 버린 지 오래입니다. 지상을 보죠. 지상을 지배하는 건 인간. 하지만 인간 따위는 이곳으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낯선 이야기가 쏟아진다.

“남은 건 잊혀진 존재들입니다. 그중에서 차원 이동이 용이하고,

극단적인 상성을 가진 용염龍迫의 보유자들을 떠을릴 수밖에 없죠.”

“마왕들이 왜 지상으로 나가려고 할까요? 세계를 구석구석 모조리 뒤져서라도,용의 잔혼殘按을 전부 없애려는 것이겠지요……. 푸후홋.”

의미 불명의 웃음소리로 녀석이 말을 끝맺었다.

이 얘기가 사실일까.

머리가 복잡했다.

마왕은 용사의 존재를 모른다.

얄궂은 일이다.

멸망한다는 예언 때문에 인간계로

나왔는데, 그것 때문에 용사들에게 마왕들 모두 살해당한다.

‘혹시……

실제로 마왕을 죽이는 용사들에 대해서 알리면, 기스-제-라이를 살릴 수 있지 않을까?

그녀에 대한 마왕들의 적개감이 희석될 가능성은 없을까?

해 보고 싶지만.

‘•••믿게 만드는 게 문제지.’

용종龍種은 결코 부활하지 않으며.

너희를 죽이는 건 인간 용사.

황실 비역의 플라스크에 담겨진 용사들이라고 말하는 걸 도대체

어느 마왕이 믿어 줄까?

말파스도 비웃을 것 같은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잇는다.

녀석이 나를 바라봤다.

“말이 없으시군요. 자, 이제 향에 머리 담그시지요. 다음 이야기는 나가서 해 드리겠습니다.”

“으..«

"n"..

이야기를 이어 듣고 싶어서라도 장단을 맞춰 줄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향로 위의 연기에 머리를 들이댔다.

위로 쏟아지듯 피어오르는 향은 무척 진해서,둔한 감각을 때리듯

단번에 뚫고 들어왔다. 머릿속에 품고 있던 복잡함을 단번에 날려 버리는 것 같은 강렬한 향이었다.

- 데엥…….

- 데에엥…….

저 멀리서 종소리가 들려온다.

종소리가 다시 한 번 남은 생각을 깨끗이 날려 버린다.

- 달그락.

몸이 비틀거린다.

우후후후.

- 데에엥…….

웃음소리를 뚫고.

먼 곳에서 다시,

“종소리,들립니까?”

“들리… 는데……

“됐습니다. 됐어요! 여기입니다! 종소리가 들리는 쪽이에요!”

물에 잠긴 듯 무거웠던 전신에 다시 힘이 들어온다.

아까보다도 더 가볍다.

종이 울리는 쪽으로 가는 건가?

올바른 길인 것 같았다.

- 파앗!

나는 기세 좋게 몸을 빼어 전갈을 따라갔다. 칼날처럼 좁아졌던 길은 다시 넓고 평탄해졌다.

“여기입니다! 이쪽으로 계속!”

길에서 점점 안개가 피어올랐다.

전갈 녀석의 모습은 이제 보이지 않았지만,목소리만으로도 방향을

잡고 따라갈 수 있었다.

게다가 어디에선가 조금씩 빛이 들어오기 시작한 덕분에 달리기는 오히려 더 쉬워졌다.

길은 한참을 더 이어졌다.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완만했던 경사가 조금씩 가팔라졌지만 가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었다.

어느새 전갈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어차피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걷고,다시 걸었다.

- 철퍽.

계속 길을 올라가자 경사는 다시 완만해졌고, 어느새 발밑에 물이 차기 시작했다.

— 철 펴… 철 펴

점점 밝아지기 시작한다.

발목까지 차는 물 위를 계속해서 지나,물안개를 헤치고,빛을 쫓아 다음 걸음을 내디딘 순간.

펼쳐진 광경에 나는 그 자리에 못 박힌 것처럼 우뚝 설 수밖에

없었다.

‘에 라스트?’

처음 보는 거대한 종탑.

그리고 중간중간 낯설고 멋들어진 건물들도 세워져 있었지만.

이 풍경은,틀림없는 에라스트다.

‘맞는 거지?’

확신을 위해 구석구석 자세하게 살펴보려 했을 때였다.

“와아! 오셨군요!”

멀리서 외치는 인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코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루비…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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