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5화 틈 (7)
“너는……!”
하얀 후드의 남자.
세 개였던 머리는 줄어들어 하나만 남았지만,여덟 개의 팔과 복장은 틀림없는 그자였다.
의식도 못 하는 찰나 사라진 책.
다시 빼앗을 수 있을까 생각하는 짧은 사이.
- 스르륵!
남자는 애슈턴의 책을 돌려주며 팔을 후드에 집어넣었다.
“돌려받게나. 할 수 있다는 것만 보여 주려고 했으니.”
인벤토리를 열어 애슈턴의 책을 다시 넣으며 녀석을 경계했다.
‘혹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전부 털 수 있는 게 아닐까?’
몸을 둘러싸고 있던 인벤토리를 아예 꺼 버렸다.
투기장에서 언제 죽을지 몰라도, 밑천을 다 털리는 것보다야 훨씬
나은 선택이겠지.
“후후… 본인이 홈치는 것은 오직
‘길’뿐인데… 걱정하지 말게.”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는 녀석을 바라봤다.
‘길?,
아니,물어야 할 건 어쨌건 따로 있었다.
“너는… 기스-제-라이에 대해서 그때 뭘 알고 있었던 거지?”
〈결코 돌아가지 마라.〉
〈길은 막혀 있고,기댈 곳도 없을 테니까.〉
하얀 후드의 말을 떠을렸다.
기스-제-라이가 살해당한 상황과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말이다.
녀석이 가만히 눈을 깜빡이면서 대답했다.
“뭐… 그 네크로멘서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어. 그때는 길을 지나며 지독한 함정을 발견한 것에 불과해. 책을 읽은 고마움으로 조언을 조금 던진 거지.”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바싸고가 기스-제-라이에게 행한 저주에 대해 설명했다.
“•••해서,그걸 풀 방법은 없을까?”
남자가 고민에 찬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계약의 각인을 저주로 역전이라. 워낙 다양하게 발현 가능한 형태라 눈앞에서 보지 않으면 모르겠는걸. 그런 건 마계 출신이 잘 알 걸세.”
“마계 출신이라면……
“너를 여기로 보낸 영주 말이야. 그런 녀석에게 물어보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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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스트를 만들어 나를 농락한 녀석이 다시 한 번 떠올랐다.
‘여길 나가면 알려 준다고 하기는
했는데……
그 말을 과연 믿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감옥의 주인인 녀석을 생각하다, 후드를 바라보고 물었다.
“네 카드는 뭐지?”
하지만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카드 같은 건 없어.”
“뭐라고? 이 투기장에는 그럼……
“견문확대. 지금까지 안 가 봤으니 구경 왔지. 세계의 안개를 걷는 게 내 일상이야.”
그 기괴한 감옥과 투기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스며들어 왔다는
이야기인가.
사기를 치려는 뱃사공을 가볍게 다루는 모습에서 느꼈지만,역시 범상치 않은 존재였다.
“아,이것도 받아라.”
남자는 한 쌍으로 이루어진 보검 두 자루를 후드에서 꺼내 건넸다.
눈에 익은 보검이었다.
“설마… 인밴토리를 해제했는데……!”
“그걸 인벤토리라고 부르나 보군. 나도 닫은 걸 건드리는 일은 무리지. 처음에 미리 빼놨던 거야. 그런데… 자기 ‘영역’에 뭐가 있는지 관심이
너무 없는 거 아닌가? 후후……
나는 엉겁결에 쌍검을 받아 들어 인벤토리 안에 넣었다.
녀석의 말대로다.
내부를 들여다봐도 캐빈 애슈턴의 책 숫자 정도만 셌지,보물들이나 무기들은 제대로 분류하지도 않고 있었다.
나는 인벤토리를 닫고 물었다.
“그런데 내 인벤토리를… 도대체 어떻게 뚫은 거지?”
후드는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알고 싶으면,내 제자가 되거라.”
조금 갑작스럽다.
제자라니.
“글세……
“네가 ‘영역’을 다루는 법에 대해 완벽한 가르침을 주겠다. 너에게는 내 가르침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헤어지고도 자꾸 떠오르더군. 다시 만난 게 운명 아닐까?”
‘좀 부담스러운데.’
후대 양성에 관심이라도 있나.
제자가 되라는 게 대단히 어려운 요구는 아니다.
애초에 가르침을 받는 것만으로도 제자라고 불릴 수도 있겠지.
“뭐,좋다. 제자가 되겠……
하지만 이어진 후드의 말은 몹시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그럼 네 영역에 보관된 물건들을 나에게 바쳐라.”
“뭘 달라는 거지?”
“전부 다. 네 의지로 바쳐.”
“•"뭐?”
남자는 후드 속에서 낯빛도 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등가교환의 법칙이다. 이 정도의 가르침을 주려면 어마어마한 공물이 필요하지. 그 안에 든 물건 전체라면 적당하겠다.”
“…저번처럼 애슈턴의 책을 빌려
주는 정도로 안 될까?”
“있는 대로 다 내놔. 좋은 것에는 제대로 값을 지불하는 습관이 장기적 으로 좋을 것……
“됐어. 안 해.”
“그래,됐… 뭐……?”
“안 한다고.”
나는 깔끔히 거절했다.
애슈턴의 책은 물론이고.
다른 보물들도 당장 쓰진 않아도, 아이작과 나냐우가 골라 준 소중한 물건들이다.
설령 인벤토리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모조리
넘겨줄 수는 없었다.
‘게다가 뭘 믿고?’
후드의 동요가 느껴진다.
“…다시 생각해 봐. 네가 어디서 나 같은 스숭을 만날 수 있겠어? 기껏해야 환상감옥의 영주 따위에게 사기나 당하겠지.”
자리를 피해도 후드는 나를 졸졸 쫓아왔다.
“싫다는데 왜 계속 따라오지?”
“집착하는 거 맞다. 지금 너한테는 내가 너무 필요하거든.”
넘치는 자신감이다.
“약한데도 불구하고 자기 영역이 있다니……. 뭐가 될지 정해지지 않은 신선한 ‘영역’이라면… 반드시 내가 가르쳐야 해.”
신뢰를 심어 주려는 것처럼 후드가 말을 이었다.
“기본적인 특성은 ‘보관’이지만… 고집은 없는 것 같고… 누군가가 정체성을 한 번 무너트려 주기라도 한 건가. 상당히 자유로워졌어.”
“그런 것까지 아는 거냐?”
내 말에 후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온갖 세계를 여행한 탓에 각지의 특색을 비교해… 무엇이든
순식간에 잡아낼 수 있지. 심지어 그게 개인이 지배하는 ‘공간’이라도 마찬가지다.”
“으...W
"n".•
잠시 고민했지만.
“싫어.”
여전히 대답은 같다.
인벤토리 안에는 기스-제-라이의 단검도 들어 있고.
뭘 얼마나 대단한 걸 가르쳐 줄지 몰라도 멋대로 넘길 수 없지.
‘그런데 인벤토리가 뚫리다니……
녀석은 다 되돌려 주기는 했지만, 꽤 충격적인 일이다.
‘필요할 때만 써야 할지도.’
나는 인벤토리도 띄우지 않은 채 다시 격돌 지점을 향해 걸어갔다.
그때 였다.
“거기로 가면 안 돼!”
단호한 외침에 흠칫하는 순간.
녀석이 선심 썼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런… 그럼 호의로 대체해라.”
“호… 의?”
뭔가 엉뚱한 소린데.
“솔직히 말하지. 너는 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곳을 탐험했을 이 몸이
보기에도 규격 외… 어떻게 될지, 어디까지 오를지 알 수 없는 존재. 그렇다면… 역시 그런 존재의 호의를 사 두고 싶다.”
후드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후우. 내가 이렇게까지 억지로 맞춰 주다니……
내 호의라.
‘줄 수야 있지.’
사실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고민이 된다.
아니.
역시 그렇게 쉬운 걸로 취급하면
곤란할지도.
지금까지 만난 다른 인연들에게 미안한 일.
〈곤란한 상황이지. ‘다음’에 네가 어떤 보복을 할지 모르잖아? 신뢰 회복을 위해서는 뭐든 할 수 있지, 아니… 해야지. 다시 네가 나한테 오게 만들 필요가 있었어. 그딴 건 희생이 아니다.〉
아이작마저 나에게 마음을 빚을 지우려고 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됐다.”
“뭐라고? 설마 이 이야기도 지금 거절하는 거냐?”
“호의라는 게 그렇게 거래되는 건 아니지 않나? 어느 한순간 가지게 될 수는 있어도.”
“하하… 하하… 그래… 그렇지....
네 말이 맞다. 내가 너무 조급했군. 그러니까… 일단 멈춰라. 저기로 가면 안 된다. 네가 봤던 격돌은 한 명이 만든 거다.”
부끄럽다는 듯 웃은 남자가 말을 이었다.
“겉치레만 요란한 원소 마법이지. 한쪽이 싸우다 지쳤다고 생각하고 찾아올 자를 겨냥하는 함정이다.”
“뭐? 함정?”
설명이 이어졌다.
“애초에 일부러 투기장에 들어와 즐기려는 녀석이니… 피하는 쪽이 좋다. 기다리면 내 말이 맞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거다.”
그는 후드를 뻗어 나까지 덮었다.
‘일단 나를 공격할 생각은 없어 보이는데……
가만히 엎드린 지 삼십 분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 쿠과앙! 쿠쾅! 쿠쾅! 쿠쾅!
하늘로부터 시커먼 빛이 곳곳으로 꽂히기 시작했다.
부정한 힘이 내가 목표한 지점을 중심으로 황야와 숲 곳곳을 단숨에 짓이겨 버리고 있었다.
한 발 한 발에 땅이 흔들린다.
‘이 정도 떨어져 있어 다행이군••…
직격되는 부위는 한 번에 수 미터 이상으로 파일 것 같은 충격파.
육체 따위는 찌그러짐을 넘어서, 즙으로 변해 지하로 스며들겠지.
비명조차 들리지 않는다.
‘엄청나네……
한참의 광란이 지나고 나서.
후드가 작게 속삭였다.
“그녀가 이 투기장의 최강자……. 어때,내 말이 맞는 걸 확인했나?”
“•••고맙다.”
저기로 걸어갔으면 기껏 여기까지 온 보람도 없이 똑같은 꼴이 되어 곧바로 끝났겠지.
“이제 슬슬 일어나자고.”
후드가 말했다.
“그런데 너도 지친 녀석을 사냥하러 갔던 거냐?”
“그건 아니고……
한 번의 위기는 구해진 셈.
‘그 값이라고 해도 좋겠지.’
시체를 홉수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자세히 털어놓자,후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했다.
“굉장히 놀라운 능력이군. 좋다. 일이 생각보다 쉬워질 것 같군……. 역시 신경 쓰이는 녀석이었다니까. 그래! 일단 네가 하던 걸 해 보자.”
뻗어 오는 손에 엉겁결에 악수를 하고 녀석을 따라갔다.
“이제 넌 내 제자가 된 거야!”
굉장히 즐거워 보인다.
이미 한차례 투기장을 돌아본 듯 내딛는 발걸음에는 거침이 없었다.
“여기다.”
크기는 약 50센티미터.
나비와 벌을 반쯤 섞인 것 같은 몬스터의 시체 위로 초록색 빛이 을라오고 있었다.
“페어리……
전생에서는 마왕 강림 이후에나 볼 수 있던 종족이,마계 투기장에 쓰러져 있었다.
원소의 힘을 뿜어내고.
작고 빠른 날갯짓 때문에 잡기도 극히 어려운 개체.
후드가 내 생각을 읽듯 말했다.
“그래. 번개의 힘을 가진 녀석이야.
저격에 당했지. 흡수하자고. 아까 본 녀석과… 시체 수거팀 때문에 이런 온전한 시체는 거의 없어.”
- 고오오오……!
빛 주위의 공기가 진동했다.
언제나처럼 초록색 빛이 몸으로 빨아들여지며,가득 차는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꽤 크군.’
- 달그락! 달그락!
꽤 용량이 크다.
몸이 멋대로 움직일 정도.
[뇌전 Lv.l(new!)을 회복합니다.]
[뇌전 Lv.2(new!)를...]
[뇌전 Lv.5(new!)을 회복합니다.]
- 해당 스킬의 마비/확산/연쇄/ 마력 파괴 특성을 회복합니다.
진하게 빨려 들어온 초록색 빛이
천천히 온몸으로 흩어진다.
힘을 소실한 뒤 처음으로 회복한 〈마법〉.
‘•••레벨 5라니… 대단한데.’
이미 익혀 놓았던 스킬이긴 하다.
‘상승 효율이 압도적이긴 하지.’
신규 습득보다 훨씬 효율이 좋은 사실은 이미 확인한바.
그래도 천둥의 탑주 엘란드에게 흡수한 힘을 그대로 다시 계승할 정도라니.
후드가 말을 이었다.
“첫 번째 가르침을 주지. 이제부터 홉수한 힘을 계속 뿜어내 봐라.”
- 파지지직!
시키는 대로 스킬을 발동.
앞으로 뻗은 손가락을 타고 노란 뇌전이 번쩍거렸다.
상당히 만족스러운 힘이다.
손끝에서 시작한 번개가 사방으로 아무렇게나 내달린다.
달리고,달려도 부족하지 않다.
회귀를 초월해 내게 달라붙어서, 뼈를 타고 흐르는 액체가 이 정도는 여유롭다는 듯 지지해 주었다.
상기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하얀 후드가 말을 이었다.
“이 용량은… 역시… 생각대로군. 이제 ‘영역’을 발동시켜라.”
“알겠다.”
- 우우웅!
공기가 사방으로 밀려났다.
반경 3미터.
‘영역’ 안에서 치는 번개와 밖에서 치는 번개가 어지럽게 흩어질 때,
- 스윽!
옆에 있던 하얀 후드가 안쪽에 달린 오색 매듭 하나를 풀어냈다.
‘저게 뭐지?’
매듭이 살아 있는 나비처럼 혼자 허공을 나풀거리며 날아왔다.
그리고 미친 듯 치는 뇌전과 내가 발동한 ‘영역’ 사이에 아무렇지 않게 끼어들어 그 둘을 묶기 시작했다.
“계속.”
- 파지지직!
강해지는 번개가 매듭을 휘감고.
오색 매듭이 나풀거리다 허공으로 천천히 녹아들었을 때였다.
“이제 넓혀 봐라.”
5미터.
7미터.
- 과과과과광!
번개로 만들어진 반구의 충격파가
순식간에 사방을 초토화시켰다.
- 과광! 과광!
번개가 내리칠 때마다 돌바닥도 울퉁불퉁 파이기 시작했고.
재가 된 땅이 튀어 오르며 먼지가 솟아났다.
“더 넓게.”
10미터.
15미터.
그렇게까지 범위를 넓혔는데도, 번개는 조금도 약해지지 않는다.
공기의 절연絶緣은 내가 설정한 반구 안에서는 일어나지 않으니까.
- 콰광! 콰광!
통전通電.
허공이 튀기고,폭발하고. 경련을 일으킨다.
15- 16- 17… 18… 19…….
“너무 시선을 끌었어. 줄이자고.”
반경 20미터까지 폭주한 후에야, 나는 스스로가 도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느꼈나? 너는 방금 ‘번개의 영역’을 만들어 낸 거다.”
“번개의… 영역이라니……
‘이런 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녀석은 몹시 뿌듯한 표정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번개라는 힘의 형태와 영역을 내 매듭으로 이어 준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