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334화 (334/458)

377화 틈 (9)

하얀 후드가 공간을 마치 끈처럼 꼬나 잡았다.

오색의 두 갈래 매듭이 선명하게 허공에서 길게 늘어지며 순식간에 팽팽해졌다.

아무런 장력도 없을 것 같던 매듭. 이미 내 영역에 녹아들었다고 생각한 매듭 두 개가 증폭되며 인벤토리를 잡아당겼다.

‘설마……!’

수십 배로 증폭된 오색의 매듭은

인벤토리가 있는 공간 전체를 꽁꽁 움켜잡고 허공의 모양이 변할 만큼 강하게 잡아당겼다.

물건 몇 개가 문제가 아니다.

이대로라면 인벤토리 자체가 아예 뽑혀 나간다.

뭘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엇……?”

하지만 매듭을 당기던 하얀 후드는 더 이상 경계 안쪽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팔을 늘어뜨렸다.

‘내가 뭘 한 게 없는데?’

의식적이라거나 억지로 버틴 게

아니다.

무언가 절대 움직이지 않는 것에 마주해 버렸다는 감각.

인벤토리가 자기가 있을 자리를 결정했다는 느낌이다.

“이야……. 감탄스러운데.”

무표정하던 하얀 후드가 양손의 매듭을 놓고 팔짱을 끼었다.

“대단하구나. 두 개나 걸었는데 당겨지지 않다니.”

“너,지금… 뭘 하려고 한 거냐!”

“알면서 왜 그래?”

후드가 하려는 짓이 성공했다면.

그 결과는 상상하기도 끔찍했다.

남자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지금도 실시간으로 전해 오는… 내 다양한 소식통에 따르면 너는 굉장한 이목을 끌고 있다. 더 이상 함께 다니기가 부담스러울 정도야. 아마도 금방 죽을지도 모르지.”

“그래서 어쨌다는 거지?”

“네가 죽으면 그 영역이 나한테 귀속되게 하려고 했지. 매듭에는 그런 효과가 있었다. 내가 너에게 힘을 넘기고 비의를 가르친 만큼, 죽은 후엔 그 영역을 그대로 다시 받아 온다는 효과가……

처음부터 이게 목적이었을까.

그동안 너무 잘해 준다 싶었지만, 어쩔 수 없는 배신감에 칼을 잡은 손이 약하게 떨렸다.

다른 손으로 떨리는 손목을 잡고 녀석을 노려봤다.

분노가 묵직하게 차오른다.

후드가 어깨를 으쏙했다.

“굳이 화낼 거 없지 않나? 어차피 빈손으로 와서 다시 빈손으로 가게 되는 것일세. 자네가 가진 그 많은 재물도,놀라운 자기만의 영역도 죽고 나면 모두 티끌로 흩어질 터. 내다 버리느니 나에게 시주하는 게 좋지 않겠나?”

녀석에게 개소리 지껄이지 말라고 화를 내고 싶었다.

나는 죽으면 다시 회귀하는 데다.

회귀할 때마다 인벤토리가 계속 이어진다.

혹시라도 인벤토리를 빼앗겼으면 계속 큰 손해를 볼 뻔했다.

‘어쨌건 하얀 후드도 인벤토리를 빼앗을 수는 없다는 건가.’

침투만 가능하고.

하지만 매듭이 더 많았으면 정말 빼앗겼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흑 당기는 힘이 고작해야 매듭 두 개에서 나오는 거라면•…"

머리가 경고성을 울리고 있었다.

지금 이상은 위험하다.

이제 인벤토리에 매듭을 받는 건 주의해야 한다.

“젠장,언제는 호의로 받겠다면서! 어떻게 된 게 이놈이나 저놈이나 뒤통수칠 생각뿐이냐!”

“검증이기도 하다. 내가 주는 힘은 나 하나만의 힘만은 아니니까……

내가 뱉어 낸 짜증에 후드가 묘한 소리를 하며 말을 이었다.

“하나 걱정하지 마라. 네 죽음을 가정해 시험 삼아 당겨 봤지만… 턱도 없었다. 너의 호의에는 역시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이야기지. 좋은 거래인 게 검증된 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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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칠 위협에서 너를 숨겨 주고도 싶었지만,그럼 이목이 집중되어… 나까지 위험해지니 역시 곤란하다. 네게 선택지가 준비되어 있다는 것 정도만 알려 주겠다.”

- 콰직……!

비틀어진 공간이 후드의 손길을 따라서 점점 균열이 커졌다.

“선택지들과 가까운 곳에 균열을

열었다. 다시 만나면 좋겠군.”

- 스윽!

그는 더 물어볼 시간도 주지 않고 안쪽으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선택지? 어쨌거나… 다행이군.’ 녀석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한다. 후드가 뭘 생각했는지는 몰라도, 내가 얻은 건 이득뿐.

인벤토리의 활용도가 압도적으로 늘어난 것은 물론이고, 탈출구까지 열어 주었다.

그가 만든 균열이 들어오라는 듯

안정적으로 허공에 벌어져 있고.

그 너머가 보인다.

주위의 풍경과는 연계되지 않은 새로운 세계.

조심스럽게 균열 안으로 첫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느낄 수 있었다.

빛도,냄새도,온도도.

얇은 경계를 사이에 두고 완전히 달라지고 있다.

‘저 건너가 본격적인 마계인가?’

온몸에 힘이 들어간다.

새로운 세계를 천천히 느끼면서 나머지 한 발도 떼려 할 때였다.

- 파드드드득!

그 순간.

기다렸다는 것처럼 수많은 편지가 막 발을 걸친 경계 너머에서 내게 날아들었다.

“응?”

편지는 구태여 잡아챌 것도 없이 살아 있는 것처럼 내 손으로 계속 날아들었다.

봉투는 단 하나만 검은색이었고, 나머지 수십 장은 모두 뼈를 닮은 백색이 었다.

잡은 십수 장을 정리하고 봉투를 막 뜯으려고 했다.

- 콰과과광!

그런 와중에 전혀 뜻밖의 존재가 회오리를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저 녀석은?’

감옥에서 본 적 있는 녀석이었다.

‘역시 패거리였나……

- 크허어헝!

신장 4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곰은 허공에 바람의 정령들을 소환하곤 그들을 타고 아래로 내려왔다.

‘혹사 같은데……

얼마든지 이쪽으로 급강하할 수 있음에도 누런 곰은 멀리 떨어진 폐허에 내려앉아 나에게 소리쳤다.

“가지 마! 공격 안 해! 제발!”

‘뭐지?’

감옥 안에서 굵은 목소리로 위엄 넘치게 말하던 건 연기였나.

“영주님이 잡아 놓으라고 했어! 제발 가지 마!”

W O

•o..•

곧 그 뒤를 따라 전갈도 허겁지겁 나타났다.

“잠깐! 잠깐만 멈춰 보세요!”

아직 완전히 넘어가지 않은 상태.

전갈은 제발 경계하지 말라는 듯 한참 거리를 두고 나를 불렀다.

“이,이렇게 길까지 뚫어 버리는 분이셨다니! 이게 가능하려면 대체, 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제가 뭐든 다 해 드리겠습니다! 떠나지 마세요! 굉장히 잘 싸우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아니,사실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길, 이렇게

길을 어떻게 뚫으신 건지! 무조건 만족시켜 드리겠습니다! 전부요!”

지금껏 녀석에게서 한 번도 듣지 못했던 애절한 목소리다.

저런 절절한 목소리도 낼 수 있는 녀석이었나.

‘잘하고 있었다고?’

처음부터 위에서 투기장을 보고 있던 게 분명하다.

하지만.

하얀 후드가 도움을 준 건 위에서

봐도 몰랐다는 이야기.

‘엄청난 능력이군……

은신을 넘어선,차원의 단절.

어떻게 해야 나도 녀석처럼 할 수 있을까.

은신 스킬을 버리라고 할 만하다.

겉치레를 만들라고 했는데.

무언가를 막아 내는 것처럼 단순한 물리력 부여는 아닐 거고.

역시 어떤 깨달음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런 편지는 버리시고요! 제발 말 좀 들어 보십시오!”

멀리서 전갈이 외친다.

루비아의 모습도,레나의 모습도 취하지 않았다.

최소한 대화의 진정성은 있다고

봐도 좋겠지.

‘하지만……

- 툭!

무시할 건 무시한다.

나는 경계에 걸쳐 선 채 봉투를 뜯었다.

‘말파스의 인장이라……

봉투도 못 보게 하고,루비아의 모습으로 집어삼키던 편지도 실은 나한테 오는 거였겠지.

서둘러 봉투를 뜯자마자 안에서 편지 대신 까마귀 날개가 파드득

허공으로 올라왔다.

[말파스의 각인이 활성화됩니다.]

‘각인 활성화?’

튀어나온 까마귀 날개는 주변을 맴돌며 작은 울림을 전달했다.

〈이것밖에 못 해 줘서 미안해… 잡고 지상으로 도망쳐… 좌표는…….>

까마귀 날개가 전달한 세 차례의 연속 이동 좌표가 머리에 들어온다.

‘•••정신?’

어디에도 글자는 없었다.

소리도 없다.

그저 주위를 맴도는 것만으로도, 말파스의 감정과 정보가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다.

원래 내 안에 심어져 있던 것.

뼈에 새겨진 각인을 통해 정보가 생성되는 것처럼.

‘이게 마왕의 힘인가……

계약자에게 제한된 정보만을 전달할 수 있던 지상계와 정보의 질과 양이 차원이 달랐다.

‘생생하군……

이동에 필요한 마계 일부에 대한 지식까지 미약하게 늘어난다.

말파스의 현 위치마저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아주… 아주 멀구나.’

직접 도와주기는 곤란한 상황.

주변을 맴도는 날개를 놓아뒀다.

그런 사정과 마음이 극단적으로 섬세하게 나에게 전해진다.

각인을 받지 못한 과거에는 알 수 없었던 현상이다.

아마,전하고 싶은 마음만 한정해 전달하는 거겠지.

그럼에도 강제되는 ‘공감.’

까마귀 날개와 직접 접촉한다면 어떨까?

두려워졌다.

이걸 잡는 순간 말파스와 훨씬 더 끈끈한 유대감이 생길 것 같다.

고맙기는 하지만.

‘운신의 폭이 좁아질지도……

그리고 무수한 다른 편지들은一

수십 건 모두 바싸고의 인장으로 봉인된 것들이다.

“뜯으면 안 됩니다! 뜯으면……

하나 정도는 괜찮겠지.

- 스르륵.

봉투를 뜯어내는 순간 뻣가루가 허공으로 흘렀다.

이번에도 같다.

마왕의 '정신’이 나에게 전해진다.

〈내 제사장이 되어라.>

하지만 각인이 없어서인지.

말파스와 비교했을 때의 정보량은 터무니없이 적다.

내용도 엉뚱하다.

‘무슨 의도지?’

의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기스-제-라이를 살해하고,나까지 처리하려고 했을 바싸고가 갑자기 나한테 제사장이 되라고 하다니.

하지만 거기서 끝.

더 이상의 설명은 없다.

- 좌악!

동시에 도착한 다른 편지 봉투를 빠르게 찢어 봤다.

다른 봉투들의 새하얀 뻣가루에는

바싸고의 정신이 꽤 많이 수록되어 있다.

처음 뜯은 건 대충 쓴 거였나.

내가 자신에게 예속되어야 하는 이유가 세세히 전달되고 있다.

‘…꽤 집착이 심하군.’

역시 각인이 없어서인지 직접적인 감정의 결은 전달되지 않지만.

정보량은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내가 기스-제-라이의 후계자라면, 자신의 각인을 받는 즉시 얼마나 화려한 성장을 이룰 수 있는지를 바싸고의 ‘정신’은 생생한 영상으로 보여 주고 있었다.

왜 나를 원할까?’

수상하기 짝이 없다.

혹시 기스-제-라이와 용에 대한

무언가를 알아내려고 하는 건가? 함정일까?

나에게 무슨 가치를 봤나?

별로 그럴 이유도 없는데.

그렇게 인재를 찾기 힘든가? 마계에서 나 정도야 많을 텐데. 온갖 생각이 꿈틀거리며 섞인다.

‘바싸고는……

전갈의 외침이 환상을 깨부수고 들려왔다.

“바싸고는 계약자를 배신했습니다! 설마 그런 마왕에게 가시려는 건 아니지요? 그런 녀석과 유대감을 느끼시면 안 됩니다!”

망할 녀석.

나한테 오는 편지를 전달하지 않고 다 뜯어 봤다는 사실을 숨기지도 않는다.

어쨌거나,선택지는 셋.

말파스의 날개를 붙잡고 그대로 지상으로 날아가거나.

전갈 녀석의 영지로 귀환하거나.

바싸고를 만나거나.

물론,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기스-제-라이를 살해한 바싸고의 제사장 따위가 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꺼림칙한 선택지를 오히려 무시하라고 애원하는 전갈은 무슨 생각일까.

어쨌거나.

조금 더 정보를 알아내고 싶었다.

후드가 열어 준 균열.

그 가운데 몸을 걸친 채.

나는 전갈을 바라봤다.

“뭐든 해 준다고?”

전갈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무조건입니다! 말씀만

내려 주십시오!”

일단 정공법이다.

“그럼 말해 봐라. 내가 처음부터 너에게 요구했던 걸 잊어버리지는 않았겠지?”

“후후후……

전갈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바싸고가 건 저주의 해제 방법 말씀이군요. 제대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다 가르쳐 드리지요. 도움이 될 만한 것까지도 선물해 드리겠습니다.”

경계에 걸친 몸이 녀석 쪽을 향해 넘어갈 뻔했다.

겨우 균형을 잡고 정신을 집중.

‘하얀 후드가 해낸 일이 그렇게 대단한 건가?’

길을 뚫은 게 이렇게까지 녀석의 태도를 다르게 만들 줄은 몰랐다.

물론.

전갈 녀석의 착각을 내가 책임질 이유는 전혀 없다.

나야 정보만 얻으면 그만.

여기서 들어야 한다.

옆에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곰이 끼어들었다.

“저… 영주님,경계가 뚫렸으니 마왕들이 관찰하기 시작할 텐데, 괜찮을까요?”

“당연합니다! 이곳은 중립 지대! 마왕의 지배는 적용되지 않습……

그때 였다.

- 콰직. 콰직. 과직. 콰직…….

한쪽 발을 디딘 새로운 차원에서, 허공에 나타난 주먹 크기의 구가 끔찍한 기운을 흘리며 허공을 씹어 먹기 시작했다.

378히■ 틈 (10)

- 콰직! 콰지! 콰직! 콰직!

허공에 비명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구에 씹힌 부분들이 투명한 포말을 일으키며 흘어졌다.

〈닥쳐라.〉

굉음 속에서, 의지가 울려 퍼졌다.

의지가 울려 퍼지는 것은 바깥이

아니라 내 머릿속처럼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하얀 후드가 새롭게 열어 준 차원 쪽에서 ‘소리’가 전부 사라졌다.

달은 빛을 내뿜고 구도 회전했고 한쪽 발이 차원 너머의 땅을 디딘 감각도 견고했지만,모든 종류의 진동이 굳어 버린 듯 사라졌다.

‘이게 마왕의 힘인가?’

본신의 강림도 아니다.

일부의 권능뿐.

그럼에도 차원에서 ‘소리’를 아예 없애 버렸다.

강제된 침묵 속에서,

해리解離의 영주.

미녹의 웃음이 침묵을 경망스럽게 끌어내렸다.

투기장은 전갈의 것이었고 그곳은 진동도 소리도 온전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3좌께서 간접 강림하신 건가……. 하지만 이쪽에서 지껄이는 거야 제 마음……. 왕들이 공통으로 보장한 중립의 영역. 3좌라 해도 단독으로 침범하실 수는 없습니다!”

탑을 휘감은 투기장의 회오리가 홍분한 전갈의 날숨처럼 혼들렸다.

녀석이 뿜어내는 힘이 느껴졌다.

‘이 정도로 강하다니……

새카만 기운이 녀석의 발밑에서 흘러나와 들끓었다.

그건 차원의 경계를 칠하며 구의 영향에서 자신의 세계를 지키는 것 같았다.

“후후… 들리십니까?”

“들린다!”

나는 반쪽의 세계를 향해 외쳤다.

“서 두르셔 야겠습 니 다. 제 3좌께 서 저의 생각보다 훨씬 이쪽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군요.”

하지만 내용과 달리 그의 말투는

조금 느긋하기까지 했다.

“그럼 빨리 말해! 굉장한 압력이 느껴진다고! 각인 역전의 저주를 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 과드득! 콰득! 아그작!

그 순간에도 구는 검은 칠을 피해 공간을 짓씹으며 사방을 점거하고 있었다.

가만히 턱을 괴고 답변을 기다릴 여유는 없었다.

“그러면,마왕을 죽이십시오.”

해리의 영주는 가벼운 농담이라도

던지는 것처럼 대답했다.

“뭐……?”

하지만 전혀 받아 줄 만한 답변이 아니었다.

지금 저걸 답이라고 내놓는 건가?

황당한 말이었다.

마왕을 죽이라고?

존재만으로도 나를 완전히 옥죄고 있는 게 ‘간접 강림’이라면서.

“헛소리를……

“해리의 영주는 마왕에 대해서는 헛소리하지 않습니다. 각인의 역전을 피하는 방법은 그것뿐입니다.”

어딘가 꽉 눌린 듯한 말투였다.

“좋아,어떻게?”

미녹이 어깨를 으쏙했다.

“저도 모릅니다.”

“모른다고!”

살의가 솟구치며 주먹이 쥐어졌다.

마왕은 못 죽여도 저놈은 죽여야 하는 게 아닐까?

미녹이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마계가 마왕에게 주는 보정을 배제하고,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데다,페널티가 걸린 상태로 일대일로 싸우게 하는 법은 알고 있습니다.”

“더 말해 봐!”

“지금은 잊힌 의식이지만,어떤 마왕이라도 자기 각인을 새긴 자가 야-슈-르크. 축출 의식을 신청하면 반드시 일대일로 받아들여야 하죠. 단,신청 조건이 하나 있는데……

- 과직! 콰직! 과과과과!

“급하다! 빨리 말해!”

“이쪽으로 오시면 알려 드리지요.”

가라앉았던 살의가 다시 솟았다.

하지만 지금은 분노보다는 빠르고 냉철한 상황 판단에 따라 움직여야

할 때였다.

‘녀석에게 더 휘말리면 안 돼.’

최소한의 정보는 얻었다.

정보를 더 듣겠다며 저쪽에 가면 똑같은 꼴이 반복되겠지.

"하얀 후드도 없을 거고.’

이대로 떠나는 게 낫다.

- 덥석!

나는 주변을 빙빙 날며 돌고 있는 까마귀 날개를 붙잡았다.

한 손에 잡힐 만큼 작은 한 쌍의

날개였지만, 날개를 잡은 순간에 말파스가 입력해 둔 좌표가 머리에 들어왔다.

날개가 투명한 속을 폈다.

그 너머로 무음의 퍼득임이 널리 전해지는 것 같았다.

속도를 붙일 것도 없이 순식간에 떠오를 수 있겠지.

이 날개에 몸올 맡기면 안전하게 지상계로 돌아갈 수 있다.

‘지상으로……

하지만 지상계를 생각하는 순간, 무언가 놔두고 온 게 떠올랐다.

이대로 올라가도 되는 것일까?

올라간다면.

역시 별빛청여우를 필두로 해서 레드 플레이크를 만날 생각이다.

그들에게 기스-제-라이의 죽음에 대해 알려 줘야 한다.

‘그러면 놓고 가는 건 좀……

- 팟!

손에 쥔 까마귀 날개를 다시 놓고 미녹을 바라봤다.

“내가 너에게 호의를… 최소한의 호의를 갖길 원하면,지금 여기서 그녀의 시체를 내놔라!”

분명하다.

내가 ‘환상 속’ 에라스트 야社에 묻은 시체는 당연히 환상의 주인인 녀석에게 있다.

그거라도 받아 갈 생각이었다.

호의 따위 필요 없다고 비웃으며 거절해도 상관없다.

요청도 해 보지 않고 갈 수는 없다.

‘혹시 모르니까.’

그러나 미녹이 보인 반응은 전혀 의외였다.

“갑자기 무슨 당황스러운 소리를 하십니까요? 저한테 시체라니요! 그런 게 어디 있다는 겁니까?”

?”

나는 눈치가 빠르지 않다.

하지만 이 정도로 노골적이라면 알아차릴 수 있었다.

‘숨기고 있다!’

투기장에서만 울리는 녀석의 말은 어떨지 몰라도.

영역 가운데 끼어 있는 내 말은 분명히 제3좌에게 들리고 있다.

그렇다면.

미녹은,스스로가 기스-제-라이의 시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마왕 바싸고에게 숨기고 싶어 한다.

‘이걸로 협박을 한다면… 뭐가 더

나올지도 모르겠군.’

나는 입을 떼는 척했다.

“내가……!”

그때 였다.

가벼운 모션을 취하는 것만으로도 상대는 즉각 응답해 왔다.

“쉿! 숨김없이 당신에게 모조리 얘기하겠습니다.”

- 과콰콰……! 콰콰콰콰……!

회전하는 구는 점점 커진다.

그것은 어느새,부글부글 끓는

진득한 검은 경계까지도 침식하려 입을 벌리고 있었다.

- 파드득…….

주위를 도는 까마귀 날개에 점점 힘이 떨어져 간다.

불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지만, 이대로 미녹의 말을 듣지 않고서 나가 버릴 수는 없었다.

입을 다물었다.

“기스-제-라이의 유해와 유물들. 린트부름의 힘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들이 탐났습니다.”

“그래서… 나를?”

“그렇습니다. 차원에 가둬 두거나 투기장에서 핑계로 죽게 놓아두려 했습니다!”

큰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역시 사악한 의도였던 것인가.

“물론 당신이 차원의 길을 뚫을 수 있는 분인지 전혀 모르고 저질렀던 일이므로, 부디 용서를.”

“•••뻔뻔하게 지껄이는군.”

마계의 사고방식일지도 모른다.

강자와 약자에게 대하는 태도가 어떤 겉치레도 없이 다르다.

그것이 대의이자 도덕률인 것처럼

통용된다.

“왕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힘……. 그 편린이라도,실마리라도 가지고 싶었죠. 바싸고도 마찬가지입니다! 궁금해서라도 당신이 그의 영역에 다가가는 순간… 유산을 뽑아먹고 영원한 시간 속에 감금할 겁니다. 규칙 핑계를 댈 테니,제 영역에 있는 편이 안전합니다. 이곳에서 저와 함께 힘을 기릅시다!”

“널 어떻게 믿고?”

더욱 거대해지는 구를 불안하게 바라보며 빠르게 물었다.

“믿으실 필요조차 없지요. 당신은 언제든 제 영지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내가 그의 생각처럼 차원을 뚫는 존재라면 그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생각해 봤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마왕 강림도 금방이다.

말파스의 날개를 타고,도망쳐서 지상으로 간다 해도 바싸고가 금새 따라올 수 있다는 이야기.

‘하지만… 이게 사실 내게 유일한 선택지겠지.’

“단검에 잠재된 린트부름의 힘을 제가 정련해서 드릴 수 있습니다. 그 방법은 마계에서 저만 아는……

뻔한 수작 같지만.

계속 듣다간 현혹될지도 모른다.

결심을 굳히고.

막 이동하려 할 때였다.

소리가,진동이 먹힌 공간에서도 느낄 수 있는 거대한 힘의 충돌이 일어났다.

내 주변을 돌던 까마귀 날개.

밤하늘처럼 검은 까마개 날개가 새하얗게 탈색되어 버렸다.

〈그물에 빠지고 올가미에 걸려든 먹잇감이로다.〉

새하얗게 탈색된 까마귀 날개는 다시 잡아도 아무것도 느껴지는 게 없었다.

‘이런……!’

“하핫,하하하……. 이제 선택지가 하나 줄어드셨군요!”

반대편 영역에서는 미녹이 즐겁게 지껄여댔다.

“어서 오십시오! 멀쩡한 선택지는 하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저쪽은 어딜 봐도 명백하게 틀려먹었죠!”

바싸고의 힘이 훨씬 강해졌음에도 미녹은 아까보다 여유로워졌다.

진심으로 바싸고를 선택하는 게 최악이라고 생각하는 거 같다.

틀린 생각은 아니겠지.

타이밍을 놓쳐 버린 기분이 든다.

‘갇힌 건가?’

확신이 든다.

투기장 방향으로 들어가면 다시 나오지 못한다.

차원을 뚫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몹시 실망한 미녹은 나를 지독하게 학대하지 않을까?

어떻게든 홀려서 단검을 빼앗으려 한다면,녀석의 환상에 완벽하게 버틸 자신은 없다.

그렇다고 바싸고 쪽으로 가면……. 콰직!

회전하는 거대한 구에서 새하얀 뼈로 만들어진 손이 튀어나왔다.

손가락이 까딱거리는 것과 함께, 투명한 막 같은 게 나를 끌어당겨 사방으로 감쌌다.

온몸이 뻣뻣해진다.

〈나는 가중한 것이 되었나니 갇혀 나갈 수 없고.〉

세 방향에서 동시에 보이지 않는 힘의 벽이 만들어져서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건 내가 만든 영역을 짓이기듯 밀어내고 있었다.

보이지도 않는 공간의 틈에 끼어, 앉지도 서지도 눕지도 못한 자세로 갇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커다란 구체를 보며 물었다.

“제사장으로 만들어 준다고 하지 않았나? 갑자기 뭐 하는 짓이야!”

일단 녀석에게 큰소리를 쳤지만 당황스러웠다.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나오다니.

어쩌면 전갈이 신사적이었던 게 아닐까.

- 쿠쿠쿠쿠…….

〈나는 낚시로 낚고 그물로 모으고 기뻐하는 자.〉

“당연히 거짓말이었겠죠! 정말로 그걸 믿으셨던 겁니까?”

검은 칠을 통해서 미녹이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이미 아득하다.

“나를 대체 왜 원했지?”

〈너 따위가 아니다. 내 먹잇감을 숨기지 말거라. 그것은 나를 위해 마련된 것. 내 노예의 시체를 당장 내어놓아라.〉

역시 놈도 시체를 원하고 있다.

‘제사장은 무슨… 전갈의 영지에 들어올 수 없으니 나를 꾀어내려고 했던 것뿐……

혐오스러운 녀석이다.

무엇보다 상대가 그 누가 됐든지,

네크로멘서의 시체를 넘길 생각은 절대 없다.

‘갖고 있지도 않지만……

어차피 곤란한 상황.

조금이라도 정보를 더 얻어내기 위해 일단 큰소리를 쳐 봤다.

“일단 풀어라! 일단 풀어 주고… 내 질문에 대답해라!”

하지만 이런 협상이 전혀 먹히지 않는 상대인 것 같다.

〈주제도 모르는 것이… 내 마음은 이미 변했다. 절망뿐인 시간 속에

영원히 가둬 주지…….>

“뭐야?”

그때 였다.

“크흐흐… 한번 잘 해 보십시오. 안 될 겁니다. 의미 없는 짓이죠. 차원을 뚫으시는 분이거든요.”

미녹의 ‘말’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바싸고의 구로 직접 전해졌다.

‘젠장……

저 녀석은 여유롭다.

나를 구해 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은데.

〈음……? 방은 세 겹인데 방 안에 방이 있어 모두 여섯이니…….>

- 과드득!

몸이 두 배로 답답해진다.

〈잘만 되는데 무슨 헛소리냐.〉

“어… 그게… 거기서 뭐 하십니까? 뚫고 나오시지요? 왜 계속 당하고 있으신가요?”

억지로 나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미녹의 외침이 들린다.

“제 차원을 뚫던 것처럼 뚫으시면 됩니다!”

“그게… 그때는 됐는데 지금은 안 되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십니까? 안쪽에서 난 길인데요? 그런 일이 우연히 벌어질 확률은 0입니다!”

위기다.

‘안 되는데 어쩌라는 것인지……

“너무 그렇게 여유를 부리시다가 걷잡을 수 없게 될지도 몰라요!”

‘젠장……

〈시간을 칠한다… 1.1 … 1.2…….>

위험하다.

〈1.3… 1.4 … 1.5, 1.6, 1.7, 1.9,

2.1, 2.4, 2.8…….>

느리다.

점점 느려진다. 생각도,감정도, 기억도 이 공간 안에서는 점점 더 느려지고 있었다.

내부의 시간은 바깥보다 3배.

4배,5배 느리게 흘러간다.

〈6, 7, 8, 9…….>

아니,빠른 건가?

꽤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은데, 차원 건너편에 보이는 미녹은 거의 움직임이 없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채 갇혀… 너는 무한을 경험하리라. 모두 다 뱉어낼 때까지 너라는 존재 자체도 망각하게 되겠지…….>

한 마디.

저 말을 듣는 데 걸린 시간만…….

체감 10분.

이대로라면 극히 위험하다.

뭐든 해야만 했다.

“아니! 그 시체는 나한테 없다고!

시간 낭비야!”

〈뭐… 웃기지… 마라…….>

벽은 그대로다.

뭔가 제물이 필요할 것 같다.

“나는 다 쓴 칼 하나만 있다고!

용의 힘이 깃든 나머지는 환상에 속아 전부 장례 지냈단 말이다!”

〈그럼 다 쓴 칼을 보여라.>

사방을 휘감은 공간의 압박감이 살짝 느슨해졌다.

“여기다!”

인벤토리에서 붉은색 단검을 꺼내 허공에 집어던졌다.

〈정말인가?〉

어느새 형상화된 ‘눈’이 미녹을 향했다.

〈그런 의도였다면 네 녀석을 결코 간과할 수 없구나…….>

증거물을 내놓았기 때문일까.

벽이 한층 더 느슨해졌다.

‘지금이 아니면……!’

양손에서 기스-제-라이의 단검을 꺼냈다.

계획대로다.

목표는 자살.

하지만,혹백의 두 자루 단검을 손에 죈 그 순간.

“으으윽.!”

위기라고 외칠 것도.

마력을 불어넣는다고 의식할 것도 없었다.

온몸의 기운이 몸서리를 칠 만큼 울컥울컥하며 강렬하게 단검으로 뽑혀 나가고 있다.

제어할 수 있는 힘이 아니다.

아깝다는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서로에게서 흘러나오는 힘.

칠혹의 칼날에서 나온 하얀 글자, 순백의 칼날에서 나온 검은 글자. 그들은 서로를 거세게 매도했다.

회색 따위는 한 점조차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처럼,서로를 밀어내고 물어뜯으며 용솟음쳤다.

싸우고,싸워도.

빛은 바래지 않았고.

어둠도 걷히지 않는다.

공간이 비명을 지르며 찢어질 뿐.

〈어,어떻게 이걸…! 크아아악……!>

바싸고의 손은,그 구는 충분히 새하얗지 않다.

‘회색’.

허공에 내민 손이 부서져 간다. 세계 자체가 어차피 회색일까. 주위에서 요란한 진동이 울린다.

뭐라고 하는 말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보이지도 않는다.

내 안에 흐르는 순수한 마력액을 제외하면,나조차도 어차피 회색에

불과하니까.

양손,양팔이,척추와 온몸이 모두 용납되지 않고 부서졌다.

두개골은 이미 없다.

기스-제-라이가.

어째서 이 단검을 쓰지 않았는지 알 것 같다는 기분이 들 뿐.

뭔가…….

상태창이 빼곡하게 떠오른다.

하지만 지금은 볼 수 없다.

‘서로 상극인… 두 용의… 힘이… 폭주한 건가?’

먼지가 된 내가,사방에 흩어지는 감각만이 마지막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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