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5화 트로이카 (7)
“맞아. 그 녀석은 우리 일곱 명 가운데 하나야.”
그렇다면.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바다 위에서 수녀와 함께 크라켄, 후작과 싸운 뒤.
다시 방문한 산장에서〈1/7>이라는 숫자가 처음으로 책에 나타났다.
루멘 발도프를 만난 뒤에 숫자가 〈2/7>에서〈3/7>으로 변했다.
캐빈 애슈턴의 책에서 봤던 시를 다시 떠올린다.
어디에나 있는 하나의 조각이 내 시체를 곱게 정리하고 있다
여기서 ‘조각’은 레드 플레이크.
〈깨진 조각들과 접촉하시오.〉
<3/7>
〈1/7>에서〈2/7>로 이어지는.
중간의 공백이.
방금,확실하게 채워졌다.
“레드 플레이크. 내가 너희들을 만날 때마다 이 숫자가 꾸준하게 늘어나고 있다.”
마지막 장에 쓰인 숫자를 들어서 보여 줬다.
“묻겠다. 캐빈 애슈턴은 누구지?”
지혜는 물론.
종종 스킬마저도 고작 책 한 권에 심어 놓는 존재.
마법사는 이런 것까지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지 경악했던 인간.
‘지혜가 올랐지.’
의심할 것도 없이 이 책은 분명히 애슈턴이 썼으며.
‘만날 때마다 숫자가 변하는 건.’
애슈턴과 레드 플레이크가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뜻이다.
그 어느 때보다.
캐빈 애슈턴의 정체에 가까워졌다는 직감이 든다.
하지만 여우의 답변은 단호했다.
“몰라.”
“지금 장난하나……!”
당황과 분노가 뒤범벅된 외침이
터져 나왔다.
경매장 상인과 정확히 같은 대답.
저런 건 절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반응이 아니다.
“말하기 싫으면 그렇다고……
본격적으로 따지려는 순간.
수녀가 말을 이었다.
“그게 언제나 정해진 대답이었지. 레드 플레이크는, 캐빈 애슈턴에 대해서 몰라야만 해.”
“그게 무슨 뜻이지?”
“애슈턴은 유산을 남기며 자기에 대해서 결코 알려고 하지도 말고, 외부에도 숨기도록 했어. 유산을
받는 우리의 첫 번째 규칙이야.” 수녀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캐빈 애슈턴의 이름이 나온 이후 시종일관 진지한 표정이었다.
“유산이라면……
“이런 거.”
별빛청여우는 벗은 가면을 다시 살짝 위로 들었다.
그리고,천천히 다시 덮어썼다.
파란색 잔상이 얼굴에 달라붙기 직전 그녀는 가면을 내려놓았다.
투과. 감정. 변조.
지금껏 본 것만 해도 믿을 수 없는 성능을 지닌 가면이다.
“그리고 이런 거.”
- 툭.
수녀가 풍뎅이의 날개를 손으로 어루만졌다.
그 기체를 타고 회색빛 거성들이 조약돌만 한 크기로 보일 만큼 높이 날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걸 애슈턴에게 받았다는 건가? 직접 만나서?”
다급히 되물었다.
수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만난 적 없어. 유산은 전대 여우로부터 승계됐다.”
전대 여우라니.
레드 플레이크는 오랜 세월 동안 저런 걸 갖고 이어져 온 조직이란 말인가.
“그리고 우리 레드 플레이크는… 계속 유산을 찾을 의무가 있지.”
애슈턴에 대해 몰라야 한다면서, 별빛청여우는 많은 걸 내 앞에서 털어놓고 있었다.
기스-제-라이가 수녀를 묘한 눈으로 바라봤다.
“암살교단인 이유는,혹시 유산을
다른 자들이 가지고 있으면 죽여서 빼앗아야 하기 때문이지. 풍뎅이 페르시우스도 엠버의 인물에게서 그렇게 빼앗은 유산 중에 하나고.”
“…유산이라는 걸 당신들은 대체 몇 개나 가지고 있는 거지?”
“이 가면처럼 각 이름이 물려받는 고유유산이 일단 하나. 그 외에는 선대가 탈취하거나 획득한 것들이지. 당대에 따라 본부에 유산을 맡기고 맨몸으로 활동하는 경우도 있다. 루멘 발도프도 그런 것 같더군.”
캐빈 애슈턴.
그는 뭘 하고 싶었던 걸까?
뭐든 하고 싶었다면.
이런 터무니없는 유산을 물려줄 정도로 강대한 자원이 있으면서.
왜 직접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경악스러울 만큼 강력한 조직을 만들어 낼 수 있었으면서.
왜 굳이 내가 자신의 책을 따라가게 했을까?
왜 나를?
내가 특별한 점은.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회귀……?’
그렇다면.
애슈턴이라는 존재는 도대체 그걸 어떻게 알았다는 거지?
가면을 벗은 수녀는 똑바로 선 채 눈을 감고 있다.
말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굳게 닫힌 눈도 입도 열릴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기스-제-라이에게 물었다.
“당신… 당신은 애슈턴에 대해서 뭘 알고 있지?”
네크로멘서는 붉은 입술을 작게 뻐끔거렸다.
“내가 레드 플레이크의 명예 사제로
들어온 건,애초에 동방에서 만난 캐빈 애슈턴의 부탁이었어.”
기스-제-라이가 말을 들은 나는 경악으로 굳어졌다.
아무런 반응도 보일 수 없었다.
캐빈 애슈턴과.
기스-제-라이가 만났다니.
왜 지금에서야 알았단 말인가?
하지만.
예전의 만남에서 물었더라면.
그녀는 대답했을까.
얼마 전까지 회귀도 믿지 않았던 기스-제-라이다.
머릿속을 한 가지 감정이 채웠다.
더 듣고 싶다.
물을 엄두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듣고 싶었다.
네크로멘서는 내 심정을 읽듯이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때는 캐빈 애슈턴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았지만……. 그래,자세하게 알려 주지.”
웅크렸던 등불이 흔들렸다.
나는 수렁처럼 그녀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 ♦ *
- 쏴•아아아
비가 멎을 기세도 없이 퍼붓는다.
기스-제-라이가 억지로 혼을 묶어 일으킨 시체들이 승천하지 못하고 훌리는 눈물인가 보다.
하지만 네크로멘서는.
‘이게 사령들의 절규인가?’
그 비가 달았다.
저주와 함께 바닥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검은 안개도 불쾌하지 않았다.
이름난 무사들의 격전지.
위패位牌 하나하나마다 만들어진 기와지붕이 저주에 삭아간다.
“어차피.”
- 파삭.
떨어진 기와를 발끝으로 짓이기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싸움 좋아하는 놈들이었잖아?”
다시 일으키는 데 문제는 없다.
사령술.
억지로 지상에 묶인 사령死靈은
과거를 잊어버린 망령t靈이 되고, 망령은 아무것도 없는 제 처지를 깨달아 악령惡靈이 된다.
악령들은 매일 그녀를 저주했지만 기스-제-라이는 부서지지 않았다.
“이제 인간은 충분하고……
一 철퍽.
사령술의 오의를 깨달은 그녀를 막을 것은 없었다.
더 강하고 특이한 것을 일으켜서 지배하기 위해 세계를 탐험했다.
그녀가 걷는 한 걸음마다 죽은 지
오래된 것이 일어났고,너무 오래 살아 주변을 잡아먹는 것들이 죽고 새로 일어나 권속이 되었다.
그런 그녀가 죽은 자들의 군주인 바싸고에게 선택받은 건 당연한 결과였다.
죽음과 삶 사이에 걸쳐.
몸의 절반이 각인화된 상태에서.
제3좌의 힘에 짓눌린 악령들은 더 이상 그녀를 저주하지 않았고, 네크로멘서는 마왕의 각인이 주는 조용함을 인정했다.
모든 면에서 이미 일가를 이뤄낸 그녀가 홉수의 권능을 개화한 것도 그때 즈음.
하지만 그녀가 밤낮으로 되풀이되던 저주를 그리워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답답해.’
마왕의 힘을 뚫고 저주를 들려줄 강력한 존재를 찾아 헤댔다.
이제 더 이상 들리지 않는 절규가 애달팠다.
원혼들의 절규를 가까이 함으로서 죽음에 대한 감성이 피어난다.
결코 깨끗해질 수 없는 악령들의 아우성이 없다면 삶은 밋밋하다.
그게 기스-제-라이가 최고로 치는 풍류였다.
발작적인 저주 속에서 혼에 대해 깊이 이해하는 것이 그녀가 이만큼 강해진 원동력이기도 했다.
‘재미없군.’
둔해진 감각으로.
네크로멘서는 생각했다.
‘바싸고를 죽인다.’
최고의 유희를 잃어버린 그녀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마왕의 상극.
린트부름의 힘을 찾아 방랑하고.
그 결과를 얻은 지도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을 때였다.
“요,요괴가 있답니다!”
반인반골半人半骨의 그녀가 뻗은 촉수에 잡혀 허공에서 허우적대는 청년이 뱉은 소리였다.
굳이 죽이고 일으킬 가치도 없는 미약한 존재였다.
하나 그녀 쪽으로 도망칠 정도로 두려웠다는 요괴가 흥미로웠다.
“들어 보자.”
또 다른 자극이 될지도 몰랐다.
“이 요괴는… 하,향기입니다.”
더듬거리는 청년이 말을 이었다.
“단풍도 별 볼 일 없고,꽃나무도 크지 않은 저희 마을에 어째서 이런
요괴가 나타났는지……
모든 요괴妖怪가 그렇듯 사내가 털어놓는 이야기도 기묘했다.
“그건 향기에서 향기로 퍼집니다. 실체가 없고,살아 있는 인간에서 인간으로 옮겨 가지요. 향기와 함께 말입니다.”
요괴를 들이마실까 두렵다는 듯 청년은 홈칫 숨을 참았다.
더듬더듬 이야기가 이어졌다.
요괴가 들린 인간은 혼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그게 어떻단 말인가.
기스-제-라이는 청년을 바라봤다.
“그걸 왜 두려워하지?”
“아,아무도 퇴치할 수 없어서… 그렇습니다.”
아무도 퇴치할 수 없어서.
그녀가 있는 쪽으로 도망칠 만큼.
두려워한다.
기스-제-라이는 관심이 생겼다.
청년을 놓아주고 린트부름을 찾아 여행하다가 비숫한 방을 보았다.
실력 있다는 자들이 찾아갔지만, 퇴치는 번번이 실패했고,이름값은 점점 높아지기만 했다.
‘우습군.’
인간을 찢어 먹는 잔혹한 요괴는 얼마든지 널려 있다.
강한 자들도 얼마든지 널려 있다.
그녀만 해도 그러하다.
하지만 그중어떤 사냥감에게도 이만큼이나 많은 자가 몰리지는 않는다.
‘강하고… 선해서인가.’
인간을 해치지 않는,
이름 높은 요괴.
사냥에 실패해도 끔찍한 꼴 따윈 당하지 않아서일지도 모른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가 봐야겠군.’
요괴가 나타난다는 마을 입구.
기스-제-라이는 주위를 둘러봤다.
사람은 없었다.
의뢰를 받아들일 것을 공표했다.
감히 그녀와 견주려는 사냥꾼은 없었으며,악명 높은 네크로멘서가 방문한다는 소식에 주민들도 밖에 나오지 않고 조용했다.
'으음.’
형태 없는 요괴를 상대한 경험이 적은 건 아니다.
물에 기생하는 요괴.
안개에 기생하는 요괴.
불씨에 깃드는 요괴도 보아왔다.
퇴마의 지식도 적지 않다.
‘비강에 기생하는 형태인가.’
숙주의 사방을 봉쇄하고.
바람을 빨아들이는 마법으로 강제 봉인하면 끝이다.
누구에게 깃들었는지 묻기 위해 의뢰를 내건 촌장을 찾아갔다.
대가를 지급하기로 약속한 인간도 촌장이었으므로 어차피 처음부터 만나야 했다.
“멀리서 잘 왔네.”
세월이 머리카락에 하얗게 지나가 있었다.
네크로멘서는 자신을 부른 눈앞의 존재를 일별했다.
그녀의 안목이라면.
보자마자 알아차릴 수밖에 없다.
“네가 그 요괴냐?”
촌장이 피식 웃었다.
“환영하네.”
당연했다.
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말을 하지 못할 리가 없다.
말을 할 수 있다면.
헛소문을 내지 못할 리가 없다.
원하는 상대를 부르지 못할 리가 없고.
의뢰를 맡기지 못할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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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너,설마… 나를 찍었냐?”
요괴는 기스-제-라이를 노렸다.
“그렇지. 잘 알고 있구먼.”
네크로멘서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말도 제대로 안 나왔다.
그렇게 이틀의 싸움이 벌어졌다.
첫째 날,정오.
기스-제-라이는 마법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첫째 날,자정.
요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새벽.
그림자에도 바깥쪽 그림자固雨와 안쪽 그림자景가 있음을 깨달았다.
다시 자정.
현상이 나타나는 숙條을.
사라지는 홀怒을 깨달았다.
이틀간의 싸움은,싸움이 아니라. 따라 할 수 없는 가르침이었다. 답이 나오지 않는 싸움의 도중.
기스-제-라이가 용의 힘이 담긴 단검을 빼 들었을 때였다.
여유롭게 싸우던 촌장이 그녀를 만류했다.
“나는 흔적이네. 흔적과의 싸움에 힘쓸 것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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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떡이던 그녀가 멈췄다.
싸우는 내내 봐주고 있다.
적은,분명히.
자신에게 말하려는 게 있었다.
그 생각에 기스-제-라이도 단검을 바로 해방하지 못했다.
촌장이 입을 열었다.
“강한 것을 찾지 않았나? 동방에 린트부름의 힘이 잠들어 있는 곳 하나를 더 알려 주겠네.”
“너… 너는 뭐지? 이름을 대라.”
처음 맛본 철저한 패배.
싸움이라고도 부를 수조차 없이 허우적거린 기스-제-라이는 겨우 그 말을 꺼냈다.
노인은 위를 바라봤다.
계절은 아직 멀었는데도.
사흘 동안 싸움에서 온갖 기운을 받은 덕분인지 활짝 피었던 하얀 모란이 서서히 아래로 떨어졌다.
늦겨울 개울물에 천천히 흐르는 하얀 모란은 마치 연꽃 같았다.
“여기서는 유연流遠이라고 하세. 린트부름의 유적을 찾고,자네가 바다를 건너가 줄 곳에서는 캐빈 애슈턴이라고 하면 통할 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