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화 트로이카 (8)
그의 이름이 나온다.
다급히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지?”
기스-제-라이가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애슈턴은 린트부름의 유적이 잠든 장소를 알려 주었다. 동방에서 내가 발견하지 못했고,생각도 하지 못한 장소를 하나 알려 주더군.”
이어지는 이야기에 집중했다.
애슈턴은 서방으로 가는 시기와 그에 맞춘 항로도를 전해 주었고, 서방에서 레드 플레이크가 린트부름 탐색을 도와줄 거라 말했다고 했다.
“그리고 사라졌지.”
“사라… 졌다고?”
“레드 플레이크와 함께하면 언젠가 자신을 만날 거라는 말을 한 녀석과 다시 눈이 마주쳤을 때,남은 건 아무 기억도 없는 촌장뿐이었어.”
기스-제-라이는 거기서 더 이상 애슈턴을 쫓을 수 없었다.
일단 남겨진 지도를 따라갔다.
지도는 놀랄 만큼 정확했다.
그녀는 동방에 숨겨진 린트부름의 힘을 하나 더 회수하고 서방으로 향했다.
힘을 새긴 단검은 이제 세 자루.
세계의 끝이라고 알려진 바다를 건너야 했지만, 애슈턴이 알려 준 항로를 따라가자 기적처럼 폭우도 괴물도 없었다.
“그렇게 도착해서 레드 플레이크를 만났다. 서방에 있다는 린트부름의 유적들에 갈 차례였지.”
문득 의문이 들었다.
현재 기스-제-라이가 가진 단검도
세 자루다.
이상하다.
“서방에서는 뭘 얻은 거지?”
내 질문에 네크로멘서의 미간이 살짝 뒤틀렸다.
“그러니까,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뭐……?”
별빛청여우도 그때 일이 생각나 당황스러운 것처럼 머리를 감쌌다.
간신히 찾아낸 레드 플레이크는 린트부름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고, 기스-제-라이는 그게 정말이라는 사실을 몇 번씩 확인했다.
“그 이후로 혼자서 대륙을 한참
뒤지고,나중에는 수녀를 포함해 레드 플레이크의 도움도 받았지만 유적 따위는 없었어.”
그 어떤 뜬소문도.
린트부름에 대해서는 놀라울 만큼 아무런 실마리조차 없었다.
“동방에서는 진짜로 알려 주더니……. 생각해 보면 나를 여기로 보내려는 수작이었던 것 같다.”
간단한 이야기다.
바다까지 건너가게 하려면 확실한 신뢰를 쌓는 게 먼저다.
정말 린트부름의 유적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는지.
아니면 애슈턴이 기스-제-라이에게 의도적으로 다른 것들을 숨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네크로멘서는 기만당했고.
자력으로 이런저런 단서를 이용해 린트부름의 유적을 찾던 동방으로 돌아갈 수조차 없었다.
“항로가 완전히 변해 있었으니까. 돌아가려 했다가 몇 번이고 배를 잃었지.”
바다가 얼마나 기괴한지는 충분히 알고 있다.
원해遠海의 초입에서 인어 떼와 크라켄을 만났다.
“결국 애슈턴을 다시 만나 따지기 위해서라도,계속 레드 플레이크와 함께할 수밖에 없었다.”
의문이 떠오른다.
기스-제-라이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는 동방에서부터 마왕의 힘을 몸 반쪽에 봉인하고 죽음을 부리는 사령 술사였다.
피에 굶주린 살인마는 아니더라도 누군가를 죽이고 다시 일으키거나, 고이 잠든 영혼을 다시 속박하는 데 일말의 거리낌도 없었다.
아무리 암살교단이라고는 해도.
이런 네크로멘서를 레드 플레이크가
순순히 받아 줬단 말인가?
지금껏 경험한 바로는.
레드 플레이크는 기스-제-라이에게 일방적으로 밀릴 만큼 만만한 집단은 아니었다.
이런 질문에 수녀가 대답했다.
“당연하지. 계시가 있었으니까.”
“계시?”
난데없는 단어였다.
별빛청여우가 네크로멘서를 흘끗 쳐다본다.
마치 이런 것까지 말해도 되냐는 표정이지만 네크로멘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말해 줘.”
수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떤 식이든 우리에게 기묘한 메시지들이 전달되곤 해. 활동을 조금 줄이라든가,유산을 어디에 숨기라든가.”
“그럼 너희들은 그 말을 듣나?”
“물론이지. 애초에 우리에게 유산을 남긴 것도 애슈턴인 데다……
여러 사례가 이어진다.
가격이 급등할 약초의 매입.
위법 도박장의 자금이 묻힌 위치.
황실의 깊숙한 동향.
무엇보다도.
후대後代를 이어 나갈 후보들.
그런 정보들이 나뭇잎에 쓰인 글자 들이나.
발신자 없는 편지로 전해져 왔다.
메시지는 항상 정확했고.
그 덕에 레드 플레이크는 위기를 피하고 조직을 보존해 왔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온 메시지는 네크로멘서를 명예 회원으로 받아 놓으라는 내용이었다.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렇게 레드 플레이크에 들어간 기스-제-라이는 하릴없이 서방을
떠돌았다.
처음으로 체념이라는 감정이 몸에 스며들었다.
슬슬 배회가 지긋지긋해질 무렵.
애슈턴에게 압도당했던 무력감이 조금씩 잊혀 갈 때.
다시 한 번 세상에 붉은 날개를 펼치고 싶었을 때.
시기를 맞춘 듯 레드 플레이크에 들어온 황제 암살 의뢰는 괜찮은 기분 전환이었다.
린트부름의 힘 대신 자유 연합의 영응 묘역이라도 받아 내기 위해 기스-제-라이는 의뢰를 수락했다.
“그러다가 너를 만난 거지.” 그녀에게는 첫 번째 만남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오랫동안 반복된 만남이었다.
처음에는 흥미롭게만 생각하고서 미쳤다고 무시하고.
다음에는 계획을 세운 걸 엎을 수 없다고 무시하고.
그다음은 만나서 해야 할 말에 대해 알려 주고.
최근에는 마왕에게 살해당하고.
이제야,여기까지 왔다.
머리가 복잡하다.
나는 수녀에게 물었다.
“레드 플레이크 쪽에서 애슈턴에 접촉할 수는 없냐?”
수녀가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해. 우리야 애초에 그럴 생각도 하지 않지만,기스는 혼자 애슈턴의 메시지를 추적하려 했어. 그리고 전부 실패했지.”
“마지막 접촉은 언제였지?”
“기스를 받아들이라고 전했을 때. 7년 전이었어.”
적어도 그때까지는 존재했다는 이야기.
‘아니,그런 차원이 아니야.’
동방에서는 촌장으로 나타나고.
서방에서는 암살교단에 메시지를 전한다.
'최소한… 둘..
공간에 구애받지 않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궁금한 건 더 있었다.
“혹시… 그 계시라는 것. 거기서
나를 언급한 적은 없나?”
뜬금없는 질문은 아니다.
애슈턴은 분명히 나와 의도적으로 촘촘하게 얽혀 들고 있다.
내 앞에 애슈턴이 준비한 무언가가 계속해서 나타난다.
수녀가 고개를 저었다.
“전혀 없었어.”
“그럼 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캐빈 애슈턴은 이렇게까지 나와 엮이면서도 왜 레드 플레이크에게 나를 언급하지 않은 걸까?
한참을 헤매고.
수많은 죽음을 넘어섰다.
내가 이들을 찾는 것보다는.
이들이 나를 찾게 하는 편이 휠씬 쉬웠을 텐데.
사라진 애슈턴을 향해 질문한다.
생각에 빠졌을 때.
“하지만,내 조각은 소명3命.”
“으음……?”
갑자기 수녀가 말을 잇는다.
“부름을 받아 몸을 바치는 거야. 지식을 관장하는 건 나 말고 다른 멤버지. 우리는 각자 가진 조각이 다르거든. 그……
수녀가 꺼내려던 말을 거뒀다.
“기스의 부탁으로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대부분 말해 줬어. 정말… 이래도 되는 걸까 몰라.”
수녀는 분명히 레드 플레이크의 첫 번째 규칙을 깼다.
‘기스-제-라이를 위해서……?*
아마도 명예회원도 모를 핵심적인 비밀을 나에게 말해 준 것이다.
누설자에게 어떤 규제가 있을지.
어떤 비참한 결말이 있을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중간에 말을 끊었지만 더 요구할 기분은 들지 않았다.
“고마워.”
네크로멘서가 대신 나직이 답하며 말을 이었다.
“애슈턴은 너를 일부러 피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걸. 네가 스스로 레드 플레이크를 찾아낼 때까지
엮이지 않게 한 걸지도 몰라.”
“드디어 애슈턴을 만날 수 있나 했는데……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기스-제-라이가 그렇게 뒤졌는데 찾지 못한 상대다.
내가 닿을 수 있을까?
문득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캐빈 애슈턴이란 사람… 요괴… 아니,뭐가 됐든 말이죠. 그자는 기스-제-라이 씨를 왜 여기로 오게 했을까요? 서쪽으로요.”
어느새 바싹 다가와 조용히 듣던 레나가 속삭이듯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보기에는……
수녀가 입을 열고.
“당연하지.”
기스-제-라이가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나도 문득 떠오르는 게 있다.
“나를 너와 접촉시키려 한 거다. 그 외에는 없어.”
‘시나리오……
설마 거기까지 애슈턴이 안배해 놓았다는 이야기인가.
“재밌네요. 레드 플레이크가 특정
정보를 잠궈 달라고 트로핀 여단에 요청한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군요. 접수했어요. 캐빈 애슈턴이라……
레나가 흥미롭다는 듯 웃음 짓고 있었다.
스친 그녀의 눈빛은 언제나처럼 흐려지지 않고 명징했다.
«으..w
당황하는 표정의 수녀에게 레나가 안심하라는 듯 슬쩍 손을 들었다.
“‘죽을’ 때까지 비밀로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뭐… 나야 믿을 수밖에 없네.”
가볍게 한숨을 쉬는 수녀를 보고
레나는 큭큭 웃는다.
“그 어쩔 수 없는 한숨 좋았어요. 저는 무력한 분에게 약하거든요.”
이마를 짚는 수녀를 보고 입술을 가볍게 할은 레나가 주제를 계속 진행했다.
“그런데,그 애슈턴이라는 자의 정체가 뭐건… 시나리오 클리어가 먼저 아닐까요? 그래야 그 존재와 더 가까워질 것 같기도 하고.”
또박또박 디디는 듯한 레나의 말에 기스-제-라이가 끄덕였다.
“옳다.”
나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책에〈시나리오 승급 시작〉이라는 문자가 떠올랐다. 녀석은 분명히 이 모든 것과 관련되어 있다.
“레나,우리가 세운 계획을 이제 설명할 차례야.”
네크로멘서도, 암살교단의 수녀도, 나도 동시에 그녀를 바라봤다.
“오시죠.”
부름에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가서 테이블을 둘러쌌다.
넓게 펼쳐진 지도의 한 점.
익숙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레나가 말을 이었다.
“먼저.”
가리키는 도시는 에라스트였다.
“에라스트 내 유령의 위치는 모두 파악됐습니다. 활동에 걸리적거릴 유령들을 최우선 몰살합니다.”
생각하지도 못한 말이었다.
“유령을… 전부 죽인다니……
절대적인 은신 능력을 가진 그들을 어떻게 전부 파악했는지는 몰라도.
소녀 공작의 직속으로 근위대를 가볍게 압도하는 수준의 그자들을 그럭저럭 몰살한다고 쳐도.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부하들과 갑자기 연락이 끊기면.
당장 제국제일검인 소녀 공작부터 가만히 있지 않을 게 당연하다.
하지만 레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에라스트 북동쪽의 커다란 도시를 이어서 가리켰다.
“다음으로,그라스미어 영주위를 루비아에게 물려줍니다.”
“무슨… 소리야?”
“기스-제-라이,보여 주세요.”
“물론이지.”
- 스윽!
그녀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 저벅.
그녀의 군단에 섞여 있던 무언가가 천천히 산장으로 걸어 들어왔다.
“사냥꾼……?”
- 저벅.
익숙한 얼굴이었다.
트롤이 걸릴 함정을 만들어 놓은 여섯 명의 사냥꾼 가운데 하나.
아직도 손에는 장궁을 들고. 허리에는 투창을 메고 있다. 당연하게도 경계할 수준 따위는
아니지만.
문제는.
어딘가 미묘하게 어색하다.
머지않아 눈앞의 사냥꾼이 산장에 있다 사라진 무언가와 홉사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박제……?’
“사냥꾼 빈스본입니다.”
하지만 그건,
말을 하는 박제였다.
“기스-제-라이 님께 충성을 바치고 있습니다.”
굳어진 나를 보면서 네크로멘서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하… 너,대체 뭘 놀라는 거냐? 설마, 진짜로,내가 좀비를 만들지 못한다고 생각했던 건 아니겠지? 어서 아니라고 해 주지 않을래?”
“하지만……
이건 좀비 따위가 아니었다.
오히려 평범한 인간보다도 자세가
훨씬 더 올바르다.
기억에 있던 사냥꾼보다 훨씬 더 강화되어 있고.
“재한테 뭐 물어볼 거 없어?” 기스-제-라이가 독촉했다.
“너는… 너는… 사냥꾼으로서의 기억을 가지고 있나?”
몸 어느 한 곳 무너지지 않은.
어느 한 곳 썩어 가지 않은.
인간보다도 한층 깔끔한 느낌의 좀비가 입을 열었다.
“물론입니다. 기스-제-라이 님께서 제게 죽음을 주신 뒤에 더 기억이 잘 나는 것들도 있습니다.”
좀비는 기스-제-라이의 지시를 받아 유년기부터 살아온 삶을 죽 옮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한다.
“검기에 입문하지 못한 상급 기사 한 명과 동귀어진이 가능합니다. 산악 탐색,덫 제작이 특기입니다. 약 7일까지 무리 없이 연속 기동이 가능합니다.”
잠을 잘 필요도 없다는 이야기다.
“기스-제-라이에 대한 감정은?”
“그분께 일어난 게 저의 유일한 행운입니다. 그분의 말씀은 절대絶對. 오직 무한한 봉사와 복종뿐입니다.”
할 말을 잃고.
멍하니 기스-제-라이를 바라봤다.
그녀가 어깨를 으쏙했다.
“이게 진화進化 아닌가?”
“전부 다 이렇게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라스미어 영주 따위는 얼마든지 가능하지.”
“죽인 영주를 조종해서……
레나가 말을 받았다.
“루비아에게 영주위를 물려주게 만들 겁니다. 주변의 중역도 모두 이런 상태로 만들 거예요.”
네크로멘서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 영지를 발전시킬 필요가 있나? 이미 발전된 영지의 영주가 되면 그만이지.”
얼핏 그럴듯하지만.
“아니,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쥬라의 마법사나,검기를 쓰는 기사는 이상한 점을 알아챌 거다. 이들의 상태를 오랫동안 숨길 수는 없어! 무엇보다 유령들을 전부 다 죽인다니……! 제국 전체를 적으로 돌릴 셈인가? 아무리 너희들이라도 버틸 수 없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상식이다. 눈앞의 별빛청여우가. 기스-제-라이가.
레나가 이걸 모를 리 없다. 싸늘함이 등골을 타고 을라온다.
“버틸 생각 없다.”
네크로멘서가 피식 웃었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상식이다. 눈앞의 별빛청여우가. 기스-제-라이가.
레나가 이걸 모를 리 없다. 싸늘함이 등골을 타고 을라온다.
“버틸 생각 없다.”
네크로멘서가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