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8화 트로이카 (10)
“으윽……
지끈거리는 기억이 머리를 강하게 파고들고.
한 번도 겪은 적 없는 상황들이 마음을 비집는다.
캄감한 밤.
뜯어내듯 난폭한 손길.
곳곳에 뚫고 들어오는 칼날들.
시선에 담긴 욕망이 수면 아래의 영상들을 재생시켰다.
“가까이 오지 마……!”
루비아는 열 번째 아들에게 잡힌 손목을 얇은 쪽으로 빠르게 틀어 빼냈다.
어느새 손에는 그가 허리에 찼던 단검이 들려 있었다.
의도했다면 당사자 정도는 곧바로 죽일 수 있을 기술과 속도였다.
그윈이 혀를 찼다.
“쯧쯧… 저 아이는 왜 저런 꼴을 하고 있는 것이냐? 내 아이를 낳기 위해서는 몸뿐 아니라 정신도 모두 건강해야 하거늘. 행동거지가 저리 사나운 것을 보니 혹시……! 처녀가
아닌 것 아니냐?”
긴장감에 솜털이 곤두선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가문의 피를 온전히 이은 후손을 낳으려면 반드시 처녀여야 한다.
다른 잡종이 뿌려진 적이 있다면 그 땅에서 태어난 아이를 침!들러 가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연금술이 증명하고 있지.’
다행히도.
“아닙니다, 아버님. 분명히 처녀가 맞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여럿이서 감시하지 않았습니까?”
루비아의 곁에 시녀를 여럿 두어
남자가 붙지 않게 감시했다.
그 시녀를 총괄하는 역할을 맡은 아들이 안심하라는 듯 확신을 담아 대답했다.
그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도 순종은 배워야 하겠구나. 다치게 하지 말고 잡아 보거라.”
“예.”
비숫하게 생긴 열 명의 남자가 그녀를 둘러쌌다.
이번에는 방심하지 않은 채였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인간의 장막 너머로 늙은 그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크홈……! 중요한 발표가 있으니 모두 모이도록 전하여라. 날짜는 일주일 뒤가 좋겠구나.”
“혼약 발표를 하실 계획입니까?”
”그렇다. 내 후계를 낳을 부인의 책봉 아니더냐? 여하한 차질 없이 준비하여 라.”
“예!”
♦ ♦ ♦
갇힌 지 하루가 꼬박 지났다.
눈도 가리지 않고 묶지도 않은 채 가둔 덕에 시간의 흐름은 그럭저럭 알 수 있었다.
그녀가 갇힌 방은 의외로 말끔한 장소였다. 누워 있는 침대는 원래 사용하던 것보다도 나았다.
몸 관리를 하라고 하는 것인지, 오히려 에라스트에서 지낼 때보다 식단은 훨씬 호화로웠다.
- 똑똑.
“세 라비 입니다.”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좀 진정이 되십니까?”
말투는 정중하지만.
눈빛은 얼굴을 할는 것 같았다.
“이런 일을 벌이는 게 알려지면 에라스트 사람들이 정말 어지간히 기뻐하겠군요. 아무런 죄도 없이 납치 감금에다 강제 결혼이라니.”
루비아가 쏘아붙였다.
“딱히 당신의 잘못은 없습니다.”
세라비가 말을 이었다.
“그러나 에라스트 백성들도 딱히 잘못한 건 없지요.”
“그게 무슨……
“당신이 아버지와 결혼하지 않으면 에라스트 주민들이 지금보다 훨씬 힘들어질 겁니다.”
“더러운 협박이군요.”
“인간이란 건 원래 더럽습니다. 저는 있는 그대로 말할 뿐입니다. 당신 하나만 참으면 됩니다.”
“에라스트의 성녀라고 불리지만 실체는 한심할 만큼 이기적이군요. 고작 당신 하나 때문에 사람들이 피를 보게 만들 겁니까? 숭낙하고, 에라스트 행정관들에게 전하세요. 혼인 때문에 늦어진다고.”
비슷한 말들이 맴돌았고.
루비아는 거절했다.
에라스트 주민들이 행복해질까? 그럴 리 없다.
그녀에게 중성하는 자들을 오히려 기만하는 것에 불과하다.
에라스트 주민들이 챈들러 가문에 더욱 복속되는 결과는 사양.
무엇보다.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
루비아는 명확히 불행해진다. 그리고, 조금씩.
감금된 그녀에게 주는 음식물에
이상한 게 섞이기 시작했다.
아주 작은 알갱이.
묘하게 쓴맛.
몸의 변화로도 알 수 있다.
‘마약이다.’
마약은 입으로 복용해도 된다.
효과가 훨씬 더 낮아질 뿐이지만, 천천히 몰래 복용시킨다면 음식에 섞는 것 이상의 방법은 없겠지.
그녀는 투명한 물만 마시고 다른 음식은 버리기 시작했다.
굶주림과 감금.
몇 날 며칠을 방에 갇혀 있어서인지 머릿속에 끔찍한 기억이 계속해서
떠오른다.
하지만.
‘나는… 구해졌어.’
그 기억 속에 항상 그녀를 구하는 존재가 있었다.
죽은 적도 여러 번.
지독히 폭행당한 적도.
끔찍하게 고문당한 적도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이,구원받았다.
누군가가 세계에 루비아의 존속을 요구하면서 몇 번이고 반복해서, 그녀에게 달려와 구해 주고 있다.
항상 강하지만은 않고.
이런저런 실수도 많지만.
언제나 자신의 몸이 부서져 가며, 그녀를 거듭해서 지켜 주려 애쓰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
가슴이 죄어 온다.
반복해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죽어 가면서.
지켜 주는 걸 넘어서 그녀의 삶을 도우려고까지 애썼다.
‘아무 상관도 없으면서… 어떻게 그렇게까지……
눈앞에 모습이 그려지고.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
“•••루비아.”
지금처럼.
정말 소중하기에.
“괜찮은… 건가?”
환상으로 나타나 버리는 것이다.
“혹시 어떻게 된 건……
걱정하는 음성.
조심스러운 태도.
하지만 이렇게까지 생생하게 앞에
떠올려 버린다면.
역시,병病이 아닌가.
어쩌면 약의 작용일 수도…….
“루비아……!”
눈앞의 환상幻相이 그녀를 보고 애타게 묻는다.
“나를 잊어버린 건가?”
세상 모든 것을 잊어버린 것처럼.
눈앞에 나타난 그것은一
오직 빤히 루비아만을 바라보고, 말을 걸었다.
경계해서 물만 마셨다지만.
역시 무색무취의 약물이 식수에도 들어가 있었는지.
생생하게 떠오르는 환상을 보며 루비아는 커다란 눈을 아주 천천히 깜빡였다.
머리가 멍한 것도.
심장이 죄어오는 것도.
모두 약물의 까닭이겠지.
“나를 잊었다면… 그것대로 좋아. 아이작도 사라진 세계선이니까……. 하지만 이대로 너를 방치하면 계속 같은 결과가 반복되겠지.”
그는,망설인다.
그리고.
가장 어울리지 않는 말을 꺼낸다.
“미안하다. 동의 없이 세계선을 바꿀 수밖에 없겠어. 영주직를… 떠넘길게.”
* * *
- 딸랑!
그윈은 줄을 당겨 종을 울렸다.
한 번.
이것은 아들을 부르는 종이다.
종소리가 완전히 끝날 때까지도 사방은 조용했다.
"쯧." .
그원은 짧게 혀를 찼다.
평소라면 소리가 시작되는 즉시
부리나케 달려오던 아들들이다.
그러나 발소리도 없었다.
‘한심한 놈들.’
가주家主인 자신이 언제 부를지 모를 일이다.
밤에도 항상 귀를 기울여야 한다.
자리를 물려줄 만한 놈이 하나도 없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하자 더욱 마음이 무겁게 느껴졌다.
그윈은 인내심을 발휘해서 약간 더 기다렸다.
재차 빠르게 종을 울리는 것은, 오히려 영주의 권위를 떨어트리는 일이 된다.
하지만.
새롭게 아내로 맞을 에라스트의 관리관.
옛 영주 가문의 아이에게 보였던 싱싱한 생명력이 떠오르자 어쩔 수 없이 조바심이 끓었다.
- 딸랑!
이번에는 더 강하게 줄을 당겼다.
종소리가 영주실을 넘어 복도까지 가득 채우며 울려 퍼졌다.
첫 번째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크게 울렸지만.
여전히 아무도 오지 않았다.
이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내가 너무… 자비로웠나?’
아들들을 너무 오냐오냐하면서 키웠는지도 모른다.
규율에 복종하지 않는 것들에게는 처벌이 필요하다.
그는 채찍을 한 손에 말아 쥐고.
- 딸랑! 딸랑! 딸랑!
줄을 연거푸 세 번 잡아당겼다.
이 소리는 이제 성 전체에 울려 퍼질 것이다.
모두를 부르는 종.
듣는 자는 하던 일을 즉각 멈추고 바람처럼 영주의 발 앞에 꿇어야 마땅한 종소리다.
그제야,뒤늦게.
“예,아버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하고 있던 게냐! 너희는……
그윈의 노성이 슬쩍 잦아들었다. 마침 볼일이 있는 목소리다.
화를 내는 것보다도 일이 먼저다.
여자가 먼저다.
“그래,네가 에라스트의 아이를
담당했었지? 교육은 어떻게 되고 있느냐? 이제 순종하느냐? 시간이 별로 없다! 안 되면 알지 않느냐? 예전처럼 약물이라도 써서……!”
챈들러 그윈은 여자의 몸에 상처가 나는 것이 싫었다.
그런 폭력은 위대한 영주인 그가 아니라 평범한 범부凡夫들도 모두 할 수 있는 일이며.
외모가 상하면 여자의 본질적인 가치가 떨어진다.
대신 여자에게 정신精神은 의미가 없는 부분이므로 약물로 그것만을 개조하는 게 현명한 방법.
자손들도 모두 그 이념을 이어받아
살아가고 있었다.
“아버지,준비되었습니다.”
랜들러 세라비가 대답했다.
“그래. 들여보내거라!”
문 뒤에서.
- 스륵.
천들러 세라비가 슬쩍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고.
푸른 면사포를 쓴 신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호,결정을 내린 것이냐!”
수도에서 특별히 구해 온 드레스.
혼인식에 입힐 드레스였다.
화려한 보석을 휘감은 연분홍색의 드레스 자락이 아름다웠다.
“으홈.”
가날프게 떨리는 눈을 보는 것도 나름대로의 묘미겠으나.
자신이 걷어 줄 때까지 정숙하게 면사포를 쓰고 있는 것도 훌륭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미리 입어 보고 싶다고 하여……
“허허. 기특하구나. 곁에 오거라.”
꽃과 나비를 여러 겹으로 마감해 볼륨을 살린 드레스 자락이 바닥에
끌려 살아 있는 듯이 움직인다.
“후… 후후……
20미터.
_ 쿡
면사포를 쓴 신부가 웃는다.
가벼운 웃음.
역시,조금 건방지지만.
여자가 저렇게 웃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
앙탈이라고 보아 넘길 수도 있다.
10미터.
세라비를 문앞에 세워 둔 채.
드레스를 입은 에라스트의 아이가 조금씩 그윈에게 가까워진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그윈의 다리가 저려 왔다.
‘뭐지?’
이상했다.
손발이 차가워지고 이유도 없이 몸이 떨린다.
“흐읍.”
침이 제대로 넘어가지 않을 만큼 숨이 가빠진다.
‘이게 무슨……r
무섭다.
분홍색 드레스에 장식된 보석이, 수놓아진 꽃이,나비가.
아니.
그 안의 존재가 채찍을 어느새 바닥에 떨어트릴 정도로 무서웠다.
루비아라는 아이일 텐데.
잘 길들여진 채로 자신의 후계를 낳을 여자.
무섭다는 건 있을 수 없는데도.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워지는 일이 어쩐지 두려웠다.
“너는……
가까이 다가오는 아들의 모습도 어딘가 이상하다.
낯빛은 자신보다도 새하얗고.
온기마저 하나 없이 차가웠다.
“네놈,얼굴이 왜 그러냐.”
“아하하핫……
하지만 아들의 대답 대신 낭랑한 웃음소리가 옆에서 울려 퍼졌다.
“거야 분칠을 안 했으니 그렇지. 홍조도 띄우고 할 게 제법 많은데… 하도 시끄럽게 종을 흔드는 탓에 일찍 와 버렸잖아?”
전혀 다른 목소리의 신부가.
- 스륵.
면사포를 벗어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