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9화 트로이카 (11)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 응?”
공포가 폭발한다.
“흐읍! 흐윽! 흐읍!”
그윈은 심장을 움켜쥐었다.
발끝에서부터 등골을 타고 구토가 치솟는다.
기괴한 용모.
사실 그런 것 따위에 겁을 먹을
나이와 경험은 아니다.
황실의 그림자인 유령.
그들과 은밀한 교류를 나누면서 기괴한 마물은 얼마든지 보아 왔다.
그러나 눈앞의 상대는•…“.
“홉… 흐읍! 끄홉!”
검기의 직전까지 간 무인으로서의 감각과.
70년간 세 도시의 권력을 누리며 쌓아온 직감이.
살아 있는 한 생물로서의 육감이 경고한다.
아니,선고한다.
죽는다.
여기서 죽는다.
도망칠 수도,유예할 수도 없다.
- 저벅.
“에,에라스트의 아이……! 그 애는 어디 있느냐!”
머릿속이 공포로 텅 빈 상태에서 오직 떠오르는 생각은 단 하나.
죽는다면.
임신을 시켜야 한다.
챈들러 가문을 위한 씨앗을 필히 자신이 남겨야 한다.
‘죽기 전에… 죽기 전에……
어디 있는지 모를 그 아이를 당장 찾아야 한다.
생명력을 짜내듯 그윈의 눈가가 실시간으로 한충 퀭해지며 항진된 성욕이 용암처럼 끓어올랐다.
최후의 씨앗을.
“어디……! 어디 있느냐……!”
그는 허우적거리며,
집무실 책상 안쪽에 숨겨진 비상 호출 레버를 당겼다.
- 탱! 뎅! 뎅!
성벽 안쪽에서.
음습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언젠가 자기에게 찾아온 자들.
혹시 아주 곤란한 일이 생길 경우 이 레버를 당기라고 했던…….
부서진 가면의 검귀들.
황실 직속이라며 터무니없는 힘을 보여 준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해결해 줄 것이다.
칼끝에서 검기마저 은은히 보이던 압도적인 실력자들이었다.
그리고.
안쪽에서 벨이 울리기가 무섭게 영주실 바깥 복도 가득히 인기척이
느껴졌다.
공포에 뻣뻣하게 질린 그윈마저도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수많은 인기척이 대놓고 다가오고 있었다.
“여,역시……!”
이렇게까지 즉각 나타날 줄이야.
구원이다.
절망 끝에서 빛이 비친다.
그윈은 순간적으로 허리를 펴고 쇳소리를 질렀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여기 기괴한 마물이 있습니다! 저를……r
- 끼릭.
一 끼리릭.
- 쿵. 쿵...
‘발소리.’
가깝고.
둔탁하다.
덜컹거리며 몸이 부딪히는 소리도 들렸다.
“그어어……
그러나 눈앞에 나타난 구원자들은 어딘가 이상했다. 얼굴에 걸치고 있는 조각난 가면은 틀림없었지만, 팔다리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럽고 느릿느릿했다.
“그어… 그어어……
스무 명이 넘는 그들이 한 번에 나타나 영주실로 걸어오자 공기가 부자연스럽게 울렁이는 것 같았다.
저분들이 대체 어떻게.
저렇게 많은 숫자가 있었던가?
아니, 무엇보다.
“왜,얘네 믿고 있었어? 왔으니 이제 인사라도 할래? 안타깝게도 한 가닥씩 하는 녀석들은 복원이 불가능해서,대충 일으켰어.”
‘사령… 술.?’
황실의 검귀들이 움직이는 모양은 전형적인 좀비.
이런 자들을.
스물이 넘게 죽였다고?
말도 안 되는 상황이지만.
결론은 더욱 명확해진다.
여기서 살해당한다.
그렇다면 그라스미어의 영주답게. 첸들러 가문의 가주답게.
“하... 하하하.. ”
억지로 웃음을 짜낸다.
당당해지자.
두렵지만.
70 평생을 그라스미어의 영주로 살아온 긍지가 있다.
휘하의 아들을 스무 명이나 남긴 업적이 있다.
그 아들들이 낳아 장성한 손자의 숫자도 무수하다.
“악마인지… 그 추종자인지 뭔지 모르겠으나……. 죽여라.”
“오호?”
“나를……. 죽인다 해도… 첸들러 가문은 영원하다. 이번 일은 즉시 황실에 알려지고, 토벌당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가문은 다시 영광을 찾을 것이니……. 내,내가 죽어도… 가문은… 남는다!”
“그래?”
드레스를 입은 ‘죽음’이 웃는다. 그리고,다음 순간.
- 스르륵.
마치 준비라도 되어 있었다는 듯, 어기적거리는 '가면’들과는 다르게 가벼운 몸놀림의 아들들이 문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여덟… 열들… 스물… 서른...
어느덧 드넓은 영주실도 인파로 가득 메워졌다.
아들,사촌,손자…….
이번에야말로 모두 다 익숙하기 그지없는 얼굴들.
그윈이 씨를 뿌렸고.
그원에게 복종하며.
대를 이어야 하는 첸들러 가문의 예비 후계자들이다.
하지만.
풍기는 분위기가 사못 다르다.
우둔하며 느릿느릿하던 육남도, 당당한 자세로 가뿐하게 그의 앞에 자리 잡고 있다.
무엇보다,차갑다.
남자 스무 명이 나타났는데 방의 온도가 올라가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윈을 서늘하게 찔렀다.
“너희는 여기서 뭘 하는 것이냐?”
- 부응!
익숙한 상대에게,익숙한 매질을 하며 발작적으로 공포를 피한다.
一 처억.
육남은 날아오는 채찍을 가볍게 손으로 잡아챘다.
“이……
그럴 능력도 없고.
담도 없는 녀석이었는데.
“저는 강해졌습니다,아버지.”
“주,죽은 거 아니냐?”
그때 다른 아들이 나타났다.
열네 번째던가.
좀처럼 눈에 띄지도 않던 조용한 녀석이었다.
“글쎄요. 훨씬 만족스럽습니다.”
“만… 족?”
“잘 필요 없고,먹지 않아도 되며, 생각할 수도 있지요. 오히려 욕구가 없으니 훨씬 또렷하게 말입니다.”
“그… 그게 무슨… 헛소리냐……. 그러면 아이도 낳을 수 있는 거냐? 교배를 할 수 있느냐? 우리 가문의 혈통을… 씨앗을 싱싱한 여자에게 계속 심을 수… 있냐는 말이다!”
“아버지.”
열네 번째 아들이 말을 이었다.
“그딴 걸 왜 해야 됩니까?”
“뭐… 라고?”
“많이 낳아 봤자 어차피 한 명만 영주가 될 거 아닙니까? 아버님의 선택 범위나 넓히려고요? 그런 건 거절입니다. '원래부터’ 말입니다.”
“이… 이것들이……. 너도 그러냐?
너도? 너도? 설마 너희 모두가… 그런 것이냐……?”
멀리 파견 나가 있던 아들들까지 모두 핏기도,온기도 한 점 없는 시체가 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에는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손자들까지 창백한 얼굴로 서 있다.
잔혹하다.
자신이 지배한다고 틀림없이 믿었던 그라스미어를.
잔혹한 신이 지배하고 있다.
그윈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현실이라고 믿기 힘들었다.
비틀거리며.
나타난 자손들 하나하나의 몸을 직접 잡아 본다.
차갑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만큼 온도도 차가웠다.
꿈이라는 편이 그럴듯하다.
70년 동안 살아오며 그의 대에서 가문을 최고로 번성시켰다.
그토록 노력해 왔는데.
모두 끝이란 말인가?
말이 되지 않는다.
이미 거의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그원은 결심을 내렸다.
치직도 믿을치직 없다.
역시 치직가" 직접 치직를 치직야만치직
_ 크크치직
아무 치직 치직수 치직
치직내치직 치직 씨 치직 뿌려
어디치직 라치직.
치직에치직 도.
그러나.
아무리 정신이 붕괴한 그윈이라도 면사포를 쓰고 있던 눈앞의 ‘죽음’을 ‘여자’라고 볼 수는 없었다.
찾아야 한다.
찾는다.
지금까지 쉰 번 넘게 임신시켰듯 이번에도 다시……!
그리고.
천부적인 감각 덕분일까.
하늘이 내린 걸까.
복도의 대들보에 걸터앉아 있는 ‘여자’가 보였다.
할 수 있다.
저 여자라면 할 수 있다.
아주 훌륭하다.
“너,너다……! 어서……!”
동요의 극치에 이르러 맛이 가 버린 눈빛에,대들보에 앉아 있던 '여자’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나 참……. 뭐라는 거야.”
“허억… 허억……
가까이 다가간다.
- 서걱.
가고 싶다.
한 발자국 더 앞으로 가야 한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면 할 수 있다.
- 끄드득.
하지만 ‘여자’에게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지독한 고통이 그를 찢는다.
“꾸……
가고 있는 건 맞을까?
“뀨……
말을 하려고 해도.
말 대신 목구멍 안에 꽂힌 얇은 파이프에서 피만 울컥 솟아난다.
“•••규!”
“상처가 보이면 곤란하니까.”
‘‘규우!”
이럴 수는 없다.
죽는 것보다도.
그것보다도 곤란한 것은.
계속 피가 빠진다.
‘의지’가 풀려 버린다.
첸들러 가문의 씨앗을 뿌릴 마지막 남은 산양이.
자기 자신이.
죽어 버린다.
“규!”
설마 챈들러 가문이 자기 대에서 완전히 소멸하는가.
부정하겠다.
“뀨우……
심장 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이제 퍼 올릴 피가.
피가 사라진다.
“다 된 것 같네요. 이제 생명을 부여하셔야죠.”
“하아… 이 짓도 더 못 해먹겠어. 솔직히 피곤하다니까?”
“즐길 만큼 즐기고 계시잖아요.”
“큭큭……
어디 선가,
이제 멈춘 심장 박동을 닮은.
노랫가락이 가슴 안에서 천천히 울려 퍼진다.
해사한 죽음이여.
굶주리던 죽음이여.
입을 다문 채 옆에서 고요히 홀러 다니던 죽음이여.
이제 거울을 열고 나와 표류하는 혼을 잡아…….
마음속이 녹아내리고.
머릿속에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이 달빛처럼 채워져 온다.
기스-제-라이.
나는 이제 그분을 섬긴다.
번식욕 따위는 가슴에서 깨끗이 흘러내려서.
- 과작.
바닥에 떨어져 투명한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나려는 순간.
“고작,이런 인간이었나요.”
애절하게 찾던 신부가 다가왔다.
‘에라스트의… 아이?’
- 스륵.
그녀의 옆으로.
살 한 점 붙어 있지 않은 해골이 붙어서 움직이고 있었다.
막 이지러지려던.
완전히 부서지려던 무언가가 다시 울컥 솟아오른다.
싱싱한 에라스트의 암컷이.
약물에 세뇌당해서 그윈 자신에게 바쳐야 할 눈길을.
터무니없게도 인간도 아닌 옆의 해골에게 향하고 있었다.
빼앗아야 한다.
가져야 한다.
내 …이를.
내 아…….
그런■ 내 자손■ 모두■
“끄어어……
첸들러 그윈은 시계추처럼 똑같은 자리에서 흔들거렸다.
“앗,정신이 붕괴해 버렸네.”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네크로멘서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떻게 된 거죠?”
“사실 정신을 유지한 채 좀비를 만드는 게 결코 쉬운 게 아니야. 절대안정을 취한 상태에서 고통도 없이 죽여야 하지. 넘어가는 순간을 잠이 들었다가 가뿐히 깨어났다고 생각하는 게 가장 좋아.”
“그럼… 이 남자는……
“혼이 소멸할 때까지,악몽 속에 갇혀 있을 가능성이 높겠지.”
기스-제-라이가 화사하게 웃으며 루비아에게 물었다.
“왜,가엾니?”
“…아니요. 휘말린 별 상관없는 자손들이 훨씬 불쌍하네요.”
루비아의 눈빛이 잠깐 흔들렸지만 그윈을 향한 말투는 단호했다.
미묘한 측은함과 자책감은 그원이 아니라 나머지를 향했다.
일제히 늘어선 아들들과 랜들러 가문의 방계들.
대부분 아는 얼굴이다.
자신을 집요하게 괴롭한 자들도.
주민들의 수탈에 앞장선 자들도.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첸들러 가문의 일원이라는 것 때문에 전혀
처벌받지 않은 자들도 많았지만.
가문의 재물로 부유하게 살았을 뿐 큰 악행이 기억나지 않는 자들도 드문드문 섞여 있었다.
루비아의 시선을 받은 이들 중에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아닙니다,아가씨. 저희는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창백한 남자는 피를 다 뿜어내고 혼들거리는 그윈을 보며 말했다.
“저건,굳이 없어도 영주 계승에 지장은 없을 겁니다. 일은 저희가 깔끔히 처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