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349화 (349/458)

392화 트로이카 (14)

푸르게 떠오르는 메시지를 보고 생각했다.

‘이건……

캐빈 애슈턴의 안배다.

의심의 여지는 없다.

아니,이런 걸 안배라고 말해도 되는 걸까.

두려움이 스멀스멀 사방에서 달라 붙는다.

캐빈 애슈턴은 도대체 어디까지

내다보고 있다는 말인가?

기스-제-라이를 동방에서 여기로 보냈다면 지금도 어딘가 살아 있을 확률이 높다.

도대체 뭘 생각하면서.

뭘 계획해 왔을까.

‘어디까지 내다보고 있는 거냐.’

얼마나 많은 힘과 노력이 있어야 이렇게까지 치밀한 계획을 세울 수 있는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수녀가 지도 전체를 스캔해서 엠버메어로 가져갔어. 판독 결과가 나오는 대로 돌아오겠대.”

석판 위 반짝이는 것은 암살교단

본부의 기기를 사용해야 읽을 수 있는 특수한 기호들.

그 외에도 본부에서 정밀 감식이 필요한 것이 대부분이라고 수녀가 말했다고 했다.

‘…판독이라.’

어떤 결과가 나을지 기대보다는 두려움에 싸여 있다.

황실의 최정예 유령들을 몰살시킨 상태에다,레드 플레이크의 전폭적 협조까지 얻을 수 있는 상태에서만 볼 수 있는 ‘유산’은 대체 무엇을 말해 줄 것인가.

“저도 지도에서 알아볼 수 있는 게 전혀 없네요.”

레나도,루비아도,내사과장도.

지도 위에 표시된 기호들은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한동안 생각에 빠져 석판 전도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나 참……

문득 내사과장이 눈살을 찌푸리며 허공을 힐끗 노려봤다.

“맞이해야 할 승냥이 새끼가 있다. 연락도 없이 하필 지금 오다니, 시기가 좀 묘한데.”

“누구라고?”

전방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감지되지 않는다.

“어,유령 한 마리야.”

그 말을 듣는 순간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는다.

마왕의 은폐가 있어도 상위 유령은 하위 유령을 탐지한다.

에라스트에 머물던 그림자는 모두 죽였으니.

다른 녀석이라면 수도에서 파견되어 오는 게 분명했다.

‘이제 시작이군.’

걱정했던 일은 지금부터다.

시아는 우리를 보고 말했다.

“잠깐 안쪽에 들어가 주겠어?”

나와 루비아는 레나의 안내를 받아 빠르게 석판 뒤에 섰다.

내 사과장은 능숙하게 기 계장치를 조작했고,벽이 조용하게 아래에서 위로 솟아오르며 복잡한 기계들과 석판과 우리를 모조리 가려 버렸다.

달빛이 사라졌다.

석판 위의 잔광殘光은 곧 빠르게 사그라졌다.

안쪽은 어둠뿐이었다.

다시 내성으로 돌아가긴 늦었다.

앞에는 유령.

뒤에는 기괴한 석판.

한껏 치솟은 긴장감을,

“…■三L크 ”

옆에서 들려오는 레나의 웃음이 가볍게 흩어 버렸다.

“무슨 일이야?”

“셋이 숨어서 이러고 있는 게 좀 웃기잖아요. 얼어붙어서.”

“웃기는 건가……

“당연하죠. 누가 오든 상관없이 우리가 무조건 이긴다고요.”

“갑자기 로랑스 공작이라도 오면 곤란하겠지만 그러면 내사과장이 애초에 감지를 못 했겠죠?”

일리는 있는 말이었다.

“소리 내도 돼요?”

루비아가 옆에서 깨끗한 두 눈을 반짝거린다.

긴장이라도 한 건지,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는 게 느껴졌다.

레나가 루비아 쪽으로 몸을 슬쩍 붙이며 말했다.

“괜찮아요,영주님. 벽을 망치로 힘껏 두드려도 될 거예요. 여기는 액자 안쪽이니까요.”

“액자… 안이요?”

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공간 안에서는 은폐 효과를 그대로 누릴 수 있는 반면,거꾸로

바깥은 그대로 감지할 수 있지요. 비밀 통로와 내성 관계가 여기서도 적용된다고 보시면 되요.”

레나의 설명이 이어진다.

목소리는 조금도 죽이지 않는다.

하지만 바깥에서 다가오는 유령을 기다리는 내사과장은 반응이 없다.

‘정말 안 들리는 건가.’

“유령이라니… 설마 우리가 벌인 일을 눈치랜 건가.”

“을 게 온 거죠. 사실 이렇게까지 움직였는데,별일 없던 것만 해도 운이 좋았던 거예요.”

그럴지도 모른다.

남부 3성域의 영주를 바꾸고.

패자®者의 가문을 모조리 좀비로 만들어 놓았음에도.

아직 황실은 움직이지 않았다.

‘기이할 정도지.’

내사과장이 최대한 연막을 친다고 해도 어쨌거나 1인.

구멍은 생길 수밖에 없다.

그때.

- 저벅. 저벅. 저벅…….

중간에서 갑자기 생겨난 기척이

벽을 두고 가까이서 멈췄다.

시아가 있는 바로 그 공간이었다.

가면을 벗은 건가.’

“과장님,접니다.”

낯선 남자의 목소리와.

“뭐야,웬일로 네가 여기 왔어? 그쪽도 어지간히 한가한가 봐?”

자기 손으로 에라스트의 부하들을 몰살한 시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까지 긴장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태연한 말투였다.

“하하하… 솔직히 여유로우신 건 과장님 아닙니까? 황실의 두 번째로 날카로운 그림자께서 이런 구석에

박혀 계시니 기분이 어떠십니까?” 빈정대며 올라오는 말투를 시아가 긁어내리듯 쏘아붙였다.

“긁지 마라. 일 좀 잘한다고 정신 놔 버렸냐?”

“에이. 사랑합니다,과장님! 일부러 심심하실까 봐 특별히 제가 왔어요. 옆에 붙어 있어도 괜찮겠지요?”

“자꾸 기어오르면 손목 잘린단다. 어떡하니? 그럼 이제 일 잘한다는 소리도 못 들을 텐데.”

시아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만져질 것 같은 진한 살기가 벽을 뚫고 느껴졌다.

“하하하핫… 그럼 곁에 있는 건 포기하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 왜 이렇게 아무도 없습니까? 너무 조용한데요. 이렇게 말했다고 귀도 자르시는 건 아니죠? 헤헷……

나긋나긋한 남자의 목소리가 문득 낮아졌다.

갑자기 몰아치는 불안함에 저절로 주먹으로 힘이 들어갔다.

‘이긴다고 해도……

저 남자가 여기서 살해당한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곧바로 전쟁의 시작.

원치 않는 부담이다.

“시골에 처박혀서 놀고 있는 꼴 보기 싫어서 일 시켰지. 세금 받는 국가의 노예들이 풀어지면 되겠어? 근처를 자세히 탐색시켰다. 지도가 작성되고 있어. 금방 보고가 들어갈 거다. 이게 초안이다.”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노련한 대답.

‘설마 이 지도를 보고… 그때부터 준비했나.’

아니,저 정도의 준비성이면.

대답은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었겠지.

“이야……

무언가 살펴보는 것 같던 남자가 감탄을 내뱉는다.

“존경합니다. 이건 슬쩍만 봐도 진짜 대박이네요… 던전에다가… 온갖 광맥까지 조사라니……! 이걸 어떻게 이 짧은 기간에……!”

“어차피 도시 감시는 나 하나로도 충분하니까.”

“정말 최고시네요. 이거… 제가 라인을 잘못 탄 건가 싶어지네요. 과장님한테 붙을 걸 그랬습니다.”

“너처럼 뱃속 시커먼 새끼는 절대 안 받아 줘. 너는 지금처럼 로랑스 공작이랑 어울리는 게 딱 어울려. 그분은 요즘 어떻게 지내냐?”

공작의 심복인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날카로운 그림자께서는… 그게… 요즘 정신이 없으십니다. 저희… 에게도 관심이 없으시고요. 뭔가 굉장히 바쁘신 것 같은데.”

“뭔데?”

대화가 이어진다.

“모르겠습니다. 덕분에 편하게는 살고 있습니다만,이래도 될지는 모르겠네요. 애들 기강이 너무… 풀려서요.”

“어쭈,편하냐?”

“솔직히 편합니다. 저희가 일이

어렵습니까? 인간들 좀 갈아치우고 전쟁 준비하는 게 뭐 그렇게 어렵겠 습니다. 공작님 한 분 모시는 게 훨씬 어렵죠.”

“이야,대단한 발언이네?”

“하하하… 아시다시피……

계속해서 대화가 이어졌다.

친밀함을 가장하고 서로에게 정보를 캐내려는 대화였고,그런 패턴이 둘 모두에게 몹시 익숙해 보였다.

그건 마치 한 편의 연극 같았다.

그렇게 한참 이어지던 대화를 시아가 문득 잘라 버렸다.

“그래서,왜 왔다고?”

남자의 혓바닥을 칼로 뚫는 것처럼 날카로운 살기가 질문 안에 배어 있었다.

찾아온 유령은 흠칫하며 더 말을 돌리지 못했다.

“아… 이걸… 드리러 왔습니다.”

짤랑거리는 금속음이 들렸다.

“준비됐습니다. 인간들을 이걸로 하나씩 바꿔 치워 버리시면 됩니다. 그리고… 여기 루비아라는 녀석이 새로 영주가 됐다던데요? 과장님 작품이시죠? 바꿨을 때는 가족도 없고 알아보는 사람도 적은 녀석이 최고지요. 부모도 처자식도 없고 정말 깔끔하네요. 멋지십니다.”

루비아의 이름이 나온다.

어쩌면 멋대로 오해받아 다행일지도 모르지만,결코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 머리에 진득하게 녹아든다.

‘이걸로… 라고?’

인간들을 바꿔 버리는 이야기.

연달아 생각이 떠오른다.

‘애벌레인가.’

‘신형의 완성이라면, 저번보다는 훨씬 빠른데.’

'마왕 강림이 당겨진 여파겠지.’

‘저번에 먹힌 건 첸들러.’

‘지금 애벌레가 먹을 건……

‘당연히.’

〈오셨… 습… 니까,은… 공.〉

수박 같던 큰 고깃덩어리에서.

굴곡과 입체감이 생겨나던 얼굴이 떠오른다.

첸들러를 닮아 가던 이목구비.

진작 생각했어야 했다.

‘루비아가… 현재 신형 애벌레의 첫 번째 먹잇감이다.’

충격 속에서.

분노가 끓어오른다.

이제야 그 사실을 떠올린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다.

루비아가 먹히는 건.

절대로 벌어질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글쎄?”

시아 으스노르의 차가운 목소리가 끔찍한 상상을 치워 낸다.

“하하하핫,과장님이 아니면 그런

이변이 일어날 리 이런 곳에 처박혀 조금 녹슬었을까 빨리 올라오시죠?

없지요. 혹시나 있다고 실력이 걱정했습니다만, 영주도 바꾸면

이제 뭐 하실 일도 없으실

“파리 새끼처럼 아부 떨지 말고. 일 끝났으면 꺼져. 방해되니까.”

문득 기시감이 느껴졌다.

〈왜 아부를 떨고 그래? 내가 기분 좋으면 꼭 한 사람씩은 죽이는 거 몰라서 그래?〉

예전에 부하들에게 말하던 것과 다르다.

어쩌면.

지금 시아의 앞에 선 유령은.

싸워서 반드시 죽일 자신은 없는 상대일지도 모른다.

패배는 아니라도.

도주를 허용하게 될지도 모르는.

“후후후… 알겠습니다. 필요하신 물건만 전해 드리고 가는 향기로운 후배로 남겠습니다. 건승하십시오.”

종종걸음으로 멀어지던 인기척은 문득 연기처럼 사라졌다.

다시 가면을 쓴 것 같았다.

♦ * ♦

집무실로 이동한 뒤.

우리는 시아가 받은 철제 상자를

가운데 놓고 회의를 시작했다.

상자 안에서 꿈틀거리는 생명이 느껴졌다.

‘나는 이미 몇 번씩 봤지만……

이번 생의 루비아와 레나는 처음.

“루비아,괜찮겠나?”

“인간을 먹고 흉내 내는 벌레야. 아무래도 영주님은 안 보는 게 좋지 않을까?”

동시에 터져 나온 말에 내사과장이 나를 바라봤다.

“어. 당신,이것도 알아……?”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루비아를 만류하듯 바라봤다.

“괜찮아요. 보여 주세요.”

루비아가 고개를 저었다.

“걱정해 주는 마음은 감사하지만, 저 그렇게 약하지 않아요.”

“으음… 영주님, 무섭지 않겠어?”

“무서워요. 두렵고요. 하지만 제가 알아야 하는 거잖아요? 다름 아닌 저를 빼앗으려고 하는 거니까요.”

영주의 단호한 의지에 반대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내사과장은 철제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30센티 정도의 애벌레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두 마리.

“아까 들었지? 하나는 여분이야. 혹시 영주 시체가 안 남는 경우, 다음 영주를 먹이는……

상자 안에는 마법진이 빼곡하며.

몸통과 짧은 팔다리는 모두 혹철 족쇄에 묶이고.

이빨이 빼곡한 주둥이는 용암석 재갈이 채워져 위로 들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재갈이 채워진 주둥이에서 무언가를 씹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녹색 점액이 연달아 흘러내렸다.

천들러 형빈의 시체를 씹어 먹는

오도독,오도독 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것 같았다.

“우욱… 진짜 안 귀엽네.”

손을 절레절레 저으며 극단적으로 순화된 표현을 하는 레나와 달리, 루비아는 별 반응도 없이 똑바로 벌레들을 바라봤다.

“황실에는 저를 이걸로 바꿨다고 보고하실 거죠?”

내사과장이 고개를 끄덕였고.

“언제까지 먹힐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지금 운이 좋은 상황이야. 로랑스 놈이 뭔가에 신경 쓰느라 이쪽을 못 건드리는 것 같으니.”

레나가 덧붙였다.

“제국제일검은, 어디서 뭘 하는지 꼬리가 아예 안 밟혀요.”

“그 거지 새끼,방금 온 놈과도 연락이 안 되는 거 같아. 그 낯짝 두꺼운 놈을 한두 번 겪어 본 게 아니라 느낌 알거든.”

“…실종인가.”

소녀 공작과 실종.

도대체.

누가 그를 실종시킨다는 건가.

“운이 좋은 건지도 몰라요. 사실 지금쯤이면 한번 뒤집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너무 순탄하잖아요?”

어떤 방해도 없이 통치 레벨 8에 도달했다.

시나리오 클리어는 순항.

‘가끔 운이 좋을 수도 있지……

그렇게 생각하며.

레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을 때.

어둠 속에서 통로를 대놓고 걸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다들.”

그건 멀리서부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빠놓고 무슨 재미있는 이이기들을 하고 있었던 거야?”

영주 집무실로.

지나치게 딱 맞는 순간에 그녀가 걸어온다.

“대체 어떻게 알고… 지하에서 농성을 준비하던 게 아니었나?”

에라스트가 대대적으로 공격받을 경우에 대비해 지하에 방어 기능을 구축하는 게 그녀가 맡은 일.

기스-제-라이는 피식 웃었다.

“너희의 바로 곁에서 잠들지 않고 일하는 좀비들이 스물이나 된다는 사실을 잊은 거냐?”

“시간 날 때마다 녀석들의 감각을

점점 더 강화시키고 있단 말이야. 루비아가 새벽에 밖으로 나갈 때 바로 보고가 들어왔거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조금의 쉴 사이도 없이 복무하는 스무 명의 챈들러는 네크로멘서의 눈과 귀였던 것이다.

그녀는 지체 없이 말했다.

“보여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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