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355화 (355/458)

398화 트로이카 (20)

하지만,

- 턱

칼이 뽑히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것을 벤 검이었다. 하지만 전투가 끝나면 항상 최상의 상태로 정련했으므로,피와 기름이 굳어 빠지지 않을 리는 없었다.

‘막혔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튀어나와 칼을 뽑는 걸 막고 있었다.

관문에서 뛰어내린 해골의 움직임은 수도에서 만난어떤 암살자보다도 빨랐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가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거리가 열 걸음은 떨어져 있는데,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뻗어와 칼을 뽑는 걸 막았다는 것이었다.

손도 아니고,칼도 아니었다.

홀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살짝 옆으로 움직였다.

좀 더 뽑기 쉽게 살짝 칼자루를 아래로 늘어트리고,

칼을,

- 턱

뽑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것이 칼자루를 쳤다. 칼은 다시 뽑히지 못했다.

이번에는 투명한 힘이 아래에서 강하게 위로 쳐을린 탓에 손목이 시큰거릴 정도였다.

레안드로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해냈다……!’

후작이 검을 뽑는 걸 막는 순간 짜릿한 쾌감이 정신을 가득 채웠다.

손가락 하나에 막혀.

트롤 산장에서 칼도 뽑지 못하고 농락당했던 때의 기억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지금은 내가 후작이 칼을 뽑는 걸

막아 낼 정도가 된 것이다.

압도적인 민첩 스탯에 더해.

가까운 거리에서 인벤토리를 밀어 붙여 만들어 낸 결과였다.

제국의 4 검주.

레안드로 폰 바티엔느는.

내 영역을 뚫지 못한다.

이젠 두려울 것 없다는 자신감이 마음속에 솟아올랐다.

'말은 역시 통하지 않았지만……

크게 기대한 것은 아니다.

놈은 설득이 되는 타입이 아니다.

애초에 마물은 대화할 대상으로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

솔직히 같은 인간들과 대화가 가눙한지도 의심스럽다.

‘그래도 찔러본 거지.’

어쨌거나,중요한 건.

내가 후작을 두 번이나 연속으로 막았다는 사실.

“기껏 곱게 말해 줬더니……

여유롭게 경고했다.

당황한 녀석의 얼굴 표정을 보자 다시 한 번 통쾌한 감각이 솟는다.

무엇이든지 처음이 어렵다.

네크론 신사회의 무리를 처음 쓰러 트릴 때처럼.

검기를.

마법을 처음으로 깨달을 때처럼.

이제 레안드로 후작 정도는 칼도 뽑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거역한다면 베어 넘길 수밖에 없다.

그 전에.

뽑히려는 칼날을 다시 막으려고 생각했을 때였다.

- 우우우……!

후작은 칼을 뽑지 않았다.

그리고 빠르게 움직이는 것마저도 포기했다.

하나,둘…….

허공을 하나하나 점유해 나가듯이 천천히.

여섯,일곱,여덟…….

그는 나를 응시하면서 견고하게, 칼집의 모든 부분을 접점으로 해서 공간을 훑어왔다.

새하얀 칼집에 일렁이는 진청색 기운이 무겁게 위를 덮쳐 왔다.

궤적이 보일 만큼 느리고.

선명해지는 공격.

뭉쳐진 빛무리는 허공을 지날수록

점점 더 진해진다.

‘이건……!’

같은 공격으로 두 번이나 죽었다.

기스-제-라이가 준 검은 단검의 글자들조차,내 힘이 부족한 탓에 이 공격을 막아 내지 못했다.

하지만,이번에는.

‘막을 수 있다.’

레안드로 폰 바티엔느는 마왕이 아니다.

한 명의 인간.

넘어서야 할 대상.

공격해 오는 루트는 알고 있다.

허공에 균열을 일으키는 하얗고 푸른 공격을,

인밴토리를 겹치고,겹쳐.

반경 3미터로 집중시킨다.

눈앞에서…….

- 파파파파팟!

단검으로 부딪칠 때와는 다르게, 후작 또한 전신전령의 힘을 다해서 두들겨 오는 공격을 막아 냈다.

- 카강!

수직으로 떨어지는 거대한 힘이 허공에 부딪혔다.

하지만 나는 한 걸음도 뒤쪽으로 물러나지 않았고,후작이 끌고 온 검기는 튕겨지며 공격을 가한 그를 거꾸로 몇 걸음 밀어냈다.

‘…성공이다!’

처음 만났을 때는 손가락 하나도 꼼짝 못 하고 당했던 공격이었다.

처음 이 공격을 받았을 때.

시간과 공간을 완전히 지배당하는 기분이었다.

방패도 무기도 들 수 없었으며,

대항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루비아가 사 준 갑옷을 머리부터 절반으로 갈라놓았던 공격.

하지만,이번에는.

같은 갑옷을 입고 완벽하게 막아 낸 것이다.

여기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소진해 왔던가.

얼마나 쓰러지고,얼마나 부서지고, 소중한 자들이 죽는 모습을 바라보며 달려왔던가.

‘됐어.’

완벽한 방어.

부상당한 상태도,방심한 상태도

아니다.

최선을 다한 후작의 공격을 내가 정면에서 막아 낸 것이다.

칼을 쥔 후작의 두 손이 충격으로 떨려왔고,두 눈은 경악으로 한껏 부릅떠져 있었다.

“말로 하면 안 듣는 거냐?”

‘뇌전.’

그대로 영역을 밀어붙였다.

- 콰과과과광!

번개의 충격파가 후작과 미유를 태우면서 그대로 밀어붙였다.

- 과광! 콰광! 콰광!

미유는 검은 털이 새하얗게 탔고, 후작은 혼자 앞쪽에서 번개를 맞고 버티다가 뒤로 밀려 바닥을 긁으며 비참하게 나가떨어졌다.

쓰러진 후작을 향해 달려들었다. 칼을 짚고 일어서려는 그를 다시 영역을 집중시켜 밀어 버렸다.

— rz rz rz tz

후작은 반격은커녕 뭐에 당했는지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반쯤 바닥을 파고들며 뒤로 처박혔다.

‘결빙.’

허공에서 솟구친 날카로운 얼음이 창이 되어 만신창이로 비틀거리는 후작에게 꽂혔다.

입가에서 흐른 피는 홀러내리지도 못한 채 허공에서 얼어붙었다.

절뚝거리는 발목도 바닥에 처박힌 상태로 완전히 얼어붙었다.

초반에 멀리 날아간 미유는 진작

감전된 채로 일어나지도 못했다.

기절한 것 같았다.

- 파앗!

다시 후작에게 달려가서 그대로 인벤토리로,

가장 단순한 형태이며.

그만큼 효과적인 공격.

‘밀어낸다.’

- 파직!

새하얗게 얼어붙은 바닥에 다시 거칠게 뽑힌 후작의 몸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내려치기도 결국 위에서 아래로 밀어내는 것이고.

을려치기도 결국 아래에서 위로 밀어내는 행위다.

후작은 그걸 막지 못했다.

그가 뿌린 피가 얼어붙은 결정이 깨져 나갔다. 머리를 맞는 걸 피해 간신히 어깨를 들었는지,완갑이 통째로 떨어져 나간 후작이 바닥에 떨어졌다.

- 과직! 콰직! 콰드득!

떨어진 후작에게 빠르게 접근해 주먹으로 얼굴을 후려쳤다.

‘4배.’

압축한 영역으로 몸을 보호한 채 배를 때리자 갑옷이 부스러기처럼 떨어져 나가며,대마법 문양을 새긴 안감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건 압수하지.”

소중히 품고 있던 황금빛 약병을 빼앗아 뒤로 멀리 던져 버렸다.

별빛청여우의 투영 공격에 의해 반쯤 뜯겨 나간 심장까지 복구했던

엘릭서.

‘위험한 건 미리 치워 두자고.’

인벤토리에 넣을 수도 있었지만, 혹시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미래가 왜곡될 가능성에 조심스러웠다.

“크으옥……

후작의 입가에서 핏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루비아가 건네준 갑옷 건를렛에 레안드로의 핏물이 스며들었다.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난 상태로 녀석을 오연하게 내려다봤다.

감전되고, 얼어붙고, 그 상태에서 잔혹하게 구타당한 후작은 바닥에서

미약하게 꿈틀거렸다.

그 순간 느낄 수 있었다.

‘드디어……!’

나는,

검주보다 위에 을라선 것이다.

바람이 뜨겁다.

아니,내쉬는 숨만이 뜨겁다.

출혈이 멈추지 않는 몸의 회로에 번개가 함부로 흘러간다.

‘못 버틴다.’

공격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온몸을 후려치던 공격이 멈추고, 건를렛이 함부로 품 안에 들어와 엘릭서를 빼앗았다.

“네 녀석을 죽이려면 몇 번이고 죽일 수 있었어!”

자신에게 정보를 뿌렸던 혹막.

“미유와 함께 수도로 돌아가라!”

큰 소리에 머리가 울린다.

말에 대해서까지 알고 있다.

하지만 이쪽은 상대의 실마리조차 잡지 못하고.

이렇게 어이없이 패배하는 걸까.

- 반짝.

엘릭서가 뜯겨 나간 자리.

그 안쪽에 숨겨진 빛의 보석을, 레안드로는 선득한 숨을 삼키면서 천천히 손으로 쥐었다.

찬란한 다이아몬드의 빛.

일리엔의 눈물.

품에 있는 것만으로 마왕의 결계를

인식할 수 있는 유물이지만 지금은 어떤 효과도 없었다.

아니,접촉에 응답하듯 강한 빛이 나왔지만 상대의 결계는 그려지지 않는다.

‘마왕의 힘이… 아니라고?’

빛의 유물이 보여 주지 않았다.

그렇기에 파악하지 못했다.

아니,틀리다.

틀려 먹었다.

‘언제부터… 내가……

냉기에 얼리고,번개에 감전되고, 땅에 처박혀 구타당한 온몸보다도 떠오른 사실이 더욱 아팠다.

‘여기에 이렇게 기대고 있었지?’

- 달그락.

손으로 다이아몬드를 떼어냈다.

“히… 힝……!”

기절했다가 다시 일어난 미유가 반쯤 탄 몸으로 절뚝거리며 다시 다가왔다.

“돌아가라.”

레안드로는 말에게 다이아몬드를 달아 주고 북쪽을 가리켰다.

“히히힝!”

“기사단에게 이 유물을 전해라. 쓸모가 없진 않을 거다.”

“히힝!”

미유가 입술을 살짝 말아 올리며 서운함과 분노를 표시하려 했지만, 레안드로는 미유와 똑바로 두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돌아가라. 싸우는 데 방해된다.”

단호한 명령을 내리고.

한동안 두 인마는 서로를 가만히 바라봤다.

“히힝……

말이 검은 눈동자를 빠른 속도로 움직이더니, 곧 레안드로의 지시의

따라 위로 달리기 시작했다.

- 다그닥! 다그닥!

미유가 멀리 떠나갈 때까지.

그 모습을 나는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뭐지? 저렇게 빨리 사라질 리가 없는데?’

비역까지 쫓아왔던 녀석.

혹시 진지하게 명령하면 순순히 말을 듣는 걸까?

뭔가 최면을 걸었는지도 모른다.

미유를 보낸 후작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그 눈빛은 아까와 사뭇 다르다.

“기다려 줘서 고맙군.”

“비록 마물이지만,결투의 예의를 다하겠다.”

‘안 기다렸으면 어쩌려고.’

예의 따위를 차릴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치려면 얼마든지 칠 수 있었다.

하지만 말과 얽혀 있을 때 공격하면 미유가 대신 맞을 확률이 높다.

‘말을 먼저 죽이면 안 돼.’

황실의 비역.

말의 잘린 목에서 뿜어진 선혈이 얼굴에 닿았을 때.

레안드로는 잿빛 기사마저도 뒤로 세 걸음 물러나게 만들었다.

새파란 칼이 찌르고,찌르고,다시 찌르고,또다시 찔러오던 공격.

눈에서 연기처럼 일어나던 푸른

불꽃은 지금의 나조차도 감당할 수 없을지 모른다.

“아니,뭐… 예의는 됐고……

‘뇌전.’

- 과과과광!

하지만.

후작의 반응은 아까와 달랐다.

레안드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유가 떠난 이상 이제 머릿속엔 어떤 부담도 없다.

천천히 머릿속을 비워간다.

수도의 마경을.

비브리오를 잊었다.

리브레트릴,알테리온,파이로를, 테레스,아르고를,그가 추적하던 수도의 흑막들을 잊었다.

무엇을 조사했으며.

무엇을 발견했는지 잊었다.

수많은 결계와 진법을 깨트려 준 일리엔의 눈물을 잊었다.

로랑스 타르티에를,그의 실종에 대해서도 잊었다.

오직 눈앞의 상대에게 집중했다.

‘너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질문이 입안에서 맴돈다.

하지만 쓰러트리고 묻는다.

보이지 않는 영역이 빠르게 내게 쇄도한다.

- 파앗!

뒤로 몸을 피했다.

- 과과광!

조금 전까지 발을 디디던 자리가 산산이 터져 나가며 흙이 비산했다.

- 과광! 과광! 과광

한순간의 차이로 계속해서 땅이, 허공에 터져 나갔다.

칼을 부딪치는 것은 어리석다.

몸을 부딪치면 분쇄된다.

저 안에 있는 것은 번개의 기운. 그리고 얼음의 기운.

발동시키는 데 준비 자세도 없고,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간 전체가 적이 되는 이 순간이,보이지 않는 허공이 자신을 노리는 순간이 왠지 싫지 않았다.

‘조금 더 가까이.’

땅이 뜯어지고 허공에서 폭발이 일어날수록 조금씩 영역이 읽혔다.

- 파바바밧!

흩뿌린 검기는 가볍게 흩어지고, 몸을 얇게 감싸고 있는 호신강기에 적의 영역이 닿는다.

- 콰광!

커다란 소리를 내며 몸이 뒤쪽에 나가떨어진다. 버렸다면 아까처럼 땅속 깊이 처박혔을 것이다.

그렇게.

‘열 걸음.’

넓이를 재어 보고.

'형태는… 원.’

’가끔씩 변형이 있지만 기본적인 형태는 원이다. 거기까지가 상대의 역량이겠지.’

모습을 판단하며.

‘안에 묶여 있는 ‘번개’와 ‘냉기’는 완성도가 높지만,정작 원 자체의 밀도는 거기 의존하고 있어.’

‘번개와 냉기가 어설픈 원의 운용올 감춰 주는 것 같군.’

그러므로.

‘해볼 만하다.’

결론을 내린다.

- 카캉!

오감으로 겉을 조금씩 인식하고, 두드린다.

조금씩 더 선명해진다.

- 카강! 카강! 파지지직!

배회하며 겉을 두드릴수록.

공간을 구성하는 바람이,진공이, 번개가,얼음이,의지가 레안드로의 감각으로 파고들었다.

그중에 가장 나약한 것은. 공간을 구성하는 상대의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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