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2화 트로이카 (24)
“에라스트,그라스미어,유블람은 당연히도 제국에 속합니다. 황실의 명령을 받들어야 합니다.”
술렁거림이 멎기를 기다리지 않고 루비아가 말을 잇는다.
“하지만,저는……!”
군중이 곳곳에서 침을 삼키며 두 눈을 깜빡거린다.
“이 세 도시를 다스림에 있어서, 황실의 명령을 모두 무시했습니다. 조금도 듣지 않았습니다.”
“황실은.”
술렁이던 대장장이 집단을 영주가 바라봤다.
그들은 작업장이 밀집되어 있는, 성문부터 광장 왼편 구역에 자리를 잡고 서 있었다.
“무기를 만들라고 했습니다. 전쟁에 쓸 병기를,모든 재료를 공출해서 만들라고 했습니다. 가마와 풀무를 오로지 무기를 제작하는 데 쓰고, 현직은 물론 은퇴한 분들과 어린 자녀들까지 밤낮으로 일해야 맞출 할당량을 요구했습니다.”
대장장이들이 얼음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황실은.”
루비아는 다음으로 광장 중앙의 농민들을 바라봤다. 차분한 영주의 목소리가 그들 위로 울려 퍼졌다.
“여러분이 수대에 걸쳐 일궈 놓은 비옥한 남부의 토지를,그곳에서 피땀으로 생산된 귀한 밀 한 알, 쌀 한 톨을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종자까지 바치도록 강요했습니다.
곳곳에 섞여 있는 상인들,광부들, 목축업자들에게도 루비아의 말이 연달아 이어졌다.
영주 루비아는 도시를 발전시키고 지탱하는 주역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언급했다.
긴 시간이 걸렸지만.
대열을 이탈하거나 불만의 외침을 내지르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오히려 모두가 그녀에게 동조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크크크… 잘하네.”
옆에 숨은 네크로멘서가 희미하게 웃었다.
“하지만… 저는……!”
단상 위의 영주는 애끓는 절규로, 스스로를 고발하듯 외쳤다.
“이제 더 여러분을 지켜 드릴 수 없습니다.”
저희가 대신 지켜 드리겠습니다, 하는 외침이 크게 터져 나온다.
영주는 손을 들어 단호하게 그걸 거부한다.
“제국 최고의 푸른 사자 기사단이 내려옵니다.”
어떤 술렁임은 커지고.
어떤 술렁임은 작아지며.
어떤 술렁임은 내용이 바뀐다. 하나의 인간이 복잡한 만큼. 도시는 더욱 그러하다.
수탈당하기 싫은 마음,자신들의 영주를 몹시 아끼고 존경하는 마음, 영주의 행동을 이해하는 마음.
황실에 맞설 수는 없다는 마음, 칼날 아래 살해당하기 싫다는 마음, 영주가 왜 이런 이야기를 꺼냈는지 궁금해하는 마음.
“여러분은.”
과부하가 걸린 시민들에게 영주는 마지막 선언을 남긴다.
“그러니,이제 저를 버리십시오.”
“철저하게 저를 부정하세요.”
“저를 지우셔야 합니다.”
“저주하고, 욕하고,매도하세요.”
“반역자가 홀로 성 안에 박혀서 무엇을 했는지 모른다고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십시오.”
“실제로 여러분들은 모르십니다. 저는 영주가 되고 성에 사람들을 최대한 적게 들였습니다. 오로지 행정관들과 저만의 성이었습니다. 파발을 모두 차단하려고 했습니다. 잠시나마… 여러분들에게 평온하고 좋은 도시를,드리고 싶었습니다.”
“모두를 속여서… 미안합니다.” 침묵은.
- 여,영주님……!
길지 않았다.
- 아닙니다,영주님! 영주님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저희도 소식통이 있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가혹하게 이뤄지는 공출이 왜 여기에서만…….
아… 영주님! 혼자서만 그토록 커다란 짐을 지고 계셨다니…….
- 얼마나 혼자 고되셨습니까!
곳곳에서 울음 섞인 응원이 마구 터져 나온다.
루비아의 행동도,군중의 반응도 예측하지 못했다.
“좋잖아? 뭐 설마,우리한테 도움 받는 상황을 공표하기라도 할 것 같았어?”
놀란 나를 보고 기스-제-라이가 비뚜름히 입꼬리를 끌어을린다.
“거짓말도 안 하면서,마음까지 훈훈하게 만들어 주고. 이 정도가 적당하지.”
감동적인 분위기지만 물론 모두가 그렇지만은 않다.
- 그럼 저 여자 목을 아예 지금 따서 기사단에 바친다면 더 좋지 않을까?
- 우리는 황실에 충성을 바치고 싶었는데,사악한 영주에게 끔뻑 속은 거라고. 반역자를 죽……!
대세를 거스를 정도는 아니지만, 놓아두면 위험할지도 모를 삐딱한 중얼거림들.
하지만 그런 중얼거림은 하나둘 소리 없이 정리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시아에게 말해 놨어. 루비아가 굳이 호위 없이 나서겠다고 하니, 호위가 필요 없는 상황을 만들어 버리자고.”
정리가 끝나자 장내의 분위기는 한충 더 고조되어.
- 사랑! 사랑인 겁니다! 영주님께서 저희를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것은 사랑이라 믿어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토록 달콤한 사랑을 받고서 누가 영주님께 돌을 던진단 말입니까!
다소 과잉된 외침도 들려온다.
루비아가 주먹을 꼭 쥐고 최후의 명령을 내린다.
“마지막으로 곳간을 열겠습니다.
성의 행정관들이 모두 준비해 둔 상태입니다. 이틀의 시간이 있으니 차분히 받으시고,혹독한 세월을… 부디……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 영주님!
- 여… 영주님……!
“시민들의 평판… 이랬지?”
네크로멘서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을 때였다.
一 띠링!
[그라스미어, 유를람,에라스트의 시민들이 영주에게 뜨거운 애정을 느낍니다.]
[호감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평판이 상승합니다.]
[평판이…….]
[루비아가 자리에서 물러나더라도, 사람들은 영주를 오랫동안 강렬히 기억할 것입니다.]
[통치 레벨이 올랐습니다!]
[시나리오 진행 중…….]
[현재 통치 도시 - 그라스미어, 유블람,에라스트]
[통치(眞) Lv.lO(newi)]
[S급 시나리오, ‘레이 루비아’를…….1
[…클리어하셨습니다.]
[루비아는 적통을 이은 세 도시의 영주입니다.]
[챈들러 가문이 보좌진으로 일괄 조정됩니다.]
[혈통이 조정됩니다.]
[능력치가 일괄 상향됩니다.]
[다양한 통치 스킬이 생성됩니다.]
[높은 확률로 인재가 통치 도시에 방문합니다.]
[‘폭풍 속의 통치자’ 시나리오가 활성화됩니다.]
[상시 발동 시나리오입니다.]
[전쟁 이벤트가 발발하기 전까지 루비아의 모든 통치 관련 능력치가 30% 상향됩니다.]
[단,황실이 그녀를 노립니다.]
[단,수도회가 그녀를 노립니다.]
[단,마계가 그녀를 노립니다.]
[???가 그녀에게 의아함을 갖기 시작합니다.]
[시나리오 슬롯이 1개 추가되었 습니다.]
[현재 슬롯: 3/4]
[동화율이 내려갑니다.]
[51.27%…….]
[시나리오 클리어에 따라,현재의 경로 변경을 확정합니다.]
세계가 다시 한 번 들끓는다.
광장을 가득 메운 영혼들을 담은 거죽에 구멍이 뚫리고,팔다리가 말라죽는 화초처럼 오그라든다.
햇살이 비스듬한 초점에 휘감겨서 산란하고 있었다.
기스-제-라이로 보이는 ‘기울기’가 어깨를 잡아첸다.
“*# $&래?”
“%%#@게 &&[email protected]어?”
“&!&, 시나!%#%)클''#%야?”
아직,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굴곡에 서서히 제자리를 되찾음에 따라.
시나리오에 대한 물음이라는 건 알아차릴 수 있다.
어깨를 잡고 있는 기스-제-라이를 보며 간신히 말했다.
“클리어… 다.”
“드디어? 된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비아는… 설마 이런 상황까지 전부 예측했던 건가?”
네크로멘서가 웃으며 대답했다.
“알고 했으면 무서운 영주님이고, 모르고 했으면… 후후. 생각해 보면 그쪽이 훨씬 더 무섭지?”
루비아는 영주 은퇴를 선언하고 단상 뒤로 내려왔다.
자신들은 황실에 맞서 싸우겠다는 군중도,통치해 달라고 붙잡으려는 군중도 많았지만 현실성은 없는 이야기였고.
어차피 스무 명의 유령이 감싸는
그녀에게 닿을 수는 없었다.
“기스-제-라이 님… 언데드 군단은 어떻게 하실 거죠?”
도서관과 연결된 비밀 회의실에서 루비아가 물었다.
“후후. 영주님이 말을 돌리시네. 이것부터 축하해야지. ‘다음’부터는 세계선이 고정된 상태라는 건데?”
네크로멘서는 루비아와 내 쪽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드디어……
여기 닿았다.
루비아 시나리오를 클리어했다.
무덤에서 일어날 때부터 그렇게나 노력했던 목표를 이뤄낸 것이다.
세계선상에 고정된 빛나는 영주.
이제 내가 죽어도 그녀는 확고한 기반을 가지고 시작한다.
이제 더 이상 고통받는 환경에서 살아가지 않는다.
분명 그럴 거고.
그래야만 한다.
“다음 세계의 저라고 해도 좀처럼 실감나지는 않지만요.”
“이 녀석과 만나면 기억이 다시 살아난다고 했잖아? 그러면 같은 인간이라고 봐야지.”
“역시 그렇겠죠?”
루비아가 나를 가만히 바라본다. 따듯하게 눈으로 미소 짓던 그녀가 뒤쪽에 숨겨진 상자를 들고 왔다.
“아, 그리고 선물이 있어요.”
“선… 을?”
“전에 검주와 싸우시면서 부서진 갑옷을 고쳐 놨어요.”
후작의 검기에 거의 찢기다시피 했던 갑옷이다.
“그게… 고쳐졌다고?”
그녀는 상자를 열었다.
커다란 상자에는 놀라울 정도로 말끔히 수리된 갑옷이 있었다.
투구부터 목,어깨,가슴,팔꿈치, 손목부터 손가락까지 덮는 건를렛, 허벅지,무릎,정강이와 종아리를 보호하는 열 개가 넘는 파츠들이 가지런히 안에 정비되어 있다.
“이건……!”
안에 놓인 갑옷을 살펴보자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예전에 입었던 같은 갑옷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훌륭한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정말 멋지군.”
“대단하죠? 제일 실력 좋은 분이 최고의 재료를 써서 재구성했대요.
그래도 정말 신기한 게, 이 갑옷이 마치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빠르게 고쳐졌다고 하더라고요.”
“음… 고맙다.”
감사의 뜻을 표하고.
풀 플레이트를 전부 몸에 걸치는 순간이었다.
- 띠링!
눈앞에 효과음이 울렸다.
[계승 아이템을 획득했습니다!]
[루비아의 갑옷]
- 갈기갈기 찢어진 판금 갑옷을, 그라스미어 최고의 대장장이들이 최고의 재료로 수리한 역작.
- 원본은 루비아와의 오랜 추억이 깃들어 있는 물건이다.
[시나리오 클리어에 의해 다음의 능력이 부여되었습니다.]
- 레이 루비아가 당신을 무덤에서 일으키지 않아도,갑옷의 착용만으로 서번트 시스템이 상시 활성화됩니다.
‘이건……!’
레나 때와 같은 계승 아이템.
‘확실히 끝냈다는 거군.’
해냈다는 사실을 확실히 실감하게 해 주는 상징.
훨씬 더 어려운 시나리오를 클리어 했는데도 아이템 설명은 간략하다.
그러나.
‘서번트 시스템이라면.’
머릿속으로 과거의 수많은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나를 향한 루비아의 ‘생각’에 따라 수많은 혜택이 적용되었다.
내가 길을 잘 찾는다고 생각하면, 시야가 넓어지기도 하고.
은신 능력이 을라가기도 했다.
때로는 주변에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스탯이 오르기도 했다.
터무니없이 느껴질 정도의 혜택.
‘그런 걸… 갑옷 입은 것만으로 할 수 있다고?’
경악에 빠질 만한 일이다.
하지만.
기묘한 위화감이 느껴진다.
‘지나치게 타이밍이 좋아.’
시나리오 클리어 이후 바로 준비해
건네주는 계승 아이템이라니.
[50.97%…….]
세계의 초점이 살짝 흐트러지려는 순간이었다.
“혹시 마음에 안 드세요?”
루비아가 눈을 반짝였다.
그 빛에 다시 만상이 또렷해진다.
“그럴… 리가… 최고다. 굉장히… 마음에 들어.”
“정말이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쩔쩔매는 나를 도와주는 것처럼 기스-제-라이가 슬쩍 다시 화제를 돌렸다.
“뒤늦게 답해 주자면,내 군대를 빼낼 준비는 끝났어. 미리 차분히 하고 있었다고.”
얼른 말을 받았다.
“마계에 침식된 지하 통로는 조금 꺼림칙하지 않나?”
내가 알려 준 길을 피한다고 해도 위험은 도사리고 있을 것 같았다.
“괜찮아. 레나가 트로핀 여단의 협조를 받았어. 내 군대를 물자로 위장해서 수송하기로 했거든.”
언데드 군단을 지하 비밀 통로에 보관했다가, 차후 밖이 조용해지면 꺼내어 수송한다는 이야기였다.
“해안에 배가 준비되어 있어.”
나냐우는 죽었지만.
이번 세계선에서도 비숫한 정보 길드는 존재하고,레나가 그곳의 고위 간부로 활약하고 있는 덕택에 가능한 방법이었다.
“레나도 배를 타고 그때 오고.”
“영주님과 우리는 먼저 비행선을 타고 가면 돼.”
감회가 새로웠다.
중립도시 엠 버 메어 (Embermere).
루비아와 함께 그곳에 가다니.
거기까지 그녀가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예전에 루비아와 함께 엠버에 가는 이야기를 했다.
‘갑옷을 사고 나면 같이 거기로 가자고 했었는데.’
‘기스-제-라이를 만나러 가려고 했었지.’
루비아가 계승 아이템으로 건네준 갑옷을 입고,기스-제-라이와 함께 엠버에 간다고 생각하니 무척 묘한 기분이었다.
그래도,드디어.
기대감이 차오른다.
잿더미 이전의 엠버로.
‘기계공학의 도시로 가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