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3화 트로이카 (25)
푸른 새벽.
레드 플레이크의 비행선이 서서히 관문에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를 제외한 탑숭자는 넷.
남부 세 도시의 영주였던 루비아.
린트부름의 힘을 찾는 네크로멘서 기스-제-라이.
황실의 두 번째 그림자였던 시아 으스노르.
레드 플레이크의 닥터 설아다.
돌아보면 한 명 한 명이 어떻게 엮었는지 모를 놀라운 녀석들.
그러나 어떤 부하나 수행도 없이, 누구의 이목도 끌지 않고 비밀리에 이 자리에 모여 있었다.
一 ,、大、,、스丄.
- 교、 .
비행선은 무척 거대한 크기였지만 하늘을 주시하지 않으면 알아채지 못할 만큼 불빛도,소음도 없이 은밀하게 내려오고 있었다.
“대단하네요……
루비아가 작게 감탄했다.
“엠버로 가는 건… 괜찮은가?”
이룬 걸 모두 버리고 떠나야 하는 그녀의 마음이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루비아는 눈을 빛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기뻐요. 새로운 모험을 떠나는 건데요? 부끄럽지만 짐도 다 들어 주셔서 저는 정말 편하게 가게 되네요. 감사해요.”
그녀의 이런저런 용품은 하나로 묶어 인벤토리에 넣어 둔 상태.
전날 몇 안 되는 사람들과 이별의 시간을 가진 덕분에 제법 마음이
정리된 것 같다.
내려오는 비행선을 살폈다.
공기를 데워서 나는 비행체.
몸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원통형 기낭 좌우로 여덟 개의 프로펠러가 달려 있고,중앙 아래에는 바깥이 탁 트인 탑승석이 있었다.
“저것도… ‘유산’인가?”
“아니야. 레드 플레이크가 유산을 접하며 쌓아 온 기술을 응용해 직접 만들어 낸 거지.”
“놀랍군……
이번 생에는 이곳에서 다시 한 번 비참한 최후를 맞는 걸 각오했다.
기스-제-라이도.
레나도 그렇게 말했다.
‘다들 꿍꿍이를 감추고 있었다니.’
어쨌건 도망갈 수 있다면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아무도 죽지 않고.
아무도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엠버를 향한다.
‘이런 날이 오긴 오는구나……
그 순간.
마치 그런 생각을 하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 쿠구구구구구
수많은 말발굽 소리가 겹쳐지며 멀리서 땅이 진동한다.
어쩐지 쉽게 풀린다 했지.
관문에 서 그들을 바라봤다.
선두는,아무도 태우지 않은 흑마.
‘미유……!’
그리고 그 뒤를 갑옷에 포효하는 사자가 양각된 기사들이 말을 몰아 달려오고 있었다.
'열… 스물… 서른… 마혼… 명?’
쉰도 되지 않는 숫자.
하지만 사천의 기마대가 눈앞에서 돌격하는 것 같은 박력이 공기를 진동시킨다.
- 두두두두!
새벽이.
솟아오르는 해가 으르렁거린다.
“뭐가 이렇게 빨라? 잠도 안 자고, 밥도 안 처먹고 달려온 거야?”
시아가 인상을 찡그렸다.
부딪쳐 싸울 수도 없는 상대다.
이들까지 살해한다면 주민들에게 화가 미치겠지.
“음? 아슬아슬하네.”
네크로멘서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비행선이 착륙하기까지는 약간 더 시간이 더 필요해 보였다.
“어떡하죠?”
시아는 말없이 하늘과 기사단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고,루비아는 조마조마한 듯 입술을 살짝 깨물며 내 손을 꽉 쥐었다.
- 두두두두!
- 두두두두두!
푸른 사자 기사단 전원.
마흔 기의 인마가 평야를 달린다.
혹사당하는 말 위의 전원은 무척 세심한 대마법對魔法 문양을 새긴 풀 플레이트를 걸치고 있다.
식사도 잠도 잊고 달려온 이틀. 터무니없는 거리를 주파했다.
절묘한 마술馬術과 지독한 훈련의 성과 덕분이었지만,오르는 열기는
견디지 못해 마흔 명 전부 투구는 벗은 상태였다.
수도에서 세 필씩 가지고 출발한 말은 이제 모두가 마지막 여분을 타고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선두는 언제나 미유.
- 히히힝!
왜 이렇게 느리냐는 듯이 한 번씩 뒤를 돌아보며 콧김을 뿜는 녀석이 기사들의 달궈진 망막에 찍힌다.
모두가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저 흑마는.
자신의 주인이 위기에 처했다고 굳건히 믿고 있다.
이틀 내내 보아 온 모습.
‘솔직히 믿기지는 않지만.’
기사단 절반 이상의 생각이었다.
‘그분이 도대체 어떻게 위기에 처한다는 말인가?’
레안드로는 4 검주의 말석.
혼자서 후작의 좌에 앉아 있다.
하지만 그를 따르는 자들은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사실상의 제국제일 검이라고.
그럼에도.
-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말할 힘도 아끼며 기수는 계속해 마지막 말을 몬다.
한순간 한순간이 돌격이었다.
‘혹시.’
‘만에 하나라도……
‘단장님이 나를 기다린다면.’
‘단장님이.’
기사 제이드는 자신들이 단장을 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어떻게 감히.’
검술의 끝을 한 번도 보이지 않은 단장은 기사단 전체가 덤벼도 쉽게 물리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인을 잃은 빈 말이 돌아왔는데 태연히 넘길 수는 없다.
제이드는 한순간 한순간 자신의 최고 기록을 돌파하며 남쪽을 향해 말을 달렸다. 이틀째.
노을이 지고,
밤바람이 차오르는 순간.
- 투툭.
- 히히힝!
기사 알피린은 갑옷을 풀어 버리고 앞쪽으로 말을 몰았다.
미유의 바로 뒤편.
이제 그녀가 선두였다.
기마와 그녀의 심장이 공명하며 쿵쿵 울렸다.
그녀가 소리 높여 외쳤다.
“이 흑마를 보라! 이건 누가 봐도 단장의 위기다! 우리가 언제 그를 구하러 달려가 보겠는가!”
“히히힝!”
미유가 울부짖는다.
어쩌면 남부가 끔찍한 상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모두의 머릿속에 흘끗 스쳐간다.
평안하다는 소식만 전해지지만.
미유의 저 불안한 눈빛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만약… 그렇다면.’
기사 메렉은 생각한다.
‘제국 남부는 지금 어떤 지옥이 펼쳐져 있을지 모른다.’
‘수도로 향하는 정보를 모두 다 왜곡할 정도의 요괴들.’
‘술수에 능하고,단장을 죽일 만큼 강한 마귀들이라면.’
‘싸울 가치는 넘쳐나겠군.’
그걸 생각하는 기사들의 가슴은 공포가 아닌 흥분으로 두근거렸다.
마魔를 보면 모두 베어 버린다.
그것이 단장과 자신들이 약속한 제1 계명.
황실의 미적지근한 반응 따위는 상관없다.
미지의 마경이 그곳에 있고.
자신들이 단장에 이은 최일선.
벌써부터 달아오를 수밖에 없다.
그들의 바람에 부응하는 것처럼, 어스름한 여명이 조금씩 동쪽에서 차오를 때쯤.
-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남부로 향하는 도로에 처음으로 인위적인 장애물이 나타났다.
“관… 문?”
“없던 겁니다. 불법이군요.”
“그대로 부숴 버릴까요?”
“괜찮겠지.”
마경은 저 너머 도심에 있을 터.
레안드드 폰 바티엔느가 고작해야 이런 관문에 막혔을 리는 없다.
기사 알피린이 계속 말을 달리며
외쳤다.
“관문의 책임자에게 전한다! 바로 문을 열지 않으면 부수고 모두를 체포하겠다!”
푸른 사자 기사단은.
두 번 말하지 않는다.
슬쩍 그녀의 옆에 붙은 제이드가 방패를 꺼내어 푸른 파괴의 기운을 불어넣었다.
“부수는 건 이게 좀 낫지.”
그때 였다.
- 끼이익
멀리서 관문이 열리며.
한 명의 인간이 앞쪽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저건……!”
회청색 머리칼.
마음 어딘가 시들어 버린 것 같은 묘한 표정의 얼굴.
틀림없었다.
막 떠오르는 태양 아래서 당당히 걸어 나오는 인영의 정체는 단장.
레안드로 폰 바티엔느였다.
“모두 멈춰라!”
- 히히힝!
달려오는 미유를 필두로 기사단이 천천히 걸음을 늦췄다.
“다… 단장님! 거… 걱정했습니다! 단장님……! 단장님에게 무슨 일이 생길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그랬던 거죠!”
가장 최근에 입대한 열일곱 살의 프릭스가 울먹이며 달려 나왔다.
커다란 몸에서 터져 나오는 힘을 레안드로가 높이 평가해서 기사로 받아 준 소년이었다.
평소였다면 그런 프릭스의 약한
모습을 다른 기사들이 놀렸겠지만 이번에는 조용하기만 했다.
“그래. 난 아무렇지도 않다.”
“그럼요! 다,단장님은……!”
“휴우……
“다행입니다.”
“별일 없으셨군요.”
절반 정도의 기사들도 조심스럽게 침을 삼키며 안도의 한숨을 쉰다.
그때 였다.
“각하……?”
창날에 기운을 거두지 않고 있는 기사 알피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후작은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슬쩍 웃기까지 했다.
“그래. 너희는 뭐 하러 여기까지 달려온 거냐?”
옆에 있던 기사 제이드가 미간을 찡그렸다.
“정말 괜찮으십니까? 에라스트에 무슨 일이 생긴 거 아닙니까?”
후작은 고개를 저었다.
“남부는 안전하다. 잠시 혼자서 시찰하고 있었다. 나한테 괜찮냐니, 웃기는 소리로군.”
기사단의 얼굴에 일제히 당혹의 빛이 스쳤다.
“하지만,미유가……
기사 에르고스가 단장에게 코를 대고 킁킁거리는 혹마를 가리켰다.
“혼자 온 건 어떻게 된 겁니까?”
- 히힝〜
미유는 후작에게 달려가 누구보다 반갑게 몸을 비볐지만,
- 히… 힝? 히히히힝!
갑자기 몸을 빼냈다.
“어어엇,이 녀석에 단장님에게 단단히 삐졌나 봅니다.”
그리고 두 눈을 빨갛게 빛내면서 말발굽을 들어 날카롭게 베어내듯 옆으로 후려쳤다.
후작은 그 공격을 뒤로 휘청거려 간신히 피하며 소리쳤다.
“이 녀석이 잠시 정신이 나간 것 같구나. 어디 묶어 둬라.”
“단장… 님?”
그리고.
- 다그닥. 다그닥.
일곱 명의 푸른 사자가 경계하듯 후작을 둘러쌌다.
“뭐 하는 짓이냐? 단장에게 갖출 예를 잊은 거냐?”
선두에 선 기사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할 때.
- 팟!
어느새 말에서 내려 팔짱을 끼고
있던 기사 레일리가 움직였다.
“혀,형님! 뭐 하시는……!”
“칼을 왜 빼십니까?”
자세를 낮춘 채 한쪽 발을 축으로 빙글 회전하며 강하게 휘두른 칼은 후작이 피할 곳을 내리쳤다.
레안드로가 홈칫 피하는 동시에 장검은 두 갈래로 나눠지며 얇고 뾰족한 쌍검을 생성했고,역수의 쌍검이 살아 있는 것처럼 레안드로 후작을 횡으로 베어 갔다.
“어… 어어!”
그리고.
一 서걱.
한 번의 절단음.
레안드로 폰 바티엔느.
제국의 검주는 셋으로 갈라져서 죽었다.
“이건… 각하가… 아니다.”
기사 레일리가 짓씹듯 뱉어냈다.
푸른 사자들은 레일리의 행동에 흠칫했지만,곧 사태를 파악한다.
“잔악한… 사술邪術이다!”
“진짜 각하를 구해야 해.”
하지만 빠르게 적응하지 못하는
자도 있었다.
“하… 하… 다… 단장님이… 이게 무슨… 으아아… 아아..!”
아직 요마妖廢,괴기怪奇와 싸운 경험이 부족한 열일곱 살 프릭스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 히힝! 히히힝!
푸른 사자 기사단은 후작을 따라 수많은 마경을 거쳤다.
괴력난신을 상대로 백전불태.
고참들을 따라 기사들이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 때.
- 사박.
손에 칼도 들지 않은 단장이 다시 가뿐한 발걸음으로 그들에게 슬쩍 다가오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니까?”
기사 알피린의 두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었다.
“또… 감히……!”
그녀는 곡예하듯 말을 몰아 창을 내질렀다.
단장의 가슴팍에 창날이 닿을 때
짓씹은 알피린의 입술에서 선혈이 흘렀지만,반투명한 기운이 서린 창날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단장의 페와 심장이 터져 나갔다.
열입곱 소년은 넋이 나갔고.
기사들은 눈을 부릅뜨고 그것을 바라보았다.
굳이 파마破廢의 축복이 없더라도 깨달을 수 있다.
눈앞의 존재는.
당연히 단장이 아니다.
그들 모두를 입단 심사한 단장은 제국제일검.
자신들의 창칼에 뚫리고 썰릴 리 없는 우상이었다.
하지만.
“반역인가? 반역이야? 반역?”
“제국법……
“으아아아아!”
기사 에르고스가 거대한 망치를 휘둘러 법률을 운운하려는 단장을 죽였다.
- 광! 광! 광!
이미 머리가 깨져 즉사한 단장을
팔다리와 몸통까지 으깨 버린다.
“환상은… 아니다.”
마법을 해제하는 스크롤을 그가 찢으며 말했다.
“그럼 뭐라는 거야!”
알피린이 발작적으로 외쳤다.
“모르겠다. 인형인지……
그때.
“너무 아프잖아.”
“그만 죽여라.”
“미안하다.”
“얘들아,내가 미안하다.”
“훈련이 너무 과했지?”
다섯,여덟,열셋,스물,서른…….
관문 앞쪽.
사방에 숨어 있던 단장이 천천히 자신을 드러냈다.
그 숫자는 쉰을 넘어서고 있었다.
- 털썩.
신참 단원들 가운데,팔에 힘이 빠져 무기를 내려놓는 자들이 몇몇 생기기 시작했다.
* * *
“귀여운 영주님한테는 말하지 마. 괜히 무서워할까 보다. 크큭.”
네크로멘서는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을 조용히 속삭였다.
“몸의… 반 이상이 타 버렸는데… 그렇게 애벌레의 먹이로 쓸 수가 있다는 건가?”
놀라웠다.
지금껏 본 건 온전한 시체가 먹혀 꼭두각시가 되는 광경뿐.
공작에게 암살당한 레안드로나, 그라스미어 내성에서 먹힌 랜들러 형빈 같은 녀석들이다.
“뭐,응용과 발전이라는 거지.”
“싸울 수도 있고?”
질문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기대하진 마. 정수를 쫙쫙 빨아 버린 덕분에 껍데기뿐이거든.”
문득 서늘해졌다.
‘사악하군.’
시체를 모독하고.
생전의 시체를 사랑했던 인간들의 마음을 모독한다.
‘한 톨 빠짐없이 정수를 빨아들인 내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걷는 것은.
명백한 사귀邪鬼의 길.
나 역시 세상으로부터 마물이라고 칭해지는 존재다.
‘처음부터 예측하고 있었지.’
당연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무엇보다 루비아의 마음이 다치지 않는 게 중요하다.
무엇을 더 바랄까.
애벌레에 대해 설명하면서, 옅게 미소를 띤 기스-제-라이의 표정이 결코 싫지 않았다.
- 쿠구궁.
작은 비행선이 관문 반대편 땅에 정확히 착륙했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와아! 무인 비행선인가요?”
루비아가 주위를 둘러봤다.
“내가… 하니까… 괜찮아……
닥터 설아는 아까부터 갖고 있던 기이하게 생긴 계기판을 조작하고 있었다.
“설아 님이요? 그러면 여기까지는 어떻게 온 거예요?”
“비행은 이륙과 착륙이 무엇보다 어려운 부분이고,나머지는 경로만 입력하면 그만이거든.”
기스-제-라이의 설명.
“•••진짜 죽여주네. 역시 이쪽에 붙길 잘했다니까.”
“이런 걸 레드 플레이크는 직접 만들었다는 거군요!”
시아와 루비아가 연신 감탄하며 자리를 잡고,설아는 안에 들어가 조종석에 앉는다.
내부는 그렇게까지 크지 않아서, 인간 열 명 정도가 탑승하면 적정할 정도였다.
- 부우우우우……!
비행선은 고도 높이 떠올랐고.
“영주,네가 다스리던 도시들이다. 감상해 봐라.”
네크로멘서는 슬쩍 루비아가 관문 바깥의 참상을 보지 못하게 몸으로 시야를 틀어막았다.
“아… 아름다워요……. 이런 구도로 도시들을 보게 될 거라곤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했는데… 세상에……
“언젠가 돌아을 날이 있겠죠?”
루비아가 싱긋 웃었다.
시나리오를 클리어하긴 했지만.
결국 도망치는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부쉈나 보군.”
비행선이 이미 높이 떠올랐을 때.
망원경으로 계속 아래를 살피던 기스-제-라이가 속삭이듯 말했다.
푸른 사자 기사단은 나안으로는 보이지도 않는 까마득한 저 아래에 있었다.
그들은 수백 번 후작을 죽였고, 그만큼 마음이 망가진 상태였다.
“잘 있어라,퍼런 것들아.”
“으음……
조금 안타까운 마음도 든다.
‘챈들러 녀석이 떠오르는군.’
첸들러 형빈과는 그렇게까지 친한 관계가 아니었지만,처음 애벌레에 먹히던 광경은 꽤나 참혹했다.
〈오셨,습,니까. 은,공.〉
〈키?키키키키킥…….>
밋밋한 주둥이를 들썩이던 벌레.
그래도 정신을 붙잡고 자신들의 ‘단장’을 부숴 버린 저들의 수련은
찬사를 보낼 만한 것이다.
조금 더 늦게 왔으면 저런 경험은 안 해도 됐을 텐데.
닥터 설아의 연구로 가르베라는 양산이 가능해진 상태.
외형만이라면 스물이고 서른이고 얼마든지 뽑아낼 수 있었다.
“영주님에게는 비밀이다.”
속삭이는 네크로멘서를 보며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 부우우우…….
세 시간이 지났다.
어느새 가도의 끝.
“저게 라쿤 폭포예요! 정말 물이 춤추듯 흘러내리는걸요. 땅속에서, 바위틈에서 뿜어 나오는 지하수와 합쳐져 일어난 현상이래요. 책에서 봤는데 정말이네요! 저건 유명한 요마비 고원이죠? 평생 지도에서만 볼 줄 알았는데 정말 멋져요……
루비아의 감탄은 끊이지 않았다.
“경치 좋지?”
내가 할 말은 그 정도였다.
비행선의 고도는 자연스레 높아져 멀리 떨어진 산맥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가,산맥에 접근할 때 즈음에
정상보다 조금 더 높아졌다.
봄의 아침.
바람은 잔잔했고 구름 한 점 없는 평온한 날씨였다.
닥터 설아의 비행선 조종은 몹시 부드러워서 침대에 누워 있는 것 같았다.
수녀의 페르시우스에 타서 봤던, 활공하며 빠르게 통과한 풍경과는 또 다른 운치가 있었다.
여태까지 못 느껴 본 여유.
안전.
‘어쩌면… 여기만큼 안전한 곳도 없겠군.’
신세는 분명 도망자지만 지금까지 이렇게 평안한 적이 없었다.
“좋군.”
동부 산맥 정상을 향하며 불안도, 공기도 조금씩 엷어졌다.
황실의 유령이었던 시아는 아예 휘파람까지 불며 망원경으로 이곳 저곳을 살폈다.
“와아… 선명하네요……
동부에서 손꼽히게 높다는 다니안 산의 정상.
“말의 머리를 닮은 봉우리예요. 저기가 두 눈이고,저기가 입술… 그리고 저곳이 갈기… 보세요!”
“오호? 그래?”
그 위에 오르면 누구나 감성적이 된다는 봉우리를 바라보던 시아는, 망원경을 든 손을 아래로 힘없이 떨어트렸다.
“미… 미친… 저… 게… 뭐야?”
“무슨 일이야?”
“저… 저기……
살짝 턱까지 떨리는 시아를 보고 나도 망원경을 들었다.
뭐가 내사과장까지 했던 그녀를 이렇게 놀라게 했단 말인가.
하지만.
정상을 살펴본 순간.
차가운 얼음물에 뛰어든 것처럼 번쩍 정신이 들 수밖에 없었다.
아름다운 풍경.
따듯한 봄바람.
루비아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익숙하다.
[동화율이 떨어집니다…….]
이런 위화감은.
[50.14%…….]
지긋지긋할 정도로 잘 알고 있다.
[49.98%…….]
[%®®*%를 시작합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살아가는 세계.
“%데 @래?”
네크로멘서가 끼어들었다.
산 정상.
그곳에 있는 건.
시아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치직거치직. 분명치 그 빌어 치직먹을 거지새끼인데……,
단정한 분위기의 검객.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그것은,
입술도 칠하지 않은 채.
긴 속눈썹도 붙이지 않고서.
볼에 연지도.
양쪽 코의 커다란 비취도 없이.
짤랑거리는 장신구도.
코르셋도,드레스도,굽 높은 금색 구두도 신지 않고.
어깨까지 내려왔던 긴 머리칼은
귀까지 짧게 쳐낸 채로.
칠흑 일색으로 전신을 감싸고서 차분하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플 정도로 차가운 시선이 나를 안정시킨다.
시아가 비명처럼 말했다.
“절대… 그 새끼가……. 아니야.”
404하 권리 위에 잠자는 자 (1)
- 좌르륵!
날카로운 파공성이 울린다.
하얀 촉수가 사방으로 뻗어 가며 기스-제-라이가 비행선을 보호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물론 공격을 하기에는 지나치게 먼 거리.
공작은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고 있을 뿐이었지만.
그 시선조차 불안했다.
‘그런데… 저건?’
동화율이 떨어지며 녀석의 머리 위에 무언가 떠오른 것 같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려는 순간.
- 쉬이이이잉……!
상승 기류를 받은 데다가.
묘한 분위기를 느끼고 프로펠러를 전력 가동한 닥터 설아의 운전으로 비행선은 금방 공작과 멀어졌다.
기스-제-라이는 비행선을 둘러싼 촉수를 조금씩 거둬들였다.
공작은 시야에서 사라졌지만,의문은 남았다.
‘대체 뭐지?’
로랑스 타르티에 공작은 왜 저기 있는 거고.
왜 지금까지 한 번도 접하지 못한 옷차림으로 있을까?
혹시.
레안드로가 죽어서?
아니겠지.
지난 생에 소녀 공작 자신이 직접 살해했을 때를 회상했다.
〈귀중한 추천권을 사용했는데… 소녀가 그이를 추천할 때는,사이좋게 이 세계를 가지자는 거였죠! 연합도, 엠버도 짓밟아서 엉덩이 아래 두자는 거였는데…….>
진심으로 슬퍼하고 있었지만.
〈아아……. 어떻게… 이럴 수가… 발정이 나려면 그냥 나한테 나지… 생일 선물도 못 줬는데……!>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역시 아니야.’
레안드로 후작이 죽었다고 저렇게 복수심을 불태울 리는 없고.
복수심을 불태우더라도 스타일은 바꾸지 않는다.
‘기껏해야 립스틱 색을 바꾸는 것 정도겠지.’
게다가.
다르다.
보이고 만질 수 있는 것 외에도 각자에게는 고유의 공기가 있다.
하지만 공작의 분위기는 단순히 헝클어지거나 깨뜨려진 게 아니다.
아예 전혀 다른 존재.
“재 가끔 저렇게 옷이랑 분위기 바뀌냐?”
침묵하던 기스-제-라이가 입을 열었다.
시아가 고개를 저었다.
“15년간 한 번도 그런 적 없어.”
“그러면 쌍둥이라도 있는 거야?”
“그럴 리가. 하나도 감당 안 되는데 쌍둥이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해.”
시아의 말에 옆에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로랑스가 둘이라니 도저히 상상하고 싶지 않다.
예전처럼 레안드로가 수십 명으로
복제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과거 유령 서열 2위.
누구보다 공작을 잘 아는 시아도 저게 공작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 말이 맞을 텐데…….
뭘 알고 여기에 있던 걸까.
공작은 왜 변했을까.
혹은,시아의 말대로.
저건……. 누굴까.
생각이 맴돈다.
'아예 다른 존재라면……
갑자기 황실 비역에서 마주쳤던
존재들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열 기의 타이탄.
잿빛 기사.
잿빛 기사조차도 도망가게 만든 울컥 쏟아지는 진흙.
그들로부터 도망쳐서.
플라스크에 담긴 루-륨을 모조리 홉수하고 위로 오르던 우리를 잡아 세운 글자들.
상태창 같은 다른 층위의 표식이 팔에 떠오르던 두 명의 인간.
‘혹시 그거였나?’
공작의 머리 위에 떠오른 표식은, 그때 본 표식과 비슷한 느낌인 것
같기도 했다.
확신은 할 수 없었고.
어차피 까마득하게 멀어져서 다시 확인할 수도 없었다.
따끔따끔한 긴장은 비행선에 오래 도록 남았다.
“뭐 그렇게 얼어들 있어?”
기스-제-라이가 루비아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우리 영주님까지 왜 그래?”
“괜찮… 겠죠?”
“방금 봤으면서. 닭 쫓던 개처럼 하릴없이 허공만 쳐다보고 있었잖아. 주제에 날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엠버까지 못 쫓아올 거야. 최소한 시간은 많이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기스-제•■•라이의 말이 길어지는 게 묘하게 위화감이 든다.
어쩌면 그녀도 공작에게서 섬뜩한 무언가를 느낀 걸까.
“…신경 쓰여.”
병이라도 든 것처럼 창백한 안색의 시아가 중얼거렸다.
“나,레드 플레이크의 안전가옥에 있게 될 거라고 했지?”
촉수를 거둔 네크로멘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너희들의 조력을 받아서 로랑스를 조사해 보면 안 될까.”
“갑자기 왜?”
“저 새끼가 무슨 상태인지 내가 직접 알아내고 싶어. 저 새끼에게 일어난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파악해야겠어.”
“위험하지 않을까요? 안 그래도 지금까지 저희를 위해 힘껏 싸워 주셨는데……
루비아의 걱정에 시아 으스노르는 한쪽 입꼬리만 미약하게 뒤틀면서 웃어 보였다.
“하지만,레안드로가 사망한 이상
전쟁도 분명 저놈이 주도할 테니, 엠버도 내 뜻을 지지해 줄 거야. 아닌가?”
“나도 함께하지.”
“뭐야?”
내 말에 기스-제-라이가 얼굴을 찡그렸고.
얌전히 앉아 있던 루비아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그렇게 놀랄 건 없을 텐데.”
다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공작의 주변에 떠올랐던 무언가는 ‘표식’과 비숫한 느낌이었다.
〈뽑아내 버려.〉
〈하지만… 영향력이 너무 큰데?>
〈안정이 더 중요하니까. 남는 건 무작위로 채워지겠지.〉
〈권한, 적출.〉
금빛 까마귀의 빛이 지워지면서 검은 구슬로 빨려 들어가던 비역의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움직여야 해.’
직접 부딪쳐서.
공작에게 벌어진 일을 알아 나가다 보면.
아이작과 나냐우를 되찾을 단초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좀 의외지만 좋아. 그럼……
시아 으스노르가 뭔가 다른 말을 꺼내려 했을 때였다.
- 과과과광!
멀리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모두 고개를 돌렸다.
거대한 폭풍의 장막이 거짓말처럼 빠르게 형성되고 있었다.
“어..
- 과과과광! 콰콰콰콰광!
비와 벼락이 섞인 폭풍우까지는 아니었지만 강렬한 바람이 빠르게 날뛰었다.
휘말리는 즉시 거대한 비행선이 가랑잎처럼 날아가 버릴것 같은 대류가 조금 전까지 평온했던 바다 위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 부우우웅……!
비행선은 폭풍의 장막을 피하려고
한층 고도를 높였지만,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나는 좌석 손잡이를 꽉 잡고 있는 루비아를 보며 외쳤다.
“이런 곳을! 지날 수 있는 건가?”
설마 여기서 또 모두가 죽는 건 아니겠지.
원해의 미친 폭우 속에서 싸우며 바다에서 후작,수녀, 크라켄,나 모두 사망했던 끔찍한 기억이 다시 떠오른다.
아무리 루비아 시나리오를 끝낸 직후라지만 그런 식으로 죽는 건 거절이다.
농담이라면 끔찍하다.
필사적인 기분으로 네크로멘서를 바라봤지만.
“크큭. 닥터 설아를 믿으라고.”
터무니없이 여유로운 표정.
“자리에… 앉아……
닥터 설아가 중얼거렸다.
루비아는 원래 앉아 있었고.
시아는 짜중 난다는 듯 손잡이만 살짝 잡았으며.
나는 자리를 옮겨 루비아의 곁을 지켰다.
“으… 무서워요……
루비아의 손이 어느 때보다 빨리 내게 뻗어와서 나를 잡았다.
가느다란 손을 통해서 느껴지는 그녀의 떨림이 몹시 선명하다.
기스-제-라이가 그 모습을 보고 슬쩍 한쪽 눈을 깜빡여 윙크했다.
- 지이잉.
탑승석에서 강화유리로 된 투명한 덮개가 을라오고.
비행선의 한쪽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포문을 열었다.
혹시 보이지 않는 적이라도 있나 싶었을 때.
- 광! 광! 쾅! 콰광!
허공을 겨냥한 대포들이 일제히 사격하며 비행선이 요동쳤다.
“꺄아악!”
루비아가 비명을 질렀다.
“이게 뭔……!”
“옆에 있는 사람 잘 챙기시고.”
포격의 반동으로 인해 빙빙 도는 폭풍 속에 빨려간 비행선은 심하게
요동쳤다. 비행선은 폭풍의 결을 따르듯이 위로 치솟으며 곡예처럼 움직였다.
휘말린다는 말을 극단적인 형태로 경험하는 동안.
남부 세 도시의 영주였던 여자는 내 품 안에서 거의 혼절한 것처럼 무서워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웬만하면 눈썹 하나 깜짝 안 하던 시아도 얼굴이 파랗게 변했다.
일어선 상태로 균형을 잡는 데는 무리가 없었지만.
아무리 뛰어난 검술의 소유자라도
폭풍에 휘말려 원해에 추락한다면 살아남는 건 요원하니까.
“어허. 자리에 앉으랬잖아.”
- 쾅! 쾅! 쾅! 쾅! 과과광!
비행선 이곳저곳에서 계속 쏘아지는 포성이 비행선을 줄곧 때리는 바람 소리와 섞여 외침을 가린다.
육지와 달리 거대한 포신의 쏘는 반동을 홉수해 줄 땅도 없었기에, 어마어마한 힘이 그대로 비행선에 가해지며 크게 움직였다.
그럴 때마다 비행선은 서로 다른
폭풍의 흐름을 타고 어처구니없이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이대로 비행선이 부서지는 것은 아닐까?
나는 상관없지만 루비아는 어떻게 보호해야 하지 않을까?
후작을 흡수하며 최후로 각성한 능력을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
비행선을 보호하지 않아도 되나?
기스-제-라이는 왜 저렇게 태연히 웃고만 있는 거지?
온갖 걱정이 휘몰아쳤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하늘이 평온해졌다.
“아……
루비아의 작은 탄식이 들렸다.
뒤쪽에는 여전히 안팎으로 격렬한 폭풍이 넓고 거대한 장막을 치고 있었지만,앞쪽의 기류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 탈칵.
폭풍을 벗어난 비행선에서 투명한 강화유리가 벗겨졌다.
“이제… 끝……
비행선이 움직인 방향은 돌아보면 놀랍게도 직선.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다고 하진 못하겠어……
시아가 감탄 섞인 한숨을 쉬었다.
비행정도 비행정이지만.
어쩌면 이런 폭풍의 존재가 그간 엠버와 제국을 단절시켜 줬던지도 모른다.
기류를 뚫은 비행정이 평온하게 한동안 나아갔을 때.
“저게 뭐야?”
노란 구름의 무리가 아래쪽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엠 버다.”
기스-제-라이가 툭 뱉어낸 짧은
단어였지만.
‘여기가… 바로……
그곳인가.
재와 시체밖에 남지 않은 상태가 아니라.
하나하나의 자치령이 아직은 모두 살아 숨 쉬는 작은 섬.
공학의 도시국都市國.
‘드디어 왔군.’
바닷바람을 타고 몇 시간도 걸리지 않아 도착했지만, 기분상으로는 거의 수십 년 만에 이곳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보자 깊은
감흥이 밀려들었다.
그때는 잿더미인 엠버에 마족에 사역당하는 병사로 왔지만.
지금은 모든 게 살아 있는 도시에 시나리오 클리어 상태로 도착했다.
무엇보다 소중한 자들과 함께다.
'기스-제-라이,루비아..
바다에서는 레나가 기상에 맞춰 정해진 바닷길을 이용할 테니.
“와… 정말 높네요……
아직 옆에서 손을 놓지 않고 있던 루비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대체 기술력이 얼마나 뛰어나야 저런 걸 만들 수 있는 걸까요?”
노랗게 형성된 구름의 무리 아래 높은 탑들이 노란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예전에는 저런 것도 없었지.’
사람이었던 고깃덩어리도.
건물이었던 잔해도 없이.
먼지처럼 흩날리는 하얀 잿가루가 전부였기에 원래의 기술력은 아예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으음……
노란 연기는 거대한 씨줄 날줄이 교차하는 것처럼 얽히면서 하늘에 짙게 깔리고 있었다.
비행선 안으로도 조금씩 흘러들기
시작했지만.
독성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저 바퀴 좀 보세요!”
연기를 뿜는 높은 탑들은 육지의 톱니바퀴와 연결되어 있었다.
새까맣고 거대한 톱니바퀴는 하나 하나가 거의 황궁의 연병장만 한 크기였다. 돌리는 사람은 없었고, 감시나 점검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도 밑으로 눕혀진 그 거대한 톱니바퀴는 천천히 돌아갔다.
그리고 거기 연결된 것들도 함께 도시 곳곳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거대한 톱니바퀴는 마치 엠버메어
전체에 연결되어,이 도시 자체를 조금씩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엠버의 발전 기관이에요!” 기스-제-라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고 있군.”
“증기 기관이라는 건가?”
나도 책에서 읽은 내용을 읊었다.
“단순한 수증기가 아니라 루-름을 이용하는 발전이다. 그래서 지금 위쪽에 배출되는 기체들도……
- 철컥.
탑숭하고 있는 비행선의 커다란 기낭 부분이 아예 넓게 퍼지면서 노란 구름들을 쓸어 담기 시작했다.
“꼼꼼하게 다시 포집해서 재활용한단 말씀이야.”
“루-륨은 한정되어 있으니까.”
“이런 비행선들의 상당히 중요한 목적이기도 하지.”
네크로멘서는 엠버메어에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가볍게 한 마디씩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건너편에서도 비숫한 비행선들이 거대한 봉투를 기낭에 매달고 구름을 포집하고 있었다.
멀리서 보이는 것까지 두 개체.
“저것도 당신들 레드 플레이크의 소유물인가?”
“아니,비행선을 만들 수 있는 건 엠버에 우리만이 아니야.”
네크로멘서가 바닥의 거대한 검은 톱니바퀴를 손으로 가리켰다.
“제작이라면 저 검은 톱니바퀴를 굴리는 녀석도 굉장하다고. 우리야 유산에 매몰되어서 기술 발전 따윈 크게 생각하지 않지만,저 녀석은 정말 놀라워.”
“그라스미어의 대장장이들이 이런
장소를 보면 좋아했을 텐데요…… 루비아가 묘한 어조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렇겠지.”
바로 수긍했지만.
그녀는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급히 말을 돌린다.
“하지만 저는 이제 영주 같은 게 아니니까요.”
눈동자가 살짝 혼들린다.
돌아보자 두 눈에 촉촉한 기운이 서려 있다.
잘 살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로 미세했고.
나름대로 굳건하게 감정을 숨기고 있었지만.
몇 번이고 삶과 죽음을 반복하며 루비아를 봐 온 시간이 있으므로, 이 정도는 금방 알아채 버린다.
역시 그리움이 있었던 건가.
"하긴/
하루 전까지만 해도 그라스미어의 영주였다.
그녀야말로 가장 통치에 어울리는 재목일 텐데, 이렇게 다른 곳으로 데리고 와야 하는 것이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톱니바퀴를 굴리는 녀석이라고?”
루비아가 슬픈 기분에 젖어들지 않게 하기 위해 말을 돌렸다.
물론 실제로 궁금하기도 하다.
‘굉장하고… 놀랍다니.’
기스-제-라이가 언제 이런 평을 한 적이 있었던가.
바싸고의 전 제사장이나 마계의 강력한 스카우터들조차 개미떼라고 비웃으며 맨주먹으로 짓이겨 버리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 시아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보탰다.
“엠버의 ‘단독의장’, 자기 자신을 엠버로 확장해 버린 그 과학자를
말하는 건가.”
자기 자신을 엠버로 확장했다니, 상상이 가지 않았다.
‘무슨 소리일까.’
“제법이야? 정보를 숨긴다고 해도 유령 내사과장 정도 되는 녀석의 시선은 역시 못 피하네.”
하지만 시아는 전혀 칭찬을 들은 표정이 아니었다.
“기스-제-라이 당신을 포함해서, 엠버의 3강은 정보기관이 아니라도 모를 리가 없잖아.”
엠버의 3강.
들어 본 적이 있다.
처음 기스-제-라이가 황제 암살을 시도할 때,마법사 가운데 한 명이 그녀를 보고 엠버의 3강이라면서 근위 기사들에게 경고하고 대화를 시도한 적이 있었다.
나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모두 멈춰라!〉
〈엠버를 지키는 3강 중 하나다. 저자를 섣불리 공격하지 마라!〉
〈용건이 뭔지 묻겠소.〉
〈어,황제 암살.〉
〈목격자가 없으면 암살이지,뭐.〉
문득 궁금증이 든다.
기스-제-라이는 단독으로 황제를 암살하고.
마왕도 넘볼 만한 존재인데.
그녀와 비견할 만한 강자가 이곳에 둘은 더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어째서……
엠버는 잿더미가 된 걸까.
기스-제-라이 같은 초월자 셋에 레드 플레이크,트로핀 여단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이곳 방어에는 전혀 무리가 없어야 한다.
제국이 가진 전력을 싹 다 긁어 보냈다고 해도 잿더미가 되는 일이
상상되지 않았다.
기스-제-라이가 먼저 죽어서일까?
‘지금은 다르겠지.’
이번 세계선에서는 예전과 달리 그녀를 살린 상태.
제국 4검주 중의 하나인 레안드로 후작도 죽였다.
처참한 패배가 무엇 때문이었건.
‘내가,저울눈을 움직였어.’
엠버 쪽으로 천칭이 기울어진 건 분명했다.
- 부으으으으
이리저리 움직이며 노란 구름을 봉투 가득 포집한 비행선은 천천히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곳곳에 깃발이 꽂힌 높은 첨탑의 꼭대기에서 비행선을 인도하듯이 직선의 빛이 쏟아졌고.
비행선은 불빛의 인도를 따라서 착륙장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 쿠쿵.
비행선이 가볍게 착륙했을 때.
“환영합니다.”
- 끼릭. 끼릭. 끼리릭…….
옷 위에 태엽을 수십 개 장착한 남자가 다가왔다.
갑자기 위화감이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는데,지금은 당연히 거기 있어야 할 것처럼 나타나서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남자의 뒤쪽은 분명 장애물 없이 병 뚫린 평야.
‘숨었다가 나올 곳도 없는데.’
땅에서 솟은 듯이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그를 보자 홀린 것 같았다.
“뭐야……
시아조차 녀석을 전혀 감지하지 못했던 듯 눈을 깜빡이며 목으로 꼴깍 침을 삼켰다.
기스-제-라이가 분위기를 읽은 듯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의장. 가시광선 〈투과〉를 넘어 전자장 왜곡까지 달성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또 뭐가 더해진 거야?”
‘저 남자가 의장이라고?’
기스-제-라이의 물음에 태엽 옷을 입은 남자가 살짝 미소를 띠며 말을
받았다.
“에너지를 살짝 산란시켰습니다.”
“방법은? 뭘 발랐어? 소음도 전혀 발생하지 않았던데.”
“그건 비밀입니다.”
“우리 사이에 비밀이 어딨다고?”
- 끼릭. 끼리릭.
“3개월 21일 7시간 5분이나 엠버를 비우셨으면서 뭐가 우리 사이인지 본 의장은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가끔은 자신이 엠버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자각하시길 요청합니다.”
‘무슨 대화지?’
그나저나.
남자의 옷에 빼곡한 태엽은 단지 장식에 그치지 않았다.
-끼리리릭…….
가만히 세어 보자 합하면 백 개는 될 것 같은 태엽들은 조금씩 각기 다른 박자에 맞춰 움직였다.
비행선에서 내리는 것과 동시에, 태엽의 남자는 정확하게 ‘타이밍’을 맞춰 우리 앞에 섰다.
기스-제-라이는 남자를 가리키며
소개했다.
“이 인간은… 엠버의 단독의장, 공중통제관,국방장관,에너지부장, 교통청장,재무부장,어… 아무튼, 이런저런 걸 전부 혼자 맡고 있는 브람이야. 식사할 시간이 없어서 소화기관까지 모조리 인공 장기로 갈아 끼운 녀석을 인간이라고 해야 할지는 솔직히 모르겠지만.”
U | 99
단순한 소개였지만.
한 번에 지나치게 많은 정보량이 쏟아 내린다.
‘인공 장기라니.’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죠?”
묘하게 공감대가 형성되었는지, 루비아가 적극적으로 브람이라는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 티틱. 티딕. 틱.
팔꿈치 부근에 달린 둥근 태엽이 작은 소리를 냈다.
기스-제-라이와 함께.
엠버메어의 3강 가운데 하나라는 남자는 무기질의 느낌이 드는 눈을 깜빡이며 친절한 표정으로 웃었다.
“엠버에서는 다들 하기 싫어하는
역할이지만, 저는 이 도시를 반드시 유지하고 싶으니까요. 예술에 검열이 없는 도시,과학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도시 엠버에 방문하신 것을 다시 한 번 환영합니다.”
405하■ 권리 위에 잠자는 자 (2)
그가 웃음을 지으며 우리에게 하나하나 반갑게 인사했다.
“닥터,오랜만입니다.”
“안녕… 의장. 새 사람… 인사해.” 처음 인사를 받은 설아는 약하게 고개만 끄덕이고 뒤로 빠졌다.
의장이라 불린 남자도 끄덕이고 루비아를 바라봤다.
“남부 세 도시의 영주님이시군요. 반갑습니다. 선정에 대한 말씀은 정말 많이 들었습니다.”
레드 플레이크가 눈앞의 남자에게 적극적으로 정보를 줬을 것 같지는 않은데.
그녀를 한눈에 알아본다.
‘역시 엠버의 3강이라는 건가.’
“이젠 아니지만요. 만나 뵙게 돼 영광입니다, 브람… 의장님.”
루비아는 가볍게 웃었지만 밑에 가라앉은 씁쓸함이 느껴졌다.
“그냥 브람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잡무를 담당할 뿐입니다.”
“잡무라니요! 기스-제-라이 님에게 들어 보니 이 도시 전체가 성립하게 하는 분이던데요. 정말 대단하세요.
저는 처음부터 옆에 계신 분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헤쳐 나갔는데……
남자의 얼굴에 미소가 서린다.
“놀라운 자질을 보이신 걸 이미 알고 있는데 무척 겸손하시군요. 나중에 도시 운영에 관한 말씀을 한번 같이 나눠 보도록 하지요. 시간 나실 때 연락 부탁드립니다.”
루비아와 인사를 마친 그는 다시 시선을 옆으로 옮긴다.
“시아 님,남부에 활동하는 황실 유령들을 대부분 처리해 주셨다고 들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현명한 선택에 찬사를 보냅니다. 엠버는 압제에 저항해서 일어나는
이들을 위한 자리를 언제나 마련해 놓고 있습니다.”
‘저런 것까지 아는 건가?’
루비아야 물론 공인이지만.
붉은 눈의 여자는 황실의 은밀한 조직에서도 가장 어두운 곳에 속한 인간인데.
‘저렇게 한 번에 보고 알다니.’
시아의 입술이 비죽이 벌어진다.
“엠버는 역시 절대 쉬운 상대가 아니라니까.”
“밖에 친구들을 조금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어차피 사적 복수였을 뿐이야.
명성 높은 의장님을 직접 만나 뵙게 되어 반가워.”
그때 였다.
“하핫. 그럼 검역 절차가 있어서… 실례하겠습니다.”
“응?”
‘검역 절차라고?’
문득 걱정스러워졌다.
어쨌거나 이곳은 인간의 도시.
정체를 당당히 드러내고 도시에 입성한 기억은 없다.
혹시 엠버에 못 들어오게 하는 건 아닐까.
내 존재가 문제가 되지는 않을까?
하지만 기스-제-라이는 여유로운 표정이었고.
“완전히 평화적인 방식의 전투력 측정 입니다.”
“뭔데? 해 보라구.”
一 지잉.
동시에 남자의 모노클에서 나온 푸른빛이 시아를 훑었다.
“어?”
마치 별빛청여우의 가면에서 뻗는 초록색 빛이 떠오르는 모습이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짧은 순간에 스캔이 마무리되어 지나갔을 때.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심으로 놀라는 것 같았다.
“정말 대단하군요. 전투력 수치가
1만을 훌쩍 넘으실 줄이야.”
시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 하는 거야. 본인의 전투력을 그게 수치화할 수 있다고?”
기분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저것도 유산인가?’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레드 플레이크는
아니다.
‘검은 톱니바퀴를 굴리는 인간의 기술력도 굉장하다고 했으니.’
전투력을 측정하는 이 기계는.
높은 확률로 눈앞의 남자 자신이 직접 만들어 냈다는 이야기였다.
“정확히 말하면 루-름으로 비교한 에너지 척도입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젠장. 난 그런 거 믿지 않아. 전투력이란 직접 칼을 맞대 보고 볼장 다 봐야 아는 거 아닐까?”
“물론 그렇습니다. 잠재력 정도로 생각해 주시지요. 위험한 시기에,
이렇게 강한 분이 함께해 주셔서 더할 나위 없이 기뽑니다!”
위험한 시기라.
전쟁이 닥쳐을 것을 엠버메어의 의장이라는 남자도 물론 예상하고 있는 거겠지.
“그리고… 여기는 네크로멘서의 친구분이신 것 같은데……
그가 마지막으로 나를 바라본다.
눈빛에는 긴장감도 없고 적의도 없었다.
‘마물이라도 괜찮다는 건가?’
푸른빛이 딱히 해롭게 보이지는 않았다.
거절할 이유는 없었고.
남자가 나에게 보내는 중립적인 시선이 상쾌하게 느껴져 은연중에 호의를 갖게 될 것 같았다.
‘엠버에 들어가는 거다.’
이 정도는 거쳐 줘야지.
“시작하겠습니다.”
- 지이잉.
모노클에서 빛이 비치며.
안경과 연결된 극소형 스피커가 남자의 귀 안에서 작게 진동했다.
아예 몇 개의 태엽이 돌아가면서 남자의 동공이 빠르게 움직였다가 작아졌다.
‘으?,
시아를 스캔할 때보다 훨씬 오래 걸린다.
‘인간이 아니라서인가?’
‘혹시 공격을 준비할 확률도……
‘기스-제-라이가 태연한 걸 보니 그런 건 아닌데.’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남자는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뱉지 못하고.
시간이 멈춘 듯 그 자리에 못 박혀 가만히 서 있었다.
모노클에서 비치던 푸른색 빛은 보라색으로,분홍색으로,백색으로 빠르게 변해갔다.
‘무슨 문제지?’
주위를 바라봤다.
기스-제-라이 혼자만 알겠다는 듯 소리 없이 웃었고.
이지러진 분위기 속에서 남자는 모노클을 천천히 벗었다.
그 순간 느낄 수 있었다.
빛이 나오는 건 모노클이 아니라 무기질의 왼쪽 눈 자체.
차가운 적막이.
“당신은… 누구십니까?”
느릿한 목소리에 깨져 간다.
- 끼리릭… 끼리릭…….
몸에 붙은 태엽이 자신을 신경 써 달라는 듯 딸깍거렸지만,남자는 지금까지와 달리 거기에 신경을 끄고 있었다.
“누구긴. 내 제일 친한 친구라고.”
기스제라이가 씩 웃었고.
“…하지만 이 수치는 말이 되지
않습니다.”
엠버의 의장이라는 남자는 경악을 감추지 않는다.
“뭐가 그렇게 높이 나왔지? 무슨 스카우터인데?”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대상의 능력을 10k 차원에서 스캔합니다. 그리고 루-름을 이용해 판데르발스 공식에 따라 동위를 측정하죠.”
“100을 넘는다면 훌륭한 전투원,
검주급에 걸치게 되면 1만을 훌쩍 뛰어넘겠지요. 하지만 이건… 제가 지금까지 측정한 그 어떤 존재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나오셨습니다.”
잘 알아들을 수는 없는 이야기다.
어쨌거나.
루-름을 기준으로 측정이라니.
후작을 흡수한 다음 한차례 더 강해지긴 했지만, 남자가 이렇게나 놀라는 건 내가 지금까지 홉수한 루-륨 용액이 많아서 그런 것일지 모른다.
황실 비역.
부서진 플라스크들에서 한꺼번에 홀러든 은빛 액체가 떠오른다.
몸 전체의 부피를 압도하는 양의 액체가 몇 번이고 반복해서 회로로 폭주했었다.
세계가 바뀌는 이정표로 작용했던 은빛 마력액.
‘루-름을 가장 잘 활용하는 곳은 엠버라고 들었는데.’
어쩌면 그때 흡수했던 루-름의 진가를 지금 이곳에서 활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엄청나군요. 이 정도의 수치라면 뭐가 가능할지 솔직히 짐작하기도 어렵습니다.”
브람이 혼자 고개를 갸웃하면서 조심스럽게 중얼거린다.
무기질의 눈에서 기묘한 설렘과 희열이 느껴진다.
“뭐가… 가능이라니?”
“루-륨 동위 레벨 측정은 단순한 전투력 환산에만 목적이 있는 게 아닙니다. 이건 사실 장착 가능한 전술 무장을 측정하기 위해 개발된 공식입니다. 엠버메어에서 개발된 전술 무장의 상당수는 루-름으로 작동하고,거기 얼마나 동조할 수 있느냐에 따라……
의장이 차분한 해설이 계속된다.
엠버의 기술력은 압도적인 수준.
가지고 있는 재화만 충분하다면, 심장이나 소화기관,혀나 눈까지 의체로 대체할 수 있는 도시.
팔다리에 장착하는 무장병기들은 말할 것도 없다.
초당 수십 회의 타격까지 가능한 쓰러스터를 장착한 주먹.
투사체가 날아가는 탄도 무기는 물론이고.
웨폰팩의 버전에 따라서 광추면을 모조리 절삭하는 레이저 병기마저 존재한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사실,웨폰팩을 개발했다고 해서 누구나 쓸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혹시,방금 그 스캔이라는 게……
뭔가 눈치랜 듯한 시아의 의문에 남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맞습니다. 역시 알아차리셨군요. 맥스 쓰러스터를 사용한 무기나, 지향성 에너지 무기 정도라면 모두 상당한 수준의 루-륨 동위 레벨이 필요하지요. 어쩌면 각자가 가진 ‘그릇’이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 끼릭. 끼리릭.
다시 한번 태엽 소리가 울리고, 브람은 말을 정리한다.
“어쨌건,보라색을 초월한 이상 광학병기 커스텀이 가능할 거고.”
“분홍색에 도달한 이상,엠버에서
저밖에 사용하지 않는 질량 병기도 사용이 가능할 확률이 높습니다. 몸에 빈 공간이 많으니 장착하기도 편하실 거고.”
나보다도.
“너… 설마 얘한테?”
기스-제-라이가 놀란다.
“이 정도의 잠재력이 뜨는데 그냥 보내드릴 수는 없지요.”
“호호… 그야 좋지만...
그녀가 나를 보며 뿌듯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대체 뭘 어쩌겠다는 건지 정확히 물으려고 했을 때였다.
- 끼리릭!
남자의 어깨에 달린 태엽이 마치 비명처럼 울부짖는다.
그는 생각났다는 듯 다시 표정을 관리하며 말했다.
“어쨌건, 엠버메어에 오셨으니… 시민 등록 절차를 밟으셔야겠군요. 가시죠.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시민이요?”
루비아가 의문을 꺼냈다.
“네. 그렇습니다.”
“혹시 시민이라는 건 오기만 하면 될 수 있는 건가요?”
제국에서 거주인과 시민은 동일한 단어가 아니다.
‘연합도 그렇다고 읽었는데.’
마음대로 도시에 들어온 자들은 추방당했다.
터무니없는 차별 대우를 받으며 동떨어진 교외나 허름한 골목에서 제3계급,제4계급으로 사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다짜고짜 시민 등록 절차라니.
루비아의 질문에 남자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태어나거나, 바깥에서 이곳으로 오시면 됩니다. 엠버메어를 찾아오는 일이 절대로 쉬운 건 아니니까요.”
어쩌면.
납득이 가는 이유다.
비행선이 어떻게 힘들게 왔는지, 인어들에게 끌려서 원해에 왔을 때 후작과 별빛청여우가 도대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떠올려 보면,여기 도착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비범한 인간들이다.
상인연합 소속의 선장 넥스몬드는 편안한 바닷길이 있다고 했지만
그런 걸 안다는 것만으로 당연히 특별한 일.
“아… 그렇지만.”
루비아가 끼어들었다.
“저는 그냥 따라오기만 했는걸요. 여기 다른 분은 모두 굉장하지만, 저는 혼자였으면 절대로 이곳까지 도착하지 못했을 거예요. 그래도 제가 자격이 있을까요?”
들뜬 기분을 억제하려는 것 같은 표정으로.
그녀가 태엽의 남자를 흘끗 보며 말했다.
하지만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이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이지요. 이곳까지 오셨다는 결과가 중요합니다. 그게 운이건, 인맥이건 상관없습니다. 시민권은 결과로써 부여됩니다.”
문득 과거를 떠올린다.
- 쏴아". 쏴아.B
마족의 군단원으로서 노를 저어, 엠버메어를 향해 갈 때는 별다른 고난을 겪지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바다의 기류는 엠버에서 만든 것일지도 몰랐다.
‘선별을 위해서……?’
엠버의 파괴와 함께 그 기류 또한 사라진 것일지도 모르고.
“엠버를 나가면 어떻게 되지?”
시아가 물었다.
유령 내사과장이었던 그녀조차도 여기에 관한 정확한 지식은 갖고 있지 않은 것 같아 놀라웠다.
“거주지를 등록하지 않은 상태로 육 개월 이상 떠난다면 시민권이 박탈됩니다. 나눠 줄 루-륨은 한정 되어 있으니까요.”
“나눠 줄… 루-름이요?”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은 엠버의
시민으로서… 엠버에서 채굴했던 루-륨의 일정 지분을 갖습니다.”
“지금은 대략……
- 끼릭. 끼릭. 끼리릭.
“현 시간을 기준으로 한 사람당 대략 1.99174 리터로군요. 저에게 위탁해서 운용시킬 수도,이런저런 다양한 물품을 구하는 데 쓸 수도 있습니다.”
시민이라는 이유만으로 2리터에 달하는 양이 배분된다.
그 양도 적지 않지만.
‘내가 지금까지 흡수한 양은……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다.
브람의 스캔에서 특별한 결과가 나온 까닭은,지금까지 홉수했던 루-륨의 양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어서겠지.
그 은빛 액체를 흡수해서였건.
혹은 흡수할 수 있어서였건.
“그럼 일단 도심에 가시겠습니까? 차는 준비해 놓았습니다.”
몸에 달려 있는 태엽들은 각각의 속도와 방향으로 움직였고,남자는 모든 그 톱니를 몸의 일부처럼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새로 온 친구들은 돌아야 할 곳들이 있지.”
기스-제-라이는 걸음을 떼지 않고 부언한다.
“아, 의장. 당신은 수사국장이기도 하잖아? 알아봐야 할 게 있어.”
‘수사국장이 라니.’
“어떤 거 말씀이십니까?”
“로랑스 타르티에. 제국제일검에 대해서야. 최근의 행적이라든가… 이상한 일이 없나 자세하게 한번 살펴볼 가치가 있을 거야.”
- 끼릭. 끼릭.
태엽이 돌아간다.
“최근에 그에 대해 입수된 정보는 제국 수도에서 실종되었다는 사실 정도입니다. 본격적인 조사를 위해 시간을 더 만들어야 하는데……
- 끼리릭. 끼릭.
가슴팍에 붙어 있는 태엽이 다시 돌아간다.
”무리야? 너무 과중한가?”
하지만 무언가를 계산하던 브람은 고개를 저었다.
“소모성 장기 교체 주기를 조금 더 줄이면 가능합니다. 적극적으로 알아보도록 하죠.”
간단한 일인지 의문이 들었지만, 워낙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통에 끼어들기도 쉽지 않았다.
“여기 친구들도 관심이 많으니까, 같이 일하면 든든할 거야.”
“그렇다면 더 쉬워지겠죠. 추후에 논의해 보도록 하지요.”
남자가 활짝 미소를 지었다.
‘이런 인간이 알아봐 준다니.’
엠버메어를 지탱하는 존재.
역량과 책임감은 만난 지 몇 분도
지나지 않았지만 알 것 같았다.
공작에 대한 불안은 조금 가시는 느낌이었다.
곳곳에서 터져 나가는 희미한 연기 너머로 커다란 차가 보였다.
‘마차가 아니로군.’
한 번도 본 적 없는 형태였다.
유리와 쇠가 조합된 듯한 날렵한 모양새의 전차.
말 대신 커다란 바퀴와 전조등이 앞에 있었고,철제 밸브 같은 것이 곳곳에 달려 있었다.
측면과 전면에 탁 뚫린 유리창이
시야를 보장해 주고 있었다.
별빛청여우의 풍뎅이보다는 한참 떨어진 수준의 기술처럼 보였으며, 떠오르는 반투명한 홀로그램이나 안내 메시지도 없었지만 견고하고 기능적으로 보였다.
‘이게 기관이라는 건가.’
닥터 설아가 앉으려고 하는 걸, 브람은 흘껏 나를 보더니 옆까지 따라와서 앞 좌석에 먼저 자연스레 앉았다.
一 끼릭. 끼리릭.
“어……r
닥터 설아가 당황하고.
네크로멘서 역시 놀라 소리친다.
“뭐야? 너 바쁘잖아?”
차까지만 같이 가는 줄 알았는데, 아예 운전대를 잡아 버린다.
데리고 돌아다녀 준다는 건가?
그럴 일정이 되나?
“본인은 엠버의 방위국장입니다. 역사상 최강의 루-륨 동위 레벨을 가진 분이 오셨는데 직접 모시지 않을 수 없죠.”
날 말하는 것 같다.
“언데드로 사시는 건 어떻습니까? 요즘은 너무 바빠서,저도 먹지도 자지도 않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군……
가까워지려는 시도 같지만 어딘지 어색하다.
이런 상황에서 뭐라고 해야 할지 솔직히 모르겠는데.
“그럼 진작 내게 말하지 그랬어. 좀비로 만들어 주면 되잖아?”
네크로멘서가 짐짓 다정한 어조로 끼어들었지만 브람은 아주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기스-제-라이 님의 좀비는 굉장히 기능적이지만,기스-제-라이 님에게 절대복종하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기스-제-라이 님이 엠버를 배신하실 경우 완벽하게 답이 없는 데다가, 사역자가 사망할 경우 비활성되니 거절하겠습니다.”
“예전보다 말투가 더 이상해졌어. 두뇌까지 갈아 끼운 거 아니야?”
“엠버 3강인 기스-제-라이 님의, 엠버에 대한 무관심에 대한 본인의 전용 대응 말투로 해석해 주시죠.”
설마.
엠버를 방치한 기스-제-라이에게 투정을 부리는 건가?
생각보다 둘은 친밀한 사이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남자가 어깨를 으쏙했다.
“회로 증설 정도는 했지요.”
“뭐,진짜였어?”
네크로멘서가 놀란 듯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그 정도면 엠버에 대한 무관심도 질병의 영역이라고 판단됩니다. 저는 내장과 팔다리를 바꾸기 전, 과로가 쌓인 양안雨眼과 두뇌부터 건드렸습니다만.”
네크로멘서가 아까운 듯 머리칼을
손으로 꼬았다.
“흐홍. 제대로 좀비가 되어 줄지 안 될지도 모르겠는걸.”
“해당 상황의 가정을 거절합니다. 기스-제-라이 님께서 저를 살해하려 하셔도 성공률은 14.9%에 지나지 않습니다. 포기를 권장합니다.”
“정말? 그거밖에 안 돼? 거짓말.”
“엠버메어에서의 승리 확률이며, 저는 엠버를 떠나지 않으므로 해당 수치는 지극히 유의미합니다.”
대화가 티격태격 진행되는 사이, 차창 밖으로 신기하게 생긴 것들이 지나갔다.
커다란 바퀴 안에 인간 한 명이 탑승하고 있는 형태가 많았고,철로 된 말이나 거미에 탑승하고 다니는 자들도 있었다.
도로 한쪽은 뭔가 지키는 것인지 기계 같은 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안에 인간이 들어 있는 건지, 정말 기계만으로 움직이는지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무엇보다도.
“어…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우리를 무시하고 있어요.”
투명한 유리창 너머 힐끗 이쪽을 바라보는 자들은 있었지만,지금껏 겪은 일들과 비교하면 말 그대로
무반응이라고 해도 될 것 같았다.
가린 것도 아닌데.’
이 도시에서는.
모두가.
나에게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걱정이 머쓱해질 정도의 무관심.
보고도 별 반응 없이 시큰둥하게 지나가는 자들의 불투명한 눈빛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인간의 도시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멋진 일이었다.
“저기는……
아무렇지 않게 거리에 지나다니는 행인들 가운데 이종족도 심심찮게 섞여 있었다.
“엘프가… 남아 있었네요……
숲과 함께 죽은 종족.
박제가 되어 권력자들의 밀실에 전시되어 있는 줄 알았던 엘프들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레’라지에를 추종하는 다크엘프가 아니라,전혀 다른 느낌의 새하얀 엘프들이 나른한 표정으로 바퀴를 타고 다니고 있었다.
산맥 지하 깊숙이 숨어 산다는 드워프도.
반요半妖와 수인도.
몸의 절반이 도마뱀인 리자드맨과 날아다니는 나비족까지.
“굉장하네요……
드물지만 하나둘씩은 길거리에 녹아서 아무렇지 않게 지나다니고 있었다.
마계의 꿈속에서 본 것 같은 곳이 정말 존재하는 건가 싶은 놀라운 광경이었다.
‘정말 좋은 곳이군.’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td O O O
브람이 운전하는 차가 구석구석을 누비며 움직였다.
그때 였다.
- 끼,끼헤에에에에에엑!
뭉툭한 게 짓썰리는 소리와 함께 듣기도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뭐야?”
살인과 고문에 누구보다 익숙할 시아도 얼굴을 찡그릴 만큼 섬뜩한 비명이 있다.
406하 권리 위에 잠자는 자 (3)
“사건이 터진 것 같은데.”
내가 말했다.
비명은 굉장히 두꺼운 방음벽에 막힌 것 같았지만, 차 안의 탑승객 구성이라면 그 어떤 고요한 비명도 놓칠 리는 없다.
생명과 고통이 연료로 타들어 가다, 터져 나가는 강렬한 폭음이 연달아 울려 퍼진다.
“대체 무슨 짓거리를 하는 거야?”
시아가 얼굴을 찡그렸다.
“이 소리……. 죽이고 토막 내는 게 아니라 토막 내면서 죽이는 거잖아. 끔찍한 살인 사건이네.”
“그렇지 않습니다.”
브람은 핸들을 돌리지도.
차를 멈추거나 속도를 줄이지도 않고 앞으로 태연하게 운전해 갔다.
“그렇지 않다니?”
시아 으스노르가 입술을 할으며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저런 비명 소리는 본인도 굉장히 잘 아는 소리야. 당신 정도가 설마 안 들리는 건 아니겠지?”
“중앙 B 섹터 15번지.”
브람이 이곳의 지명을 옮고.
“이곳은 자신의 신체가 절단되기를 원하는 분들이 모이는 장소입니다. 오늘 일정이라면……
- 끼릭. 끼리릭.
비명의 폭음 속에서 태엽 소리가 울려 퍼진다.
“피시술자 어두비. 희망 시술은 사지 절단. 말단 부위까지 모두 다 잘라서 오직 한정된 부위에만 피가 돌기를 원함.”
“특이사항은… 마취되지 않은 채
절단되기를 원했네요. 비명 소리는 좀 더 들릴 겁니다.”
“뭐? 이런 미친……;
시아 으스노르도 어이가 없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루비아는 지금 당장이라도 토할 것처럼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누가 자기 팔다리를 잘라 달라고 했단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럼 어떻게 살라고요……!”
“보통 의족이나 의수로 대체하고 살다가,무력감을 느끼고 싶을 때 떼는 방식이지요.”
“의… 의장님은 정말 도시에서 저런 일을 허용하시는 건가요?”
- 끼리릭.
누군가 감아 놓을 것도 없이 혼자 감기고,풀리는 태엽장치의 남자는 신기한 소리를 들은 것처럼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허용이요? 제가 허용하고 말고 할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어처구니없는……
“밥을 먹을 때 손을 써야 합니까? 잠을 잘 때 위를 본 채 잠들어야
합니까? 네발이나,혹은 두 발로 걸어야 합니까? 뒤꿈치와 앞부분의 압력이 균열하게 땅을 디뎌야 하는 겁니까?”
의장이 말을 이었다.
“어떤 움직임으로 살아갈 것인지 간섭하지 않듯이,어떤 부위로만 살아갈 것인지도 간섭하지 않지요. 시술자와 피시술자의 상호 합의된 의사입니다.”
찜찜하긴 한데.
나야 통각도 살도 없고.
뼈가 분리된다고 할지라도 육체적
고통이야 없지만.
‘그런 게… 과연……
뭔가 묘하게 어긋난 기분이 든다.
“나는 잘라내는 것보다 붙이는 게 취향이지만. 어쨌거나 자기 자신의 몸이라는 거잖아?”
기스-제-라이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보탰다.
커다란 안경이 가린 닥터 설아의 표정은 알 수 없었고.
상황에 충격을 받은 건 처음으로 엠버에 온 사람들 정도였다.
“기왕 온 김에 이 동네 조금 더 구경하든지. 의장,어차피 길이는
비슷하지? B섹터 16번지까지 전부 보고 가자고.”
“네. 오히려 지름길이기는 해서… 구조는 복잡해도 통과 시간 자체는 비슷합니다.”
문득 고개를 돌려 살핀 루비아의 얼굴빛이 창백하다.
“아니,안 보는 게 낫지 않아?”
하지만 시선을 마주친 루비아가 고개를 저었다.
“전 괜찮은걸요. 한 번쯤은 보고 싶어요. 전부 엠버의 일부잖아요?”
“으음……
“그럼 가겠습니다.”
차는 빗방울처럼 골목으로 뻗어 들어갔다.
B섹터 16번지는 오로지 모퉁이와 모퉁이로 만들어진 것처럼 거자로 구불구불했다.
어둠이 내려 젖은 골목 곳곳에서 눈이,귀가,코가 보였다.
그것들은 표준적인 인간과 조금씩 다른 형태를 하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뭐죠?”
루비아가 물었다.
B섹터 16번지를 지나는 인간들의 모습은.
‘다른 종족은 아닌데……
대부분 평범한 인간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 후천적인 손길로 '변형’되어 있었다.
“자기를 좀 꾸민 거지.”
기스-제-라이가 말했다.
장식으로 이마 양옆에 굵은 뿔을 만들어서 붙인 인간.
귀를 확장하고 얼굴을 기묘하게 박음질한 인간.
등에 날개처럼 갈고리를 박아서.
자신을 건물의 지붕에 매단 채로 전시하는 인간…….
시아가 얼굴을 찡그렸다.
“끔찍하기도 하지. 의장님,여기가 저런 자들을 양산하는 곳이야?”
“그렇습니다. 커다란 성형 병원이 있는 곳이죠.”
“뭐 그딴 의사가 있어? 아무리 돈을 많이 받는다고 해도 그렇지… 의사 주제에 저따위 기괴한 시술을 해주다니 윤리는 말아 처먹었나. 저거 다 몸 망가뜨리는 거잖아.”
시아의 비난에 엠버 의장 브람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B섹터 16번지에서 시술을 하는 사람은 돈을 받지 않습니다.”
“•••뭐라고?”
“수술은 모두 ‘아티스트’ 나냐치 박사의 작품입니다. 그리고 닥터 나냐치는 해당 집도에 있어 한 푼도 받지 않습니다.”
“다만 처음부터 끝까지 마취 없이 진행한다는 조건이 붙습니다.”
“마취 없이 인체에 절단과 봉합, 조작을 하는 데에서 오는 가학적인 쾌락이 ‘아티스트’의 대가지요.”
“저딴 걸……!”
“자기표현을 하는 것뿐이잖아? 마음에 안 들어?”
네크로멘서의 말에 시아가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구역질 나서 뒈지겠네……
제국을 배신한 전직 내사과장이 중얼거리며 욕설을 뱉어낸다.
“좆같은 새끼들이 진짜……
팔다리를 절단하고.
몸 곳곳을 주사기로 빨아들이고.
얼굴을 일부러 무너뜨린 모습들을 보며 열이 받은 것 같았다.
“쓰레기 새끼들. 장애와 질병까지 도둑질하는 거냐.”
생각보다도 분노를 표하는 그녀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당신이 이 정도로 화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루비아의 낯빛을 다시 살핀다.
그녀는 말없이 어지러운 표정으로 바깥의 인간들 하나하나를 천천히 관찰하고 있다.
“내가 언제 화를 냈다고… 젠장. 로랑스 타르티에 그 쓰레기 새끼도 이래서 싫었어. 운만 좋게 강자로 태어난 주제에 약자의 흉내를 내지 말라고. 그딴 걸 꼴림의 대상으로 소비하다니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저새끼들 확 그냥 죽여 버릴까……. 팔다리 잘리는 걸 넘어서 시체가 되면 아예 제일 무기력할 거 아냐. 좇같은 새끼들이.”
“후후후……. 재밌는 반응이네. 열정 넘쳐서 보기 좋아. 로랑스 공작이 그래서 싫었어?”
기스-제-라이는 웃었고.
“살해는 곤란합니다.”
브람은 정색하며 제지했다.
“쳇. 안 해! 안 한다고!”
“물론 이 도시에는 당신과 같이 생각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숫자로 보면 훨씬 더 많을지도 모르고요. 소개시켜 드릴까요?”
자기가 자기 신체를 훼손하는 데 개입할 이유는 없는 걸까.
저건 자기학대인가.
정신병으로 보}야 할 것 같은데.
“너무 파괴적이지 않나?”
“맞습니다.”
내 물음에 의장이 대답합니다.
“파괴적이지요. 하지만 시아 님이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최고의 자기 파괴 행위는 자살입니다.”
“그래서?”
“저렇게 신체를 변형하는 자들은 통계적으로 삶의 욕구가 이미 적은 인간들입니다. 만약 절단이나 왜곡 수술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무척 많지요.”
“그렇다면 저걸 ‘파괴’ 행위라고 봐야 할지도 애매하지 않을까요?”
“홍. 저런 짓거릴 하다가 결국은 자살할 확률이 훨씬 더 높을걸.”
“논란이 있겠지요.”
‘뭐라고 생각해야 될지 모르겠군.’
시아의 말처럼 비판적으로 볼까 싶다가도.
엠버의 시민들이 나에게 던져 주는 무관심한 시선과,저런 신체 왜곡을 인정하는 게 밀접히 관련되었을 것 같기도 했다.
- 끼익.
마침 차가 구불구불한 골목 끝에 닿았다.
옆에서 소리내 웃던 기스-제-라이는 닥터 설아와 함께 내렸다.
“함께 더 있고 싶지만.. 우리 둘은 먼저 간다. 레나를 맞아야 하거든. 의장,내 친구들을 잘 부탁해.”
“물론입니다. 잘 모시죠.”
레드 플레이크 두 명을 내린 차는 골목 끝을 빠져나와 한층 더 넓은 길로 접어들었다.
넓은 도로 위에서 굉음까지 내며 질주하는 커다란 바퀴들이 보인다.
그 뒤로 뿜어지는 매캐한 연기가 허공에 자욱하게 남았다.
서로가 서로에게 한 마디도 말을 걸지 않아서 적막한 도로 위에서 커다란 건물이 나타났다.
B섹터 16번지와 완전히 대조되는 깔끔하고 큰 건물이었다.
엠버에서도 집중적으로 관리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풍경이 바뀌었다.
“이쪽입니다.”
회색 건물 입구에 차를 멈춘 브람이 내려서 우리를 안내했다.
“루-륨을 보관하는 은행이지요.”
그가 건물 앞에 섰을 때였다.
[최고 권한 인식.]
[출입을 허가합니다.]
- 지이잉.
틈 하나 없이,가로세로 20미터 정도의 틈 없이 요새처럼 보이는 건물이 저절로 문을 열었다.
“이야,무인으로 작동하는 건가? 탑주들의 던전보다 이쪽이 훨씬 대단한걸.”
시아가 작게 중얼거렸다.
빈말 같지는 않다.
녀석은 마탑주의 던전을 간 적이 있는 걸까?
긴,마법사 사냥도 심심치 않게 했다고 했으니.’
아쥬라의 마법사들과 황실이 오직 좋은 관계만 유지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황실의 비역은 뭘까?
탑주들의 수준이 눈앞의 건물에 미치지 못한다면.
황실의 비역을 아쥬라의 탑주들이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합동 작업이라고 해도… 절대로 곤란할 것 같은데.’
대체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
예전에 제국에는 훨씬 더 발달한 기술이 있던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마법이나.’
결국 비숫한 얘기겠지만.
분명히 과거에 뭔가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으음.’
출입구가 한 방향이 아닌 건지, 안으로 들어가는 사이 다른 자들도 다른 곳에서 조금씩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고 대기하고 있다.
한 팀씩 들여보내려는지.
출입 절차에 훨씬 시간이 걸리고 있지만.
브람이 그들을 흘끗거리며 빠르게 은행 중심부로 들어갔다.
발걸음을 옮기는 것과 함께 건물 안의 모든 문이 자동으로 열리고 닫힌다.
“신기하네요……
루비아는 하나하나 놀라며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나 역시 감탄하며 주위를 자세히 살폈다.
근무하는 인원은 한 명도 없는데
거대한 건물이 매끄럽게 돌아간다.
자동으로 움직이며 바닥을 닦는 기계도.
천장과 벽에 매달린 채 움직이는 둥그랗고 불투명한 렌즈도 보인다.
“투사 무기인가? 잘못 움직였다가 뼈도 못 추리겠군.”
렌즈가 매달린 벽 뒤편의 빼곡한 구멍을 살피고 말했다.
“루-륨은 엠버를 돌아가게 하는 마력원입니다. 소중한 만큼, 철저히 보호해야 하니까요.”
그는 품에서 황금빛 열쇠를 꺼내 한쪽 벽으로 다가갔다.
벽에는 작은 구멍이 있었다.
구멍에 열쇠를 꽂아 넣자 드르륵, 드르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풀리는 소리가 들리며 벽이 뒤로 열렸다.
- 위이이잉.
문을 여는 방법은 고풍스러웠지만 안쪽은 바깥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풍경이 펼쳐졌다.
[루-름 공급 기계 ‘평행의 나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안쪽에 놓인 커다란 기계 가운데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은빛 액체가 흐르는 커다란 나무 중앙에는 수백 가닥의 길고 투명한 튜브들이 연결되어 있었다.
수십 명이 팔을 벌리고 둘러싸도 다 두를 수 없을 것 같은 거대한 은빛의 기계나무는 환상 속에서나 볼 것 같은 장관이었다.
- 지이잉. 지이잉. 지이잉…….
피가 흐르는 심장처럼 꿈틀꿈틀
박동하는 나무 가운데서 뿜어지는 액체는 튜브의 말단에 붙어 있는 나선 태엽장치까지 도착하고 다시 안쪽으로 돌아오길 반복했다.
그 진동이 나무 안쪽에서.
바깥에서.
건물 전체에서 은은히 울려 퍼지고 있는 것 같았다.
“와… 아름답네요……
루비아의 감탄사 위로.
“코드 부여.”
엠버의 의장이 부드럽게 음성을 인식시킨다.
[권리자 권한을 인식합니다.]
[부여할 코드를 말씀해 주십시오.]
“9613-6XMM-O415-1C8.”
“6417-CMBQ-1116-JC9.”
“5953-1RHK-9194-HF3.”
[새로운 코드 부여를 인식합니다. 시민 코드 9613-6X- 시민 코드 6417… 시민 코드 5953…….]
브람이 말한 숫자와 문자가 다시 한 번 울려 퍼지고.
- 탈칵.
정확히 세 곳에서.
나무와 연결된 튜브의 끝을 막은 태엽이 느슨해지며 빛나고 있다.
[각 시민은 나무에서 지분만큼의 루-륨 인출이 가능합니다.]
“등록 절차가 완료됐습니다.”
“어떻게 된 거지?”
“시민 코드 부여는 제가 담당하는
일이니까요.”
“당신 말고는?”
“없습니다.”
어쩌면 눈앞의 기술보다 훨씬 더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과정을 브람이라는 인간 하나가 담당한다는 사실.
나는 당황해서 물었다.
“그럼 당신이 죽으면 엠버메어는 완전히 망하는 거 아닌가?”
브람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의 의식 데이터는 대부분 복제되어서 네트워크 안에
업로드된 상태입니다. 유사시에는 언제든 데이터를 집어넣을 수 있는 의체도 2기나 있으므로 걱정하지 마십시오.”
‘불안한데.’
레안드로 후작이 황실이나 제국을 배반한다고 해서.
심지어 제국제일검인 소녀 공작이 그런다고 해서.
아쥬라의 그 어떤 탑주가 제국에 등을 돌린다고 제국이 무너지지는 않는다.
여러 세력이 정치에 참여하고.
서로 견제하며 권력을 치열하게
탐하고 있다.
하지만.
‘이 녀석이 엠버를 배반하면?’
혼자만으로도 충분히 도시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 하나를 갈아 넣어서 도시를 지탱하고 있는 녀석에게 하기에는 가혹한 상상.
하지만 엠버의 멸망이라는 미래를 이미 알고 있기에 거기에 모든 걸 맞춰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혼자 모든 걸 처리한다니.’
한 명의 절대적 희생을 전제하는 시민들의 자유.
‘지나치게 의존적이야.’
이게 과연 얼마나 갈 수 있을까?
뇌를 증설하고.
눈을 갈아끼우고,
심장을,소화기관을 갈아끼웠다는 눈앞의 이 남자는 도대체 얼마나 엠버를 향해 봉사해 온 걸까.
“아무튼,저장된 루-름은…… 브람의 말이 상념을 깨트린다.
“빼서 쓰실 수도 있고 여기 남겨 두실 수도 있습니다. 남겨 두시면 한 달에 0.7%의 이자가 붙지요.”
“얼마나 벨 수 있지?”
“전량을 인출하실 수 있습니다. 다만 0.1 리터까지는 증서를 통한 지분 거래로도 얼마든지……
자세한 설명이 이어진다.
은행에 그냥 놓아둔다면 브람이 엠버의 운영에 사용한다는 것까지.
‘딱히 인출할 필요는 없겠군.’
그런 결론이 나온다.
내가 루-름을 흡수할 수 있지만.
지금껏 홉수한 양을 생각했을 때, 2리터 정도면 흡수하고 하지 않건 별 차이도 없겠지.
오히려 흡수한 루-륨은 바깥으로 꺼낼 수 없으므로,이렇게 엠버의
화폐로 남겨 두는 편이 나을 거다.
“남겨 두겠다.”
“그럼… 저도 남겨 둘래요.”
“나도. 당장 뭘 할 생각은 없어. 일단 밖에 뭐가 있는지 알아야지. 그리고 나는 레드 플레이크랑 같이 당분간 로랑스 타르티에 그놈을 추적할 거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은행에 있는 세 분의 루-륨은 제가 도시 발전에 운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브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다시 은행 밖으로 나갈 때였다.
나갈 때는 다른 문을 사용했는데, 다른 쪽에서 안으로 들어을 때는 알지 못했던 긴 줄이 있었다.
[시민 코드 0630-74XY-43-< 인식합니다.]
“전부! 전부 찾을 거라고!”
[시민 코드 5103-BH4J-43•••을…….]
“2리터 전부 인출한다.”
인간뿐만이 아니었다.
리자드맨도,호인족도,월랑족도, 엘프도 급하게 루-륨을 모두 전부 찾아가고 있었다.
“뭐지……?”
슬쩍 돌아본 순간.
브람의 얼굴은 눈에 띄게 단단히 굳어 있었다.
407호후 권리 위에 잠자는 자 (4)
“브람 의장님,표정이 왜 그러셔? 무슨 일 있는 거야?”
의장은 시아의 물음에 답도 하지 않고 뒤로 빙글 돌아섰다.
하지만 시아는 포기하지 않았다.
“대답해 줘. 다들 왜 지금 이렇게 루-륨을 찾고 있는 거지?”
“필요한 게 있겠지요.”
나도 끼어들었고.
“그 필요하다는 게 뭐지?”
루비아도 마찬가지였다.
“엠버메어에서는 루-름이 화페로 쓰인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러면 어디 쓰려는 건지 아실 텐데……
단독 의장이니까.
당연히 모를 리가 없다.
그러나.
“저에게는 루-륨 반출을 저지할 권리도 없고.”
브람은 고개를 젓는다.
“여러분에게 반드시 설명해야 할 의무도 없습니다.”
알지만 말하지 않는다.
단호한 태도다.
“뭐야,뭔데?”
시아가 인상을 찡그렸지만 대답을 강요하지는 못한다.
문득 기스-제-라이와 싸우면 그가 85% 이상의 확률로 이긴다던 말이 떠오른다.
어차피 억지로 들을 수는 없다.
- 끼릭. 끼리릭.
다시 한 번.
태엽이 돌아간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군요. 이제 무기 공방으로 가시죠.”
“우리가 쓸 무기를 말하는 건가? 그럼 여기서 찾아야 할 텐데.”
루-름이 화페라면.
무기 구매를 위해서는 필요하지 않을 리가 없다.
“아니요,여러분께선 지금부터…… 두 손을 벌려 은행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막은 녀석이 소리친다.
“국방부 소속이 되시면 됩니다.”
“국방부 소속이라고?”
“사적 무장이 아니라 엠버 방위를 위한 일이니 당연히 개인의 루-륨 따윈 필요 없습니다.”
“뭐……? 누구 마음대로?”
갑자기 웬 국방부냐고 따졌더니, 유사시에 원할 때만 예비 전력으로 편성하겠다는 설명이 이어진다.
특수 예비군 1호.
녀석이 방금 만들어 낸 자리다.
“지금 여기서 주어지는 루-륨으로 사는 것보다 비교도 안 되게 훨씬 강한 장비를 사용하실 수 있지요.”
“당장이나,뭐 주기적으로 우리가
해야 하는 건 없는 거고?”
“물론입니다.”
“…그럼 가자고.”
무언가 숨기는 건 확실하지만.
파고들 건덕지도 없고.
기스-제-라이가 소개한 녀석인데 해를 끼칠 가능성도 없다.
오히려 우리가 받고 있는 것들은 무조건적인 특혜에 가깝다.
‘어차피 제국의 편은 결코 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들을 피해서 엠버까지 왔다면 무장시켜도 좋은 거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물론 이런 무기까지 받은 이상.
전쟁이 일어나면 엠버의 편에서 끼어드는 게 도리이긴 하겠지.
‘여기가 망하면 갈 데도 없고.’
문제는 엠버의 멸망이라는 결과를 알고 있다는 사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엠버가 망한 이유를 찾아야 해.’
지금 어느 때보다도 강하다.
이유만 안다면 엠버의 멸망이라는 결과를 피할 수도 있을지도.
‘하지만,당장 브람에게 모든 걸 털어놓을 만한 분위기는 아닌데.’
‘좀 더 때를 보자.’
은행 밖으로 나온 브람이 우리를 차에 태워 안내한 곳은 놀람게도 엠버메어의 가장 외곽 쪽이었다.
건너편에는 해안에 닿기 직전의 드넓은 모래사막만 펼쳐져 있고, 주위에 건물이라고는 딱 하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몇 층인지 짐작이 어려울 만큼 거대한 건물은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인상적인 외형이었다.
밥그릇을 엎어 놓은 것처럼 둥근 건물 중앙으로 의장 브람이 우리를 안내하며 걸어 들어갔다.
입구부터 시작해서 곳곳의 보안은 루-륨 은행보다도 한층 더 투철해 보였다.
위에서 아래로 내리긋는 브람의 손짓에 자동으로 열리는 방호벽들 하나하나는 놀라울 만큼 두꺼웠고, 각자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제작되어 있었다.
[제1 방호벽을 개방합니다.]
- 쿠구구구구…….
[제2 방호벽을 개방합니다.]
- 지이이잉……!
[제3 방호벽을 개방합니다.]
- 끼긱. 끼긱. 끼이이이익.
3개의 방호벽이 열리고 난 뒤.
브람은 우리를 한쪽 방을 향해 안내했다. 그곳에는 거대한 공들이 고정대에 받혀 있었다.
공의 지름은 아이의 키 정도.
약 150cm 정도다.
“루비아 님을 위한 곳입니다.”
“저를요……?”
먼지가 쌓일 환경은 아니었지만, 먼지의 그것처럼 뽀얀 회색인 공에 브람이 손을 얹었다.
누구의 취향인지 몰라도 애초에 그런 식으로 칠해진 것 같았다.
- 삐이이이....
브람의 손에서 무언가가 뻗어서 커다란 공의 작은 구멍들로 쏙쏙 들어간다.
[XM836 미니건 활성화.]
[KNS 플라즈마 절단기 활성화.]
[압력 측정 중……J
[니트로 부스터 활성화.]
그리고 공에서 기묘한 목소리가 울려 나온다.
- 우우응.
- 우웅. 우우웅.
동그랗기만 했던 회색의 철구가 사방으로 펼쳐지며 사지0波들이
전개된다.
이제 신장은 2미터.
- 위이잉.
다리 아래 촘촘하게 달린 미세한 바퀴가 움직이며 360도 사방으로 자유롭게 회전한다.
- 쿠궁. 쿠궁. 쿠궁.
펼쳐진 중간 부위에 달린 프레스 관절이 움직인다.
바퀴의 기동만이 아니라 3차원의 자유로운 보행도 가눙한 증거.
브람의 몇 가지 입력과 함께.
[세큐리티 볼 EPK21 가동.]
[세큐리티 볼 EPK22 가동.]
[5953-1RHK-9194-HF3을 보호할 대상으로 인식합니다.]
분명히 브람이 루비아에게 부여한 시민 코드다.
- 좌르륵.
세큐리티 ‘볼’이라 불리기에 너무 커다란 그것은 루비아를 둘러싼 채 방호벽을 형성한다.
전개된 두 개의 커다란 철제 공 안에서 루비아가 당황했다.
“이건… 뭐죠?”
“루비아 님을 위한 병기입니다.”
“저 를요?”
“루-륨 동위 레벨이 없이도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한 무장이죠.”
“호오……
시아가 부럽다는 것처럼 두 구의 세큐리티 볼을 바라본다.
“연합의 최고급 철인과 비교해도 압도적이잖아. 사용되는 자재들만 보면 의원들이 쓰는 타이탄급으로 봐도 되겠는걸. 이런 대단한 것을 엠버가 숨기고 있었다니.”
시아는 결국 손을 들어 말한다.
“솔직히,하나씩 주는 거면 나도 갖고 싶은데. 이런 거 있으면 밤에 편하게 잘 수 있잖아.”
一 끼릭. 끼리릭.
어깨에 달려 있는 브람의 커다란 태엽이 돌아갔다.
“이 유닛은,루-름 동위 레벨이 없는 분도 사용 가눙한 제품이라… 제작이 어렵고 물량도 몇 기 없습니다. 시아 님이 장착할 수 있는 다른 걸 쓰시는 게 더 나을 겁니다.”
“중요 요인 보호라는 건가.”
“맞습니다.”
루비아가 곤란한 어조로 말했다.
“정말 이런 걸 제가 써도 될까요? 저는 엠버에 막 왔고,사실 중요한 사람도 아닌걸요.”
“중요합니다.”
브람이 웃으며 대답했다.
“기스-제-라이에게 직접 부탁받은
친구분 아닙니까. 그녀에게 빚을 지게 할 기회는 절대 많지 않지요. 하하핫……
단독의장.
혼자 엠버를 책임지는 존재.
어째서인지.
녀석의 웃음은 아직까지 어딘가 찜찜해 보인다.
‘루-름 은행의 대량 반출 사건을 목격해서인 걸까.’
다른 두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물어볼 수도 없고.’
- 위이잉.
루비아에게 붙은 세큐리티 볼은 다시 구 형태로 되어 그녀를 졸졸 따라오고 있다.
‘타이탄급 장비라니.’
전직 유령 석차 2위의 평가라면 확실하다.
연합 의원 두 명이 최대 전력으로 루비아를 보호하는 것과 마찬가지.
네크론 신사회에 쫓겼을 때부터,
유블람을 지났을 때,트롤에게서 쫓겨 절벽에서 떨어질 때,그리고 보티스의 사제장인 비브리오에게
몸이 개조당해서.
눈앞의 세큐리티 볼처럼 온몸이 ‘펼쳐지며’ 칼날을 드러내던 그녀가 떠오른다.
내가 계속 실패해 온 이상.
엠버메어의 저런 최첨단 병기가 루비아에게 붙은 건 분명 고무적인 일이다.
‘다행, 인가……
내 쪽을 흘끗거리는 루비아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녀석의 안내를 받아 다음 방으로 향한다.
“뭐가 이렇게 썰렁해?”
수십 명도 둘러설 수 있을 듯한 드넓은 방.
그곳에는 고작해야…….
열 개도 안 되는 무기가 여기저기 흩어져 놓여 있었다.
“루-륨 동위 레벨 1만 이상이 필요한 무기들입니다. 지금으로선 여기 있는 것들이 전부군요. 사실 거의 쓸 수 있는 사람도 없어서… 제작된 이후 보관만 하고 있었죠.”
하지만 의외로 평범한 것들이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장창.
곤봉을 쇠사슬로 엮은 플레일.
외날에 긴 자루를 가진 언월도.
폭이 넓은 도끼와 쌍검,긴 협도, 그리고 몇 개의 다른 무기와 함께 구석에 떨어져 있는 ‘손잡이’.
“호오.”
골라 보라는 권유도 듣지 않고, 시아가 그곳을 향해 걸어간다.
손잡이를 자세히 보면 그 위쪽에 촘촘한 철제가시들이 엮여 있다.
길이는 약 2미터.
하지만 제대로 휘둘러질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얇다.
그걸 잡은 순간.
一 휘익!
형광의 초록으로 반짝이기 시작한 채찍이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나며 허공을 가른다.
그곳에 상대가 있었다면 갑작스레 늘어난 채찍에 대응하지 못한 채 분명히 몸이 반으로 잘렸으리라.
기습.
한두 걸음을 물러난다고 피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 피이잉!
초록색으로 번뜩이는 채찍은.
사냥감 하나를 그물망에 가두고 몰아대듯 자유로이 길이가 바뀌며 마구 휘둘러진다.
채찍은 마디 하나하나가 모조리 살아 있는 것처럼 허공을 물어뜯고 휘감는다.
그리고 어느새인가 세 가닥으로 갈라져서,상정된 적 셋을 동시에 베고,채찍으로는 있을 수 없게도 다른 세 방향으로 비틀린다.
- 쿠과과과!
시아가 잡았을 때부터 초록색으로 빛나던 채찍은 어느 순간 스스로 중량을 더해 가듯 전혀 다른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바닥에는 한 번도 닿지 않았는데 단지 허공을 터트리는 것만으로도 괴멸적인 충격음이 울려 퍼진다.
‘이 채찍은……!*
단순히 ‘휘둘리는 것’이 아니다.
루-름 동위 레벨로 파악되는 몸의 잠재력을 동력으로 해서 분명하게 의지를 갖고 살아 움직인다.
중량을 실어 부풀어 오르는 것도.
끝을 날카롭게 만들거나.
여러 갈래로 나뉘는 것도.
마치 5미터짜리 창처럼 꼿꼿하게 한 방향으로 찔러오는 것조차.
물론,모두 다.
“이거,전부 마음대로 되잖아!”
힘을 불어넣는 사용자의 생각에 충실하도록 만들어진 무기.
이 넓은 공간을 열 개도 안 되는 무기들이 차지하고 있었던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거대한 방의 공간을 전부 쓰면서 기교의 극치인 편무輕舞를 선보인 시아 으스노르는 천천히 ‘손잡이’를 거둬들였다.
“그걸로 선택하시겠습니까?”
“당연하지. 처음부터 끌렸어.”
선택이 빠른 여자였다.
“그런데,이런 걸 마련해 줄 만큼 나를 완전히 믿는 거야?”
“유령들을 모조리 죽이셨는데… 이미 저희 편이 되지 않겠습니까.”
전직 내사과장은 ‘손잡이’를 짐짓 쓰다듬으며 웃었다.
“뭐,돌아갈 곳이 없긴 하지.”
“그나저나 굉장한 활용이로군요. 루-륨 동위 레벨이 높다는 사실이 보장하는 것은 이런 무기들의 사용 가능성이지……
“센스는 별개라는 거지?”
“본인 이야기를 잘 아시는군요. 이 경우는 무기와의 동조율이 무척 특출합니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전투력이 을라가시겠군요.”
“후후후.”
“마지막입니다. 가시죠.”
브람은 나를 바라봤다.
녀석의 눈동자가 묘한 기대감으로 흔들리고 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표정이었다.
계속해서 끼리릭,끼리릭,통치의 일정을 알리는 듯한 태엽을 달고
있는 엠버의 단독의장이 나를 향해 저런 눈빛을 보이리라고는.
심지어 설레는 듯한 미소마저도 띠고 있다.
“뭐야,의장님? 표정이 왜 그래.”
착각은 아닌 것 같다.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걷는 그를 향해서 말을 걸었다.
“이제 내 차례인가?”
브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측정한 동위 레벨에 맞는 무장을 해드릴 수는 없습니다만……. 일단 아무것도 안 달기는 뭣하니 임시로라도 쓰실 만한 물건이 하나
있습니다. 동위 레벨에 맞는 진짜 무기는 이제부터 제작에 착수하도록 하지요.”
브람은 우리를 건물의 가장자리로 안내했다.
둥그렇게 생긴 건물이라서일까.
두 겹의 방호벽을 더 지나 들어간 방은 가로로 길었으나.
시아처럼 무기를 시연해 보기에는 아무래도 면적이 모자랐다.
‘뭘 어쩌려는 거지?’
- 지이잉.
방에 진열되어 있는 것은 하나.
기괴하게 생긴 한 자루의 길다란 랜스였다.
평범한 랜스보다 훨씬 더 두꺼운 보라색 장창에는 굵고 긴 모양의 손잡이가 있었고,창끝 부분에는 마치 무언가를 사출하는 듯한 작은 구멍이 파여 있다.
‘안쪽이 비었나?’
“쥐어 보십시오.”
창을 살짝 쥐자.
[기계공학 Lv.l를 회복합니다!]
- 좌륵. 좌르륵.
자루를 덮은 손잡이가 손 전체를 감싸고 진동하며.
[기계공학 Lv.2를 회복합니다!]
- 우우웅!
하얀빛을 내기 시작한다.
[기계공학 Lv.3을 회복합니다!]
‘이걸… 단지 잡은 것뿐인데?’
예전의 기계공학 스킬을 완전히 다시 기억해 낸다.
놀라운 현상이었다.
‘진작 좀 더 이것저것 만져 볼 걸 그랬나.’
사실 손에 쥔 창이 엄청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이게… 뭐지?”
“입자를 빛의 속도로 가속시켜서 빔을 쏘는 겁니다.”
“빛을 쏘는 거라고?”
“빔입니다. 빛으로 가열하는 게 아니라 운동에너지로 상대를 전부
파괴하는 것이죠.”
“이런 걸… 개발한 건가.”
설명이 조금 더 이어진다.
공학 레벨이 회복됐지만,내용을 알아듣기는 힘들다.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기술력.
“레드 플레이크가 가지고 있었던 설계도가 있습니다. 엠버의 관리 대가로 몇 개의 설계도를 받았고, 그걸 참고해서 만든 겁니다.”
“으흠.”
“이 부분에 손을 얹고 당기면… 힘이 앞으로 폭사됩니다.”
손잡이에서 하얀빛이 뿜어져서 창
전체가 연보랏빛처럼 보인다.
“근데,여기서 하게?”
건물 가장자리.
폭이 좁은 장소다.
“기다려 보십시오.”
- 위이이이잉!
벽이 천천히 양쪽으로 움직이며 해안에 닿기 직전의 거대한 모래사막이 다시 보인다.
“무기연구소가 여기 위치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한번 쏘아 보시죠.”
가진 힘이 천천히 손잡이로 빨려 들어가면서.
창 전체가 안쪽에서부터 천천히 달아오르는 감각이 느껴진다.
‘여기 랬나.’
튀어나온 부분에 손을 얹고 뒤로 당겼다.
- 위이이잉!
- 과과과과광!
408호]■ 권리 위에 잠자는 자 (5)
연보라색 빛에 직격당한 표면이 굉음이 일으키며 움푹 파였다.
충격파조차 일으키지 않고 깊은 안쪽까지 들어간 공격은 어디까지 닿았는지도 전혀 짐작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역시!”
옆에 서 있었던 브람이 감탄사를 터트리며 말했다.
“다시 한번 발사해 보시겠습니까? 이번에는 각도를 위쪽으로 좀 더
조정해서 멀리까지 쏘아 보시죠.”
“으음.”
랜스 손잡이 위쪽에 투명한 상이 조준점으로 맺힌다.
살짝 위로 들어 올리고.
해변과 닿은 사막을 겨냥해 2격.
- 번쩍!
다시 한번 보라색 빛이 저 멀리 쏘아지고.
사막 위에 끝 모를 새까만 구멍을 만들어 낸다.
“사정… 거리가… 어디까지야?”
멍하니 중얼거렸다.
서 있는 곳과 두 번째 타격점과의 거리는 까마득할 정도였다.
무려 수천 미터에 달하는 사막의 반대편.
지금까지 이런 초장거리 무기는 본 적도.
상상해 본 적도 없다.
대포 따위는 아득히 뛰어넘는다.
“딱히 사정거리의 의미는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출력이 높을 경우 사거리도 그에 따라 오르니까요.”
“•••잔탄은 어디서 보지?”
탄의 잔량을 묻자 브람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없습니다.”
“뭐?”
“사용자의 에너지를 그대로 쓸 수 있습니다. 루-륨 동위식으로 소유 에너지를 측정해서, 자연적 복구가 가능한 정도로만 쓰도록 리미터가 걸려 있긴 합니다만……
- 우우우웅!
브람은 연보랏빛 창신을 뿌듯한 표정으로 쏙 훑어본다.
“소유 에너지는 랜스 끝에서부터 색이 변하는 방식으로 측정하도록 했습니다만, 지금은 전혀 닮는 게 보이지 않는군요. 다시 해 보시죠.”
혹시 내가 지금까지 흡수해 왔던 루-륨을 영구적으로 소모해 버릴까 싶어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 콰광!
한 발을 더 쏴도 연보랏빛 랜스는 조금의 변화도 없다.
망원경을 들어 타격점을 관찰하던 시아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이거,저 멀리까지 초점이 거의 흩어지지 않고 한곳에 모이잖아? 저렇게 정밀한 타격이 가능하다니 정말 놀라워. 이 정도라면 탑주급 직사直射 마법이라고 해야겠는걸?”
“정말 엄청나네요……! 다른 투사 무기 따위와는 아예 비교될 정도가 아닌걸요.”
확실히 상상할 수도 없던 엄청난 위력이고 정확도다.
몇 번의 시험 사격이 이어진 뒤. 브람은 보라색 랜스 손잡이를 살짝 꽃처럼 편다.
“이 정도로 에너지가 충분하다면, 혹시 이것도 해 보시겠습니까?”
- 지이이잉.
창끝에서 빛이 산란되며 손잡이 위쪽의 투명한 상이 여러 곳을 조준 하기 시작한다.
셋,일곱,열…….
“뭐지?”
“놀랍군요. 이래도 리미터에 아예 표시조차 되지 않으니……. 도대체 얼마나 에너지를 가지고 계신 건지 짐작도 안 되는군요. 레벨을 좀 더 을려 보겠습니다.”
- 위이이이잉!
조준점이 열다섯 개에 달했을 때 창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스물,서른,쉰…….
“어?”
- 콰직!
보랏빛 랜스의 끝부분이 갑자기 넓게 터져 나가며 쉰 개의 조준점이 거대한 하나의 빛기둥으로 변하며 앞으로 터져 나갔다.
- 과아아아아앙!
거대한 굉음이 앞쪽으로 터지면서 모래 사막 한쪽이 완전히 까맣게 붕괴되어 버린다.
다행히 힘의 폭발이 한쪽으로만 일어나서 우리가 서 있는 방향에는 그냥 바람 정도만 불었지만.
사고가 터졌다면 끔찍했을 거라고 생각하며 브람을 노려봤다.
“하,하핫……
창끝에서부터 1/4이 넘게 날아가
버린 거다.
복구될 리가 없겠지.
더 이상 랜스는 작동하지 않고.
터무니없이 비싸 보이는 무기를, 다시 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무기를 부숴 버린 건데.
“키야아……
녀석의 안색은 전혀 창백하거나, 일그러져 있지 않다.
싱글벙글 활짝 핀 표정.
“이봐. 무기도 망가졌고… 방금 사고가 날 뻔한 거 아닌가?”
“괜찮습니다. 어차피 사출 방향은 과부하될 경우에도 무조건 앞으로
고정되어 있고… 이런 것 정도는 망가져도… 후후……. 어차피 여기서 그치실 건 아니니까요.”
“무슨 소리지?”
- 끼릭. 끼리리릭.
브람의 몸에 붙은 커다란 태엽이 움직인다.
“현재 개발 중인 녀석이 있지요.”
“범용성과 파괴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무기입니다.”
“단 하나의 문제는……
一 끼리릭.
이 이야기를 하면서 어째서인지 태엽이 유독 자주 돌아간다.
마치 이와 관련해 시간과 일정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필요 출력이었습니다. 첫 번째 발동을 위해 기본적으로 끌어 쓸 에너지가 엄청났으니까요.”
“하지만 그 문제점은 아주 깔끔히 해결된 것 같군요.”
그의 얼굴에 또다시 짙은 미소가 번진다.
“보유 에너지로 바이올렛 랜스를
폭파시킬 정도시라면 말이죠.”
“…으음.”
“도대체 얼마나 강한 무기이길래 그러는 거야?”
전직 유령 내사과장이 상대에게 질문을 던지고.
엠버의 의장은 그녀가 아닌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천벌天罰을 구현하실 수 있다고 보면 적절할 겁니다.”
“아무래도 그 말이 가장 적절해 보이는군요. 자세한 사항들은 완성 단계에서 설명드리지요.”
시아가 과장되게 입을 가리면서
큭큭 웃었다.
“어머. 천벌? 엠버의 의장님께서 그런 말랑말랑한 단어를 구사하실 줄은 몰랐어.”
“세상에 어떤 비열한 악덕惡德이, 미끼도 없이 목숨을 바로 뽑아가는 폭군이 있긴 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호오. 신들을 접한 거야r
“신의 사자 비슷한 걸 간접적으로 접한 적은 꽤 있지요.”
그 말이 우습게 들리지 않는다. 황실 비역에서 봤던 천사들까지
떠오르면서 문득 섬뜩해진다.
엠버의 단독의장 브람.
이 녀석은 어디까지 경험한 걸까?
“어쨌거나.”
- 끼리릭.
그가 태엽처럼 말을 돌렸다.
“완성되면 알려 드리는 걸로 하고, 이제는 여러분을 레드 플레이크로 안내해야겠군요.”
랜스의 사용법을 조금 더 익힌 뒤 손에 들고 그를 따랐다.
브람은 도시 외곽을 향해서 차를 몰았다.
엠버메어에도 낮과 밤은 있었고 슬슬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바람이 점점 거세지는 밤이었다.
하지만 어떤 밤이라도 브람에게는 투명했고,차량은 가볍게 밤길을 뒤적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한참을 달리던 차량은 정물처럼 가만히 서 있는 공터 앞에 멈췄다.
“동부 E섹터 74번지입니다.”
브람의 말과 함께 공터의 정체가 조금 더 명료해진다.
외곽 중에서도 아주 외진 곳이다.
아무렇게나 버려진 건축자재들과 말라죽은 나무들은 움직이지 않는 그림자로 우두커니 선 채 차갑게 식어 가고 있었다. 생명의 비린내도, 웅웅거리는 신음도 찾아보기 힘든 장소였다.
“뭐야?”
이리저리 뒹굴고 있는 잡동사니 어느 것에도 삶이 없었기에 묘하게 황폐한 느낌조차 없었다.
전직 황실 유령 내사과장의 질문에 엠버의 단독의장은 한 템포 늦게 대답했다.
“여깁니다.”
“여기… 라니?”
의문이 사방을 짚었다.
주위를 둘러본다.
뭔가 제대로 벌여 놓지도 않은 공터가 있을 뿐이다.
뭐가 여기지?
지하로 통하는 통로라도 있다는 이야기인가? 하지만 쥐구멍 따위는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기척이라는 게 아예 없다.
시아도 같은 걸 느낀 것 같았다.
“아무것도 없는데?”
그러나 브람은 앞으로 손을 뻗어.
허공을 가리킨다.
“레드 플레이크 본부입니다.”
“도대체 무슨… 헛소리를.”
접선 장소이기라도 하단 말인가?
그러나.
[메타메 테 리얼 Metamaterial 부분
비활성화.]
허공에서 투명한 베일이 서서히 벗겨지기 시작했다.
공터라는 칠이, 잡동사니라는 칠이, 을리다 만 건물의 골조라는 칠이,
엉겨 붙은 어둠이라는 칠이 벗겨지고 그 자리에 현실과 비현실 사이를 갈라놓는 벽이 나타난다.
그건 지하로 통하는 직경 5미터 정도의 둥그런 입구였는데, 몹시 낯선 느낌을 주는 문양과 재질로 만들어져 있었다.
보기만 해도 비자연성이 느껴지는 기이함이 다.
둥그렇고 평면적인 입구였지만, 어딘가 다른 세계에서 이 세계를 향해 불쓱 내민 손처럼 느껴졌다.
- 스르륵.
브람이 가까이 걸어가자 입구에서 촉수 같은 무언가가 솟아 이쪽을 훑었다. 가느다란 촉수 끝에 달린 미세한 유리 렌즈가 빙빙 돌아가며 반짝이고 있었다.
“접니다.”
[일행이 많군. 수고하셨소.]
어딘가에서 차가운 기계 합성음이 울려 퍼진다.
루-름 은행의 비밀 통로나.
최첨단 무기들을 개발하는 해변의
연구소에도 브람이 다가가는 즉시 문이 열렸다.
하지만 지하로 통하는 이 입구는 입장 허가 판단이 내려져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듯 가만히 닫혀 있다.
- 끼릭. 끼리리릭.
남자의 태엽이 울렸다.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루비아가 정든 듯 그를 바라봤다.
“어라,가시는 건가요?”
“예. 저의 임무는 다했으니까요. 루비아 님도,다른 분들도 가까운
시일 내 꼭 다시 뵙기를 바랍니다.”
“채찍은 고마웠다고.”
“좋은 주인을 만나 다행입니다. 개발 중인 무기도 완성되면 그 즉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나를 보고.
- 끼리리릭.
태엽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의장 브람은 우리를 두고 사라졌다.
자동으로 인식이 되지 않은 것도 그러했고.
어쩐지 지금까지와 안내한 느낌이
미묘하게 달랐다.
선이 그어진 것 같은 공간.
‘여기는 녀석의 영역이 아니라는 이야기인가.’
- 지이이잉.
브람이 사라진 후에야 가장자리로 둥그렇게 말리듯이 문이 열렸다.
열리는 단면을 보고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강도가 엄청났고,두께는 1미터에 달했다.
‘이런 게 문이라고?’
그동안 경험했던 세계를 벗어나
비현실의 입구로 통하는 접면처럼 느껴졌다.
방금 방문한 무기 연구소에서도 느꼈지만.
이런 기술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두 가지 면에서 이상하다.
첫 번째는 황당할 정도로 발달한 기술 자체의 측면에서.
두 번째는 엠버의 멸망을 분명히 알고 있는 처지에서.
이런 발달한 기술을 갖고 있는데 제국에 패배한다는 사실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와 시아가 몰랐을 정도라고.’
마탑주나 검주들이라 해도 이곳을 쉽게 발견할 수는 없다.
‘레드 플레이크는 그때 엠버와 함께 멸망했던 걸까?’
이곳을 보니 따로 살아남았을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그때는 레드 플레이크라는 집단에 대해 아는 게 없었으니까.
지금도...
당장 알 수 있는 건 없다.
우선 눈앞의 상황에 집중하자.
“여기가… 레드 플레이크 본부……
전직 유령 내사과장은 감개무량한 표정마저 보이고 있다.
너무 깊게 전율했는지 입꼬리마저 올라가지 않은 상태.
감격한 동공이 살짝 풀려 있다.
비밀 애호가인 그녀가 살아가며 맛볼 수 있는 가장 황홀한 상황이 지금일지도 모른다.
“와아……
루비아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감탄을 뱉지 않을 수 없는 놀라운 상황이다.
입구가 열리고.
[엘리베이터에 탑승해라.]
남겨진 우리에게 기계음이 간결히 명령했다.
“엘리… 베이터?”
[…너희 앞의 둥그런 판 위쪽에 올라타라.]
합성음의 묘한 박력과 비현실적인 상황에 압도당한 걸까.
우리는 순순히 입구 쪽의 투명한 유리판에 올라섰다.
- 철컥.
반구형으로 닫힌 ‘엘리베이터’가 직선으로 미끄러진다.
“정말 현실이 아닌 것 같아요.”
“…아닐지도 모르지.”
루비아의 감탄에 전직 내사과장이 멍하니 답했다. 움직이는 유리공간 바깥으로 기괴할 만큼 잘 짜맞춰진 질서가 느껴졌다.
엠버의 몇몇 건물도 그랬지만, 이 본부만큼은 바깥과 완전히 다른
내력 위에서 만들어진 것 같았다.
바깥과 관련된 어떤 추억도 없어 보이는 이질적인 지하의 탑塔.
얇은 와이어에 매달린 유리공간은 놀라울 만큼 안정적으로 안쪽 깊은 공동에 내려갔다.
“수경 재배 시설이 있었어요!”
중간에 스쳐간 넓은 공간을 보고 루비아가 외쳤다.
“식용 식물뿐만이 아니라 꽃까지 기르고 있었고요.”
“중간에 육류 저장소도 있었어.”
“소름 돋네. 레드 플레이크라는 녀석들이 말하는 ‘유산’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이 건물은 도대체 뭐 하는……!”
전직 내사과장의 말 뒤에 숨겨진 의미를 나도 읽어냈다.
이 건물 전체가.
레드 플레이크의 ‘유산’일 거라는 확신을 ‘엘레베이터’ 위에 탑승한 모두가 하고 있었다.
‘비역과도 다른 느낌인데.’
여러 단계가 겹쳐진 게 아니다.
이 장소 전체가 온전하게 하나의 완결성을 갖는 공간.
“모든 유산은 소모성이라고 알고 있는데. 이 건물 유지는 언제까지
되는 거야?”
말을 거는 것처럼 시아가 허공을 향해 물었다.
[시아 으스노르,그쪽은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네 남은 수명보다는 이쪽이 더 오래 유지될 테니까.]
허공에 건조한 음성이 울렸다.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들린 것과 같은 변조된 기계음.
말하는 상대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인간인지 아종족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이것 봐라. 내 이름을 불러 주네. 뭐 하는 당신이야.”
“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시죠?”
[코드네임,바실리스크. 본인 역시 레드 플레이크의 일원이지. 하지만 우리는 아직 만날 준비가 안 됐다.]
“만날… 준비?”
의외의 말에 내가 캐물었다.
지금까지 레드 플레이크 단원들이 나를 만나며 ‘준비’를 운운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별빛청여우도.
루멘도.
명예회원 기스-제-라이도.
닥터 설아도 마찬가지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시아가 끼어들었다.
“우리는 몰라도 이 녀석은 굉장한 루-륨 동위 레벨을 가진 녀석이야. 브람한테 못 들었어? 혼자 4검주도 죽인 녀석이란 말이지. 지나치게 건방진 거 아니야?”
[…특히 시아 네 녀석과는 그다지 만나고 싶지 않군.]
“어? 뭐야? 당신, 날 아는 분이야? 나 아는 사람 별로 없는데……?”
- 치지직.
짧은 소리와 함께.
기계음이 완전히 사라졌다.
‘누구지?’
황당한 기분을 느끼며 목소리가 남긴 말을 곱씹었다.
유령 내사과장을 알 만한 인물이 과연 몇이나 될까.
‘설마 소녀 공작은 아닐 거고.’
너무 황당한 가정은 빼기로 하자.
안 그래도 제국 황제 본인이나, 황실 권력에 극도로 밀접한 몇몇 인물밖에 없을 것 같은데.
“너… 혹시 유명하냐?”
내 물음에 시아는 이를 악물었다.
“나는 로랑스 그 새끼처럼 나대지 않거든? 그림자라고. 젠장. 뭐야?”
“레드 플레이크의 정보력이 몹시 뛰어나서라고 하기에는, 미묘하게 아는 사람 같은 느낌이 났어요.”
“짐작 가는 건?”
“•••없어.”
의문을 남겨 둔 채.
- 少、O 으
우리를 태운 엘리베이터는 옆으로 움직여서 넓은 광장에 도착했다.
내리라는 듯 활짝 열린 문을 지나 걸어간다.
앞에는 희고 매끈한 벽에 빛으로 거대한 그림을 투사하는 풍뎅이와 피곤한 듯 머리카락을 질끈 묶은 여자가 있었다.
가면은 쓰지 않는 듯 풍뎅이 위에 놓여진 상태다.
“오래 기다렸지?”
“엘윈 에사우……
그녀는 마치 몸을 풀 듯,가면을 벗은 얼굴로 우리를 보며 말했다.
“딱 좋은 시간에 왔어. 에라스트 유령들이 숨어 있던 석판의 분석을 막 끝낸 참이다.”
수녀는 별빛처럼 웃고 있었다.
409하■ 권리 위에 잠자는 자 (6)
반갑게 우리를 맞는 별빛청여우를 흘끗 바라본 다음 주위를 계속해서 두리번거렸다.
기다리고 있는 엘윈 에사우에게 실례라는 걸 알면서도.
그곳의 모든 게 놀라워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과학을 가장한 신비의 빛이 가득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수녀의 이동수단인 페르시우스를 포함해서.
형태는 물론 만들어진 재질부터가 완전히 낯설게 느껴지는 기계들이 각자의 목적을 가진 채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흔들리는 듯한 다양한 형태의 기계들은 허공에 무언가를 투사하기도 하고 투사된 빛을 다시 흡수하기도 했다.
규칙 같은 건 보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어울리며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 신비로웠다.
“와… 이게 다 뭐예요?”
“후훗. 판독에 필요한 장비들을 모아 놓은 거야. 레드 플레이크의
규칙 해석에 관한 장비는 전부 다 여기 있다고 말해도 좋달까.”
“이것들,전부 유산인 거지?”
전직 유령 내사과장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진다.
“맞아.”
“역시 레드 플레이크의 저력은… 대단하군. 로랑스 그 도둑 새끼가 레드 플레이크는 가장 마지막까지 적대하지 말라고 했던 게 확실히 옳은 말이었어.”
'호칭이 거지에서 도둑으로 다시 바뀌었군.’
잠깐 엉뚱한 생각에 빠져 있다가
수녀를 바라봤다.
‘분석을 끝냈다고 했지.’
내부의 광경에 홀렸지만.
사실 모든 게 하나의 목적이다.
유령들이 숨은 통로 깊숙한 곳의 석판 지도.
이곳의 모든 장비는 오직 그걸 분석하기 위한 것들로 보인다.
“결과는 어떻게 됐지?”
그렇게 물어 주기를 기다린 듯이.
“이것 좀 보렴.”
수녀는 가까이 있던 직육면체의 상자에서 동그란 황금 벌레 모형을 꺼냈다.
“이건……
흘끗 보고 놀라서 한번 더 유심히 살폈다.
아래위로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다, 결국 무심코 손을 뻗어서 수녀에게 벌레 모형을 받아 버렸다.
이렇게 보니까 확실하다.
‘분명히 익숙해.’
주먹만 한 크기의 녀석.
넓은 등껍질에 촘촘하게 금박이 입혀져 있지만 그런 건 현혹이다.
중요한 건 내부의 재질.
당연히 평범한 강철도 아니고.
프리모파이트 같은 희귀 금속도 아니며.
엠버의 건물을 보호하던 재질조차 아니다.
그리고 구조.
- 끼긱.
조그맣게 떨리는 내부를 탐지로 느낀다.
허공에 흩어지던 진동이 손끝으로 홉수된다.
- 끼기긱. 끼긱. 끼기기기긱
‘똑같군.’
진동은 흘러내리고 기억은 거꾸로 올라온다.
- 끽. 끼릭. 끼기긱.
패턴을 가진 게 분명하지만.
워낙 복잡하고 거대한 패턴이라서 짧은 시간 동안에는 반복되지 않는 무언가.
내부에서 혼들리고 맞물려 서로
돌아가는 진동.
몇 번을 살펴도 마찬가지.
‘카린……
자유 연합의 전쟁 영웅이 나에게 선물해 줬던 황금빛 벌레 모형과 같은 물건이다.
나는 그녀와의 기억을 회상했다.
〈이건… 고대의 유산을 여는 열쇠라고 해요. 사실인지는 저도 모르겠지만, 가문에서 대대로 소중하게 내려오는 보물 중 하나예요.〉
〈3대조께서 평생 연합 전 국토를 뒤지셨지만 결국 ‘문’은 찾지 못하
셨어요. 저희 쪽에 없다면,분명히 제국에 있지 않을까 해서 참전하며 갖고 온 거람니다.〉
내가 전쟁 영웅으로 만들어 줬던 의원이다.
녀석에게서 받은 게 ‘진짜’ 가치 있는 물건이라는 사실은 함께 있던 아이작이 '알아보지 못한다’는 걸로 확실해졌었다.
바로 그 물건이 여기 있었다.
“이게… 왜 여기에……?”
“어라? 본 적 있어? 레드 플레이크 본부는 처음 아냐?”
청여우가 눈을 빛냈다.
“예전에 본 적이 있다. 연합 쪽 인물에게서.”
지나치게 간소화한 설명이었지만 청여우는 어쩐지 알겠다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후후… 너라면 그럴 거 같았어. 이건 그거랑은 다른 파편이야.”
혼자 뭘 추측한 걸까.
“다른 물건……?”
선대로부터 내려오던 물건이라며 설명을 시작했다.
엄청난 강도를 자랑했으며 귀중해 보여서 간직했지만,도무지 용도를
알 수 없어서 가만히 보관만 했던 물건이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자세히 살펴보니 조금씩 모형의 방향이 다른 느낌이 든다.
울리는 진동도 카린 크렉소르라는 연합군 의원이 나에게 줬던 것과 사실 미묘하게 다르다.
내부의 무게중심과 저울이 분명 다르게 설정되어 있는 느낌이다.
‘하나만 있는 물건이 아니라니.’
그런데 이게 에라스트에서 발견한 석판과 무슨 상관이냐고 물으려던 찰나였다.
“저,잠시만요……
가만히 서 있던 루비아가 갑자기 옆에서 끼어든다.
“저도 본 적이 있을지도 몰라요. 조금 자세히 볼 수 있을까요?”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루비아가 어떻게?’
카린 크렉소르에게 이 〈열쇠〉를 받았을 때 루비아는 이미 살해당한 상태였다.
볼 수 있을 리가 없다.
멍하니 있는 나에게 그녀가 다시 묻는다.
“안 될까요?”
“•••여기.”
물론,당연히 거절할 리는 없다.
손에 쥔 녀석을 건네줬다.
벌레 모형을 이리저리 돌려 보고, 직접 만져도 보던 루비아가 오래 지나지 않아 작게 감탄한다.
“이 부분……. 저희 도서관에서 본 적이 있는 거 같아요.”
“에라스트 도서관?”
또다시 도서관이다.
루비아가 사령술 원고를 발견한 장소
지하 통로가 연결된 곳.
그리고…….
‘시간의 틈바구니에 갇힌……
천재 대마법사라는 책이 있던 곳.
읽었을 때 애슈턴의 히든 피스를 접했다면서 지혜가 10이나 상승한 데다가,통찰 (E마이너) 이라는 특전까지 얻은 책이다.
드래곤이 만든 시간 함정에 갇힌 마법사의 이야기.
루비아가 말을 이어 나갔다.
“맞아요. 에라스트 도서관에 있는 ‘시계’ 손잡이랑 모양이 엄청나게 비슷하네요.”
시계라니.
문득 떠오르는 녀석이 있다.
높이 30센티쯤 되는 커다란 시계.
시계 안에 들어 있는 푸른 모래는 네다섯 시간이 지나도 아래로 모두 떨어지지 않았다.
“책 읽을 때마다 돌렸던 모래시계를 말하는 건가?”
“어? 해골님도 아시네요?”
모래가 홀러내리는 움푹 들어간 부분에 손잡이가 있다며 루비아가 자세한 설명을 이었다.
나도 그 모양을 안다.
안으로 깊이 들어간 손잡이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캐빈 애슈턴의 책……
그 표지에 적색 비늘이 덮인 용과 깨진 모래시계가 수놓여 있다.
‘에라스트 도서관에 있던 커다란 시계와 분명히 닮았지.’
푸른 모래가 흐르던 모래시계.
책 표지의 시계는 깨져서 어떤 색 모래가 들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히 형태는 비슷했다.
“뭐야, 여기 있는 모형 같은 게 에라스트 도서관에 있었다고?”
“분명해요.”
설마 진짜 같은 건가?
아니지.
그렇게까지 우연이 겹칠까 싶은
순간이었다.
“•••맞을 거다.”
에라스트 도서관에 간 적도 없는 별빛청여우가 잔뜩 홍분한 얼굴로 말했다.
“맞다고?”
본 적도 없으면서 설명만 듣고서 어떻게 확신하는 거지?
의문에 사로잡혔을 때.
“그래. 이걸 봐.”
- 위이이잉.
가벼운 진동 소리와 함께 허공에 새로운 푸른빛이 떠오른다.
“유령들이 숨어 있던 통로 벽에 구현되어 있던 설계도로 만들었어. 추적기다.”
“추적기?”
“봐 봐, 세상에는 이 벌레 모형이 일곱 개 흩어져 있어.”
떠오른 빛을 홀린 듯 바라본다.
푸른빛은 지도 위에 겹쳐 띄워져 깜빡거리고 있다.
‘일곱 개라.’
모두 한눈에 들어오지는 않지만.
엠버임을 알 수 있는 곳에 또렷한
광점光點 두 개가 있다.
“여긴 어디지?”
레드 플레이크의 본부가 아니라, 엠버메어의 다른 위치에 뜬 빛을 바라보며 시아가 물었다.
이미 지도상에서 우리의 위치는 나름대로 파악을 끝낸 것 같다.
별빛청여우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트로핀 여단의 본부다. 다짜고짜 내놓으라고 말하기에는 곤란해서… 일단 관망 중이지. 레나라고 했나? 그쪽 고위 간부가 도착하는 대로 교섭을 진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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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나라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름이 튀어 나온다.
‘이상한데.’
하나씩 자르면 몰라도.
전체적으로 보면 섬뜩섬뜩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감각이 기어 나온다.
‘시나리오 인물이 전부〈열쇠〉와 연결되어 있어.’
루비아의 에라스트 도서관에 있던 모래시계.
레나가 필요한 트로핀 여단.
나를 레드 플레이크에게 인도한 기스-제-라이.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지만.
시나리오 활성화가 한 번 시도된 자유연합의 카린 크렉소르.
모두 하나씩의 〈열쇠〉와 굉장히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렇게나 겹치는 상황을 우연으로 치부하는 건 불가능하다.
방향성은.
극히 뚜렷하다.
멈칫하는 사이 별몇청여우가 손을 들어 허공을 가리킨다.
“세 번째 빛이 바로 아까 말했던
에라스트야. 정확히 에라스트 내성 중앙에 있는 거로 추정하고 있어.” 도서관이겠지.
“…정말 맞네요.”
“그래,연구가 빨리 끝났으면 좋을 뻔했어.”
루비아가 아쉬운 표정을 짓지만, 당연히 그런 걸 미리 알고 가져올 방법은 없다.
매일 책을 보면서 시계를 돌리는 루비아가 아니면 누가 모래시계의 손잡이 따위에 신경이나 썼을까.
‘그래도 위치를 알고 있다.’
‘에라스트에 잠입해서 시계 하나
가져오는 정도야 어렵지 않겠지.’ 누가 특별히 도서관 모래시계에 관심을 갖지는 않을 테니까.
이건 회수하기 쉬운 편이다.
“다음은… 여길 보렴.”
수녀가 멀리 떨어져 있는 제국의 북쪽 끝을 가리킨다.
푸른 불빛 아래 놓인 대륙 전도의 최상단.
“마탑이네?”
유령 내사과장이 끼어들었다.
“맞아.”
눈보라가 치는 북방.
아쥬라의 탑.
고작 쉰 명으로 평방 40킬로가 훌쩍 넘는 대지를 자신들의 땅으로 인정받는 자들의 권역.
푸른 광점光點은 그 영토에서도 가장 끝에 떠을라 있었다.
“어… 여기 끝이라면 거기인데? 해리결박의 감옥이잖아. 수감자의 자아를 추상화하고 해체시킨 다음 괴멸시키는 장소잖아. 끔찍한 곳에도 있네.”
아이작이 말한 장소.
북쪽의 늙은 거미들이 머무른다는
장소에 또 하나의 ‘열쇠’가 있다고 수녀가 말하고 있었다.
“다섯 번째는 여기다.”
“황궁이잖아?”
“확대할 수 있나?”
“여기……”
깜빡이는 불빛은 수도 정중앙을 가리키고.
머릿속에 스치는 장소가 있다.
“혹시 비역인가……?”
그만큼 자세하지 않아서 확신까지 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건 핵심인 건 분명해 보인다.
“아니.,’
단호한 대답이 튀어나온다.
“비역의 서고와 보물 창고에 저런 물건은 없어. 유령 내사과가 아는 한에서는.”
비역의 유물과 도서를 정리하는 임무를 담당했던 시아의 보증이다.
그러나 비역이 아니라면?
하지만 비역만큼 뭘 ‘숨기기’ 좋은 장소도 없을 텐데.
문득 아이작과 함께한 마지막이 떠오른다.
루-름이 있다는 지하로 내려가지 못하고 ‘덩어리’와 마주했었다.
“서고는 4층일 터다. 2층… 아니, 1충 아래는 어떻지? 유령이 그곳도 관리하나?”
“그걸… 그걸 대체 어떻게?”
전직 내사과장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니… 아니… 그 밑까진 몰라. 너는 대체……. 네 말대로 그곳에… 있을 수도……
그녀가 경악으로 더듬거린다.
‘으음.’
그 추측이 틀렸다고 해도.
제국에 셋.
엠버에 둘.
연합에 하나.
숫자만은 분명하다.
“그리고,이게 마지막이다.”
두 대륙과 하나의 섬에서 완전히 떨어진 동쪽.
지도 저 멀리 밖에서 선명한 점이 빛나고 있었다.
“여기는……
“동방이 다.”
수녀가 대답한다.
“바다를 건너야 해. 거리상으로도 그렇고 아마 이쪽이 가장 나중에 갖게 될 거야.”
« O w
o'...
나는 아직도 손에 쥔 금빛 모형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그래서,열쇠 일곱 개를 모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제일 중요한 건 듣지 못했다.
전 세계에 흩어진 모형 일곱 개는 무슨 문을 열까.
“석판을 분석해서 알아낸 핵심은, 결국 유산의 가동 방법이야.”
수녀가 페르시우스를 툭툭 쳐서 조종하자,반투명한 허공에 붉은 소용돌이가 떠오른다.
“표시된 열쇠들을 전부 다 모아
가져가서 유산에 넣으면,‘1만배’를 작동시키는 거야.”
1 만배.
청여우와 처음 만났을 때.
사막을 가로지르며 알게 된 유산.
지금까지 발견된 유산 중에 가장 강력한 파장보다 수치가 1만 배나 강한 녀석을 사용할 수 있다고?
‘시나리오를 따라가다 보니 여기 도착한 거야.’
그 사실이 섬뜩한 경악으로 변해 소음을 빨아들인다.
소명수녀의 이야기가 차갑게 나를 옭아매는 것 같았다.
벗어날 수 없는 달콤한 사슬.
어떻게 이 상황에서 유산을 향해 진행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벌써 정확히 향방을 알고 있거나, 쉽게 얻을 수 있는 파편은 4개.
‘카린이 가진 것.’
‘에라스트 도서관의 시계.’
‘트로핀 여단의 파편은… 레나가 해 줄 거고.’
마지막 하나는 지금 당장 내 손에 들려 있다.
완전히 기울어진 압도적인 선택은 자유라고 부를 수 없다.
‘이건……
음모일지도 모른다.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음모.
침을 꿀꺽 삼킨 전직 내사과장이 끼어들었다.
“알고 있을 텐데? 탑주들이 모여 단체로 시도했지만,결국 기록에도 남기지 않고 도망갔다. 처리해도 처리해도 끊임없이 다시 생겨나는 군체는 어떻게 할 거지?”
폭발하고 갉아먹는 수억 마리의 기계벌레.
‘붉은 늪’에 관한 시아 으스노르의 지적은 타당했다.
“아하하핫……
수녀는 허공에 투사되는 빛 속에서 안개처럼 웃었다.
“일단 목적지에 도달하고 나면, 그것들이 다시 생겨나지 않게 하는 방법도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상황은 전보다 훨씬 나아질 거야.”
나를 포함한 지금의 전력이라면 지하로 내려가서 ‘1만배’의 정체를 확실히 파헤칠 수 있을지도.
그때 였다.
- 위이이이잉…….
“으음?”
우리가 내린 엘리베이터가 빠르게 위로 을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