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화 권리 위에 잠자는 자 (7)
一 위이잉.
아래로 내려온 건 새카만 벽.
다섯 듀라한을 거느리고 나타난 네크로멘서 였다.
“기스!”
“하하핫… 고생했어,엘윈.”
별빛청여우의 외침에서 묻어나는 애틋함에 기스-제-라이가 웃었다.
“대단한 일을 해 줬군. 손님들은
엠버 구경 잘들 했나?”
붉고 단아한 입술이 움직인다.
옆에 조용히 서 있던 닥터 설아도 인사하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네! 이렇게나 신기한 곳이라고는 정말 꿈에서도 상상 못 했어요!”
“후후. 영주님은 재밌는 호위병을 얻었군. 내 좀비들보다야 훨씬 더 나올 것 같은데……
잠시 분위기가 떠들썩해진다.
‘길라우트… 오랜만이군.’
나는 다섯 듀라한을 살펴봤다.
물론 그들에게 마계 침식지에서 함께 싸웠던 기억은 없지만 혼자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다.
‘다친 데는 없군.’
다들 무사히 온 것 같았다.
아래로 내려온 일곱을 살펴본 뒤 문득 깨닫는다.
있어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레나는?”
그녀를 맞는다면서 차에서 내린 이들이 레나 없이 온 게 의아했다.
기스-제-라이가 어깨를 으쓱하며 옆을 돌아봤다.
시커먼 그림자가 앞으로 나섰다.
“군대를 물자로 위장해서 잘 보내 주기는 했는데……. 마지막 순간에 배에 탑승하지 않았소.”
듀라한 안드레이가 대답했다.
“어째서지?”
“엠버에 가면 일을 해야 한다고, 자기한테 휴식이 필요하다고 했소. 잠깐 남아서 쉬겠다며 안 왔지.”
“…레나가 쉬겠다고?”
머릿속에 경고가 울렸다.
그녀가 휴식을 원한 건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오히려 일 중독자에 가깝다.
그녀는 지금까지 만난 생애에서
항상 준비에 준비를 거듭했다.
물밑에서 음모를 꾸미고,거래를, 접선을 하고,항상 은밀하고 빠르게 움직여 왔다.
모두가 정신을 놓고 있을 때조차 어떻게든 움직이려 하는 게 바로 레나다.
지금처럼 역량을 갖추지 못했던 시기에도 항상 그랬다.
푸르손의 추종자를 만나러 갈 때.
내가 동굴에서 멍해지고 있을 때.
모든 경우의 수에 대책을 세우고 위기에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았다.
놀고 있었던 적은 없다.
‘그런 레나가 쉰다며 엠버에 오지 않았다고?
“쉴 수도 있지 뭐.”
“쉰다니… 그걸 믿는 거요?”
게다가 쉬어도 엠버 쪽이 훨씬 더 안전하다.
당연히 대충 지어낸 말일 거다.
조금 신경질적으로 따지며 묻자 기스-제-라이가 피식 웃었다.
“말 자체보다,판단을 믿는 거다.”
“판단을… 믿는다고?”
“레나가 그렇게 말했으면,우리가 말한 대로 생각해 달라는 얘기야. 그 판단을 믿어 줘야 하지 않겠어?”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어 말문이 막혔다.
“동료란,그런 거다.”
네크로멘서가 듀라한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동료라……
속으로 가만히 그 단어를 곱씹듯 중얼거렸다.
힘을 실어 주고.
서로를 믿어 주는 게 동료라면.
그동안 수없는 생애를 반복하며, 누구보다 동료라는 말에 가까웠던 존재는 바로 레나일지도.
그녀가 줬던 펜던트.
시나리오 클리어의 대가.
계승 아이템을 가만히 바깥으로 꺼내어 만지작거렸다.
“그리고,죽어도 뭐……
능청스럽게 기스-제-라이가 말을 이었다.
“다음에 또 시작하면 되잖아?”
“그게 무슨……!”
레나가 죽는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지금까지 벌어진 그녀의 죽음은 온전히 내 책임이었으니까.
그러나 이번은 다르다.
레나 본인의 직감으로 판단한 일.
‘실패한 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했을 때였지.’
레나를 믿어야 한다.
그녀의 감각이라면 이미 스킬이나 권능의 영역.
내가 거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끼어들 수는 없다.
분명 레나 나름의 계획이 있겠지.
“아,그건 그렇고… 이제 우리도 수녀님이 대체 뭘 분석했는지 들을 차례인 것 같네.”
네크로멘서의 요청에 소명수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말할게. 첫 번째 빛은
- 쏴아아...
활공滑空에 실패한 해안의 포말이 부서지면서 거기 묻은 빛도 부서져 흩어지고 있었다.
까마득한 바다 저편에서 실려 온 포말은 바람에 계속 떠밀리는데, 거기에 머리칼을 흩으면서 레나는 종이 뭉치를 하나하나씩 차분히
읽었다.
〈꺼지지 않는 등불〉달리아크에서 트로핀 여단 동쪽 4번 해안 기지로 부하들이 보낸 정보 보고서였다.
기스-제-라이의 마물 병력을 실어 보내는 일을 하면서도.
일일 정보 보고서는 평소와 전혀 다름없이 촘촘히 읽는 중이었다.
아니,오히려.
어떤 강박에 시달려 한충 자세히 읽는지도 몰랐다.
- 파드드든!
“이 시간까지 들어온 첩보입니다. 또 한 뭉치 왔습니다.”
“흐음.”
그녀는〈정보 경매>를 할 필요도 없었다.
레드 플레이크와 트로핀 여단의 이름을 동시에 쓸 수 있다.
레드 플레이크 단원인 경매상에게 규칙을 어기고 정보 전부를 빼돌려 달라고 하지 않아도.
그 둘이 차지하는 지분을 생각하면, 최근의 정보 정도는 정식으로 전부 쉽게 입수할 수 있었다.
“그런데,금방 엠버로 가실 텐데,
어차피 여기 들어오는 건 대부분이 제국 쪽 정보이지 않습니까?”
비쩍 마른 부하가 중얼거렸다.
그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눈앞에 바로 엠버로 향하는 배가 정박해 있고.
듀라한들의 지휘를 따라 언데드 병력이 하나둘 배에 질서정연하게 오르는 상황이다. 트로핀 여단의 단원이 승선이 끝나가는 배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본부장님? 이제 슬슬 승선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하지만.
레나는 아무런 대꾸가 없다.
그녀는 계속 보고서만 바라보다가 뱉어내듯 말했다.
“어… 이게 뭐냐?”
손에서 한 장의 보고서가 천천히 구겨진다.
“뭔가 있습니까?”
“제국 분기 회의가 소집됐다네.”
“예. 맞습니다.”
“그거,아직 소집될 분기 꽤 많이 남지 않았어?”
“그게… 뭐,지금 중간 즈음이라 가능할 것 같기도 합니다.”
“아니,이상하잖아.”
레나가 말을 잘랐다.
“관행적으로 분기 초에 열리던 게 왜 지금까지 안 열렸는데? 로랑스 타르티에가 없어서잖아.”
로랑스 타르티에는 황실 정보기관 유령의 수장이자 제국제일검이고, 오직 셋밖에 없는 공작公蔣이다.
혹막 중에서도 기획하는 자.
“그런 걸까요?”
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표하지는 않았지만 당연하지. 로랑스 타르티에가 나타났을 거야. 이 새끼가 대체 어디서 뭘 하다가
왔는지 궁금해지네.”
그때.
“맞습니다!”
그 순간 다른 방향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로 전서구를 받은 부하였다.
“방금 받았습니다. 로랑스 공작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는 첩보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옷차림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레나는 자리에서 즉시 짤막하게 정리된 첩보를 읽었다.
‘옷차림이 바뀌었다고……?’
별일은 아닐지 몰랐다.
검주는 검주일 뿐.
옷차림이 바뀐 게 어떻단 말인가? 하지만 가슴 깊은 속을 움켜쥐는 싸늘한 느낌이 있었다.
‘지금까지 뭘 했지?’
제국제일검이 지금까지 어디에서 헤매다가 나타났는지 알고 싶었다.
속 편하게 떠날 수 없는 직감이 그녀를 잡았다.
레나의 감感은 언제나 기이하게 맞아떨어졌고,심지어 머리와 감이 충돌할 때도 항상 망설이지 않고 직감을 따랐기에 지금껏 암흑가를
성공적으로 누빌 수 있었다.
‘도움이 되어야 해.’
엠버에 있는 누군가에게 반드시 도움이 되고 싶었다. 몇 번의 생을 반복하며 자신을 여기까지 끌어 준 존재에게.
‘그런 걸 운명이라고 하는 거지.’
‘운명의 상대를 돕는 거야.’
그걸 위해서라면 목숨 같은 거야 얼마든지 바쳐도 좋았다.
만나는 건.
이번 생뿐만이 아니니까.
전생에도 계속 만나 왔고.
앞으로도 만나리라는 확신이 있는
상대라면 무엇도 아깝지 않다.
레나는 마지막으로 배에 을라탄 듀라한에게 말했다.
“어이,목 없는 친구.”
“기사 안드레이다.”
지명당해서 긴장했는지,딱딱하게 굳은 음성이 갑옷에서 울려 퍼졌다.
레나가 픽 웃었다.
“이름 말하면 없던 목이 생기냐? 아무튼… 배는 내가 운전하는 것도 아니니까 너희들끼리 알아서 가라. 선장이 잘할 거고 바다 위에서야 내가 도움 될 건 없어.”
어떻게 전개될지 불안한 상황을
놓고 엠버에 갈 생각은 없다.
실종됐던 로랑스 공작이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누군가는 제국에서 벌어지는 일을 실시간으로 감시해야 한다.
“…주군에게 당신도 함께 간다고 들었는데?”
“난 좀 쉰다고 전해 줘. 거기서 또 일하기 싫단 말이야.”
엠버에서 자신을 걱정하는 일은 원하지 않았다.
게다가 당장 무슨 일이 터진 것도 아니다.
모든 게 아직은 의혹일 뿐.
‘뭐라고 할 말도 없고.’
“•알겠다.”
“안드레이, 저 여자를 놓고 가도 되는 건가?”
오웨인이 물었고.
“강제로 데리고 오라는 이야기는 못 들었으니까. 그냥 놓아두지.”
하멜라인이 대답했다.
레나는 그 대화에 인상을 구겼다.
“싸움 못해서 목도 잘린 분들이 강제 운운하면 내가 마음이 상해 안 상해?”
“선장! 빨리 출발하라고!”
배가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다가, 해안가에서 사흘 동안 말을 달려 수도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접선한 정보원은 로랑스 공작이 엠버를 치는 전쟁을 선언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짐작… 아니,직감대로다.
‘엠버에 안 가길 잘했군.’
레나는 무릎에 올라온 고양이를 두 손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그녀에게 이야기를 들려준 황실의 정보원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죠?”
황실 정보원.
피에트로 백작은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했다.
“한동안 자기 세력을 내버려 놓고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와서 전쟁을 선언하는데, 반발이 없겠습니까? 유령들의 활동도 묘하게 뜸해진 것 같고요.”
정치는 균형의 게임이다.
게다가 짧지 않았던 실종은 그에 대한 공포와 신뢰를 동시에 잃게 만들었다.
“방식이 지나치게 투박했습니다. 가만히 있던 다른 세력들도 공작이
전권을 휩쓰는 건 원치 않으니까, 많이들 전쟁에 반대했습니다.”
게다가 새로 나타난 소녀 공작은 예전의 기괴한 풍모를 모두 버린 상태였다.
그건 무척 묘하게 작용했다.
여자를 과장되게 흉내 낸 기괴한 말투와 복장을 버리고.
정석적인 검객의 복장과 말투로 완전히 거듭난 그를 모두 지지하고 예전보다 더 좋아할 것 같았지만, 오히려 상당수의 사람들은 로랑스 공작을 훨씬 경계하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일이죠.”
특히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그러했다.
공작이 분장과 연기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 동안,사람들은 그에 대한 경계심을 묘하게 내려놓았다.
그것은 정신의 장애와 불행으로 해석되어 치명적인 약점으로까지 여겨졌던 것이다.
약점이 사라진 자.
그가 정상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자 사람들은 왠지 모를 불쾌를 느끼기 시작했다.
장애를 연기했던 누군가를 향해 눈살을 찌푸리듯.
없었던 것처럼 말끔하게 불행을 극복한 자를 향해 마음 어딘가가 욱신거리듯이.
트로핀 여단의 황실 정보원이자.
중립파의 일원인 피에트로 백작은 설명을 이었다.
“지금 공작 편을 드는 건 추기경 그레이시엄을 필두로 한 예메라의 교단,3검주,비브리오 명예 공작과 광록훈 정도입니다.”
잔혹한 3검주 크웨르티.
고통과 비명으로 가득한 교리를 읊어대는 예메라의 교단.
보티스의 대제사장인 비브리오와
그 심복인 광록훈 파이로.
너무나 명백한 주전파다.
하지만.
“태부,대사마,종사중랑은?”
고양이의 뺨을 털 방향을 따라서 쓰다듬던 레나의 날카로운 물음에 피에트로 백작이 대답했다.
“공작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태부 리브레트릴을 중심으로 해서 새로운 반전파가 은근히 결집하고 있습니다.”
레나는 피에트로 백작에게 얼굴을 돌렸다. 잠시 빤히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아닌데.”
그런 건 전부 연극이다.
제법 눈 밝은 정보원인 피에트로 백작마저도 속여 넘기는 연극이다.
“어떻게 아십니까?”
“그냥 알죠.”
‘분명히 들었어.’
이미 이 세계선을 몇 번씩 경험한 회귀자에게 들은 정보다.
태부,대사마, 광록훈,종사중랑, 대사농,황실 파견 마탑주는 모두 한통속이다.
모두 전쟁을 일으키는 게 목적.
“절대 확실한 정보니까.”
반전파를 한 번에 모았다가 모두 쓸어버릴 예정이겠지.
“일단 아무것도 모르는 척 가만히 연기하고 계세요. 어디에도 끼지 마시고. 가만히.”
“알겠습니다.”
간단한 지령을 받은 남자가 꾸벅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움직인다.’
전쟁의 시작 시기를 알리는 일이 중요하다.
레나는 생각한다.
‘이건 내가 여기서 해야 해.’
수도에서 바로 가까이서 붙어서 내밀한 사정을 전달해야 한다.
제국과 엠버는 전서구가 통할 수 없는 환경이다. 제대로 된 정보를 모아서 한 번에 잘 전달해야 한다.
‘배나,비행선을 통해서 건네야지. 책임이 무겁군.’
황실의 가장 핵심에 대해 조사를 시작해야 한다.
레나의 힘만으로는 무리.
‘최고의 준비를 해야 해.’
그리고.
그 최고의 준비를 해 줄 수 있는 상대는 아주 가까이 있었다.
인기척이 사라진 뒤.
그녀는 쓰다듬고 있던 작고 하얀 고양이를 향해 말했다.
“예언자님?”
[그래. 말해라.]
고양이가 머리를 레나의 손가락에 비볐다.
“〈투명한 천조각〉주술을 준비해 주시겠어요? 피시전자는 저 하나. 과거,현재,미래에 걸쳐서요.”
[정말 어려운 걸 아무렇지도 않게 시키는군. 로랑스 타르티에의 뒤를 밟을 생각이냐?]
레나는 고개를 저었다.
“처음부터 그렇게 무모할 생각은 없어요. 제 목숨은 세상에서 제일 귀중하니까요. 일단 쉬워 보이는 녀석들부터 캐내야죠.”
물론 처음부터 다짜고짜 로랑스 타르티에의 뒤를 밟으려는 시도는 하지 않는다.
‘그건 제일 나중이다.’
다른 녀석들 하나하나도 당연히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냐아아옹…….]
둥글게 몸을 말았던 횐 고양이가 천천히 제 키보다 더 긴 기지개를 폈다.
몸을 푸는 걸까.
묘족 주술사 샤루니안.
그녀는 이번 세계선에도 레나의 곁에 있었다.
아주 천천히 갸르릉대면서, 몹시 긴 세월을 살아남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