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363화 (363/458)

422화 권리 위에 잠자는 자 (19)

‘이게 무슨……?’

레나는 오지 않은 게 아니라 움직일 수 없던 거였다.

흩어진 핏물 일부가 레나의 무릎 아래를 감고 놔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곳에서부터.

공작은 다시 구성되고 있었다.

꾸물거리던 것들이 점점 빠르게 하나의 형상을 만들었다.

부서지고 다시 만들어진 탓인지,

레나를 구속하는 데 즙의 일부를 쓴 탓인지,공작은 아까보다 작고 어려진 상태였다.

조금 더 마른 10대 후반의 소년이 나를 바라봤다.

“어이가 없네……

목소리에서 진한 불쾌함과 짜증이 묻어난다.

소년 공작에게서는 더 이상.

틈이 보이지 않았다.

몸집은 훨씬 작아졌지만 아까와는 다르게 월 해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두려웠다.

‘뭐지?’

다시 공작의 모습을 살펴본다.

온전히 감각하기 위해 노력하자 달라진 것이 느껴진다.

공작은.

방금 해안에서 터진 폭발에 의해 〈소모〉된 무언가가 〈회복〉된 느낌이었다.

절망이 몰려왔다.

전투 직전의 아찔한 긴장감이라면 쾌감마저 느낄 수 있을지 모르나, 그런 긴장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승산이 보이지 않는다.

이길 수도.

도망칠 수도 없다.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감각.

공작이 여전히 일그러진 얼굴로 내뱉었다.

“대체 어떻게… 부하에게 이만한 힘을 준 거지? 기스-제-라이라는 네크로멘서는 도대체가……

성큼성큼 앞으로 다가오는 녀석의 목소리에 당황스러움이 묻어난다.

하지만 이길 수 없다는 당황감은 아니었다.

‘이런 것’까지 해야 한다는 당혹감이 전부다.

- 팟!

느려질 수 없는 시간이 느려졌다.

아까처럼 다섯 배,열 배,백 배의 수준이 아니다.

1초를 수천 번 쪼갠 수유를 지나 찰나를,청정淸淨을 지난다.

흐릿했던 시간이 펴지고,펴져서 영원처럼 선명해진다.

공작의 몸 안을 폭발시킨 것처럼 아주 자그만 빈 공간을 거대하게 확대해 터트린 것처럼.

그는 아주 작은 찰나를 쪼개고,

다시 늘리고,다시 쪼개고, 늘려서 움직이고 있었다.

상대에게 있어서는 영원이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찰나조차도 아닌, 하나의 점에 가까워서.

결국,시간이 정지한다.

- 파삭.

정지한 시간 속에서.

눈앞에서 빛이 뿜어지며 시야가 갑자기 확 낮아졌다.

두 개의 긴 무언가가 낮아진 시야 바깥으로 튀어 나갔다.

방어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 팍.

팔뼈 하나가 날아가고,정지된 순간에 다른 팔뼈가 잘려 나갔다.

소년 공작은 아무것도 쏟아지지 않는 뼈를 걷어찼다.

백사장 위를 구르는 네 팔다리가 허무하게 하늘에 모래를 튀긴다.

“젠장……

짜증을 내는 목소리가 들린다.

시간은 멋대로 멈추고,시작해서

대응할 실마리조차 잡을 수 없다.

“이것까지 사용하다니……. 젠장……. 복구가 너무 힘들겠는데……

놈은 어느새 눈앞에 있었다.

중간 과정 따윈 없는 이동.

공작이 몸통만 남은 나에게 손을 뻗는 순간.

- 우우옹…….

허공에서 작은 구슬이 소환됐다.

도저히 잊을 수 없는,아이작과 나냐우를 세계에서 적출해 낸 모양 그대로였다.

공포로 몸이 얼어붙었다.

‘사라지는 건가?’

저번에는 뭔가 오류가 발생해서 없어지지 않았다고 해도,이번에도 그렇다는 보장은 없다.

게다가 어렵게 복구한 힘을 다시 잃는다면?

“권한,적출.”

하지만.

무언가 빨려 들어가려는 순간.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유일한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팔다리가 없어도 상관없다.

확실히 개념을 짜 올리는 상상만 가능하다면.

지금까지 없었던 방식의 공격도, 간섭도 가능하다.

애초에 공격은 팔 따위로 한 건 아니니까.

세계에 나 있는 금.

그곳에 내 해석을 넣으면…….

- 퍼펑!

공작의 머리, 가슴,온몸이 핏물로

변해 터져 나갔다.

하지만 터져 나가는 공작의 얼굴이 지어 보였던 건 고작 냉소.

‘•••뭐지?’

- 좌르륵.

터진 핏물이 다시 뭉치고 가루가 된 뼈가 모아 붙는다.

발작적으로 공격을 계속했지만,점점 결합은 빨라지기만 했다.

아니, 빠르게 만들어지지 않고도 만들어지고,뭉칠 것조차도 없이 잔해는 그 자체로 기능한다.

핏물은 이제 굳이 인간의 형태 따위를 만들려 하지 않았다.

덩어리진 형태,날카로운 형태, 흩어지는 형태,매듭진 형태,멀리 뻗어가는 형태,흘려보내는 형태, 붙잡는 형태…….

끊임없이 변화하는 형상에 유일한 공통점이 있다면,끔찍할 정도로 주하다는 것.

보는 것만으로 몸이 떨릴 정도로 불길하고 혐오스럽다.

- 스스숙…….

춤추는 핏물은 큰 입을 벌리고, 날카로운 이를 만들고,혓바닥을 날름거린다.

웃는 핏물은 찔레꽃 덤불이 되어 핏방울 하나하나마다 가시를 낳고, 가시는 독과 저주를 품고 곤두서서 말라 간다.

두개골과 갈비뼈가.

악의로 가득 찬 핏물에 감싸인다.

그러나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

둘러싸는 거라면 이쪽에도 하나 방법이 있다.

‘덮어씌우고……

이미 깨달은 능력.

나를 위협하는 핏물을 인벤토리로 휘감았다.

공격은 먹히지 않지만.

아예 안에 봉인해 버린다면.

- 꾸드드득…….

그러나.

사방을 둘러싼 상태에서도 핏물은 들어가지 않는다.

유산과 같은 현상.

‘마지막 수단마저 막힌 건가.’

강해졌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라면 누구와 붙더라도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나.’

절망감이 몰려든다.

‘대체 얼마나……

실패를 거듭해야 할까.

동료들이 죽어 가는 모습을 얼마나 더 보아야 하는 걸까.

그때 였다.

핏물이 짜증을 내듯이 요동치며 뒤로 빠졌다.

시간이 멈췄다.

공작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어디… 어디로 간 거지?’

경악스러웠다.

다시 아무런 중간 과정도 없이 녀석은 레나의 곁에 서 있다.

출렁거리는 핏물에서 다시 완전한 공작의 형상을 취한 채로.

경악에 이어 공포가,절망이,다시 섬뜩한 허무가 올라온다.

“과연… 기괴한 녀석이군. 부하가 이 정도면 주인은 도대체 얼마나 강한 거지?”

“관련된 것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 뽑아내야겠어.”

중얼거린 공작은 곁으로 고개를

돌려 레나를 바라봤다.

무슨 수를 써서든 막아야 한다. 그것만은 절대 허용할 수 없다. 필사적으로 모래 바닥에서 사지가 잘린 몸을 비틀었지만.

공작은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일단 너부터다.”

아직도 허공에 떠 있는 촘촘하게 새까만 검은 구슬이 아주 천천히 그녀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멈춰져 있는 그녀의 왼쪽 발목이, 오른쪽 무릎 아래가.

점점 투명하게 사라져 갔다.

기시감이 정신을 파먹는다.

레나가 빨려 들어가고 있다.

한마디 유언도,최후의 종언조차 남기지 못하고.

그의 몸 이곳저곳에 투명한 틈이 생겨난다.

분명히 세계에서 지워지고 있다.

‘안 돼.’

하지만 저주스러운 검은 구슬은 미동조차도 없다.

작은 파문도,진동도,일그러짐도, 번쩍임도 없다.

괴로움이 이어지는 찰나.

이미 세계에서 그녀는 지워져 있었다.

레나는 사라졌다.

내가 죽이지 못한 핏물 속으로, 부수지 못한 검은 구슬 속으로.

그녀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조차 모르고 사라졌다.

비명도 없고 웃음도,슬픔도 없이 인사도 하지 않고 사라졌다.

아이작과 나냐우가 흩어져 빨려 들어갔던 것처럼.

〈T&T의 레나라고 합니다. 정보와

절도,암살을 다루는 길드죠. 설마 그중에 필요한 게 없으실까요?〉

〈그냥 기다리는 것보다는… 제가 인간들을 꾀어 오는 거죠. 그러면 기사님이 처리하는 거예요. 좋죠?>

얻을 게 있어 살렸다.

〈어차피 떠나는 길인데,왜?〉

〈하핫,그래도 한 달 넘게 있으며 정도 들었고. 던전으로 쳐들어오는 녀석들 엿 좀 먹으라는 거죠.>

〈아무래도 힘들 거 같아요.>

〈탈출 말인가?〉

〈살아남는 거요.〉

동굴에서 그녀를 그냥 죽였더라면 한 번의 죽음으로 끝났다.

그라스미어의 불을 받은 이후에 던전을 공략하며 죽었다면 두 번의 죽음으로 끝났다.

푸르손의 추종자들에게 세 번째로 죽은 건 온전히 내 책임이었다.

〈다음 생에서는 아마도 도와드릴 위치에 있지 않을까요?〉

네 번, 다섯 번…….

죽음을 반복하고.

몇 번이고 모르는 새로운 관계로 만나면서도.

그녀는 한 번도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뭐,세상이 내게 무슨 짓거리를 한 건지는 몰라도 지금은 당신이 좋아요. 마음에 드니 돕겠다는 거. 그게 전부예요.〉

항상 마음 한편에서는.

레나의 신의와 판단에 의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무게가 온전히 다가온다.

세계에서 그녀를 찾을 수 없다니.

그녀가 쌓아 온 인과가 사라졌다는 참담한 감각 속에서.

나눴던 대화가,함께한 전투들이, 모험이,기만이 떠오른다.

팔다리가 없는 몸이 떨려 온다.

O O 으......”

■ ■ ■ ■ ^3 .

핏물이 다시 형태를 회복하지만, 이제 놈을 공격할 의미도,가치도 찾을 수 없었다.

내 행동은,내가 내린 결론은.

‘틀렸다.’

따져 볼 것조차 없는 명백한 오답.

- 꾸르르르륵…….

핏물이 다가온다.

저항할 의욕은커녕 펼칠 의욕도, 내던질 의욕도 없다.

그녀는 아팠을까,괴로웠을까.

아무것도 느끼지 않고 사라졌을까.

모든 것들이 지나가는 풍경처럼 흩어지지만.

핏물은 다시 형체를 갖추고.

“어디에 숨어 있는 거냐……

입을 만들어 지껄인다.

나를 흡수할 때 정지가 풀리고, 무언가 위화감을 느낀 탓일까.

‘적출’은 없이.

팔다리가 해체된 내 몸을 그대로 쥐고 앞으로 걸어간다.

- 저벅…….

‘바깥’의 존재는 담담하게 앞으로 걸어갔다.

♦ * *

고도 500미터.

잿빛 구름으로 덮인 하늘 위. 마력 비행정,〈거짓 날개〉갑판.

그 위에 선 기스-제-라이의 눈에 추종자들의 비행정들이 들어온다.

도합 서른일곱 척. 기스-제-라이.

반인반골의 네크로멘서는.

오랫도록 자신을 숭배해 온 혹마법 단체 ‘이상주의자’를 비행정단으로 이끌고 와서 천천히 고도를 낮추고

있었다.

고도 400미터.

〈거짓 날개〉갑판 위에 서 있는 기스-제-라이는 적외선 망원경으로 아래를 살폈다.

엠버메어에 책임감을 가지고 있던 해안 포대는 전멸.

백사장의 폭약까지 모두 터졌다.

브람도 감당하지 못했고.

해저 루-륨 발전소까지 터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다.

‘저게 대체 뭐란 말이야?’

기스-제-라이는 피부로 덮인 쪽의 이마를 찡그렸다.

그녀가 알던 세계의 원리 따위는 적용되지 않는 존재.

이길 수 있을까?

정말 뭔가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정체 모를 흥분이 들끓어 오른다.

격렬하게 가슴이 뛰었다.

기스-제-라이는 이길 수 있어서 싸우는 것이 아니다.

견딜 수 있기에 꺾이지 않은 것이 아니다.

죽음은 언제나 가장 가까운 친구.

누구에게도 굴욕을 인정하지 않는 호승심은 그녀를 이루는 뼈대다.

‘저런 식의 부활까지 가능하다면, 불완전한 용의 힘으로 죽이는 건 어렵겠지만.’

고도 300미터.

잿빛 구름이 코앞이다.

‘살해는 단념.’

그러나.

어차피 목적은 따로 있다.

“슬슬 시작할까.”

한 손을 들어.

- 휘이이이잉!

허공을 잡아 찢는다.

울부짖는 공기에 구름이 비틀려 길을 열고.

드-루즈의 별을 거꾸로 뒤집고 원을 그린 문양을,수십 척의 비행선이 허공에서 만들어 내며.

“제 피를! 영혼을 바칩니다!”

“당신이라는 백장미 가시에 저의 심장을 찌르겠습니다!”

“그대 시체로 세계를 갱신하리라, 평온을 베풀어 오신 여신이여!”

“눈길 한 번! 부디 눈길 한 번만

주십시오! 아니요! 무시하십시오! 저를 잔혹하게 무시하십시오! 몹쓸 이 신자에게 그 고귀하신 눈길을 허락하지 말아 주십시오!”

“저의 생명을 사용해 주시는 것은 황홀한 포상! 포상입니다!”

거기 탄 자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자신의 심혼心魂을 네크로멘서에게 바치고 있었다.

그동안 쌓아 을린 수련을,마력을, 소양을,고통을,기스-제-라이라면 옥1처럼 부수며 써 줄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기에.

중앙 비행선에 선 네크로멘서는 불타오르는 두 주먹을 아래를 향해

내밀었다.

- 과르르르르르!

주먹에서 가슴, 얼굴, 다리, 발.

전신을 붉은 고대어가 긴 문장을 이루어 뒤덮는다.

하늘에 퍼런 불이 붙는다.

불을 보며 기스-제-라이는 환하게 웃었다.

‘생각보다… 제대로 됐군.’

시들지 않는 꽃.

떨어지지 않는 꽃.

용화Dragonfire,만개滿開.

불꽃의 폭풍이 수십 갈래가 겹쳐 부옇게 하늘을 태우며 낙하했다.

423하 권리 위에 잠자는 자 (20)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동굴 속을 지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가,

“기스-제-라이……?”

하늘을 바라보는 공작의 목소리에 세계가 돌아온다.

해결해야 할 일을 끝낸 것 같은 개운한 목소리.

그 목소리에 번쩍 정신이 든다.

지켜야 할 것이 있다.

기스-제-라이를.

그녀까지 잃을 수는 없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두렵게 느껴졌다.

‘당장 자살할까?’

하지만 내가 죽는다고 세계선이 끊긴다는 보장은 확실히 있을까?

‘내가 죽은 이후’의 변동이 혹시 반영된다면.

여기서 나는 죽고.

기스-제-라이까지 사라질 가능성도 있다.

특히 공작은 ‘바깥’의 존재니까, 내가 자살한 이후의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다.

‘오면 안 되는데……!’

지금이라도 도망치라고 외치려고 할 때였다.

뿌듯한 표정이었던 공작은.

하늘를 올려다보며 당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드래곤… 파이어……?”

잿빛 구름으로 덮인 어둠을 뚫고.

하늘을 찢는 거대한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 쾨싸아•아■아■아•아•아!

어둠으로 두껍게 가려졌던 하늘에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

하늘이 열리며 불길이 직선으로 공작에게 내리꽂혔다.

불길은 허공을 스쳐 지나지 않고 모조리 태우고 지나갔기에 해안의 공기는 녹아서 화기火氣로 변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바닷물들마저 공기가 되어 증발했다.

“무슨……

무엇도 녹이고 증발시킬 수 있는 불길이 공작을 관통했다.

그런 말을 남기며 공작이 빠르게 몸을 피한 순간,‘이 세계의 것’이

아닌 불길에 날개가 생기며 그를 쫓아갔다.

- 과드드드득!

불길에 날개에 이어 손이 생겼다. 타오르는 손이 공작을 잡았다.

그리고 새롭게 생겨난 입안으로 가져갔다.

“이딴 마법은 없… 크아아악!”

공작은 어째서인지 피하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불꽃 이빨에 공작의 얼굴이 뜯어 먹히고,푸른 불꽃 헛바닥이 그의

입에 들어가더니 입과 목과 내장을 전부 휘감아 녹여 버렸다.

섬세하고 집요하게 살아 움직이는 용의 불꽃은 공작을 안과 밖에서 동시에 잡아 뜯었다. 수십 갈래의 불꽃이 교대하며 공작의 서로 다른 부위에서 들락거렸다.

거대한 불줄기 속에서 수십 갈래 불꽃이 살점을,혈관을,뼈를,신경을 태우고,

찢은 살점과 핏물을 삼킨 불꽃이 서로에게 옮겨붙으며 폭발했다.

공작의 온몸이 순식간에 새하얀 재로 변해 간다.

‘이게… 용의… 힘……

혼자 감당하는 게 아닌.

다른 자들의 도움을 받아 행하는 준비된 공격이라면.

이 정도까지 할 수 있다는 건가.

옆에서 뜨거운 열기를 느꼈지만, 네크로멘서가 만든 불꽃은 공격할 대상을 분명히 아는 듯 놀람게도 공작의 몸 위에서만 번졌다.

강하다.

지금까지 본 그 어떤 불꽃보다도, 심지어 검기 자체를 타오르게 하는 검염劍炎, 죽음의 기사 특전으로 얻은 타오르는 업화보다도 훨씬 더

지독한 불꽃이었다.

새파란 것들이 일어났다가 다시 스러지고, 스러지는 재 속에 다시 일어난다.

아주 작은 티끌마저 제 아궁이로 쓸 수 있는 용의 숨결은 스스로에 완전히 취해 불꽃을 섞어 서로를 태웠다.

하지만.

정말,이길 수 있을까.

눈앞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상대는 ‘바깥’의 존재.

“기스-제-라이! 도망쳐!”

하늘을 쾅쾅 두드리듯 외쳤다.

이런 미약한 외침까지 듣는 힘을 가지고 있는 걸까.

“아니,이 힘이 어느 정도 먹히나 관찰해라.”

허공에 높이 떠 있는 비행정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관찰… 하라고?’

기스제라이는 자신의 목숨을 희생 하는 공격을,어쩌면 자신의 존재 자체를 위기에 처하게 하는 공격을 하며 정보를 주려고 한 것이다.

一 과르르르르르!

공작은 어떻게 해도 그를 휘감은 불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새하얀 재가 흩어진다.

터져 나간 수십 갈래 불꽃은 하얀 재를 물고 모조리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고,다시 터져 수천 갈래의 반딧불이 되어 재를 품고 셸 수도 없는 위치로 흩어져 버린다.

불꽃이 향한 바닷물이 증발했고, 다른 곳의 두꺼운 구름까지 타올라 넓게 빛이 비췄다.

하지만.

“하아……

깊은 한숨이.

비행선에 달린 음성확장기를 통해 새어 나왔다.

네크로멘서의 친숙한 목소리였다.

“기스-제-라이! 엘윈 에사우……! 도망치라니까……!”

들리는 걸까,들리지 않는 걸까.

빠르게 고도를 낮추는 비행선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인벤토리 열어!”

소명수녀가 외쳤다.

“인벤… 토리?”

“빨리 받아! 시간 없어!”

소명수녀가 다짜고짜 작고 빛나는 무언가를 집어던졌다.

- 슈아아앙!

주먹만 한 크기.

황금 벌레 모형이 엄청난 속도로 인벤토리 안에 들어간다.

“이게 뭔……

소명수녀가 일방적으로 외쳤다.

“트로핀 여단 본부에 쳐들어가서 깽판을 치고 흠쳤어. 어차피 전부

끝나는 마당이니 상관없거든.”

“아니,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당신들,도망치라니까!”

“그게 중요한 거다,멍청아.”

불꽃을 유지하는 기스-제-라이의 목소리였다.

내 말이 정말 들린 걸까?

아니면 안 듣고도 쉽게 예상해서 저런 소리를 한 걸까.

- 과과과과과광!

불꽃은 허공에 부유하는 구슬을 공격하고 있었다.

“저게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일단 불줄기로 잡아 놓고 있는 게 할 수 있는 일의 전부… 다. 크큭… 진짜 용이라도 몇 마리 데려오지 않으면… 다음에는 정말… 제대로 찾아보자고……

네크로멘서가 마지막까지 농담을 하며 불타는 어깨를 들썩거린다.

비행기들 역시 마법진의 일부인지 곳곳이 떨어지며 비틀거리고 있다.

어느 순간,불길이 약해지고.

흩어졌던 재가.

땅에서,바다에서,하늘에서 다시 모여들고 있었다.

그리고 계속 같은 자리에 떠 있는 구슬을 받쳐 올리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레나를 홉수한 검은 구슬의 색은 천천히 옅어져서, 색채 군데군데에 하얀 균열 같은 게 보였다.

〈무슨 용량이 이렇게 터무니없이 큰 거지… 오류인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기스-제-라이를 홉수할 수 없다는

이야기 같지는 않았다.

천천히.

비행정을 향해 구슬은 꾸준하게 위로 가까워지고 있었으니까.

〈엘윈… 엘윈… 에… 사우...

올라가는 재가 진동하듯 수녀의 이름을 읽어낸다.

섬뜩함이 느껴진다.

〈기스… 제… 라이…….>

불꽃에 허물어지는 그녀의 이름도 옮어 댔다.

거기는 아름다움도, 운율도 없다.

섬뜩함이 난폭하게 손을 뻗는다.

목표는 명백하다.

‘젠장……

모두를 홉수한 구슬이 하려는 건 뻔한 일이다.

“도망치라니까!”

- 부우우응!

〈너희들 따위가 무슨 권리로… 이 세계를 망쳐 놓는지 모르지만… 이젠 끝이다…….>

‘무슨 권리라고?’

‘세계를 망친다고?’

마치 자신이 세계의 주인이라는 태도였다.

모든 걸 발아래로 보는 오만함 정도가 아니다.

자신의 뜻이〈세계>이며,

자신이 원하는 것이〈순리〉.

다른 건 오류라고 생각하는 극히 편협하고 뒤틀린 시선.

놈의 정체가 뭔지는 몰라도.

인간들보다도 한층 더 인간 같은 사고의 기만자로 느껴지며 혐오가 치밀어 오른다.

저런 공작보다는 해안에서 죽어 간 엠버메어의 시민들이.

하늘에서 떨어진 이상주의자들이.

함께 배를 타고 왔다가 발전소의 폭발에 휘말려 죽은 자들이 훨씬 '세계의 주인’이라고 불려야 하지 않는 건가.

아이작의 말대로.

저들은 ‘손님’에 불과하며.

우리가 이 세계의 ‘주민’일 텐데.

저런 것에 동료들을 빼앗겼다니.

물론 혐오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기스-제-라이와 별빛청여우가 탄 비행정은 고도를 높여 가지만.

재로 받쳐진 구슬은.

그것보다도 조금 더 빠르게 위로 을라가고.

지금 또 뭘 시도하는 건 무리다.

‘자살해야겠군……

신경이 기스-제-라이에게 분산된 지금이 아니라면 자살마저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더 버티면 구슬이 비행정에 닿고,

정말 모든 게 끝이다.

그런 절망만은 피해야 한다.

세계선의 반복을 아는 놈들이다.

여기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레드 플레이크의 동료들까지 100% 적출되지만.

자살이라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처음에는 자살이 정말 제대로 된 방법이 맞나 망설였다.

동료들을 어떻게든 도망가게 하려고 자살을 미뤘지만, 이젠 그건 틀려 먹었다.

세계가 나를 중심으로 시작하고 끝날 가능성.

세계선에서 누군가를 ‘뽑아낼 수’ 있는 저런 존재들마저도.

내 회귀와 함께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희망.

그 가능성이 얼마나 희박하던지, 이제 거기에 걸어야 한다.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다.

- 쿵.

불에 휩싸인 비행정이 폭발하며 떨어진다.

저기 휩싸인다면 최소한의 위장은 될 수 있겠지.

- 과과과광!

내 위로 떨어지는 이상주의자들의 비행정을 보며,그대로 두개골을 터트렸다.

파삭,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처럼 분쇄된 뻣가루가 허공에 쏟아졌다.

고요하다.

어둠 속에서 새소리도,풀 소리도, 바람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고요 속으로 익숙한 소리가 섞여 들려온다.

-

- 똑. 똑.

떨어지는 물소리로 동굴의 구조를 파악한다.

익숙한 동굴이다.

기스-제-라이가 듀라한들과 함께 머무르던 장소.

‘죽은… 건가.’

자살은 성공이었다.

회귀 능력은 여전하고.

‘상태창.’

언제부터인지 모른다.

이제 굳이 소리내 말하지 않아도 그 정도는 간단히 띄울 수 있었다.

[죽음의 기사 Lv.8…….]

직업도,스킬도 그대로.

‘검염.’

- 과콰콰과!

마력의 소모가 극단적인 스킬을 다시 시전해 봐도,부담은 없다.

막대한 불의 기운이 빈 어둠에서 끓어오른다.

몸에 흐르는 루-륨도 여전.

공작이 나를 세계에서 주줄하려고 했을 때가 떠오른다.

어째서인지 정지시킨 시간이 다시 홀렸다.

그걸 당황스럽게 여긴 놈은 대신 레나를…….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무거운 자책감이 짓눌렀다.

생각해 보면 구하러 가지 않았어도 같은 결과가 나왔을 수도 있지만, 그런 억지 위안에는 어차피 아무런 가치도 없다.

[인벤토리 Lv.?을 발동합니다.]

‘이건… 남아 있군.’

기스-제-라이와 별빛청여우.

그들이 마지막에 전해 준 황금빛 벌레 모형이 손에 잡힌다.

레드 플레이크 본부에 있던 벌레 모형과,트로핀 여단에 난입해서 난장판을 벌이고 가져온 모형.

‘일곱 개가 있다고 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하나를 포함해서, 그중에서 두 개를 갖고 시작한다.

‘전부 기스-제-라이 덕분이군.’

‘레나가 사라졌다면……

그 사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지독하게 괴로워졌지만,가까스로 생각을 이어 나간다.

이 황금 벌레를.

간부인 그녀가 없는 지금이라면, 트로핀 여단에서 빼내기는 몹시도

힘들었을 거다.

- 끼릭. 끼리리릭.

진동을 천천히 손으로 느끼면서 생각한다.

뭔가 이상하다.

- 달그락.

관 밖의 흙을 손으로 움켜쥐면서 생각했다.

위화감의 정체는…….

고요함.

‘왜 이렇게 비어 있지?‘

주위를 탐지해 봐도 아무도 없다.

기스-제-라이나 듀라한들은커녕, 나를 제외한다면 언데드 하나 없이 썰렁한 동굴이다.

시작 위치는 같지만.

저번에는 분명히 기스-제-라이와 듀라한들이 황제 암살을 준비하고 있던 장소다.

’다를 이유가 없는데.‘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gap?,

- 팟!

나는 몸을 일으켰다.

‘시나리오.’

- 띠링!

[현재 슬롯: 3/4]

[상시 시나리오 ‘폭풍 속의 통치자’가 발동 상태입니다.]

[상시 시나리오,‘진화하는 조력자’가 발동 상태입니다.]

[EX 급 시나리오, ‘기스-제-라이 살리기’를 진행 중입니다!]

루비아.

레나.

기스-제-라이.

그녀들의 시나리오 세 개가 모두 동시에 활성화되어 있었다.

‘설마……

레나가 세계로부터 적출되었다는 사실은 확실한데.

시나리오는 남아 있다.

역사를, 기억을 지우는 관리자의

검은 구슬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시나리오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얘기는……

시나리오 유지는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가장 희망차게는.

이 장소에 없는 기스-제-라이.

시나리오가 남은 레나.

두 사람 모두가 사라졌을 수도, 혹시 모두가 남아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절망스럽게는.

엠버메어에 침공한 소년 공작이 기스-제-라이를 구슬로 흡수하고,

그 뒤를 이어 루비아까지 모두 다 홉수했을 가능성도 있다.

모두 상상이지만.

어디까지 현실일지 발을 내디디려 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웠다.

겁이 났다.

그냥 물러서 동굴에 머리를 박고 모든 걸 외면하고 싶었다.

떠 있는 시나리오 메시지만 보고 그들의 존재를 긍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건 모욕이다.

기스-제-라이가 자신에게 건네준 두 개의 황금빛 벌레 모형에 대한, 유산의 열쇠에 대한 모욕이다.

편지를 써서 나를 도망가게 하고, 마지막까지 공작 곁에서 연기해 준 레나의 최후에 대한 모욕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다.

그렇다면 거기에 대해 온전하게 책임질 수밖에 없다.

돌이킬 수는 없더라도.

외면하고 확인하지 않는다는 것만큼 비겁한 일은 없다.

나는,

- 달그락.

다시 한번,

동굴 밖으로 걸어 나갔다.

424호후 눈먼 달,지는 꽃 (1)

머릿속으로 길을 떠올리고.

기스-제-라이를 찾아서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 저벅.

'으음……?’

동굴 바깥이 고요하다는 사실에 위화감이 든다.

‘폭포가 있지 않았나?’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바람은 그렇다 치더라도.

돌계단 사이로 쏟아 내리는 폭포가 있을 텐데.

‘말라 있어.’

건조했다.

웅덩이에 만들어지는 하얀 물거품도, 허공에 튀어오르는 물방울도 없다.

‘날씨가 바뀐 건가?’

아니면 산의 물줄기를 인위적으로 바꿨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바뀐 건지도 모르고.

하지만,폭포가 완전히 사라진 건

역시 인간이 손을 댄 느낌이 난다.

‘2시 정도인가……

해의 위치를 바라봤다.

가장 뜨거운 시간이지만.

‘말라붙을 정도는 아닌데.’ 어쨌거나.

[탐지 Lv.l5를 발동합니다.]

[심안心眼(A플러스)이 적용됩니다.]

[명경지수明鏡止水 적용…….1

혼적이,

느껴지지 않는다.

‘없어……?’

아직 허공에 떠 있는 붉은 해가 한순간에 저물고 불어오는 바람이 시드는 것 같았다.

모험가,정찰대, 여행자,사냥꾼의 흔적은 느껴진다.

그러나 아래로 땅을 파고 움직인 언데드 군단의 흔적도.

다섯 듀라한의 흔적도.

모두를 통솔하는 기스-제-라이의 흔적도 느껴지지 않았다.

풍경이 회색빛 잿더미로 변했다.

제국에 네 명밖에 없는 검주에게 끝까지 전부 홉수한 탐지 Lv.15.

지상과 지하의 지형지물까지 모두 파악할 수 있는 심안心眼(A플러스).

결계 따위의 현혹을 무효화하는 명경지수明鏡止水.

아무리 기스-제-라이라고 해도.

이런 나에게 군대 전체를 이렇게 깨끗하게 숨기는 건 무리다.

무엇보다도.

나는 그녀의 기운을 알고 있으며.

그녀로부터 심어진 머리뼈가 분명 공명共鳴해야 할 터다.

‘그렇다면……

지하에서 나와 함께 싸운 그녀의 병사들이 스쳐 지나간다.

기사 안드레이,오웨인, 하멜라인, 펜리르,길라우트.

이들 모두가 기스-제-라이와 함께 사라져 버린 건가?

제대로 느끼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상실감이 얇은 막 바깥에서 떠돌아다녔다.

‘이건 아니야.’

그녀가 사라졌다면 아무것도 나를 위로해 줄 수 없다.

- 팟!

홀린 것처럼 땅을 박찼다.

찾아야 한다.

분명히,어딘가에 있을 터였다. 반드시,어딘가에 있어야 한다.

가물가물해지는 정신을 집중하고 탐지 범위를 넓혔다.

상공으로 떠오르던 검은 구슬과, 추락하던 이상주의자들의 비행정을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기스-제-라이……

감각을 열고 사방을 내달렸다.

하지만 산 전체를 훑어도 언데드 군단은커녕 듀라한 하나가 이동한 흔적도 찾을 수 없었고.

익숙해야 할 사기邪氣의 실마리도 느껴지지 않았다.

주변까지 한참 동안을 더 뒤져도 마찬가지였다.

‘없어.’

그녀가 매복하고 있던 언덕에도.

곧게 뻗은 검지 뼈로 가리키면서 무너지라고 명령한 대로에서도.

기사들이 꼼꼼하게 확인하던 산길 주변에서도 기스-제-라이의 흔적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휘이이이잉

겨울바람만 그대로일 뿐이다.

‘아무리 결계라도……

지나치지 않았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그녀 쪽에서라도 내 존재를 먼저 인식하고 다가왔을 거다.

스며드는 절망을 외면하고 빠르게 다른 곳으로 움직였다.

이 언덕에 없다면,다른 언덕을.

이 산에 없다면 다른 산을 뒤지면

되는 일이다.

- 팟!

어느새 에라스트 근처 야산까지 도착했다. 무덤은 파헤쳐져 있고, 관 속엔 아무것도 없다.

내가 여기서 나왔다는 세계선은 이미 확정된 상태이니 당연하겠지.

그리고.

기척이 느껴졌다.

‘그 녀석들인가?’

기스-제-라이에게 살해당한 황실 근위대 세 명인가 싶었다.

하지만 숫자는 둘.

얼굴도 다른 녀석들이다.

‘정찰병인가?’

하나를 죽이고,다른 하나만 잡아 입을 열게 만들어도 되고.

둘 모두를 기절시켜 끌고 간 뒤 하나씩 정보를 캐 봐도 좋다.

그림자에서 천천히 두 손을 들어 남자들의 목을 잡아채려는 찰나.

“후우……

경비병 하나가 깊게 숨을 내쉰다.

“그냥 앉아 있으면 안 될까? 응? 어차피 행차는 이틀 뒤에나 근처에 을 텐데 말이야.”

불량한 자세로 눈을 반쯤 감고 있던 병사가 입을 열었다.

“후아아암……. 젠장. 지금은 아직 에라스트에 도착도 안 했을 텐데 무슨 여기까지 순찰을 돌아야 해? 이게 말이 되는 거야?”

눈꺼풀은 이미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고 피곤한 듯 하품을 계속하는 상태였다. 맞은편에 있던 병사가 휘휘 손을 저었다.

“폐하의 행사는 그림자들이 항상 따라붙어. 제대로 일하는지 지금도 감시하고 있을 텐데?”

“그거 일부러 퍼트린 미신이라고. 에잇……

처음 말을 꺼낸 경비병은 몇 마디 투덜거리면서도 결국 바로 서 있는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황제가… 내려오고 있다고?’

지금 에라스트를 향하고 있다면.

‘따라간다.’

- 팟!

잡담을 하는 경비병들을 버려두고 빠르게 북쪽으로 움직였다.

목표는 황제의 행차.

기스-제-라이가 이 세계에서 아예

사라지지 않았다면.

시간축이 완전히 엉망으로 뒤틀린 상태가 아니라면.

황제 암살은 분명히 실행되고.

황제가 내려오는 경로를 짚는다면 네크로멘서는 반드시 만나게 된다.

답은 쉽게 나왔다.

‘그래도 없다면……

떠돌며 단서를 찾을 수밖에 없다.

풀벌레의 울음소리.

마른 나뭇잎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넘어서 빠르게 달려간다.

일단 황제의 위치를 파악한 다음, 거기서부터 내려가는 길을 샅샅이

뒤져 볼 생각이다.

공기가 서서히 식어 간다.

에라스트 근방은 물론.

그 위로 올라가는 도로 주변에도 수색대들이 군데군데 보였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곳곳을 훑어보는 3인 1조의 무리들.

황제가 지나갈 리 없는 산길까지 샅샅이 살펴보지만.

정작 대로의 그림자에 숨어 걷는 내 존재는 전혀 알지 못한다.

- 다그닥.

황제의 행차에 더 가까워졌다는 이야기일까.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근위대로군.’

기사들은 한 기 한 기가 별도로 움직이며 땅 하나하나를 긴 막대로 짚어 점검했다.

물론 숨어 있는 데는 아무 지장도 없었다.

산길에서 그들을 관찰하며 북쪽을 향해서 걷던 도중이었다.

‘저건……

좋은 기억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미스릴 갑옷이 보인다.

이사벨 시몬느.

근위기사단장이 직접 나와 황제가 행차할 도로를 점검하고 있었다.

‘날카롭군.’

물론 검을 맞댈 수준은 아니지만, 말을 모는 모습에서도 느껴지는 진지하고 성실한 태도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어쨌거나.

‘세계선은 크게 변하지 않았어.’

에라스트 근방의 경비가 예전보다 삼엄해졌다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황제의 행차는 그대로.

이사벨을 보면 행차 구성 인원도

비슷해 보인다.

물론,네크로멘서가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수풀을 빠르게 달렸다.

대로도 수풀도 산길도 빠짐없이 점검했다.

커다란 바위를 단번에 뛰어넘고, 언덕을 몇 번의 발걸음에 전부 다 날아 넘었다.

바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날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아직 가짜 황제의 본대를 만나지 못했을 때.

C급 던전 〈비틀린 안개 지역〉이

위치한 골짜기에서 기묘한 공명이 느껴졌다.

저녁 으스름이 스며들 무렵에는 간헐적인 귀곡성이 울리는 장소.

희미하지만,확실하다.

누구의 것인지 온몸으로 느껴지는

사악한 기운.

익숙한 공명이지만.

익숙한 상황은 아니다.

이런 게 가능한 상대는 하나밖에 없으므로.

뼈를 나눈 그녀.

기묘하게도 결계의 범위까지 내게 느껴지는 것은,역시 몸의 일부가

내 안에 심어져 있기 때문이겠지.

‘•••300미터.’

그 거리에 그녀가 있다.

그렇게나 떨어진 곳에서부터 미리 알아볼 정도다.

주먹이 쥐어지고,긴장으로 몸이 뻣뻣해진다.

어쩌면 그녀가 내 존재를 먼저 느꼈을지도 모른다.

나를 목격하고,어떤 권능을 써서 일부러 내가 그녀를 더 의식하게 만들었을 가능성도 있다.

기스-제-라이의 능력은 그 끝을 알 수 없으니까.

나는 아마 그녀가 의도한 것처럼 호기심을 느끼거나.

강렬하게 끌리는 대신,

‘•••다행 이군.’

아찔한 안도가 온몸으로 내달려 흩어진다.

그녀가 저기 있다는 확신.

아직 존재한다는 사실.

사라졌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무사했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황제 암살의 장소가 유블람으로 향하는 길에서 에라스트 북쪽으로 달라지고.

시간이 좀 더 당겨졌을 뿐.

시나리오도.

그 존재도 그대로다.

엠버의 최후에서.

기스-제-라이를〈공작〉이 그대로 놔뒀을 리는 만무하다.

그녀의 이름까지 확인하며 분명히 목표로 삼았고.

세계가 계속됐다면 끝까지 쫓아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적출했겠지.

‘내가 죽으면 세계가 멈춘다……

그 추측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왜,어째서.

지금은 알 수 없다.

그런 의문조차 그저 작은 것으로 생각될 만큼 다행스러웠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곧 죽는다.

이 순간에도 내려오고 있을 가짜 황제를 마주하는 순간.

계획된 암살을 실행하는 순간.

잿빛 기사가 나타나 네크로멘서의 군단을 전멸시키고.

그녀의 몸을 갈라 버린다.

‘살려야지.’

당연히 떠오른 생각.

황제 측에 정보를 흘려서 훼방을

놓을 수도 있고.

〈린트부름의 꿈〉을 말하며 그녀를 설득할 수도 있고.

이제는 용의 힘을 가진 단검들과 마왕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다.

내 존재 자체로 호기심을 자극해 끌고 나올 수 있을지도 모르고.

이제 이 세계선은.

이 인과는 쉽게 바꿀 수 있다.

기스-제-라이를…….

멈칫.

무언가가 앞으로 나서려는 발을 묶는다.

몸이 올아매인 듯한 기분.

무언가 머리를 스친다.

‘설득해야… 할까.’

여기서 그대로 놔두면 분명히.

가짜 황제를 죽이고.

네크로멘서도 죽는다.

잿빛 기사가 나타나면 죽음은 결코 피할 수 없다.

나조차도 막을 수 없는 죽음이며, 용의 힘을 가진 단검을 쓰더라도 살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잿빛 기사에게 살해당한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처음 만났을 때.

그리고 두 번째 만났을 때 모두 몸이 찢겼다.

결정을 내렸다.

‘나는……

- 사박.

그녀로부터,발을 돌렸다.

나를 감지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

수백 미터를 떨어져 있으면서도 닿을락 말락 한 아슬아슬함.

궁금해하는 네크로멘서의 얼굴이 당장에라도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장소는 바뀌었어도 역시 오랫동안 준비해 왔을 작업이다.

그걸 포기하고 나를 쫓을 만큼은 아닐 터.

‘기스-제-라이……

당신을,나는.

여기서 죽게 놓아둔다.

잿빛 기사가 나타나 네크로멘서를 죽인다고 해도.

‘죽을’ 뿐.

‘그게,어쩌면… 훨씬 나아.’

살아나 움직이면 〈공작〉으로부터 홉수당할지도 모른다.

녀석은 세계선을 관측할 수 있는 존재이므로.

이미 기스-제-라이에 대한 정보를 그들이 인지했다면.

‘이번에는 공작이 아니라 다른…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모르지.’

이 순간에도 그녀의 위치를 읽고 접근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살릴 수 있을 때까지.’

그들을 막아설 수 있을 때까지.

기스-제-라이는.

죽어야 한다.

그녀의 영구적인 소멸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으니까.

내가 만들어 갈 세계선의 변동에 그녀를 끼워 넣을 수 없다.

함께하지 않는다.

비참한 기분은 어쩔 수 없었다.

소멸로부터 도망치게 하기 위해서 그녀를 죽게 내버려 두다니.

막을 수도 버텨 줄 수도 없다.

마음이 앙상하게 마른다.

그러나 네크로멘서를 살리겠다는 욕심을 부릴 수는 없다.

〈밖〉의 존재에게 저항할 수 없다면 함께 살아갈 수 없다.

‘이제 해야 할 일은……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실현할 차례.

- 팟!

나는 길을 다시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근위대가 정찰하고 있던 수풀로 돌아가서.

덫을 놓고,기다렸다.

먼저.

미끼를 얻기 위해서.

“잠깐.”

“무슨 일이십니까?”

“이쪽은… 나 혼자 수색하지.” 흔들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425호후 눈먼 달,지는 꽃 (2)

“예?”

근처에서 함께 움직이던 기사의 의아한 시선이 쏟아진다.

하지만 이사벨은 단호했다.

“이미 안전은 확인되지 않았나? 먼저 돌아가라.”

“그게… 폐하가 계신 본대가 곧 출발할 텐데요.”

“나중에 중간 즈음에서 합류하지. 어차피 내가 없어도 출발 자체에는 지장이 없지 않나?”

“그래도 단장님……

“돌아가라.”

이사벨은 말을 끊고 명령했다.

분명 억지에 가까웠다.

하지만 부하들은 그 억지를 더는 따지지 못하고 물러갔다.

근위대에서 그녀의 위치는 적어도 그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이사벨은 의무에서 벗어나듯 훌쩍 말 위에서 내린 뒤 천천히 두 발로 걸었다.

그리고 손을 드는 것처럼 자연스레 칼을 뽑았다.

근위대와 함께 있을 때는 숨겨둔

차가운 살기가 피어올랐다.

그녀를 중심으로 공기의 흐름이 얼어붙었다.

- 사박.

몇 합이나마 듀라한 넷을 동시에 상대했던 기사의 걸음은 우아하고 부드럽지만.

뻔한 함정으로 향하고 있다.

이사벨은 그럴 수밖에 없다.

후작과 자신만 알고 있는 표식을 지나칠 수 있을 리도.

그런 표식을 보고 부하를 데리고 올

리도 없다.

기다리는 상대가 후작 본인이라고 생각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

그럼에도,이사벨 시몬느는 혼자 표식을 찾아서 걷는다.

이건 후작과 관련된 어떤 종류의 협박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무시는 불가능하다.

이사벨 시몬느는 특정하게 꼬인 철사를 따라가며 점점 더 함정에 가까워진다.

어리석은 일이지만,어떤 감정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후작과 약속한 표식을 따라 혼자 걸어오는 것.

이게 이사벨이라는 기사가 살아온 낮과 밤을 걸쳐 내려진 결론이다.

그리고,

“나와라.”

마지막으로 놓은 표식과 몇 걸음 떨어진 장소에서 그녀가 손에 든 칼을 고쳐잡았다.

차가운 살기가 검에 모여든다.

상대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미묘한 감이 그녀의 걸음을 그곳에 멈추게 만들었다.

“그분에 대해 뭘 아는 거지?”

“거래를 위해 불러낸 게 아닌가? 모습을 드러내라!”

단호한 읊조림에 민망해진다.

나는一

‘딱히 할 말은 없는데.’

- 툭.

그림자를 타고 이사벨의 등 뒤로 돌아갔다.

가볍게 뒷목을 치기 위해 한 손을 휘둘렀지만,놀람게도 그녀는 순간 공격을 느끼고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너무 쉽게 봤나?’

피하는 것과 동시에 뻗은 칼에서 차가운 검기가 바닥을 스쳤다.

강철도 한순간에 베어낼 것 같은 날카로운 기운이었다.

‘검빙.’

하얀 빛을 내는 이사벨의 보검과 내가 만든 공간이 부딪쳤다.

칼이,검기가,갑옷과 그녀의 몸이 얼어붙었다.

안쪽까지 얼어붙은 칼이 날아가서 바닥에 깊이 박혔다.

비가 고인 웅덩이에서 물이 밖에

튀어오르는 것처럼 한기가 근처의 수풀을 새하얗게 얼렸다.

“조용히 가자.”

멱살을 잡고 당겨 뒷목을 가볍게 쳐서 기절시켰다.

뭔가 저항하려는 것 같긴 했으나 소리를 내게 만들 정도의 여유는 주지 않았다.

그녀의 움직임은 무척 효율적이고 뛰어났지만, 나는 이사벨이 아예 예측할 수 없는 수준의 압도적인 속도로 움직일 수 있다.

‘탐지.’

몸을 살펴봤다.

한동안 의식이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한 손에 그녀를 들고 빠졌다.

어차피 다른 길을 만들 생각이지, 이사벨 본인을 설득할 계획은 없다.

‘이것부터.’

대마법 룬이 각인된 갑옷을 벗겨 일단 인벤토리에 넣었다.

이사벨은… 넣을 수 없고.

기절시킨 채로 계속 다니는 것도 거추장스럽고.

‘뭐 없나?’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인벤토리를 뒤적거렸다.

대부분 무기였지만,오래지 않아 아이작이 챙겨 두라며 넣은 녀석을 발견했다.

‘이런 게 있었지.’

- 우우우웅…….

공간을 열고 허공에서 치렁치렁한 은빛 사슬을 꺼냈다.

얇은 쇠사슬이 스스로 움직인다.

묶어야 할 대상에 적당히 두르면 자율적으로 옭아매는 구속장비.

‘〈가시 면류관〉이랬나.’

묶인 자가 강하면 강할수록 힘을 발휘하는 사슬.

황실 비고에서 챙긴 아이템이다.

- 좌르르륵.

그저 사슬이었는데 구속하는 순간 수갑과 족갑은 물론,입에 물리는 재갈까지 나타난다.

묶은 그녀를〈메마른 지하 묘지〉 깊숙한 곳에 처박았다.

도망의 걱정은 없다.

아직 기절해 있지만,벗어나려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팔다리에 멍이

불그스름하게 들 만큼, 혹은 아예 끊어내려 할 만큼 사슬이 강하게 몸을 옥죄일 거다.

‘이 정도면 적당하겠지.’

암살이 진행될 장소가 작게나마 보이는 위치로 간다.

저곳에서 사건이 일어난다.

세계가 혼들린다.

판단은 끝났고,나는 지켜본다.

이사벨 시몬느는 없지만,그녀가 말한 대로 행차가 이어지고 있다.

- 쿠구구궁!

머릿속에서 소리가 울린다.

지금쯤 땅이 무너지겠지.

네크로멘서가 준비한 무덤.

거리는 멀고,현장은 강한 결계로 은폐되어 있지만.

몇 번씩 목격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듯이 떠오른다.

지반이 신기루처럼 아래로 무너지고 백 명이 넘는 인원이 떨어진다.

열 배가 넘는 수의 언데드 군단에 근위대는 침몰한다.

만다라에 의해 약화된 마법사들은 다섯 명의 듀라한이 사냥하고.

기스-제-라이 본인은 나설 일조차

없는 안전한 싸움.

단장조차 여기서〈가시 면류관〉에 묶여 있으니 결과는 한층 더 빨리 나타나겠지.

황제는 죽고.

부서진 군단병들은 네크로멘서에 의해 다시 일어나며.

암살은 성공이다.

그리고,

느껴진다.

나타나는 기운을 이 거리에서도 감지할 수 있었다.

- 달그락.

그녀를 방치하기로 결심했지만, 무심코 주먹을 쥐어 버린다.

도망치지 않는다.

외면하지 않는다.

이건 온전한 내 선택이니까.

결계가 박살 나고.

멀리서 희미하게 느껴지던 기운이 사라진다.

기스-제-라이는,

죽었다.

이런 결말을 알면서도 끼어들지

않은 나 때문에 이제 이 세계에서 그녀는 없다.

방치한 죽음을 향해 걸어간다.

가까워져도 아무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은폐하는 결계도 사라졌지만.

잿빛 기사의 강림에 의해 증발해 버렸기 때문이다.

갈기갈기 뿜어내는 짙은 짓눌려 부서지는 병사들의 선명하다.

그게 잿빛 기사의 힘이다.

〈공작〉이나 비역에서 봤던 비슷한 건가 싶다가도 검은

모두가

기운에 모습이

존재와 구체는

사용하지 않는다.

말도 통하지 않고.

살육만을 저지르는 존재.

머릿속에서 잿빛 기사와,그에게 살해당한 네크로멘서에 대해 계속 생각한다.

미리 강박적으로 자세하게 전장을 떠올린 탓인지 현장을 목격하는 건 예상만큼 괴롭지 않았다.

근위대가 죽었고,황제가 죽었고, 언데드 군단이,네크로멘서가 죽어 있었다.

낯설지 않고,괴롭지 않다.

이끌었던 병사들의 부서진 모습이

참혹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듀라한들의 짓이겨진 모습이 전혀 힘겹지 않다.

눈앞에 찢긴 네크로멘서의 모습에 울렁거리지도 않는다.

해야 할 일은…….

땅에서 한 발을 떼고,다시 다음 발을 움직이는 것.

다시 발로 지면을 밀어내고.

아무렇지 않게 앞을 향해 걷는다.

‘정수 흡수.’

네크로멘서의 주위에서 희미하게 피어나는 초록색 빛을 빨아들인다.

‘흡수……

스랫과 몇 가지 지식이 머릿속에 흘러들어 온다.

기스-제-라이의 흡수가 끝나자, 전장에 초록색 빛이 사라진다.

흡수할 수 있는 건 그녀 한 명.

저번 생에 기스-제-라이의 결계로 20배에 가까운 효율로 레안드로를 빨아들인 결과였다.

시체는 이제 시체로서의 의미만을

갖는다.

나는,다시 전장을 둘러보고. 눈앞의 네크로멘서를 응시한다.

반으로 찢긴 그녀도 가만히 나를

바라본다.

다음에는 다시 살릴 수 있을까?

또다시 그녀를 죽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고 장담할 자신은 없다.

싸워야 할 상대는 세계에서 아예 누군가의 존재를 뽑아낼 수도 있는 녀석들이니까.

- 우우우웅.

몸을 뒤져 용의 힘을 품은 단검을 챙기고 시체는 인벤토리에 넣었다.

기스-제-라이에게 ‘밖’의 것들이 이미 주목하기 시작했다.

시체도 숨길 필요가 있다.

나중에 이곳에 온 ‘공작’이 그녀가 암살에 성공하고 혼자 탈출했다고 생각하게 만들면.

나름대로 혼선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고.

마법사들의 시체도 뒤져 봤지만, 탑주급도 아닌 마법사들에게 딱히 얻을 건 없었다.

황실 비고에서 가져온 무기들도 안 쓰고 묵히고 있는 참이니까.

어지럽게 널려 있는 다른 것들은 건드리지 않고 에라스트로 향했다.

루비아의 존재를 확인해야 한다.

기스-제-라이의 존재가 남은 만큼 루비아도 온전하겠지만.

혹시나 싶은 일말의 불안이 아직 남아 있다.

기척을 죽이고 성문을 넘었다.

‘좀 다른데……?’

성문을 지키는 병사들은 물론이고 안쪽을 순찰하는 경비대들까지도 지금까지의 어떤 세계선보다 착실히 훈련되어 있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지나 내성으로 숨어들기도 전.

“총관, 경비대는 지금 어디까지 순찰하고 있죠?”

“세 번째 언덕에서 폐하의 행차를 보고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죠. 우리가 나가서 맞는다는 계획이었는데… 아직까지 연락이 없는 건 이상하지 않나요?”

“지체되었나 봅니다. 조금 기다려 보는 건 어떠십니까?”

“아니요. 지금 확인하는 파발을 보내세요. 아만에서 출발한 뒤에 중간에서 지체할 이유는 없지요. 있다면 우리가 알아야 하고요.”

“예,알겠습니다.”

뭔가 예감하는 걸까?

어딘가 불안한 기색이다.

기억이 남아 있다면.

혹시나 황제 암살에 대한 기억도 희미하게 전승되었을지도.

어둠 속에 몸을 숨겨 그녀를 잠시 따라다녔다.

검은 야회복을 입은 영주는 쉽게 말을 몰며 도시 이곳저곳을 면밀히 점검했다.

‘남부 세 도시의 영주……

그녀가 이 세계선에서 자리잡은 위치는 금세 파악할 수 있었다.

‘…고정됐군.’

추격자를 달고 무덤으로 도망쳐

오던 그녀는 이제 없다.

에라스트의 쓰레기 같은 무리들은 진작 사라졌을 거고.

유블람도 마약에 쩔어 있는 곳은 아니겠지.

골목 골목을 살펴봐도 예전보다 훨씬 부강해 보인다.

네크로멘서가 제 군단을 에라스트 북쪽 멀리 위치시켰던 건,어쩌면 남부 세 도시의 지배자가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될 만큼.

약한 안도에 이어서,그녀로부터 지금 당장 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더는 나와 얽혀들지 말아야 하는 인간이니까.

계속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고, 보고 싶고,근처에서 그 안에 담긴 감정을 느끼고 싶었다.

루비아를 마음 안에 만들어 놓고 있지만,당연히 실제의 그녀만큼 생생하지는 못하니까.

그냥 곁에 있고 싶었다.

물론.

내 욕심 따위보다 그녀의 평안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망설일 여지는 없었다.

- 팟!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미련을 버리고 영주실로 이동했다.

‘•••여기군.’

갑옷은 그곳에 있다.

에라스트에 두는 걸까.

아니면,항상 가까운 곳에 가지고 다니기라도 하는 걸까.

그걸 보자 지금까지의 시간들이, 루비아가 나에게 보여 줬던 호의가, 그녀가 겪어야 했던 부당한 시련이, 맑은 웃음이 다시 떠오르며 마음을 무너뜨렸다.

그녀가 나를 기억한다는 표식을,

[서번트 시스템이 활성화됩니다.]

허락 없이 착용한다.

[시야가 15% 중가합니다.]

[위험을 발견할 확률이 15%…….]

[전투력이 10% 증가합니다.]

[은신 능력이 30% 상승합니다.]

[모든 스탯이 10% 상승합니다.]

[방어력이 15% 상숭합니다.]

[독서 스킬의 효과가…….]

[신비도神秘度가 올라갑니다.]

[상식의 궤를 벗어나는 존재들에 대한 대항이 가능하게…….]

지금까지 루비아와 경험했던 모든 버프를 갑옷의 착용만으로 받는다.

아직도 백일몽을 꾸며 나에 관한 기억을 희미하게 갖고 있을까.

소중하게 간직한 풀 플레이트가.

사라진 걸 보며 뭐라고 생각할지 알 수 없다.

그녀가 나와 만난 건 우연일까?

우연이라면 나에게는 행운이고, 그녀에게는…….

항상 불행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뭐라도 보답하고 싶지만,지금껏 그녀가 나와 깊게 얽혀 좋은 꼴을 본 적은 없다.

영주 루비아의 삶에 개입하는 건 여기까지.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있었다.

- 스륵.

조용히 내성 복도를 걸어서 곧장 도서관으로 향했다.

지하와 수상하게 연결되어 있는 에라스트 도서관.

‘이거지.’

하루 전체를 측정한 만큼 커다란 모래시계.

〈시간의 틈바구니에 갇힌 천재 대마법사〉의 표지에 그려진 것과 같은 모래시계가 눈에 띄인다.

책 표지에 수놓아진 모래시계는 부서졌지만.

형태는 분명 비슷하다.

‘모래가 흘러내리는 부분… 움푹 안쪽으로 들어간 부분에 손잡이가 있다고 했었나……

레드 플레이크 본부에서 루비아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탁자에 놓인 모래시계를 거꾸로 뒤집었다.

곱고 단정한 모래들이 아래쪽으로 흘러내린다.

‘어떻게 꺼내라는 거지?’

지금 인밴토리에 넣어 둔 열쇠는 두 개.

이것까지 하면 셋이다.

그러나.

시계 손잡이에 살살 힘을 줘도 벌레 모형은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예 모래시계 통째로 인벤토리에 집어넣으려 했지만 터무니없게도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뭐야… 이게 유산이라도 된다는 이야기야?’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다.

하지만 회귀하면서 모아야 하는 소중한 열쇠를 그냥 밖으로 들고 다닐 생각은 없었다.

‘다른 벌레 모형은 부서지지 않고 단단했었지.’

힘을 좀 준다고 열쇠가 부서지진 않을 거다.

손잡이를 제외한 모래시계의 철조 부분을 잡고 비틀었다.

철조 부분이 간단히 구부러지고.

- 파삭.

유리 부분이 속절없이 부서지며 모래가 쏟아지는 순간이었다.

426호후 눈먼 달,지는 꽃 (3)

人스

모래가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며 내 위에 덮어 씌워졌다.

움직이는 속도는 알갱이 하나하나가 마치 순간이동 하는 것처럼 빨랐다.

피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동화율이 떨어집니다…….]

[48.59%…….]

‘이게 뭐지……?’

달라붙은 모래가 꿈을 꾼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내게 씌워지며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묘한 기분이었다.

‘무슨… 마법인가?’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혹시 뭔가 해로운 건 아닐까?

저주 같은 게 씌워진 건 아닐까. 하지만 실제로 뭐가 달라진 건지

알 수 없었다.

‘상태창.’

스탯과 스킬은 전부 그대로.

기분도 그대로였지만.

모래는 분명 흡수된 상태다.

아무리 몸을 움직이고 털어 봐도 모래는 한 톨도 바닥에 떨어지지 않았다.

혹시 싶어 모래시계를 인벤토리에 넣어 보았다.

모래가 사라진 시계는 인벤토리에 가볍게 들어갔다.

‘모래가… 유산이군.’

인벤토리에 들어가지 않은 이유.

유산은 바로 모래였던 거다.

무슨 역할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해로운 건 아니겠지.

부서진 모래시계를 인밴토리에서 다시 빼서 제자리에 놓았다.

그 순간.

익숙한 이미지가 문득 떠올랐다.

열쇠가 빠지고,유리가 부서져서 모래가 흘러나간 시계는 〈시간에 갇힌 천재 대마법사〉표지에 있는 녀석과 완전히 똑같았다.

애슈턴은 이 모래시계를 부수고 열쇠를 가져가는 것까지 내다보고

있었던 셈이다.

‘우연일 리는 없지.’

에라스트 비밀 통로의 지도까지도 그자의 안배.

애초에〈유물〉을 레드 플레이크에 전승한 게 그자다.

이 시계도 당연히 그가 뿌려 놓은 조각 가운데 하나.

‘일단 믿고 움직여 보자.’

애슈턴이 뿌려 놓은 조각을 따라 움직여서 지금까지 해가 된 적은 없었으니까.

빠져나가려다, 주위를 둘러봤다.

항상 루비아가 책을 읽던 이곳은

보는 것만으로 따스한 기분이 들게 만든다.

눈에 익은 책들을 바라보며.

그 책들을 모두 읽었을 도서관의 주인에게 가만히 작별을 고했다.

- 팟!

바깥으로 나와 동굴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문득 생각나는 게 있다.

‘인간… 이지.’

묶어 둔 이사벨은 인간이다.

‘잊어버릴 뻔했군.’

먹을 걸 줘야 한다.

목을 축일 건 있어야 한다.

후작이 을 때까지 적어도 사홀.

사흘이면 인간이 굶어서 죽지는 않아도… 상당히 괴로워질 만한 시간이다.

그 꼴이 볼만하겠지.

후작이 죽어가는 이사벨을 보면 나와 협조하려는 생각이 드는 데 상당한 악영향을 미치게 될 거다.

‘미리 준비해 놔야겠군.’

아직 성 근처.

주변에 농장도 민가도 많다.

식량 좀 가져오는 건 쉬운 일.

하지만 에라스트 근처의 민가에서 약탈하는 건 피하고 싶었다.

- 팟!

빠르게 북쪽으로 올라갔다.

계승 아이템인 갑옷.

유물인 모래시계.

그 둘은 어쩔 수 없었다고 해도, 이제부터는 뭔가 하나 가져오고, 흔적을 남겨도 루비아의 통치권이 아닌 도시에서 하고 싶었다.

그녀에게 어떤 식으로든 피해를 주고 싶지 않으니까.

‘흐음……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다시 이곳을 지나게 된다.

황제 암살이 일어난 곳.

‘뭔가 찜찜하군……

피해서 지나갈 수 없을 만큼 도로 전체가 시체로 가득한 구간.

그때.

푸른 하늘에 떠 있는 작은 점이 보였다.

‘저게 뭐지?’

점은 위젯 동전만큼 커진 다음, 다시 세이론처럼,그리고 얼마 후 커다란 밥그릇처럼 보였다.

‘비행… 정……?’

엠버메어에서나 봤던 녀석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제국에 저런 게 있었다는 거지?’

기묘한 위화감.

‘언제부터 저런 게……

에라스트 근처 상공에 태연하게 떠돌아다녔다는 거지.

선명한 비행정의 모습에서 섬뜩한 공포가 느껴졌다.

- 달그락.

[죽은 척하기 Lv.l을…….]

[종족: 해골]

[특성이 반영되었습니다.]

[죽은 척이 5배의 효과를…….]

바닥에 쓰러진 건.

직감에 가까웠다.

다음 순간.

- 쌔애애앵!

- 쿵.

날카롭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

무언가 바닥에 떨어지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먼지가 일어났다.

움푹 파인 땅 너머.

허공에서 뭐가 떨어졌는지 볼 수 있었다.

비행정에서 떨어진 존재는 로랑스 타르티에.

제국제일검이다.

'역시"' 소녀가“' 이"니이2.’

벌써부터 산 정상에서 본 모습과

똑같은 복장.

건조한 분위기.

이 시점에서 이미 제국제일검은 빙의된 상태였다는 걸까.

어마어마한 높이에서 완충 장치도 없이 뛰어내린 그는,무릎에 묻은 먼지 한 톨 털지 않고 암살 현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벌써 여기를 찾아온다고?’

저자가 조금이라도 더 빨리 여기 왔다면 어땠을지 생각하니 머리가 아찔해졌다.

- 사박.

평범한 발걸음 소리마저 살얼음이 깨지는 소리처럼 들린다.

- 사박. 사박…….

그가 시체의 도로를 거닌다.

발걸음은 내 쪽에 가까워졌다가, 다시 멀어지길 반복한다.

‘뒤지고 있어.’

소리로 알 수 있었다.

찾는 건 황제도.

행렬에 동행한 마법사도 아닐 터.

뻔하다.

저번 세계선에서 놓친 네크로멘서 기스-제-라이가 목표.

인벤토리에 있는 그녀의 시체가 아찔하게 느껴졌다.

가자기 소리가 멈췄다.

‘뭘 하는 거지?’

아주,천천히.

쓰러진 채로 고개를 돌려 녀석을 바라봤다.

그때.

공작이 고개를 돌려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이런 젠장……!’

들킨 건가?

하필 지금 움직여서.

아니,도대체 언제부터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지?

모든 게 끝나는 기분이었다.

상대가 얼마나 강한지는 진저리 날 정도로 잘 알고 있다.

격전지가 아닌 바깥에서 떨어져 쓰러져 있는 내 존재는 분명 눈에 들어오겠지.

게다가 갑옷을 입고 있다.

이런 위치라면 평범하게 버려진 해골은 결코 아니고,네크로멘서의

언데드 군단임이 분명해진다.

무엇보다.

‘저 녀석은……

죽은 척하는 스킬 따위는 곧바로 간파할 거다.

세계 바깥의 존재.

엠버를 침공하며 해안에서 보여 준 능력이라면 모르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

여유가 사라진다.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한번 싸워 볼까?

공작은 그 작던 발소리조차 내지 않고 점점 더 내 쪽으로 다가온다.

도망갈 수 있을까.

‘망할……

바로 자살할까.

‘1만 배’를 여는 열쇠도 이미 하나 획득했고.

자살하는 쪽으로 빠르게 마음이 기울고 있었지만.

다가오는 녀석의 눈빛이.

태도가 어쩐지 적대적이지 않다.

그게 나를 망설이게 만들었다.

눈앞의 ‘공작’은 내 투구를 젖히고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아무런… 특징 없는 해골기사.

갑옷도 해골도 평범하다. 계속해서 관찰해도 시간낭비에 불과하다……. 그런가 보군.”

녀석이 쳐다보는 것은 허공.

쓰여 있는 무언가를 읽는 것처럼 느긋하게 중얼거리고.

一 철컥.

나를 땅바닥으로 내던지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제 아무 관심이 없어 보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더없이 다행이기는 하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모르는… 건가? 정말로?’

이제는 끝이라고,자살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녀석이 뭘 읽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째서 인가.

원인을 짐작할 수 없었다.

엠버의 해안에서는 저런 식으로 나를 읽지 않았던 것 같은데.

내 강함을 알아차리고.

나 같은 부하가 있는 네크로멘서 기스-제•■•라이를 경계했다.

뭔가 달라진 거라면.

‘혹시… 모래?’

시계에서 쏟아져서 몸에 덧씌어진 모래들이 생각난다.

외부의 존재가 보는 ‘푸른 창’을 교란시키는 건가.

제멋대로인 추측일 뿐이었지만, 지금 머리에 떠오르는 건 그것밖에 없었다.

“기스-제-라이… 이런 난장판을 벌여 놓고 도대체 어디 내뺀 거지. 정말 개판이군……

돌아선 녀석이 혼자 중얼거렸다.

‘역시 기억하고 있어.’

녀석도 지난 세계선을 알고 있다.

알면 알수록 섬뜩하다.

이런 상대와 싸워야 하는 건가.

저번 생에 나를 분명 봤으면서도 방금처럼 던져 버린 걸 보면 분명 뭔가 허점도 있다.

그러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기에 마음을 놓을 수도 없다.

무엇보다.

수색이 끝나지 않았다.

자칫 뻐마디 소리라도 냈다간.

수상함을 느끼고 돌아올 가능성이 충분하다.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있을 때.

- 히히히잉!

경비대가 타고 온 말이 언덕 위에 멈추며 높은 울음소리를 냈다.

잘 훈련된 경비대원들이 떨어지듯 말 위에서 내린다.

오기로 된 행렬이 전멸한 광경에 황망함을 금치 못하는 표정.

루비아가 보낸 자들일 터다.

공작은 시체들에 보내는 눈길보다 훨씬 무심하게 그들을 흘끗거린 뒤 다시 시체를 수색했다.

하마한 경비대원들은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공작에게 다가갔다.

‘죽일까?’

경비대를 전멸시키는 것 정도는 녀석에게 일도 아닐 거다.

제국 수뇌부 회의에서 반 이상을 즉석에서 학살한 존재니까.

가진 힘은 물론이고.

세간의 평판이나 후폭풍 따위에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모든 걸 엎을 수 있겠지.

‘그다음이 걱정인데.’

에라스트 경비대가 전멸한다면, 상황 파악을 위해 다음 경비대가 을 거고.

그러면 루비아까지 여기 오게 될

가눙성이 있다.

만에 하나.

저 녀석에게 눈앞에서 루비아가 살해당한다고 생각하면.

그걸 과연 내가 계속 누워 볼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 공작은 경비대를 전멸시킬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공포와 경악을 극복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걸어오는 경비대에게 녀석이 먼저 말을 걸었다.

“제국 공작,로랑스 타르티에다.

황제 시해 사건에 대해 조사 중이지. 방해하지 않는다면 근처에 있어도 상관없어.”

의외로 상식적인 이야기다.

“옛? 아… 예……! 예!”

눈앞에 벌어진 상황에 얼이 빠져 있던 경비대원들은 그저 연달아서 고개만 끄덕거릴 뿐이다.

다행스러운 진행이지만.

한 시간이 지나도록 공작은 계속 전장을 뒤질 뿐이었고.

- 꼬르륵.

경비대원 중 한 명의 배에서 울린 작은 소리가 정신을 일깨웠다.

'빨리 음식을 가져가야 하는데.’

이사벨이 걱정이다.

단련된 기사.

그것도 근위대 단장이니 하루나 이틀 정도는 버틸 수 있겠지만.

공작의 수색이 얼마나 지속될지 알 수 없다.

아무리 나를 ‘눈여겨볼 가치가 없는 평범한 해골’로 읽는다 해도 여기서 일어나 움직인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정신을 조금 차린 걸까.

경비병 한 명은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에라스트 방향으로 돌아갔다.

공작은 계속 시체를 뒤적거렸고, 나는 무력하게 누워서 죽은 척을 계속했다.

하루가 지난 뒤 추가로 십여 명의 경비대가 현장에 도착했다.

‘공작’은 그들을 전부 현장 바깥에 세워두고 시체를 모조리 점검한 뒤 얼굴을 구겼다.

“어디로 갔는지 전혀 모르겠군. 여기서 증발해 버린 건가? 흔적이 뭐가 이따위지……

경비대에게는 들리지 않는 작은

투덜거림이 내게는 똑똑히 들렸고.

로랑스 공작의 탈을 쓴 무언가는 웃음도 발소리도 남기지 않고 홀연히 사라졌다.

정말 지나간 건가.

시선까지 정면으로 마주치고도, 아무 일이 없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안 들킨 게 맞겠지……?’

조금 전까지 그가 여기 있었다는 사실마저 이상하게 느껴졌다.

시체들은 원래 헤집어져 있어서 의미가 없고.

높은 비행선에서 뛰어내려 착지한 자국 정도가 유일한 증거다.

녀석의 구겨진 표정을 생각했다.

‘원하는 걸 찾지 못했어.’

현장에서 사라진 지도 한참 뒤.

완전히 멀어졌다는 확신이 들고 나서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빨리 벗어나자.’

경비병들은 공작이 사라진 뒤에도 현장에 감히 접근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런 그들을 일별하며 빠져나왔다.

시간을 더 지체하기도 곤란해서 아예 황제가 죽은 현장에서 식수와

식량을 챙겼다.

가짜든 진짜든.

엄연한 황제 암살이다.

근위대는 전멸했고.

아쥬라의 마법사들까지 사망.

‘영주가 곤란해지겠군. 그래도…… 지금 벌어진 이 모든 상황에 대한

기억이 희미하게라도 있다면.

루비아는 잘 대처할 거다.

‘시나리오 보정도 있고.’

챈들러 가문이 보좌진으로 편입. 뛰어난 인재가 도시 방문하고. 통치 능력치가 30% 상승한다.

공작이 암약하는 이상 루비아에게 접촉하지 않는 게 오히려 최선의 선택임을 새기며 동굴로 돌아왔다.

- 좌륵!

묶여 있던 이사벨의 사슬을 바로 해제했다.

의외로 온몸에 멍은 없었다.

사슬이 움직일수록 조여드는 걸 알고 얌전히 있는 것 같았다.

사슬의 힘과 자신을 비교해 보고 내린 판단이겠지.

깨끗한 물부터 건넸다.

이사벨은 놀라지도 않고 꿀꺽꿀꺽 물을 삼키며 나를 바라봤다.

“나는 레안드로 후작의 부탁으로 널 구하러 왔다. 클레멘스 2세는 이미 죽었거든.”

식량 주머니를 던졌다.

“그분을 함부로 이야기하지 마라. 고결한 기사의 임무에서 누군가를 빼돌리실 분이 아니다. 그리고… 대체 폐하가 습격당했다는 게 무슨 소리지?”

의외로 낮은 텐션이 흥미로웠다.

‘지친 건가.’

“엠버의 네크로멘서가 클레멘스를

습격했다.”

“지금 확인……

“곤란한데.”

일어서려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주저앉혔다.

오래 묶여 있어 힘이 빠진 것처럼 그녀는 주저앉았다.

“이 참람한 언데드가……

이사벨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식량 포대를 슥 보더니 잡히는 대로 비스킷,말린 과일,어포,소시지를 꺼내들었다.

- 풍!

그리고 병조림까지 따서 설탕물과 안에 든 과일을 통째로 꿀꺽꿀꺽 마시고 있었다.

“독 같은 건 걱정하지 않나?”

너무 잘 먹어서인지 무심코 보다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이사벨은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뭔가 입에 더 넣으며 천천히 숨을 몰아쉬고 대답했다.

“죽일 거라면 얼마든 죽일 기회가 있었는데 왜 독을 쓰겠어?”

자리에 앉아 팔다리까지 주무른

그녀는 식량 주머니를 거꾸로 들어 탈탈 털며 다가왔다.

“잘 먹었는데,뭐 더 없어?”

그렇게 말한 이사벨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소매에서 털듯 만년필을 꺼내 눈앞으로 찔러 넣었다.

一 번쩍!

만년필 뚜껑이 날아가며 안쪽에서 하얀 빛이 솟구쳤다.

‘검기?’

달아오른 하얀 빛이 아슬아슬하게 머리를 스쳐갔고,

- 콰광!

머리에 스치자 곧바로 폭발했다.

“어이쿠.”

하지만 머리 바로 옆에서 폭발이 일어나더라도 자동적으로 발동되는 호신강기를 뚫을 위력은 아니었다.

별다른 타격을 받지 않은 모습에 이사벨은 혼들린 것 같았다.

“재있는 면도 있군……

이틀 동안 묶여 있었는데 대단한

근성이다.

하지만 머리가 복잡했고.

별로 이사벨과 놀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궁금한 건 후작에게 물어봐라.”

녀석이 설명해 줄 수 있을지.

아니,그전에.

내가 후작에게 제대로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 퍽!

기절시킨 그녀를 안에 묶어 던져

놓고 입구에서 후작을 기다렸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 저벅.

동굴 안쪽으로 익숙한 발걸음이 들려왔다.

자신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는다.

규칙적인 발소리.

‘오는 건가……

뼈가 죄어드는 기분이었던 예전과 다르게.

그 남자가 가까워지는 건.

어쩐지 머릿속이 청량해질 만큼 반가운 기분이었다.

427호후 눈먼 달,지는 꽃 (4)

녀석은 몇 번이고 나를 죽였다.

그럼에도 묘하게 기분이 상쾌하고 반가워지는 기분이다.

결과적으로 녀석에게서 얻은 게 많기 때문일까?

아니면 세계를 되풀이해도 변하지 않는 그의 존재가 어떤 기준점처럼 느껴져서일까.

‘아니… 그건 내 사정이고.’

지금 녀석의 기분은 엉망이겠지.

황제 시해 사건이 일어났고.

범인의 행방은 묘연하며.

무엇보다.

이사벨 시몬느가 현장에서 시체도 없이 사라졌다.

‘싸움부터 걸 텐데.’

지금 이 순간만 보면 분명히 내가 더 강하지만,정말 완벽한 승리를 장담할 수 있을까?

싸우는 중에 뭐가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변수는 녀석의 재능.

제국제일검인 ‘소녀 공작’조차, 후작과의 첫 싸움 이후 철저하게

비무를 피했다.

‘완전히 같은 편이 될 때까지는 감당할 수 있는 범위에 두고 싶다, 라고 했다던가……

유령 내사과장이 전해 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런 수준의 재능이다.

마지막으로 녀석과 싸웠을 때도, 처음에는 압도당하다 나중에 점점 강해지는 녀석을 알 수 있었다.

기스-제-라이가 마지막에 뒤에서 끼어들지 않았더라면 이기는 쪽이 과연 나였을까?

‘이사벨을 빨리 풀어 줘야겠어.’

그쪽이 현명한 판단이다.

어차피 녀석과 본격적으로 싸울 생각도 없고.

멀쩡한 애인을 만난다면 성격이 좀 부드러워지겠지.

- 좌르륵!

〈가시 면류관〉을 빨리 풀어 주고, 몸이 굳었던 탓에 잔뜩 썩어 가는 표정의 이사벨에게 말했다.

“널 찾는 사람이 을 거다. 갑옷을 입고 나가라.”

좋아,그 정도면 되겠지.

“무슨 소리를……!”

“레안드로 폰 바티엔느가 입구에 이미 도착했다.”

그 말의 효과는 굉장했다.

。끄윽……

이사벨은 끙끙거리며 이를 악물고 일어났다.

갑옷을 걸치려고 했지만, 왼팔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오른쪽 팔로 몇 번 주물러 감각을 회복하더니 다리를 질질 끌면서도 갑옷을 걸쳤다.

이리저리 몸을 굽혀 풀 플레이트를 걸치는 작업이 고통스러운지,몇 번의

심호흡이 이어진다.

하지만 돕는답시고 끼어들면 결코 안 될 것 같다.

이건 중요한 의식이다.

그녀는 쉬지도,머뭇거리지 않고 꼬박 하루 동안 굳어 있던 몸으로 갑옷을 입는다.

착갑을 완료한 이사벨 시몬느가 어딘가 부끄러워하며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묘하게 굴욕적인 표정으로 몇 초간 서 있던 그녀가 급하다고 생각했는지 결국 입을 열었다.

“혹시… 칼을… 줄 수 있나?”

“칼?”

“나는… 무장조차 없이 그분을 필 수는 없다.”

왜 저렇게 수치스러운 표정으로 있는지 이해가 될 것 같았다.

“그러면 말 좀 잘 해달라고.”

“…그분에게 거짓을 말할 수는… 없다.”

얼굴을 굳히고 고개를 저었지만, 왠지 몰아붙이고 싶지는 않은 녀석 이었다.

- 우우웅!

인벤토리에서 곧장 칼 한 자루를 꺼내어 친절히 손에 쥐여 줬다.

칼을 쥔 이사벨은 감사를 표하고 억지로 자세를 잡고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절뚝거리거나 바닥에 끌지 않는 걸음걸이를 무리하게 지켜낸다.

동굴 안에서 그녀의 걸음 소리가 울려 퍼지자,바깥에서 들리던 걸음 소리가 멈췄다.

'‘흐.,,

지금쯤 감동의 재회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

‘잘 해봐라.’

시간이 지났다.

할 말이 많은지,아니면 감정을 추스르고 있기라도 한 건지.

생각보다 후작이 안으로 들어오는 데 시간이 제법 걸린다.

하긴.

서로에게 물어볼 게 상당히 많은 상황이긴 하다.

‘설마 이사벨만 보고 안 오는 건 아니겠지?’

물론 후작이 내 존재를 느끼고서 여기서 돌아갈 리는 없다.

그래도 좀 너무 오래 걸리는데,

싶을 무렵 후작이 들어왔다.

오랜만에 만난 녀석은 생각보다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서늘하고 건조한 시선이 내 쪽을 향하지만.

완전히 시들고 죽은 눈빛이었던 예전보다는, 예전의 분위기보다는 훨씬 더 낫다.

이사벨을 살려 뒀던 것.

그리고 사슬을 풀어 줬던 건 역시 현명한 선택 같다.

“할 말이 있을 텐데.”

레안드로 폰 바티엔느.

“한번 들어 보지.”

녀석은 지금까지 만났던 때 중에 가장 호의적인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일단……

어디부터 이야기할까.

세계선의 개변?

‘뭘 어떻게 설명하지.’

일리엔의 유물도 아직 후작에게 주지 않은 상태.

소녀 공작과 유령,마왕들에 대해 설명하기도 애매한 시점이다.

공작도 이미 밖의 존재에게 몸이 빙의된 상태고.

레안드로와 이사벨의 증표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철사를 꼬아 만들어 보여 줬을 때 후작의 반응은 최악이었다.

이사벨에게 알린 증표를 감히 너 따위가 나에게 보일 게 아니라며, 슬쩍 다가와 나를 죽이려고 했다.

‘뭐라고 하지?’

막상 녀석을 보자 제대로 결론이 나오지 않는다.

후작이 오기 전 다양한 이야기를 떠올렸지만, 정작 녀석을 마주하자 어떤 것도 말을 안 하는 게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미래를 잔뜩 풀어놨을 때

녀석의 반응은 좋지 않았으니까.

“ o..«

거3".•

그가 손목을 돌리며 말했다.

“편하게 이야기해라. 이 세계가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사실은 나도 느끼고 있으니까.”

그가 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무슨 소리지……?”

혹시.

이 녀석도 꿈 같은 걸 꾸는 건가?

‘접촉의 빈도와 연관된 건가•…"

후작과 계속해서 얽혀 있긴 했다.

나와 자주 접촉한 자들의 의식에

어떤 항구적인 영향력을 갖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동안 말이 없던 후작은, 천천히 칼을 횡으로 그었다.

3미터의 반원이 허공에 서늘하게 그려졌다.

“이 칼이 닿는 영역… 이 밖으로 무언가 계속 겹쳐지고,비틀려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냥,직감이다.”

세계가 비틀리고 있다는 걸.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스스로 알아차린다고?

레안드로 폰 바티엔느.

정말로 그런 게 가능한 건가?

“자기소개라도 해 봐라.”

그렇다면 의외로 간단히 이야기가 통할지도 모른다.

“나는……

말을 꺼내 보려는 순간.

- 피릭!

마치 그 찰나를 노렸다는 것처럼 후작이 칼을 휘둘렀다.

칼날에 맺혔던 푸른 검기가 왼쪽

다리를 스치고 지나가 동굴 바닥을 부쉈다. 바닥에 소리도 없이 검고 깊은 흔적이 남았다.

‘자기소개를 하라면서 이건 대체 뭐 하는 짓이지?’

아슬아슬하게 피하자 레안드로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린다.

“역시 빠르군. 피하라고 공격한 건 아니었는데.”

뱉어지려는 욕설을 삼켰다.

녀석과의 대화가 역시 평화적으로 진행될 리가 없다.

피하라고 공격한 게 아니었다는 사실은 당한 쪽에서 충분히 안다.

이건 아무래도 다리 하나 정도는 가루로 만들어도 상관없을 것 같은 강한 공격이었으니까.

계속 봐도 적응이 전혀 안 되는 놈이다.

“너는 언데드 군단의 일부겠지.”

후작은 당연히 황제 시해 현장을 보고 왔을 거다.

“그런데,왜 인간을 살려서 여기 데려온 거냐? 대답해라.”

그는 내 의도를 궁금해하고 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호기심에 찬 눈빛을 보니 이대로 그의 의문을 유지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글쎄다. 궁금한 게 그것뿐만이 아닐 텐데?”

자주 봐서 그런가.

후작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왠지 알 것 같다.

이게 정보량의 차이라는 거겠지.

그는 나에 대해 무척 궁금해하고, 정보를 캐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고문을 할 수도,이기기도 쉽지 않은 상대라고 판단해서 녀석 나름대로 대화를 시도하고 있…….

- 쌔앵!

칼이 날아왔다.

후작은 직접 움직였고,그와 나 사이의 간격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오른쪽으로 뛰어서 곧바로 공격을 피했지만,그는 몸을 틀어 방향과 속도를 정확히 내게 맞췄다.

- 콰과과과과과광!

칼이 일곱 번 교차하며 동굴 안에 폭음을 만들었다.

거의 한 번의 충돌처럼 들렸지만, 그사이 녀석과 나는 원을 세 번 그리며 동굴 안쪽까지 깊이 들어온 상태였다.

‘이런 미친놈을 봤나……r

- 콰앙!

코앞에서 엄청난 속도로 머리에 칼을 꽂으려는 후작을 한 번 크게 쳐냈다.

후작은 가볍게 숨을 뱉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의 눈빛에 어린 호기심이 더욱

강해지고 있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하군……. 대체 어디서 칼을 배운 거지?”

거의 질감이 느껴질 만큼 강렬한 눈빛이었다.

“부정한 언데드가 이런… 검기를 지니고 있다니……

반드시 강함만을 이야기하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

문득 내 검술이 대부분 녀석에게 흡수한 거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칼과 칼의 대결이니만큼 확실히 그게 느껴지겠지.

부딪치면서 후작 본인이 알아채지

못하면 이상하다.

그러니 어디서 칼을 배웠느냐는 질문에 사실대로 답하면 안 된다.

‘역시… 아무 말도 안 해야겠군.’

거짓말을 해 봐야 눈치챌 거고.

황실의 비역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비브리오가 섬기는 마왕 보티스, 소녀 공작의 이야기를 털어놔 봐야 후작을 더 자극할 뿐이다.

악의 무리를 정리하겠다고 제국 수도에서 날될지도 모르지.

그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다.

“레안드로 폰 바티엔느……. 그냥 나를 믿어 봐라! 나에게는 기이한

심안과 직감이 있어! 그때그때 생기는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지! 그래서 내가 이렇게 강해진 거다!”

- 과광! 과광! 과과광!

후작의 칼이 오른쪽 손목을 치고, 그쪽으로 돌아 목을 치고,이어서 위에서 머리를 내려쳤다.

두 칼이 부딪친 자리에 잔영처럼 푸른 불꽃이 허공에 일렁거렸다.

내 칼의 검기를 보고 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기묘하군……

칼이 부딪칠 때마다 기의 폭발에 동굴 전체가 혼들리며 바닥이 움푹 꺼지고 종유석이 떨어졌다.

후작의 공격은 퇴로를 허용하지 않고 고리처럼 단단히 조여들었다.

하지만 어차피 감당할 수 없는 힘도 아니었고, 물러날 생각도 없었다.

마지막 싸음 이후.

기스-제-라이의 흡수 결계 위에서 이미 녀석을 20배에 가까운 효율로 철저하게 빨아들였다.

힘의 용량으로 뭉개는 게 아니라, 순수한 검술 대결이라고 해도 밀릴 이유가 없었다.

“이것 보},레안드로. 나를 죽이고 싶은가?”

이미 여러 번 죽였지만.

이번에는 못 할 거다.

“네가 제국을,인간을 구하려면 나와 함께 움직여야 해! 궁금한 건, 우리가 동료가 되고 나면 천천히 말해 주도록 하지……

물론,녀석을 써먹을 만큼 철저히 써먹고 난 다음에 말이다.

그 말을 꺼낸 순간.

후작의 칼이 갑자기 다섯 가닥의 잔상을 만들며 한 번에 내 몸으로

뻗어 왔다.

묘하게 어긋나는 각도로 날아오는 빛의 점.

최대는 열두 갈래였던가.

비기,섬예적총.

베고,막아도 베고,피해도 베고, 다시 몰아붙여 베기 위한 공격.

〈벤다〉라고 그어지는 곡선은 사실 모두 수없는 찌르기에 갈음하기에, 하나의 잔상이 수십 자루의 창과 칼을 날릴 수 있는 위력이다.

하지만,여기서는.

‘받아칠 수 있다……r

- 쾅!

음속을 초월하는 빛의 산란.

다섯 번 들릴 칼소리가 한 번으로 합쳐서 동굴 속에 울리고 난 뒤에, 후작은 칼을 아래로 내리고 나를 바라봤다.

분명히 내가 더 강한데.

압박감을 느끼는 건 녀석보다도 오히려 내 쪽이었다.

기세에서 밀리고 있다.

‘이 녀석… 죽는다는 생각은 안 하는 건가?’

아니면 정말 오래 살 생각이라곤

조금도 없는 녀석일지도 모르지.

이 찰나刻邪에서.

녀석은 분명히 나보다 강렬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확실히,사정이 궁금하긴 하군.”

후작은 천천히 동굴 바깥쪽으로 걸어 나갔고,나도 무심코 녀석을 따라서 움직였다.

이사벨은 이미 멀리 떠났는지,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까맣고 뭉게뭉게 가라앉은 하늘이 천천히 눈덩이를 휘날리고 있었다.

후작이 작게 입김을 불었다.

뜨거운 피가 흐르는,온도가 있는

녀석임은 그래도 틀림없는지.

내려오던 작은 눈송이가 입김에 휘말려 녹아 사라진다.

“기분 나쁘군.”

한숨을 쉰 녀석이 투덜거렸다.

“뭐가?”

“너처럼 수상한 것과 함께 눈을

맞는다니 몹시 불쾌해.”

어쩌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첫눈도 아닐 텐데.

“동료가 되고 나면 모든 이야기를 설명해 준다고 했나.”

“물론이야.”

나는 곧바로 긍정했다.

한동안 고민하던 것 같던 후작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좋아,그 전에 한 가지 조건을 걸겠다.”

428호후 눈먼 달,지는 꽃 (5)

“조건?”

“널 벨 때까지만 함께한다.”

당황스러운 감정을 억누르고 머리를 굴렸다.

잘되어 간다고 생각했는데.

벨 수 없는 마물은 내가 처음이고, 베는 순간 나의 의미는 사라진다는 이야기.

언제 어떻게 공격할지 모른다.

동료가 아니라 어려운 사냥감을 옆에 달고 다닌다는 느낌인 건가.

‘이거 참……

“받아들이지.”

안 받아들여도 어차피 공격할 건 똑같겠지.

‘지금은 내가 훨씬 강하니까……

후작 놈이 너무 강해졌다 싶으면 내 쪽에서 동료를 그만두고 멀리 도망가 버리면 된다.

아직은 먼 미래의 일이다.

아니라도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래서, 내게 뭘 원하는 거지?”

후작이 이런 적극적인 태도라니.

뭘 원하는지 질문도 할 줄 아는 녀석이라는 사실이 놀람다.

황제와 근위대가 몰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미유도 이사벨도 살아 있는 세계선의 그는 예전보다 훨씬 수용적이다.

“동방이 다.”

오랜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이다.

회귀하기 전에도 생각했고.

황제 시해 현장을 뒤지는 공작을 피해서 죽은 척을 하면서도 계속 생각했다.

혈안이 되어 기스-제-라이를 찾던

〈공작〉의 모습.

녀석은 지금부터 제국을 이 잡듯 뒤지겠지.

무언가 수상한 걸 찾아서.

그런 다음에는 엠버로,연합으로 수색이 점차 넓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동방이라면.

한동안 눈에 띄지 않게 행동할 수 있지 않을까.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가야 한다.

그리고.

강해져야 한다.

하얀 후드의 말을 떠을렸다.

〈이미 동방은 본격적으로 침식이 일어나고 있다. 요괴들이 스스로 역전의 천요주음千妖晝飮을 행하고, 이제 만마광식萬魔狂食의 조짐마저 보이고 있지.〉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여기보다도 빨리 침식이 진행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곳에 본격적으로 마계의 침식이 일어나고 있다면.

‘먹을 만한 녀석들도 많겠지.’

홉수할수록 강해진다.

기스-제-라이와 지하에서 만났던 자들을 떠올렸다.

그 정도 수준이라면 두셋 정도만 홉수해도 유의미하게 강해진다.

인간에 의해 대부분 털리고 숨은 이 대륙과는 많이 다를 거다.

마지막으로.

‘열쇠를 찾고……

유산을 찾는다.

‘1만 배라……

캐빈 애슈턴이 인도하는 길이다.

세계선을 바꿀 가능성.

바깥의 존재들에 대항할 유력한

가능성으로 보인다.

하나하나가 절실한 일들.

동방행 그 자체는 망설일 여지는 없으나.

새로운 장소로 가려면,조력자는 언제나 필요하다.

레안드로 폰 바티엔느.

그는 나와 동방으로 건너가기에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

충분히 강하면서도.

세계선에서 영원하게 지워진다고 크게 괴로울 것까지는 없는 것이 바로 이 녀석.

섭외가 가장 큰 문제지만,다행히

나에게 호기심을 느낀 덕에 한동안 아슬아슬하게나마 같이 옆에 있어 줄 것 같다.

“으음……

후작의 눈에 맺힌 호기심이 점점 단단해진다.

“…가 보려고 했지.”

“정말인가?”

“동방에는 기괴한 마물이 많다고 들었으니까. 언젠가 한 번은 가고 싶었다.”

마물이라면 모두 없애고 싶어 하는 녀석이고.

나와 함께하는 이유도 나를 베기

위해서인 녀석이니까 이해는 된다.

‘기분은 별로지만.’

“하지만 가는 법은 알고 있나?”

“물론.”

조금 득의양양한 기분이다.

기스-제-라이조차 갈 수 없었던 장소.

그녀는 별빛청여우와 함께 석판을 연구해서 결국 단서를 찾아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섬’으로서의 가까운 동방 말고, ‘진짜’까지 가는 방법도 알아.”

레안드로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내게 베이지 않고 제국을 떠날 수 있을지부터 생각하는 건 어떠냐?”

이런 걸 농담이라고 하는 건지.

농담이 아니면 더 곤란한데.

“하지만 그 전에… 아만에 가자. 확인할 정보가 있어.”

후작은 나를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달리아크의 존재도 아는 건가……. 그런 건 알아서 해라. 나는 볼일이 있어서.”

“볼일이라고?”

“신변 정리.”

‘공작이 수상하게 여기지 않을까.’

레안드로 폰 바티엔느가 구태여 신변을 정리하는 건 충분히 눈에 될 만한 요소.

눈에 불을 켜고 뭔가 잘못된 점을 찾고 있을 공작의 첫 번째 타깃이 될 수도 있다.

‘뭐라고 하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이봐! 나 같은 마물이 여기저기 혼자 돌아다녀도 괜찮겠어? 검주를 이길 만한 마물이다. 제국을 마구 뒤집어 놓을 수도 있는데. 옆에서 제대로 지키고 있어야지.”

녀석이 한쪽 입꼬리를 위로 살짝 끌어올렸다.

“지금 본인의 잠적이 눈에 될까 봐 걱정하는 거냐.”

어떻게 알았지?

의외로 남의 감정도 잘 읽어내는 녀석이었다.

“본인은……

“푸른 사자 기사단 총단장이다. 말없이 그냥 사라지는 편이 훨씬 더 눈에 띄지. 지금까지 공표하지 않고 비밀리에 활동했던 일을 이어 붙이면 된다.”

잠적 기간 동안.

악명 높은 마물을 토벌하는 식으로 위장한다는 이야기였다.

‘뭐… 따져 보면 거짓말은 아닌가.’

후작은 날 쫓아오는 거고.

지금 제국에 나만큼 강한 마물도 없겠지.

“만날 장소를 정해서 기사단으로 편지를 보내라. 신변을 정리하는 데 닷새는 걸릴 테니까……. 그 이후에 보내 놓도록.”

그는 돌아서 걸어갔다.

- 히히힝!

기다리는 미유에 올라탄 뒤에는 나를 한 번 쳐다보지도 않고 말을 몰았다.

힘차게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괜히 불안하군.’

쓸데없이 공작이나 안 파헤쳤으면 좋겠는데.

공작의 변화를 우선순위로 두고 추적한다면 레안드로 후작이라고 살해당하지 않을 리가 없다.

조심하라고 할 걸 그랬나?

아니,그러면 절대로 역효과다.

‘뭘 알려 줘서 잘된 적이 없어.’ 놈도 나름대로 알 건 다 알 거다. 애초에 뭔가 이상한 걸 눈치채고 있지 않다면 이 정도로 협조적으로 나오지 않았겠지.

싸박싸박 눈 내리는 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쏟아지는 새하얀 눈은 이 세계를 깨끗이 지워 버리려는 것 같다.

하얗게 덮이는 세상 위에 후작과 미유가 남기고 간 발자국만이 오직 뚜렷했다.

‘피곤해졌군.’

눈이 내리면.

흔적을 지우기가 더 힘들어진다.

일단 떠나긴 했지만.

〈공작>이 언제 이 근처로 다시 돌아을지 모른다.

‘나를 알아보지 못하긴 했지만……

원리를 알지 못하는 힘.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그런 힘에 기댈 수는 없다.

[은신 스킬을 사용합니다.]

[은신 능력이 30% 상승합니다.]

스킬 시전에 더해.

조금이라도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천천히 도로 바깥으로만 움직였다.

나무 아래 숨고,무성한 풀 사이 숨으며 흔적을 신경 써서 하나하나 지워 가며 움직였다.

땅이 아닌 돌을 밟고 움직였고, 바람에 맞서 걷지 않았다.

물이 흐르는 곳은 아래로 들어가 걸었다.

최대한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 이리저리 방향이 꼬여, 아만까지 도착하는 데에 생각보다 훨씬 더 시간이 걸렸다.

‘후작은 이미 수도겠지.’

공작과 싸워서 개죽음을 당하지 않기를 기원했다.

이제 곧 도착.

후작과 헤어진 날처럼,희뿌옇게 내리는 눈발 너머로 도시의 윤곽이 어림풋이 드러난다.

‘오랜만이군.’

정보상과 암살자들의 평화 지대인 달리아크가 저 중심에 있다.

풍경에 얼룩을 남기지 않고 계속 가까이 다가갔다.

- 스륵.

경비병들이 다른 인간을 검사한 다음,막 열린 성문을 자연스럽게 지나갔다.

‘결계……

점점 좁아지는 길을 지나고.

아이작이 알려 준 대로.

감정을 강제로 안정시키는 결계를 무력화한 채 달리아크에 도착했다.

뿌옇게 내리는 눈에도 지지 않고 커다란 햇불이 타올랐지만.

서른 채가 넘는 건물의 숙박자들, 그리고 근무하는 인간들 가운데서 내 존재를 알아차린 녀석은 아무도

없었다.

이 정도면 됐을까?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다.

아무리 고위 암살자들과 정보상의 구역이라고 해도.

세계선을 관찰할 수 있는〈공작〉 같은 존재와 견줄 수는 없다.

그러나.

공작의 눈에 될 위험을 감수하고도.

제국에 있을 때 반드시 알아내야 할 정보가 있다.

‘경매장……

그림자에 숨어 출입을 확인하고.

아무도 보지 않는 새벽을 틈타서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으음?”

정보를 사러 왔냐는 질문 대신, 작은 탄식이 들려온다.

“이거 참… 놀라게 만드시는군. 어디에도 포착되지 않고 이 장소에 도착한 손님은 정말 오랜만이군.”

“귀한 분이라는 건 알겠소이다. 정보를 사러 오신 거요? 물어볼 게 있다면 먼저 기본 요금인 5로티를 내시고……

나는 계속 침묵했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이 녀석도 레드 플레이크의 일원.

그런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태연히 정보를 팔고 있는 모습이, 머리로는 이해되면서도 감정적으로 껄끄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뭐요? 안 낼 거면 이만 바깥으로 나가 주시겠소?”

잠시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말했다.

“당신,기스-제-라이가 죽은 걸 알고 있긴 한가?”

“뭐… 라고?”

목소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의 동료였고.”

“캐빈 애슈턴의… 친구다.”

이건 그냥 되는 대로 뱉었지만.

〈정보 경매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펄럭!

한 번도 걷힌 적 없던 장막을 치우고 모습을 드러냈다.

기스-제-라이 이야기보다.

캐빈 애슈턴의 이야기가 녀석을 강렬하게 자극한 것 같았다.

새까만 장막 뒤에서 나타난 그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금발을 뾰족한 귀 뒤로 모아서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길고 매끈한 금발은 그 어디에도 잿빛이나 갈색,모래나 혹색 따윈 섞여 있지 않았다.

비현실적일 정도로 색채가 선명한 금발이었다.

가장 순수한 금 그 자체를 녹여도 저렇지 못할 것 같은 머리칼.

“엘프… 라니.”

남자는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는 마스크를 천천히 벗어서 오른손에 들었다.

눈가의 주름이 그가 얼마나 오랜 시간을 바라봐 왔는지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저 정도의 선명한 금색은 엘프의 왕족에게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게 문득 떠올랐다.

“하이엘프……

인간으로 따지면 6◦세 정도겠지만.

얼마나 오랜 세월을 살아왔는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래. 세계를 위해서 싸우다가 술에 담궈 마셔지거나 박제가 되어 전시된 종족이라네.”

고작 여덟밖에 안 되는 동료가 죽었는데 태평하게 있냐는 질책을 하는 것도 잠시 잊어버렸다.

“마스크는 음성 변조용인가?”

남자는 손을 들었다.

“호홉용이라네. 세상은 악취로 진득하고 인간은 점점 더 늘어만 나니까……

나를 담담하게 바라보던 엘프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물었다.

“일단,네크로멘서가 죽었다는 건 무슨 소린가. 빠져나갔을 텐데.”

원래라면 정보상인답게 대가 없이 어떤 정보도 홀리지 않을 텐데.

애슈턴의 이름을 듣고 흔들린 것 같았다.

기스-제-라이가 도망쳤다고 믿는 건 자연스럽다.

군단은 전멸했지만.

네크로멘서 본인의 시체는 거기서 사라졌으니까.

- 우우웅.

인벤토리를 열고,천천히 갈라진 그녀의 시체를 꺼냈다.

“별빛청여우가 입회한 황제암살… 집행인 기스-제-라이는 사망했다.”

“•••으음.”

시체를 확인하고 커다랗게 떠진 눈동자를 보며 말을 이었다.

“해당 정보,그리고……

“사건의 전말에 관한 정보와.”

- 入르

동방으로 향하는 항법 장치까지

추가로 꺼내들었다.

“〈진짜〉동방으로 가는 항로도를 추후 레드 플레이크에게 넘기지.”

“허……

경매장 상인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정체가… 아니,아닐세.”

그가 빠르게 말을 철회했다.

“더 이상 정보를 받으면 저울이 부서질 테니까. 좋아. 그 정도라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모두 지원해 주겠어. 원하는 걸 말해 보게.”

429호후 눈먼 달,지는 꽃 (6)

나는 뭘 원하는가.

“트로핀 여단에 레나라는 인간이 있는지 알고 싶다.”

믿고 싶은 것과 알고 싶은 것은 다르다.

- 따르륵!

검색 마법이라도 쓰는 듯 허공에 두루마리가 떠을라 팔락거린다.

“레나… 레나. 글쎄,그런 녀석은 없는데? 인간도 없고,인간이 아닌 녀석들 중에도 없다만.”

나는 진실을 직면한다.

아이작과 나냐우처럼.

레나가 검은 구슬에 빨려 들어가, 이 세계에서 사라졌다는 진실을.

어차피 모르는 척 따위는 불가능한 진실이다.

하지만 미미해서 끊어질 것 같은 희망을 가지고 계속 묻는다.

“트로핀 여단의 간부 목록을 전부 알고 싶다.”

“전부 다,라……

페르산,샤루니안,스티글리츠……. 들어 본 이름들을 포함해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낯선 이름들이 계속 튀어나온다.

그중에 레나의 이름은 없었다.

절망은 점점 짙어진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기분으로 묻는다.

“…샤루니안은 어디 있지?”

묘족 예언자는 누구보다 레나와 친밀한 사이였다.

트로핀 나냐우가 있을 때도 셋이 항상 함께 움직였다.

나냐우가 사라진 세계선에도 둘은 같은 제국 지부에서 활동했다.

혹시 사루니안에게 접근해 본다면 레나의 혼적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라피 산에 있네. 수도 남쪽이지.”

엘프는 지도를 내밀었다.

“여기 샤루니안의 사당이 있어.”

“수도 지부가 아니라,산이라고?”

당황스러운 이야기였다.

샤루니안이 언제부터 산 따위에 살고 있었단 말인가.

그가 고개를 저었다.

“제국 수도에 트로핀 여단의 지부 같은 건 없다네. 엠버와 연합에나 있지.”

“없… 다고?”

나냐우와 레나가 사라지면, 아예 그 정보 길드는 수도 지부마저도 사라진다는 건가.

기묘한 상관관계였다.

건넨 지도를 받아들고 대략적인 위치를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

“다음으로,상인 연합과 접촉해서 넥스몬드 선장을 나에게 소개시켜 주길 바란다.”

“넥스몬드 선장?”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방으로 향할 뛰어난 항해 팀이 필요하다.

아무나 섭외해 달라고 하기보다는 확실하게 실력을 아는 쪽이 낫다.

선장 넥스몬드.

자유의 영사.

교역 선박을 표방하지만 배 자체 무장은 과할 정도로 충실하고.

본인의 몸은 첨단의 강화 신체다.

내가 말한 이름에 경매상이 작게 탄성을 뱉었다.

“좋지. 최고의 선장이지. 위치도 딱 적당한데……. 연락하겠네. 닷새 뒤에

몬트벨 해안으로 가면 그를 만날 수 있을 걸세. 하지만 소개는 해 줘도 우리의 부하는 아니라……

“상관없다.”

나는 중간에 끼어들었다.

“넥스몬드라면 내가 잘 아니까.”

정확히는 어떻게 해야 넥스몬드가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지 안다.

그는 인벤토리에 눈이 뒤집힌다.

인벤토리에 넣어 놓은 물건들을 슬쩍 뽑는 모습을 보여 주면 놀라서 어쩔 줄 모를 터.

일단 만나면 끌어들이기는 쉽다.

“그날,몬트벨 해안으로 오라고

레안드로 폰 바티엔느에게 편지도

전해 줘.”

“쉬운 일일세.”

레드 플레이크의 경보 경매상이 담당하는 편지 전달이다.

이들이 하는 거라면 편지 전달은 확실하겠지.

혹시라도 편지가 중간에 사라지지 않을까,하는 걱정은 없다.

“그걸로 끝인가? 아직 내 쪽에서 훨씬 줄 게 많이 남았는데.”

이런 태도를 보이다니.

물론 부탁할 일은 많다.

“기스-제-라이에 대한 헛소문을

퍼트려 줬으면 좋겠군.”

공작의 시선을 분산시켜야 한다.

기스-제-라이가 아직 살아 있다고 생각되고.

헛소문이 퍼져서 헤멜수록 나는 동방에서 안전하게 활동하겠지.

“연합에 있다는 소문, 엠버메어에 있다는 소문,아직 제국 어딘가에 있다는 소문을 내 줘. 그녀가 아직 살아서 활동한다는 소문이라면… 뭐든 좋으니까.”

“곧바로 착수하겠네.”

이 정도면 됐을까.

눈앞의 상대는 아직까지도 거래가

끝났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평소에는… 깐깐한 녀석인데.’

지금 같은 기회에 최대한 많은 걸 물어봐야 한다.

가만히 기억을 되짚었다.

뭔가 떠오르는 게 있었다.

〈하지만,내 조각은 소명3命.〉

〈부름을 받아 몸을 바치는 거야. 지식을 관장하는 건 나 말고 다른 멤버지. 우리는 각자 가진 조각이 다르거든.〉

누구보다 오랜 세월을 살아왔던,

정보 경매장의 엘프라면.

“코드네임은?”

“정식 질문인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는 작게 한숨을 뱉고 자신을 소개했다.

“〈보이지 않는 비〉가 본인이다. 지식을 관장하는 조각이 맞지.”

그렇다면.

“캐빈 애슈턴을 만난 적이 있나?”

애슈턴은 계시를 내린다.

발신자 없는 편지로 전해지거나, 나뭇잎에 쓰인 글자들로.

거기까지가 별빛청여우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지식을 관장하는’ 눈앞의 녀석은 뭔가 다를지도 모른다.

엘프는 고개를 저었다.

“한 번도 없다.”

좀 실망스럽다.

지식 담당이라면서.

역설적으로,애슈턴을 만나 본 건 명예회원인 기스-제-라이뿐인가.

“그럼 애슈턴에 대해 너 혼자서만 아는 게 뭐지?”

“•••글쎄. 그런 게 있을까.”

잠시 침묵하던 ‘보이지 않는 비’는 허공에 떠 있는 두루마리를 손으로 잡았다.

자세히 보니 종이가 아니다.

놀랍게도 극도로 얇은 유리 같은 재질의 두루마리였다.

유리막은 남자가 아무렇게나 접고 구부리고,다시 펴도 주름 자국이 전혀 생기지 않았다.

뭘로 적혔는지 알 수 없는 작은 글자들이 빼곡이 떠다니고 있다.

‘으음……?’

“이게 내 몫의 유산이다. 무한에 가까운 그림과 정보를 저장하고,

극히 빠른 속도로 검색할 수 있는 두루마리지.”

“애슈턴의 계시는,보통 나뭇잎에 쓰인 글씨나 발신자 없는 편지로 전해지는데……

소명수녀에 따르면 동방에서 온 네크로멘서를 동료로 받아들이라는 지시도 그렇게 전해졌다.

“가끔,여기 직접 입력하지 않은 글자가 생겨날 때가 있다. 선대의 〈비〉는 두루마리에 저절로 생기는 글자는… 훗날 누군가가 애슈턴의 이름을 대며 찾아오면 합당한 대가를 받고 알려 주라고 했지.”

“어떤 게 쓰여 있었는데?”

정보의 무게를 재는 걸까.

한동안 멈칫한 '보이지 않는 비’가 말을 이었다.

“깨진 조각을 모두 모으면 저항할 수 없는 자에게 저항할 수 있다.”

‘깨진 조각……:

유산을 열 수 있다는 벌레 모형의 열쇠를 말하는 거겠지.

일곱 개의 조각.

레드 플레이크 멤버들과의 만남을 말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아니,그 둘을 구태여 떨어트려 놓고 생각할 필요도 없나.’

열쇠를 획득하는 것고}.

레드 플레이크 멤버들을 만나는 활동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그걸 모두 모으면.

분명 밖의 존재들에게 대항할 수 있다는 뜻일 거다.

더 자세히 물으려고 했지만.

“여기까지 말했으니,일단 거래는 성사된 것 같군.”

‘보이지 않는 비’는 예전처럼 입을 굳게 다물고 마스크를 끼었다.

* * *

아만에서 빠르게 달려 제국 수도 서남쪽에 도착했다.

라피 산.

“호오……

산의 초입부터 결계가 쳐져 있다.

‘여기가 생문……

하지만 평범한 인간이 빙빙 돌다 을씨년스러운 기분을 느끼고 다시 돌아가게 하는 정도의 약한 결계.

‘아니,수준은 무척 높지만……

들어가면 죽는 사문死門은커녕, 고통을 받고 다치는 상문傷門조차 없고,크게 놀라는 경문薦門마저도 만들다 말았다.

이래서는 최악의 결과라고 해도 지치거나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을 느끼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상냥한 결계는.

一 저벅.

아이작에게 직접 교육받았는데, 간단히 돌파하지 못하면 지나치게 우스운 일이다.

하지만 처음에 생각한 것보다도 수준이 더 높은 결계다.

‘이중… 아니… 삼중 결계인가.’

사문이 없다고는 하지만 이대로는 영원히 지도 위에 표시된 장소로 들어가지 못할 참이었다.

물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 과과과광!

주변 지형지물을 모조리 부수고, 땅을 파헤쳐 갈아 버렸다.

산산조각난 고양이 조각상과 깊게 꽂혀 있던 토템들이 겨울 하늘로 비산했다.

“이게 제일 쉽지.”

헤메게 만드는 게 목적인 결계다.

헤멜 길 자체를 부숴 버리면 결계는 근원을 잃고 표류.

일은 간단해진다.

- 팟!

안으로 깊숙히 들어갔다.

라피 산 안쪽에는 바위 위에 배를 깔고 누워 있는 고양이,나를 보고 웅크린 고양이,나뭇가지 위에서 꼬리를 세운 채 몸을 쭉 펴고 있는 고양이,두셋씩 모여 서로 장난치는 고양이들로 가득했다.

몸과 머리를 내 쪽으로 향한 채 빤히 바라보고 있는 녀석들의 수가 가장 많았다.

천천히 녀석들을 지나니 자그만 사당이 보였다.

그 안에서 숨길 수 없는 강렬한 존재감이 느껴진다.

‘여기로군.’

하얀 고양이가 두 눈을 크게 뜨고 내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샤루니 안.”

나는 곧장 녀석의 이름을 불렀다.

“야옹?”

고양이가 모르는 척 울었다.

하지만 하루 이틀 본 것도 아니고 시간을 끌고 싶은 기분도 아니다.

“쓸데없이 연기하지 말자.”

“애옹〜 애옹〜〜”

여전히 모르는 척이다.

여기도 다 부숴야 말이 통하려나.

오래 설득하고 싶지 않았다.

- 광!

힘을 실어 강하게 발을 굴렀다.

한 번의 발구름으로 땅이 깊숙히 파이며 사당 전체가 혼들렸다.

“야……

반쯤 누워 있던 고양이가 온몸의 털을 바싹 세우고,눈을 크게 뜨며 이빨을 드러냈다.

〈야 이 개새끼야!〉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야 정체를 드러낸 건가.

〈이건 대체 또 어디서 굴러들어온 개뼈다귀야!? 푸른 사자 기사단은 이런 거 안 잡아가고 대체 어디서 뭐 하는 거야!〉

바로 그 푸른 사자 기사단 단장의 동료에게 할 소리는 전혀 아니라는 생각이지만.

“레나는 어디 있지?”

〈뭐? 레나가 누구야!?〉

“…정말 모르는 건가.”

〈무슨 개소리야 정말!〉

샤루니안이 앞발로 땅을 거칠게

북북 긁었다.

〈이건 뭐 천문으로도 잎점으로도 나타나지 않던 게 레몬 밭에서라도 솟아났나? 에잇, 팔자가 꼬이려니 이딴 마물이 어디서 나타나서…….>

연기라는 의심은 하지 않는다.

모르는 게 당연하다.

이미 예상하고 있다.

하지만.

레나를 그토록 좋아하던 고양이가 그녀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현실이 쓸쓸했다.

움직이지 않는 나를 보고 묘족이 인상을 한층 더 찌푸린다.

〈더럽게 센 것 같은데… 패배를 인정할 테니 썩 꺼져 줄래? 여기를 못자리로 쓸 거면 내가 옮겨 주고. 하지만 자손 만대로 저주해 주겠어. 아니,이미 저주를 잔뜩 받았으니 그런 꼬라지가 됐겠지만?〉

세계에서 레나가 도려내진 자리가 아프다.

찢어진 하얀 천.

누구도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는 텅 비어 버린 공백.

누가 그녀의 빛깔을 기억해 낼까.

인간보다 스무 배 민감한 후각을 가진 묘족 샤루니안도 그녀의 냄새를 잊었다.

세계 전체가 혼자 꾸는 악몽처럼 느껴진다.

“점이라도……

〈응?〉

“레나에 대해서… 점이라도 한번 쳐 주지 않겠나.”

〈뼈다귀 주제에 뭐 이리 우울해?

점을 쳐 주면 사라져 줄 거냐?〉

“그러지.”

〈흥...〉

기분 나쁜 소리를 냈지만.

샤루니안은 결국 마타타비 잎으로

점을 치기 시작했다.

〈너에서부터 읽어야겠지. 너에게 관한 레나의 명운名運은…….>

잎점을 시작하자 빛은 그대로인데 동공이 작고 넓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한참 나를 보던 고양이가 꼬리를 늘어트렸다.

〈기괴하네. 너에게서는 레나라는 이름의 가지가 분명 뻗어나왔는데, 너를 벗어나면 바로 사라진다고? 이런 게 대체 어디 있어…….>

샤루니안의 점은 정확한 결과다.

진짜 실력자.

“가지를 되살릴 수는 없나?”

갑자기 생긴 그녀에 대한 신뢰로 엉뚱한 질문을 던졌지만.

의외로 샤루니안은 진지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런 건 없어. 너는… 너 혼자의 상상만으로 어떤 인간을 세계 위에 창조해 낼 수 있니?〉

“충분히 들었다. 이만 사라지지.”

나는 사당 밖으로 나왔다.

샤루니안에게는 어디까지 보일까.

계속하면 공작 같은 자들에 대해 뭔가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역으로 추적당할지도 모른다.

레나의 친했던 동료에게 위험을 무릅쓰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 정말 동방으로 가야겠군.’

괜히 수도에 들러 위험을 자초할 필요는 없다.

편지는 레안드로 녀석에게 알아서 전달되겠지.

- 팟!

지도에 표시된 몬트벨 해안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시간을 정확히 맞춘 건가?’

정보를 받은 지 아직 나흘.

조금 일찍 온 것 같은데.

마침 상대도 조금 일찍 왔는지, 잎 하나 없는 앙상한 겨울나무숲 너머 텅 빈 해안으로.

천천히 커다란 선박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430호후 눈먼 달,지는 꽃 (7)

선박은 계속 해안으로 밀려왔다, 가까워지는 배를 보며 나도 해안을 향해 걸어갈 때.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왔군.’

후작이 었다.

혼자 여기까지 해냈다.

아이 작도.

레나도.

기스-제-라이도 없이.

혼자서 제국의 검주를 영입하고, 그와 함께 동방으로 향한다.

뿌듯함이 느껴졌다.

‘이제 드디어.’

그다음으로 느껴지는 건 반가운 감정.

함께 동방으로 간다고 말했지만,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가능성이야 얼마든지 있었다.

거짓 약속을 할 수도 있고.

마음이 변할 수도 있고.

신변에 일이 생겨 오지 못할 수도 있었지만,무려 하루 일찍 도착한 녀석의 모습이 반가웠다.

함께 여행할 기대를 담아 멀리서

녀석에게 손을 흔들었다.

달리아크의 경매상이 제국 곳곳에 헛소문을 퍼트리고.

공작이 한참 동안 헛다리를 짚고 있을 동안,나는 동방에서 열쇠를 수집하고 힘을 키운다.

동방으로 뜨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 다그닥! 다그닥!

손인사에 답장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미유를 몰고 다가오는 속도는 조금 더 빨라졌다.

“여기다.”

확실히 시선이 마주쳤다.

우리가 탈 녀석들이 저기 있다고 설명하려고,손끝으로 넥스몬드의 기함을 가리켰다.

이미 눈에 익은 선박이었다.

후작은 귀찮다는 듯 그냥 고개를 끄덕거렸다.

- 히히힝!

열 걸음 옆에 다가와서 말 위에서 내리고.

가까이 걸어온다.

“신변 정리를 끝냈다.”

인사도 없이 할 말만 하는 녀석이다.

“반년은 사라져 있어도 그다지 의심받지 않을 거다.”

반년으로 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얼마간은 의심의 눈초리를 피하겠지.

“혹시 로랑스 공작에게 보고했나?”

“공작 전하는 만난 적 없다만. 본인은 푸른 사자 기사단장으로서 누구의 허가를 받을 필요는 없다.”

가장 큰 걱정거리였지만.

여기에 무사히 왔다는 것만으로 이미 짐작할 수 있었다.

레안드로 후작의 성격상.

‘공작’을 만나 수상한 점을 느꼈다면 그 배후를 파헤쳤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쯤 시체가 되었겠지.

저번 세계선에서 ‘공작’은 자신의 정적을 한자리에서 모두 죽였다.

봐주는 것 따위.

인재를 중하게 여기는 일 따위는 없었다.

‘소녀 공작’과는 성격이 다르다.

동방으로의 여행이 시작도 전에 완전히 꼬여 버릴 수 있었다.

“그런데 그건 왜 묻는 거지? 공작 전하는 계속 수도를 비우고 있던데.”

후작이 미묘한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수도를 비우고 있다면.

역시 기스-제-라이를 찾아 어딘가를 헤매고 있는 건가.

한편으로는 안심이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왠지 불안함이 엄습해 오는 말이기도 하다.

여기로 쫓아오고 있다는 뜻일지도 모르니까.

어쨌건 빨리 뜨는 게 최선이겠지.

“그냥, 제국제일검이라고 하기에 신경 쓰여서 물었지.”

충분한 설명이 된 걸까.

더 이상 묻지 않는다.

“저 말은… 데려갈 건가?”

후작은 잠시 곤란한 표정을 짓곤 고개를 끄덕였다.

“도저히 떨어지려 하지 않더군.”

억지로 떼어놓자 황실 비역까지도 따라왔던 미유의 성격으로 볼 때, 어쩔 수 없었을 거다.

녀석이 미유에게 집착하는 만큼 미유도 녀석에게 집착하니까.

‘저 녀석도 잘 보호해야겠군.’

웬만한 경우에 내가 도울 일까진 없겠지만.

후작의 역린은 두 군데다.

돈도 명예도 충성도.

심지어 그를 충성스럽게 따르는 기사단과의 의리조차 아니다.

하나는 저 혹마.

미 유.

다른 하나는 이사벨.

‘미유는 데려왔고……

남은 건 이사벨이다.

생각해 보면.

이사벨 시몬느 백작은 근위대인데 몰살 현장에서 혼자 살아남았다.

몰살 직전에 근무지 이탈이라니,

매우 의아하고, 누가 봐도 수상한 상황이다.

‘이건 굳이 공작이 아니라도 분명 눈여겨볼 텐데.’

다른 것도 아닌 황제 암살.

사정을 실토하라며 이사벨이 잡혀 끔찍한 꼴을 당할 가능성은… 무척 높다고 봐야 한다.

동방까지 그녀의 소식이 전해질지 몰라도.

이사벨의 죽음이라도 전해 들으면 갑자기 미쳐서 울부짖으며,지금 당장 돌아가 복수하겠다며 난동을 부리는 게 아닐지 걱정스럽다.

“그… 이사벨은 어떻게 됐지?”

“어떻게라니?”

후작은 의아한 표정이다.

“동굴에서 만난 게 마지막이다. 그녀를 내가 어쩔 입장은 아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하겠지.”

어쩐지 사무적인 태도다.

이사벨이 죽었을 때는 그 난리를 쳤으면서 정작 살아 있을 때는 저런 태도를 취하는 건가.

나는 과거를 떠올렸다.

〈피고는 제국 중경中更 이사벨 시몬느의 살해를 인정하는가!〉

〈질문은 허용하지 않는다! 피고는 이사벨 시몬느의 살해,사체 훼손, 유품의 강탈을 인정하는가!〉

황제 클레멘스는 알 바 아니라고 대놓고 말하면서 이사벨과 미유의 죽음에만 잔뜩 홍분하던 모습이.

악몽 같은 과거가 떠오른다.

그럴 거면 살아 있을 때나 제대로 챙기든가.

소명수녀와 항해하는 나를 끝까지 쫓아와 죄없는 선장까지 매달고

크라켄에게 죽었던 때가 떠올라서 불쾌해졌다.

“무슨 소리야! 황실의 그림자들이 이사벨 주변에 붙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이렇게 무책임하게 동료를 버리고 와? 안전 가옥이라도 마련해 주고 왔어야……!”

“주제넘는 참견이로군. 실력으로 근위대 단장이 된 기사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이사벨 시몬느는 본인의 휘하도 아니다.”

아직도 녀석은 자기 마음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왈칵 짜증이 솟아오른다.

“그따위로 마음 숨기다가 영원히

표현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고!”

잃어버린 것들에 절망하며 나를 끈질기게 쫓아오던 녀석의 모습이 떠올라 계속 분노가 치솟았다.

“속죄가 불가능한 죄책감을 갖고 살아가게 될 거야. 그걸로 좋나?”

날카롭게 내뱉었다.

레나,아이 작,기스-제-라이…….

잃어버린 것들.

내가 지키지 못한 것들이 하나씩 떠을라 더 울컥했다.

다른 세계선에서 저지른 잘못들이 누적되어 나를 짓누른다.

상대가 이미 죽어 버렸다면 아무리

자책해도 죄를 씻을 수는 없다.

후작이 아니라 나에게 화를 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때 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울리지 않게 부끄러운 표정이 아주 짧게 스쳐 지나간다.

“달리아크의 정보 경매상이 내게 접촉했다. 그녀에게 안전히 활동할 신분을 마련해 주고 왔지.”

화를 낸 게 머쓱해지는 대답.

진작 그렇게 말할 것이지.

‘그 엘프 노인인가.’

역시 빠르다.

코드네임,보이지 않는 비.

지식을 담당하는 조각이 벌써부터 활동에 나선 것이다.

거기까지는 부탁하진 않았지만, 추가 서비스가 꽤 후하다.

“네가 움직인 거 같던데. 의외로 배려가 깊군.”

그렇다고 쳐두는 게 좋겠지.

녀석에게 빚을 달아 둬서 나쁠 건 없으니까.

“그 정도야,뭐.”

무표정하던 녀석의 눈빛이 살짝 풀렸다.

고맙다고 악수라도 청하려는 걸까.

그리고 다가온 후작은.

자연스러운 자세로 내 턱을 향해 그대로 칼을 올려쳤다.

아무 준비 자세도 없고,눈빛조차 살기를 띠지 않고 있어서 예측이 불가능했다.

새파란 검기의 발현조차 내 턱에 닿긴 직전에야 일어났다.

후작 본인에게 홉수한 호신강기가 자동으로 발동되지 않았다면 분명 타격을 입었을 공격이었다.

막거나 반격을 할 경황도 없었다.

반사적으로 몸을 훌쩍 뒤로 빼서

피했다.

하지만 을려치기는 처음부터 내가 피할 걸 의도했는지,레안드로는 첫 공격에 이어 내가 움직일 곳을 미리 예측하고 칼을 휘둘렀다.

- 과과과광!

그대로 버텨 칼을 막아 냈다.

공격은 네 방향.

며칠 전의 싸움에서 다섯 방향으로 왔을 때보다 기괴하게도 한층 더 막기가 까다로웠다.

양심도 감성도 없는 놈이다.

이런 대화를 하는 도중 다짜고짜 칼을 휘두르다니.

- 콰광! 콰광! 콰광!

[심안心眼(A플러스)이 적용됩니다.]

[명경지수明鏡止水 적용…….1

분노와 당황이 차분히 가라앉으며 후작의 공격을 받아친다.

더없이 빠른 속도.

하나를 막으면 다른 하나를 막기 더 힘들어지는 악랄한 공격.

반응할 틈을 주지 않는 감각적인 연계.

막고,흘려내기를 반복.

이번에야말로 피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되면 후작의 공격은 다시 멀리 튕겨나가 버린다.

새로운 각도이기에는 해도 녀석의 공격은 모두 내 눈에 ‘보인다.’

그 공격이 읽히고,궤적이 읽히고, 의도가 읽힌다.

녀석은 나와 두 번째로 싸우지만, 나는 이미 셸 수도 없이 칼을 섞은 상대다.

홉수한 검술도 녀석이 기반.

이 정도까지는,간단하다.

굳이 속도에서 빨라지지 않더라도 공격을 홀려낼 수 있고,처음부터 차단할 수 있다.

- 피리릭!

그의 칼이 흐릿하게 휘어 들어와 다리와 머리를 향했다.

- 과광!

한 번의 장검 회전으로 날카로운

칼끝을 모두 차단해 낸다.

그러나.

모든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들기 시작하는 긴장감은 어째서 일까.

‘더… 느려지고 있어?’

후작의 공격은 첫 기습과 달리, 점점 더 느려지고 있다.

기분 탓일까.

그 공격을 받아내는 나는 오히려 처음보다 더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느낌이 든다.

‘따라하는 건가?’

“밑천을 드러내라. 이대로는…… 후작이 나를 향해 조근한 말투로 뱉어 냈다.

“천천히 잡아먹힐 뿐이다.”

나긋한 경고가 섬뜩했다.

- 과광!

확실한 제압이 필요한 시점이다.

‘검빙.’

근위기사단장 이사벨의 검기까지 단숨에 얼어붙게 만들었던 권능은 후작을 뒤로 피하게 만들었다.

공격의 템포를 끊고 그 다음 순간 곧바로 날카로운 공격을 이어 갔다.

‘검염.’

- 쿠콰콰콰콰!

공기를 부수며 울리는 폭발음.

레안드로는 감히 대항하지 못하고 칼을 늘어뜨렸다.

검기 자체를 태우는 압도적인 힘.

루-륨으로 유지하는 출력이다.

“이것도 따라 해 볼 테냐?”

본다고 해서 따라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살아 꿈틀거리는 것처럼 허공을 연소하는 검기의 불꽃.

그 궤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회색빛 재로 바꾼다.

상대방의 검기조차도.

하지만 검염을 차분히 관찰하는 녀석의 모습이 어쩐지 불안했다.

‘진짜 위험할 때나 써야겠군.’

예전에 인밴토리를 활용해서 마구 몰아붙이고 난 뒤,후작이 기묘한 힘을 각성했던 모습이 떠오른다.

뭔가 깨달으려는 듯한 간질간질한

눈빛이 신경 쓰여 검염을 거뒀다. 그리고 다음 순간.

- 피리리리리릭!

후작의 공격은 수십 명의 숙련된 궁수가 화살을 발사하듯이 똑바로 꽂혀 왔다.

자신을 잊고 스스로 번개가 된 것 같은 속도로,검기를 담은 칼끝이 빠르게 수십 차례를 낄러 들어온다.

이건 피할 수 없다.

무형 검 無形劍.

폭爆.

- 번쩍!

넓은 공간을 향해 쏘아낸 검뢰가 지름 수 미터에 걸쳐 쏟아진 모든 공격을 모두 소리도 없이 부쉈다.

공기가 폭풍처럼 휘몰아쳐 나가고 부서진 바닥의 파편이 먼지가 되어 온 사방에 자욱하게 솟았다.

창백한 얼굴의 후작이 입가에서 피를 흘리며 비틀거렸다.

“…제국 땅에서 끝장을 보는 건 역시 무리였군.”

녀석은 칼을 거뒀다.

‘그런 데 집착하고 있었던 거냐.’

관할 같은 걸 생각하고 있던 건 아니겠지.

징그러운 녀석.

더 이상의 공격은 없었고,나도 뒤를 돌아봤다.

어느새 배에서 내린 넥스몬드의 선원들은 입을 벌린 채로 멍하니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짧은 대결이었지만, 딱 적절했던 타이밍이었을까.

눈을 껌뻑거리며 아직까지 자기가 뭘 본 건지 넋을 놓고 있는 녀석이

많다.

인벤토리를 사용하지 않은 검술의 대결이었다고 해도,내가 해안까지 밀렸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후작이 그걸 생각하고 멈췄는지 모르지만.

여기서 더 싸우면 정박된 배들이 전부 부서지는 건 금방이겠지.

마지막까지 갑판 위에 있던 선장 넥스몬드는 처음 보는 장치를 눈에 가져다 댄 채로 우리를 바라봤다.

‘안경… 인가?’

그렇기 생각하기에는 조금 커다란 유리 장치였다.

조금씩 가라앉는 배 위에서.

싸움이 멈추고 나서야 넥스몬드는 천천히 장치를 눈에서 떼었다.

길쭉하게 뻗은 외투 소매가 점점 기우뚱해지는 배 위에서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저렇게까지 몰입하며 갑판 위에서 넥스몬드가 하는 일은 명확하다.

녀석은, 언제나처럼.

“서,선장님!”

가격을 매기고 있다.

걱정하는 선원들의 목소리를 듣고 훌쩍 몸을 날려 착지한 넥스몬드의 입가가 미세하게 꿈틀거리고 있다.

익숙한 표정이다.

“혹시… 달리아크의 소개를 받고 오신 분들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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