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1화 눈먼 달,지는 꽃 (8)
“맞아. 내가 당신을 찾았지.”
“일행이십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적으로 넥스몬드의 두 눈에 다양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저 정도의 상인이 레안드로 후작을 알아보지 못할 리는 없다.
제국의 법을 수호하는 대상조가 밀무역에 종사하는 자신을 찾았다.
그것도 달리아크라는 회색 지대를
통해서.
거기에 담긴 의미를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기존에 갖고 있던 관내후에 대한 정보와 눈앞의 상황을 조합해 내고 있겠지.
“저는… 상인입니다.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지만,두 분 정도의 고객이라면 호의만 받고도 상당한 용역을 제공해 드릴 수 있습니다.”
“두 분 정도라니. 뭘 알고 뱉는 소리인가.”
레안드로가 찌르듯 물었다.
선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든
장치를 들었다.
두껍고 커다란 안경 같기도 하고, 망원경 같기도 한 장치였다.
“그렇습니다. 저 자신의 무력이야 보잘것없지만,장비의 힘을 빌리면 어느 정도까진 따라갈 수 있지요.”
물론 그런 장비를 갖춰 둔 것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자신’의 역량이라고 봐야겠지만.
묘한 대화였다.
레안드로는 상대가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냐는 뜻에서 날카롭게 따져 물었겠지만.
선장은 자연스레 그걸 자연스럽게
검술의 수준 이야기로 흘려넘겼다.
그가 대상조라는 사실은 어차피 넥스몬드도 알고.
넥스몬드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후작도 알 거다.
하지만 정식 항구가 아닌 해변에 커다란 선박 여러 척이 정박하는, 딱 봐도 대규모 밀무역에 종사함이 틀림없는 상대 앞에서 공공연하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건 다른 문제다.
그 위태로운 순간을 넥스몬드는 부드럽게 피해 갔고, 후작도 한 번 찌르고 난 뒤에는 구태여 추궁하지 않았다.
선장이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제가 달리아크에서 들은 얘기는 소개까지였습니다. 저에게 어떤 걸 바라시는 겁니까?”
“우리를 동방으로 태워다 줬으면 좋겠군.”
“동방… 말씀이시군요. 저희들이 연합을 통해 동방으로 가는 항로를 잡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가 머쏙한 표정을 지었다.
“두 분 정도의 능력과 인맥이라면 굳이 저를 통하지 않았어도 다양한 선택지가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동방에 간다,이걸로 하실 의뢰는
끝이십니까?”
“본토다.”
“예……?”
“〈섬〉은 잠시 거칠 뿐이고,이후 진짜 동방으로 가는 게 목적이다. 괜찮겠나?”
“진짜… 동방… 말씀입니까?”
“싫은가?”
물론 싫어할 리가 없다는 걸 알고 묻는다.
싫기는.
그들도 최근에서야 알아낸 본토의 존재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걸 보면서 평가를 확 을리겠지.
넥스몬드는 침을 삼키고 천천히 두 눈을 깜빡였다.
“정말 놀라운 정보력까지 가지고 계시는군요. 하지만 저희도 그곳에 가는 방법은 모릅니다.”
그것도 안다.
“괜찮다. 섬까지만 가면 되니까. 거기서부터는 내가 직접 동방으로 인도해 줄 수 있다.”
넥스몬드의 인공 심장이 심박수를 올리고.
가만히 서 있는데도 그의 호홉이 거칠어진다.
그가 돌아봤다.
“서,선장님……!”
근처에 서 있던 부관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가실… 겁니까?”
선장은 고민에 찬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번 항해는 계획에 없었습니다. 제게 무엇보다 소중한 게 있다면 선원들의 안전… 모두의 뜻을 다시 확인해 봐야 합니다.”
‘으음?’
첫 만남에서 넥스몬드가 한 말이 떠올랐다.
〈황실이라니,어떻게 그딴 걸… 싫어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침해받을 수 없는 계급과 그에 부합하는 소수가 모두를 짓누르는 이 시대를 파괴할 겁니다.〉
〈망령들에게 봉사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선장 독단의 결정 따위는 내리지 않는다는 건가.
자신이 원해서 가는 것처럼.
타인들은 위험을 감수하는 것도, 감수하지 않는 것도 오로지 자신의 선택이어야 한다고 믿는 태도였다.
선장 넥스몬드는 뒤를 돌아보며 선원 들에게 물었다.
“다들 어떻게 생각하지?”
뭐,존중할 만한 태도이긴 한데.
걱정스럽긴 하다.
‘설마 안 가는 건 아니겠지.’
너무 쉽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섬〉에서 항로도를 구한다고 해도 그걸 진짜로 믿어 줘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인벤토리를 보이면 더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려나.
그러나 후작 앞에서 인벤토리를 여는 게 좀 꺼려진다.
며칠 사이 두 번 싸워 보고 나자, 녀석이 얼마나 빠르게 나에 대해 파악하는지 싫을 정도로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레안드로가 있는 곳에서는 최대한 밑천을 늦게 까고 싶은데.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절대로 가고 싶은데요!”
항해사 복장 아래로 우락부락한 근육의 굴곡을 느낄 수 있는 중년 남자가 말했다.
목과 얼굴에 굵게 파인 주름살은 연륜을 느끼게 할 뿐이지 노쇠의 증거는 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남자가 다시 소리쳤다.
“열 척이 뱃머리를 나란히 하고 항해할 수 있는 함대가 대륙에서 몇이나 됩니까? 진짜 동방에 가장 먼저 가는 건 우리 함대여야죠!”
거의 짐승처럼 그르렁거리는 것 같은 목소리로 키를 잡는 조타수도 입을 열었다.
“해도도 나침판도 없이 눈 감고도 왔다 갔다 하는 길은 지겹습니다. 우리가 안 가도 선장님 혼자서라도 가실 생각 아닙니까?”
조타수는 바다에서 크라켄 촉수가 뛰쳐나와 키를 감아도 이기겠다는 기세로 거들었다.
다른 선원들도 지지 않는 사나운 목소리로 외쳤다.
“무슨 소리십니까!”
“제가 아니면 그 자리에 도대체 무슨 얼간이를 채우시려고요!”
박력 넘치는 표효가 몬트벨 해안 곳곳에서 메아리쳤다.
“선-장-님! 저도 갑니다!”
멀리 있는 선원들이 외쳤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넥스몬드는 동방 항해에 참가할지 여부를 선원들과 자세히 상담하기 시작했다.
“…좋습니다.”
이야기를 끝낸 넥스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 타시죠. 돌아오는 길까지 저희가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가까운 배를 가리키는 넥스몬드의 옆얼굴에 설렘이 가득했다.
“이대로 곧장 떠나도 괜찮은가? 교역 같은 건 안 해도 좋아?”
선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가져온 물건은 굳이 제가 관리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렵잖게 다룰 수 있는 것들이니까요. 이번 항해에 불참하는 선원들에게 맡기면 됩니다.”
그렇게까지 해 주는 건가.
고맙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후작과 배 위에 을라가려 할 때였다.
살짝 불안한 표정으로 넥스몬드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하나 부탁을 드리자면… 제가 두 분이 어떤 관계이신지는 모르겠지만,배 위에서만은 결투를 자제해 주시겠습니까? 배라는 건 단단한 듯 보이면서도 사실은 꽤나 연약한 녀석이라서요……
애처로운 그의 말투에 나는 빨리 대답했다.
“물론이다.”
바다 위에서 싸우는 건 한층 더 끔찍하다.
정말 안 좋은 기억도 있고.
하지만 후작은 답변이 없다.
불안하다.
“부탁… 드려도 되겠습니까?”
- 히히힝!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하던 녀석은,가볍게 투레질을 해대는 미유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항해 중에 배가 파손되면 곤란할 테니까.”
아무래도 애지중지하는 제 말이 빠질까 봐 저러는 거 같았다.
‘•••같이 온 게 다행이군.’
* * *
바람을 가득 안은 돛은 펄럭이며 함선들을 동쪽으로 밀어냈다.
불룩하게 부풀어 오른 돛을 달고 다섯 척의 배는 횐 포말을 일으키며 바다를 갈랐다.
특별히 할 일을 분배하지 않아도
모두가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한두 번 가 본 길이 아닌 것 같았다.
“원해로 진입하겠습니다.”
- 끼이익.
조타수가 타륜을 꺾었다.
바다의 색이 짙어지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
기분까지 서늘하게 만드는 남색이 보는 이를 불안하게도, 차분하게도 만드는 것 같았다.
“차갑군.”
타륜 근처 난간에 기대어 서 있는 레안드로가 중얼거렸다.
그는 조용히 앞을 보고 있었다.
선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북쪽으로 가고 있기도 합니다만, 원해로 들어가면 온도가 점점 더 낮아집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기분 탓인지, 부서지는 파도 거품이 조금씩 더 단단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여섯 시간 정도 나아갔을 때였다.
- 휘이이잉!
겨울 바다라는 걸까.
북쪽 하늘의 어두운 틈새로부터 새하얀 눈폭풍이 쏟아졌다.
거센 눈폭풍은 휩쓸리는 것들을 하늘에 매달아 뒤집어 버릴 듯이 매섭게 몰아쳤다.
하지만 보는 선원들은 움츠리지도 않고 각자 제 할 일에만 몰두했다.
굉음을 내는 눈폭풍을 바라보자 선장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항로로는 절대 오지 않습니다. 지난 32년간 관측된 결과입니다.”
폭풍을 바라보던 후작은 인상을
찌푸렸다.
“해안 경비대……. 직무 유기로군. 이런 길을 모르고 있다니.”
육지와 차원을 달리하는 폭풍과 꿈에 나올까 두려운 바다 마물들로 가득하다는 원해.
경비대는 진입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지만,
상인 연합은 거기에서도 살길을 개척해서 보란 듯이 단속을 피하고 있었다.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일하는 만큼 버는 저희와 월급만 받는 경비대가 어떻게 같을까요? 새로운 길을 찾으려다 죽을지도 모르는데요.”
넥스몬드의 넉살에 후작은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발치에서 부서지는 흰 파도에 홀끗 시선을 주고, 바람을 가늠하듯 다시 먼 구름을 바라봤다.
차갑고 비릿한 바람이 가느다란 회청색 머리카락을 어지럽혔다.
제국 땅 위에 있지 않은 레안드로는 왠지 뭔가를 내려놓은 듯 홀가분해 보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복수에 매여 나를 추격해 올 때와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미유도 배 위에 있는 게 불안하지
않은지 차분하게 걸어다니고 있다.
무려 황실 비역에 나타난 철인과 싸우기까지 한 녀석이다.
배가 침몰해도 바다에서 수영하는 것 정도는 자신 있다는 걸까.
몇 시간 동안 꼼짝하지 않고 서서 바다를 바라보던 그가 문득 충격을 받은 표정을 지었다.
“으음.”
작게 침음까지 토하는 모습이 아무 래도 미묘하다.
바다를 보고 검의 깨달음 같은 걸 얻지는 않았겠지.
‘불안하게 만드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그렇지는 않을 거다.
기분 탓이겠지.
상인 연합이 개척한 연합 항로는 쾌청하지는 않아도 무척 쾌적했다.
비바람이 불어도 뚫어 나가는 게 아니라 뒤에서 밀어주듯 불었고, 파도는 거세지더라도 좌우 측면이 아니라 앞으로 오는 거라서 균형을 잡기 어렵지 않았다.
원해를 항해한 지 사홀째.
점점 열어지는 색의 바다를 보며 넥스몬드가 말했다.
“이제부터 자유 연합의 북쪽 근해로 진입해야 합니다. 다만 거기에서는 경비선이 순찰을 돌 테니 위장을 하셔야 합니다.”
“위장?”
“네,일단 다 통해 있기는 한데, 일단 형식적으로라도 선원 검사는 실시할 가능성이 있어서 말입니다. 으음… 성자의 유골로 위장하실 수 있으십니까?”
사흘 동안 항해하며 정체를 이미 넥스몬드에게 드러낸 뒤였다.
전혀 어려운 건 아니다.
“그러지.”
죽은 척하기 기술을 시전한다면 웬만한 인간은 관심도 주지 않고 지나갈 거다.
어려울 일은 조금도 없다.
유골함과 치장 물품을 가지러 간 사이에 넥스몬드가 후작에게 말을 걸었다.
“손님께서는… 갑판원으로 위장해 주십시오.”
레안드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관이 가져온 깔끔한 선원복으로 갈아입은 꼴을 보자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바다 위를 항해하는 배 곳곳에서
가장 자유로워야 할 갑판원 복장이 그에게는 한없이 불편해 보였다.
“너무 안 어울리는 거 아니냐?”
해적이건,상인이건,해군이건. 뱃사람이라는 공통점을 가진다.
바다는 언제나 변덕스럽고 규칙 따위는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 쉽게 팽겨쳐 버리므로.
“잘 좀 입어 봐. 그거 맞아?”
하지만 알고 있다.
뭘 어떻게 입든.
뱃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복장은 단단한 규율의 삶 위에서 살아온 레안드로에게는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았다.
“콕콕큭……
하지만 후작은 깨끗하게 내 말을 무시했다.
안 들리는 척은.
“여기 누워 계시면 됩니다.”
커다란 유골함에 눕자 선원들이 손가락에 보석 반지를 끼우고 몸과 얼굴에 금줄을 칭칭 감았다.
머리에는 관까지 씌우고 월계수 잎을 곳곳에 장식하는 것 같았다.
“"•품.”
슬쩍 내려다본 후작이 비웃음을 홀렸다.
- 히힝! 히히힝!
가만히 있던 미유까지 다가와서 입을 A 자로 만들며 킥킥거린다.
말 주둥이가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는 거였나.
2 대 1이라니.
처음부터 곤란한 싸움이었다.
“이 정도면 된 것 같습니다.”
자기는 절대 안 웃었다는 것처럼, 세상 진지하게 미간에 힘을 주며 넥스몬드가 말했다.
- 출렁.
잠시 더 근해를 항해하자 커다란 무장선 두 척이 배 주위로 접근했다.
갑판 위에까지 대포를 설치하고, 선수포에 선미포까지 장착.
전투를 위해 만들어진 선박이다.
‘경비선인가.’
“정지! 배를 세워라!”
갑판에 선 남자에게서 날카로운 경고가 울려퍼졌다.
돛을 접고 배를 세우자 경비선은
옆에 바싹 붙여 검은 갑옷을 입은 병사 일곱 명을 을려 보냈다.
그 가운데 선 남자가 넥스몬드를 보고 말했다.
“아,오늘은 다섯 척만 오셨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세금은 물론 열 척 전체에 내겠습니다. 나머지 함대도 따라을지도 몰라서요.”
“크홈. 그럼 우리야 고맙지만.”
슬쩍 수금을 마친 해양 경비대는 아예 선원들 얼굴도 살펴보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선장,항구로 갈 거요?”
“네. 앞으로 먼 길을 갈 거라서.
제대로 보급을 해야 합니다.”
“그렇군. 크렉소르 경매는 참가 안 하시고?”
“이번에 열립니까? 그러면 당연히 참가하지요! 정보 감사합니다.”
“우리 사이에 이렇게 중요한 건 당연히 말해야지. 그럼 항구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시게.”
정보료로 약간 돈을 더 챙겨받은 경비선은 나란히 멀어져 갔다.
몸에 칭칭 감긴 금줄을 걷어내고 일어난 나는 선장에게 물었다.
“크렉소르… 경매라니?”
“연합에서 가장 부유한 크렉소르
가문이 주최하는 비정기 경매입니다. 비정기라고 아무 때나 한다기보다, 물건이 갖춰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실시하기 때문에 언제나 월리티는 기대할 수 있습니다.”
경매에 별 흥미는 없다.
하지만 익숙한 이름이 내 주의를 사로잡았다.
크렉소르 가문.
‘분명히,녀석들이 갖고 있었지.’
선대로부터 내려오던 물건.
전쟁영웅으로 만들어 줬던 여자.
카린 크렉소르가 나에게 건네줬던 물건이었다.
어쩌면 그곳에서 카린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타이밍이 좋다.
웬만하면 몰래 홈쳐내고 싶지만, 경매장을 좀 뒤엎어도 열쇠를 하나 더 가질 수 있다면.
행동할 가치는 충분하다.
“같이 가시겠습니까?”
후작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 있겠다.”
“손님께서는? 가시겠습니까?”
“물론. 경매에 관심이 가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