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366화 (366/458)

433화 눈먼 달,지는 꽃 (10)

“70.”

소란을 뚫고 은방울처럼 또렷한 목소리가 울렸다. 단위는 당연히 연합의 화폐 단위인 셰켈.

목소리는 감정을 표현한다.

때로는 쌓아온 생을 전달한다.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던 재능을 과시하는지도 모른다.

간결한 목소리와 함께 번호 팻말을 들어 올린 여자를 보고 사람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입술로 조용히

욕설을 뱉어내는 자들마저 있었다.

“망할 년……

“또 왔어?”

단순한 짜증보다는 낭패스러움이 사람들의 얼굴에 번지고 있었다.

특히 지금까지 경매된 물건들을 주로 구매한 앞줄에 앉은 자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봤다.

고혹적인 분위기의 흑발 미인이 머리칼을 꼬며 걸어오고 있었다.

‘카린 크렉소르……

아이작의 도움을 받아 인벤토리를 만들어 내기 전.

나에게 황금빛 벌레 모형을 줬던 자유연합의 의원이다.

직선으로 입을 다문 차가운 청옥 느낌의 장신 보좌관도 함께다.

틀림없는 본인.

‘운이 좋군.’

못 찾고 포기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맞아떨어지다니.

동방에 가기 전,이렇게 간단히 열쇠 하나를 더 얻는다면 엄청난 이득이다.

“왜… 다들 짜증을 내는 거지?”

그녀에게 다가가려다 문득 혼자 중얼거렸다.

“저 여자가 경매가를 기가 막히게 조정하거든.”

옆에 있던 피에로 복장의 인간이 친절하게 대답했다.

경매보다는 공짜 술을 목적으로 경매장에 들어온 듯,웨이터들이 슬슬 피할 때까지 술을 빨고 있던 녀석이었다.

“무슨 소린가?”

피에로가 흘끗 눈을 들었다.

시선이 내 앞의 쟁반을 향했다.

공짜 술이 도는 시간은 끝났지만, 나는 물론 술을 마시지 않는 선장 넥스몬드가 받은 잔들도 거기 그대로

쌓여 있었다.

“ o ”

쟁반을 통째로 들어 녀석의 앞에 올려놓았다.

피에로는 알콜 중독 환자처럼 잔을 들지도 않고 머리를 아래로 내려 술잔에 입술을 홀짝였다.

목을 축인 그가 기분 좋게 풀어진 눈으로 피식 웃었다.

“진짜 사고 싶은 물건도 아니면서, 낙찰은 안 받는 선에서 아슬아슬하게 한계까지 가격을 끌어을리지. 다른 사람들의 자금을 일부러 소모하게 만들거든. 진짜 사고 싶은 물품에 경쟁자들이 제대로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거야.”

“그런가.”

피에로는 눈짓으로 끄덕거리곤, 다음 잔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이 시기의 카린은 저런 짓을 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호기심이 생겼다.

그가 하는 일을 가만히 지켜봤다.

“8이”

새가 수놓아진 동양풍의 비단옷을

입은 여자가 펫말을 들었다.

“140.”

카린은 얼굴에 미동도 없이 다시

가격을 올렸다. 단번에 뛰어오른

단위에 좌중이 잠시 술렁였다.

140세켈.

작은 봉토를 가진 제국 남작의 연 수입에 맞먹는 액수였다.

“140 나왔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백사십… 일.”

붉은 비단옷의 여자가 썩은 얼굴로 다시 응찰했다.

카린은 손에 든 번호 펫말로 살짝 부채질을 하며 말했다.

“160.”

“161!”

“괜찮으시 겠어요?”

붉은 비단옷의 여자에게 옆에 있던 비서가 속삭였다.

“어차피 200세켈 정도의 가치는 차고 넘치는 작품이야.”

그때 였다.

카린이 손을 들었다.

“뭘 찔끔찔끔 올리고 그래? 200!”

“200! 200셰켈 나왔습니다. 현재 최고가입니다!”

“정말 살 생각인가?”

“저러다 안 사면 보증금을 10%는 뱉어내야 할 텐데……

“200! 더 없으시면 세 번 부르고 종료하겠습니다. 200, 200……

붉은 옷의 여자가 미간을 살며시 찡그리며 뱉어냈다.

“22이”

다리를 꼬고 앉은 검은 비단옷의 여자가 옆에서 조용히 충고했다.

“이쯤에서 그만하시는 게 낫지 않겠어요?”

“저년은 처음부터 기선을 제압해야 하는 거예요.”

그때 였다.

잠시 망설이고 있던 카린이 손을 들었다.

“240.”

결코 지지 않겠다는 듯 붉은 옷의 여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30이 300셰켈이다! 어디 한번 더 불러 보시지!”

카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펫말을 다시 들어 올렸다.

“예! 응찰하시겠습니까?”

모두의 시선이 카린을 향했다.

그녀가 천천히 부채를 부치듯이 팻말을 흔들었다.

“아니요? 그냥 바람 쐰 건데요? 다시 보니 좀 별로네.”

“30이 300셰켈! 낙찰되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 짝짝짝짝....

카린이 번호 팻말을 놓고 두 손을 들어 조롱하듯 박수를 쳤다.

“어휴,다들 어서 박수 쳐 줘요. 300이래,300. 스케일이 대단하셔. 하하하하……”

붉은 옷의 여자는 분노를 누르고 최대한 우아하게 앉으려 했지만, 부들부들 떠는 걸 참으려는 입가가 어쩔 수 없이 보인다.

“저런 식이지.”

피에로가 쟁반에 있는 술잔들을 천천히 비워 가며 말했다.

카린의 등장 이후,경매장에서는 몇 번씩 비슷한 상황이 반복됐다.

굳이 다른 점을 찾으면 희생양이 계속 바뀌고 있다는 것 정도.

그녀는 단 한 번도 낙찰을 받지 않으면서도 항상 경매품의 가격을 최대으로 끌어 올렸고,낙찰자들은 한 번도 깔끔한 기분으로 물건을 차지하지 못했다.

‘O으'

— I그 •

물론 그게 내 관심사는 아니다.

[탐지 Lv.15]

[활성 상태로 전환합니다.]

심안心眼(A플러스)의 보조를 받는 15레벨 탐지.

궁극에 도달한 스킬이다.

멀리 떨어진 카린의 심장 박동과 근육의 움직임이 잡힌다.

그녀가 가격을 부르며 달라지는 호홉의 미세한 변화까지 느껴진다.

하지만 아무리 그녀의 몸을 샅샅이 살펴봐도.

‘열쇠가… 없잖아?’

카린 크렉소르.

그녀는 그리 특별한 인간이 아니다.

내게 무언가를 숨기는 건 무리다. 당황스럽다.

‘왜 없는 거지?’

세상이 몇 배 느리게 느껴질 만큼 집중해서 세밀히 그녀를 탐색했다. 등에서 솟는 땀 한 방울까지 알아 차렸지만.

열쇠는 찾지 못했다.

없다.

혹시나 싶어 몸을 숨긴 채 그녀를 수행하는 주변인들까지 살펴봐도 전부 마찬가지다.

‘놓고 다니나?’

어쩌면.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유산. 아직 그걸 받기에는 지분이 부족한 상황일 가능성도 있다.

어쨌거나.

‘물어봐야겠군.’

물론 모두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이 상황에 뛰어들 수는 없다.

상황을 빨리 끝내면서.

카린과 얽히는 방법.

내가 직접 경매에 참여해야 한다.

- 스르륵.

인벤토리에서 금괴 하나를 슬쩍 꺼내 넥스몬드에게 보여 줬다.

“혹시 여기 화폐로 바꿀 수 있나? 그러면 얼마 정도지?”

“이런 크기의 순금이라니……!”

넥스몬드가 숨을 몇은 채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나에 2,500셰켈은 될 겁니다.”

“좋아. 일단 하나를 바꿔 줘.”

선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금괴가 인벤토리에 적어도

열 개는 남아 있다.

곧 환전소에서 칩을 받아온 그가 나에게 수북한 더미를 안겼다.

자금은 충분하다.

“다음 그림은… '장난스런 계약!’.

30부터 시작하겠습니다!”

“40.”

이번에도 카린이 시작했다.

“41.”

“60.”

“70.”

“80.”

금액이 조금 을라 80에서 멈췄다.

모두 지친 걸까.

자금이 떨어졌거나.

슬슬 더 이상 그녀에게 휘말리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80 나왔습니다! 더 없으십니까? 없으시면……

나는 아무도 추가 응찰하지 않는 그림을 바라봤다.

‘모르겠군.’

감정 스킬은 없다.

하지만 카린의 심장 박동과 호홉, 근육의 움직임은 정확히 안다.

“100.”

경쟁이 붙었다면, 아직은 한참 더 가격을 부를 만한 물건이다.

나를 향해 카린이 몸을 돌렸다. 길고 얇은 손목을 들어 머리칼을 젖히고 나를 바라본다.

뭘 생각하는 걸까.

눈가에 비웃음이 서린다.

“120.”

“150,

“170.”

숫자는 조금씩 을라간다.

하지만 아직 여유가 있다.

‘진짜 사고 싶은 물건인가?’

특별한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 181.”

이 호홉,맥박,손에 흐르는 땀.

미세하게 혼들리는 눈동자.

이쯤에서 끝인가.

마지막 호가를 불렀을 때의 신체 반응이다.

여기서 더 부르면 포기하겠지.

돈은 많지만…….

물건이 목적은 아니다.

“181셰켈 나왔습니다! 현재까지 최고입니다. 더 없으십니까?”

‘넘긴다.’

목적은 그녀의 호기심.

“세 번 부른 뒤 마무리하겠습니다.

181. 181. 181. 낙찰되셨습니다!”

카린의 최초 낙찰.

하지만 표정은 밝지 않았다.

‘쉬운데?’

“다음은……

계속 경매 물품 대신 신체 반응을 측정한다.

곧 그녀가 확실히 사고 싶어 하는 작품이 나왔다. 조금 전 낙찰받은 작품보다도 훨씬 더.

실제로 더 가치가 있는지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

카린 크렉소르가 얼마나 사려고 하는지가 중요하겠지.

“220.”

아예 처음부터 가격을 높여 불렀다. 그러자 그녀가 분한 얼굴로 나를 흘겨봤다.

“•••221.”

애써 감추려고 해도.

이게 열 받은 맥박이구나.

경매가 진행될수록 점점 정확하게 상태 측정이 가능해지고.

더 쉬워진다.

탐지 스킬을 이런 식으로 활용할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레안드로의 탐지 스킬이 유난히 높았던 이유를 알 것 같다.

녀석은 제국 대상조.

거짓과 진실을 판별하는 직업에서 이만큼 유용한 스킬도 드물겠지.

그가 뛰어난 재능 위에 노력으로 발전시켰던 스킬을 나는 유감없이 사용해 주고 있었다.

“230.”

“240.”

“270.”

“270세켈 1두갓.”

카린 크렉소르가 한계라고 느끼면.

“안 살래.”

나도 곧장 그만둔다.

“270세켈 1두갓! 270세켈 1두갓… 낙찰! 낙찰입니다!”

하지만 전혀 기쁜 표정은 아니다.

몇 번,비슷한 상황이 이어지자 내 쪽으로 응원을 보내는 인간들이 생겨났다.

“멋지다!”

“저 건방진 년이 임자 만났군!”

주위에서 들리는 소리에 그녀는 천천히 호홉을 고르며 얼굴 근육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이를 악문 걸 티 내지 않기 위해

혀까지 끼워 넣고 있다.

아프지는 않으려나.

절반 정도는 표정 관리에 성공한 그녀가 내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오기 시작했다.

“바깥에서 저 좀 볼래요?”

원하던 바다.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를 따라갔다. 좁은 바깥 골목길에서 카린이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오랜만이다.

예전의 사근사근한 태도와는 제법 다르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호의의 씨앗은 분명히 보인다.

경매장에서 따라온 몇몇 기척이 곳곳에 숨어서 우리를 훌었다.

위치나 자세로 보아 카린의 호위로 짐작되는 자들도,다른 세력으로 짐작되는 녀석들도 있다.

“당신 솜씨 잘 봤어요. 물어보죠. 내 밑으로 들어오지 않을래요?”

밑으로 들어가라고?

재밌는 말을 하는 녀석이다.

“뭐?”

그녀가 말을 이었다.

“받쳐 주는 배경이 없으면 경매는 위험해요. 낙찰을 받아도 문제지요. 아비도니아 항구가 얼마나 위험한

장소인지 알고 계세요?”

“그런가.”

저렇게 귀여운 소릴 하다니.

“크렉소르 가문의 핵심인 본인이 당신을 도와드릴 수 있어요. 저는 머지않아 제1상속자가 될 거예요. 밑으로 들어오라는 말이 불편하면, 제 품에 안기라는 말은 어때요?”

그녀가 활짝 벌린 두 팔을 내민다. 길고 부드러운 흑발이 살랑거렸다.

한 점 망설임도 없는 자신감.

“당신이? 그럴 자신이 있나?”

저번처럼 내가 영웅으로 만들어 주지도 않았는데.

“세상은 저를 중심으로 돌아가요. 저와 손을 잡는 순간,당신도 역시 그 축이 되는 거죠.”

뭘 믿고 저러는 걸까.

그 순간이었다.

허공에 상태창이 떠올랐다.

[특성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카리스마 C마이너: 운명이라는 이름의 자기 최면]

[카린은 자신을 신의 아이라고 확신합니다.]

[운이 소폭 상승합니다.]

[단일 대상을 상대로 사용할 경우 랭크 보정: C플러스]

[해당 스킬을 받아들이겠습니까? Y/N]

취하는 것도,취하지 않는 것도 내 마음이라는 건가.

이런 스킬을 타고난 녀석이기에 자기를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별로 높은 랭크도 아니면서… 카리스마가 드문 재능이긴 하지만.’

기스-제-라이가 발휘하던 B플러스의 광역 카리스마가 떠올랐다.

하지만 상태창을 보는 것도 아니고

정신 저항이 불가능한 상대라면, 많은 인간은 스킬로 인한 감정을 운명이라고 느낄 수도 있겠지.

“그런 건 됐고.”

“네……?,,

어째서 설득되지 않는지 진심으로 경악하는 표정이다.

[카리스마 C플러스의 영향을 깨끗이 무시했습니다.]

“열쇠. 열쇠 없냐? 벌레 모형인데.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뭐 그런 거 없어? 얼마를 주고라도 살 테니까.

내놔 봐.”

카린 크렉소르는.

어느 때보다도 충격받은 표정으로 입술을 바들바들 떨었다.

지금까지 측정되지 않았던 강도의 격렬한 신체 반응이었다.

그 얼굴 위로.

[감정 중…….]

[조건을 충족합니다.]

[시나리오를 활성화합니다.]

‘이게 뭐야?’

434호후 눈먼 달,지는 꽃 (11)

[감정 중…….]

[조건을 충족합니다.]

[시나리오를 활성화합니다.]

[A마이너급 시나리오,‘카린 크렉소르’가 열립니다.]

[카린을 크렉소르 가문의 첫 번째 상속자로 만드십시오.]

[그녀를 자유 연합 의회의 의장으로 만드십시오.]

[보상: ???]

분명하다.

루비아.

레나.

기스-제-라이.

그녀들에게 떴던 시나리오다.

‘뭐야,저 녀석을?’

좀처럼 시나리오가 뜨는 기준을 알 수 없었다.

열쇠를 얻는 것과 관련이 있으리라는 희미한 추측만 가능할 뿐.

게다가 무슨 조건을 충족한 거지?

저번에는 그녀를 전쟁영웅으로 만들어 주기까지 했는데도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고 떴다.

이번엔 카린과 말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설마 분노하게 만들어야 하나.’

어쩐지 으스스한 느낌이 들었다.

어쨌거나.

A마이너급 시나리오.

‘연합 의회의 의장이라니……

시나리오가 난이도를 뜻한다면, 루비아를 영주로 만드는 것보다는 훨씬 더 쉬운 시나리오다.

‘하긴.’

자유 연합의 전쟁영웅이 된 게 내 조력 덕이라고 해도.

경매장에서의 솜씨를 보면 확실히 놀라운 수완가.

출발점도 그렇다.

인간 사냥꾼들에게 쫓기던 루비아와 비교할 수 없이 유리하다.

하지만.

‘내가 별로 생각이 없는데.’

저 인간 여자와 굳이 그렇게까지 엮어야 하나?

의욕이 없다.

열쇠만 얻으면 충분한데.

나는 상태창에 떠오른 정보들을 바탕으로 빠르게 추측을 옮었다.

“잘 생각해 봐,크렉소르 가문에 내려오는 열쇠. 혹시 제1상속자가 되어야 얻을 수 있는 거야?”

걱정스럽다.

그런 거라면 시간도 오래 걸릴 텐데.

예전처럼 전쟁영웅 같은 극적인 사건을 만들 수는 없으니까.

지금 건드리고 싶지도 않다.

시나리오고 뭐고.

열쇠만 얻고 빠질 수 있으면 그게 최선이다.

“열소]. 벌레 모형.”

나는 반복해서 강조했다.

그때 였다.

“어떻게… 그런 말을… 당신처럼 모멸감이 들게 말하는 인간은 정말 처음이야……

새하얗고 곱던 얼굴이 순식간에 붉으락푸르락해 졌다.

‘끔찍해.’

‘정말 싫어.’

'미친 거 아니야?,

‘최악이야.’

처참하게 일그러진 그녀의 입술 안에서 뭔가 짧은 어절들이 조용히 웅얼거려지고 있었다.

그녀는 두 주먹을 꼭 말아쥔 채 바들바들 떨었다.

공기가 싸늘하다.

‘이런……

카린은 상처받은 얼굴로 골목을 천천히 돌아 나갔다.

모멸감이라니.

뭘 어쩌라는 건가?

그냥 거래를 하고 싶었을 뿐인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분, 걸음이 굉장히 느릿하군요. 분명히 잡아 주기를 바라는 것 같은데……

뒤따라온 넥스몬드가 저편으로 사라지는 카린을 보고 물었다.

잠시 고민에 빠졌다.

녀석을 잡을 것인가?

정말 도와줄 것인가?

하지만 역시 곤란하다.

그럴 때 벌어질 일들을 상상하니 벌써 귀찮아지기 시작한다.

“내버려 둬. 일단 동방부터 가지.”

“예,알겠습니다.”

넥스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발동된 시나리오를 건드리지 않고 놓아둔다고 갑자기 사라지는 일은 없을 거다.

일단.

동방에 다녀오는 것부터 해결하고 돌아와도 늦지 않다.

‘갑자기 죽지는 않겠지.’

레안드로 후작을 동방으로 가자고 데려온 상황이다.

갑자기 노선을 변경하는 건 역시 무리다.

다시 레안드로와 선원들이 기다리고 있는 숙소로 돌아갔다.

“이제 오나?”

“경매장에서 볼일이 끝났거든.”

“내 건?”

내 거라니.

경매장에서 후작에게 줄 물건을 생각했을 리가 없다.

너무 자연스럽게 요구해서 무척 당황스러운데.

이럴 경우 선물을 주는 게 인간의 풍습일까?

정말 경매장에 다녀오며 선물올 안 사온 탓에 기분이 상한 걸지도 모른다.

‘갑자기 공격할지도 몰라.’

지금은 바다 위도 아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아무거나 대충 주자……

가만히 서 있는 녀석을 보면서,

인벤토리에 뭐가 있는지 점검했다.

‘명검 같은 걸 줄 수는 없지.’

목적지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더 강해지게 만들 수는 없다.

쓸모없는 걸 줘야 한다. 사치스럽기만 한 거.

이게 어떨까.

살짝 몸을 돌려 인벤토리를 전개.

갑옷 안에서 꺼내는 척을 하자.

무기류 대신 적당한 물건을 손에 잡는다.

“써 봐라.”

경매장에서 사긴 한 거다.

카린이 사고 싶어 했던 물건.

최고급 비단을 사용해서 제작한 말안장을 꺼냈다.

“으음.”

후작의 눈썹이 살짝 위로 들렸다.

“농담이었는데… 안감이 부드럽군. 받아 두지.”

품에서 뭔가 꺼내는 모습을 무척 주의 깊게 살폈던 듯하다.

하지만 이 정도 지나치듯 봤다고 뭘 알 수 있는 건 아니겠지.

안장을 의외로 기껍게 받은 녀석은 손가락 끝으로 안장 안쪽을 짚었다. 차분히 안장 이곳저곳을 계속해서

살피고 있다.

‘뭘 그렇게 보지.’

안장을 보고,나를 본다.

뭘 생각하는지 항상 찜찜하다.

음침한 녀석이다.

‘고맙다는 말은 굳이 안 받아도 되겠군.’

계속 안장을 들여다보는 녀석을 놓아두고, 바깥으로 나왔다.

하루를 쉰 다음,선장은 출항 전 간단히 브리핑을 했다.

“항해하기 딱 좋은 시기입니다. 동방으로 가는 지름길이 아주 깨끗한 시기지요. 흉포한 바다 마물들은

한 마리도 보기 힘들 겁니다.”

평소라면 두 달 넘게 걸려 돌아갈 거리를 드물게 지름길로 이용할 수 있다며,넥스몬드가 설명을 이었다.

“다만 마주칠지도 모르는 일종의 자연 현상이 있긴 합니다만……. 열에 한 번 정도 생기는 겁니다. 그리고 설사 일이 생기더라도 저희 힘으로 충분히 해결 가능합니다. 준비되어 있습니다.”

넥스몬드는 베테랑 상인이다.

쉽게 장담을 하지 않는 녀석일 터. 후작은 음울하게 눈을 빛내며 뭔가 항로에 대한 자세한 사정을 캐묻고 있었지만,나는 선장을 믿고 배에

올라탔다.

‘들어서 뭐 하겠어.’

어차피 배는 선장이 인도한다.

넥스몬드 함대는 북쪽 해안을 떠나 곧장 바다로 접어들었다.

한동안은 잔잔한 파도와 미풍이 함대를 사뿐 밀어 주었지만,근해의 끄트머리에서부터 훌쩍 파도가 높이 도약하기 시작했다. 돛을 밀어내는 바람도 점점 더 맹렬하게 표효하고 있었다.

같은 원해지만 또 달랐다.

제국에서 연합으로 향할 때보다 한층 바다가 변덕스러웠다.

선원들에게도 덜 익숙한 길인지, 배 안에 흐르는 긴장감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어떤 풍향과 풍속에도 넥스몬드 함대의 선원들은 유려한 솜씨로 돛을 조종했다.

변덕스러운 풍향의 흐름까지 전부 외우고 있는 것 같았다.

“만개!”

불어오는 역풍에도 돛을 모두 펴서, 다섯 척의 배는 지그재그로 길을 찾아갔다.

때때로 안개까지 끼며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일사불란한 움직임에

따라 선체가 부드럽게 움직인다.

육지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막막한 바다.

그 위에서 오직 나침반과 육분의에 의지해 가며 3주가 지났을 때였다.

‘후작은 뭘 하는 거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날따라 녀석이 보이지 않았다. 전날 아침부터 뭔가를 부지런하게 체크하더니,오늘 정오가 되자 아예 모습을 감췄다. 미유조차 갑판에 내버려 둔 채였다.

막 녀석을 찾아볼까 싶은 순간.

- 쏴•아•아•아•

바다 건너편.

어떤 질감이 새하얗게 일어나는 파도를 먹어치웠다.

바다가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뭐지?”

“으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에 말씀드린 그 자연 현상……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는 선장의 표정이 실시간으로 구겨지고 있었다.

“이상하군요.”

넥스몬드가 설명을 이었다.

“바다의 정령들입니다. 뭐든 자기 안에 뒤집고 삼켜 버리는 먼바다의 그림자들이죠. 이 루트면 열 번 중에 한 번 정도 만나는데 지금이군요. 한데… 숫자가 너무 많고, 범위가 지나치게 넓습니다. 마치 뭔가가 일부러 녀석들을 이곳에 부른 것 같은……

누가 저런 바다 정령들을 함대로 불렀단 이야기일까.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기괴하군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절망할 정도는 아닙니다.”

선장 넥스몬드가 주먹을 꽉 쥐고 빠르게 지휘를 시작했다.

“전원,포격 준비! 동쪽을 향해서 2번 대형으로!”

계속해서 폭풍우 곳곳에 뚜렷하게 투명한 형상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얗게 일어나는 폭풍이나 파도 그 자체보다,뚜렷한 질감이 느껴지는 정령이 훨씬 투명해 보인다는 사실은 상당히 역설적이다.

- 쿠구구구!

넥스몬드의 명령은 곧바로 나머지 네 척의 배로 전달됐다.

다섯 척의 배가 일제히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선체의 옆에서 각각 24문.

도합 120문의 대포가 투명해지는 바다를 조준하기 시작했다.

한 척에 24문.

대포를 싣는다는 건 몹시 무거운 포탄과 화약까지 잔뜩 적재한다는 이야기다.

화약은 웬만한 상품과는 무게를 비교하기 어렵고,대포가 반동으로 움직일 공간도 고려해야 한다.

대포 한 문을 빼면 족히 몇 배의 상품을 실을 수 있을 정도다.

장거리 항해라면 식량과 물 역시 여유 있게 실을 수밖에 없다.

즉, 이만한 무장을 갖춘 선단을 운용한다면.

넥스몬드가 동방 무역으로 다루는 상품들은 극소량으로 엄청난 이윤을 만든다는 이야기다.

- 과과과과과쾅!

바다 자체를 타깃으로 삼은 포격에 대양이 진동했다. 광역으로 밀려드는

정령들을 다섯 척의 배가 빙그르르 원을 돌면서 포격했다.

선체 옆에서 화염이 치솟았다.

자유 연합의 전열함급 이상으로 불법 개조까지 마친 대포는 끝없이 연사를 해댔고,선원들의 포술도 경이적이 었다.

하지만 거대한 포환에 맞은 물은 흩어져도 다시 물이 되었다.

적중할 때마다 물기둥이 솟으며 물의 정령이 물보라가 되어 흩어졌다.

처리가 됐는지 안 됐는지 구분도 힘들었다.

살도 뼈도 피도 내장도 없다.

투명한 형체만 있었다.

저건 그냥 물이다.

어떤 악의를 가졌는지도 판별하기 어렵다.

그저.

부딪친다면 물 위에 이질적으로 떠 있는 무언가를 간단히 휩쓸고, 부수고 전복시킬 거란 짐작만 쉽게 가능할 뿐이다.

- 과과과과과과쾅!

다섯 척의 우현으로부터 뿜어지는 백여 발의 포환이 다시금 해원을

난타했다. 화염에 이어 피어오르는 새까만 포연이 멀리까지 쓸려가서, 바다 정령들의 모습이 더욱 선명히 드러났다. 아직도 정령들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사방에서 덮쳐 오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많은 건 태어나서 처음인데……

평생을 바다에서 지냈을 것 같은, 족히 쉰은 되어 보이는 갑판장이 신음성을 흘렸다.

“정말 이상하군요……

그때 였다.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건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었던 녀석이 홀연듯 뒤에서 솟아오르며 핀잔을 줬다.

어딘가 여유로워 보이는 표정의 레안드로였다.

“아니,뭐……

절망적인 건 아니었다. 굳이 내가 움직이지 않아도 넥스몬드의 지휘 아래 바다의 정령들은 조금씩 분쇄 되고 있었다.

좌우현에서 번갈아 가며 포격하기 위해 원을 그리면서도 다섯 척의 배는 꾸준히 폭풍우 범위 바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정령들과의 거리도 딱히 좁혀지지 않았다. 아슬아슬한 상황이었지만, 절체절명의 위기라고 할 수는 없다.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닌가.”

자기는 하루 동안 사라졌으면서, 후작이 옆에서 부추긴다.

‘그래도……

너무 무심했나 싶다.

일제 포격이 정령들의 몸에 구멍을 내고 충격으로 물을 흩어트렸지만, 저들을 파괴하는 것보다 함대와의 거리를 벌리고 이곳을 이탈하는 게 목적이다.

어차피 죽여 없앨 수 있는 것들도

아니다.

‘밀어낸다.’

뭔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지만, 나에게는 간단한 해결책이 있다.

속성을 섞을 필요조차 없다.

가장 익숙하고.

인벤토리를 각성한 뒤 처음부터 활용했던 기능을 사용하면 된다.

- 우우웅!

투과율 제로.

이미 수없이 써왔던 힘.

- 쿠구구구구구궁!

공기가 사방으로 밀려났다.

저 정도의 정령들을 상대로 굳이 압축할 필요도 없다.

압축되지 않는다면.

반경 10미터.

30미터.

50미터.

영역은 한없이 넓어지고.

오직 안쪽에 다섯 척의 배를 두고 밀어 버린다.

정령들은 보이지 않는 힘에 밀려 순식간에 흩어진다.

공기도, 파도도,폭풍도,정령들도 이쪽으로 다가오지 못한다.

- 퍼벅! 퍼버벅!

어떤 녀석들은 막의 존재를 받아 들이지 못하고 억지로 버티다 그대로 몸이 터져 버린다.

“어? 어어?”

나는 칼도 들지 않았다.

그냥 갑판 위에 서 있을 뿐이다. 발동하는 영역은 보이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선장과 선원들은 갑자기 밀려나는 정령들을 보고 홈칫 굳어 버린다.

“아•니••• 어떻게"' 이현"* 설마*.!”

뒤에서 지켜보는 후작이 눈치라도 준 건지,특별히 관찰력이 좋은 건지 넥스몬드가 내 쪽을 바라본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상에… 이럴 수가……!”

의미가 없다는 걸 알아차렸는지, 어느새 선장은 포격을 멈추라고 지시한 상태였다.

그때쯤 되자 다섯 척의 선원들이 전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전 함선,만개! 전진 대형으로! 무시하고 우리 갈 길을 간다!”

다섯 척의 범선이 아직 정령들이 버티는 전방을 그대로 돌파했다.

대포 심지에 붙은 불도 꺼 버리고, 갑판에서 돛줄을 조정하는 선원들은 깨끗이 반으로 갈리는 바다를 보며 가슴까지 부여잡은 채 묘한 감동을 느끼는 것 같았다.

“이제 됐나?”

나는 갑판 위에서 천천히 물었다. 갑판장은 입만 삐끔거리며 아직도 나를 홀끗홀끗 보고 있었고.

선장이 눈을 껌뻑이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을 때였다.

“휘이익.”

난데없이 작은 휘파람이 들려왔다. 뒤를 돌아봤다.

계속 나를 지켜보던 레안드로가 뭔가 알겠다는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435호후 눈먼 달,지는 꽃 (12)

아무래도 수상하다.

레안드로 폰 바티엔느는 애초에 정령 퇴치를 조금도 거들지 않았다.

뒤에서 팔짱을 끼고 가만히 나를 지켜보고 있던 것 같다.

살짝 펴진 표정이 불길하다.

‘젠장.’

인벤토리로 한참 두들겨 팬 다음 만신창이가 되었던 녀석이, 갑자기 깨달음을 얻어 인벤토리를 베며 내게 대항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곤란하다.

배 다섯 척을 감싸고 있던 영역을 빠르게 해제했다.

갑판 위에 선 레안드로의 회청색 머리칼이 다시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흩날린다.

“뭘 기분 나쁘게 쳐다보는 거냐?”

씩 웃는 얼굴의 후작에게 뒤늦게 따져 물었다.

“별로.”

녀석이 어깨를 으쓱한다.

옆에서 한 번 봤다고 뭘 얼마나 알 수 있을까 싶었지만.

의도치 않게 밑천이 털린 기분이

아무래도 껍껍하다.

“너… 설마?”

혹시나 싶었다.

덮쳐온 정령의 숫자가 평소보다 이상할 정도로 많았고,나타나는 범위도 묘할 만큼 넓었다는 선장과 갑판장의 말이 떠오른다.

〈뭔가가 일부러 녀석들을 이곳에 부른 것 같은…….>

이들은 항상 하는 항해.

차이점이라면.

우리 둘의 존재뿐이다.

‘나는 가만히 있었고.’

역시 후작이 의심스럽다.

애초에 꼬박 한나절을 어딘가로 사라져 있었기도 하고.

하지만 대체 어떻게 부른 걸까? 바다 정령들이 모여들게 하다니. 방법이 감도 잡히지 않는다.

이 녀석에게 그런 수완도 있다면, 까도 까도 매운 양파 같은 놈이다.

“피곤하군.”

놈은 한 것도 없으면서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아니,한 게 있다면… 바로 그게

문제지.'

어쨌거나 이미 벌어진 일이다.

당했어도 어쩔 도리는 없다.

이제 와서 돌이킬 수도 없다. 나는 하얗게 찰랑이는 파도를 보며 갑판에 서 있었다. 혼자 남겨진 내게 선장이 말을 걸었다.

“저……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다.

진지한 그 눈빛에 강한 기대감을 느꼈다.

‘정회원 가입을 권하겠지.’

상인 연합 정회원.

한 번에 카드 다섯 장을 줄 거다.

그것 외에는 없다.

정령 사태로 능력도 보여 줬다.

동방에만 도착하면 상인 연합의 효용은 일단락되지만.

일단 카드를 받아 둬서 나쁠 건 전혀 없겠지.

그러나.

튀어나온 건 생뚱맞은 질문이다.

“한데… 두분,어떤 사이십니까? 궁금합니다.”

어떤 사이라니.

뭐라고 해야 할까.

진지한 눈빛이었다.

배를 타기 전 해안에서는 후작과 격돌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선물도 준 데다가,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하다.

어떤 사이라고 해야 하나.

이해관계가 맞아서 일시적으로 뭉친 사이?

삐걱거리다 최근에 친해진 사이?

바다정령의 대량 출현.

방금 벌어진 일이 수상하긴 하지만, 같이 다니는 인간을 너무 매도하면 오히려 안 좋게 보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넥스몬드도 인간이고,

후작도 인간이다.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고,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타인을 배려하며 행동하는 게 인간이 항상 말하는 윤리였던 것 같은데.

좋게 말하자.

“소중한 내 일행이라고 말해 두지. 우리는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 저 녀석,차갑거나 무섭게 보여도 나름대로 속정이 깊어.”

분발해 봤다.

레안드로의 분위기와 어울리게, 적절한 어휘를 구사한 것 같다.

서큐버스님의 서재에서 항상 책을

읽어 왔던 보람이 있다.

하지만.

갑판 위에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아… 그렇군요. 이제 사흘 뒤면 해안에 도착합니다. 방금 활약해 주신 것……. 다시 한번 깊이 감사 드립니다!”

선장이 뭔가 재빠르게 말을 맺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딘가 어색하다.

‘으응? 카드는……?’

주지 않는다.

문득 실언을 깨닫는다.

나는 지금 제국 대상조와 단둘이 동행하고 있다.

해안에서 싸우는 모습을 봤기에 일말의 기대를 걸고 나를 떠봤을지 모르지만,거기에 후작과 친하다며 잘못된 쐐기를 박은 거다.

‘이런.’

제국에 완연히 적대적인 모습을 보였던 저번과는 다르다는 이야기.

〈적어도 황실의 편은 아니실 게 확실합니다. 황실을 지지하면 불을 질러 제국군을 따돌리셨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게 중요한 건지도 모른다.

‘뭐……

굳이 지금 상인 연합의 정회원이 될 이유는 없지만.

조금 쓸쓸한 기분이 들기는 한다.

‘저 녀석은 이런 데까지 사사건건 걸림돌인가.’

레안드로가 들어간 자리를 가만히 노려봤다.

* ♦ *

안으로 들어간 후작은 하루종일 선실 안에서만 시간을 보냈다.

“방해하지 말라고 합니다. 뭔가 굉장히 집중하시는 것 같은데……

배식 담당 선원이 후작의 근황을 전했다.

식사도 없이 선실에서 집중하고 있다고 했다.

“별다른 건 없나?”

“푸른색,하얀색 빛이 창문으로 비쳤습니다.”

“빛이라고?”

“창문 너머로 봐서 불투명하지만 원이 그려지는 것 같기도 하고…….

촘촘히 빛의 그물이 짜여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도대체 무슨 현상이란 말인가.

불안하다.

하지만 내가 선실에 가까이 가면 미유가 험악한 표정을 짓는 탓에 직접 확인해 보기는 무리.

혹시.

내리자마자 공격하는 게 아닐까.

‘확 기습해 봐?’

하지만 정말 한 번에 인벤토리를 알아냈다고 생각하는 건 누구라도 무리겠지.

지금 이 시점에서 싸움을 걸 것도

아니고.

그런 무모한 짓을 해봐야 남는 건 하나도 없다.

‘좋게 생각하자.’

녀석의 성장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다.

‘적당히 키웠다가……

위험하다 싶으면 기습적으로 먼저 죽여 버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괜찮은 먹잇감이 될지도 모른다.

강해지면서 정수 흡수가 가눙한 녀석들이 빠르게 줄어드는 판에, 레안드로가 강해지는 건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도착했습니다!”

사흘이 지났을 때.

선장의 손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저 멀리 육지가 보였다.

안에 머무르던 선원들도 갑판으로 나와 들뜬 표정으로 천천히 정박을 준비했다.

‘이곳인가……

열은 안개 속에 가로놓인 해안은 끝없이 길었지만,해안의 대부분은 녹갈색 이끼가 낀 바위 절벽이라 배를 댈 곳은 정해져 있었다.

안으로 움푹 들어간 좁은 만濟.

이미 열 척의 배가 정박해 있고,

만濟의 모래를 넘어 안쪽 고지대를 보면 하얗고 높은 초소가 있었다.

엠버의 관제탑 정도는 아니었다. 하나 요괴를 상대로 수련하러 가는 탐험지.

문명이 발달하지 않았다는 ‘섬’에 세워진 탑이라고 하기엔 놀랄 만큼 크고 세련된 형상이다.

후작도 옆에 서서 초소를 바라봤다.

“저게 당신이 말한〈선발대들〉인가?”

“그렇습니다.”

선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의 존재에 대해서는 배에서 이미 자세히 설명한 뒤였다.

〈선발대들乂

‘섬’에 발을 들인 대륙의 인간들은 원주민과의 교류, 요괴 사냥에서 온갖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리고 나중에 오는 자들은 다시 같은 시행착오를 겪지 않게 해 주기로 결심했다.

섬 곳곳을 탐험하고 조사한 그들은 던전과 요괴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후배들에게 제공한다.

물론,상당히 비싸게.

‘원주민도 아니면서.’

〈선발대들〉에게 정보를 사지 않은

던전에는 아무도 출입할 수 없다. 발견되지 않은 던전도 마찬가지. 심지어,필드에서 만나는 요괴도 모두 다〈선발대들〉의 허락을 받고 사냥해야 한다.

특정 던전이나 요괴도 아니다.

이들은 구역을 갈라서 자신들이 ‘땅’ 자체의 주인이며,그 위에서 나타나는 건 그들에게 귀속된다고 주장한다.

일견 생각해 보면 어처구니없는 녀석들이다.

불합리하다.

그러나.

처음 동방을 개척할 만한 힘을 가진 인간들의 실력과 인맥이 대단하지 않을 리 없고.

초기에 탐험하던 모험가들 중에서 〈선발대들〉이 마음에 들지 않었던 외골수 타입의 인간들도,가만히 팔짱 끼고 있어도 자신을 위해서 기득권을 만들고 나눠 주는 자들을 굳이 배척하지 않았다.

정의가 아님을 알아도.

패거리 짓고 우기는 모습이 그리 탐탁치 않더라도.

억지스러운 권리를 강요하기 위해 폭력까지 거리낌 없이 동원해도.

무조건 ‘앞서 온’ 자신들의 편을 들어주기에 훼방을 놓지 않는다.

게다가.

이들은 섬과 교류하는 주요 단체인 〈상인 연합〉과 커넥션을 맺어서, 정해진 숫자의 인원에게는 무료로 무사수행을 지원해 준다.

안내원까지 붙어서.

원하는 만큼.

자신들 외에 힘을 가진 집단에게 융통성까지 있었고,이것이 섬에서 그들의 법이 통용되는 비결이었다.

〈실질적인 국가 역할이군.〉

〈그렇습니다.〉

여기까지 항해할 실력이면 굳이 설비도 필요 없다는 걸까.

그저 모래만 깔린 백사장으로.

다섯 척의 배가 아무 손상도 없이 부드럽게 정박했다.

백사장 위에 서 있던 묘한 얼굴의 인간이 선장을 맞이했다.

대륙에서 본 적 없는 얼굴.

“혼혈입니다.”

어느새 조금 친밀해진 갑판장이

묻지도 않았는데 설명했다.

“선장님! 오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반년 만이시군요.”

[동방어 Lv.l을 회복합니다!]

‘들은 것뿐인데.’

예전의 동방어 스킬을 회복했다.

기계공학도 그렇고.

비역에서 힘이 뽑혀 나간 뒤로도, 지식 계열 스킬은 접하는 순간에 지연 없이 원래 수준으로 회복되고 있었다.

“반년 전에 왔나?”

선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거듭 저를 놀라게 하시는군요. 설마 동방어까지 하시는 겁니까?”

“기초도… 정말 어렵던데……

갑판장은 입을 벌렸고.

“흐음……

후작도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런 건가.

“뭐,오기 전에 책을 살짝 봤다.”

정확히 말하자면 챈들러라는 책을 홉수한 거지만.

선장도 동방어로 인사를 받았고,

해안가에 서 있던 인간은 씩 웃고 이후로는 계속 대륙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일이 잘 진행되는 것 같아 후작을 슬쩍 돌아봤다.

선실 안에서 뭔가 해낸 것 같던 녀석이 내리자마자 나를 공격할까 싶었지만.

의외로 칼자루에 손도 안 올리고 느긋한 자세로 얌전히 있다.

주의력이 잔뜩 녀석에게 쏠려 있는 와중에 앞에서는 대화가 원만하게 진행된다.

“넥스몬드 선장님,이번에는 어떤 물건을 구하러 오신 겁니까?”

“글쎄요… 물건도 있지만,오늘은 일단 모험부터 부탁드릴 겁니다. 무사수행이지요.”

선장은 배 안에서 말을 맞춘 대로 이야기를 진행했다.

“아하! 좋습니다. 귀한 분들께서 모험을 원하시는 거군요. 꾸준히 손님을 데려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기 서 계신 두 분인가요?”

혼혈 여자가 웃는 표정으로 나와 레안드로를 눈짓했다.

선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본토로 향하는 단서를 찾는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고?〉

〈아니,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지도에 표시된 곳에 데려가 달라고 하는 것도 피하라고 했다.

〈섬은 자기들이 모조리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할 텐데,특정 위치를 지목하는 것도 의심을 살 겁니다.〉

〈뭐가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라면 출입을 금지시키고 철저히 조사에 들어가겠죠.〉

넥스몬드의 조언이 떠오른다.

물론 출입을 금지시킨다고 힘으로 뚫지 못할 건 아니지만.

훼방을 받거나,처음부터 마찰을 일으킬 필요는 전혀 없다.

굳이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다.

그 점은 후작도 동의했다.

‘일단 안내원과 함께 섬 깊숙이

들어간 뒤 따돌려 보라고 했지…… 마치.

의도치 않게 길을 잃은 것처럼. 그게 가장 이상적인 시나리오다.

애초에 동방으로 가는 길이라며

지도에 표시된 위치도 섬의 심처. 가장 깊숙한 곳이었다.

모험을 한다며 계속 들어간다면 어차피 가까워진다.

“두 분,이쪽으로 오십시오. 다른 한 분의 말도 준비했습니다.”

짧은 머리 여자가 친절한 얼굴로 우리를 안내했다.

- 히히힝.

장단을 맞춰 주기 위해 말 위에 을라탔다.

잘 훈련된 순종적인 녀석이다.

“저는 일주일 정도 소소한 물건을 구하다가… 이후에는 상인 연합의 동방 지부에서 쉬고 있겠습니다. 편하실 때 언제든 돌아오시지요.”

선장은 초소 반대편을 가리켰다. 높이 솟은 나무들 너머로 연기를 내며 흐르는 샘물과,책에서 봤던 동방의 건축 양식이 보인다.

기와지붕 아래로 화려한 종이등이 숲에 한차례 걸러진 바닷바람에 슬슬 혼들렸다.

경매장에서 봤던 연합의 사람들이 무척 좋아할 만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아이작의 말을 들어서 그런 걸까. 어쩐지 모두가 계획되고 만들어진 ‘가짜’처럼 보인다.

해안의 풍경을 뒤로하고 안내를 따라 계속 안으로 들어갔다.

해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안에 들어가도 풍경은 대부분 무성하게 우거진 나무뿐이었다.

‘길 뚫기가 힘들었겠군.’

중간중간 평평한 개척지에 거주지로 보이는 곳도 있었지만,창고와 집, 각종 초소가 밀집되어 있는 해안가에 비하면 한적했다.

안으로 깊이 들어갔을 때.

내가 선물한 안장 위에 앉아 가던 후작이 갑자기 미간을 좁혔다.

“확실하군.”

“조용한 곳에서 봐도 같아.”

뭐가 같다는 걸까.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

“저 녀석,마물의 냄새가 묻었다.”

레안드로는 혼혈 안내원을 보며 작게 말했다.

“마물의… 냄새라고……?”

“아주 진하다. 만져질 정도로군.”

“그런 냄새도 있냐?”

나한테도 나는 걸까. 몸 구석구석을

들썩이자,녀석이 싸늘한 표정으로 비웃는다.

“자기 냄새는 모르지.”

스킬을 쓰라는 걸까.

‘탐지.’

성실하게 우리를 안내하는 눈앞의 여자를 살폈다.

어딜 어떻게 샅샅이 감지해 봐도 상대는 인간이었다.

15레벨 탐지로 알아보지 못하는 변장을 할 수 있는 상대가 정말로 있기는 할까?

물론 있기야 하겠지만.

이런 해안가 초소에서부터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고?

의아하다.

“인간이 아닌 것들과 아주 가까이 지내는 것 같은데……

“정작 인간이 아닌 것들은 어디 있는지 모르겠군. 지금까지 오며 쭉 살폈지만 마물은 너뿐이다.”

후작은 고민에 빠진 듯했다.

인간인데, 마물 냄새라니.

넥스몬드와도 부드럽게 소통하던 눈앞의 인간이.

〈선발대들〉소속이라던 여자가.

섬에 사는 요괴들의 끄나풀이라는 이야기인가.

‘그냥 넘길 수도 없는데.’

후작의 직감은 몹시 날카롭다.

어떻게 상황을 파악하지?

위협해 봐야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당신.”

후작은 여자에게 찌르듯 물었다.

“예?,’

귀까지 오는 짧은 머리의 여자가 고개를 돌린다.

“네 몸에서 마물의 냄새가 난다.

해명해라.”

그게 끝이었다.

다짜고짜 해명… 하라니.

저렇게 대놓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 줄이야.

설마 제국 대상조로서 일 처리도 저따위로 하는 건가?

문득 인간들이 불쌍해졌다.

하지만 안내원은 눈만 껌뻑이고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저… 말입니까?”

436호후 눈먼 달,지는 꽃 (13)

차가운 긴장감이 허공에 흐른다.

저렇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될 만큼 수상하다는 건가?

지금부터 계속 싸우면서 섬 깊이 들어가야 하는 걸까.

두려울 거야 없지만.

역시 귀찮아질지도 모른다.

‘학살극을 벌여야 하나.’

그러나 안내원은 태평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그거야 매일 녀석들을 사냥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동방으로 모험을 오신 손님들을 안내하려면 요괴와 항상 부딪히는 게 당연하지요.”

“…거짓말은 아니군.”

레안드로가 미간을 좁혔다.

‘나도 이재 알겠네.’

인간의 신체 반응이라는 건 거의 비슷하다.

경매장에서 카린에게 했던 것처럼, 안내원의 신체 반응을 계속 탐지하고 있었기에 진실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럼요. 당연히 진실입니다.”

후작이 미간을 좁혔다.

그가 가하는 압박감은 원한다면 아예 인간 여럿을 손끝도 안 대고 기절시킬 수도 있을 정도다.

저 속에서 안내원이 신체 반응을 관리하며 거짓말을 할 수 있을까?

기습적인 물음 속에서 레안드로를 상대로 저렇게 능숙한 연기를 하며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건.

제국 전체를 통틀어 봐도 몇 명 되지 않을 거다.

하지만 아직도 레안드로는 찜찜한 표정이었다.

안내원이 분위기를 풀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동방은 아주 위험한 곳입니다.”

“넥스몬드 영사님의 소개를 받은 귀한 분들이니,제가 항상 옆에 붙어 있겠지만,아주 조금이라도 타이밍이 어긋나면 목숨이 위험할 수 있으니… 후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시기 바랍니다.”

‘과장이군.’

게다가 계획되고 연습된 멘트.

절대 즉흥적이지 않다.

그동안 몇 번이고 거듭해 왔던, 틀에 짜인 말임이 느껴진다.

계속해서 녀석의 반응을 탐지하고 있었기에 역시 금방 알아차렸다.

이 요령을 의식하고.

활용하기 시작하자 세상이 전혀 다르게 보인다.

일단은 인간 한정이라도 진위가 판별된다는 건 굉장한 느낌이다.

앞에는 높은 누각이 보인다.

그곳으로 가는 좁은 길을 사이에 두고 동양풍의 가게들이 양옆으로 빼곡하게 늘어서 있다.

지금까지 없던 인간들이 어디서 이렇게 나타났는지 그 골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다들 비장한 표정이네.’

“저희가 온 건 지름길이었습니다. 특별한 손님들만 이용할 수 있죠.”

안내원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여기는 모두 함께 들어가는 공통 입구라 좀 혼잡합니다.”

‘과연.’

넥스몬드의 이름값이 먹힌 건지, 우리처럼 안내원을 옆에 붙이고 온 무리는 거의 없었다.

“5인 이상은 이쪽입니다!”

“쥐 사냥터로 가시는 분!”

“원숭이 사냥터로 가시는 분!”

좁은 길 끝의 누각을 기점으로, 〈선발대들〉의 안내원이 빼곡하게 몰려든 인파를 분류하고 있었다.

‘인간은 여기 전부 모아 놨군.’

“휴… 너무 힘들었어. 어서 숙소로 돌아가자고.”

“이제 다음 코스는 온천에서 청주 띄워 놓고 마시는 거야. 이거야말로 이번 여행의 목적이었지!”

“좋네!”

수련이 아니라 아예 관광처럼 온 녀석들도 많았다.

술을 마시러 여기까지 온 건가.

대단한 애주가라고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술이 아니라 풍경에 이미 취했네, 같은 소리를 흥얼흥얼 중얼거리는 여행객의 시선을 따라갔다.

빼곡한 숲을 배경으로 솟아오른 화려한 누각과 탑들이 보였다.

하지만 탐지를 발동해서일까.

혹은 아이작의 말을 들어서일까.

저것들이 얄팍하게만 보였다.

물론 이상하게 보자면 한도 끝도 없었다.

애초에 던전에 이렇게 인간들이 많이 몰려 있는 장면도 생소하다.

“자네, 전혀 못 보던 얼굴이구먼.

초심자인 것 같은데 조심하라고!” 지나가던 남자들이 후작을 향해 거들먹거리며 지나갔다.

후작을 알아보는 인간은 없다.

거리 때문인지,자유로운 항해가 제한되어 있어서인지.

제국보다는 자유 연합에서 온 것 같은 인간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젊은 레안드로를 향해서 가르치듯이 의기양양하게 이런저런 충고를 해댔다.

레안드로는 태어나서 저런 소리를 처음 들어 보는 사람처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쩐지 고소한 기분이다.

“가시죠. 여기는 초보자 지역이라 두 분이 머무르실 곳은 아닙니다.”

“뭐… 야?”

마침 적절하게 끼어든 안내원은, 당혹스러운 표정의 인파를 제치고 깊은 숲으로 향하는 계단 위쪽으로 을라갔다.

삼나무 숲을 지나자 곳곳에 넓은 개천이 흐르는 모래밭이 펼쳐졌다.

반경 3km 이상.

〈진짜 해안〉으로부터 이미 상당히 떨어진 위치였는데.

바닷물 냄새가 난다.

일부러 환경을 조성한 인공적인 느낌이었다.

“사냥 중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곧바로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안내원이 앞을 가리켰다.

옆에 개천이 흐르는 모래밭 위를 거대한 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크긴 하군.’

몸길이는 옆으로 7-8미터 정도에 신장은 2미터를 훌쩍 넘는다.

흔들리는 거대한 집게들은 그보다 훨씬 위에서 딱딱 마주치고 있다.

일부러 연출한 건지.

아니면 정말 죽은 뭔가가 있는지 거대한 푸른 집게에는 붉은 피와 내장이 들러붙어 있었다.

푸른색 껍질 곳곳에 숭숭 나 있는 굵은 털은 게의 움직임에 따라서 함께 혼들렸다.

- 파직! 파지직!

집게발 사이에 전류까지 흐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커다란 게들을 보며 안내원은 자기가 키운 병사를 보는 것처럼 씨익 웃었다.

“넥스몬드 님께서 강한 분들이라고 강조하셔서 특별히 모시긴 했는데, 역시 좀 무리겠죠? 다른 곳은……

내가 말을 끊었다.

“저들을 전부 없애면 다음 장소로 데려가 주나?”

“네? 아… 네. 그, 그거야… 예.”

“혼자 하지.”

후작이 옆에서 팔짱을 꼈다.

뒤로 물러서는 정도는 아니지만, 겁먹은 게 분명한 말에서 내렸다.

괜히 여기서 저런 게에 먹힌다면 곤란해진다.

안내원과 적당히 장단 맞추기가 어렵다.

나는 혼자 앞으로 나섰다.

여덟 개의 다리로 몸을 지탱하고, 거대한 두 개의 집게발은 가까이 다가오는 생명체를 분쇄할 것처럼 양쪽으로 활짝 벌리고 있다.

다가가며 주위를 둘러봤다.

‘우리만 있는 건 아닌데.’

맨몸의 인간은 없다.

- 쿵!

- 쿠궁!

격돌하는 몇 기의 철인이 보인다. 신장 5미터가 넘는 철인 두 기가 대게 하나에 붙어서 제법 여유롭게 싸우고 있었다.

‘돈 좀 있는 녀석들이군.’

강철로 된 거체를 바다 건너까지 데리고 을 수 있다면 연합에서도 상당한 지위의 인간들일 거다.

동방 탐험은 확실히 연합의 높은 인간들에게 유희인 모양이다.

- 까앙!

3미터에 가까운 검이 휘둘러진다. 폭 40cm, 두께 6cm의 그 강철은 검이라고 부를 수도 없어 보인다.

‘도대체 얼마나 무거운 거야.’ 그만큼 움직임이 느리다.

나는 그냥 커다란 돌 하나를 줍고 가까운 게에게 집어 던졌다.

목표는 정확히 눈 사이다.

- 부응!

빠른 속도로 집게발이 교차한다. 제일 신경을 자극할 만한 곳이니

태연히 있을 수는 없겠지.

‘파악은 끝났고.’

가동 공격 범위는 이제 한눈에 보인다.

애초에 공격을 받는다고 대미지를 입을 리도 없다.

이건 그냥 장난이다.

내 수준에서 저건 그냥 대게고, 조금 커졌을 뿐이다.

심지어 검기를 쓸 것조차도 없다.

‘이 정도면 죽겠지.’

나는 적당히 얇고 긴 플랑베르쥬를 꺼냈다.

다른 투핸더보다 손잡이가 30cm

정도로 짧은 편이고.

몸체에 비해 칼날만 훌쩍 길어 1.5미터 정도다.

후작은 인벤토리에서 칼이 갑자기 나오는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본다.

‘괜히 꺼냈나?’

바다의 정령을 밀어내는 것까지 본 마당에 이 정도로 뻘 건 없다.

어차피 지금 녀석이 볼 수 있는 내 실력은 하나밖에 없다.

내려치기다.

- 좌악!

다리를 묶거나 잘라서 움직임을 봉쇄할 것도,위협적인 집게발부터 무력화할 필요도 없다.

나는 그냥 허공에 훌쩍 뛰어올라, 거대한 게를 반으로 잘라 버린다. 피와 내장이 묻은,기껏 활짝 벌린 집게발에 힘이 막 들어가기도 전에 몸을 잘라 버린다.

순수한 검술 레벨만으로도 두꺼운 껍질은 물 가르듯 잘려 버렸다.

- 푸쉬식!

게가 반으로 잘리는 순간 새하얀

연기가 뿜어지더니 시체의 크기가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뭐야?’

안개처럼 시야를 가리는 연기가 계속 게의 몸에서 뿜어졌다.

연기가 모두 걷힌 자리에 남은 건 고작 팔뚝만 한 크기의 정말 평범한 바닷게 한 마리였다.

“묘하군.”

후작이 짧게 중얼거렸다.

과연 그러했다.

제국의 던전에서는 이런 현상은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었다.

‘동방은 뭐가 다른 건가?’

- 서걱!

달려드는 다음 녀석을 베어 갔다. 다섯 마리쯤 해치웠을 때도 모조리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흐음……

고개를 갸웃하던 후작도 어느새 합류했다.

녀석은 칼끝에 검기를 날카롭게 세워 게의 급소를 찔렀다.

한 번의 찌르기에 껍질이 뚫리며 한 마리씩 곧장 쓰러진다.

녀석의 검에 죽은 녀석도 푸시싁

연기를 내며 크기가 쪼그라든다.

순식간에 모래밭에 초토화되고, 남은 건 인간 팔뚝보다 더 작은 게 열다섯 마리의 시체뿐이다.

거대한 것들의 시체마저 모조리 쪼그라들었기에 백사장은 기묘하게 텅 빈 느낌이었다.

남은 건 철인 두 마리와 아직도 구석에서 싸우는 하나뿐.

“거대화 주술인가.”

후작이 낮게 중얼거렸다.

팔뚝만 한 평범한 바닷게를 일부러 거대화시킨 거라면.

대체 누가 그랬단 말인가?

레안드로는 거기에 대해서 별다른 의문조차 표하지 않는다.

담담하게 안내원을 바라본다.

“다음은?”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 정도의 몬스터는 C급 정도의 수준이다.

동방에서 기분을 낸다는 정도의 의미밖에 없다.

굳이 시간을 지체할 의미는 없다.

강해도 이렇게 거대한 녀석들을 상대할 때는 긴장하게 되는 경우가 많지만,우리는 그런 수준도 이미 훌쩍 뛰어넘었다.

“그게……

안내원은 경악과 불신에 가득 찬 표정이다.

이쪽을 향하는 경악의 눈길은 물론 안내원뿐만이 아니다.

저 멀리서 아예 철인에 탑승한 채 싸우는 녀석들도 있다.

간신히 한 마리를 처치한 자들이 싸움을 멈추고 경악에 찬 눈길로 이쪽을 바라본다.

아무래도 말 한마디 걸고 싶은 기색으로 천천히 다가온다.

우리도 그걸 모를 리는 없지만, 굳이 여기서 더 관계를 복잡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카린도 버리고 왔는데,뭘.’

안내원을 재촉해 모래밭을 빠르게 벗어났다.

“다음?”

“다… 다음은……

안내원이 말을 더듬었다.

“이번은 처음이라서 비… 비교적 쉬웠지만……. 다음은 정말! 정말로! 위험한 곳입니다.”

작아진 게들의 시체를 몇 번이나 뒤돌아보는 안내원을 따라 빠르게 다음 사냥터로 이동했다.

빨리 처리할수록 섬 안으로 깊이

들어간다.

실력을 다 보여 줄 필요도 없지만, 굳이 시간을 끌 이유도 없다.

후작도 비슷한 생각인 것 같았다.

- 다그닥! 다그닥!

질주하는 말 위에서 얕은 산 하나를 타 넘고 깊은 계곡으로 들어갔다.

침식으로 만들어진 기암괴석들과 곳곳의 폭포가 아름다운 장소였다.

하얀 연기를 뿜고 있는 계곡 안의 동굴을 배경으로 졸졸 흐르는 냇물, 그 근처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는

동물들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하얀 연기를 뿜는 구멍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사슴도, 말도, 소도 줄어들었다.

‘아니… 풀 자체가 없군.’

입구에서 하얀 연기를 뿜는 동굴은 독벌레들이 우글거리는 곳이었다. 원래 크기의 수십 배가 된 개미, 전갈,거미들이 모인 곳에서 지독한 악취가 흩러나왔다.

“벌레… 싫군.”

거대화된 독충들의 대규모 난교 파티를 방불케 하는 동굴에서 그가 칼을 빼들었다.

“힘은 필요한 만큼만 쓰자.”

그가 낮게 말했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까지 숨어서 지켜보는 걸까.

곳곳에서 계속 시선이 느껴지는 건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샅샅이 동굴을 탐지해도 인간이 숨어 있는 기색은 없다.

인간이 아니면 대체 뭐가 그렇게 줄곧 우리를 보고 있단 말인가?

기괴했다.

레안드로가 신경 쓰인다는 눈빛을 보낸다.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런 사이는 아니지만.’

정말 어딘가에서 느껴지는 시선이 신경 쓰인다는 눈빛인지 어떤지도 모르고.

거대한 독벌레들과 적당히 간격을 유지하면서 하나씩 처리했다.

레안드로는 싫다면서도 벌레 위에 을라타서 칼을 휘두르고,쑤셔박고, 꿰뚫었다.

차근차근 처리한 독충들의 시체는 이번에도 하나같이 평범한 벌레의 크기로 쪼그라들어 있었다.

수십 분의 일로.

“더 강한 곳은 없나?’

“얼마나" 열심히 기른 것들인데……

〈선발대들〉의 여자는 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중얼거렸다.

“뭐라고?”

“아… 아닙니다. 다른 곳으로 안내해 드리죠.”

437호후 눈먼 달,지는 꽃 (14)

길렀다니.

계곡 안의 저 거대한 독벌레들을 자기가 만들어 냈다는 건가?

작디작은 혼잣말이지만 송곳처럼 날카롭게 머리에 박혔다.

후작도 못 들었을 리는 없었다.

‘역시 무언가의 번데기… 복제… 〈놀이공원〉이라는 건가.’

이미 반복해서 레플리카라는 말을 들었을 때문일까.

놀랍지도 않았다.

이〈사냥터〉가.

동방을 모조한 작은 섬이 베푸는 놀이라는 거다.

이런 체험의 공급자가 평범하게 보이는 인간들인〈선발대들〉이라는 사실은 흥미로웠지만.

그 배후에 뭐가 있을지는 모른다.

안내원의 구겨지는 얼굴을 보고, 시니컬한 표정으로 입술 끝을 살짝 비트는 후작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단순히 사냥터를 독점하고 이득을 챙기는 게 아니라,아예 사냥터를

‘만들어 낸’ 거라면.

〈선발대들〉의 진짜 목적과 정체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이해할 수 없었다.

사냥터를 독점하는 이득.

적지 않을 거다.

그러나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냥터를 만들어 내고.

저 거대한 것들을 기르는 노력에 비하면 어떨까?

혼란스러웠다.

'애초에 저런 걸 길러 낸다는 게 가능하기는 할까?'

그렇지만,관리되지 않고 있다고

보기에는 사냥터 구역이 지나치게 잘 구분되어 있다.

‘저놈은 분명히 평범한 인간인데.’ 과한 생각일지 모른다.

단순히 사냥터를 지키고만 있는 무리일지도.

‘후작과 상의해 볼까?’

흘긋 그쪽을 봤다.

단단한 무표정은 아직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았다.

어쨌거나.

위험한 상황이 벌어진다고 해도 후작이 옆에 있다.

여차하면 녀석을 방패로 삼을 수

있을 거다.

일단 계속 가보자.

겪는 만큼 느껴지는 게 있겠지.

“다음.”

안내원을 재촉했다.

“여기는 정말 위험한 곳인데……

♦ ♦幸

하지만 결론은 같았다.

거대화된 사마귀가 출현하는 굴, 몸이 비늘로 덮이고 손발에 갈퀴가 있는 괴물이 출현하는 계곡.

길이 15미터 정도의 민달팽이가 나오는 늪.

움직이는 청동 사자상들과 싸우는 신전까지 전부 가볍게 지나쳤다.

‘위협은 전혀 안 되는군.’

물론,나와 후작이 함께 다니며 위협이 될 만한 적을 바란다는 게 터무니없는 바람일 수도 있다.

“어… 어떻게……. 여기까지 이렇게 빨리 오는 분들이 있다니……

[레벨이 올랐습니다!]

[죽음의 기사 Lv.l2(new!)]

차분히 스랫을 분배했다.

이렇다 할 스킬을 쓸 것도 없이 순수한 검술과 스탯만으로 싸우고 있다.

힘과 민첩이 올라간 만큼 사냥에 미세하게 가속도가 붙는다.

‘그래도 좀 이상한데.’

레벨이 오르는 속도가 더디다.

지나칠 정도로.

사냥터를 계속 돌아다녔는데도, 레벨이 4밖에 오르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포인트 같은 것도 전혀 들어오지 않는다.

자연히 의욕도 사라졌다.

기껏 데려온 녀석을 활용한다는 생각으로 후작에게 대부분 처리를 맡겼다.

가짜……/

다시 그 단어를 떠올렸다.

진짜와 가짜를 판명하는 건 결국 시스템이고.

이들을 아무리 사냥해 봐야.

던전을 공략했을 때 얻는 혜택은 없다는 이야기다.

‘기묘하군.’

진짜 동방에 빨리 도달하고 싶은 감정이 더욱 커진다.

- 콰직! 우드드득! 콰쾅!

안내원이 던져 주는 기본 사냥터를 전부 해치우기까지 시간은 하루도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 사냥터에서 보낸 시간보다 이동에 걸리는 시간이 더 길다.

“다음은?”

“다,다음은… 인형의 집입니다. 강철보다 강한 목각 인형들이……

안내원이 경악한 표정으로 앞장섰다. 이제 하다못해 인형 따위를 갖다 대겠다는 건가 싶었지만,얌전히 따라가기로 했다.

방향이 마음에 든다.

“가깝다.”

후작을 슬쩍 쳐다보며 말했다.

안내원이 걷는 방향은.

지도에 표시된 장소에 직선으로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 까강!

칼과 도끼,언월도를 든 인형들은 꽤 높은 수준의 무예를 구사했다.

서넛으로 이루어진 합격술은 물론 진법陣法이라 해도 될 만큼 거대한

규모의 합격술까지 연마한 듯하다.

물론 인간 형태의 적과의 싸움에 익숙한 나와 후작에게는 눈 감고도 헤쳐나갈 수 있는 수준이다.

사냥터에서 싸우는 내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기만하는 것까지도 완벽하게 가능했다.

나는 일부러 칼의 속도를 늦추며 녀석에게 슬쩍 시선을 보냈다.

‘좀 천천히 하자.’

“슬슬 무리군……

곧바로 알아들은 걸까.

후작도 힘이 모자라 느리게 칼을 휘두르는 척을 했다.

‘나보다 한술 더 뜨네.’

거의 쓰러질 듯 위태롭게 싸우는 녀석을 보며 안내원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해요! 지치신 게 당연합니다! 아무리 뛰어난 분이라도 지금까지 터무니없는 속도로 무리했습니다! 그리고… 이미 최고 기록이십니다!”

나나 후작이나 실력의 반의반도 보여 주지 않았다.

그런데도 최고 기록이라면.

수련을 한다고 섬에 오는 자들의 실력도 알 만했다.

‘하긴 그렇지.’

최정상급의 실력자라면 제국에서나 연합에서도 제 일만으로도 턱없이 바쁠 거다.

레안드로도 그렇고.

다른 검주들이 ‘섬’에 다녀왔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었다.

결국 여기 오는 건 일종의 유희에 불과하다는 걸까.

“혹시 인형들의 움직임을 느리게 만드는 향초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방어력을 약화시키는 피리 연주를 원하십니까? 문의해 주십시오!”

저런 게 있으면서 말도 안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인가.

지금까지 겪은 다른 던전들.

거대한 게,사마귀,독벌레 계곡, 사자상의 신전에서도 각각 저런 걸 판매할 준비를 하고 있었겠지.

우리가 너무 가볍게 돌파한 탓에 그럴 기회를 얻지 못했을 뿐이고.

‘이 새끼들이?’

넥스몬드의 소개로 안내는 해 줘도, 추가 서비스는 유료라는 건가.

독한 놈들이다.

하지만 상황을 파악했을 후작은 표정 변화도 없이 얌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다 좋은데……

그가 말을 이었다.

“일단 이곳에서 쉬고 있을 테니, 새콤한 것부터 좀 마실 수 있나? 마시면서 천천히 생각해 보지.”

“예,근처에서 금방 지원을 받아 음료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안내원이 자리를 뜨자 레안드로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이다. 따돌리자.”

- 과광!

저 앞에서 버티는 목각인형들을 지금까지와 비교도 안 되는 속도와 힘으로 뚫어 버리고 곧장 사냥터를 빠져나왔다.

“여기다.”

지도를 다시 펼쳐 확인했다.

지금까지 온 속도로 봤을 때.

1시간 정도만 똑바로 말을 달리면 될 것 같았다.

처음부터 목적은 여기.

진짜 동방으로 갈 단서에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도에 표시된 곳을 향해 빠르게 움직이던 도중.

커다란 도로로 접어들기가 무섭게, 갑자기 안내원이 맞은편에서 불쑥 나타났다.

녀석은 우리가 있는 곳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가왔다.

“어이쿠, 길을 잃으신 겁니까? 이쪽으로 오십시오!”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알아내고 여기까지 바로 쫓아온 거지?

몸을 숨기고 있었는데 간단하게 까발려진 것도 당황스러웠다.

“고객님,어딜 가고 계셨습니까?”

“다음 사냥터를 찾는 중이었다.”

“하… 하하……. 저랑 안 마주치고 나오기도 굉장히 힘드셨을 텐데… 어떻게……

어색하게 웃던 안내원이 손에 든 호리병을 흔들었다.

“드시겠습니까?”

“지금은 별로… 입맛이 없어서.”

“아하핫,그렇군요. 그럴 수 있죠. 이쪽으로 따라오시지요. 제가 계속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목각 인형들이 있는 곳이 끝나고.

심지어 서로에게 강화 마법까지 구사하는 흑요석 인형들과 싸우다

벗어날 때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이곳이 모조품이라면.

가공의 사냥터이며 허위의 냄새가 짙게 배인 공간이라면.

우연 같은 건 있을 수 없다.

같은 일이 두 번 반복되자 안내원의 표정도 서서히 바뀌고 있었다.

나는 모른 척 재촉했다.

“다음은 어디지?”

“으음••…. 이제부터 여러분의 안전을 절대로 보장할 수 없는 곳입니다! 이건 빈말이 아닙니다! 아까와는 다릅니다. 가장 끔찍한 장소 중에 하나! 숲 전체가 당신의 적입니다.

인간 서넛 정도는 꿀꺽 삼켜 버리는 큰 입이 달린 나무들의 구역이죠. 정말 후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빨리..

대답도 귀찮아진다.

경험치도 제대로 주지 않고.

포인트 보상조차 없는 사냥터의 반복이 슬슬 지겨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후작이나 다른 인간들.

‘대부분의 인간이겠지.’

나처럼 상태창이 뜨지 않는 자들. 시스템을 볼 수 없는 인간들이라면 어떨 것인가.

그들은 애초에 누군가를 죽여서

레벨이 오르는 방식으로 강해지지 않는다.

상당히 실력 있는 자라도.

제국과 이 장소의 차이를 제대로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 차이가 오직 나에게만 선명히 보인다고 생각하니, 흡족하기보다 어딘가 깊이 섬뜩해진다.

- 과직!

살아 움직이는 수목들을 파괴하며 후작이 지나가듯 말했다.

“인공적인 주술의 냄새가 짙은데.

그보다… 기분 나쁘군.”

“음?”

“아니다. 더 확신이 들면 말하지. 빨리 가자.”

작은 길을 뚫어 빠르게 안내원을 따돌렸다.

이번에는 약한 척이나 힘든 척도 하지 않았고, 대놓고 빠른 속도로 달려갔다.

‘이제 금방이다.’

‘어차피 기스-제-라이의 지도에 표시된 위치와 멀지 않아.’

위험과 이득을 비교했을 때.

티 나게 따돌려도 이대로 가는 게

현명하다.

광! 광! 과직!

거대한 손을 휘두르는 인상 나쁜 나무들을 베어내고 숲 밖으로 나와 길목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저거다.”

후작이 곳곳에 놓여 길을 밝히는 종이등을 가리켰다.

종이등의 숫자는 느리지만 분명히 늘어나고 있었다.

동방어가 쓰여진 팔각등이 단단한 받침대 위에 세워져 있기도 했고.

나무와 나무 사이 허공의 줄 위에 풀잎이 그려진 둥근 등이 바람에 살며시 흔들리고 있기도 했다.

신비로운 빛을 부드럽게 퍼트리는 둥불이 길올 안내하듯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서서히 내려앉는 어둠과 어울려, 허공에 색색의 꽃이 피어 있는 듯한 광경이었다.

“저게 우리를 감시한다.”

후작은 허공에 흔들리는 꽃들을 보고 아무런 감홍도 없이 차갑게 말했다.

“확실해?”

의문이었다.

나와 녀석의 탐지 스킬은 같지만, 종이등에서 딱히 주술적인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

레안드로가 말을 이었다.

“주요 길목에는 반드시 보이고, 저 등불이 없는 곳에서 안내원이 우리를 쫓아왔던 적은 아직 없지. 확실하다. 저걸 다 부숴 버리든지… 아니면 안내원이건 뭐건… 눈앞에 나타나는 대로 눕혀 버리고 지도에 표시된 곳에 가든지.”

어느 선택지든지.

시선을 받지 않을 리는 없었다. 슬쩍 지도에 표시된 곳에 간다는

계획은 실패인가.

허공에 있는 저 등들을……. 불태워야 하나?

생각을 정리하며 후작과 앞으로 걸어갈 때였다.

“정할 시간이다.”

- 저벅. 저벅. 저벅…….

다시 멀리서 안내원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인다.

“거기 계셨군요! 자꾸 사라지져서… 이거 참 곤란합니다……

어쩐지 한층 더 비열한 안색으로, 안내원이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정말,두 분처럼 뛰어난 모험가분들에게도 제대로 자극이 될 장소로 데 려 다드리 겠습니 다.”

“지금까지도 그러지 않았나?”

또 시간 낭비를 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정말 이 녀석을 젖혀 버리고 눈에 띄든 안 띄든 지도에 표시된 장소로 달려가야 하는 걸까.

‘게다가 표정도 달라졌어.’

우리를 보는 눈빛에서 노골적으로

수상함이 느껴진다.

이제 은근히 숨기고 싶은 생각조차 없는 것 같다.

저 녀석을 처리하고.

수상하게 느껴지는 종이등도 전부 없애버릴까 싶을 때.

“하핫… 하하핫……

안내원이 기괴할 정도로 유쾌하게 보이는 표정으로 웃었다.

바람 한 점 없는데도 어쩐지 그녀의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여긴 정말… 정말… 다릅니다. 여태 들어갔다가 살아나온 고객은 한 분도 없었습니다.”

‘뭐야? 사실……?*

이제 익숙해진 신체 반응 탐지가 여자의 말이 진실임을 말해 준다.

“위치가 어디지?”

“이쪽입니다.”

안내원이 품에서 지도를 꺼냈다.

어째서인지 내가 갖고 있는 것과 정확히 같은 축적의 지도였고.

그녀가 하얀 손으로 가리킨 곳은, 기스-제-라이의 지도에 표시된 바로 그곳이었다.

438호후 눈먼 달,지는 꽃 (15)

내 손의 지도는 기스-제-라이가 엠버에서 쥐어 준 것.

정확히 같은 축척의 지도를 갖고 있다는 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무심코 안내원을 노려보았지만, 그녀는 미소만 지어 보일 뿐이다.

‘가보면 알겠지.’

안내원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기나긴 돌다리가 나왔고, 양옆의 울창한 나무들 아래로 푸른 개천이 홀렸다.

무척 잘 정돈된 길이지만 인간의 자취를 찾아볼 길 없었다.

홀릴 듯이 고즈넉한 정취에 젖어 앞으로 향했다.

길은 텅 비었지만,하늘이 천천히 붉게 물드는 탓인지 오묘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럼 고객님,저는 이제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꼭 원하는 결과를 얻으시길 기대하겠습니다.”

“당신은 안 들어가나?”

“이곳부터는 위험해서 제가 감히 함께할 수 없습니다.”

양해해 주길 바란다며 방긋 웃는

녀석의 얼굴이 어딘지 낯설다.

지옥으로 사람을 밀어 넣는 듯한 얼굴이다.

‘심지어 숨기지도 않는군.’

후작과 시선을 교환했다.

‘함정이겠지.’

하지만 신경 쓸 거 없다.

“좋을 대로.”

어차피 들어갈 길이고.

어차피 젖혀 놓고 가려던 녀석이다. 안내원을 다리 입구에 세워 놓고, 돌다리를 천천히 걸어갔다.

lkm 정도의 긴 돌다리를 건너자 탁 트인 넓은 길이 펼쳐졌다.

맞은편은 슬슬 피어날 준비를 하는 꽃봉오리들로 울긋불긋한 산이고, 점점 산 가까이 깊숙한 곳에 들어 가는데도 묘하게도 길은 이전보다 넓어진 상태를 유지했다.

뚫린 대로는 지도에 표시된 곳을 정확하게 향하고 있었다.

다른 곳으로 샐 것도 없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있었다.

‘저거,신경 쓰이네.’

걸어갈수록 등불의 숫자가 점점 늘어났다.

지금까지는 주요 길목에나 드문드문 발견되던 녀석들이,모든 나무마다

달려 있었다.

받침대 위에 놓인 팔각등은 아예 다섯 걸음마다 하나씩 규칙적으로 설치되어 있었다.

‘무슨 연출이지?’

따듯하게 하늘을 달구던 노을도 조금씩 희미해졌다.

하늘을 어디선가 몰려온 구름이 두껍게 덮기 시작했다.

넓은 길과 대조적으로 구름 사이로 비치는 구멍들은 점점 좁아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어두워지는 나뭇가지 끝에 걸린 등불들이 한층 강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동시에 발걸음을 멈췄다.

사람 머리를 두 개 겹친 크기의 등불들은 분명 조금씩 더 커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빛이 강해지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등의 크기 자체가 확실히 변하고 있었다.

“뭐야?”

“…이렇게 깨끗하게 숨겨지다니.”

후작이 씁쓸히 중얼거리며 칼을 고쳐 쥐었다.

'설마 진짜 이렇게 될 줄이야.’

매달린 등불의 크기는 이제 인간

한 명의 전신만큼 커지고 있었다.

등불 양옆으로 날개가 솟아나고, 가운데 생겨난 아가리는 옆으로 죽 찢어져서 몸의 절반이나 차지했다.

‘정말… 요괴였다고……?’

자조적인 감정이 들었다.

후작의 말대로다.

합리적인 추론에 의해 등불들을 의심했지만.

탐지 스킬을 써 봐도 수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요괴들이 변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

‘이게 말이 되나?’

나와 녀석의 탐지 스킬에 걸리지 않았다.

인간의 신체 반응까지 측정할 수 있고,깊은 아래의 지형 탐지까지 가능한 스킬로 알아보지 못했다.

‘그 정도의 변장이 가능하다면.’

어쩌면 지금껏 부딪힌 녀석들보다 훨씬 강한 적일지도 몰랐다.

계속 거대해지는 반투명한 종이등 안쪽에 식물의 줄기나 혈관 같은 게 돋기 시작했다.

등불은 마치 주위의 어둠을 빨아 먹으여 성장하는 것 같았다.

기이하게 변형되며 등불에 비치는

빛들은 점차 음울한 붉은 기운을 띠고 있었다.

나무와 나무 사이 줄에 걸려 있던 등불이 허공에 두둥실 떠오르고, 바닥에 서 있던 팔각등은 뿌리가 돋는 것처럼 생겨난 다리로 우뚝 일어났다.

다리로 일어난 등불들은 인간보다 훌쩍 더 컸다.

점점 압박감이 커져 간다.

‘시스템 창은 안 뜨는군.’

제국이라면〈C급 던전〉이라느니.

〈랜덤 인카운터〉라느니 하는 말이 반투명한 푸른 창으로 떠올랐을 터.

그러나 여전히.

거대화한 게를 사냥할 때와 같이, 아무것도 뜨지 않고 있다.

‘이것도…〈선발대들〉이 관리하는 사냥터인가?’

점점 더 크게 찢어지는 입안에서 기다란 혀가 빠져나왔다.

내민 혀끝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우둘투둘한 돌기들이 돋아났는데, 그게 어둠을 핥는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허공 위를 움직이자 한순간 검붉은 섬광이 일어났다.

- 화르르르!

검은 연기와 함께 굉음이 울리며 수십 개의 등불 요괴들이 동시에 사방에서 화염을 뿜었다.

불은 등불이 매달려 있던 나무를 모조리 새까맣게 태우고,차가운 돌로 된 바닥까지 번지고,사르고, 퍼져 왔다.

- 히힝! 히히힝!

말들이 놀란 듯 울었다.

레안드로는 사방의 불꽃이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미유 위에 앉은 채

몸을 돌리며 칼을 휘둘렀다.

불꽃이 아니라 단단한 돌바닥이 가루처럼 부서졌다.

부서져 떠오른 작은 알갱이들이 주위를 빙그르르 돌았다.

‘뭐야?’

처음 보는 모습이다.

레안드로가 언제부터 저런 일을 할 수 있는 녀석이었지?

‘이건 마치… 인벤토리를 쓰는 것 같잖아?’

- 파시식!

우리를 중심으로 빙그르르 도는 알갱이들은,허공에 춤추는 화염을 그대로 덮어 꺼 버렸다.

- 화르르!

거대한 등불들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입을 벌리고 불을 뿜어냈다. 레안드로의 칼끝이 다시 긴 궤적을 그리며 돌았다.

- 콰과과광!

바닥이 흔들리며 직경 수 미터가

폭발한 것처럼 부서졌다.

간격과 경계가 생겨났다.

휘몰아치는 모래의 원이 생겼고, 아무리 뜨거운 화염도 거기 닿는 순간 움직임을 잃고 부서졌다.

등불들을 향해 휘몰아치는 작은 모래 알갱이들 하나하나가 검기를 머금은 것처럼 푸르게 반짝였다.

- 좌악!

등불들의 한껏 벌린 입이 찢어지고, 몸통 전체가 갈가리 찢기며 안에 담긴 검붉은 화염이 어지럽게 쏟아져 홀렸다.

- 콰광! 콰광! 콰광!

후작은 바닥을 부수며 돌가루의 부피를 점점 더 늘려 갔다.

푸른 빛을 머금고 녀석의 근처를 회오리치는 모래 알갱이들은 점점 더 범위를 넓혔다.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녀석이 나를 보고 불길하게 씨익 웃는다.

마치 보란 듯한 느낌이다.

허공을 그대로 밀어낼 수는 없는 모양이다.

모래라는 매개체가 필요한 건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심하네.’

지금까지는 같이 힘을 숨겨 와서 몰랐는데.

정말 배 위에서 나를 본 것만으로 저런 힘을 깨닫게 된 걸까.

‘장난이 아니군.’

물론 아직 내가 훨썬 강하다.

하지만 그렇게 방심하다간 언제 어떤 식으로 당할지 모른다.

‘조심해야겠어.’

만들어진 회오리에 절반에 가까운 등불들이 파괴되어 갈 때였다.

- 쿵!

지반이 울렸다.

거대한 양옆의 나무들이 일제히 혼들리며 가운데로 기울어졌다.

바닥에 가해진 너무 큰 충격으로 사람 키 정도의 높이로 떠다니던 모래들이 일제히 허공에 치솟았다.

‘뭐야?’

거신이 바닥에 망치질이라도 한 것 같은 충격파가 울렸다.

후작이 경계하며 뒤로 물러났다.

뽀얀 돌 먼지 사이로 눈에 띄게 긴 뿔이 보였다.

날카로운 뿔 하나의 길이만 해도 20미터는 훌쩍 넘는 것 같았다.

길고 거대한 두 개의 뿔은 좌우로 기울어져 있었는데, 뿔에 수많은 등불이 걸려 있었다.

인간 크기의 거대한 등불 요괴들이 뿔에 매달려 춤을 췄다.

수십 개의 등불 요괴를 뿔에 걸고 있을 만큼 괴물은 거대했다.

예메라의 신전을 지키던 거북이 와들루스와 비교해도 1/4 정도는

되어 보였다.

녀석은 단순히 거대한 게 아니라 대단히 단단하고 강해 보였다.

여우와 사슴을 섞은 것 같은 몸에 발끝부터 얼굴까지 두꺼운 각질이 붙어 있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앞발은 고양이를 닮았다.

부분만 놓고 보면 얼핏 귀엽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모든 걸 합친 전체적인 모양새는 극히 흉포하고 기괴했다.

후작이 등불을 상대하고 있을 때 나는 녀석의 앞에 다가섰다.

‘이건 진짜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스템 창은 여전히 뜨지 않지만.

뭘까.

눈앞에 존재하는 건 오래전부터 존재해 온 무언가다.

강하든,강하지 않든.

이거야말로 동방의 진짜 뭔가라는 느낌이 든다.

〈섬〉에 온 이후 지금까지 싸웠던 어떤 녀석들과도 다른 느낌이다.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뜨지 않을 상대는 아니지 않나?

‘혹시 가려져 있는 건가?’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뭔가가 있어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을 때.

거대한 녀석은 나를 슬쩍 피했다.

강한 걸 알아보는 걸까?

“계약된… 먹이가… 아니다……

워낙 거대한 울림이었기 때문에, 한순간 웅얼대는 것 같은 착각이 있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거대한 괴물은 웬만한 인간보다도 훨씬 더 또렷한 발음을 구사했다.

“너는 우리들의 먹이가 아니다. 싸움에 끼어들지 말아라.”

천둥 같은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려퍼졌다.

“뭐?”

- 쿵!

작은 언덕 같은 거대한 몸이 몹시 민첩하게 위로 튕겼다.

“으음?”

거대한 신전의 기둥만 한 뒷다리를 박차 위로 십여 미터나 뛰어오른 녀석은 나를 아득하게 넘어 똑바로

후작을 덮쳤다.

“사냥감… 취급이냐?”

후작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 광!

은은히 푸른빛을 내며 회전하는 모래가 모여 레안드로의 머리 위에 형성한 반구를 괴물이 후려쳤다.

- 과광! 과광!

몇 알의 모래들이 등불괴물들을

한 번에 찢어 버린 점을 생각하면 괴물의 앞발은 어마어마한 강도의 표피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 화르르르!

후작이 만들어 낸 반구 위에 계속 양쪽 앞발이 휘둘러졌다.

게다가 공격 사이사이에 괴물의 뿔에 달린 등불 요괴들이 전신을 불태우며 후작에게 달려들었다.

레안드로는 그걸 하나하나 전부 화염이 근처에 닿지도 못하게 하며 박살 냈지만,몸을 빼기는 여의치

않은 모양이었다.

‘미유가 다칠까 봐 신경 쓰는 건가?’

괴물의 긴 뿔에 달린 수십 개의 등불이 사방에서 화염을 뿜는 데다, 집채만 한 앞발이 연달아 타격을 가하니 곤란할 법도 했다.

‘빨리 도와줘야겠군.’

꼴 좋다고 시간을 끌면 위기에서 뭔가 각성해서 한층 더 강해질지도 모른다.

‘계약된 먹이가 아니라고?’

도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나를 뒤에 남기고 간 괴물의 뒤로 걸어갔다.

파리를 쫓듯 휘둘러지는 꼬리를 인밴토리로 짓눌러 바닥에 그대로 처박았다.

“으으?”

괴물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꼬리를 움직일 수는 없었다.

어차피 잡을 수도 없는 크기지만.

근력만 있다면 잡은 쪽의 무게가 가벼운 이상 꼬리를 잡은 상태에서 몸이 위로 들려 버린다.

하지만 기초적인 인벤토리의 사용 만으로도 녀석의 꼬리 정도는 곧장 바닥에 고정시킬 수 있다.

‘그 인간을 너무 각성시키지 말란

말이다.’

어차피 후작은 이런 정도의 적을 상대로 죽지 않는다.

- 우웅!

인벤토리에서 꺼낸 랜스를 그대로 꼬리에 박았다.

‘검빙.’

길이 3.5미터짜리 랜스 전체에서 밀람처럼 창백한 섬광이 터져 나왔다.

폭포처럼 홀러내린 섬광은 꼬리를 꿰뚫어 바닥에 깊이 고정시켰다.

꼬리 부분은 두꺼운 표피를 뚫고

통째로 괴사했고,녀석의 하반신 피부 전체에 표피보다 두껍게 하얀 얼음이 끼었다.

“크아아아악!”

거대한 요괴의 비명이 울렸다.

고통에 따란 반사적인 명령인지, 수십 마리 등불요괴가 반사적으로 내 쪽으로 달려들었다.

‘검빙.’

어둠에서 일어나는 불꽃의 포말이 새하얗게 얼어붙었다.

내뿜은 화염과 함께 역설적으로 얼어붙은 등불 요괴들은 바닥까지 닿기도 전에 부서져 흩어졌다.

“고맙군.”

그사이 후작은 여유를 얻어 뒤로 물러갔다.

그가 칼을 뒤로 잡아당겼다.

준비를 마친 듯 앞으로 휘두르는 칼날 전체가 조각처럼 새파란 빛을 뿜어냈다.

- 좌악!

괴물은 온전한 상반신으로 팔을 교차 형태로 만들어서 방어했지만, 기둥 같은 양팔의 지름 각각 절반 이상이 잘려 나가며 충격으로 피를

토했다.

“이거,제법 버티네?”

나와 후작이 양쪽에서 공격했는데 아직 살아 있다.

평범한 상대는 아니다.

던전 보스나 인카운터라고 쳐도 최소한 A랭크.

이런 게 밑도 끝도 없이 이곳에 떨어져 있을 리는 없다.

‘살아 나온 인간이 없다고 했지.’

이 녀석을 말하는 걸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일단 끝내 버리자.

인벤토리로 꼬리를 잡고 녀석을 누르고 있을 때,후작이 다시 뒤로 천천히 칼을 당겼다.

칼을 당기는 자세가 예전과 달리 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검기……?’

그건 단순한 칼로 만들어진 압력이 아니었다.

애초에 저 정도 너비의 칼로 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어가는 하나의 ‘획’만 해도 직경 수 미터에 달하는 공기의 움직임이 공간을 찢는다.

날카롭게 키워낸 진공과 검기의 바람이 맞물려서 궤도를 만들면서 아래에서부터 괴물의 육체를 길게 난도질했다.

“크어어……

검기의 바람은 모든 화염의 불씨를 사그라뜨리고,터트린 피를 돌바닥에 진하게 흩뿌리며 계속 쏘아졌다.

몸이 완전히 너덜너덜해졌을 때.

“어어?”

괴물은 내가 누르고 있는 꼬리를 제 손으로 잘라내고 높이 뛰어서 도망갔다.

“저… 저놈이……r

- 팟!

거대한 몸에서 멎지 않고 흑혈이 홀렸지만 한 번에 수십 미터씩을 도약하며 도망가는 속도는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놓칠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차피 저 방향이다. 쫓자.”

내가 앞장섰다.

섬에서 싸운 녀석들 중 무엇보다 그럴듯한 상대였다.

저 정도라면 죽였을 때 경험치를

제법 줄지도 모른다.

특별히 포인트가 나을지도.

게다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도 인상적이다.

‘계약된 사냥감이라니……

그에 관한 이야기도 듣고 싶었다.

- 다그닥! 다그닥!

다행히 충격으로 기절하지는 않은 말을 달려 쫓아갔다.

도저히 감출 수 없는 핏자국과, 필사적으로 디뎠지만,점점 사이가 짧아지는 도약의 흔적을 찾아 깊이

들어갔을 때였다.

“잠깐……

후작이 손을 들었다.

“인간?”

녀석이 손을 드는 순간 나도 곧장 알아차렸다.

“하나,둘… 아니,엄청 많은데?”

앞쪽에서 무수한 인간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439호후 눈먼 달,지는 꽃 (16)

산자락을 오를 때마다 곳곳에서 기척이 느껴진다.

울퉁불퉁한 산자락에서 느릿하게 움직이는 짐승들의 존재도.

비탈진 언덕 위 나뭇가지에 앉아 짧은 생을 털어 버리듯 파드득 날개를 치는 새들도.

하지만 무엇보다 나무 사이로, 바위 위로,구름 아래서 풀을 밟고 두 발로 선 인간들의 존재가 가장 또렷하다.

우리는 걸음을 재촉했다.

스러지는 노을을 몸으로 받으며 걸어갔지만,첫 번째 민가를 발견할 즈음에는 이미 푸른 달빛이 시리게 내려앉고 있었다.

달빛에 젖은 산길을 따라 흙 위로 민가들이 형성되어 있었다.

저녁임에도 민가 안에서는 따로 불빛이 새어 나왔고 산길을 오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길 위의 인간들은 검은 머리칼에 누런 옷을 입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가면 발견될 거다. 몸을 숨길까?”

“일단 가지. 반응을 봐야겠어.” 후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앞으로 나아가자 머리를 까끌까끌하게 민 남자가 우리를 보고 놀라 소리를 질렀다.

“와아악!”

남자는 그대로 도망갔다.

그들의 복장과 얼굴은 연합이나 제국의 인간들과는 확실히 달랐다.

본 적 없는 외형이었다.

달빛을 받으며 널따란 바위 위에 누워 있던 사람이 일어나 집으로 도망가기도 했다.

계속 들어가자 경매장에서 봤던

스타일의 옷을 입고 있는 사람도 드문드문 돌아다닌다.

“누구XX?”

“바깥XX 처음X XXXXX.”

“설마 XXX XX XXXX XXX XX?"

“XX한 XX이다.”

그들은 하나둘 모여서 우리를 보고 동방어로 수군거렸다.

묘하게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가 많이 섞여 있었다.

‘진짜 동방어가 맞나?’

첸들러에게 흡수했던 것과 구조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안내원이 쓰던 언어와도 달랐다.

같은 언어 같으면서도.

마치 아주 오래된 옛 언어 같은 느낌이었다.

“바깥에서 사람들이 오는 건 처음 봤다는 소리를 하는데.”

나는 후작에게 사람들이 하는 말을 적당히 짐작해서 전해줬다.

갑옷을 입고 말에 탄 나와 후작이 두려운지, 마을 사람들은 가까이 오지는 못하고 짐짓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오고 있다.

‘탐지.’

앞서 측정했던 것과 같다.

모든 신체 반응은 저들이 인간임을 말해 준다.

“역시 인간들이지?”

“나도 그렇게 느껴진다.”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길가에 늘어선 등불요괴들에게도 전혀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

무엇보다 요괴로 가득 찬 사냥터 안쪽에 인간의 마을이라니.

너무나 수상하다.

대체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

무엇보다도.

기스-제-라이가 준 지도에 표시된 장소와 점점 가까워진다.

지도에는 마을이 표시되지 않지만 경사와 산자락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우연이라는 말로는 결국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다.

슬슬 마을의 중심부다.

단촐한 민가 여러 채가 오밀조밀 모여 있다.

몇몇 굴뚝에서는 뒤늦게 밥이라도 짓는지 하얀 연기가 올라온다.

그때쯤 되자 우리를 구경하듯이 뒤따르는 무리가 제법 긴 줄을 만들고 있었다.

- 히힝…….

미유가 작게 울었다.

“배가 고프다는군.”

‘이 녀석,말 울음까지 해석할 수 있는 건가?’

내가 타고 있는 말도 슬슬 걸음이 느려지고 있었다.

“좀 먹여야겠는데.”

그 순간이었다.

뒤따르던 마을 사람들이 우리를 갑자기 둥그렇게 둘러쌌다.

“뭐지?”

“공격하려는 건 아닌 것 같다.”

공격이 먹히지도 않겠지만 애초에 마을 사람들은 모두 빈손이었다.

흉흉한 기색도 없다.

철없는 아이들이라도 외부인에게 돌멩이라도 집어 던질 법하지만, 그런 일조차 없었다.

신기하다는 듯 관찰하며 따라오다 말들이 힘없는 티를 내니 우리를 둘러쌌을 뿐이다.

“X먹이! XX!”

“이리 와라!”

'설마 상황을 알아챈 건가.’

대단한 눈치다.

그들이 우리에게 다가와 이쪽으로 와보라는 듯이 손짓을 했다.

가도 되는 걸까.

후작과 시선을 교환했다.

녀석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인다.

“확인해 보자.”

사람들을 따라가 보니 소가 있는 헛간에 여물이 쌓여 있었다.

이리저리 뾰족한 수염이 난 남자가 소를 슬쩍 옆 칸으로 움직인 다음 손으로 여물을 가리켰다.

‘탐지.’

여물은 여물일 뿐이다.

수상한 성분은 검출되지 않는다.

후작도 검사를 끝냈는지 미유의 등을 토닥였다.

“히히힝!”

미유는 킁킁 냄새를 맡더니 곧장 여물 속에 머리를 처박았다.

내가 타고 온 말도 여물에 고개를 박았다.

나와 후작은 말 위에서 뛰어내려 그들이 부담 없이 식사하게 했다.

식사하는 도중,밖에 나갔다 온 털투성이 남자가 두 손에 커다란

풀잎을 들고 앞으로 내밀었다.

웬 풀잎이지.

이런 건 말도 못 먹겠는데.

“뭐야,먹어?”

간단한 단어를 사용해서 말했더니 털보가 깜짝 놀랐다.

“XX 말을 할 X XXXX?”

“조금.,’

털보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고개를 저었다.

“x잘 하x!”

‘확실히 다르군.’

이 정도까지 듣자 확실해졌다.

제국에 동방어라고 알려진 것과 이 마을의 인간들이 쓰는 언어는 분명히 조금 다르다.

털보는 자신이 가져온 커다란 풀잎을 벌려 보였다.

안을 가리켰다. 풀잎 안에는 곱게 싸인 구슬 모양 떡이 있었다.

“독은 없군.”

가볍게 떡을 살펴본 레안드로는 곧장 그걸 받아 꼭꼭 씹어 삼켰다. 그리고 손짓을 섞어 말했다.

“더 없나?”

털보는 그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웃었다.

웃음 속에서 체온이 느껴졌다.

그가 방으로 들어오라며 우리를 손짓해 부른다.

“갈 건가?”

“말까지 먹였는데. 일단 들어가지.”

밖에서 본 아늑한 초가집은 의외로 공간 활용을 잘하는 건지 안쪽이 널찍하게 느껴졌다.

‘2층도 있군……

두툼한 창턱 밖으로 남자가 말없이 솥째 밥을 내왔다.

커다란 솥 속에는 이런저런 잡곡과

나물이 아무렇게나 섞여 있었다.

‘독은 없다.’

깔끔하다.

적개심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후작은 계속 성격 안 좋은 표정을 지었지만,아무래도 수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는지 천천히 숟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게 식사를 시작하는 녀석의 모습에서 어딘가 위화감이 느껴졌다.

‘뭐지……?’

‘이렇게 마음 편한 녀석이었나.’

“너 같은 녀석도 밥이란 걸 먹나? 잘 먹네.”

“계속 싸우고 굶었다.”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에서 기묘한 위화감이 느껴진다.

“내가 너 같은 마물인 줄 아나?”

게다가 피식 웃기까지.

‘으음……

문득 그 감정의 정체를 알아챈다.

‘위험하지 않아.’

처음으로 후작의 곁에 있으면서도 위협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묘하군.’

어쩌면 친근감이 쌓인 것일지도 모른다고 잠시 생각했지만, 역시나 그 정도는 아닐 터였다.

친근감이 라니.

그런 우스운 단어를 머릿속에서 털어내기 위해 고개를 저었다.

후작이 식사를 마쳤을 때 바닥이 천천히 따듯해지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침구를 펼친 털보는 바닥을 두드렸다.

“여기. 자라.”

나도 알아들을 수 있게 신경 써서 간단히 말한 것 같다.

‘웃기는군.’

아무리 말에게 여물을 먹이고.

밥까지 먹었더라도.

이런 수상하기 짝이 없는 마을에서 레안드로가 잘 리가 없다.

지금 당장이라도 밖으로 나가서 지도에 표시된 곳을 수색해 보자고 말하겠지.

그러니까.

녀석의 당연한 반응을 예상하며 자리에서 막 일어나려 할 때였다.

“함정은 아닌 것 같군. 이 마을이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진 몰라도… 일단 좀 쉬지.”

‘뭐라고?’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쉬… 자고?”

“그래. 좀 잘 필요가 있다.”

“제정신이냐?”

하지만 그는 무슨 말을 하냐는 듯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오랜 시간 항해를 하고,배에서 내린 뒤에도 종일 싸워 왔다.”

“피로가 생기지 않을 리 없지.” 도대체 언제부터.

피로 따위의 말랑말랑한 단어를

녀석이 입에 담았다는 걸까.

‘내가 너무 과하게 생각하나?’

어쩌면.

내가 지켜 준다고 안심하고 자리에 누운 건지도 모른다.

그건 좀… 우스운데.

어느 쪽이든 변화가 생겼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산자락의 조용하고 아늑한 밤이 지났다.

오늘 밤은 조용하기로 결심이라도 한 듯이 마을 전체가 고즈넉해서, 별빛도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 스릉.

밖에 나가 칼을 빼들었다.

괜히 보이지 않는 적을 경계하듯 허공을 겨눈다.

‘수상해.’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수상하기 짝이 없다.

수상한 게 당연하지 않은가? 후작은 미친 건가.

‘아니,녀석은 감이 좋으니까.’ 나보다 훨씬 날카롭고.

마물 냄새까지 운운하는 녀석이

괜찮다고 한다면.

정말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나는 밖에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그래도,혼자라도 움직일까…… 하지만 자고 있는 레안드로를 두고 아무렇게나 움직이긴 꺼려진다.

잘되고 있는 걸까.

- 우우웅!

인벤토리를 열고 간만의 레나의 펜던트를 꺼냈다.

레나는 이제 곁에 없지만.

그녀의 날카로운 조언은 펜던트 형태로 내 곁에 있다.

나는 익숙한 펜던트를 만지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판단을 시행한다.”

[현재 설정:〈사망 및 그에 준하는 위기 시 자동 발동〉]

[설정을 변경하시겠습니까?]

[발동 후 7일 동안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사용되는 능력:〈위기회피(B)>]

- 어린 시절부터,온갖 종류의 위험을 숨 쉬듯 피해 온 여자가 갖게 되는 수준의 특수 능력. 동물적인 직감에,인간으로서의 배움과 궁리가 결합되어 있다.

“사용하지 않는다. 그대로 놔둬.”

[초기 설정을 유지합니다.]

- 팟.

상태창이 사라지고.

아무것도 뜨지 않는다.

나는 펜던트를 그대로 목에 걸고 있었다.

‘위험하다면… 경고하겠지.’

아무런 반응이 없다.

적어도 내 목숨은 위험하지 않다.

‘결국 펜던트가 감지할 수 있는 수준에서 지만.’

- 화르르!

뭔가 헛헛하고 싸한 느낌이 괜히 허공에 가볍게 검염을 피워냈다.

불꽃의 영역을 유지한 채 초가집 주위를 빙빙 돌았다.

분명히 과한 의심은 아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다들 태평한 거야.’

아침까지 초가집 주위를 돌다가 안으로 들어갔을 때.

- 똑똑.

방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실례하겠습니다.”

세련된 대륙 공용어였다.

방문을 열었다.

웬 말끔하게 생긴 긴 머리 남자가 웃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서 오신 분들입니까?”

“제국이다.”

“아! 모험을 하신다는 분들이군요. 하지만 여기까지 오신 분들은 아직 못 뵈었는데……

“당신,말은 어디서 익혔지?”

내가 나서서 말을 끊었다.

원래대로라면 먼저 후작이 할 만한 대사라고 생각하면서 그를 홀끗했지만.

간밤에 잘 잤는지 몹시 개운하고 편안한 표정만 짓고 있다.

“저 말입니까? 혼자서 책을 보고 배웠습니다.”

“마을에 공용어를 할 줄 아는 분이 한 분 더 계셔서 함께 연습을 하곤 합니다.”

그 정도로 여기까지 능숙하게?

의심스럽지만 계속 묻는다.

어차피 이 녀석이 아니라면 물을 상대도 없다.

“이 마을은 뭐 하는 곳이지?”

조용하던 레안드로가 끼어들었다.

“당신들의 정체를 묻고 싶군.”

“저희는… 처음부터 이곳에 살던 원주민들 입니다. 이상합니까?”

“모험가분들께서 찾는 사냥감은 여기엔 없습니다.”

사냥감.

그 단어가 묘한 울림을 냈다.

“이 산으로 어떤 요괴도 들어오지 못하게 수호신이 지켜 주고 있죠.”

“수호신이라고……?”

“요괴… 뿐만 아니라 인간도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 텐데,두 분은 어떻게 된 건지 신기합니다.”

r

이 남자의 얘기가 과연 설득력이 있느냐는 차치하고.

수호신이라니.

우리가 아까 죽일 뻔한 몬스터를 말하는 게 확실하다.

여기서 그 사실을 말하면 이들을 적으로 돌리게 되겠지.

‘조용히 해야 해.’

말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왔을 때는 없었다.”

“쫓고 있는 위험한 녀석이 있다.”

“여기 왔을 때는 전투의 혼적밖에

없더군. 우리가 쫓고 있는 녀석이 수호신의 경계를 뚫고 들어온 것 같은데.”

[요망한 거짓말 특전 발동.]

[칭호: 이야기꾼 발동.]

[지혜 수치가 적용됩니다!]

[거짓말을 성공시킬 확률이 제법 증가합니다.]

[대화의 내용뿐만이 아닙니다. 당신의 태도를 상대가 진실하게 믿게 됩니다.]

[상대가 위화감을 느낄 확률이 제법 줄어듭니다.]

“뚫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닌데……

긴 머리 남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만큼 위험한 녀석이란 얘기지. 당신이 이곳 대표인가?”

하지만 적당히 넘긴 것 같다.

‘다행이군.’

‘그런데 아까부터 후작은 왜 이리 조용한 거야?’

나는 레안드로를 흘끗거렸다.

하지만 신체 반응은 정상이다.

‘기분 탓인가.’

푸른 옷을 입은 긴 머리 남자가

내 쪽을 바라봤다.

“아닙니다. 저는 그냥 대륙어를 할 줄 알아서 말을 걸었을 뿐이고, 신녀께서 마을의 중심에 계십니다. 저와 밖을 둘러보시겠습니까?”

‘마을의 중심이라면……

바로 우리가 찾아온 그곳.

신녀라는 존재가 단서의 핵심에 닿아 있을 게 분명하다.

“그 신녀를 만날 수 있나?”

남자가 곤란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와 후작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신녀님은 지금 중요한 일 처리에 바쁘십니다. 머지않아 만날 수는

있으실 텐데… 그 대신 제가 마을을 구경시켜 드리지요.”

“좋아.”

전체적으로 보면 새로운 실마리가 손에 잡히겠지.

남자는 우리를 안내하며 마을을 하나하나 구경시켜 줬다.

평화롭고 소박한 마을이었다.

아침이 되자 거리에는 아이들이 많아졌다. 처음에는 거리를 두고 무서워하며 보다가, 어른들보다는 훨씬 더 먼저 우리를 향해 다가와 호기심 어린 눈을 빛내며 외쳤다.

“xx! xx!”

‘또 못 알아듣겠군.’

이곳은 챈들러가 왔던〈섬〉이다.

천들러에게 홉수한 동방어는 분명 여기서 먹혀야 할 텐데.

‘어쩌면……

이쪽이 본토에서 쓰이는 언어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말을 처음 보는 건지, 두 필의 말을 둘러싸고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들뜬 것 같은 아이들에게 미유는 신기할 만큼 잘 놀아 줬다.

‘저 말… 원래 저런 성격이었나?’

지금까지 본 바로도 그렇고.

배 위에서도 선원들에게 분명히 더러웠던 것 같은데.

공격적인 녀석이 이 마을에서만은 저렇게 얌전하게 군다는 게 뭔가 기이하게 느껴진다.

“히힝!”

큰 입을 헤벌쭉 벌리고 갈기털을 아이들의 얼굴에 비벼대자 미유를 둘러싼 아이들은 까르르 웃었다.

‘뭔가……

익숙한 감각이다.

걸려들 듯 말 듯, 잡힐 듯 말 듯 한 감각이 느껴진다.

“신녀는 언제쯤 만날 수 있지?”

“아,지금 말씀드리려는 참입니다. 당신을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

마치 그 순간 계시라도 내린 듯한 말투다.

“나를……?”

“예.”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만,뵙고 싶다고 하십니다.”

440호후 눈먼 달,지는 꽃 (17)

“나만 보고 싶다니 무슨 소리지?”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하다. 무엇보다 후작이 이런 얘기를 듣고 가만히 있을 리가.

하지만.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린 곳에서 후작은 그저 멍하니 바닥에 앉아 미유와 아이들이 노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이봐,이자가 하는 말을 들었지?”

“그래,너만 보고 싶다는군.”

잠시 나와 눈을 마주친 뒤 고개를 돌린다.

원래 알고 있던 후작과 지금 녀석 사이의 간격이 너무 멀고 깊다.

뭔가 무너져 버릴 정도로 강렬한 위화감이 밀려온다.

아무래도 이건 이상하다.

음식에 독을 탔나 싶다가도.

후작이 그런 짓에 당할 리 없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우리는 함께 움직일 거다.”

여차하면 멍한 녀석을 들쳐 업고 깽판을 놓을 생각이었지만.

남자는 의외로 순순했다.

“오는 거 자체야 상관없겠군요. 그럼,가실까요?”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계속해서 우리를 안내했다.

그가 발을 멈춘 곳은 초록 실타래가 탐스럽게 꼬여 나무들 사이에 걸려 있었고,그 뒤로 도무지 산속에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커다란 건물이 보였다.

‘이곳이군.’

후작에게 시선을 보냈지만.

텅 빈 눈과 마주할 뿐이었다.

오싹함이 등뼈를 타고 올라온다.

‘나라도 정신 똑바로 차리자.’

지도에 표시된 장소.

동방으로 가는 열쇠를 찾는 곳은 확실히 여기다.

건물 바깥으로 주위는 허허벌판에 가까우니까.

'땅을 파야 한다면 모르지만.’

“들어오시지요.”

문을 열고 들어가자 홀로 커다란 방 안에 있는 여자가 보인다.

여자는 단정히 앉아 허리를 펴고 먹을 묻힌 붓을 화폭에 움직이고 있었다.

외모는 대륙인과 달랐고 머리칼도

검은색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농염할 정도로 자극적인 외모가 눈에 띄었다.

살짝 늘어진 눈꼬리에 또렷한 붉은 기운이 돌았고 입꼬리는 힘도 주지 않는데 어딘지 비릿하게 말아 을려져 있었다.

인간이라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뭐든 해주고 싶지 않을까.

여자는 그저 그 자리에 있을 뿐, 별다른 교태를 부리지 않았지만.

아마도 저런 분위기를 매혹이라고 부르는 거겠지.

슬쩍 후작을 바라봤다.

'이 녀석은 별 반응 없지만.’

두 걸음 앞까지 다가갔을 때 그녀가 그리는 그림이 보였다.

화폭 안에 있는 건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있는 남자였다.

말은 보통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였고 배경은 산길인 것 같다.

아직은 색도 얼굴도 칠하지 않은 먹선일 뿐.

그러나 보는 순간 후작과 미유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혹시……

저게 레안드로를 흐리멍덩하게

만든 술법 같은 건가?

홍분하기는 일렀다.

사실이라면 여자는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주술사라는 뜻이다.

침착하게 정보를 끌어내야 했다.

“오셨군요.”

여자가 붓을 멈췄다.

“당신이 이곳의 우두머리인가?”

“흐음… 우두머리라는 단어는 조금 어색한걸요.”

붓을 놓은 여자가 앞으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몇 미터나 떨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뭔가가 턱을 스르르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소녀는 그저 소녀랍니다.”

우리를 안내했던 머리 긴 남자가 말없이 차를 내려놓고 물러갔다.

차에서 올라오는 수증기가 여자와 우리 사이를 가로질렀다.

찻잔은 여자 앞에 하나.

후작 앞에 하나였다.

내가 차 따위를 못 마신다는 걸 파악한 듯한 태도.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불안하다.

“독은 없군.”

그러나 후작은 속 편하게 찻잔을 들었다.

‘독이 없다고 그냥 마시나?’

아까부터 이해할 수 없는 행동만 계속하고 있다.

여자가 말을 받았다.

“차 한잔에 담길 만한 독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거든요.”

어떻게 보면 여자의 말대로다.

레안드로는 차를 마시기 전부터 이상했으니까.

“지금 그리는 건 뭐지? 어딘가… 익숙한데.”

이야기를 돌렸다.

여자는 빙긋 웃으며 종이를 슬쩍 들어 보였다.

“잘 그렸죠? 처음 배에서 내렸을 때부터 관찰하고 있었거든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우리가 만난 건 지금이 처음이잖나.”

어차피 섬에 방문하는 건 몇 팀 되지도 않는데.

그중 유명한 넥스몬드의 손님이면 모를 리가 없다는 걸까?

게다가 전용 안내원까지 붙이고 이동했으니까.

그런 대답을 기대했지만.

“글쎄요. 전생에라도 만났을까?”

여자는 살포시 웃으면서 긴 붓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노골적으로 수상한 태도지만 후작은 말없이 차만 홀짝거리고 있다.

답답해서 내가 다시 나섰다.

“수호신이라는 건 어떤 존재지?”

수호신 얘기를 하면 좀 더 핵심에 접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마을의 정체.

그리고 이 여자의 정체까지도.

“어머, 왜 모르는 척이에요?”

“모르는 척이라니? 이곳을 지키고 있는 존재라길래. 하지만 우리는 보지 못해서……

[칭호: 이야기꾼 발동.]

[지혜 수치가 적용됩니다!]

[거짓말을 성공시킬 확률이 제법 증가합니다.]

하지만 허공에 떠올랐던 메시지는 글자 위에 물감이 엎어진 것처럼 엉망으로 덧칠됐다.

[%%@?&% * @$]%@[email protected]%&?]

알아볼 수 없게 변한 문자들마저

곧바로 투명하게 사라진다.

“하하하하… 연기가 어설퍼요.”

여자가 웃었다.

“보지도 못했는데 그렇게 심하게 상처를 입혔어요?”

“당신 지금……

나는 놀랐다.

“말했잖아요. 계속 보고 있었다고. 뭘 속지도 않을 거짓말을 해요?”

“당신들이 베어 버린 아이는 지금 제가 숨겨 놓고 치료하고 있어요. 그것 때문에 오는 게 늦었어요.”

순식간에 진행된 이야기에 나는

홈칫했다.

물론 줄곧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솔직하게?’

앞에서 대놓고 인정하니 얼떨떨할 정도였다.

‘자신이 있다는 건가?’

뭔가 다른 의도가 있는 걸까.

일단 대화를 더 해보기로 했다.

“당신이 그 괴물을 길렀다는 걸 인정하는 건가?”

그녀가 쿡쿡거렸다.

“뻔하지 않나요? 이미 섬 자체가

유지하기 버거운 거짓인데, 여기서 뭘 더 기만하는 것도 지치는걸요. 궁금한 거 있으면 다 물어보세요. 내가 성실하게 말해 줄 테니까.”

이 섬 자체가 거짓.

테마파크라는 건 아이작에게 거듭 들은 터였다.

〈진짜〉가 따로 있다는 건 알고.

그걸 찾아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대놓고 듣게 될 줄이야.’

게다가 다 물어보라니.

확인을 해 보자.

“당신……. 혹시…〈선발대들〉과는

무슨 관계지?”

다리 위에서 헤어졌던 안내원의 얼굴이 떠올랐다.

분명 우리가 누구를 만날지 알고 있는 표정이었다.

- 좌르륵!

여자의 뒤에 세워져 있던 병풍이 살아 있는 것처럼 길게 펼쳐졌다.

“선발대들이라……

여자가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들은 3년 전 이곳에 전부 가둬 놓았어요. 바닷길이 열리고 제가

이곳으로 건너온 다음부터죠.”

커다란 병풍 속에 자세히 묘사된

인간들이 보였다.

제국이나 연합에서 건너온 듯한 각양각색의 모습들이다.

칼끝에 반투명한 검기를 운용하는

인간도 보였고.

심지어 연합의 철인까지 보인다.

‘뭐야,이거……?’

언제부터인가.

병풍 속 인간들은 살아 있는 것처럼

조금씩 꼬물거리고 있다.

하지만 그들을 상대하는 요괴들은

전혀 움직이지 않는 정물.

“설마… 이게 그 선발대들인가?”

“그렇지요. 〈동방으로의 항로〉가 3년 전에 생기고 나서,이곳으로 온 뒤 제가 한 명도 빠짐없이 가둬 놓거나 죽였지요. 지금 돌아다니고 있는 건 모두 저를 따르는 아이를 덧칠한 녀석들이죠.”

여자가 손가락으로 붓대를 살며시 긁었다.

진실이라면 경악할 만한 수준의 술법이 었다.

‘덧칠이라니.’

그런 걸 했다고 15레벨의 탐지가 먹히지 않는단 말인가?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도 후작은 맛이 간 듯이 가만히 앉아서 차만 홀짝이고 있다.

나는 홀린 듯 질문을 계속했다.

“…사냥터는?”

“평범한 녀석들을 거대화시키고 흉포하게 덧칠한 것뿐이지요.”

“•••이 마을은 뭐지?”

“고향에서 지배하는 인간 마을을 한번 구현시켜 봤지요. 주민들은 모두 저를 따르는 아이들이고요.”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까지 거짓인지 알 수 없었다.

도무지 파악할 수 없다.

눈앞의 여인은 장난을 치는 걸까?

아니,애초부터.

이런 장난이 가능하긴 할까?

나는 여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묶어 내린 긴 머리카락처럼 새카만 눈동자였지만,최면을 거는 것처럼 안쪽에 언뜻 푸른빛이 비치는 것 같기도 했다.

‘어디서… 많이 본 눈……

그 푸른빛이 왠지 익숙했다.

우릴 데려온 안내원의 눈에서.

목각 인형들의 눈에서.

등불 요괴들의.

다리 위의 거대한 요괴의 눈에서.

마을에서 마주친 털투성이 남자와 아이들의 눈에서.

푸른 옷을 입은 긴 머리 남자의 눈에서.

줄곧 저 푸른빛을 본 것 같았다.

“너는… 요괴인가?”

여인이 쿡쿡거리며 웃었다.

웃는 입가가 끝도 없이 벌어졌다. 양쪽 허공에 길고 새빨간 입술이 그려졌다.

두 눈이 사라졌다.

입술 사이 단아하던 새하얀 이가 수백 개의 핏빛 송곳니로 변했다.

여자는 손가락을 뻗었다.

열 개의 하얀 손가락이 마디마다 초록색 줄무늬가 그려진 검고 긴 다리로 변하더니 끝에서 하얀 실이 뻗어가 사방을 뒤덮었다.

아니.

실은 원래 그 자리에 있었다.

원래부터 있는 투명한 실이었다. 애초에 방 전체가 하얀 실로 짜여 있었다.

투명한 실은 여자의 입이 끝도 없이 길게 찢어질 때까지도 가만히 차만 홀짝이고 있는 후작을 겹겹이 감싸고 있었다.

입과 송곳니는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왔고 실은 다시 투명해졌다.

이 모든 일이 진행될 때까지도.

내 감각에 그녀는 계속 인간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초롱너울이요.”

“뭐……?”

“요괴 같은 일반 명사는 싫어요. 초.롱. 너.울.”

여자가 한 글자 한 글자를 강조하며 허공에 손가락을 짚어가며 말했다.

“특별히 초롱이라고 불러도 좋아요.” 여자는 해사하게 웃었다.

앞으로 살짝 몸을 기울인 여자와 옆에 가만히 앉아 있는 레안드로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이자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분명히.

잠깐 드러난 거미줄은 레안드로에게 특히 칭칭 감겨 있었다.

“잠시 다른 세상을 구경시켜 주고 있는 것뿐이에요. 저 정도로 강한 먹잇감을 녹이는 데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요.”

“언제부터?”

“처음으로 배에서 내릴 때부터죠. 당신들을 안내하는 여자의 호홉에

이미 독이 섞여 있었답니다.”

거짓말은 아니다.

옆에 멍하게 앉아 있는 레안드로의 반응만 봐도 확실하다.

‘녀석이 당하다니.’

제국에 넷밖에 없는 검주.

재능이라면 제일검인 공작마저도 넘어서는 인간이다.

이런 공격에 면역이 없는 걸까?

아니,나와 그가 요괴들을 전부 인간으로 인식하게 만들 정도니까.

대항 자체가 어렵겠지.

무엇보다.

‘이 섬 전체가……

거미줄이 다.

아이작이 했던 말을 떠을렸다.

〈검주들의 준비는 스스로에 관한 것이지만,탑주들의 준비는 공간과 인과에 관한 것이다. 아무렇게나 길을 걷다 싸운다면 분명히 검주의 손을 들어 줘야겠지. 하나 지키는 싸움이라면 열이면 열… 백에 아흔 여덟은 탑주들이 이긴다.〉

〈여기에서 한쪽에게만 유리하게 작용하는 중력과,우연과,마찰력을

떠올려 봐라. 아니,떠올릴 수 있는 건 죄다 상상해라. 단순한 트랩의 차원이 아니라… 아예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고 생각하면 된다.〉

상대의 말을 믿는다면.

3년 동안 짜 놓은 거미줄.

최소한 마탑주급 이상의 요괴가 짠 둥지로 걸어 들어온 거다.

문득 머릿속에 의문이 든다.

“그럼, 왜 나는……r

어째서 나는 멀쩡한가.

“당신은 인간도 아닌 데다가.”

여자가 뾰로통한 듯 입을 내민다.

“현혹이 잘 안 됐거든요.”

‘후작도 정신력이 대단할 텐데.’

결계 따위의 현혹을 무효화하는 명경지수라면 녀석도 있을 터.

그걸 뚫어 버렸다는 이야기다.

'죽음의 기사나… 말파스의 가호. 뭔가 다른 힘이 발동된 건가.’

어쨌거나.

레안드로의 정신 방어를 뚫었다면 제국에서 그녀의 현혹을 견딜 수 있는 인간이 있기는 할까?

여자가 말을 이었다.

“처음부터 줄곧 지켜봤다고 했죠. 제가 보기엔 왼쪽의 인간보다 훨씬

강한 건 당신인 것 같은데요?”

“그게 어쨌다는 거지?”

“이름 높은 산의,어쩌면 산맥의 주인이 될 만하신 힘을 가진 분이 어째서 인간 따위와 함께 행동하고 계시는 걸까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다 알고 있다는 듯 말을 계속했다.

“동방으로 가고 싶으신 거죠?”

여자와 한 번도 만난 적 없다.

감시당하고 있었다고 해도 후작과 동방에 대해서 섬 안에서 이야기도 주워섬긴 적이 없다.

그런데도 이미 분명히 알고 있다.

‘대체 어떻게?’

혼란스러웠다.

“가고 싶잖아요. 그렇죠?”

여자는 아이를 놀리듯이 말한다.

더 이상 정보를 주지 않기 위해서 입을 다물어도 다 안다는 듯 빙긋 웃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녀가 계속 말을 잇는다.

“저는 여기 온 이후로 지금처럼 기분 좋은 적이 없었어요. 내기에 진 탓에 억지로 떠맡기는 했지만, 열린 바닷길로 인간들이 유입되지 못하게 하는 게 내 임무라고요.”

“동방… 으로?”

“맞아요! 우리들의 땅으로요.”

여자는 인상을 확 찌푸렸다.

“이까짓… 이까짓 거짓의 섬을 조종하며 고양이나 키워야 한다니! 비천하고 교활한 잡놈들이 소녀를 이곳에 처박아 놨어요. 본토에서 아마 놈들은 열심히 세력을 불리고 있겠지요.”

3년 전 바닷길이 열렸다는 말이 다시 떠오른다.

“그럼 그전에는?”

“아주 가끔,동방에서 여기로라면

가능했지만, 이곳에서 동방으로는 오지 못하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기스-제-라이는 있지도 않은 길을 그토록 찾아 헤떴고.

이곳에 있다는 동방으로의 힌트도 3년 전에야 생겼다는 건가.

‘그럼 에라스트의 석판은… 그걸 실시간으로 반영했다고?’

‘도대체 어떻게?’

머릿속에 끊임없이 의문이 솟는다.

애초에 여자가 왜 이 모든 것을 모조리 말해 주는지도 알 수 없다.

목적이 뭘까?

단순한 희롱인가?

아니면 이것도 술법에 빠트리는 절차인가?

짓궂은 표정으로 잠시 뜸을 들인 여자가 입을 열었다.

“옆에 있는 인간 따위는 베어 버리고 저와 동방으로 가요.”

“너와… 같이..?”

“자세한 목적은 천천히 들려줘요. 하지만 가는 것 자체는 좋잖아요? 함께 보름달의 축제를 즐겨 봐요. 당신 정도 되는 파트너를 데려가면 내가 힘에 부쳐 밀렸다는 변명도 그럭저럭 할 수 있으니까요.”

절대로.

더 이상 섬에 머물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다.

새로 생긴 바닷길을 지키고 있던 요괴의 제안이라니.

도무지 짐작한 적도 없던.

예상 밖의 전개였다.

‘설마,이게 지도가 뜻하는 바는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다.

이곳까지 도달한 나를 명분으로 동방의 요괴가 고향으로 돌아간다.

캐빈 애슈턴과 관련된 비밀들은 언제나 항상 예상을 가볍게 뛰어넘는

전개였다.

이 제안을 거절한다면.

동방으로 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애초에 기스-제-라이의 지도에는 이 장소만 표시되어 있을 뿐이다.

가는 명확한 방법 따윈 없다.

눈앞의 요괴 자체를 타고 동방에 가야 할 수도 있고.

힘이 가늠되지 않는 상대이기에.

싸움이 벌어진다면 내가 패배할 가능성도 있다.

나는 멍한 표정의 후작을 바라봤다.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앉아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무방비해 보인다.

‘제대로 당했군.’

녀석을 아래위로 훑으며 말했다.

“이 남자는 내 동료다. 밸 필요는 없겠지. 같이 가면……

하지만 초롱너울의 태도는 무척 단호했다.

“이거 보세요,사령기사 아저씨. 그렇게 감상적으로 굴지 말아요! 본토는 요괴들의 땅이란 말입니다! 인간은 우리들의 완구이며,노예고, 먹이예요. 강하다고 할지라도 그런 혹을 달고 다닐 수는 없어요. 달이 인간에게 낙인을 박을 거라고요. 우리들의 위치까지 쓸데없이 노출되는 거예요. 손해가 커요.”

“으음……

“둘이 그다지 사이도 좋지 않아 보이던데, 은근히 애물단지인 거죠? 당신한테 좋은 일 해 드린 거예요. 뭘 튕기고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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