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1화 눈먼 달,지는 꽃 (28)
“그런데……
나는 초롱너울에게 물었다.
동방 땅을 밟은 이상 일단 먼저 확인해야 할 게 있다.
“혹시 이곳에서 가장 지식이 많고 현명한 녀석은 누구지? 물어볼 게 있는데.”
“누구긴 누구겠어? 나지.”
“…너도 모르는 문제다.”
“아,혹시 그 열쇠를 물어보려고
그런 거야? 보여 줬던 벌레 모형?”
“맞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인벤토리에서 황금빛 벌레 모형을 꺼냈다.
“이거지.”
이 모형을 찾는 것.
세상에 흩어진 일곱 개의 열쇠를 모아서 〈유산〉을 가동시키는 일이 동방에 온 주요 목적 중에 하나다.
“흐음.”
짧게 고민하던 녀석이 대답했다.
“귀중한 물건이지?”
“아주.”
“그러면 금빛 도깨비들이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너희, 도깨비 방망이 얘기 못 들어 봤어?”
“그게 뭐냐?”
처음 듣는 얘기다.
후작도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나만 모르는 게 아닌 모양이다.
“세상에,역시 예상대로 무식하네. 도깨비 방망이도 모르다니. 싸움만 아는 놈들이었어.”
“칼질도 좋지만 상식은 좀 갖추고 살지 않을래? 유명한 이야기잖아.
금 나와라 뚝딱. 도깨비방망이를 휘두르면 뭐든지 다 나온다는 거. 그 굵고 우둘투둘한 방망이에 끔찍 하게 맞아 죽기 싫으면 없는 것도 털어 내놓을 수밖에 없단 이야기, 정말 몰라?”
모른다.
애초에 도깨비 따위는 본 적도 없고.
“그래서,요지가 뭐냐.”
후작이 끼어들었다.
“벌레 모형 열쇠가 귀한 물건이면 도깨비 창고에 있을 거란 말이지. 그러니까……
잠시 고민하던 초롱너울이 결단을
내린 것처럼 외쳤다.
“그 창고, 당장 가서 털자.”
“…지금 바로?”
천천히 힘을 회복한다거나.
조심스럽게 주변부를 돌면서 현재 동방의 정보를 습득한다거나.
그녀가 옛날에 거느렸던 부하들을 하나씩 다시 모은다거나.
이런 과정은 전부 생략하는 건가?
새로 온 지역이니만큼.
동방에 대해서 탐색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당연하지. 바로 핵심부터 가자!”
불꽃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깨비들의 패거리인 게 분명한 땅귀신까지 나타났어. 이런 마당에 주변부만 빙빙 쑤시면 곤란해져. 시간이 지날수록……
초롱너울이 말을 이었다.
“우리가 정보를 얻는다고 해도, 녀석들이 우리에 대해 훨씬 많은 걸 알게 되겠지. 할 수 있는 대비를 비교해도 이 땅을 장악한 도깨비 놈들이 더 유리하겠고.”
“의외성이 살아 있을 때 움직이자는 이야기군.”
후작이 끼어들었다.
”맞아. 내가 본 너희들의 실력이면 승산은 충분해. 지금 치자!”
초롱너울이 나를 바라봤다.
“으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땅이 도깨비라는 녀석들에게 장악되어 있다면.
초롱너울의 말이 옳다.
어쨌거나 초롱너울은 지도에 표시된 열쇠 그 자체고.
그녀의 인도를 따라야겠지.
“동의한다.”
레안드로도 눈을 깜빡이며 미유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물론.
동방에서 가장 강한 요괴 무리를 처리하자는데 녀석이 거절할 리는 없었다.
“후후후… 좋아. 뜻이 합쳐졌군. 우리가 같은 날에 죽을 필요는 전혀 없지만,도깨비 때려잡을 때까지 적당히 협력하자고.”
때마침 바람이 불었다.
제대로 피어나지도 못하고 까맣게 시들어 버린 꽃잎들이 흩날리고, 바싹 말라 죽은 열매들이 우수수 바닥에 떨어졌다.
후작은 열매 하나를 손으로 주워 비볐다.
그을음 같은 새까만 가루가.
도깨비들이 있다는 남쪽을 향해 흩날렸다.
북풍이었다.
* ♦ *
“중간까지는 야옹이를 타고 간다.
그게 빠르거든.”
“얼마나 걸리지?”
“글쎄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면
열흘 정도? 야옹아,엎드려.”
- 쿠구궁.
불꽃의 말에 따라 곧바로 엎드린 요괴의 광활한 등 위로 먼저 내가 을라갔다.
“그런데 이 녀석,이름이 뭐지?”
“야옹이라니까?”
“진짜 이름… 말이다.”
갖바람쥐나 왕꽃게 같은 건 분명 진짜 이름이었다.
이런 강대한 요괴가.
후작과 내 합공에서 살아남아 도망쳤던 요괴가 정말 야용이라는 이름을 가졌을까.
“왜에?”
불꽃이 날카로운 표정을 지었다.
“야옹이가 진짜 이름이면 안 되니?
그냥 그렇게 부르면 되는걸.”
‘알려 주기 싫은 모양이군.’
초롱너울이 상대를 부르는 것만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느낌이 있었다.
어쩌면 진명이라는 건 치명적인 약점이 될지도 모른다.
- 팟!
후작이 단번에 야옹이의 허리에 자리를 잡았고.
“히히힝!”
머뭇거리던 미유도 결국 그 근처에 발을 뻗고 누웠다.
처음에는 경계했지만 푹신한 털이 있는 부분에 발을 뻗어서 그런지 곧 노곤한 표정을 지었다.
“간다……
거대 요괴가 충격도 소음도 없이 조용히 하늘로 뛰어올랐다.
'이거 놀라운데.’
대단한 탑승감이다.
바다에서도 물론 안락함을 느끼긴 했지만.
육지에서 펄쩍 위로 될 때마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높이 뛰어오르고,한 번씩 바닥을 디딜 때마다 착지에서 오는 모든 충격을 네 다리의 튼실한 근육으로 가볍게 흡수해 버린다.
바닥을 디디는 충격은 야옹이의 관절까지 오지도 못했다.
무엇보다 발톱을 감춘 야옹이의 발바닥 자체가 굉장히 폭신해서, 바닥을 디딜 때 소리 자체도 거의 나지 않았다.
한 번 뛸 때의 도약력도 엄청나서 자기 몸의 5배에 가까운 높이까지 될 수 있었다.
신장이 50미터에 달하는 만큼.
한 번에 250미터 정도의 높이로 을라온다.
새하얀 구름이 훌쩍 가까워지는 기분이었다.
‘이 정도라면,저번에 못 잡은 게 당연하군……
계곡을 뛰어넘고.
높은 암벽을 연달아 몇 개씩 훌쩍 뛰어넘었다.
인벤토리로 바람막이 역할을 하고
있어서 안정적으로 바깥을 볼 수 있었다.
한 번씩 솟을 때마다 탁 트이는 풍경은 아름다웠다.
푸른 숲과 언덕.
넓게 펼쳐진 논밭.
인간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것 같은 마을들이 종종 보였다.
제국에 비해서는 상당히 낙후되어 있긴 하지만.
꽤 큰 군락도 있다.
곡선의 멋을 살린 집과 건물들, 그럭저럭 정비된 도로까지 보인다.
‘인구 자체는 많은 것 같고.’
이런 평온한 풍경 속에 요괴들이 인간을 잡아먹고 있다는 걸까?
‘나름대로 번영하는 것 같은데……
반항하는 인간들의 마을이 모조리 불탄다거나.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워낙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탓에 하나하나 눈여겨볼 수는 없었지만.
“마魔가 인간을 잡아먹는 곳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고요하군.”
후작이 조용히 옮조린다.
꼬박 하루를 달렸을 때
앞쪽에 거대한 산이 보였다.
둘레와 높이를 감히 짐작도 하기 힘든 산이었다.
웬만한 산은 밥그릇 크기 정도로 보일 정도의 거리에서 아예 둘레가 다 보이지 않았다.
가장 높이 걸린 구름조차 그 산의 높이에 비하면 까마득히 저 아래에 있었다.
“크군……
“무겁고.”
나도,레안드로도.
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산의 중심, 까마득한 정상에서.
터무니없이 강한 무언가가 나를, 그리고 주위의 모든 것을 오연하게 바라보는 것이 느껴진다.
별생각 없이 받아들이면 영험한 기운이지만.
[심안心眼(A플러스)이 적용됩니다.]
[명경지수明鏡止水 적용…….]
[…에게 더 치밀하게 집중합니다.]
그 아래를 좀 더 들여다보면.
오만함이 느껴진다.
상대를 추방하고 멸시하는 기운.
산에 가까워졌을 때 즈음.
“어휴,너무 들여다보지 말라고! 그러다 괜히 눈 마주치면 귀찮아.”
- 화르르!
초롱너울이 우리에게 경고를 하며 바깥으로 튀어나오고.
“야옹아… 슬슬 멈추렴.”
요괴를 땅에 착지시킨다.
불꽃의 말에 따라 요괴가 사뿐히 땅에 내려앉았다.
“여기서부터 걸어간다.”
“꼭 그래야 하나?”
“이제부터는 아옹이를 눈에 띄게 하고 싶지 않아. 여기까지 편하게 타고 왔으니까 이제 직접 걸어.”
동방까지 안내한 것도 녀석이다. 틀린 말은 아니니 시비를 걸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불꽃이 말을 이었다.
“야옹이가 못 지나가.”
“못 지나간다니?”
그녀가 손을 뻗어 앞을 가리켰다.
“이 산은 가온누리의 일부라서. 꽃의 들판은 아니지만,신의 별장 같은 거야. 요괴도 인간도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돼. 마음대로 들어 갔다간 아주 곤란한 꼴을 당하게 될 거야.”
“〈자유로운 백성〉들만 출입한다는 그 꽃의 땅이라는 말인가?”
“맞아. 그 별관이야.”
여기서부터.
신의 영역이라는 이야기인가.
“돌아가야 하나?”
“그렇게는 너무 긴 여정이 되고…….
지름길이 좋지. 지하 동굴이야.”
“지하 동굴?”
“그래. 지하 깊은 곳까지 꽃의 신이 단속하지는 않아서,요괴들이 몸으로 뚫고 다니면서 만들어 놓은 동굴이지. 영기로 넘치는 산인 만큼 요괴들도 많이 몰려들었거든. 지하에 살아도 그 기운을 받을 수 있으니까.”
“신의 영기를 받기 위해 마魔가 모인다니. 기이한 이야기군. 진정한 영기靈氣라면 사이한 것들은 전부 태워 버리는 게 당연할 텐데?”
“하핫, 얼굴은 곱상하게 생겨서 어찜 이렇게 앞뒤가 다 꽉 막혔담. 세상에,‘진정성’ 찾는 아이는 정말
오랜만이네.”
불꽃이 후작을 놀리듯 감쌌다.
“가서 진정한 사랑이라도 해 봐. 진정성 찾는 애들은 꼭 자기한테 그게 결여되어 있더라.”
“…그래서,하고 싶은 말은?”
날카로워지는 분위기를 재빠르게 진정시키고 불꽃에게 물었다.
“동굴에서 귀찮은 게 굉장히 많이 달려든다는 거지. 전부 맡긴다?”
“이 요괴도 꽤 강하지 않나.”
나는 야옹이를 바라봤지만.
“야옹아,작아지자.”
“알았다. 주인.”
- 푸스스
우리를 내려놓은 ‘야옹이’가 하얀 연기를 내뿜으며 빠르게 작아지기 시작했다.
30미터. 20미터. 10미터.
5미터에서 다시 3미터로.
커다란 호랑이 크기 정도로까지 줄어든 야옹이는 계속 줄어들어서 정말 옅은 크림색 고양이가 되어 버렸고.
“야옹〜”
고양이가 입을 작게 벌렸다.
“뭐야,지금 설마……?”
“한번 해 봤다.”
후작이 굳어 버렸고.
미유마저도 어이가 없다는 듯이 입을 벌리고 한참을 서 있었다.
그런 짓을 하고 크림색 고양이는 훌쩍 뛰어 내 품에 안기더니 깊이 고개를 파묻었다.
“긴 항해와 달리기로 피곤하군. 이제 자겠다.”
진심인가.
이 녀석.
정말 잠들어 버린 듯 쌕쌕거리는 고양이를 안고 나는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자,가자! 야옹이 조심히 들고!”
불꽃이 앞에서 재촉했다.
“이쪽이야.”
앞장서는 불꽃을 계속 따라갔다.
곧 거대한 동굴이 보인다.
우거진 수풀 따위에 가릴 수 없는 거대한 동굴이다.
직경만 40미터를 훌쩍 넘는다.
나는 내 팔에 안겨 잠든 크림색
고양이를 바라봤다.
“이 정도면 굳이 이렇게 변하지 않아도 지날 수 있겠는데?”
“어디까지 우리 야옹이를 학대할 생각이야? 그 정도 했으면 됐지. 게다가 자유롭게 뛰어다닐 수는 없다고.”
불꽃이 짜증을 낸다.
물론 동굴이라는 건 언제 어디서 좁아질지 모르는 녀석이기도 하다.
내부의 기척을 살폈다.
심안이 발동한다.
당장 탐지에 걸리는 건 없었지만 좋은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요괴가 우글우글하다는 건가.’
“너희들,들어가기 전에 주의해야 할 게 있어.”
“뭐지?”
“너희들이 강한 거야 잘 알지만, 그 힘……. 특히 너무 특이한 권능을 사용하지는 마.”
빈말 같지는 않다.
불꽃이 진지한 표정과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간다.
“깊은 지하 동굴이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꽃의 신의 영역 아래야. 지켜보고 있을 가능성이 높거든. 최소한 뭔가 느끼긴 하겠지.”
“너무 특이하고 강한 힘을 보면 그녀가 너희에게 접근할지도 몰라. 그러면 정말,아주 아주, 생각보다 훨씬 더 귀찮고 까다로워질 거야.”
가온누리를 다스린다는 꽃의 신.
동방의 주신.
그것에 대해 초롱너울이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 갔다.
“꽃의 신은 관심을 갖는 대상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르거든. 모험은 좋을 게 없어. 게다가 특히 네가 나를 죽였을 때 같은 커다란 힘을 쓰면 터널이 무너지고,산 일각이 무너질지도 모르고,그럼 미리별이 굉장히 나쁜 감정을 갖게 되겠지.
우리 그런 복잡한 상황에는 절대로 처하지 말자.”
인벤토리의 적극적인 활용이나.
검뢰 같은 공격적인 기술은 조금 곤란하다는 이야기인가.
초롱너울이 이렇게 길고 진지하게 무언가에 대해 설명하는 건 상당히 의외다.
육체가 부서져도 기뻐하고.
겁날 게 없는 녀석이 아니었나.
“꽃의 신은… 강한가?”
그 정도로 주의를 받자 호기심이 올라온다.
“신이 강하냐고?”
초롱너울이 코웃음을 쳤다.
“당연하지. 기본적으로 신은 불사. 육체도, 영혼도 불멸. 무엇보다도 신이라는 명목으로, 현계의 것이 아닌 ‘격외’의 것으로 취급되기에… 세계의 구속을 받지 않거든.”
“그건 무슨 소리지?”
“이 세계의 법칙을 벗어난 힘을 발휘해도 억지력이 크게 작용하지 않는다는 얘기야. 눈속임의 필요가 현격히 줄어들지.”
“눈속임……
주술사는 거미줄을 속이는 자라고 아이작이 말한 적이 있다.
세계를 둘러싼 인과를 속여서.
포상은 자신에게,징벌은 남에게.
은혜는 반으로 갚고.
복수는 천배로 해야 한다고.
‘아예,속일 필요가 없다,라……
그런 게 어떤 감각인지는.
아직 상상하기 어렵다.
“•••알았다.”
“어? 하나도 기대하지 않았는데 의외로 좀 감을 잡은 것 같은걸? 너도 알았지?”
자신을 바라보는 초롱너울을 향해 후작이 검을 세웠다.
푸른 검기가 칼끝에서 3미터 넘게 솟구친다.
“이 정도는 되나?”
“응… 뭐.”
검기 정도는 괜찮다는 걸까. 인벤토리 없이 싸워야 할까.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하지만 동굴에 사는 요괴 무리를 처리하는 데 굳이 그것까지 필요 없겠지.
“그러지.”
- 스릉.
나는 칼을 빼들었다.
후작보다 조금만 더 굵게 검기를 만들어 낸다.
애초에,검기 출력이라면.
루-름으로 마력원을 삼는 내 쪽이 압도적이다.
“후후… 다들 의욕적이네. 좋아! 그럼 가 보자고!”
- 화르르!
앞으로 나온 초롱너울이 동굴로
먼저 들어간다.
“따라와!”
몇 분도 지나지 않아서.
우리를 환영하듯이.
- 파드득!
허공에서는 박쥐 요괴들이.
- 꾸드득!
바닥에서는 샛노란 연기를 뿜는 점액들이 바닥에서 튀어 을라오고.
‘이런 젠장……
동굴 벽면을 타고 떼로 몰려오는 바위 두더지들까지 감지되고 있다.
“정말… 동굴 부수면 안 되냐?” 간절히 물었지만.
“절대 안 돼!”
초롱너울은 더없이 단호했다.
452호후 눈먼 달,지는 꽃 (29)
물론.
처절한 개싸움 따위는 없다.
나는 한 손에 〈야옹이〉를 안고, 가볍게 칼을 휘두른다.
3미터를 훌쩍 넘는 푸른 파괴의 빛이 달려드는 무리를 그대로 반으로 갈라 버린다.
붉은 혓바닥의 도마뱀들은 길쭉한 내장까지 붉은 것을 보여 주며 바로 터져나갔다.
몰아치는 식욕의 회오리 속에서도
얼마든지 여유가 있다.
검기는.
구겨지지 않고.
빛도 바라지 않는다.
푸른 테두리에 닿은 적들은 모두 생명이 파기되고 부서져 내린다.
최소한으로 내보이는 이 정도의 힘에도 몰려드는 무리의 피와 삐가 섞여 갈려 나간다.
하지만 귀찮고 신경 쓰이는 건 물론.
더러운 건 여전히 더럽다.
가진 힘도 미약하며.
상대가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것을 판단할 신중함도,이지도 없이.
그저 오랫동안 어둠 속에 살아 온 요괴 무리는 날벌레 떼에 가깝지만 그만큼 번거롭기도 하다.
그들은 자신을 돌아보지도 않고, 상대를 생각하지도 않으며.
처박히듯이 달려든다.
오로지,후작에게.
“•••너무 많군.”
- 파아앗!
한 방울의 피도 내 얼굴에 튀게 하지 않겠다는 듯 후작은 검기의 농도를 높이며 달렸다.
직경 3미터의 푸른 반원이 둥글게 회전하며 무수한 요괴들의 검붉은 내장을,하얀 뼈를 전부 증발시킨다.
큰 기술 같은 건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급소를 노리는 것도 없다.
그냥 검기가 뿜어져 나오는 칼을 휘두르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것뿐이지만 파고들 빈틈 따위는 전혀 없다.
파괴력은 물론이고.
속도가 압도적이다.
공간 자체를 찌그러트리듯 빠르게 칼을 휘두른다.
덤벼드는 무리의 공세는 조금도 먹히지 않는다.
하지만 후작의 쇄골에서 솟아오르는 각인이 점점 더 강한 빛을 발한다. 동굴의 수많은 요괴들은 그 빛에 끌리고 있다. 미약한 무리들이지만, 모이는 무리의 숫자가 많아질수록 각인의 빛은 점점 더 강해지고,빛이 강해질수록 더 많은 수의 요괴들이 몰려온다.
악순환이다.
- 퍼어억!
휘두르는 단칼에 또다시 수십의 무리 벌레들이 사라진다.
어차피 이 세상에 영원은 없다. 인간도,요괴도,동굴의 어둠 속에 웅크리던 무리도 그걸 알고 있다.
그럼에도 자신을 불태울 찰나를 찾지 못해서, 허용된 수명을 바람 빠진 돛처럼 주저앉아 살아 가지만.
빛이다.
온기다.
먹잇감이 다.
허용되고,각인된 제대로 된 먹이. 부드럽고, 따듯하다.
저런 건 보통의 먹이가 아니다.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
눈부시도록 뜨거운 각인의 빛을 뿜어내고 있는 저 먹이에게라면, 다른 모든 건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찰나에 모든 걸 던지게 된다.
입을 벌리고…….
- 퍼격.
수많은 욕망들이 한 번에 반으로 갈라진다.
하지만.
그 균열 뒤로.
또 다른 무리들이 달려들었다.
♦ ♦ 本
동굴 안에서 이틀이 지났다.
“•••너무 많군.”
- 화아아아악!
후작이 만들어 낸 검기의 회오리가 직경 5미터의 원통을 만들며 적을 갈라 버린다.
바닥에 깔려 있는 시체들도 바람에
휘말려서 핏물이 된다.
하지만 적은 여전히 달려들고.
쌓이는 건 시체들뿐만이 아니다.
레안드로의 안색도 조금씩이지만 분명히 더 어두워지고 있다.
나타나는 무리의 최소 9할 이상은 레안드로에게 달려들고 있다.
앞에서,옆에서,위에서,밑에서.
- 좌악!
내 칼에 걸리는 건 후작을 향해 덤벼들다 서로의 몸에 부딪힌 탓에 떠밀려 온 것들뿐이다.
‘이렇게 관심을 못 받다니.’
내 몸에 부딪힌 녀석들마저 뒤를 보이고 어떻게든 레안드로를 향해 손을 뻗고 입을 벌린다.
- 콰과광!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수십 마리의 점액 요괴를 날려 버리며 레안드로가 나지막하게 묻는다.
“이거, 파낼 수 없나?”
초롱너울이 고개를 젓는다.
“달이 새긴 거야. 이 세계의 법칙을 벗어나 있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네
피와 살점만 깎여 나갈 뿐이야.”
후작은 그 말을 의심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새겨진 것인 만큼 본질을 어느 정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저 얼굴을 구기면서 칼을 계속 휘두르며,흩날리는 시체들 사이를 가로질러 걷는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무리는 온갖 각도에서
후작만을 미친 듯이 노린다.
‘힘들어 보이는군.’
산은 끝을 상상하기도 힘들 만큼 거대하고,그 아래를 뚫는 동굴은 직선과는 거리가 멀다.
동굴의 길들이 나뭇잎의 잎맥처럼 갈라져 있다. 갈라진 그 진로마저 몹시 구불구불하다.
초롱너울이 최단거리로 안내해 주긴 하겠지만 얼마나 더 지나야 할지 감도 잡기 어렵다.
게다가 후작의 입장에서는 정확히 자신을 노리고 몰려드는 떼거리다. 전신의 경맥으로,손가락 끝에서도 검기를 뽑아 낼 수 있는 검주에게는
하품이 나올 정도로 간단한 적.
그러나 피로가 계속 누적되는 건 분명하다.
초롱너울의 강한 경고가 있으니 큰 기술로 쓸어버릴 수도 없다.
긴장 속에서 작은 노동을 반복하는 건 인간을 금방 지치게 만든다.
미유도 마찬가지였다.
자잘한 요괴들은 쉽게 걷어차 버릴 규격 외의 명마.
평야라면 사홀 밤낮을 달리더라도 지치지 않는 녀석조차도,어둡고 울퉁불퉁한 바닥에서 싸우며 몹시 지친 기색이다.
“•••잠깐 쉬자.”
억지로 미유를 재우며 그 자리를 지키는 후작의 얼굴에 점차 짙은 피로감이 묻어난다.
걸음을 멈춰도 요괴 무리는 그의 몸에 새겨진 각인을 쫓아 계속해서 달려든다.
동굴 왼쪽 천장.
날개가 달린 종유석 형태의 노란 점액들이 후작을 향해서 날카롭게 내리꽂힌다.
그 사이에 잠든 미유가 있지만, 아예 뚫고 가려는 듯하다.
- 팟!
내가 후작보다 빨리 움직여 그걸 그대로 증발시킨다.
의식했는지 흘끗 돌아본 후작이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고맙다.”
저 녀석이 고맙다는 소릴 하다니.
“웃기지 말고 이제 뒤로 빠져라.”
후작이 피곤한 얼굴로 침묵하고, 나는 앞으로 나선다.
워낙 모두가 후작을 노리는 통에.
지금까지 내가 벤 양은 후작의 1/10밖에 되지 않는다.
녀석의 등 뒤를 지키는 것보다, 앞에서 미리 죽여 주는 쪽이 녀석이 훨씬 덜 싸우는 방법이겠지.
녀석의 표정이 조금 흔들린다.
다시 한번 밀려드는 녀석들에게 검기를 더 늘려서 칼을 휘둘렀다. 반원이 아니라,후작까지 보호하는 검기의 둥근 원을.
- 화르륵!
작게 만든 검염劍炎이 순식간에
퍼져 나가며 어두운 동굴을 데운다.
바닥에서 타오르는 검기가 무리의 접근을 저지한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
“뭐,어쩔 수 없지.”
초롱너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염을 일렁이며 적을 본격적으로 쓸어 나가자,후작까지 보호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히 히힝……?”
올라간 온도에 정신이 들었는지 미유가 일어나고.
나는 녀석을 보고 말했다.
“이번에는 네가 좀 자지 그러나?”
눈 밑이 어두워진 상태에서도. 아직 경계하고 있는 걸까.
“못 믿는다면,뭐.”
녀석은…….
“믿지.”
그대로 눈을 감고.
막 일어난 미유의 등에 엎드린다.
“가면서… 자겠다.”
“히히힝!”
길을 지체하기는 싫다는 걸까. 그나저나.
아무리 피곤한 상태라고는 해도,
정말 내 앞에서 자는 걸까?
정말 자는 게 맞나 의심스럽다.
역시 일부러 방심시키고 뒤에서 베려는 게 아닐까.
‘미묘한데.’
기척을 탐지해도 틀림없이 깊은 잠에 빠진 게 맞기는 하지만.
그 레안드로 폰 바티엔느가 내게 목숨을 맡긴다고?
함정일지도 모른다.
앞으로 걸어가다,다시 홀끗 뒤를 돌아봤다.
눈을 감고 있는 건 맞고.
숨소리도 고르긴 한데.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오랫동안 고민에 빠져 있을 만큼 한가한 상황은 아니다.
- 좌악!
후작에게 달려드는 무리들을 다시 베어 내고.
“하나,둘,셋. 왼쪽에서 세 번째 길로 들어가!”
불꽃의 인도에 따라 움직인다.
무려 여섯 갈래의 갈림길을 지나 걸러 간다.
길이 갈리며 20미터를 훌쩍 넘던 동굴 직경이 절반으로 줄어든다.
초롱너울의 말처럼 꽃의 신이라는 존재에게 살해당하지 않더라도.
그녀가 없었더라면 이곳의 미로를 쉽게 돌파할 수 없었을 거다.
탐지에도 분명 한계가 있으니까.
“이제 가운데로!”
불꽃이 다시 소리친다.
“너는… 이 동굴을 어떻게 이렇게 잘 알고 있지?”
“칼이나 좀 더 빨리 휘두르렴.”
“비밀이 없으면 재미없잖아? 어서 가자고.”
직경 5미터 정도로까지 좁아지던 동굴이 다시 몇 배로 흑 넓어진다.
후작이 나를 믿고 종종 잠에 든 지 사흘이 지났을 때.
드디어.
거대한 동굴의 끝이 느껴진다.
“이제 다 왔어.”
레안드로는 미유의 등 위에 누워 잠들어 있다.
아직까지 녀석이 정말 잠든 건지 아닌지 확신하긴 어렵다.
내가 미처 잡지 못하고 홀려보낸
요괴가 베인 걸 본 것도 같고.
- 사박.
“강한 녀석은… 없었군.”
동굴은 끈적하고 몹시 지겨웠지만 특히 강한 요괴는 없었다.
초롱너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괜히 동굴에서 잘났다고 날뛰다가 꽃의 신에게 주목받으면 곤란하니까. 그렇다고 날될 능력이 있는 녀석이 자진해서 힘을 누르고 거기에 살 리도 없고. 땅 자체에서 영기가 뿜어진다는 건 굉장하지만,
그러느니 밖에서 다른 요괴들이나 인간을 잡아먹고 힘을 키우는 게 빠르거든. 너희가 처리한 것처럼, 이지가 없는 수준의 무리만 그곳에 모여서 곰팡이처럼 피어나는 거야.”
“그런가.”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제약해야 하는 곳에 들어가고 싶지 않은 건 자연스럽다.
불꽃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동굴 밖으로.
첫발을 디딘다.
“아……
바람이 트인다.
오랫동안 고이고 막혀 썩어 가던 공기가 아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리저리 불고, 쌓이다가 흔들리고,위에서 아래로 불다가 때로는 아무렇게나 활개 쳐 나가는 상쾌한 바람이 나뭇잎들을 쓸며 숨 쉬고 있었다.
넓은 잎사귀들이 흔들리고.
그 위에 맺혀 흘러내리는 달빛도 현악기처럼 바람의 리듬에 맞춰서 떨리고 튕겨진다.
바람.
동방에서는 달도 풍경도 낯설고
바람도 낯설어서 한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박혀 있는 사이.
잠든 후작을 업은 미유는 터덜터덜 어딘가로 걸어간다.
풀이라도 뜯으러 가는 건가.
어둠 속에서 건조 사료만 힘겹게 씹었으니 밖으로 나온 김에 싱싱한 잎사귀를 뜯어야겠지.
녀석을 내버려 뒀다.
초롱너울은 너무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듯 잔소리를 시작했다.
“편하게 온 거야. 요괴들이 전부 이런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어어?”
인간의 모습으로 설명하던 녀석이 흠칫한 표정을 지었다.
반사적으로 녀석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지만.
붉은 꽃들이 흔들리는 가운데서 평화롭게 잎사귀를 뜯는 미유밖에 없었다.
풍경은 여전히 상쾌하다.
“왜 그래?”
“으응? 아무것도 아니야.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서. 내 나이가 되면 되살릴 추억이 많다니까.”
불꽃이 회상에 잠기듯이 부르르 몸 을 떨었다.
몇 살이라고 했더라.
왕꽃게와 이야기했던 걸 생각하면 최소한 700살은 넘은 것 같은데.
어쨌거나.
그다지 중요한 건 아니겠지.
움푹 꺼진 그듬달에 의지해 계속 계곡을 걸어갔다.
달의 윗부분은 떠낸 것처럼 깊이 파였지만 폐기되지는 않는다.
사라진 것은 며칠 후 거짓말처럼 다시 복구될 거다.
미유가 멈춰서 목을 축일 때쯤 후작이 일어났다. 그가 부스스한 얼굴로 가만히 침을 삼켰다.
“끝난… 건가?”
“그래. 잘 자더라.”
“힘의 사용은?”
깨어난 후작은 불꽃에게 그것부터 물었다.
“이제부터 마음대로 해도 돼.”
“좋군.”
그 순간.
개울물 위에서 흩어지는 달빛에.
미유의 목덜미로 작은 붉은 점이 비춰 보이다가.
곧 다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