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5화 눈먼 달,지는 꽃 (32)
‘저 안에 있군.’
불규칙한 심장의 박동이 포대 속 인간들의 존재를 알려 주고 있었다.
우리를 본 너구리는 빙긋 웃었다.
“어휴,초장부터 더러운 놈이네.”
작게 한숨을 내쉰 불꽃이 말했다.
“저건… 뭐지?”
“비말이라는 놈이야. 저 인간들 살리고 싶으면,펼쳐진 꼬리부터 당장 끊어 놔야……
“꼬리라고?”
작게 말했지만.
너구리가 눈을 붉게 빛내며 귀를 쫑긋거 렸다.
“초통너울 님이 돌아왔다고 했나? 그렇담 나도 최선을 다해야 하셔.”
상당한 거리였는데 귀가 밝은 것 같았다.
후작이 막 너구리의 반대편에 도착한 시점.
막 달려들려던 찰나.
어떻게 움직여 보기도 전.
너구리의 검고 부슬부슬한 꼬리가 커지면서 털들이 갑자기 칼날처럼
날카로워지고.
하얀 술 포대 안에서 빠른 속도로 빙빙 돌아가기 시작했다.
위이이이잉,하며 한 번에 수십의 무언가가 분쇄되는 소리가 울렸다.
너구리 요괴는 길쭉한 주둥이를 하얀 포대에 대고 막 갈아진 즙을 한 방울도 남김없이 삼켰다.
당연하게도.
포대에서는 더 이상 아무 박동도 감지되지 않는다.
요괴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건, 술 포대 따위가 아니다.
꼬리를 이용해 즉석에서 인간즙을 만들어 내는 포대였다.
“에휴.”
초롱너울은 예상했다는 듯 짧게 한숨을 쏟아냈고.
“재 도망갈걸? 바로 쫓아가! 빙한 공격에 약하니까……
- 쿠궁!
땅을 울리며 뒤로 내빼는 너구리 요괴의 행동을 정확하게 예측했다.
막 도착한 후작이 극심한 충격을 받아 얼어붙은 찰나.
‘검빙.’
- 서거격!
뛰어오른 너구리 요괴를 허공에 그대로 얼려 버렸다.
하지만 너구리의 몸에 서려 있던 붉은 기운이 폭발하듯 꿈틀거리며 주위를 감쌌다.
검빙의 영역은 붉은 기운을 전부 잠식하지 못했고,거대한 너구리는 얼음 안에 갇혀서 허우적거렸다.
‘호신강기……?’
최소한 검기만큼은 강한 요력을
온몸에 퍼트릴 수 있는 듯했다.
나는 얼음을 깨트리려고 두 눈을 뻘겋게 빛내며 발버둥 치는 요괴를 보며 말했다.
“버티잖아? 빙한에 약하다며?”
“약해서 저 정도지. 약자 사냥만 좋아하긴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한가락 하는 놈이야. 화염 저항에, 각종 물리 저항까지 전부 다 있……
버둥거리는 녀석을 다시 한번 공격 하려는 순간.
빛이 튀어 나갔다.
- 파각!
잔영을 남기고 자리에서 사라졌던 후작이 내가 만든 얼음을 가볍게 부수고 요괴를 찔렀다.
빨려 들어간 것 같은 속도였다.
하얀 얼음과 붉은 요력을 모조리 뚫고 푸른 검기가 배를 두부처럼 관통했다.
보이지도 않았고 반응할 여유조차 없는 공격이었다.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새파란 검기가 너구리의 등을 깊숙이 뚫고 나와 있었다.
“물리 저항… 있다며?”
“있어서… 저 정도인 것 같은데.” 불꽃도 놀란 듯 말이 느려졌다. 그나저나.
‘저 녀석… 대체 언제부터 저렇게 내 검빙을 뚫을 수 있게 된 거지?’
물론 작정하고 날린 건 아니고, 초롱너울의 재촉을 받아 한순간 급조한 공격이긴 하다.
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성장세다.
‘설마……
인간들이 갈려 나간 모습을 보고 실력이 올라간 건 아니겠지.
터무니없는 일이다.
만약 사실이라면.
재능에 한계가 있긴 한 걸까?
원래 저 정도였나?
미유를 죽인 잿빛 기사에게 무려 세 걸음을 맞섰던 걸 생각한다면 분노할 때마다 벽을 넘는 것 같긴 했지만.
동방에 데려온 건 역시 잘못한 게 아닐까 싶어 불안하다.
모르겠다.
일단 동방의 요괴들을 상대하면서 서로 칼을 겨눌 일은 없겠지.
눈앞의 일에 집중하자.
“끄윽……
과연 물리 저항이라는 게 헛말은 아닌지,검기가 흐르는 칼을 박고 있는데도 너구리의 내장은 요력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너구리는 지독히도 괴로워 보였다.
검기가 살갗을 찢어 그 속을 깊이 훑고 있지만,목숨은 붙어 고통이 지속되는 것이다.
“크으으윽!
크크콕
고통에 맛이 간 표정으로 요괴가 몸을 구부렸다.
레안드로는 요괴의 어깨를 발로
짓눌러서 다시 쭉 폈다.
“키회… 키킥……
너구리가 피를 토하는 도중에도 불꽃을 보고 킥킥거리며 말했다.
“초통너울 님… 대체 어디서 이런 강한 괴물들을 데려오신 거셔.....?
지금이라도 응? 내… 손을 잡으셔. 나는 좋은 정보가 아주 풍부하셔. 데려올 수 있는 친구도 잔뜩이셔.”
“싫은데.”
“크으윽… 왜 싫어하셔? 꼭 다시 생각해 보셔! 다구리에 장사 없으셔. 아는 것보다 더 엄청난 녀석들이 여기로 오는 중이셔.”
“말해 봐.”
“일단 치우셔… 끄흐흐… 흐흐……
이를 악물고 말하던 요괴 너구리는 고통에 거의 정신이 나간 것 같은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빨리… 끄흑……
초롱너울은 버둥거리는 너구리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싫은데. 그리고 얘네 어차피 내 말 귓등으로도 안 들어. 특히 네 배에 칼 박은 애는 나랑 친하지도 않아. 넌 뭘 하든 여기서 뒈질 거야.”
“이런 씨발……!”
너구리의 몸을 보호하던 요력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리고 눈이 돌아가는 걸 보니 생명을 깎아 발악하는 것 같았다.
내장이 펄떡거리며 지금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재생되고 주위 공기가 붉게 회오리치며 레안드로를 향해 날아들었다.
후작은 칼날 같은 회오리를 몸으로 받아내며 빠르게 아무는 너구리의 뱃속에 발을 집어넣고,
“그러니까.”
- 좌악!
발에 둘둘 감은 내장을 바깥으로 걷어차며 말했다.
“내장 길이라도 재 달라는 거냐?”
요괴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실시간으로 찢기며 아무는 내장이 밖으로 뽑히는데 몸은 다른 발로 밟혀 있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고 후작을 할퀴려 했다.
1미터가 넘게 돋아난 붉은 발톱이 후작을 뼈째로 찢어발길 듯 공격해 들어왔지만,간발의 차로 한 대도 명중하지 못했다.
“크악! 크아아악! 뒈져라!”
요란한 비명이 숲을 울렸다.
하지만 요력에도 한계가 있는지 발톱에 집중해서 휘두르면 칼이 박힌 내장의 재생이 현저히 약해졌고, 내장의 재생에 집중하면 후작에게 제대로 된 공격을 하지도 못했다.
후작은 이빨을 악물고 벌벌 떠는 요괴를 삐딱한 표정으로 내려다봤다. 내장에서 홀러나오는 체액과 피, 그가 방금 마신 인간즙이 삽시간에 흙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썩 보기 좋지는 않군.”
자기가 만들어 낸 풍경에 후작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빨리 마신 걸 다 뱉어내라.”
“카아아아악! 카악!”
이미 피도 토할 만큼 토하고 내장도 다 가른 것 같지만,후작은 너구리의 마지막 체액 한 방울까지 모조리 뱉어내게 할 셈인 것 같았다.
“갸아… 악!”
- 퍼억!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너구리의 요력이 다 닳으면서 후작의 검기가 너구리의 몸을 터트렸다.
살아 있는 상태에서 워낙 지독히 짜낸 탓인지 쏟아지는 피와 체액은
덩치에 비해 놀랄 만큼 적었다.
바늘 몇 개를 한참 쑤셔 넣고 있던 물풍선을 발로 짓밟아 터트린 것 같은 풍경이었다.
흐물흐물한 피의 폭발이 한차례 지나고.
불꽃이 재빠르게 내게서 빠져나가 요괴의 시체를 덮어쓴 순간.
“서쪽,아니……
레안드로가 바닥에 꽂혔던 칼을 빼 들며 읊조렸다.
“남쪽,동쪽에서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된 것 같군.”
꽃의 신의 영역이었던 북쪽.
그곳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초롱너울이 말한 요괴들의 축제가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많은 인간과.
압도적인 요괴들의 기척이 해일처럼 난폭하게 밀고 들어온다.
- 과직. 와드득. 후르르륵…….
- 쮸읍… 꿀꺽.
바깥쪽에 있는 요괴들의 기척은
숨고 도망치는 인간의 기척을 무척 느긋하게 없애고 있었다.
외곽 멀리서부터 느껴지는 요괴의 무리는 스멀스멀 피어을라 스미는 존재감만으로도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강하다.’
여기서 빠르게 이동하지 않으면, 거리는 점점 더 좁혀지고 포위망이 완성된다.
절대적인 숫자는 적지만.
느껴지는 요괴 하나하나가 아무리 못해도 죽은 너구리에 못지않은 녀석들이라는 사실이 기척만으로도 느껴진다.
생명이 빨려 들어가는 소리.
만찬을 더욱 즐기기 위해 일부러 허용해 준 비명들이 선명하게 바람에 실려 다가온다.
손이 벗겨지도록 애써 나무 위에 올라가 있거나.
진흙과 수풀 속에 깊이 얼굴까지 처박아 숨거나.
어느 쪽으로 도망쳐야 하는지조차 모른 채로,옷이 찢어지고 살갗이 벗겨져도 살기 위해서 발버둥 치는 비명들이 바람을 타고 들려온다.
죽음 자체에 초연하더라도.
끔찍한 고통 속에서 장난감으로
희롱당하다 먹히는 것에는 누구도 초연할 수 없으므로.
비명은,
모두 평등했다.
어디로 움직일 것인가?
학살은 북쪽을 제외한 270도에서 펼쳐지고 있다.
모든 방향으로 움직일 수 없다.
살해당하는 모두를 구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레안드로와 다른 방향으로 나눠서 움직이더라도 극히 일부의 방위만 막을 수 있을 뿐.
“아 됐어! 그냥 가자니까!”
흔들림을 눈치첸 걸까.
초롱너울의 재촉이 거세진다.
나는,
一 저벅.
하늘을 향해 걸어갔다.
“야,너 지금 뭐 하는……!”
인벤토리를 허공에 전개해서 밟고
서서히 올라갔다.
한 걸음,두 걸음,세 걸음...
안정된 부유감이 느껴진다.
숲의 가장 높은 나무보다도 훌쩍
더 위로 을라갔다.
너구리의 비명을 들은 자들부터. 진홁 속에 숨어 있던 인간들이. 나뭇가지에 매달린 인간들이 모두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봤다.
올라가야 한다.
모두에게 말해야 한다고.
구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일까.
어느 때보다도 인벤토리의 통제는 안정적이다.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동쪽,서쪽,남쪽을.
저 멀리서 높이 솟은 나무보다도
커다란 키의 요괴들이 보인다.
그들조차 훌쩍 고개를 꺾어 들어야 나를 올려다볼 수 있는 지점에서 멈춰 섰다.
여기까지 올라왔어도.
공포의 냄새는 가시지 않는다.
바람숲에는.
씻을 수 없을 만큼 공포와 고통의 냄새가 가득 배어 버린 것이다.
요괴들은 이러한 유희가 자신들의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하겠지.
그 가학심은 무엇보다도 서쪽의 인간들과 닮아 있다.
어디에서든 절대 기득권이라는 건,
지배계층은 저렇게 되는 것일까.
세계를,타자를 저렇게 인식하고 소비할 수밖에 없는가.
그런 행태에 딱히 논리를 내세워 반대할 생각은 없다.
옳다거나,옳지 못하다거나.
믿음을 가진다거나.
그런 걸 해본 적은 없다.
어차피 모든 건 하나의 현상이고 논리로 확장하려는 순간 디테일은 무너지며.
신념 따위를 가지면 언제나 더욱 불합리해진다.
정당화 같은 건 하지 않는다.
그냥,지금 여기서.
인간들을 구하고 싶으니까 한다.
동방의 인간들을 해방하겠다느니 같은 기분 따위는 당연히 없었고, 서방에서 마물들을 해방하겠다느니 같은 목표도 있던 적 없다.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서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할 뿐이다.
요괴들이 학살을 정당한 자신의 권리로 생각하듯이.
나에게도,
이 정도 권리는 있지 않은가.
- 저벅.
이것도 유희라면,유희.
뭐라고 불러도 좋다.
나는 상공에 30미터 정도 떠오른 상태에서 외쳤다.
“인간들이여!”
“동방의 인간들이여! 살고 싶다면 이쪽으로 와라!”
정당화는 없다.
이걸로 오히려 인간들이 한층 더 비참하게 살해당할지도 모른다.
고급의 어휘도 구사하지 못한다.
동방어 레벨의 한계.
“숲의 가운데다! 지금 사냥당하는 인간들이여!”
알고 있는 단어는 정해져 있지만.
“너희를 요괴들로부터 구해 주겠다! 목소리가 들리는 쪽이다!”
확실히,내 외침은.
숲 전체에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