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7화 눈먼 달,지는 꽃 (34)
바다를 건너 동방까지 온 목적과 안전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인간들 따위는 무시하고 초롱너울의 말대로 빨리 숲을 뚫고 나갔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택에 후회는 없다.
여기서 살해당하는 인간들을 그냥 무시하고 지나친다면,기껏 후작과 잡은 손을 다시 놓아 버리게 된다.
우연과 레안드로의 변덕이 겹쳐서 아슬아슬하게 끌고 온 관계다.
이 남자는.
시나리오의 대상 따위도 아니다.
호감도가 누적되어서 다음 생에 다시 간단히 친해지는 일 따위는 기대할 수 없다.
그것뿐만 아니다.
실력도 마찬가지.
후작을 설득해서 지금 수준까지 성장시킬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기껏 운 좋게 데려온 최강의 전력.
녀석과 헤어진 채 정체도 모르는 금빛 도깨비와 결전을 치르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처음에는……
위기를 맞이하면 녀석을 나 대신 미끼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동방의 요괴들이 나보다는 인간을 먼저 공격할 거라는 어렴풋한 계산이 있었고.
희생양으로 삼으려고 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함께 싸워 온 정이나.
의리 때문만은 아니다.
아직은 녀석을 방패막이로 놓고 도망갈 위기가 아니라고 무의식이 외치고 있었다.
‘꽃의 신……
당장 우리가 지난 지하 터널만
생각해 보자.
무리가 살던 거대한 터널 위에 우뚝 솟은 산을 지배하는 존재는 무엇인가.
〈신〉.
바람숲에서 축제를 벌이는 수많은 요괴보다 명백히도 더 강하다는 동방의〈신〉이다.
지금보다 더한 위기라면 얼마든지 찾아온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녀석과 한층 더 결속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
손을 잡고 우리들이 함께 선택한
위기를 돌파한다.
후작의 기척을 감지한다.
떨리는 기색은 없다.
칼을 잡은 손은 느슨해지지 않고, 두근거리는 심장에는 일체의 동요도 느껴지지 않는다.
- 쏴아아아아…….
“계속 원거리 공격에 집중해라. 다가오는 녀석들은 내가 맡지.”
오히려 흔들리며 잡념에 빠진 건 내 쪽이다.
멀리서 인간을 학살하는 요괴들에
향하는 검뢰의 숫자가 줄어든 걸, 곧바로 알아차리고 후작이 나에게 경고한다.
아무래도.
이 남자는.
방패막이나 미끼 같은 단어들은 전혀 머릿속에 떠올리지 않고.
오로지 눈앞의 적들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으음.”
달려오는 가장 강한 요괴들로부터 그가 나를 지켜 주는 동안.
도망치는 인간들을 원호해 달라는 이야기였다.
“알았다.
- 파지직! 번쩍! 파지지지직!
계속 적들을 향해 검뢰를 날렸다.
‘너무 산만해졌나.’
정말 나를 믿는 걸까.
민망했다.
녀석은 적어도 나를 놓고 도망갈 생각 같은 건 전혀 하지 않는 것 같으니까.
부끄러움에 후작을 돕듯 접근하는 요괴들을 향해서 두어 번 검뢰를
흩뿌려 봤지만.
一 퍼병!
‘안 맞네……:
허공에서 번개를 뿌리는 모습을 보고도 달려오는 자들은 하나같이 강자들인지 슬쩍 몸을 틀어 검뢰를 그대로 피해 버린다.
집중해서 한 녀석에게 쏟아부으면 모르겠지만.
간헐적으로 날려 봐야 피할 만한 요괴들만 이곳을 노리고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 콰과광! 파직! 파지지직!
심지어 번개를 정면에서 몸으로 받아 버리는 녀석까지 있다.
온몸이 뾰족한 산호초처럼 되어 있고 네발로 땅을 디디는 거체.
신장 5미터에 길이 20미터는 훌쩍 넘을 만한 녀석이었다.
몸에 돋아난 산호초 몇 개가 파삭 부서지고,몸이 잠시 마비되면서 그 자리에서 움찔하긴 했지만,다시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
아무래도 레안드로에게 맡기는 게 좋을 것 같다.
모든 신경을 다시 원거리 공격에 집중했다.
외곽의 요괴들은 숫자는 꾸준히 줄어들고 있지만.
‘인간 사냥도 여전하군.’
번개가 날아온다고 해도 흩어져서 아예 도망가 버리는 요괴는 없다.
자신이 아닌 다른 녀석들이 번개를 맞기를 기대하는 것일까.
사냥의 쾌락에 헐떡이면서 그냥 죽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소멸의 위험조차 기꺼이 무릅쓰고,
눈앞의 신선한 공포에 탐닉하면서, 절대 이 축제를 포기할 수 없다며 즐기는 저들은.
인간만큼의 가학심과.
인간조차도 훌쩍 뛰어넘은 욕망과 광기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공포를 먹고,고통을 먹고, 절망을 먹고,고기를 먹는다.
그것이 요괴.
지금이 가장 요괴다운 순간이며.
요괴다운 모습의 실현.
번개가 내리꽂히고,빗방울에 섞여 자욱한 뇌기가, 그리고 그것을 피한 자리에 인간의 피와 비명이 계속
피어오른다.
그나마 빗소리가 비명을 지우고.
나에게 구원받은 인간들은 전체 상황을 못 보는 게 다행이지만.
一 파앗!
적들이 나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벌써 가까워진 녀석들과 대치하는 후작의 형편은 훨씬 불리했다.
명백한 열세.
앞쪽에 나와 있는 후작을 스물에 가까운 숫자가 둘러싸고 있다.
달려온 요괴들은 누구 하나 비슷한
용모가 없었다.
인간을 죽이는 건 너무 시시했는지 새하얗게 질린 다른 요괴의 머리를 뽑아 거대한 손에 쥐고 킥킥거리는 녀석이 보였다.
살덩이 뿔이 우뚝 돋아나 있고, 턱과 이마,볼 부분의 얼굴 살이 수십 겹으로 쳐진 모양새의 기괴한 요괴 였다.
왼쪽 귀가 있어야 할 부분에 달린 두 번째 입이 깨작거리며 손에 쥔 머리통에서 흐르는 피를 낼름낼름 핥아 먹었다.
그 옆에는 단정한 옷차림의 여자가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어깨 아래로는 옷차림이나 볼록한 가슴까지 단아한 인간 미녀였지만.
목만 수십 미터를 구불구불 뻗어 허공에 긴 머리칼을 드리우고 있는 작고 하얀 얼굴에는.
뾰족한 뿔만 세 개 돋아 있을 뿐 이목구비 따위는 없었다.
신장 십 미터가 훌쩍 넘는 거대한 해골인데,유독 두개골만 커다란 녀석도 있었다.
다른 곳에는 살점이 전혀 없는데 양쪽 눈에 분홍색 안구만 박혀서 돌리며 희번덕거리고 있었다.
나를 알아보는 건지 커다란 턱이
움직이며 딱딱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해골 종족을 상대로 발휘된다는 카리스마는 먹히지 않았다.
동방의 요괴이기에 언데드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판정될지도 모르고.
‘어쩌면……
스킬이 먹히는 수준마저 넘어선 존재일지도 모른다.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그럴 경우.
저 거대한 해골은〈죽음의 기사〉 이상의 언데드라는 이야기다.
해골의 종아리 즈음에는 오싹할 만큼 사악한 기운을 풍기는 요괴가 가만히 서 있었다.
무언가의 살가죽으로 겹겹이 이어 만든 여우 가면을 쓰고 고풍스러운 겹겹의 비단옷을 입었는데,가벼운 겉옷을 젖히자 하반신 부분에 각자 다른 네 가지 색으로 입술을 칠한 거대한 입이 나타났다.
거대한 입은 후작을 보고 진득한 침만 뚝뚝 홀리고 있었다.
“북방을 향하는 이 난잡한 축제가 꽃의 신을 자극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서 따라왔는데……. 과연,벌써 재미있는 녀석들이 나타
났구나.”
인간의 피라고는 한 방울도 묻지 않은 하얗고 깨끗한 늑대가 입을 열었다.
털이 풍성한 꼬리가 늑대의 위엄을 더했다.
목에 두른 긴 염주에는 여러 개의 해골이 꿰어져 있었는데 그중에서 인간의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곳저곳으로 움직이는 몸놀림은 땅이 아니라 구름을 밟는 것처럼 가벼웠다.
비유나 착각이 아니었다.
실제로 늑대가 발을 디딜 때마다
공기 중의 빗방울들이 응결되면서 구름이 생겨나고 있었다.
“푸흐흐. 오만하긴. 초통너울 님이 돌아왔는데 재미없을 리가 없지.”
머리 양쪽에 구불구불 돋아 있는 뿔을 제외하면 완연한 인간 모습의 여자아이가,자그마한 공을 가볍게 통통 튕기면서 말했다.
볼이 땅에 닿을 때마다 빗방울이 증발하며 주위로 뭉게뭉게 불꽃이 일어났다.
색동옷을 입은 소녀는 가학적이고 짓궂은 표정으로 볼을 튕기며 하얀 늑대 주위에 다가갔다.
“댕댕아,너도 왔어?”
구름처럼 일어나는 불꽃이.
역설적으로 늑대가 만드는 구름을 녹여 증발시키고 있었다.
“어이없는 이름으로 부르지 마라. 그리고… 친한 척하지 마라.”
늑대가 인상을 찌푸리며 소녀와 거리를 벌렸다.
‘빗속에서 저런 화염이라니……
장난처럼 일으키는 불꽃은 호수에서 타오르던 〈그라스미어의 불〉마저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가장 신경 쓰이던 상대.
“오랜만이네.”
“초롱너울 님.”
어떻게 탐지되는지조차 마음대로 조정하던 두 개의 기척이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내며,마치 합을 맞춰 이야기한 것처럼 미세한 시간차를 두고 인사를 건넸다.
“어,그래. 하얀실,파란실아.”
“파란실이 먼저야.”
동시에 울려퍼지는 목소리.
“어쩌라고… 각시손,불망을아씨, 어둠벼락,겨울이리,삿갓바람까지… 껄끄러운 놈들은 죄다 몰려왔네.”
초롱너울이 무시하며 중얼거린다.
“네 일행들도,”
“진명을 말해.”
하지만 초롱너울은 콧방귀도 뀌지 않는다.
“나도 몰라,이 거미새끼들아.”
자매의 얼굴이 살짝 구겨진다.‘
“쓰러트린 다음에,”
“혼을 뽑으면 되지.”
“각인이 걸린 인간은,”
“어차피 우리의 먹이고.”
좌우에서 번갈아 들려오는 소리가 혼란스럽다.
‘…진명인가.’
불꽃에게 이름이 불리고도.
왕꽃게와 달리 저들은 제압당하는 느낌조차 없었다.
착각인지는 몰라도.
한 겹의 껍데기가 벗겨져서.
조금 상대방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뿐이다.
그 덕분일까.
새로운 게 느껴진다.
‘이 녀석들……:
두 거미 자매.
어째서 기척의〈형태〉가 계속해서 변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애초에 몸의 절반은 영체靈體로
만들어졌기에.
이 세계의 물리와 교감하지 않고, 모습으로 뭉쳐지지 않는다.
몸의 형태를 살펴보면 정확히 1/2에 불과.
머리부터 반으로 나누어져 눈도, 귀도,하나씩만 갖고 있다.
다리도 각자 오른쪽,왼쪽의 넷…….
하나의 거미요괴를 절반으로 나눈 모양새.
나머지 몸을 채우는 건 반투명한 주술식 이다.
실이 뽑아져 나와야 할 꽁무니는, 불길하고 반투명한 글자들을 줄줄
뽑아내고 있다.
그 색만 한쪽은 약간 더 파랗고.
다른 쪽은 아주 약간 더 하얗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대체… 저들은 뭐지?”
“저물녘의 세쌍둥이다. 혼과 몸이 한데 붙어 태어났다가 나눠졌지. 잘라낸 부분의 몸을 어미가 생명을 희생하면서 주술로 가공해 놓았다. 그 어미는 내 호적수라고 할 만한 녀석이었고……
초롱너울이 설명을 이었다.
누구보다도 강한 딸을 낳으려던 전설적인 거미 요괴는 배에 술식을
새기고서.
임신 기간에 최고의 영기靈氣를 갖춘 것만 먹으러 다녔다.
그 식탐은 요괴,인간,짐승,약초, 보물을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자아를 가진 무기들마저 저물녘의 빼곡한 독니 사이에 녹아 한 끼 식사가 되었다.
절제를 잃어버린 모성애의 결말은 기괴했다.
배에 밴 것은 한 마리의 몸인데.
도를 넘어선 어머어마한 영기의 홉수로 인해,서로 다른 세 개의 혼이 자라나 버린 것이다.
그렇지만.
초롱너울의 이야기에는 명백하게 이상한 점이 있었다.
“세… 쌍둥이라고? 하나는?”
기이한 기척도 분명히 둘이었고.
저들의 모습은 분명 하나가 둘로 나뉜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그 순간이었다.
- 파드득!
“저기 있잖아.”
불꽃이 허공을 가리켰다.
사납게 내리는 빗방울 사이로.
서로 다른 곳에서 뜯어 온 듯한 세 쌍의 날개에,미녀와 독수리와 사자의 머리,원숭이의 팔 두 개와 거대한 물갈퀴가 달린 다리를 가진 흉측한 괴물이 떠 있었다.
심지어 그 모습은 뚜렷이 정해져 있지도 않은 것처럼 들끓었다.
“저게… 쌍등이라고?”
“그렇지. 세 마리의 혼에 육체는 하나에 불과하니,저물녘이 아무리 애써도 딸 하나의 혼은 희생시켜야 했다. 받아들일 수 없던 저물녘은 제 생명을 희생한 끝에 외도外道로 한 마리를 순수한 영체로 낳았다.
말하자면 저건 걸어다니는 자궁… 갈망하는 고기항아리지. 태어났지만 몸을 받지 못했기에 언제나 허하고 굶주린다. 무엇을 마셔도 목마르다. 끝없이 더 강한 육체를 이식하기를 갈구한다.”
줄곧 굳건했던 레안드로마저.
저 셋이 등장하고 난 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는 게 보였다.
‘절대 예사롭지 않군.’
주위의 다른 요괴가 없어도 싸워 이길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거리를……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에 떠 있는
녀석의 거리를 재기가 힘들었다.
‘최소한… 검주급이다.’
느껴지는 존재감만 그러했다.
싸워 본 적 없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어려운 상대라고 봐야 했다.
후작의 바싹 굳은 표정을 본다면 저 자매들만도 상대하기 어려울 게 분명하다.
‘진짜 괜히 왔나……
하지만 묘하게도 설명하는 불꽃, 저들의 강함을 우리보다는 훨씬 더 잘 알고 있을 초롱너울의 어조는 절망보다 희망에 들떠 있었다.
‘절대 같은 편도 아닌 것 같은데.’
그때 였다.
몸이 나눠진 거미 자매에게서.
“이 인간은,”
“우리가 상대한다.”
“손을 대면,”
“가만두지 않겠다.”
원래 하나의 몸이었다는 걸까.
미세한 시간차를 두고서 서로의 말을 받으면서.
“이 인간은,”
”막내가 다 먹는다.”
- 파드득!
세 쌍의 날개를 펄럭이는 ‘막내’가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그게 무슨 개소리야!”
여자아이가 발을 굴러 주변으로 불꽃을 터트렸고.
“개를 모욕하지 마라. 어쨌거나 터무니없는 억지다.”
늑대가 땅바닥을 긁었으며.
“너희들부터 죽어 볼 거냐?”
누더기 여우 가면은 꼬리 여섯 개를 빳빳하게 세웠다.
안 그래도 서로의 존재를 은근히 불편해하던.
모여 있던 요괴들로부터 즉각적인 반발이 터져 나왔다.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초롱너울을 바라봤다.
불꽃이 씩 웃으며 말했다.
“다 모아 놓으니까,이렇게 좋은 점도 있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