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8화 눈먼 달,지는 꽃 (35)
조금 더 불씨를 지펴 주자.
저들 가운데는 레안드로를 보면서 침을 질질 흘리면서도,
아직 내 존재를 상당히 의식하는 녀석들이 있다.
애초에 사방에 번개를 날리면서 시선을 끈 것부터가 나니까.
내가 끼어들면.
분명 일단 싸움을 멈추고 나부터 먼저 제압하겠지.
‘그건 곤란해.’
저들 전체를 이긴다는 건 절대로 불가능하다.
후작과 합동해도 무리다.
‘아니,전체가 아니라……
반의반만 남는다고 해도 승기를 확신할 수는 없다.
‘무조건 빠져야 한다.’
내 존재는 요괴들을 묶어 줄 뿐.
게다가 일단 싸움을 시작한 뒤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사방에서 인간들이 몰살당할 테지.
상황을 타개할 방법은 하나다.
요괴들이 레안드로를 자기가 먹고 싶어 격렬한 내분에 빠져 있을 때 인간들을 구하는 것.
그 이후.
최소한의 숫자만 남고 지쳤을 때 후작과 합공을 시작한다.
‘한둘 정도만 남으면 좋겠지만……
그렇게까지 형편 좋게 흘러가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살아나갈 방법은 그것뿐.
그 외에는 없다.
“레안드로,너를……
여기까지 정리하고 말하는 순간,
“나를 미끼로 써라.”
몇 개월 동안 땅에서,바다에서 함께 싸워왔다는 증거일까.
끝까지 말하지 않아도 속마음을 곧바로 읽어 낸 모양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확인하고, 레안드로와 나를 번갈아 흘끗대는 요괴들을 바라보며 외쳤다.
〈뭘 그렇게 나를 신경 쓰고 있냐?>
〈나는 저 우둔하게 생긴 인간놈과 같은 편이 아니다!〉
어차피 동방어다.
레안드로가 알아들을 일은 없다.
조금 더 과격하게 해도 되겠지.
〈같은 편은커녕! 자세히 말해 주지! 나는 이 망할 인간놈에게 대단히 깊은 원한이 있다! 더럽게 질기고 질긴 악연이지! 몇 번이나 죽이고 싶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지금이야 거짓말이지만.
감정은 진짜였다.
목소리에 절실한 진심이 실린다.
〈이 끔찍하게 지긋지긋한 인간을 언제나 정말 떨쳐 버리고 싶었다! 도대체 왜! 바다까지 따라온 거냐! 정말,정말 혐오스러운 집착이다!〉
별빛청여우와 나를 죽음으로 내몬
바다 위의 추격전이 떠올랐다.
‘엄청 옛날 일이긴 하지만……
그때 별빛청여우는 나에게 무척 다정하게 대해 줬는데.
황제 암살의 보상을 내가 받아야 한다고 말해 주기도 했고.
유쾌한 선장까지 가엾게 죽었지.
나를 보고 당황한 내색 하나 없이 태워 준 프로페셔널한 상인이었다.
다시 한번 보고 싶은 녀석인데.
후작 놈만 아니었으면.
육지인어 무리나 크라켄도 충분히 피해 갈 수 있었을 거다.
〈빌어먹을… 내 소중한 친구들이
이놈의 마수에 희생당했다……!>
미유나 이사벨이 죽은 사정 따윈 굳이 생각하지 말자.
그때를 생각하며 원한에 집중하니 정말 분노가 차오른다.
숲에 떨리는 내 목소리가 울렸다.
옆에 있던 초롱너울이 그런 일도 있었냐는 듯 당황하는 표정이다.
〈뭐야,진짜 그랬어……?>
요괴들도 약간의 동요가 느껴진다.
〈물론이지! 몇 번을 죽어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원한이다!〉
실제로 지금 기억하는 게 증거지.
삿갓요괴의 머리 위에 반투명한
파란 눈이 둥둥 떠올랐다.
〈거짓은 아닌 것 같다. 지독하군. 있을 수 없는 가정을 해도 진실로 느껴질 정도의 원한이라니…….>
공작의 진위판별과 비슷한 건가.
〈진짜 싫어하나 본데?〉
〈흐음.〉
오래 유지하는 힘든 권능인 건지 파란 눈은 잠시 깜빡이다 곧 다시 사라졌다.
확실히.
나에 대한 경계가 느슨해진다.
‘레안드로가 동방어를 모르는 게 이럴 때 좋군.’
좀 더 과격하게 해도 되겠지.
〈혼자서는 죽이기 힘든 녀석이라, 일부러 지금 같은 상황을 기대하고 여기로 데려온 거다! 너희들에게 전적으로 맡기마!〉
혹시 다시 파란 눈이 깜빡인다면 곤란하다.
이 정도로 해 두자.
그때 였다.
- 화르르!
〈내가 너희에게 염파를 개방하지. 읽어 봐라. 애초에 나도 저 인간을
데려올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어! 당장이라도 버리고 싶지.>
초롱너울이 앞으로 나섰다.
진녹색 불꽃이 허공에 엷고 얇게 퍼져 갈 때.
〈진실이다.〉
〈진실이다.>
몸의 절반이 영체이기에 사념을 민감하게 읽을 수 있는 두 자매가 먼저 중얼거렸다.
〈뭐야,사실이잖아.〉
색동옷을 입은 여자아이도.
〈그렇기는 하군.〉
귀를 쫑긋 세운 늑대 요괴도 이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버리고 싶어 하긴 했지.’ 저렇게만 떼어서 말하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때.
잠잠히 있던 레안드로가 나서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악의 무리,
씨를 말려 주겠다고 도발해 봐라.”
나지막한 목소리다.
다들 내 통역을 기다리는 눈치. 글쎄.
그것보다는.
〈너희들 중에 제일 강한 요괴가 자기를 먹어 주면 기쁠 것 같다고 말하는데.〉
아무래도 이쪽이 낫겠지.
-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몹시 선명히 울려 퍼진다.
요괴들의 강한 욕망에 반응해서 레안드로의 각인에서 한층 더 환한 달빛이 쁨어져 나왔다.
‘역시 이게 먹히는군.’
거의 손으로 만질 수도 있을 듯한
욕망의 공기가 진득하게 온 사방을 가득 채웠다.
“마물들의 잔혹한 행위를 절대로 참을 수 없으며,이곳의 인간들은 물론이고 동방 전체의 인간을 내가 구하겠다고 도발해 봐라.”
글쎄.
통역사의 재량을 발휘해 보자.
〈계속 눈치만 보지 말고 과감하게 자기를 뜯어 먹을 수 있는 녀석이 없냐고,자신의 살점을 잡아 뜯어 씹어 달라고,먹히기 위해 이렇게 수련해 왔다고 말하고 있다!>
- 크르르르
예상보다도.
훨씬 잘 먹힌다.
몇몇 요괴는 그 말을 듣고 극도로 흥분해서 몸을 바르르 떨었다.
레안드로는 만족한 눈빛으로 나를 흘끗 을려다본다.
잘 통역해 줬다는 표정이다.
자극해 줬지.
분노가 아니라 욕정을 일으키긴 했지만.
지독한 욕정의 대상이 된다는 게
생소해서 아무래도 둘을 헷갈리는 모양이다.
一 퍼격!
얼굴이 수십 겹으로 쳐진 요괴가 끓어오르는 욕망을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손에 쥐고 있던 머리통을 내던졌다.
그리고 그 손을 땅속에 바로 박아 넣었다.
저 멀리서 박은 손이 레안드로가 디딘 발밑의 땅을 불쑥 위로 뚫고 나오고 있었다.
“이런 미친 새끼가!”
자그마한 공을 튕기던 색동옷의 여자아이가 분노한 얼굴로 주름살 요괴의 등 뒤에 공을 던졌다.
- 콰콰콰콰!
지금까지 보여 준 건 장난이라는 기세로 공에서 불꽃이 뿜어졌다.
반경 백여 미터 안에 있는 나무에 서린 습기가 단숨에 증발될 정도의 열기 였다.
주름살 요괴는 등짝이 초고열로 지져지면서 깜짝 놀라서 펄쩍 위로
뛰었다.
하지만 시커면 속이 보일 정도로 지져지면서도 허공에서 다른 손을 뻗어 후작을 움켜쥐려고 했다.
“어리석군.”
- 콰직!
늑대가 훌쩍 뛰어 주름살 요괴의 손을 강하게 짓눌렀다.
주름살 요괴는 레안드로를 향한 필사의 돌격이 차단된 상태에서도 헉헉대며 몸을 덜덜 떨었다.
고통이 타격의 충격 때문이 아닌
터질 듯 이글거리는 욕망에 전신을 덜덜 움찔대는 듯했다.
- 크르르르르
귀밑에 양쪽으로 난 입에서 먹고 싶은 걸 먹지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침이 줄줄 흘렀고,두 눈은 진작에 흐릿하게 풀려 있었다.
늑대와 색동옷이 주름살 요괴를 차단하는 사이,여유 공간이 생긴 여우탈이 앞으로 강하게 한 발을 디뎠다.
순간 각각의 꼬리에서 여섯 개의
붉은 원이 떠올랐다. 원 하나마다 이마에 굵은 뿔이 달린 여섯 마리 요괴가 하나씩 튀어나왔다.
여섯 요괴가 여우탈을 보호하며 공간을 만들자 여우탈은 하반신의 입을 후작을 향해서 크게 벌렸다.
“혼자 전부 다 처먹으려는 버릇은 사백@ 전부터 불치병이군.”
저물녘의 두 자매는 몸의 영체로 정면을 꿰뚫는 통로를 만들었다.
이 세계의 것이 아닌 것처럼.
조금도 저항을 받지 않고 요괴의 몸을 통과한 통로로 기괴한 모습의 ‘막내’가 들어갔다.
막내는 신기하게도 통로를 바로 통과해서 손에 쥔 화극을 강하게 휘둘렀다.
여우탈은 긴 손톱을 들어 힘겹게 상대하면서도 뒤로 몸을 빼지 않고 하반신에 달린 입에서 침을 뚝뚝 흘리며 맞섰다.
동시에 제 주인을 돕기 위함인지 여섯 요괴가 ‘막내’에게 후방에서 공격해 들어갈 때였다.
- 지이이잉.
다들 신경 쓰지 않던 ‘통로’가 여섯 요괴의 몸을 모두 빙 둘러 꿰었다.
그리고 뒤에서 돕던 두 자매가 각자 가진 하나의 눈을 연두색으로 빛냈고,동시에 꿰어진 긴 통로도 연두색으로 변했다.
- 치이이익!
연두색으로 변한 통로는 여우탈을 돕던 요괴 여섯의 몸을 깨끗하게 표백했다. 몸통이 아무것도 남지 않고 녹아내리자 여섯 마리분의 팔다리가
후두둑 떨어졌다.
후작은 쏟아지는 파편들을 피하며 인상을 굳혔다.
“영체의 실을 순수한 염소鹽素로 전환해 버린 건가. 재들은 어째 못 본 사이에 더 악독해졌네.”
초롱너울이 작게 중얼거렸다.
‘저런 힘이라니……
어쩌면 두 자매는 내가 인벤토리를 쓰는 것보다 더 자유롭게 영체를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등골이 서늘했지만 일단 방금의 공격 끝에 두 자매는 지친 것처럼 보였다.
여섯 부하를 잃은 여우탈도 몸을 부르르 떨며 물러났다.
잠깐 힘의 공백이 만들어진 사이 레안드로는 슬쩍 위치를 옮겼다.
시체의 파편을 피하는 척하면서 북쪽으로 미끄러지듯 이동했는데, 우스꽝스럽게도 요괴들의 포위망은 그의 발걸음에 맞춰 따라갔다.
녀석을 적극적으로 공격하다가, 제 공격에 당한 레안드로가 정작 다른 요괴에게 먹히는 게 두려운지 제대로 된 살수도 펼치지 못하고 있었다.
남아도는 힘은 결국 엉뚱한 곳을 향했다.
- 서걱!
어두운 기운이 맺힌 칼을 후작이 아닌 제 옆의 요괴에게 박아 넣는 녀석도 있었다.
“이런 쓰레기가……! 배신이냐?”
“실수다. 얼쩡거린 네 잘못이지.”
“어떻게 봐도 고의잖나! 너부터
죽어 볼 테냐?”
심지어 레안드로가 약해질까 봐, 약해진 레안드로가 다른 요괴에게 먹힐까 봐 약화의 저주조차 변변히 걸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너무 탐나는 먹이.
어부지리를 극단적으로 두려워한 나머지 그들은 고작해야 한 명에게 완전히 휘둘리고 있었다.
一 피잉!
후작은 최소한으로 칼을 휘두르며 다시 한 걸음을 옮겼다.
요괴 무리도 엉거주춤한 자세로, 온몸이 저릴 정도의 욕망에 끌려 후작을 둥글게 감싸고 따라갔다.
‘북쪽인가……
저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북쪽이
신의 영역이라는 사실은 알 텐데.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아니,생각이 있긴 한 걸까.
정말로 내 말과 초롱너울의 말을
믿고 갔다고?
그걸로 충분했다는 건가?
늑대가 이빨을 조금 드러내다가 따라갔을 뿐이고.
나머지는 거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방치하고 가버리다니.
“내가 원했던 상황이기는 하지만, 솔직히 조금 당황스러운데.”
얼떨떨하게 초롱너울을 바라봤다.
말뜻을 바로 알아들은 초롱너울이 킥킥대며 웃었다.
“인간이건 요괴건 믿고 싶은 걸 믿을 뿐이다. 알아서 빠져 줬는데 받아들이고 싶겠지.”
“네 녀석도 때려눕히고 싶을 만한 상대겠지. 그러나 그놈이 정신이 혼미할 만큼 맛있어 보이기 때문에 너를 무시한 거다.”
“요괴는 애초에 인간을 먹기 위해 태어난 존재……. 인간을 먹는 것이 근원적인 욕망. 달이 〈먹이〉라고 문신을 새긴 데다가,그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초월급의 식사가 자신을
먹으라고 도발했다. 저들이 그리 똑똑한 녀석들은 아니지만,저런 상황에서는 누구도 정신을 차리기 어려워.”
“어쨌건 저 녀석이 심하게 맛있어 보이는 탓에 따로 보험을 안 써도 되었네. 후후… 그런데 정말 아직 탈출할 생각이 없니? 딱 이상적인 상황인데.”
“전혀 없다.”
나더러 도망치라고 이렇게 시간을 벌어 준 게 아니다.
심지어 다시 안 볼 사이라도.
레안드로가 죽고 난다면 기억이 전부 초기화되더라도.
저렇게까지 하는데 내가 여기서 도망칠 수는 없다.
- 파직! 과르르! 콰쾅!
다시 검기의 번개를 날린다.
꾸준히 한 움큼씩이라도 요괴들의 포위망을 뜯어 나갔다.
숲 전체에 걸친 포위망 때문인지 좀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다.
맞고 한 번에 바로 죽어 주지 않는 어중간하게 강한 녀석들도 있기에 작업이 더욱 더뎠지만 구한 인간의 숫자는 꾸준히 늘어난다.
초롱너울이 통솔하는 그림자들도 활약한 덕에 인간 이백 명 정도를 구했을 무렵.
계속 초조해하던 그녀가 말했다.
“어휴… 미치겠네……. 이제 가자.”
“아직 1/10도 처리하지 않았어. 갈 길이 멀다.”
“빙 돌면서 처리하자니까.”
“여기가 최적의 장소일 텐데.”
“이제 다 주워먹어야지. 여기서는 죽여 봤자 못 주워먹잖아. 먹을 게 저기 널렸는데! 설마 저걸 다 놓치 겠다는 거니?”
사실.
생각해 보면 정론이기는 하다.
여기서 아래로 움직이면 후작의 기척을 놓치겠지만.
기척을 계속 추적한다고 특별히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자기만족에 불과한가.’
“좋다. 요괴들의 혼을 수확할 수 있다는 얘기겠지? 그림자 개들처럼 부려서 인간들을 도와라.”
“그럼! 그래야지! 너한테 얼마나 많은 혼을 묶을 수 있을지 정말로 기대된다니까.”
포인트는 다른 것 같지만.
확실히 이게 훨씬 더 많은 인간을
구하는 방법이겠지.
왕꽃게의 집게나 너구리의 꼬리, 그림자 개들까지 전투에 전부 다 투입하면 확실히 효과가 있을 거다.
‘쓸 수 있는 건 다 쓰자.’
싸우면서 힘을 더 불려 빠르게 쓸어 버릴 수 있을지도 모르고.
초롱너울의 힘이 커지는 게 조금 의심스럽긴 하지만 한계는 있겠지.
어차피 나에게 매여 있는 힘.
상황은 내가 통제할 수 있다.
“좋다,내려가지.”
“어머! 흔쾌하게 동의해서 좋네. 일단은 질보다 양을 채워 보자구.”
불꽃이 흐뭇하게 웃었다.
‘먼저 저기부터다.’
- 파앗!
계속 신경 쓰이던 곳.
검뢰를 날릴 수 없을 만큼 인간과 요괴들이 가까이 붙어 있는 곳으로 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