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1화 눈먼 달,지는 꽃 (38)
나는 지배당하는 어둠빛을 본다. 네 마리 요괴를 한 번에 반파시킨 기술을 숨기고 있는 녀석이다.
‘본체가 낫겠군.’
역시 그대로 보존하는 게 낫다.
계속 나를 따라다니는 그림자로 만든다면 어둠빛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이 훼손된다.
‘원거리 공격으로 써야겠지.’
이번에는 상황이 맞아떨어져서 방심한 상태의 네 마리 요괴에게
공격을 먹였지만,실전에서는 저런 힘을 모은다면 최우선 순위의 제압 대상이 된다.
그렇지 않아도 어떻게든 어둠빛의 공격에 포착되지 않거나 피하려고 발버둥칠 것이다.
실체가 있고 카리스마에 지배되는 상태로 만든다면 멀리서도 녀석을 사용할 수 있다.
내가 하늘에 떠서 상대의 위치를 파악하고,어둠빛에게 모은 광선을 그곳으로 쏘라고 명령하면 된다.
“복종해라.”
[카리스마: 만개滿開.]
[1 천 이상의 요괴를 이끌고 있는 상태입니다.]
[대요大妖급을 다섯 이상 휘하에 두고 있습니다.]
[특전: 언데드 사령관이 강화됩니다.]
[대요〈어둠빛〉의 근원이 완전히 당신에게 제압당합니다.]
나는 녀석의 정신 깊숙한 곳까지 지배력을 행사한다.
‘사홀에 한 번인가.’
가지고 있는 권능까지 머릿속에 세세히 들어온다.
녀석의 자유는 사라졌다.
언데드라면 몸만 아니라 마음까지 완전히 나에게 종속되기에.
- 쿵!
거대한 녀석이 몸을 덜그럭거리며 나에게 조아린다.
반역은 불가능하고.
폭력을 쓰거나 찍어누를 필요조차 사라진다.
녀석이 조아린 발끝에서부터 진득한 지배자의 쾌감이 치밀어 오른다.
* * *
요괴의 숫자가 아홉에서 넷으로 줄어들었을 때 레안드로는 일말의 희망을 가졌다.
넷은 무리지만 여기서 한 마리만 더 줄이면 분명히 희망이 있다.
셋 정도는 어떻게 해 볼 수 있다.
아홉에 둘러싸여 버텨기까지 했던 레안드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게다가.
- 까강!
‘내분인가?’
세 개의 머리를 가진 요괴의 화극을 강하게 쳐 내며 레안드로는 생각했다.
요괴가 네 마리만 남은 뒤.
늑대와 여자아이,여우탈 요괴는 얼마간 싸우다가 뒤로 빠져 버렸다.
뒤에서 같은 요괴의 뒤통수라도 노리려는 걸까.
무슨 까닭인지는 몰라도 분명히 좋은 기회였다.
가자.’
레안드로는 북쪽으로 내달리려 했다. 하지만 그가 미유를 몰아서 발을 디디려는 순간이었다.
“히히힝!”
미유는 자리에 못 박힌 듯 섰다. 애마 미유가 전투중에 자신의 뜻에 반하는 일은 완전히 처음이기에.
꿈에도 이런 일을 생각하지 않던 레안드로는 거의 말 위에서 굴러서 떨어질 뻔했다.
“이게 무슨……!”
- 위이이잉
어느새인가 가죽을 기운 여우 탈의 주위를 환한 금빛 기운을 내뿜는 네 개의 기호가 돌고 있었다.
각각 세 줄로 이루어진 짧은 점과 긴 점의 조합이었다.
‘저건가.’
뜻은 알 수 없지만 한눈에 봐도 극히 위험해 보이는 힘이었다.
놀랍게도 기호들에서는 여우 탈이 뿜던 사이한 요기가 아닌 현묘한 기운이 느껴졌지만,그게 오히려 지독하게 불길했다.
‘시간을 주면 안 돼.’
어떤 마법사들과 싸울 때보다도
예감이 좋지 않았다.
레안드로는 말에서 뛰어내렸다.
세 개의 머리를 가진 요괴를 뒤로 몰아붙인 뒤 여우 탈에게 뛰어가서 칼을 휘두르려고 발을 굴렀다.
하지만 도약하려는 바로 그 순간, 강한 금빛 기운을 내뿜는 기호가 좌우로 나뉘어 여덟 개로 늘었다.
‘이런……!’
레안드로는 구르려 했던 디딤발을 바닥에서 뗄 수가 없었다.
一 팟!
기를 모아 강하게 발을 떨쳤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여우 탈의 주위를 도는 여덟 기호가 나뉘어 열여섯으로 변했다.
기호는 순식간에 하나가 나뉘어 넷이 되었음에도 서로 제각기 다른 모양이었으며,크기나 빛의 밝기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떨어지지 않는 건 오직 두 발만이 아니었다.
무인의 혼인 칼마저 내던져 버리고 싶은 중압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기도에 무언가 꽉 들어찬 것처럼 숨쉬기가 어렵다.
심장이 제대로 뛰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은 압력이 전신에 가해졌다.
- 쿠쿵.
이를 악물고 두 눈에 핏발을 세워 버티던 레안드로의 오른쪽 무릎이 푹 꺾여 바닥을 찍었다.
이제 무릎을 못 쓰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커다란 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마魔를 보면 즉시 베어야 한다는 기사단의 신념을 생각했다.
요괴 앞에 꿇을 몸이 아니다.
꺾였던 무릎이 서서히 퍼졌다.
〈어머나.〉
하지만 색동옷을 입은 여자아이가 그의 몸에 불덩어리를 집어던졌고, 몸통에 적중한 불덩어리는 고막이 터질 정도로 강한 폭발을 일으키며 그를 다시 바닥으로 처박았다.
〈와,얘 진짜 끈질기네.〉
여자아이가 감탄하면서 여우 탈을 바라봤다.
〈그런데 얼마나 저놈을 처먹고
싶으셨으면 봉인된 팔괘를 2차까지 푸셨어?>
여우 탈은 대답하지 않았다.
- 화르르!
〈이건 내가 먹는다.〉
가죽가죽을 기운 여우 가면 안에서 나지막히 중얼거릴 뿐이었다.
동시에 여우탈의 주위를 빠르게 회전하던 열여섯 개의 기호에서 금빛이 뿜어지며 기호는 순식간에 서른두 개가 되었다.
〈으음,3차 해방이라니… 대가가
결코 만만치 않을 텐데.〉
〈300년 전에도 주제넘게 팔패를 풀어서 그렇게나 아름답던 미모를 잃어버렸잖아?〉
늑대와 여자아이는 그 모습을 보고 뒤로 한 걸음 더 물러났다.
기호가 서른두 개가 되며 속도는 훨씬 더 빨라졌고,기호들이 서로 이어져서 더욱 강한 빛을 발했다.
- 우우응……!
귀가 울리고.
일반인과 비교할 수 없이 강화된
신체임에도 불구하고.
팔다리의 실핏줄이 빨갛게 투두둑 터져 나간다.
디디고 것이 하늘인지 땅인지도 판단하기 어렵다.
감각과 평행을 마비시키고.
의식을 유지하기 힘든 압박감.
기호가 열여섯 개일 때는 그나마 한쪽 무릎만 꿇고 버티고 있었는데, 서른두 개로 늘어나자 아예 무릎을 댄 부분이 허벅지까지 땅속으로 깊이 파고들어갔다.
싸움은커녕.
당장 이대로 죽어 버리지 않을까.
그는 눈을 감았다.
동방까지 온 목적을 생각했다.
사냥당하던 인간들을 생각했다.
옆에서 주술에 묶여 있는 미유를 생각했다.
당장 죽어 버리지 않는 게 이상한 압박감 속에서 레안드로는 두 발을 디디고 일어났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입에서 검은 피가 솟았다.
반은 얼어붙고,반은 그을렸으며, 요력을 두른 무기가 곳곳을 긁은 몸이다.
지금까지 누적된 것만 해도 절대
견딜 수 있는 양이 아니다.
내장에 쌓인 타격을 증거하듯이 계속해서 검붉은 피가 솟으며.
시야가 새하얗게 흐려진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그가 땅에 칼을 박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내가,내가 먹을 거야…….>
레안드로 근처에서 덩달아 팔패에 짓눌리던 저물녘의 막내는 세 개의 머리로 동시에 말하며 후작 근처로 기어갔다.
그가 사자의 아가리를 벌렸을 때
색동옷이 불덩이를 휙 던져 그걸 튕 겨 내며 말했다.
〈거,여우님. 저년부터 죽인 다음 인간은 같이 나눠 먹읍시다. 팔과를 존중할 테니 팔 하나만 주소 예? 저단은 제가 씨게 구워 버릴 테니까〉
색동옷이 한 수 물러 주겠다는 듯 목소리를 깔며 여우 탈을 견제했다.
어느새 늑대는 색동옷과 함께 여우 탈을 가운데에 놓고 빙 둘러 움직이고 있었다.
여우 탈이 우습다는 투로 콧방귀를 뀌었다.
〈너희들이 700년 동안 신이라고 불렸던 내 앞에서 손을 잡겠다는
것이냐…….>
〈동네 잡신이셨지. 욕망에 너무 충실해서 요괴로 타락하신 것이고. 그리고 팔괘를 풀었더라도 우리가 귀찮긴 할 텐데? 사실 완전 해제도 아니잖아?〉
- 화르르!
색동옷의 걸음걸음마다 바닥에서 불꽃이 뿜어져 나왔다.
32개로 펼쳐져 회전하는 패卦를 두르고 두 요괴들과의 싸움을 준비하려던 여우 탈은,괘卦 사이에서
무언가를 읽어 내고 걸음을 멈췄다.
〈대흉大凶……?>
팔괘라는 것은 본디 방위이며. 주위의 변화를 읽어 앞날을.
길과 흉을 점치고 나타내기 위한 물건이다.
무엇보다 정확하게 기능하는 것은 방향을 정해 주는 점괘占卦.
어디를 가고.
어디에는 가지 말아야 하는가를
보여 주기에.
〈이건… 이건…….>
남방에 떠오른 건 단순한 대흉이 아니었다.
[팔괘도해 ]
[정남향]
[겁살]
기호들 위에 떠오른 글자를 보고 여우 탈은 무언가에 홀린 듯 뒤로 흠칫 물러났다.
[팔괘도해 ]
[정남향]
[수옥살]
〈이… 이런…….>
[팔괘도해 ]
[정남향 ]
[천살]
- 팟!
그대로 몸을 돌린 여우 탈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덜덜 떨며 서쪽으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뭐야……?>
허공에 떠도던 기호들도.
빛나던 꼬리도 사라지고.
장내를 압도하고 있던 무게감은 온데간데없었다.
〈진짜 도망… 친 거야?〉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아무래도 연기는 아닌 것 같군.〉
〈저 빼꼼한 녀석이 도망이라니……. 엄청 신경 쓰이네. 최대한 빠르게 잡아 먹자. 싸우지 말고 나눠 먹자. 거의 지친 것 같은데?〉
늑대가 고개를 끄덕거였다.
〈좋다. 너와는 언제나 먹고 싶은 부위가 다르니까.〉
一 팟!
두 요괴가 연달아 달려들었지만, 팔괘도의 압박이 사라진 상태에서 레안드로는 순순히 당해 주지만은 않았다.
쌓인 타격에 비틀거리면서도 다시 일어서 칼을 휘둘렀다.
칼에 맺힌 검기가 뻗어 날아오는 불덩이를 박살 냈고,냉기를 머금고 내리치는 늑대의 발톱을 튕겨 냈다.
몸의 절반이 그을리고 몸의 절반이 얼어붙은데다, 화극에 호신강기가 긁혀서 갑옷 곳곳이 부서지면서도
그는 끝까지 먹히지 않고 버렸다.
괴로운 듯 몸을 휘청거리면서도, 정작 끝내기 위해서 공격하면 그게 함정이었다는 듯 날카로운 반격을 잊지 않았다.
〈크옷…….>
먹고 싶다.
요괴들의 입에서 애타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먹이는 가장 달콤한 내장은커녕 살코기 한 점 내주지 않았다.
그저 간간히 튀는 붉은 핏방울을 욕망에 사로잡힌 눈으로 성수처럼 핥고 있을 뿐이었다.
<…….>
- 콰쾅!
짙은 냉기가 서린 늑대의 발톱과 인간의 칼이 부딪쳤다.
칼이 훨씬 더 크게 튕겨져 나갔고 인간은 비틀거리며 세 걸음을 뒤로 물러났다.
누가 봐도 연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늑대는 더 공격해 들어가지 않고 대신 긴 귀를 쫑끗 세웠다.
〈킁쿵… 불길한 냄새가 난다.〉
〈뭐야, 왜 하다 말아? 뭔 냄새?〉
〈남쪽이다.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이게… 말이 되는 건가……. 지금이 아니면 늦는다. 도망가겠다.〉
〈야! 어우! 아까워서 어째! 그래도 개코 말인데 믿을 수밖에 없잖아. 이런 젠장!〉
다 죽어 가는 후작을 보고 분한 듯 발을 동동 구르던 색동옷도 늑대를 따라서 동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먹이를 둘러싸고 있던 아홉 마리 요괴들 가운데 남은 건 결국 저물녘의 막내 하나뿐이었다.
〈콕콕큭… 멍청한 것들……. 아니,
좋지… 아주 좋아……! 이 몸 혼자서 너를 자근자근 씹어 먹어 주마!〉
남겨진 막내는 즐거웠다.
강한 먹이.
일대일 상황이었지만 사냥감에게 쌓인 타격이 훨씬 더 많았다.
어쩌면 기다리기만 해도 알아서 쓰러져 줄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혼자 요괴들을 상대하며 쌓인 타격 때문에 지금도 울컥울컥 피를 토하고 있었다.
생사에 초연하여 검을 쥔 마음이 아무리 가볍다고 해도.
결국 손에 쥔 칼은 무게가 있고,
상처 입은 육체는 선혈을 홀리면서 안식을 갈구한다.
전신의 혈맥들이 완전히 터지고 엉켜 버렸으며.
다리는 절뚝거리고.
칼을 쥐지 않은 다른 손은 제대로 주먹조차 쥐었다 펼 수 없을 정도.
팔괘의 압박을 집중해서 받았기 때문일까.
고막이 터진 양쪽의 귀에서까지 새빨간 피가 흘러나온다.
이래서야 몸이 온전하다고 해도 똑바로 서 있을 수 없는 상황.
그런 상대를 보며 요괴는 세 개의
머리로 빙그레 웃었다.
〈좋아… 먹어 주마!〉
무슨 멍청한 사정에서 요괴들이 사라졌는지 알고 싶지조차 않았다.
온전히 자신 혼자 눈앞의 먹이를 먹을 수 있다는 확신과 기대감.
그것은 어떤 요괴에도 뒤지지 않는 〈탐욕〉그 자체를 본령으로 태어난 저물녘의 막내에게 있어,집중력을 흐트러트리기는커녕 오히려 최대의 잠재력을 발휘하게 만들었다
- 까가가가가가가강!
격렬한 백여 수가 오간 뒤.
- 퍼격!
여분의 팔에서 강한 주먹이 꺾어 사냥감의 배를 강타한다.
허리가 꺾이며 다시 얼마 남지도 않은 피가 토해진다.
반격은커녕 고개를 드는 것조차 어려워 보이고.
미물인 흑마는 여우가 남기고 간 팔괘의 속박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태.
인간을 먹고 저것도 배가 남으면
입가심으로 먹자.
조금 오래 버렸지만,이제 곧이다. 이제 곧…….
그토록 기다렸던 식사.
집중이 최고조에 오르고.
마지막 일격을 남겨 놓은 순간.
〈어라,도망이라니?〉
전혀 의식하지 않던 허공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래서 눈치 빠른 녀석들은 곤란하다니까요. 이거야 원,하나밖에 남질 않았군요.>
머리 위의 까마득한 허공으로부터 거대한 먹구름이 쇄도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어두운 것들이 ‘막내’를 유린했다.
어디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는 악의.
삿갓을 쓴 그림자가 혼백을 베는 귀검으로 막내의 여섯 팔을 베고, 거대한 손이 뻗어나와 다리를 잡아 으스러뜨린다.
- 파드득!
단말마처럼 반사적으로 여섯 개의 날개를 펄럭거리지만,서로 이어진 두 거미 그림자에서 나온 초록색 연기가 날개를 지져 버리는 탓에, 무의미한 펄럭거림은 금새 멈췄다.
‘언… 니……?’
의식은 거기까지였다.
입 밖으로 나오지도 못한 의문에 대답은 없었다.
생명핵의 위치를 정확히 알기에, 그곳으로 초록색 연기를 집중해서 뚫어 태워 버리는 두 거미 요괴의 그림자가 막내의 목숨을 거두는 것과 동시에 거대한 암녹색 불꽃이 그를 휩쌌을 뿐.
“추적할까요? 흔적을 보면 여우 탈은 서쪽으로,불망울아씨와 겨울이리는 동쪽으로 도망간 것 같은데요.”
그때 였다.
“네 녀석… 어떻게… 된… 거지?”
허공에.
제국 공용어가 울려 퍼졌다.
목소리에 목숨을 구원받은 감사는 없었다.
동료를 위해서 버티다 고통조차 느끼기 어려울 만큼 망가진 몸으로, 레안드로 폰 바티엔느는 칠흑 같은 먹구름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피눈물을 흘리는 눈이 담은 것은, 진득한 의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