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2화 눈먼 달,지는 꽃 (39)
“먹었다.”
가볍게 대꾸했다.
“이 숲에 있던 요괴들은 모조리 나의 일부로써 종속되었지.”
방울방울 허공에 튀는 물빛 사이로 인간의 눈빛이 아득하게 흔들린다.
“왕이시여,일단 저 녀석이라도 취하시는 게 어떠신지요?”
초롱너울이 고한다.
나는 인간을 바라봤다.
“ O 으.”
—.
쉽고,간단히,무참하게 살해할 수 있는 녀석이다.
내 손짓 하나면 유예되던 목숨은 끝나 버린다.
내 영혼에 묶인 그림자들이 그를 산산이 찢어발겨 놓을 것이다.
상당히 쓸 만한 녀석.
그렇기에 녀석과 함께 도깨비왕을 처리하러 왔다.
강한 전력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계속 상당한 활약을 했다.
하지만 이천이백의 그림자를 가진 지금이라면 별다른 의미는 없겠지.
먹어 버릴까.
‘그건 좀……
마음 한편에서 조용한 거부감이 일어난다.
그렇다면…….
“너,내게 영원한 충성을 맹세해라.”
이건 어떨까.
“뭐라고?”
인간의 얼굴이 구겨진다.
“지금까지의 공을 보아 무릎 꿇고 충성을 맹세한다면 높이 써 주마.
나는 도깨비왕을 처리하고 요괴의 왕으로 등극하겠지만,네 녀석은 내 발밑에서 인간의 왕으로 살 수 있도록 해주겠다. 가혹한 사육은 아닐 것이다.”
너무 관대한 제안이다.
제안이 빗소리를 뚫고.
“사." 육.?”
피에 젖은 입술이 떨리고.
“요괴들의… 왕이… 되겠다고……? 하하…. 하하하하하하...
레안드로가 허탈하게 웃는다.
자신은 결국 숲의 광대였다.
이런 마물에 믿음을 주어 이때껏
싸워 왔으며.
잠깐이라도 동료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에 한걸음 들여놓았다니.
싸우고 싶은 만큼 싸우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목숨 따윈 내놓은 일격을 먹이지 않고.
녀석이 다른 요괴들을 처리하는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서 만신창이로 농락당하며 비참하게 버티고,오직 버려 왔다.
그런데.
그 시간을 눈앞의 상대는 요괴의 왕좌에 서는 데 썼다는 것인가.
“너를… 동료라고 생각했다.”
악문 이 사이로 흘러나온 이야기에 스스로를 비웃었다.
수천의 그림자와 하늘에 떠 있는 ‘동료’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이 썰렁한 농담에 웃는 건 어차피 자신뿐이라는 거겠지.
윗입술과 아랫입술 사이로 간신히 도는 숨이 무너지며 오직 웃음만을 터트린다.
“하… 하하하하……
“저런,감히 왕의 앞에서 참으로 경박하게 웃질 않습니까.”
웃는다.
마음에 쌓였던 피와 고련이.
신뢰가,상처가,빗방울과 먼지가 허무한 웃음소리에 걷힌다.
자신은 어째서 마魔를 베는 것에 그토록 집착했던가.
희미한 심장 소리가 문득 과거를 되살린다.
다른 인간들과 언제나 거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강함.
그걸 볼 때면 인간들은 하나같이 두려워하며 경원시했다.
어릴 때부터 어딘가에 속할 때면 언제나 느껴졌던 어색한 공기.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자신들의
목숨까지 빼앗을 수 있는 소년은 모두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검주라는 정점에 서고,기사단장이 된 후에는 조금 편했지만.
자신이 과연 단원들의 생각대로 승배받기 적합한 존재인가에 대한 의문과.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는 기사들에 대한 내적인 거리감은 줄곧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은 정말로 인간이라고 불리기 적합한 존재인가…….
유일하게 검을 겨룰 만한 상대인 로랑스 타르티에 공작을 그렇게나 경계했던 것은,역시 동족혐오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싸움을 피한 것은 로랑스가 아닌 오히려 자신 쪽이었다.
불안했다.
자신이 그를 꺾어 버리기라도 하면, 정상에는 아무도 없어진다.
정상의 공기는 춥고 희박하다.
점점 일그러지는 로랑스 타르티에 공작을 보며 느꼈다.
이곳에 선 자신은.
어디까지 인간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가?
혼자 거대한 요새를 쓸어버리고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간단하게 죽여 버릴 수 있는 인간들을 향해 연민하고,공감하기 위해서 애쓰고, 마는 무조건 베어 버리려 한 것은, 오히려 자신이 인간이라는 명제를 계속해서 다짐하기 위한 의식.
‘그렇게까지… 했는데.’
그 절박한 신조마저 잠시 굽히고 협력했던 상대가,결국 마귀들의 왕이 되기 위해서 자신을 이용했던 것이다.
- 스르륵.
사정 따위는 물을 필요조차 없다.
모든 것을 잊어버리자.
몸의 상처,불리함,정상의 차갑고 희박한 공기,고독,지금까지 겪어 왔던 싸움,고통 같은 것을 모조리 잊어버린다.
남는 것은 오직,
검劍.
인간과 싸울 때도.
마물과 싸울 때도.
검에게 구분 따위는 없었다.
결국 자신이 걸어온 길은,검劍.
다시,칼을 들어 올리자.
들끓던 모든 잡념이 윤곽마저도 깨끗하게 사라진다.
거세지는 빗소리도 더 이상 귀에 들리지 않는다.
* * *
“싸우겠다는 건가……
흡수한 삿갓바람의 영안으로 녀석을 살펴본다.
그림자로 일어나면 영력은 오히려 예전보다 강해지고.
삿갓바람은 검술을 가장 정확하게 볼 수 있기에 레안드로의 상태도
한눈에 파악된다.
“간격을… 압축시켰군.”
한 줌도 남지 않은 체력으로 가진 유일한 선택지다.
오로지 반격을 위한 자세.
지배하는 검의 간격을 세 걸음에서 한 걸음으로 압축시켰다.
하지만 안에서는 세 배가 아니라 아홉 배는 될 것 같은 압박감.
눈이 시릴 정도의 살기가 보인다.
확실히.
‘안으로 들어가면 위험하겠지.’
하지만 이미 허공에서 이천이백의 그림자를 통솔하는 나에게 녀석이
가지는 간격 따위는 의미가 없다.
“하하하… 어리석은 녀석이군요. 왕이 무엇인지 까마득하게 모르는 알량한 자입니다.”
암녹색 불꽃이 크게 웃어댄다.
실로 그러하다.
왕에게,자신이 나설 필요란 없다.
이천이백의 요괴를 그 몸에 심고 하나가 된 왕이.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채로, 눈앞에 한 자루의 검을 들고 오직 거기에 모든 심혼을 맡겨 서 있는 검귀처럼 고독할 리가 없다.
“...이만 쓰러져라,검귀.”
- 고오오오오……!
왕의 그릇에 담기고.
왕의 힘으로 움직이는 그림자들.
어느새 그림자 군단에 합류해 온 저물녘의 막내와 함께.
대요라고 불리며 공포와 시체의 산을 쌓아 올렸던 다섯 마리 요괴를 필두로.
바람숲 전체를 덮었던 이천이백의 요괴가 이번에는 오직 한 명의 망가질 대로 망가진 인간을 향해서 몰려간다.
승리라고 할 것도 없고.
토벌이라고 할 것도 없다.
분쇄라는 말조차 거창했지만.
“과연… 훌륭하군.”
요괴들와 이어진 감각으로 인간의 분투가 느껴진다.
어디를 어떻게 상처받고 있는지, 남은 생명이 얼만큼인지.
망가진 몸으로 쥐어 극히 느릿하게 움직이는 칼에도 불구하고,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훌륭한 반격.
거의 움직이지 않는 것 같지만, ‘흐름’을 읽어서 미리 그곳에 검을 두기만 하면 말려드는 상대는 절로 제압된다.
눈을 감은 레안드로가 펼쳐내는 둔검純劍에,간격 안으로 들어선 그림자들은 홀린 듯 휘말려 베이고 흩어진다.
하지만.
- 콰과과과:라:라과]
칼이 폭풍을 벨 수는 없고.
더 이상 있을 수 없는 압도적인 힘의 차이가 모든 걸 무의미하게 짓이겨 버린다.
어떤 집중도,재능도,기적도,검의 묘리도……. 이런 힘의 차이를 이겨 낼
수는 없었다.
- 털썩.
레안드로의 모든 것이.
몸도 마음도 폐허가 된 채,최후로 움켜쥐어 들어 올린 검혼마저 부정당해 그가 땅에 쓰러진다.
피로 젖은 시선이 위를 향하지만, 보이는 것은 하늘이 아닌 이천 마리 요괴의 먹구름뿐.
콰드드드득!
칼을 쥔 오른쪽 팔이 여섯 개의 그림자에게 나눠서 파먹힌다.
이미 그림자가 된 녀석들마저도 레안드로의 육신을 먹고 싶을 만큼 욕망의 미련이 강했던 것이다.
“그만.”
그림자가 된 여섯 대요大妖.
순간적으로 통제를 벗어난 녀석들을 다시 거둬들인다.
어깨까지 깨끗하게 파먹힌 팔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칼을 쥐어야 할 오른팔이 사라졌다.
이걸로 끝이다.
와작와작 씹혀서 피먼지로 흩어진
오른팔에 시선도 주지 않을 만큼 의식을 잃은 상태.
저대로 죽더라도.
한때의…….
‘관두는 게 낫겠군.’
직접 목숨을 거두고 싶지는 않다.
“도망간 녀석들을 쫓아가 보겠다.”
“전하,송구하오나 조금 자비가 지나치신 듯하여……
- 좌라락!
암녹색 불꽃은.
자신이 별도로 통솔하는 소수의 그림자들을 움직여 인간의 왼팔을 파먹는다.
그림자 무리는 인간의 하나 남은 팔을 혈관 한 가닥,신경 한 가닥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먹었다.
이을 것도 붙일 것도 없다.
- 쏴아아아...
어깨까지 파먹힌 두 팔에서 피가 빗물에 섞여 흐른다.
저대로 얼마나 버틸 것인가.
혹여 버틴다고 해도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왕에게 저항한 대가는 팔다리를 모두 절단하더라도 부족합니다만, 명을 거두지는 않으시려는 듯하여 이 정도로만.”
초롱너울은 아직 두 발을 땅에서 떼지 못하고 버둥대는 흑마를 흘끗 바라봤다.
“저 미물은 계속 팔괘의 흔적에 눌려 있군요. 저것도 슬슬 풀릴 것 같습니다만……. 죽입니까?”
“놔둬라. 도깨비왕에게 간다.”
곧 금제가 풀린다면 적당하겠지.
흑마를 보고 명령했다.
“네 주인을 데리고… 어디로든 돌아가라.”
* * *
- 쿠르르르릉!
비는 멈추지 않고 폭우가 되고, 바닥 곳곳을 흐르는 급류들이 엉켜 숲이 더 거세게 헝클어질 때.
“히힝! 히히히힝!”
발버둥 치던 흑마가 드디어 팔괘의
흔적에서 풀려났다.
피눈물을 흘릴 정도로 버둥거린 까닭일까.
강한 주술에 짓눌렸던 까닭일까.
한때 목덜미에 작게 찍혀 있던 붉은 점이,폭우가 내리는 지금은 가슴 한편을 덮을 정도로 거대해져 있었다.
마치 발진이라도 일어나는 것처럼 그 부분의 살갗이 조금씩 투둑투둑 무너져 내린다.
하지만 흑마는 살갗에서 일어나는 일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흙탕물의 급류에 휘말려 나뒹구는 주인에게 다가갔다.
- 철퍽! 철퍽!
흑마는 주인을 내려다본다.
“히힝……
조각조각 부서지고 남은 갑옷은, 흉갑의 일부 정도.
빗물은 찢어진 배에서 흘러나온 내장을 두드리고.
더 이상 피도 토하지 못하는 입은 마비된 채 제대로 경련도 일으키지 못한다.
“히힝!”
한차례 사납게 울부짖은 흑마는 곧 흉갑 가장 깊숙한 부분의 작은 핀을 찾아 섬세한 이빨 놀림으로 해제했다.
- 툭.
바닥으로 작은 황금빛 병 하나가 떨어진다.
이 비약을 쓸 아주 작은 틈조차 나지 않던 격전.
물론 이것을 쓴다고 기사회생의 희망이 있었던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지만.
“히힝… 히힝……
흑마는 집중하며 두 개의 앞니로 병을 살짝 물어 들어 올린다.
미스릴 보호대에서 빼낸 매끈한 유리병은 흑마의 튼튼한 이빨이면 가볍게 멜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마실 것은 아니다.
_ 특
흑마는 앞발을 섬세하게 움직여 레안드로의 아래턱을 살짝 눌렀다.
一 과직.
힘없이 벌어진 입을 고정시킨 채 앞니로 병 입구를 깨트려 조심스레 기울였다.
토할 피도 사라진 창백한 입가로, 한 병 분량의 엘릭서가 고스란히 들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