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380화 (380/458)

463화 눈먼 달,지는 꽃 (40)

마지막 한 방울까지 삼킨 뒤.

은은한 황금빛이 레안드로의 몸을 감쌌다.

잔혹한 폭력이 안팎을 유린해서 상처 안에 담겨 있던 것 같은 몸이 아물기 시작했다.

안으로 스며들고.

다시 밖으로 새어 나오는 빛.

- 뚜드드득.

금이 가는 정도를 넘어 조각조각 부서졌던 뼈들이 다시 붙었다.

핏물로 행궈졌던 살갗이 아물고 새로 돋아났다.

구멍 났던 내장과 터져 버린 점막, 거칠게 찢겼던 핏줄과 신경마저 부드럽게 이어졌다.

피가 빠져나가 새하얗게 질려 있던 살갗도 손끝에서 얼굴까지 다시 색을 되찾았다.

하지만 이미 잘려 나간 두 팔은 남자의 것이 아니었다.

살갗은 어깨를 덮고 아물었다.

신경도 혈관도 근육도 거기에서 끝났다.

팔이 있던 자리로 똑똑 떨어지는 빗방울은 그대로 바닥을 때리면서 숲에 흡수됐다.

말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주인을 바라봤다.

심장은 안정적으로 뛰고 있다.

하지만.

그가 돌이킬 수 없이 망가졌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히힝……

아직도 의식은 돌아오지 못했고 빗발은 거세다.

입에 있는 텅 빈 병을 뱉어내고, 두 팔이 잘려 나가 작아진 주인의 몸 위에 섰다.

지친 말의 두 눈으로 걱정스러운 눈빛과 안타까운 눈빛이 번갈아서 나타난다.

얼마나 바라보았을까.

두 눈빛이 완연히 겹칠 즈음.

거센 빗발 사이로 뚜렷한 적의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미유의 허물어져가는 살갗으로도

느껴질 만큼 맹렬한 욕망.

번쩍이는 식욕과 식욕의 간격은 그리 멀지 않았다.

촘촘한 포위망이다.

축제를 벌인다고 모든 요괴가 한날 한시에 모일 수는 없다.

소식을 늦게 듣고 늦게 도착했던 요괴의 숫자도 적지 않았다.

〈흐흐흐흐… 한참 늦게 도착해서 죄다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렇게나 운이 좋을 수가 있느냐?〉

의미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땅을 울리며 퍼지는 불길한 소리에

미유는 온몸을 긴장시켰다.

도착한 것은 잡귀들이 아니다.

서른여섯.

그리고 한 마리.

몸의 대부분을 축축한 진흙 속에 박아 넣은 긴 몸뚱이의 대요大妖가 이끄는 백귀야행.

- 좌르륵!

흙 밖으로 튀어나온 다섯 갈래의 기다란 몸이 허공에서 흔들렸다.

('효'효'효'효....

저런 데 걸리면 꼼짝없이 묶인다. 미유는 망설일 겨를도 없이 앞발과 머리를 주인의 몸 아래로 넣었다.

“히힝……!”

다행히 주인의 허리에 묶인 끈을 이용해 등에 힘겹게 올려놓을 수 있었다.

다른 말은 상상하기도 하기 힘든 곡예 였지만.

절뚝이면서도 그걸 해낸 미유는 곧바로 주인을 업어메고 달렸다.

무거운 갑옷은 이미 부서져 한결

가벼워졌지만 부담스럽지 않은 건 아니었다.

평소라면 이 정도는 거뜬하겠지만 미유의 몸 역시 정상이 아니다.

팔괘에 짓눌린 상태에서 버티다가 탈진한 상태.

게다가.

가슴에서 퍼지기 시작한 반점은 이제 왼쪽 앞발까지 번졌고.

살갗뿐만 아니라 안쪽 근육까지 허물어진다.

- 철퍽! 철… 퍽! 좌악!

익숙하지 않은 자세로 절룩거리자 원래라면 가볍게 뛰어넘을 수 있을 기다란 나무뿌리가 발에 걸렸고, 연이어 날카로운 돌부리가 살갗을 깊숙이 헤집어 놓는다.

그럼에도 불안하게 메어진 주인이 떨어지기 않게 하기 위해 균형까지 신경 써야 한다.

“히히힝……!”

그래도 미유는 계속 달렸다.

자신이 알 수 없는 힘에 묶여서 꼼짝하지 못할 때 혼자 처절하게 싸운 주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주인은 끝까지 버티고 버렸지만

결국 친근하게 생각했던 요괴에게 두 팔을 잃었다.

주인이 고작 그런 녀석에게 당해 이대로 죽게 할 수는 없었다.

살려야 한다.

실제로 근육이 끊어지며 격렬하게 퍼지는 통증을 미유는 참아냈다.

달리는 것은커녕 가만히 주저앉아 숨도 쉬기 어려웠지만.

남은 털이 올올이 곤두설 정도로 고통스러우면서도 미유는 끊임없이 달렸다.

두 팔을 잃고 요괴들에게 산 채로 뜯어먹히게 할 거였으면 처음부터

살리지도 않았다.

축축한 진흙 위를 계속 박찼다.

하지만 절뚝거리는 데다 위태롭게 주인까지 올려놓고 달리는 자신과 요괴들의 거리는 조금도 멀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무리한 움직임의 여파일까.

살갗을 허무는 붉은 반점이 다른 다리까지 퍼졌다.

이제 균형이 문제가 아니다.

이대로는 아예 달릴 수 없게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절망.

Meeee..

미유는 물소리가 들리는 절벽으로 달렸다.

멀쩡한 몸으로 뛰어들어도 목숨을 잃을 것 같은 급류가 절벽 아래서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거센 폭우로 불어난 강은 평소보다 몇 배는 빨랐고,온통 흙탕물이라 저 안에 뛰어들면 제대로 눈조차 뜰 수 없을 게 분명했다.

- 우지끈!

날뛰는 흙탕물은 강변의 나무들을 가볍게 부러뜨리고 있었다.

동방의 빗물이란 빗물은 모조리 저곳으로 모여 흐르는 걸까.

과연 이 비가 그친다고 빠지기는 할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격렬하고 거대한 범람이었다.

- 터벅.

레안드로가 멀쩡한 상태라고 해도 감당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운 자연의 폭력을 향해 미유는 결의에 차서 발을 움직였다.

뛰어내리는 순간.

미유도,

주인도 죽는다.

알고 있다.

〈아니,저 말이 미친 건가……?>

하지만.

주인이 요괴들에게 산 채로 뜯겨 먹히느니 차라리 의식을 잃은 채로 함께 익사하는 게 낫다.

적어도,저런 격류라면.

사랑하는 주인의 시체를 마물들이

감히 훼손할 수 없게 아득히 멀리 떠내려 보내리라.

장고는 없다.

〈설마… 못 뛰어내리게 잡아라!〉

- 파앗!

미유는 신음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세 발로 허공을 향해 뛰었다.

익사를 향한 도약이었다.

* * *

〈아악! 아아악! 이 더러운 새끼가! 왜 하필 나를 쫓아온 거야! 추잡한 쓰레기 새끼야! 너 같은 새끼들은 지져 버려야… 끄아아악!〉

- 콰직.

그림자들이 색동옷과 함께 살과 뼈를 씹어 먹자 여자아이의 안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꽃만 남았다.

〈내가 아니야! 나를 건드리지 마! 가서 그 개새끼나 잡으라고! 죄다

잿더미로 만들어 주마!〉

‘검빙.’

- 사가각!

그림자들은 셔벗처럼 먹기 좋게 얼어붙은 불꽃을 베어 물었다.

〈잡았군.>

〈여우탈과 겨울이리를 놓친 일이 안타까워요.〉

그림자 군단에 흡수되는 요괴를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별로.〉

불망을아씨.

이 녀석이 제일 느리다는 정보와.

걸을 때 남는 그녀 특유의 흔적을 초롱너울이 말해 주지 않았더라면 아무도 못 잡았을 거다.

- 콰르르! 콰르르르.!

아무것도 없는 황야 이곳저곳에서 불길이 위로 치솟는다.

거세게 쏟아지는 비를 면전에서 비웃기라도 하는 듯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불꽃.

[타오르는 파괴: 검염]

[되갚아지는 뜨거움: 업화]

[불경한 춤사위: 요린]

[불에 관한 A랭크 이상의 권능을 세 종류 획득했습니다.]

[특전: 백화제방]

[특전: 백화제방]

[당신의 불꽃은 누구보다 다양하고 자유롭습니다. 불에 관련된 권능을 사용할 때의 파괴력과 사정거리가 크게 늘어납니다.]

‘검염.’

- 과과과과과광! 과르르르르!

전혀 예상하지 못한 효과였지만 괜찮은 선택이었다.

상성도 그렇고 순수한 힘 자체도 검빙에 밀리는 감이 있던 검염이 예전보다 두 배는 더 커지며 마구 날뛴다.

불꽃이 비추자 거센 비가 순식간에 녹아버리듯 증발되어 내 주위에는 비가 완전히 그친 것 같았다.

아예 떨어지지도 못하고 저 높은 하늘 위에서부터 바싹 말라 버린다.

〈잘했다.〉

〈어머,수확이 있으셨나 보네요. 축하드려요. 그럼 이제 잡귀들을 수집하지 않으실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불망을아씨를 흡수해 얻은 힘으로 불꽃 사슬,불꽃 화살,불꽃 감옥을 만들어 보고.

곳곳에 널린 잡귀들을 전리품처럼 흡수하며 천천히 나아갔다.

대단할 것도 없는 녀석들이었지만

도깨비성으로 가는 길을 서두르지 않고 보이는 대로 추격하다 보니 어느새 그림자의 숫자는 삼천을 넘어섰다.

[3천 이상의 요괴를 이끌고 있는 상태입니다.]

[특전: 언데드 사령관이 한층 더 강화됩니다.]

[추가 보상이 주어집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모든 스랫이 5 상승합니다.]

레벨이 오르고 스탯이 상승한다.

물론 이런 것들이 지금의 나에게 크게 의미 있는 건 아니지만.

기분은 점점 상쾌해진다.

초롱너울도 나에게 도깨비성으로 가라고 재촉하지 않는다.

그런 것쯤은 이제 언제 공략해도 상관없는 수준이 되어 버렸다는 걸 자신도 알고 있는 듯하다.

삼천의 요괴를 담고 있는 군단.

손끝만 뻗으면 수천의 그림자가 적을 향해 몰려가서 잡아먹고 다시 세를 불린다.

- 휘리리리릭……!

다시 한 무리의 요괴들이 나에게 흡수된다.

미약한 힘이지만 정복과 속박의 쾌감은 여전하다.

저물녘의 쌍등이 자매가 동시에 속삭인다.

‘새파랗게 목을 조르고 싶어.’

‘새하얗게 체액을 뽑아내고 싶어.’

一 슈아아아아!

각시손이 주름살로 뒤덮인 거대한

얼굴을 씰룩인다.

양쪽 귀 아래에 붙은 것까지.

세 개의 입이 중얼거린다.

‘더 먹을 거야.’

‘더 핥을 거야.’

‘더 만질 거야.’

약한 요괴들이 웅성거린다.

‘요괴는 잔뜩이니까.’

‘인간의 마을로 쳐들어가자.’

‘약한 인간을 괴롭히는 건 최고로 재미있으니까.’

욕망이 전이되어 먹을수록 갈증이 차오른다.

하늘이 끝처럼 청명한 날이라도.

이런 욕망에 뒤덮인다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겠지만.

희미한 빛도 한 점 없이 어둠과 폭우로 가득한 지금이라도.

‘닫아라.’

확실한 의사를 표하면 그림자들은 조용해진다.

어디까지나 이들의 주인은 나.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감히 의심할 여지가 있겠습니까? 이 정도면 왕좌에 앉는다는 말조차 우스워집니다.”

초롱너울이 설명했다.

요괴왕이라는 건 어디에 앉아서 되는 게 아니다.

식육과 살육이 있으면 기뻐하며 몰려가는 요괴들에게 그런 잘 꾸민 자리 따위가 의미 있을 리 없었다.

결국 최고의 백귀야행을 이끄는 요괴가 왕이라고 불리는 것이고.

심지어 내 그림자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나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당신이 계신 그곳이 바로 요괴의 왕좌입니다.”

내가 가진 건 그 정도의 힘이다.

〈왕이시여…….>

오히려 숨어 있다가 밖으로 나와 나를 맞이하는 요괴들도 있다.

알아서 엎드리는 녀석들은 굳이 잡아먹지 않는다.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

반나절 정도를 걸었을까.

그림자 군단 외에도.

엎드리고 일어나 내 뒤를 따르는 요괴들의 숫자도 기백을 헤아린다.

초롱너울의 말에 따르면 느긋하게 움직여도 도깨비성은 이제 곧.

저 멀리 높게 솟아 있는 언덕이 보인다.

“저기인가.”

높게 둘러싼 벽이 있는 게 아니라 오랜 세월이 느껴지는 돌 조각들이 파편처럼 흩어져 있어서 성이라고 불리기에는 어색해 보인다.

오히려 낡고 부서진 신전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았다.

실제로 유적의 가장 고지대에는 유독 높게 솟은 제단이 있었는데, 계단만 수백 개는 올라가야 하는 높이에 위에 뻥 뚫린 채로 둥글게 만들어져 있었다.

어차피 그 어떤 견고한 성이라도 내 군단을 막아 낼 수는 없겠지만, 조금 맥이 빠지긴 한다.

머무르는 무리가 있다고 해 봐야 그 수는 쉰을 넘지 않겠지.

“그러하옵니다. 저항하는 무리가 있다면 단번에 쓸어버리실… 하핫, 이거 그럴 필요조차 없었군요.”

〈왕이시여…….>

소문이라도 들은 걸까.

유적으로 가는 길 양쪽에서.

벌써.

울긋불긋한 피부의 도깨비 무리가 얌전히 방망이를 내려놓고 머리를 조아리며 엎드려 있었다.

“도깨비들입니다.”

“저번에 본 녀석들과는 다르군.”

몸에서 끈적거리는 촉수가 뻗어 나오고.

눈동자가 텅 비어 있던 녀석들과 달랐다.

오히려 뿔과 피부를 제외한다면 기이할 정도로 건장한 인간에 몹시 가까운 모습.

“후후후. 같은 도깨비라도 종류는 제법 다양하니까요. 자신을 어떻게

해방하면서 사느냐에 따라 형태야 어렵잖게 변하곤 합니다.”

“ o 으”

〈왕이시여……. 이곳으로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저희의 우두머리가 위쪽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고지대를 흘끗 바라봤다.

‘우두머리라.’

초롱너울과 내기를 해서 서쪽으로 보낸 녀석이겠지.

몹시 강한 기운이 느껴진다.

항복인가.

‘이건 의외인데.’

영안으로 파악한 저들 하나하나의 힘은 대단히 강하다.

도깨비가 강한 요괴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정예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기척이 느껴지는 이들의 존재를 합하면 내가 이끄는 전체 전력의 1/4 정도는 된다.

‘함정일지도 모르지.’

물론 아무런 의미 없는 일이다.

적의 전력을 최대로 쳐 봐야 쉽게 짓밟을 수 있다.

삿갓바람의 영안으로도.

본신의 탐지 능력으로도 애초에 수상한 건 느껴지지 않는다.

저들이 잡스러운 짓거리를 한다면 모조리 그림자로 만들면 그만이다.

“가 보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