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6화 눈먼 달,지는 꽃 (43)
〈좋아!>
〈가자!〉
〈흐흐흐! 크흐흐흐흐흐!〉
- 과르르르르!
다섯 대요의 그림자를 필두로.
수백 마리의 요괴들이 도깨비왕을 물어뜯었다.
목을 뜯고,귀,허벅지,허리를,
발목을, 종아리를,오금을 뜯었다.
순식간에 살점이 갈가리 뼈가 으스러졌다.
비명조차 없었다.
꾹꾹 억눌려 있던 욕망들이 쁨어져 나가며 한 방울의 더 삼키려는 광란 속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 꿀꺽. 꿀꺽. 꿀꺽……!
뜯기고
한 번에 피라도 길달은
도깨비왕을 통째로 삼키는 순간. 혼이 찌르르 울려왔다.
길달이라는 요괴가 살아온 삶과
믿어 온 신념이 무겁게 온몸에 들어찼다.
그가 지금까지 행해 온 살육이, 약탈과 기만,능욕과 배덕을 모두 한 입에 꿀꺽 삼켜 그걸 혼 전체로 맛보고 있었다.
도깨비왕은 단순히 살육과 약탈의 화신은 아니었다.
어떻게 먹잇감을 마음이 펄떡이는 신선한 상태로 가장 잔혹한 절망과 공포를 안겨 줄 수 있는지 연구한 진리의 탐색자였다.
그런 도깨비왕의 지성과 원죄와 취향,가학심,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엎드려 목숨을 바치고 있는
마음이 모두 입에 넣어졌다.
그토록 더할 나위 없는 최상급의 먹이지만 눈앞에 두고 계속 억눌러 참았다가 먹는 탓에 치솟아 오르는 만족감은 표현할 수가 없었다.
먹고 싶다,먹고 싶다고 되뇌고 머릿속에서 수천 번씩 외치던 걸 먹어 버리는 순간의 쾌감.
눈앞에서 지껄이는 먹이를 보고도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살려 두자고 참다가 이야기가 끝나서 볼일 없이 씹어 먹어 버리는 정복감까지 더해 온몸이 떨렸다.
‘맛있…어!’
영혼을 울리는 저릿저릿한 쾌감의
폭풍이 한 차례 지나가고 머릿속에 간신히 그 단어를 떠올렸다.
스며든 도깨비왕의 권능이 새롭게 느껴진다.
보물 탐색의 권능.
감정鑑定의 권능.
상대방에게 가장 끔찍하게 여기는 형태의 죽음을 강제로 체험시키는 참사慘死의 권능.
도깨비왕의 힘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끝…인가?,
더 먹고 싶다.
만족감이 아니라 미쳐 버릴 듯한
공복감이 밀려왔다.
이걸로 참을 수 없다.
여기서 멈춘다는 건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전부 먹어라.”
- 쾨•:라과•과_과•아•아•아!
도깨비왕이 순식간에 잡아먹히는 모습을 보고 아쉬움에 덜덜 떨던 그림자들이.
수천의 요괴가 동시에 풀려 나가 계단에 엎드리고 있는 도깨비들을 들여다보고 입에 처넣고 꿀꺽꿀꺽
삼켰다.
- 콰직! 콰지직! 아드드득!
- 꿀꺽! 캬아아아!
빨간 도깨비,파란 도깨비,하얀 도깨비,검은 도깨비,금빛 도깨비들이 와드득와드득 삼켜졌다.
새빨갛게 욕망이 충족된다.
묘하게도 도깨비들은 이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처럼 나에게 조금도 반항하지 않는다.
공포와 고통에 몸을 움찔거리서도 도망가거나 의외라는 반응은 전혀
보이지 않고 가만히 잡아먹힌다.
마치 자신을 바치는 의식에라도 참여하는 것 같은 모습.
정말 그렇다면.
신을 섬기는 것보다는 낫겠지.
적어도 자신의 영육靈肉을 어디에 바치는 가는 정확히 알 테니까.
아득히 번지는 쾌감을 느끼면서, 나는 머릿속에 남아 있던 기억들을 조금씩 지워 갔다.
〈울어 봐라,도깨비들아.>
빗속에 서 있던 인간의 모습.
〈크하하하… 맛있다! 맛있어!〉
혼자 멋대로 뭘 느꼈는지 몰라도 허탈한 분노에 젖어 있던 눈동자.
〈최고다! 우후후!〉
내가 직접 잘라 낸 오른팔.
〈망할 도깨비들이 나에게 모조리 먹히고 있어!>
이미 흘릴 대로 흘려 맥도 없이 뿜어지던 피.
〈한입만 더! 한입…….>
그걸 할으며 왼팔까지 살뜰하게 먹어치우던 초롱너울의 그림자들.
〈아니! 반 입만 더!〉
쓰러진 몸.
팔패에 짓눌려 몸이 으깨지면서도 발버둥 치던 곁의 말.
〈더! 더! 더!〉
점점 거세지는 빗속에서 분명하게 느려지던 맥박.
가까운 것부터.
오늘의 기억이 지워지고.
몸을 바꿔 가며 안간힘으로 현실을 지탱하던 어떤 의장.
함께하던 활공의 기억.
핑그르르 돌던 은빛 원통.
목격자 없는 암살.
동족이란 말을 비웃던 도적. 무덤가에서 부르던 목소리. 먹혀 버린 까마귀.
어제의 감정이 지워진다.
‘상관없지.’
나아가야 할 것은 미래.
어느새 그림자들은 도깨비들을 모조리 다 씹어먹은 상태였다.
예전보다 한층 더 강력해진 힘이 사방으로 뻗어 나간다.
동방 전체를.
이대로 삼켜 버릴 만한 힘이다.
“후후후후……. 달이 참 밝군요.”
초롱너울이 말했다.
진한 초록색 달이 제단에서부터 드넓은 대지를 선명하게 비춰 간다.
구름조차 가볍게 뚫어 버리고 동방
전체를 뒤덮는 달빛이 나 자신처럼 느껴졌다.
* * *
- 히힝… 히히히힝..
귓속으로 말의 희미한 울음소리가 스며든다.
당장 숨이 끊어지더라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힘겹고 애달픈 울음소리 였다.
- 쏴아아아아
레안드로 폰 바티엔느는 천천히 눈을 떴다.
살짝 들어 을린 눈 속으로 이마에 흐르던 빗물이 들어온다.
손으로 가리려다가 두 팔이 모두 잘려 버린 걸 기억해 냈다.
- 투둑.
몸을 뒤틀어서 옆을 바라본다.
一 히힝…….
생의 절반 이상을 함께한 녀석과 눈이 마주친 순간.
일말의 안도감이 몰려온다.
‘여기는……?’
거세게 들려오는 빗소리에 비해 몸에 떨어지는 빗방울은 없었다.
그제야 다시 위를 살펴본다.
동굴이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고.
안쪽은 끝없이 새까맣게 깊다.
두 팔이 잘린 채 의식을 잃었고.
그만한 출혈이라면 쓰러져 얼마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미유가 자신을 구한 게 분명하다.
엘릭서도 찾은 뒤 깨서 입안에 흘려넣은 듯하다.
그런데.
이상하다.
“미유……!”
온몸이 상처투성이.
살갗이 여기저기 벗겨져 있는 데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퍼진 붉은 반점은 몸의 절반 이상을 뒤덮고 있었다.
앞발을 넘어 이미 목과 머리까지 번져 있는 상태였다.
숨소리도 맥박도 이상했다.
주술의 냄새가 지독하다.
‘저주……?’
생기 넘치던 미유의 두 눈은 이미 꺼져 버린 촛불의 잔영 같았다.
“괜찮은 거냐? 너… 지금……?”
- 히힝.
다가가자 미유가 약하게 울며 몸을 기대 온다.
하지만 두 눈은 고통도,죽음의 공포도 담고 있지 않았다.
후회는 더더욱 없었다.
레안드로가 의식을 차리고 자기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오히려 살짝 안심한 것 같은 표정.
처연한 눈동자에.
십칠 년의 세월이 스쳐 지나갔다.
함께 목이 말랐던 기억,함께 피를 흘렸던 기억,함께 추위에 떨던 기억, 배고프고,긴장하고,분노했던 기억, 광야에서 달렸던 기억.
십칠 년 동안 함께 전장을 누볐던 기억이 되살아나 눈동자를 덮었다.
말은 가만히 침묵하고 있었지만 앞에서 바라보는 눈빛이 모든 걸 말해 주고 있었다.
슬퍼하지 말라고.
함께해서 신명나게 놀았다고.
즐거웠다고 하면서.
- 스르륵.
눈꺼풀이 천천히 닫혔다.
보통 말보다 머리 둘은 큰 덩치와 어울리지 않던 작은 숨소리가.
흔적처럼 희미한 맥박이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미… 유……?”
미유는 그렇게 죽었다.
레안드로는 죽은 미유를 바라보며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억지로라도 떼어 놓아야 했다.
절대 동방 따위에 데려오는 게, 이런 위험을 무릅쓰게 만드는 게 아니었다.
자기만 죽으면 될 텐데.
미유는 왜?
시체의 붉은 반점을 바라봤다.
어떤 병인지.
저주인지 모르지만.
두 팔이 잘려 쓸모없는 자신에게 쓴 게 분명한 엘릭서를 미유에게 사용했다면 낫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미유만이라도 이 땅에서 살아갈 수 있었을지 모르는데.
마물 히포그리프에 혼자 맞섰던 유전자다.
요괴의 땅이라고는 해도 자신처럼 미친 듯 노려지는 대상이 아니라면 자유롭게 살지 못할 것도 없다.
« o O O ,,
一厂一厂=斤...
목이 메었다.
토할 것 같았다.
앞이 눈물로 계속 흐려지는데도 두 팔이 없어 닦을 수 없었다.
‘복수……
그런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거품처럼 사라졌다.
어디에 복수한단 말인가.
누구에게,어떻게 죽은 것인지조차 모른다.
게다가.
두 팔을 잃고서.
그 순간이었다.
- 번쩍!
강한 통증이 빛과 함께 을라왔다.
쇄골 아래 새겨진 각인이 환하게 욱신거렸다.
하하 하하하.
새삼스럽게 느끼는 고통에 자조의 웃음이 터져 나왔다.
주위에 몹시 강한 요괴가 있다는 신호겠지.
이 정도라면.
틀림없다.
자신을 둘러싸고 대치하던 것들과
비교하더라도 그리 뒤처지지 않는 힘이다.
자신은 양팔이 잘린 상태.
죽는다.
여기서 죽는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우스워서 견딜 수 없었다.
싸우다 죽는 것도 아니고.
두 팔이 잘린 그를 미유가 목숨을 바쳐서 강가로 데려다 주었지만, 배회하던 요괴에게 사냥당해 아무 의미도 없이 죽는다.
허무하기만 했다.
허무는 익숙한 맛이지만 이번에는 정말 지독한 녀석이다.
마지막,이라는 걸까.
좀처럼 삼키기 어려울 만큼 짙다.
점점 다가오는 요기妖氣를 향해서 훼,하고 뱉어 버린다.
‘죽이든가.’
더 이상 살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는다.
동굴 바깥을 본 채 미유의 곁에 쓰러져 누워 버렸다.
눈이 맛이 갔는지 새하얗던 달이 초록색으로 보였다.
달이 초록색이면 어떻단 말인가.
이제 그딴 건 상관없다.
〈배고파… 너무 배고파… 하지만 참을 거야… 나는… 칡꽃이 좋아… 고사리가 맛있어…….>
동굴 안쪽에서 소리가 들린다.
단순한 위협의 그르렁거림이라고 생각했지만 동방어도 섞여 있었다.
‘희롱이라도 하는 걸까.’
어차피 알아들을 수도 없는데.
괜한 짓거리라고 생각했다.
〈참을 거야… 나는… 엉겅퀴 싹이
맛있어… 나는… 뽕나무 순을 제일
좋아해… 하지만… 이건..>
누더기를 걸친 봉두난발의 요괴가 계속 그르렁대며 다가온다.
〈아파… 아플 정도로 배가 고파… 너무너무 아파… 참을 수가 없어… 목이 타… 먹고 싶어… 너무나도 향기로워… 향기로운 네가 나빠, 아니야…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정말정말 나빠… 안 돼…. 지금껏 참아 왔어…. 나는 잘 참아 왔어…. 참을 수 있아". 싫어…. 싫어…! 나는 요괴가 아니야…!〉
요괴는 질질 끌리듯 다가왔다.
무언가에 저항하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발작……?’
묘한 요괴였다.
크르르 으으으
요괴의 눈 전체가 까맣게 빛나며 왼팔 위로 검은 혈관이 두드드득 을라왔다.
- 팟!
왼쪽 눈과 팔이 새카맣게 빛나는 요괴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속도로 빠르게 움직여 레안드로의 목을 졸랐다.
비명도 새어 나가지 못했다.
눈을 뜨고 있었는데도 한순간에 시야가 깜깜해졌다. 그 즉시 목이 부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강도였다.
귓가에 윙윙대는 소리.
점멸하는 감각.
숨구멍이.
머리로 향하는 혈관이 차단됐다.
‘죽여라.’
레안드로는 의식을 잃었다.
그의 몸이 아래로 축 늘어졌다.
〈싫어! 싫어……!>
봉두난발의 요괴가 인간의 목을 조르며 강하게 도리질을 쳤다.
협수룩하게 마구 자라 허리까지 흘러 내려오는 머리칼이 흩어지며 요괴의 얼굴이 드러났다.
열서너 살쯤 되었을까.
씻지 않아 몹시 꼬질꼬질하지만 앳된 소년의 얼굴이었다.
되다 만 뿔인지.
이마 양쪽에는 볼록히 튀어나온 작은 덩어리가 있었다.
제가 목을 졸라 기절시킨 인간을 앞에 두고 소년은 힘겹게 오른팔로 왼팔을 잡아 바닥에 쑤셔 넣었다.
- 콰과과과광!
왼팔이 단단한 암벽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가,곧 다시 검은 혈관이 울렁거리며 튀어나와 후작의 목을
조르려고 했다.
환하게 빛나는 낙인을 노리고서 왼 팔의 손톱이 레안드로의 각인을 파내려 했다.
〈아아! 아아아! 크아아아아! 나는! 인간을! 먹지! 않을! 거야!〉
소년은 울부짖으며 왼팔을 다시 몇 번이고 바닥에 짓이겼다.
- 콰광! 콰광! 과광!
하지만.
바로 눈앞에 먹이가 있다.
손만 대면 끝나는 완벽한 먹이를 어떻게든 해체하려고 왼팔이 계속 날뛰었다.
〈싫어… 싫어… 나는 사람이야… 사람이란 말이야… 인간이라고… 인간이… 될… 거야…….>
소년의 오른쪽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인간을 먹지 않기 위해 꽉 깨문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정신이 점점 혼미해졌다.
왼팔에 몰아넣은 요기가 어깨를 타고 심장으로 넘어올 것 같았다. 그렇게 된다면 살인이다.
흡혈.
식인이다.
지독한 갈증이.
참을 수 없이 서러웠던 굶주림이 달래지지만.
자신은 이제 돌아올 수 없는 선을 넘어가 버리게 된다.
소년은,그걸.
견딜 수 없었다.
〈저거야… 저거야…….>
죽은 흑마의 안장에 매달린 칼이 구원처럼 보였다.
인간으로 남고 싶었던 소년은一 홀린 듯 달려가 칼을 빼들었다. 그리고.
- 콰직!
검은 혈관을 꿈틀거리며 후작을 향해 다가가려는 어깨를.
- 콰직!
날카로운 칼날로 연거푸 내리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