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0화 눈먼 달,지는 꽃 (47)
“흐음. 뭐,그런 건 멋대로 하거라. 인간에게는,인간의 삶이 있으니까. 제한된 인식 속에 버둥거리는 것도, 버둥거리는 나름의 재미라는 것이 있으니까 말이다.”
살짝 눈을 깜빡거린 소녀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쨌건,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네 소원대로 그 미물을 살려 주지. 그리고,요괴왕을 죽이게 해주마.”
남자는 침묵했다.
요괴왕을 죽이게 해 준다니.
만 마리 요괴의 그림자를 제 몸에 두르고 있다는 녀석을 말하는 게 분명하다.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다.
신이 그 녀석을 껄끄러워한다는 이야기는 익히 요괴들에게 들었고.
신의 힘에 대해서도 요괴들에게 자세히 들었다.
미리별은 자신의 화원花園에서는 절대자이며,모든 저주를,은총을,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그녀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이 피고
시들고 지고 열리고 덜그럭거리고 닫히고 쏟아지고 흩어진다.
파닥파닥 튀는 삶도,아래서부터 젖어 가는 죽음도,고통도,쾌락도, 심판도, 자비도 모두 그녀의 뜻에 달려 있다.
'영역 안에서만.’
미리 별은.
자신의 영역 바깥으로 나온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했다.
그녀가 가꾼 영역 바깥은 추하고 더러워서 그랬는지.
바깥에서는 절대적인 힘이 미치지 않아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걸 생각한다면.’
꽃의 신과 남자가 이런 거래를 하게 될 거라는 생각은 자연스러운…….
“무얼 입을 닫고 있느냐. 애초에 그럴 생각으로 온 게 아니더냐.”
소녀의 말이 생각을 끊는다.
마음을 그대로 읽어 내다니.
소녀가 남자의 흔들리는 눈빛을 우습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
“이곳은 나의 땅이고,굳이 내 땅이 아니라도 완전히 가라앉지도 못한 인간의 마음 따위는 손쉽게 꿰뚫어 볼 수 있느니라. 네가 바라는 것은, 당연히 나에게 있다. 네가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는 바람까지 이뤄 주겠노라.”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는 바람.
소녀의 입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서, 그제야.
남자는 소녀가 처음 한 말이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녀는 남자에게 요괴왕을 죽이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미유의 생명으로 거래하려 들지 않았다.
‘요괴왕을 죽이게 해 주마.’
소녀는 어디까지나 자비를 베푸는 입장에서 말한다.
그게 남자가 생각하고 싶지 않던
욕망이라고 소녀는 지적했다.
죽이고 싶은 상대를 죽이게 해 주고, 살리고 싶은 상대는 살려 주겠다며.
믿으라고.
그저 소망하기만 하라고.
신은,
자신은.
이토록 향기롭고 달콤한 것이라고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복종하여라. 내 백성이 되어라. 신앙을 맹세하고 내 품에 안겨라. 그러하면 네 팔에 잠재된 요기를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소멸시키고, 네 피와 심장에 신성을 피워 주마.
하나 굳이 인간으로 남고 싶다면, 내 도움을 얻어 반은 신성을 얻고, 반은 인간으로 살거라.”
남자는 담담히 묻는다.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신성神性은 동등한 격이 아니면 간섭할 수 없다. 즉,불멸이다.”
불멸.
처음 보는 소녀는 아무렇지 않게 불멸을 이야기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소녀는 긴 검은 머리칼을 살며시 쓸어올리며.
“늙지도,죽지도 않지.”
불로불사를.
“허망하고 비참한 인간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다.”
영생을 이야기한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피할 수 없는 늙음과 죽음을 벗어나게 해 주겠다고 속삭인다.
“팔다리가 잘려도 다시 솟아난다. 눈과 혀가 뽑히고,물속에 잠기고, 불 속에 뒹굴고,내장이 토막 나도 너는 곧 복구된다.”
축복인지 저주인지 알 수 없도록 끔찍한 소리도 해댔지만.
“아니,애초에 내가 내린 신성을
소유하고 있다면 상처 입히는 일 자체가 거의 불가능해지지.”
결국 초월적인 능력이다.
“너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 왔기에 가능한 은총이다. 다른 백성에게는 내리지 못했던 은혜지. 기뻐하며 받들거라.”
이야기의 거대함에 짓눌린 탓인지, 곁에 엎드려 듣던 소년은 온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그 소년의 텅 빈 한쪽 팔이 왠지 허전하게 느껴졌다.
남자는 자신의 팔을 내려다봤다. 그 팔이 만들어 내던 갈증과,식욕과, 마음속에 들끓던 온갖 기억들과,
괴로움을,설득을,흔들림을,밀고 밀리던 수많은 경계를 생각했다.
모든 걸 커다란 숲으로 만들어서 묻어 버리고 스스로 얻어 낸 해갈을 생각했다.
“이 팔은… 버리기 싫습니다만.”
소녀가 인상을 찡그렸다.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이 팔에서 나온 요기도 버리지 않겠습니다. 신성을 받고,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요기가 소멸한다면, 저에게 신성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불멸은 얻고 싶지 않습니다. 요괴왕을 베는 것은 좋습니다만, 다른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
“하……
소녀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봤다.
“신의 앞에서 반신을 거절하고, 반요의 길을 걷겠다는 것이냐.”
“저는 신이 되려는 생각은 없습니다. 요괴가 되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저는 저입니다. 언제나 자신으로서 있고 싶고,나 자신이 해낸 것이 아니면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무언가 베고 싶다면 내린 신성을 받은 신의 꼭두각시로서가 아니라, 온전한 나 자신으로 그것을 베고 싶을 뿐입니다.”
남자는 담담하게 말했다.
바람이 불었다.
절반이 하얗게 세어 버린 남자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흩날리는 머리카락이 외부의 바람 때문인 것처럼,온전한 자기라는 건 결국 환상일지도 모른다.
환상을 가질 권리를 주장하면서, 남자는 소녀의 은총을 거절한다.
“혹시,방금처럼,저를 상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남자는 소녀가 두 다리를 자르고, 팔을 자르고,칼을 부취 버린 순간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렇게 벽 앞에서 부서지면서, 한 걸음씩,저 자신을 들여다보고, 조금씩 저 자신을 느끼며 강해지고 싶습니다.”
남자의 말을 들은 소녀는 고개마저 갸웃하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실소했다.
“나를 상대해 달라니… 도대체… 신을 무엇으로 써먹으려는 것이냐? 참으로 인간이 보일 수 없는……. 아니,인간다운 광오함이구나.”
소녀의 입술 끝에 잔혹한 웃음이 머물렀다.
“좋다. 후회하지 말거라. 여기서 너의 정신이 부서진다면… 네 몸만
가져다 사육하겠노라.”
“괜찮습니다.”
“좋다. 그렇다면,어디 한번 길을 찾아보거라.”
그리고.
세계가 일변했다.
향기 가득한 화원은 쓸어내린 듯 사라져 버리고.
분홍색 꽃잎 한 장 없는 풍경 속에 검게 시든 겨울 풀들이 거대해지며 끝 모르게 솟아올랐다.
완전히 바뀐 풍경 속에는 소녀도, 함께 이곳까지 올라온 소년도 모두 사라져 있었다.
무엇보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가볍게 앞으로 뛰쳐나가고 싶고 칼을 휘두르고 싶었지만,온몸이 어딘가에 깊이 박힌 것 같았다.
손을 쥐고,풀고,눈을 끔뻑이고, 다리를 들고.
움직이는 건 분명히 움직였지만一 무겁다.
손끝 한 마디 한 마디가 눅진하게 눌어붙어 흐느적거린다.
무언가에 눌린 듯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사라졌다.’
온몸의 경맥에,혈관과 신경까지 세밀하게 흐르던 기운과,새롭게 융합시킨 요기가 모두 사라졌다.
어느 쪽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차가웠다.
메마른 경맥을 느끼자 울렁거리고 메스꺼웠다.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는다.
혀가 뽑힌 것도 아니고.
치아도 그대로.
목의 근육에 힘을 줄 수도 있지만.
말은 성대 깊은 안쪽에서만 빙빙 돌고 있을 뿐이다.
의식도,팔다리도,감각도 어느 것 하나 잃지 않았는데.
숨 쉬는 것마저도 어색했다.
‘이게,신이 내리는 수련인가.’
길을 찾으라고 했던가.
여기서 나가는 길일까.
소녀에게 도달하는 길일까.
어쨌거나 남자 스스로가 원해서 받는 시련이다.
온몸을 뒤덮은 무력감을 천천히 뜯어내면서.
남자는 한 걸음을 옮겼다.
이십 년 만에 경맥에 흐르는 기를 사용하지 않는 첫걸음이다.
유년기부터 익숙했던 만큼 생각도 하지 않았던 모든 일상에 오러의 흐름이 있었다는 게 느껴진다.
다시,두 걸음.
다시,세 걸음을 걷는다.
절룩거리는 것처럼 걷던 남자는 네 번째 걸음에서 몸을 일으킨다.
눌린 가위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다섯 번째.
느린 걸음이라도 더듬대지 않고 바닥에 발자국을 찍고.
커다란 풀잎을 돌아가려는 순간.
- 스격!
느긋하게 구부러진 풀잎이 남자의 목을 슬쩍 지나쳤다.
풀잎은 남자의 목에서 튕겨 나지도 구부러지지도 않았다.
대신 남자의 목을 옆으로 자르고 지나갔다.
목에 으스스한 열기가 퍼졌다.
너무 차갑고,뜨거웠다.
기氣로 보정되지 않는 신경계가
몸 안에서 화학물질을 폭포수처럼 쏟아붓는다.
극도의 통증으로 동공이 열렸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았다.
세상이 새까맣게 꺼졌다.
그리고,
시야가 다시 돌아온 순간.
남자는 정확히 다섯 걸음 전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손가락으로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잘려 나가 붉은 피를 분사하던 목은 얇은 선 하나 없었다.
꽃향기는 없고.
소년도,소녀도 없고.
검게 시든 풀들이 집채만 한 높이로 빼곡히 자라난 처음의 그 장소다.
“결계인가.”
사라진 기氣에 익숙해진 덕분인지 이제는 쉽게 목소리가 나온다.
결국 마음의 문제.
남자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이미 소녀에게 베인 적이 있었다.
이런 환경이라면.
분명히 좋은 수련이 되겠지.
- 투툭.
팔다리를 가볍게 털었다.
대부분의 인간은 일평생 오러 따위 쓰지 못하고 이 몸으로 살아간다.
‘인간이라면.’
평범한 인간이라면.
어느 감각에 집중할 것인가.
어디에 집중해서 나아갈 것인가.
남자는 신중하게,앞을.
바라‘본다’.
시각.
인간의 감각기관 중에 가장 많은
정보를 전해 주는 게 시각이다.
그것만으로 7할.
헝클어진 풍경을 분석한다.
가만히 서 있는 것 같은 풀들이
어떤 변화를 준비하는가.
어떤 풀잎이 날카로운가.
그의 목을 벤 풀잎은 반응할 수
없을 만큼 빠르지는 않았다.
제대로 보지 못했을 뿐.
다섯 걸음 앞의 거대한 풀잎에서
날카로운 칼날을 발견한다.
‘하나가 아니다.’
목이 베인 건 우연이 아니다.
숲은 악의를 가지고 있다.
‘셋,다섯,여덟……
평범한 인간의 시력만으로도.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일곱 걸음 앞에서 심장을 노리는 나뭇가지.
세 걸음 옆에서 동시에 두 다리를 노리는 풀잎.
언제든지 굴러올 것 같은 각도로 자신을 노리는 바윗덩이.
숨어 있는 거대한 풀벌레들.
이 숲은.
하나를 피하면 둘이.
둘을 피하면 넷이 동시에 자신을 죽이려고 달려들리라는 게 보인다.
보고 피하는 건 무리다.
특히 지금의 몸이면 그런 방식은 한 번에 둘 정도까지 한계.
하지만.
‘일단 새긴다.’
결국은 한 장면 한 장면이다.
전체를 시야에 넣고.
재구성과 이해의 과정을 머리에서 소화한다면.
제대로 볼 수만 있다면 최소한의 움직임만으로 모두 피해진다.
다섯 걸음 앞의 풀을 가만히 보던 남자는 앞으로 나아갔다.
셋,넷.
다섯.
언제 목이 베였냐는 듯 왼쪽으로 살짝 피해 걷는다.
랜스처럼 찔러오는 나뭇가지를 피하고,단숨에 뭉개 주겠다는 듯 맹렬하게 굴러오는 바윗덩어리를 가볍게 피해 낸다.
* * *
- 푸슛!
세 번의 죽음 끝에.
지하에서 솟아오르는 함정마저도 남자가 피해 걸어갔을 때.
남자의 눈앞에 소녀가 나타났다.
“시련을 받아라.”
“이미 받은 게 아닙니까?”
소녀가 비웃음을 지었다.
“네 팔을 자를 때의 녀석이라도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게다가 요괴왕과 달의 교감이 한층 더 강해졌다.”
“눈이다.”
- 펑!
소녀의 가느다란 손끝에서 새까만 연기가 피어났다.
계곡의 가장 깊은 바닥처럼 검은 연기가 남자의 눈썹을 쓸어내리고 그 아래로 파고든다.
망막을,안구를, 그 뒤쪽의 혈관과 신경 다발을 한순간에 새까맣게 말려 버린다.
“계속해라.”
세상이 완전히 불타 버린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시야 속에
소녀가 속삭였다.
4기화 눈먼 달,지는 꽃 (48)
눈이 아니라 초상감각으로.
기감으로 주위를 파악하는 수련은 했다고 생각했다.
주변 환경을 감각하는 것 정도는 이미 끝냈다.
하지만 내부의 기가 사라진 채, 대부분의 감각을 집중하던 ‘시력’을 잃어버리자.
남자는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하는 것과 반대로.
남자의 마음은 실 끊어진 연처럼 흔들렸다.
평범한 인간에게 시력은 얼마나 절대적인가.
정보의 9할 가까이를 받아들이던 시각이 사라지자,공간은 물론이고, 시간 자체도 왜곡되는 것 같았다.
방금 홀러간 1초마저 같은 1초로 느껴지지 않았다.
시각이 사라진 세계에서.
시간은 멋대로 접히고,포개지고, 튀어 나가고,조각난다.
얼마나 가만히 서 있었을까.
배가 고프고,목이 말랐다.
추위와 더위가 지나갔다.
빛이 없는 세계에서 태양은 오직 온도로만 느낄 수 있었다.
아마도 하루가.
이틀이 지났을 것이었다.
인간에게 시력이라는 건 이렇게나 절대적인가.
집중하는 청각으로도,촉각으로도, 도저히 잃어버린 시각을 ‘메꾼다’는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하지만.
배고픔을 느끼고.
신체를 마음대로 조종하지 못하는 평범한 몸으로 돌아왔기에 남자는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의 갈증이면……
땀이 멈추고.
체온은 계속 을라서.
금방 정신을 잃어버릴 테니까.
사흘이 지나기 전.
남자는 움직이기 시작했고.
다섯 번의 죽음을 겪었다.
세계 자체가 개변된 느낌이었다.
시각으로 꽉 메워졌던 머릿속이
새까맣게 텅 비어 버린다.
눈이 보이지 않자.
남자는 스스로가 얼마나 시각에 휘둘리고 압도당했는지 깨달았다.
시각의 무수한 정보가 사라지자 지금 딛고 선 땅의 감촉과 경사만 남았다.
세계가 강제로 단순화된다.
여섯 번째 죽음에서.
어쩌면 이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볼 수 없기에,세계가 사라져서,
머릿속이 비어 버렸는데.
볼 수 없기에,거꾸로 이 세계를, 머릿속에 정리해야 했다.
모조리 넣어 둬야 하기에.
비어 버린 머릿속의 공간을 오히려 훌쩍 넓혀야 했다.
일곱.
여덟.
아홉 번째 죽음.
바위가 굴러와 남자를 짓이기고, 거대한 벌레가 심장을 물어뜯고, 바닥에서 솟은 나뭇가지가 남자의 몸을 관통했다.
점점 더 많은 것을 기억해야 했다.
새롭게 세계를 머리로 기억하고, 몸으로 익히면서.
남자는 생각했다.
시각에는 지금의 남자에게 쓸모없는 정보가 지나치게 많다.
이를테면,색.
피하고,살아남고,길을 찾는 데 색은 어떤 의미도 없다.
열 번째 죽음.
남자의 머릿속에서 ‘색’의 개념이 깨끗하게 지워졌다.
풀의 색,나무의 색,바위의 색,
홁의 색,하늘의 색,바람의 색.
색의 정보량은 엄청났다.
하나의 색이 가진 고유의 파장, 밝기,채도,그것들이 서로 섞이며 만들어 내는 수많은 정보를 지웠다.
머릿속에 세계가 정리되는 속도가 훨씬 더 빨라졌다.
색이 사라진 자리를 대신 조밀한 입체감이 메운다.
시각은 평면적이다.
실제의 존재를,2차원의 평면으로 단순화시켜 받아들인다.
결국,시각은 하나의 왜곡이다.
색채의 영향을 받지 않는 남자는
나무의 가지를,뿌리를,그 둘레를, 움직임을 입체적으로 인식한다.
열세 번째 죽음.
시각을 잃는다는 것이.
시련만은 아닐지 모른다고 남자는 진심으로 생각했다.
열다섯 번째 죽음.
시각에는 초점과 각도가 있다.
초점을 맞춘다면 그 밖은 보이지
않는다.
〈본다>는 행위 자체가 역설적으로 다른 것을 잃어버리게 한다.
시야가 사각을 만든다.
보일 ‘앞’과,보이지 않을 ‘뒤’가 남자의 인식에는 없다.
‘안’과 ‘밖’이 의미를 잃었다.
입체를 넘어서.
내면까지.
열일곱 번째 죽음.
보이지 않으므로.
세계는 필요한 만큼 완전했다.
스무 번째 삶.
딛고 선 땅을 느끼자 남자에게는 땅이 온전하게 ‘보였다’.
제한될 수밖에 없는 그의 ‘시점’이, 불확실한 ‘시각’이 사라지고 온전히 ‘보이는’ 땅에 전율을 느꼈다.
남자는 걸었다.
눈으로 보고 걷는 것보다도 그때그때 디디는 한 걸음 한 걸음이 훨씬 안전하고 완벽했다.
어차피,
인간은 눈으로 걷지 않기에.
아래에서 전해지는 떨림을,파동을, 개착되고 조립되는 땅의 이음새를 디디며 남자는 걸어 나갔다.
땅 위를 걷는 것만으로도 강렬한 쾌감이 느껴진다.
보이지 않는 것은 더 이상 공포가 아니었다.
그는 산을 온전히 뛰어놀았다.
일부러 자신을 위험에 내던지고, 지칠 때까지 곡예를 부리고.
최악의 상황으로 자신을 유도하며 벌레들에게 포위당했다.
- 좌악!
스물한 번째 삶.
처음의 자리에 서서.
남자는 기쁘게 웃었다.
“불쾌하구나.”
남자가 들은 마지막 ‘소리’였다.
소녀는 남자의 귀를 멀게 했다.
하나 눈이 멀었다고 해서 온전히 청각에만 의지하지 않았으므로.
큰 불편도 없었다.
이번에는 고작 두 번의 죽음 두1, 소녀는 남자의 미각과 후각을 동시에
교란했다.
그저 냄새를 맡지 못하게 하는 게 아니었다.
대체 어떻게 만들어 낸 건지 모를 지독히 끔찍한 냄새가 덮쳐 왔다.
‘심하군.’
숨 쉬지 않는 순간조차 토할 듯한 냄새가 얼굴을 뒤덮였지만.
인상을 한번 찡그리고.
웃어넘겼다.
거기에서 소녀의 초조함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중간에 갑자기 풍겨오는 너무나도 시큼하고 역겨운 냄새에 교란당해
한 번 쓰러진 뒤.
남자는 더 이상의 죽음 없이.
소녀가 준비한 고개를 넘었다.
스물세 번을 죽었지만,시간은 놀랄 만큼 적게 홀렸다.
그리고,남자는.
두 번째 고개에서.
자신의 뒷목을 꾹 누르는 소녀의 차가운 손가락을 느꼈다.
마지막 ‘촉각’이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고.
예측할 수도,그려낼 수도 없었다.
‘여기까지 하는 건가.’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방책은 없다.
그런 건 대비할 수 없으니까.
모든 감각의 봉인 속에서 남자는 아무것도 움직일 수 없었다.
움직이고 있어도 알 수 없었다. 나는…….
뜨거운 불 속에서 타오르고 있는지 차가운 물 속에서 얼어붙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모든 감각을 잃은 자신을 나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마음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까.
신경도,근육도 가지지 못한 나를 나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게 죽음일까.
의식만 살아 있는 채로 새까맣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세계에서 영원히 부유하는 것.
몸에 갇혔다면 차라리 갇힌 것은 알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갇힐 몸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른다.
〈생각하는 나〉가 정말 있는지.
의식이 있는지마저 불안해졌다. 답이 나을 수 없는 고민이지만.
남자는 한순간도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고민을 멈추는 순간.
더 새까맣고 무거운 구멍 안으로 모든 게 빨려 들어가 버릴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인식 없는 세계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을 멈추면 그를 증명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감각이 사라지자 시간마저 동시에 소멸한다.
얼마나 지난 거지?
박동. 속도. 깜빡임.
얼마나.
삼천 오백 십 오.
백 사십 일만 사천 구백 구십 팔.
일억 오천 구백 칠십 삼만 팔십 육백 오십 육.
얼마나.
얼마나 빠르게 세고 있는 거지?
일 년,이 년,어쩌면 수백 년이 지났을지도 모른다.
이 공간 속에서는 가만히 의식을 유지하는 것만도 끔찍한 집중력이 요구된다.
새까만 부유 속에서 숫자를 세며.
남자는 처음으로 희미한 공포를 느꼈다.
‘무서워.’
목이 날아가고,두 다리가 잘리고, 눈이 멀고,귀가 멀고,세상이 지독한 악취로만 가득했을 때도 느끼지 않던 감정이었다.
무서움은 단순한 감정이었기에.
느끼기 쉬웠고.
남자는 그것이 반가웠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이 무서웠기에 역설적으로 무서움에 매달렸다.
무서움.
무서움을 처음 느낀 적은?
태어날 때?
적,경계.
깊은 손상에 대한 두려움.
그러나,
아직은,
믿을 수 있다.
무서움을 마지막으로 느낀 적이
언제더라?
마지막으로…….
짓눌리던 애마.
남자는 기억해 낸다.
맞아,나는 기사였어.
‘마를 베어라.’
‘베어라.’
‘베어라.’
나는…….
몰입해서 과거를 회상하던 도중 짧게 의식이 끊겼다.
다시 돌아온 의식.
깜깜하고 작은 방을 상상한다.
그 방에 갇힌 남자는 이름을 하나 하나 되새긴다.
가졌던 기억과 감정을 하나하나 검은 방 안에 피워 을렸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반짝거리는 작은 빛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새까만 어둠 속에서 오직 그것들이 의식을 구조한다.
결국,남자도.
버렸다고 생각한 기쁨과,슬픔과, 즐거움과,감격과,감사와,벅참과, 흥분과,욕망과,미움과,분노와, 서글픔,두려움,부끄러움,죄책감, 북받치는 애정으로 살아가고.
그리고,거기에서.
작게 호흡을 시작한다.
그 리듬을, 모든 촉각을 잃어버린
상태가 되어서야,태어날 때부터 몸 깊숙한 곳에서 의식되지 않던 박자에 인식을 돌린다.
‘•••신인가.’
호흡을 붙잡고 있는 작은 반짝임이 느껴진다.
자신의 것이 아니다.
‘재미있는 짓을 하고 있었군.’
소녀의 혼.
신성이 그의 몸 안에 스며들어서, 남자가 완전히 자신을 감각하지 못하는 사이 호흡이 멎지 않게 계속 살려 주고 있었다.
신의 파편이다.
동시에 그 파편은,남자가 자신을 쥐는 것을 막고 있다.
‘이건……
베어야 한다.
길을 찾으라더니 처음부터 줄곧 자신의 몸에 들어와 있던 소녀를 바라보며 실소했다.
하지만 기를 자유롭게 순환시킬 수 있을 때야 혼을 보고 백을 베었지.
지금은 어떻게?
‘아니,해 보자.’
어차피 혼은 눈으로 보지 않는다.
시각은 애저녁에 봉인당했고.
보는 것은 자신의 의식이며,판단.
그렇다면 쥔 칼도.
칼을 쥐는 손도.
역시 자신의 마음.
남자는 의지를 날카롭게 다듬어, 호흡을 이어 주고 있는〈반짝임>을 찔렀다.
〈반짝임>은 놀란 듯 움찔거렸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버렸다.
‘더 빨라야 한다.’
남자의 의식이 가속했다.
멈춰 버린 것 같은 시간 속에서, 수많은 반짝임을 찌르고 베어냈다. 하지만 반짝임은 잠깐 수축한 것
같다가도 계속 남자의 호흡기관을 차지하고 있었다.
‘저 자리는.’
찰나의 순간에 수천 차례 공방을 치르고 깨달았다.
이런 식으로 하는 게 아니다.
범위다.
자신의 영역을 구축하고.
잠식하자.
기본적으로 숲에서 사냥꾼들에게 쫓기며 깨달았던 3미터의 영역과 다를 바가 없겠지.
몸이 닿는 촉각의 영역.
휘두른 칼이 닿는 3미터의 영역.
그곳에 들어오기만 하면 뭐든지 벨 수 있었던 자신의 땅.
그저 혼의 레벨로 전환된 것뿐.
그렇다면.
벨 것도, 찌를 것도 없다.
아예,저 안으로 이동한다.
저 반짝임 안에.
〈시점>을 만들고.
〈원〉을 만들어.
‘먹어 버린다.’
이곳은 자신의 몸.
미리별이건 뭐건.
그의 땅이다.
- 번쩍!
‘반짝임’이 경악하며 흩어지고.
순간의 의지로.
남자는 호흡기관을 유지하고 있던 흩어지는〈신성〉을 자기 영역 안에 넣어 버린다.
‘이건……!’
태양,산소,바다,바람,꽃,아침, 창가,생명, 언어,분말,부패,충동,
효소,연결,세포,추출,사멸,곤충, 문양,관능,함량,백선,향기,휘발, 혼합,반응성,유전자,향균,용혈, 발현,이끼,생태,무수한 분포의 비교,성장,변화…….
신성의 파편을 품고.
꽃에 관련된 압도적인 정보량에 짓눌려,남자는 호흡기를 유지하지 못하고 네 번 죽었다.
그리고.
- 후우.
다섯 번째에서,가까스로 자신의 숨을 쉬면서 생각한다.
‘이게… 신의 인식인가.’
세포 하나하나까지 남자를 봉인하던 신성을 인식했을 때였다.
[실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사를 모르는,재능이구나.]
귀도 멀고 눈도 멀어 있었지만,
머릿속에 그대로 뜻이 전해진다.
물론 남자는 놀라지 않는다.
[기괴하다. 무릇 단계를 오를수록 가팔라질 수밖에 없거늘,구태여 인간이 아니라도 모두에게 당연한 인과율인데,어째서,네 녀석은… 거기에서 벗어나 있구나.]
[그건…….]
무언가를 들여다보며.
잠시 머뭇거리던 소녀의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사라지기로 되어 있는 것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인가. 그렇게, ‘이후’의 규칙과 제약이 부여되지 않았는가. 몹시 어처구니가 없도다. 어떻게 이런 일이…….]
“존재하다니.”
소녀의 목소리가 ‘귀’로 들렸다.
“시련에는 만족했느냐. 짧았구나, 짧았어.”
‘눈’앞의 소녀는 어쩐지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죽음을 경험하는 건,특별하니까.
짧지 않았다,여신.”
갑작스러운 반말.
“건방져졌구나.”
소녀의 얼굴이 구겨졌고.
“구면이니까.”
삭막하게 말랐던 남자의 얼굴은, 감정을 담아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