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388화 (388/458)

472화 눈먼 달,지는 꽃 (49)

〈헤이! 호! 호!〉

〈아래로…. 아래로….〉

〈이번에는 무조건 혼자 먹어야지 혼자 제일 맛있게 한 겹 두 겹 세 겹 비벼 먹어야지. 흐흐흐흐 .>

〈공포! 더 많은 공포를!〉

〈산 인간. 산 인간. 산 인간.〉

〈피의 빗속에서 헤엄.〉

〈치아를 남길까? 엿을 남길까?〉

〈나는 안구를 장식할 줄 아는데,

안구를 장식하면 정작 그 안구들은 자기를 못 보지.〉

〈태양이 졌어!〉

〈신이 강을 훔쳤어. 강은 시체로 가득 차야 한다. 강에 가자. 모두를 빠트리자.〉

수많은 사념이 폭주한다.

언젠가부터.

그림자들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최소한의 의미를 갖지 못한 말들도 걸러지지 않고 그대로 울려 퍼진다.

끔찍한 요괴들의 기억과 감정이

폭풍처럼 휘몰아친다.

하지만 시끄럽거나 정신을 차릴 수 없다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애초에.

이들이 곧 나니까.

처음에는 흡수했던 요괴들을 모두 억압하고 제어할 수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누구인지조차 희미해지기에, 검열과 개입이 의미를 잃는다.

‘나는……

지금의 나는 무리다.

끝없이 증식하며 서로가 서로를 감염시킨다.

거대한 관념의 전염체.

하지만 내 관념이 거대해질수록, 오히려 좁은 곳에 갇힌다는 자각이 엄습할 때가 있다.

물론,그런 건.

“월식이군요.”

지금처럼 아주 가끔이다.

초롱너울의 살짝 긴장한 목소리가 들린다.

제단으로 걸음을 옮긴다.

달빛의 축복을 받지 못해 3년 중 가장 약해지는 시기다.

이 시기를 노려 꽃의 신이 공격해 올 수 있다는 초롱너울의 조언에 따라

방어를 준비한다.

생각해 보면 녀석도 상당히 기묘한 구석이 있다.

육체를 얻으려는 것도 아니고.

나를 강하게 만드는 것 자체에서 즐거움을 얻는 걸까.

신경 쓰이는 건 하나 더 있다.

“이제 달빛이 사라질 겁니다.”

그녀가 가진 달에 관한 지식들은 기묘할 정도로 깊고.

[달빛이 사라집니다.]

정확한 데가 있었다.

[1 시간 2분 17초 동안 달의 권능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달이 찍은 낙인이 비활성화됩니다.]

달이 사라지고.

그 테두리가 붉게 빛난다.

“저건… 달빛이 아닌가.”

초롱너울이 고개를 끄덕인다.

“노을입니다. 태양의 잔영이지요. 달이 스스로 가진 마력으로 내는 축복의 빛이 아니라,그저 태양을

반사해 빛나는 것뿐입니다.”

달에 관해서 그녀의 지식은 어떤 요괴보다도 자세하다.

“채워라.”

내 명령에 따라 그림자들이 각각 제단의 방위를 채운다.

머릿속을 항상 가득가득 채우던 외침들이 쑥 빠져나간다.

여덟 방위에 각각 300씩.

2,400의 그림자들이 달의 제단에 채워진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달이 예전에 이 제단에 남겨 놓은 힘을 잠시나마 되살리는 일이다.

빛을 저장하는 건 지극히 어렵고, 그 보존은 한정적이며 불완전하다.

그럼에도 이 정도의 출력이라면 웬만한 일은 우격다짐으로 충분히 해치울 수 있다.

이천이 넘는 요괴들의 혼.

사실 과도한 힘이지만.

‘200 더.’

- 끼야아아아아아아!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으니까 계속 내보낸다.

여덟 방위에 500씩의 그림자들이 채워진다.

그토록 빼곡하던 제단의 문양들도 자리가 모자란 탓에 문양당 최소한 서넛의 그림자들이 자리 잡는다.

“이 정도면 차고 넘칩니디만……

“한번 더. 가라.”

이런 핑계가 아니면 그림자들을 분산시킬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 과르르르르르르!

한 방위에 700씩.

5,600의 그림자들을 일시적으로 몰아내듯 분산시킨다.

오천이 넘는 요괴의 그림자들이 욱여넣어진 제단이 무리라는 듯이 덜덜 떨어대고 있다.

방금 전까지 마음을 뒤덮고 있던 수많은 생각들.

절반을 넘는 그림자가 쑥 빠지자 잠깐 고요해진 마음에서 무언가가 떠오른다.

월식.

3년마다 한 번씩 하늘에서 온전히 달이 사라진다.

3년.

이곳은 3년 전에 처음 봤었지.

뭘 하다 여기 왔을까?

도깨비들을 살해했다.

그 전에는?

그 전에는…….

3년 전인데도 기억들이 아주 아주 오래전처럼 느껴진다.

‘달이 하는 일은……

낙인을 찍는 것.

낙인.

누가 낙인이 찍혔더라?

기억해 내야 한다.

잊혀진 기억.

묻혀진 꿈.

‘되짚어 보자.’

낙인이 찍혔음에도 불구하고……. 동방을 활보하던 누군가.

나와 함께.

‘나’를 여기서 깨워 줄 자는…….

[달빛이 복구됩니다.]

[달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월식의 시간이 무사히 끝났습니다.

혹시나 싶어서 신경 썼는데 무사히 넘어갔군요.”

[달이 찍은 낙인이 활성화됩니다.]

- 휘이이잉……!

넓은 제단 전체의 문양을 세 겹, 네 겹으로 뒤덮었던 요괴들이 다시 내 몸으로 되돌아오려 한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데.

하지만 그런 반항 따위는 밀물에 휩쓸리는 모래성처럼 무의미하다.

그동안 느끼지도 못했던 ‘의문’을 이제야 조금씩 느끼고 있었는데.

- 콰르르르!

사라진다고?

수많은 외침과 기억과 감정들이 다시 폭풍처럼 몸으로 되돌아오며.

의문과 생각이 쭉 빠져나가고.

붙잡을 방법도 새길 방법도 없이 마지막 문이 닫힌다.

‘그런데……

도대체 어떤 ‘나’의 과거를 되짚어

보아야 한다는 걸까?

물에 빠져 죽은 자들의 원념이 뭉쳐, 살아 있는 모든 것에 원한을 품고 물가로 끌어들여 발을 잡고 죽이고 싶어 했던 ‘나’의 과거? 인간을 보면 꼭 공처럼 돌돌 말아 죽이고 싶어 했던 ‘나’의 과거? 자랑스러운 길고 날카로운 머리카락을 기르고 다시 길러서,그걸로 사람을 베고,집을, 성을,땅을 베어냈던 ‘나’의 과거? 혀 잘린 참새에서 태어나 오랫동안 인간의 혀를 먹어왔던 ‘나’의 과거? 그냥 땅에 부어 놓은 하얀 콩에서 태어나,그때그때 땅의 요기를 먹고 아무렇게 자란 ‘나’의 과거?

잠깐 피어오르는 의문은.

연달아 울려 퍼지는 ‘나’의 무수한 목소리와 비교하면 너무 옅고 얕고 희미하다.

꽃의 신을 왜 죽이고 싶어 했지? 동방은 왜 정벌하고 싶어 했지?

하지만.

생각이라는 건 아주 얇은 막으로 감싸여 있어서,그곳으로 수많은 외침이 너무나도 쉽게 침투해서 찢어 버리고 흩트려 놓을 수 있다.

〈더 많은 인간이 아래에 있다.〉

〈발달한 문명이…….>

〈파괴…. 약탈…. 혼돈…. 더 많은 혼돈을…….>

〈인간들을 모두 다 구워 버리자! 내가 봤어. 인간들은 불을 좋아해. 굽는 걸 엄청 좋아해!〉

숨겨진 만월이 자신을 드러내고.

그 아래서 수많은 ‘나’가 외친다.

결국,이게 ‘나’다.

간신히 떠올린 의문이 추락한다.

가끔 있는 월식 때마다 한 번씩 의문이 떠오르지만,추락할 때마다 그걸 다시 떠올리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가라… 가라…….>

대신 수많은 ‘내’가 공유하는 다른 욕망이 점점 더 누적되어.

현실이 얼마나 이해할 수 없는지, 선함과 호의가 얼마나 무의미한지.

세계가 얼마나 완전히 우연에 의해 움직이는지 모두에게 보여 주려는 욕망은 바위처럼 단단해진다.

〈남쪽! 남쪽! 남쪽으로 가!〉

〈북쪽과는 비교할 수 없이 인구가 많다고!〉

〈아직 만나지 않은 인간들에게도 알려 주자!〉

어디에도 숨을 곳은 없다는 것을.

그런 외침에 귀 기울이는 건 쉽고 간단하다.

〈제물! 두꺼비! 턱! 바늘잎! 힘찬 반짝임! 우리 풀이 사막이다! 불어 봄바람이 다!〉

〈나 자신에게 바치는 제물이다!〉

〈요괴를 사냥한다고 지껄여대는 재미있는 인간들까지 있어! 개네를 가지고 놀면 얼마나 즐거울까?〉

〈충분하지! 봄날이다! 방황이다! 투명하게 만들어 주자!〉

좋다.

견고할수록.

공든 탑일수록 무너뜨리는 쾌감은 무엇보다도 짜릿하다.

북쪽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냥감이 많고,발달된 남쪽으로, 감히 요괴를 사냥한다고 지껄이는 무리들마저 있는 곳으로 간다.

벌써 마음이 흥겨워진다.

하나의 세계를 망가뜨리는 일만큼 완벽한 즐거움은 찾기 힘드니까.

하지만.

북쪽과 남쪽의 경계선.

도깨비들이 자리 잡았던 곳 아래는 미리별의 땅이다.

“뚫을까?”

이제.

신의 영역을 제외하고 북쪽에서 더 휩쓸 곳은 없다.

미리별의 땅이 경계를 짓고 있는 남쪽을 앞에 두고 나는 고민한다.

이미 달빛의 축복을 받아 신성까지 갖췄다.

달의 권능에다 만 마리 요괴들의 그림자라면 상대가 신이라도 해도

해볼 만하지 않을까.

하지만.

초록색 불꽃이 나를 말린다.

“지금은 안 됩니다. 신의 정원에서 그녀와 싸우는 건 곤란합니다.”

“그렇다면……

“바다로 돌아가시죠. 남은 배들을 쓰시는 건 어떻습니까?”

〈수백 척의 유령선!>

〈보고 싶어!>

〈먹자!〉

〈유령은 별로 맛이 없는데?〉

〈잘 볶아도 맛이 없나?〉

〈피도,살도 없으니까 볶을 것도 없다고.〉

〈잘근잘근 씹어도 맛이 없나?>

〈퉤! 하고 뱉어 버릴 거라니까.〉

〈그럼 그냥 타기만 하자.〉

〈남쪽을 끝내면 미리별은 신앙을 잃어버리게 되겠지.〉

〈헤이! 호! 호! 신앙을 잃은 신의 꽃밭은 점점 말라비틀어지니까!〉

〈견디지 못한 그년이 영역 밖으로 나온다면 최고라구.>

〈맞아. 바깥에서라면 충분히 신을 찢어 버릴 수 있어.〉

미리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대요들이 전면으로 나와 하나둘 지껄인다.

〈아니,조각내 버리면 아까우니까, 밖으로 기어 나오면,눈코입과 귀를 재앙실로 꿰매고 말랑말랑한 배에 액따개를 쑤셔박아서 신성이 솔솔 홀러나오는 샘으로 만들어야 돼.〉

결국 끝끝내 쫓아가서 살해했던

여우탈의 그림자가 몹시 단호하게 중얼거린다.

〈팔다리에는 굴타리벌레를 키워서 파먹게 하고. 영원히 주술을 뽑는 공장으로 보존해야 한다.〉

오래전부터 꿈꿔 오던 게 있는 모습인 것 같다.

나는 해안으로 걸어갔다.

‘왔군.’

처음에 다람쥐를 만나고 땅귀신을 죽였던 해안이 보인다.

그때는 적이 될 거라고 생각한

도깨비들은,내가 달과 교감한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목숨까지 선선히 내놓았다.

‘물론,상관없었지만.’

도깨비들의 태도가 어떻게 되었건 그들이 내게 살해당하고 흡수되는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바람숲을 지난 시점에서 그들의 반항은 이미 무의미해졌다.

- 쏴아. 쏴. 솨아아…….

그런 생각에 잠겨 걸어갈 때 슬슬 파도가 밀려오는 소리가 들린다.

다른 소리는 없다.

만 마리의 그림자가 있다고 해도 걷는 건 어차피 나 하나뿐이기에 바다는 고요하다.

모래사장 한편에 새까맣게 마른 나무들이 넓게 펼쳐져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생명의 흔적은 아무 데도 보이지 않고.

저 너머에는 유령선단이 있다.

기다리고 있을까?

그냥 사라져 버리지 않았을까?

방치된 3년은 충분히 길고.

무엇도 3년을 방치하고 기다림을 기대해서는 곤란한데.

- 끼이이이익…….

녹슨 마스트의 소리가.

一 철컥… 철컥…….

높은 곳에 무언가를 매달고 있는 사슬의 소리가 울려 퍼진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