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389화 (389/458)

473화 눈먼 달,지는 꽃 (50)

“기다렸다……. 인도자.”

그사이 선장으로서의 통제권을 한층 더 강화한 걸까.

라스드롬의 쇠사슬은 마스트뿐만 아니라 갑판을 뻗어 선수와 선미, 우현과 좌현에까지 도달해 있었다.

“탐험은 끝났는가……?”

마스트에 묶인 선장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 절반이다. 남쪽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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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만의 그림자를 거느리고 허공을 디뎌 걸어간다.

잠깐이라면 이런 방법도 좋겠지만 바다를 건넌다면 배를 타는 쪽이 역시 편리하다.

훨씬 쉬운 방법을 놓아두고 굳이 정신력을 사용할 필요는 없다.

“엄청난 숫자의 영혼들을 데리고 움직이는군… 우리의 인도자여……. 괜찮은 것인가?”

라스드름이 나를 보고 묻고.

다른 유령선의 선장들도 내 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뭐가 괜찮지 않다는 소리인가.

알 수 없었다.

요괴들을 흡수할 때마다 나는 더 강해지고 현명해진다.

물론 그런 걸 지금 일일이 가르칠 생각은 없다.

“출발하지.”

“•••알았다.”

라스드롬은 더 이상의 질문 없이 배를 운행한다.

수백에서 수십 년 동안 한 해역에 갇혀 있던 걸 구해 줘서일까.

유령선단의 누구도 나에게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바다도 하늘도 맑지는 않았지만, 배가 파르르 이는 잔물결을 빠르게 헤치며 남쪽을 향한다.

뱃전에 치는 잔물결을 느끼면서 마음속에 기대감이 차오른다.

북쪽은 너무 극단적이었다.

바람숲을 지난 이후로 저항이라고 할 만한 저항이 없었다.

‘도깨비들은 그대로 내게 합류했고.’

그들을 흡수한 뒤 달의 권능까지 받자 요괴들은 대항의 의지는커녕 복속하거나 도망가기 바빴다.

‘차라리 모여서 덤벼들지.’

곳곳에 숨은 요괴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느라 긴 시간이 걸렸으니까.

인간들이야 말할 것조차 없었다.

무언가를 짓부수고.

파괴하고,굴복시키고.

능욕하려 해도 그럴 보람이 있는 상대가 몹시 적었다.

간단히 유희를 맛보는 것조차도 어려웠다.

무언가를 으스러뜨리려 하더라도 으스러지는 저항감이 있어야 보람이 느껴진다.

남쪽이라면 훨씬 재미있을 거다.

유령선은 점점 더 빨라지고.

미리별의 영역을 금방 지나간다.

멀리 볼 수 있는 요괴들의 힘을 호출한다.

벌써부터인가.

저 멀리 해안가의 커다란 도시가 시야에 들어온다.

“성,인가.”

해안가에 세워진 도시.

근처는 암벽이 형성된 곳도 있고, 단단한 지반 위에 굽이굽이 언덕이 솟아오른 곳도 있다.

거기에 맞춰 능선을 따라 세워진 성곽은 무려 세 겹으로 되어 있고,

사이사이와 안쪽에 높게 솟은 석재 망루들이 굳건히 적을 경계한다.

나름대로 폭넓은 해자까지 있고.

철통같은 방어다.

〈이야,완전히 차원이 다르네!〉

〈좋아아아아!〉

〈인간이! 힘껏! 반항하는 모습이 보고 싶다구!>

이 정도로 발전한 인간의 문명은 동방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방파제까지 만들어 놨어어어!〉

〈북쪽 따위 망해라! 여기가 진짜 최고다!〉

〈배고파. 배고파.〉

제국 도시들의 성곽을 떠올린다.

축조술만 생각하면 어떤 면에서는 이쪽이 더 뛰어날지도 모른다.

깊은 곳에서부터 즐거운 마음이 끓어오른다.

〈미리별의 경계만 넘으면 이런 게 있었다니!>

〈억울해! 억울해! 억울해!>

나 역시.

그동안 괜히 샅샅이 북쪽을 누비고 다녔나 싶은 기분이다.

〈사람! 사람 많아!>

〈3만… 4만… 5만에 육박한다.〉

삿갓바람이 영안을 발동한다.

제국이나 연합에서도 보기 힘든 대도시다.

성벽 바깥의 가옥과 인구수까지

생각하면 그 정도는 된다.

처음부터 이런 도시를 조우하다니 운이 좋다.

- 쏴아!

유령선은 점점 해안에 가까워지고, 다가오는 유령선단을 보고 성벽에 인간들이 모인다.

활을 겨누는 자들도 있고 커다란 대포가 올라오기도 한다.

유령선이라는 사실을 인지했는지, 그럴듯한 옷을 입은 녀석들이 애써 결계를 만들고 주술을 준비하는 게

보인다.

‘속박인가.’

산 요괴는 물론이고.

죽은 귀신까지 잡는 속박주술이 해안가에 집중된다.

‘과연 대도시.’

성벽에 올라온 시커멓고 커다란 대포들은 일제히 주술이 행해지는 해안을 겨냥한다.

〈제법인데?〉

〈주술로 묶고.〉

〈대포로 때리는 건가.〉

아예 거대한 대포들을 축성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개미처럼,많이도 모였구나 싶다.

인간들이 건방지게 성벽 위에서 감히 나를 내려다본다.

물론.

그냥 저 위로 걸어가면 되고.

성벽이 몇 겹이건 한 대 때리면 모조리 날아가 버릴 거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기왕…….>

〈해안에 있는 도시인걸…….>

〈아까워…….>

〈그거 해 보자… 그거……!> 재미있는 생각이 떠오른다.

〈달의 힘으로… 아래를…….>

〈아래를 눌러서…….>

달의 힘으로 해저를 흔들어 본다.

“시작하지.”

해저의 지각.

—크드드득

판을 밀어붙인다.

〈깊고 깊은 곳까지…….>

〈더… 더…….>

힘을 집중해서 누를 수 있을 만큼 눌러서 지각을 가라앉히고.

힘을 해제한다.

- 쿠구구구쿵!

가라앉았던 지각이 반동으로 다시 올라오면서.

‘이거 놀라운데.’

- 콰고과과!

초당 100미터를 움직이는 파도가 일어난다.

〈예에에에!>

〈죽여주잖아!〉

터무니없는 위력이다.

넓게 출렁이며 빠르게 전진하던 파도는 해안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느려지지만.

그만큼 높은 고저로 치며 포말로 하늘을 뒤덮는다.

〈아하하! 저 녀석들! 해안만 잔뜩 노리고 있었는데!>

해안 자체가 사라진다.

돌로 만든 방파제 따윈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지고.

“우리의 인도자여… 이런 경험은

처음이군……

확장된 바다로 유령선들도 휘감겨 높이 떠오른다.

[베테랑 선장 ‘범고래’ 멜리사가 놀라운 모험에 몹시 즐거워합니다.]

[항해 경험치가 을라갑니다.]

[유령선〈교활한 이빨>이 도시를 물어뜯는 바다에 즐거워합니다.]

[‘무자비한’ 바돌로의 호감도가 15 올랐습니다.]

[‘사형 집행인’ 레스터의 호감도가

15 올랐습니다.]

[유령선〈폭동〉이 무너지는 질서에

즐거워합니다.]

[베테랑 선장 ‘명예로운’ 세이엘이 인간들의 고통을 동정합니다.]

[‘명예로운’ 세이엘의 호감도가 11 떨어졌습니다.]

수많은 메시지가 떠오르고.

파도와 함께,앞으로 전진한다.

재해가 일어난 이상 살육 같은 건 전혀 벌일 필요가 없다.

모든 게 무너지는 걸 파도 위에서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성벽 바깥이 휩쓸리고.

난으 푿 O1

- 콰과과과과광!

순식간에 바다가 쏟아지며 해안의 주거지를 휩쓸어 버린다.

“이거 뭐야? 이거 뭐야? 뭐야?”

“빨라! 빨라! 아아아! 오고 있어!”

“떠내려간다! 내 집인데… 내 집! 으아아아아아!”

“흔들려! 흔들려! 흔들려!”

“말도 안 돼… 빨라…. 끝났어… 다 끝났어……

“싫어 싫어 싫어 싫어”

“여기는 괜찮은 거야? 괜찮아?”

“도망쳐! 도망쳐! 도망쳐!”

방파제가,가옥이,해자가,성벽이 무너지고,곳곳의 사람들은 달리고, 헤엄치고,물에 잠겨서,떠내려오는 작은 배에 맞아서,구부러진 집의 지붕에 부딪혀서 죽어 간다.

유령선에 맞서 보려던 신관들과 퇴마사들은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자연의 폭주에 혼비백산해 전의를 잃고 도망친다.

유령선에는 대포를 쏘고.

요괴를 향해서 퇴마를 준비할 수 있겠지만.

바다 그 자체를 인간이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재해는 도시를.

인간의 마음을 찢어발긴다.

성벽의 채 무너지지 않은 부분에 버티고 있던 누군가는 살아남고, 망루에 있는 누군가는 살아남고, 목재로 만들어진 가옥들은 통째로 떠올라서 사람들은 지붕에 올라가 살아남다가,해일에 휩쓸린 다른 가옥과 부딪혀 부서져 죽어 버린다.

집과 집이,벽과 벽이 부딪혀서

서로 부서지고,낮은 곳에 서 있던 망루는 사방으로 물을 뿜어내다가 곧장 머리까지 잠겨 버린다.

고지대로 도망치다 다리가 접질려 빠져 죽는 자,패닉에 빠져 반대로 달리다가 죽는 자,커다란 마차를 타고 달리다가 태워 달라는 사람을 무시하고 그대로 치고 가버리는 자, 실성해서 낄낄거리다 죽는 유랑인, 고지대에 머무르다가 사람들에게 도망치라고 오열하면서도 올라갈 더 높은 지대를 열심히 찾고 있는 인간들이 보인다.

‘여기는……

이제 더 할 것도 없다.

그림자들이 웃으며 인간들의 몸에 빠르게 들락거린다.

극단적인 재해의 상황에서.

잠깐이라도 요기가 휩쓴 인간들의 눈빛은 놀라울 만큼 쉽게 변한다.

마치 억눌려 있기라도 한 것처럼.

“관둬. 뭘 도망쳐? 다 끝났어.”

“괴…. 굉장해…. 이거…. 정말…. 굉장해…. 헤에….”

''하하하하하하.”

“털보 선장 놈의 집이 떠내려간다! 크흐흐흐흐… 고기 많이 낚는다고 잘난 척했지? 크크크크……

“어차피 나는 잃을 것도 없는데, 잘됐다고!”

“인생 끝난다. 끝난다! 가 버린다! 끝난다! 간다아아!”

“재밌네! 호! 재밌는 바다입니다!”

“흐하하하하하하하하하   ”

‘살려 둬라.’

그림자들을 풀고 인간들을 집어서 높은 곳 위에 올려놓는다.

이 대도시에서.

지금 내가 할 건 살육이 아니라 구호 활동이다.

너무 많이 죽이면 오히려 공포와 혼돈이 전염되는 속도가 느려진다.

퍼트릴 숙주가 사라지니까. 무엇보다도.

요괴가 인간을 건드리는 것보다는 인간들이 서로를 해치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다.

요마妖魔는 그렇게 생겨나고.

신에 대한 믿음 따위는 밀어내고, 요괴들을 나의 그림자를 한층 더 강하게 만든다.

“여러분! 고지대는 서남쪽입니다! 계단은 이쪽입니다! 보세요! 폭죽을 쏘아 올렸습니다! 이리로!”

‘정화 주술인가.’

불꽃을 보는 자들의 눈빛이 잠시 정상으로 돌아온다.

물론.

그런 짓을 하면 그림자들의 모든 관심이 한 몸에 집중된다.

언덕에 서서 외치는 고위 신관을 향해 수백의 그림자들이 몰려가서, 외치는 입으로,귀로,눈으로,코로, 온몸의 구멍으로,피부로,머리로, 가슴으로 들어간다.

“이리로 오십시오! 큭큭큭… 일단 살아남으면 됩니다! 살아남아서… 다른 도시를 약탈합시다! 우리만

죽을 순 없습니다! 히히…. 인생은 희망차게!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 우히히히… 제 패거리가 되고 싶은 분들은 저를 여신으로 섬기십시오! 크키 키 킥……

‘좋은 시작이군.’

만 마리 요괴의 그림자가.

사람의 마음에 역병을 퍼트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요괴왕의 흔적을 쫓았다.

거짓말 같은 파도에 쓸려 무너진

해안의 도시를 봤고,지진이 덮치고, 망령의 폭풍이 덮쳐 눈을 까뒤집고 미친 자들에 무너진 도시를 봤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단지 그런 소문과,몇 명의 빙의된 인간을 보고 공포로 흩어져 버린 마을들을 지나쳤다.

해일과 지진이 일어난 두 도시를 제외한다면 다른 도시들은 대부분 인간의 손으로 파괴된 흔적이었다.

사람의 창칼이 사람을 향하고.

사람의 주술이 사람을 향한 흔적이 폐허에 가득했다.

그 흔적에서.

요괴는 사람을 먹지 않았다.

가끔.

사람이,

사람을 먹었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아저씨… 느껴져요? 저 앞에서 피 냄새가… 나요.”

커다랗게 키가 커 버린 쇠돌이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금보다 훨씬 작은 소년일 때도 항상 씩씩하고 자신감 있게 말하던 녀석이었는데.

함께 요괴왕의 흔적을 쫓는 동안 말수가 줄어들고 침울한 성격으로 변해 버렸다.

당연한 결과다.

‘따라오지 말라니까.’

하지만 괴로운 표정을 하면서도 끝내 자신을 따라오는 녀석을 쉽게 내칠 수는 없었다.

‘아니,애초에……

빠르기도 하고.

냄새도 잘 맡으니까.

따돌리려고 해도 쉽지는 않겠지.

남자는 걸음을 멈췄다.

눈앞의 깊은 골짜기를 바라보자 쇠돌이가 말을 이었다.

“굉장히… 무서워하고 있어요…….

증오… 죽이고 싶어 하는 냄새가……. 둘러싸서 그걸 즐거워하고 있고… 요괴… 요괴는… 아닌데……

‘쇠돌이라. 원래 개과 요괴였나.’

강한 개과 요괴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녀석일지도 모른다.

딱히 후각을 훈련받지도 않았는데 감정까지 자세히 분류해서 냄새를 맡을 수 있다니.

후각이 최소한 늑대의 수십 배는 되는 것 같았다.

“너도 지금까지 보아오지 않았나. 요괴가 아니라도 그럴 수 있지.”

“그렇… 겠죠……

소년이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소년에게 왼팔이라는 것은.

‘요妖’라는 것은 떼어 놓고 싶었던 모든 것의 대명사였다.

더럽고,추잡하고,없애야 하고, 억누르고, 부끄러워하고, 숨기고, 징그럽고 악한 것의 대명사였다.

그게 사라진다면 소년은 고통에서 해방될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요괴가 아니라도 그럴 수 있다.’

처음이었다면 거기에 고개를 젓고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무너진 도시들을 지나고, 폐허에서 행동하는 사람들을 보며, 소년은 더 이상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따라을 거냐?”

골짜기에 다가갈수록 소란이 선명 하게 느껴졌다.

증오의 냄새.

괴로운 냄새.

인간이라는 건 호의보다 악의를 더 많이 갖고 있는 걸까?

삶은 즐거운 일보다 괴로운 일이 더 많은 게 당연한 걸까?

그럼 그냥 죽는 게…….

“따라오고 싶으면.”

남자가 소년의 목에 손을 을렸다.

“정신 차려라.”

소년은 침을 꿀꺽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낯빛은 어두웠지만,쇠돌이는 남자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곧 쇠돌이가 맡은 냄새의 근원지가 나타났다.

커다란 원형 경기장에서.

성별도,나이도,체구도 각자 다른 열댓 명의 인간이 조잡한 무기를 가지고 싸우고 있었다.

날 없는 뭉툭한 단검이나 몽둥이

같은 것들.

투기 장이었다.

물론 그들이 원해서 싸우는 것은 아니었다.

원 밖으로 도망치려는 사람들을, 둘러싼 이들은 잘 제련된 창칼로 찔러 죽이고 있었다.

이미 곳곳에 시체들이 널려 있다. 남자는 그들을 향해 걸어간다.

“악! 아아아악!”

쇠돌이는 자기보다 어린 소년이 몽둥이를 피해 손가락으로 상대의 눈을 찌르는 모습을 바라본다.

안쪽까지 찌르고,후비고,매달려

파고,더 깊이 찌른다.

그런 모습을 보며 그들을 둘러싼 무사들은 몹시 즐거워한다.

쇠돌이는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더 어린 나이의 아이들이 싸우고, 서로를 물어뜯고,미워하는 모습에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흘렸다.

이 투기장에 즐거워하며 희열을 느끼는 무사들이 자기가 그렇게나 되고 싶어 했던 ‘인간’이라는 것이, 한 팔을 자르면서까지 되고 싶어 한 ‘인간’이라는 사실이 소년의 마음을 주저앉게 만들었다.

“멈춰라.”

그리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골짜기 전체에 울려 퍼진다.

원형 투기장 안에 있던 인간들이 마치 목소리에 홀린 것처럼 일제히 움직임을 멈췄다.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무사들이 짜증을 내며 뒤를 돌아봤다.

“뭐야?”

“웬 놈이야?”

“어디서 나타났어?”

모두 서른 명 정도의 잘 무장한 인간들이었다.

칼과 창을 한 자루씩 차고 있고, 등에는 장궁을 메고 있었다.

그리고 가운데 고풍스러운 복장의 신관 한 명이 있었다.

신관은 두 눈이 시커멓게 변했고.

그를 호위하는 무사들의 표정도 어딘지 뒤틀려 있다.

‘그런가.’

남자는 생각한다.

제법 치안이 잘 유지되던 땅이, 이 짧은 기간에 투기장을 열 만큼 변하는 건 조금 부자연스럽다.

주최하는 자들이 애초부터 범죄를 저지르던 자들도 아니고.

남자는 화려한 복장의 신관을 보고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귀신을 사냥하던 녀석이 침식에 저항하지 못한 건가. 아니,완전한 빙의도 아니군……

심마에 불과하다.

대도시에서 인간의 숭배를 받으며 활동하다가 요괴의 압도적인 힘을 겪고 정신이 무너지고.

그 사이로 파고든 요기에 마음이 먹혀 버렸다.

무언가를 높게 쌓아 온 인간일수록 무너졌을 때 미치기도 쉽다는 걸 소년이 알까 생각하면서.

남자는 두 눈이 검게 물든 신관을 바라봤다.

신관이 킥킥 웃었다.

“네놈은 뭘 아는 척하는 것이냐? 새로운 신께서 너희가 원하는 바를 행하라고 하셨다. 칼 좀 쓰는 녀석 같은데 어떠냐? 우리와 합류하면 다음번 인간 사냥에서 우선적으로 장난감을 고를 수 있게 주마.”

어떻게 써도 상관없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남자는 주변을 훑었다.

투기장 안에 있는 자들뿐 아니라, 곳곳에 흩어진 시체와 고문당하는 포로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시체와 포로들의 숫자로 보아.

지금껏 서너 번 이런 짓을 한 게

아닌 듯했다.

“새로운 신이라……

一 저벅.

“아무래도 그동안 너무 느긋하게 찾아다닌 것 같군.”

남자는 중얼거리며 투기장을 지나 앞으로 걸어갔다.

소년의 손을 잡고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허리에 차고 있던 대충 만든 칼은 뽑지도 않았다.

아예 손잡이에 손도 대지 않았다.

‘멍청한 놈 같으니.’

신관은 눈짓을 보냈다.

진작 은밀히 화살을 메기고 있던 무사들이 남자의 등을 향해 일제히 활시위를 놓았다.

아니,놓으려고 했다.

하지만 시위를 놓는 반동이 몸에 오려는 순간.

- 스르륵.

그들의 상반신이 비스듬한 각도로 미끄러졌다.

‘어어?’

화살이 쏘아지지 않았다.

칼을 들고 남자를 베어 넘기려던 무사들도 몸을 움직이는 순간 몸의 절반이 스르륵 미끄러졌다.

몸이 비스듬히 나뉘고 상반신이 땅 위로 투둑 떨어졌다.

아직까지도 하반신은 그대로 땅을 딛고 있는 상태였다.

‘이… 이게 무슨……:

신관은 당황에 빠져 즉시 수인을 맺으려 했다.

예전에는 요괴를 잡는 데 쓰였지만 지금은 저항하는 인간에게 온몸이

압사당하는 괴로움을 맛보게 해서 고분고분 복종시키는 주술이었다.

최대의 힘으로 사용하면 집채만 한 바위가 짓누르는 것보다 두 배는 강한 압력을 줄 수 있었다.

‘죽어라.’

남자는 그때까지 등 뒤를 보이고 걸어가고 있었다.

볼일 없는 듯 천천히 걸어가서 아직 십여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수인을 맺으려고 양손을 의식하는 순간 묘하게 시큰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지독하게 소름 끼치는 느낌이었다.

속이 울렁거리는 듯한 그 감각에 신관은 수인을 맺지 않고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가만히 의식해 보니 시큰한 느낌은 얇은 선처럼 팔목에서 허리까지를 통과하고 있었다.

그가 작게 숨을 쉴 때마다.

심장이 뛰어서 작은 박동이 몸에 전해질 때마다 시큰한 느낌은 점차 선명해졌다.

두려웠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잘린 건가?’

붙어라.

붙어라.

몸을 붙이는 주술은 알고 있다.

비상약도 가슴팍에 숨겨 놓았다.

하지만.

그걸 사용하려고 하면.

움직이는 순간.

어떻게 될지 신관의 몸은 생생히 느끼고 있었다.

그때쯤.

스무 걸음을 더 지난 남자는 숨도 세게 쉬지 않고 서 있는 신관에게 슬쩍 고개를 돌렸다.

“자세가 좋군. 그렇게 있으면…… 남자는 들릴 듯 말 듯 작게 속삭였다.

“50초 남았다.”

그리고.

- 스르륵.

정확히 49초 뒤에.

신관의 몸은 네 조각으로 흩어져 바닥에 쏟아졌다.

“바람… 이었나요?”

소년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새로 죽은 자들의 냄새를 맡으며

남자에게 물었다.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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