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4화 눈먼 달,지는 꽃 (51)
“이 앞에는 수도인데……
나는 잠시 망설인다.
몇 킬로미터 정도를 걸어간다면 수십만이 거주하는 거대한 수도가 등장한다.
물론 인간의 숫자도 중요하지만, 그곳에는 동방 최고의 퇴마사들과, 잘 훈련된 군대가 있다.
안개로 어지럽혀진 황야를 다니며 마탄으로 요괴 일흔아홉 마리를 사냥했다는 사냥꾼이 있다.
사람에 깃든 귀신을 퇴치하다가, 언젠가부터 지금까지 퇴치해 왔던 수많은 귀신들을 소환해서 오히려 자신이 부린다는 무녀가 있다.
피를 힘의 근원으로 쓰는 부정한 혈법사가 있고.
신의 축복을 받아서.
두 주먹으로 대요를 때려잡았다는 신관이 있다.
“역시,지금 먹어 버릴까.”
잠시 고민하다 결정한다.
아무래도 그게 낫다.
동방의 남쪽에는 아직 가지 못한 많은 장소가 있다.
하지만 결국 이곳이 중심이다.
다른 장소를 더 피폐하게 만들어 봐야 큰 재미는 없다.
수도를 고립시키고 다른 곳부터 공격하면 신관은 구원받지 못하는 세계를 보며 점점 스스로 신앙을 잃어버리게 된다.
대요를 때려잡았다는 두 주먹은 뜻을 잃고 흐물흐물해진다.
피의 힘을 사용한다는 마도사나, 황야의 사냥꾼이나,귀신 소환사도 비슷할 확률이 농후하다.
지켜야 할 게 모두 사라진다는 건 그런 느낌이니까.
다른 인간을 구하겠다며 바깥으로 나을지도 모른다.
이만큼이나 힘의 차이가 난다면 각개격파는 한층 더 허무해진다.
‘역시 모였을 때가 좋아.’
더 이상 동방을 파괴하면 저들은 마음을 잃어버린다.
기어오를 의지가.
뜻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혈기가 사라지는 일이야말로 피해야 한다.
마음을 잃어버린 인형을 짓이기고 능욕해 봤자 거기에 어떤 즐거움이 있을까?
희망을 갖고,그렇기에 절망하고,
굴복시킬 의지와,더럽힐 영혼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인간이야말로 각별한 맛이 있다.
오열하고,흐느끼고,몸부림치고, 무의미하다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든 저항하려는 상대를 부숴 가는 것만이 기쁨을 준다.
기껏 모인 정예의 군대다.
저런 마음도 자신감도 무너져서, 축 처져 버린 채 벽 안에 갇혀 버린 가축으로 전락시키지 말자.
지금처럼 자신이 걷는 길 중앙에 나름대로 준비된 상태로 막아 놓고 있을 때 꼭 맛을 보자.
달궈져 나온 음식을 먹지 않으면
식어 버리게 되고.
맛이 떨어지거나 상해 버리니까.
‘지금 먹는다.’
앞으로 가만히 걸어갔다.
수도가 가까워질수록 그림자들의 의견이 분분하게 나눠진다.
하나의 목소리가 들리고.
또 다른 목소리가 들리고.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여러 번씩 들리는 목소리들은 얼핏 지독하게 혼란스럽지만.
모두 즐거움을 최대화하기 위한 방법을 찾고 있으므로.
차라리 색다른 질서를 만들어 내는
화음和音처럼 들린다.
앞으로 걸어가고 있을 때.
도시에 다가가기도 전.
수많은 인간의 기척이 느껴진다.
3만을 넘는 숫자의 정예병과.
수백의 퇴마사들이,
넓게 진을 치고 성 바깥으로 나와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맛있는 녀석들은……
기척탐지. 천리안. 고요의 시선, 심안,투시,마력포착,은폐인지.
순식간 수많의 안眼 계열 스킬이 발휘되고.
뒤쪽에 흩어져 자리 잡은 네 명의 눈에 띄는 존재가 보인다.
〈오호! 야전이라도 할 생각인가?〉
〈나름대로 머리를 굴렸는걸.〉
〈지진으로 무너진 성을 본 것들이 정보를 전해 줬나 보군.>
〈크크큭… 그걸 가장 큰 힘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꺄아! 너무 귀여워! 인간이란 건 정말 미치도록 귀엽다니까?>
〈작정하고 준비를 했어.〉
〈땅 깊이 새겨진 희생의 결계다. 아무래도 군대는 미끼인 것 같군.>
만화경,매의 눈,탐색자의 등불, 풍수의 지관,방황하는 시선.
주술의 의도는 순식간에 읽힌다.
살해당한 군대의 피를 사용해서, 혈법사가 자신의 힘을 최대한으로 증폭시키려는 것 같았다.
〈히히히,피의 거인을 만들어 내서 네 몸을 후려치려는 것 같은데?〉
〈우와,귀신 소환사라는 계집애는, 지박地轉의 주문까지 준비하는걸. 이거 최고다.〉
〈애초에 목적이 우리가 아니야.〉
〈하하핫… 재밌어.〉
혈법사는 병사들의 피를.
무당은 병사의 혼을 바란다.
살아 있는 인간보다는 피를 뿜고 죽어서 귀신이 되는 쪽이 자신들이 손쉽게 부릴 수 있기에.
군대의 보조 따위는 애초에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마탄의 저격수도 인간의 고통과
죽음,두려움을 기원으로 삼아서 탄환을 강화할 준비를 끝냈다.
대요를 때려잡았다는 신관 역시도 비슷한 짓에 몰두한다.
결국,삼만 명의 병사는.
영문도 모르는 채 평야에 제물로 투입되어 있을 뿐이다.
인간 수뇌부에 의해서.
아무리 효율적인 전략이니 뭐니 하더라도 저들의 마음이 무언가에 물든 건 이미 부정할 수 없다.
그래도.
웃기는 농담이라고 생각되는 건 어쩔 수 없다.
군대를 앞에 내세운다고 하나하나 죽여 줄 거라는 생각이.
뒤편에 숨어 있는 그들의 위치를 알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우습다.
군대 따위는 한 명도 죽이지 않고 네 명의 수뇌부를 당장 으스러뜨려 죽일 수도 있다.
물론 한번 장단에 맞춰 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최적의 환경을 조성해 줄 테니까.
어디 한번 뭘 얼마나 잘하는지, 할 수 있는 대로 뭐든 해보게 하고 싶은 마음도 크다.
- 화르르!
‘너희 네 명은 남겨 주마.’
기척을 숨긴 그림자를 흘려보내어 퇴마사들의 귓가에 속삭인다.
그들의 공격에 그림자의 형태는 부서지지만.
의도와 위치가 완벽히 읽혔다는 사실을 깨닫고 미약하게 몸을 떠는 모습이 보인다.
‘벌써부터 겁먹으면 곤란한데.’
최선을 다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앞으로 걸어간다.
그리고,그때.
흩어진 수만의 군대와 나 사이에. 한 송이의 꽃이 보였다.
〈어? 겨울인데……?>
나뭇가지에 곱게 핀 연분홍 꽃.
〈저건 3월이 되어야 피는 거잖아.〉
인간의 군대와 나 사이에 갑자기 한 송이의 꽃이 나타났다.
이곳은 미리별의 땅이 아닐 터다.
하지만 이미 말라죽은 나뭇가지에 꽃이 피어 있었고.
그 나뭇가지를 들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대체 뭐야?>
선두에 있던 300마리의 그림자가 남자를 포착한다.
〈가만히 서 있는데?〉
〈아니,다가오는 것 같기도 해.〉
〈뭐야? 제발 살려 달라는 항복의
사신이라도 되나. 백기 대신 꽃? 히히히. 낭만적이네.〉
〈싫어! 싫어! 최소한 절반은 죽고 절반은 미친 다음에 항복하라고!〉
〈근데 저 꽃은 대체 뭐야?〉
꽃.
꽃이 기억을 자극한다.
다시 어렴풋이 기억이 올라온다. 미끄러져 내려갔던 감정과 의문이 한 계단 한 계단 올라온다.
생각 하나 꼼짝할 수 없을 만큼 ‘나’의 외침으로 가득 차고.
바위처럼 단단히 굳었던 머릿속을
꽃 한 송이가 비집고 피어난다.
〈잠깐. 미리별의 냄새가 난다.〉
〈자유로운 백성인가?>
〈아니,그놈들은 몇 명 찢기고 요즘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는걸.〉
〈신이 보낸 건가?〉
〈더 이상 건드리지 말라고?〉
〈흘흘,절대 받아들이면 안 된다. 장기전이면 무조건 우리가 이겨.〉
〈먹어 버리자.〉
‘그럴까.’
뭔가 다르다는 기분이 든다.
생각은,머릿속에 피어나는 꽃은, 수많은 외침에 침해되지 않았다.
눈앞에 꽃을 든 남자가 있으니까.
남자의 응시는 기묘했다.
그는 나를 바라봤다.
머릿속에 울리는 수많은 외침을 뚫고 ‘나’를 보고 있었다.
그가 묘하게 씁쓸한 표정을 짓는 순간이었다.
기억이 폭발하며.
넓은 평원 위에 있는 게 녀석과 나밖에 없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저건……
기억이 떠오른다.
남자는 두 팔이 잘렸을 터였다. 분명히 확인했다.
절단 따위가 아니다.
악령들에게 먹혀서,뼈 한 조각, 살 한 점,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남자의 양팔은 깨끗이 사라졌다.
지혈도 되지 않았다.
먹힌 양쪽 어깨에서 폭우 속에 피가 쏟아졌다.
분명히 그랬는데.
잃어버린 두 팔이 모두 예전처럼 붙어 있었다.
“저자는……!”
초롱너울이 깜짝 놀란 목소리로 외친다.
“팔이… 수상합니다.”
과연 그러했다.
왼쪽 팔은 검은 혈관이 돋아났던 흔적이 있다.
어마어마한 요기가 폭주한 흔적이 어깨에서부터 울퉁불퉁 손등까지 굵게 흐르고 있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인간의 팔은 아니다.
〈킁킁. 왼팔에서 개 냄새가 난다.
불길한 미친개 냄새가…….>
〈미친개? 네놈을 먼지 나게 됐던 검은벼락을 얘기하는 거 아니냐?〉
〈하지만 검은벼락은 오래전에 늙어 죽었을 텐데.>
이질적이라도 최소한 ‘육’이라는 느낌은 있다.
그러나 오른팔은 더욱 기묘했다.
죽어서 메말라 버린 나뭇가지에서, 분홍빛 꽃을 피워내고 있는 팔은, 반투명했다.
실재와 환상의 얇은 경계 사이에 자리 잡은 것 같았다.
뭐든 들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걸 그대로 투과해 버릴 듯한 느낌이었다.
위험하다.
〈그런 건 몰라. 덮치자. 만지자.〉
〈그래서 왼팔이 어쨌다는 거야? 저 녀석은 분명히 인간이잖아.>
〈어떻게 해버릴까?>
〈색정에 미치게 하겠어.〉
〈히히히. 히히히히히.>
〈사지를 꺾고 즐거운 환상을 보게 만들 거고.〉
〈좋아아! 허공에 띄워. 어떤 꼴이 되는지 인간들도 봐야지.〉
〈쓸데없는 소리! 내가 처리한다! 몸 좀 풀어 볼까!〉
〈아니! 나라니까!〉
이미 잔뜩 흥분해 있던 그림자들이 남자를 노렸다.
선두의 300마리가.
앞에서. 뒤에서. 옆에서.
위에서. 아래에서.
- 콰과과과과!
요괴를 베는 명검은커녕,
심지어 칼조차 없는 남자를 향해, 덮쳐 온다.
아니,덮치는 것조차 아니다.
어차피 목적은 그 뒤쪽 수만 명의 정예 병들.
꽃을 들고 서 있는 남자는 그냥 가는 길에 밟히고 뜯겨 나가는 들꽃 한 송이일 뿐이다.
작은 부스러기 하나.
맷돌에 갈리는 작은 쌀알 하나에 불과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 순간.
누구보다 앞서가던 다섯 그림자가 사라졌다.
〈어……?>
〈봤…어?〉
〈왜 없어? 없어졌어?〉
손에 들고 있던 나뭇가지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남자는 발도,손도,고개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흠칫하는 그림자들도 있었지만,
그 뒤로 그림자 스물이 계속해서 남자를 덮쳤다.
가만히 서 있던 남자는 그제야 살짝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요괴 그림자 스물이 그 자리에서 잘렸다.
〈으음……?>
반으로 잘린 요괴의 그림자들은 예전처럼 붙지 못했다.
원래의 모습처럼 해골왕에게 다시 돌아가지 못했다.
그들은 원래 그 자리에서 깨끗이 지워졌다.
〈어디로… 사라진 거야?〉
〈장난치는 거지?〉
〈뭐야?>
〈가! 계속 덮쳐!〉
- 콰과과과과!
대요들 가운데 선두에 있던 자.
다른 그림자들과 함께 달려가던 겨울이리는 달리다가 허공에 흠칫
멈춰섰다.
〈뭔가 느낌이 안 좋다.〉
〈안 좋긴 뭐가 안 좋다는 거야? 설마 인간에게 겁먹은 거냐?〉
〈아니…. 이건 개 냄새가 아니다. 꽃…. 향기가…. 날카로운데…….>
〈이름 높던 네놈도 죽더니 볼 장 다 봤군!〉
그사이에도 겨울이리를 지나서 백이 넘는 요괴의 그림자가 남자를 덮쳤다.
그리고 그림자는 계속 베어졌다.
반격은커녕 방어도 없었고 심지어 어디서 어떻게 공격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아예 남자가 움직이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조금 떨어진 지점에 머물러 있던 겨울이리는 이백이 넘는 그림자가 베이고 나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있었다.
얼어붙고 말라죽은 나뭇가지에서 꽃이 연달아 계속 피어났고.
작은 반경에 들어온 그림자들은 흩날리는 꽃잎 하나하나에 베이고 있었다.
삼백 마리의 그림자가 사라진 뒤.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던 남자는.
겨울이리를 넘어서 일만의 그림자 전체를 쑤욱 훑어봤다.
그 눈빛에.
한때 자신의 백귀야행을 이끌던 동방의 늑대는 3년 전에도 느끼지 못했던 지독한 공포를 느꼈다.
* * *
‘돌아오지… 않아?’
낯설었다.
지금까지의 싸움은 오로지 힘이 늘어나기만 했다.
그림자들은 불사不死.
이미 육신이 죽었기에 다시 죽지 않는다는 것과도 다르다.
나라는 그릇만 있다면.
혼백을 치는 주술과 칼에 맞아서 베이고,으깨지고,흩어지더라도.
다시 나라는 그릇에 담겨 새로운 형상으로 구성된다.
그 과정에서 서로 섞여 자아들이 무뎌지더라도.
용량은 변하지 않는다.
죽어도.
다시 죽어도.
자신을 잃어버려도.
영원히 나의 일부다.
무한히 이어지는 영속의 노예.
그런 힘의 그릇을 찾을 수 없기에 초롱너울이 이론상으로만 꿈꿔 오던 요원妖原의 주술과.
도깨비왕이 요괴들의 혼을 묶었던 봉납奉納의 제사가 서로 복합되어 만들어진 초월적인 신비.
그러나.
꽃잎에 베인 그림자들의 ‘분량’은 완전히 사라졌다.
나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순식간에 300마리분의 그림자가 소멸되었다.
〈왕이시여,달의 힘을……!>
도깨비왕이 간청한다.
이제 남자를 덮치는 것은 요괴의 망령들뿐만이 아니다.
세계가,어두워진다.
달은 땅을 공평하게 비추지 않고.
마치 어딘가의 채광採光처럼.
오직 남자를 향해서 집중적으로 내리쬐고 있었다.
푸르고 깨끗한 달빛은.
지상의 더러운 것을 닦아내고.
소독하겠다는 것처럼 남자를 향해 날카롭고 내리쬐고 있었다.
달은 나의 편.
달빛에 닿은 순간 남자는 ‘오염’으로 판단당해서 살균당한다.
하지만 남자가 허공에서 피워내는 꽃잎은 사그러지지 않았다.
오히려.
신성의 편협함과 한계 같은 건, 충분히 관찰해 왔고.
이해한다는 것처럼.
남자가 흩뿌리는 꽃잎은 달빛을 받으며 더욱 생기를 얻었다.
위에서는 달빛에 젖어 새하얗게 흩날리고.
땅 아래에서 솟아오르는 질척하고 음습한 요기 속에서도 오히려 꽃은 찬란하게 피어났다.
그림자들의 새카만 악의 속에서 꽃잎은 파랗게,연보라로,초록으로, 서로 다른 꽃들로.
달빛과 그림자 속에서.
마치 그것들을 먹어치우는 것처럼 열 겹으로 스무 겹으로 피어났다.
그리고.
남자는 내 쪽을 똑바로 바라보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 이변에 경악하면서.
‘나’는 역설적으로 생각한다.
이자는…….
‘인간이다.’
그림자들을 관통하는 자기 안의 요성妖性으로 꽃을 피우고.
달빛에 지지 않는 신성神性으로 꽃을 피우면서도.
이쪽을 향해서 똑바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오는 저 모습은.
틀림없는,인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