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391화 (391/458)

475화 눈먼 달,지는 꽃 (52)

그림자들이 사라진다.

육신은 이미 소멸해 형태도 없고, 이제 힘과 악의와 유홍만 남은 채 내게 담긴 망령들이다.

가볍게 휩쓸고 지나는 것만으로도 인간이 요妖에 눈을 뜨게 만들고.

눈에 들어가서 환상을 보여 주고, 귀에 들어가서 죄악을 속삭이면.

바름을,정의를,명예를 믿던 강한 인간들마저 수백을 미치게 만들어 왔던 사귀들이다.

성벽으로도,방패로도,퇴마사들의 주술로도 막을 수 없던 그 무수한 그림자들이.

말라죽은 나뭇가지에서 흩날리는 꽃잎에 소멸된다.

달빛도 스러지고 있었다.

땅을 흔들고,바다를 범람시키고, 더러운 얼룩을 없애듯 적을 내리쬐 지워 버리던 달빛이다.

피할 수도 벨 수도 없는 달빛이 흩날리는 꽃잎에 먹혀서 지워진다.

그림자도.

빛도 벨 수 없는 게 당연한데.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힘의 크기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가라.’

칠백의 그림자를 사방에서 다시 쇄도시켰다.

하늘에서,땅에서,사방에서.

검은 파도가 덮쳐 왔다.

그리고.

- 스륵.

가지를 가만히 들고 있던 남자는, 그것을 처음으로 길게 흔들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한 바퀴.

- 파사삭.

서른의 망령들이 말라붙은 겨울 나뭇가지에 베여 사그라졌다.

남자는 계속 앞으로 다가왔다.

그림자들이 손으로 할퀴면 손을, 이빨을 들이대면 이빨을 베어냈다.

그 뒤의 이백이 사라졌고.

이백이 사라졌다.

선두의 그림자 일천은 흩날리는 꽃잎에 완전히 흩어져 버렸다.

제대로 반항할 수 있었던 망령은

단 하나도 없었다.

동방을 휩쓸던 그림자들이 고작 한 명의 인간에게 거꾸로 휩쓸리고 있었다.

피는 꽃.

떠도는 꽃.

타오르는 꽃.

날아오르는 꽃.

깜빡이는 꽃.

홀연한 꽃.

환한 꽃.

달빛에 반짝이는 꽃잎이.

어둠에 자라나는 꽃잎이 날개를 부딪치며 사방을 온통 흘러다니고 있었다.

볼 수 있는 건 꽃잎뿐이었다.

일천의 그림자를 휩쓴 꽃잎들은 황야를 덮은 9천의 그림자를 향해 날려왔다.

다시 그림자 열여섯이 사라지고, 스물여덟이 사라지 고,마흔아홉이 사라지고, 일흔일곱이 사라지고, 하나가, 하나가,하나가 사라졌다.

그림자의 1/5이 사라졌을 때.

1만의 군령群靈 속에서도 자아를

유지하던 강력한 망령들은 남자와 거리를 벌렸다.

〈괴물이다.〉

〈단순히 덮치는 걸로는 안 돼.〉

〈힘으로만 밀어붙이지 마라.〉

〈기다려,저주다.〉

〈주술을 써.>

〈구부러져라!〉

닦아세우는 올무.

비릿하게 베는 낫.

찢기기 쉬운 춤사위.

입을 벌리는 그물.

십여 개가 넘는 극악한 주술들이 한 번에 남자를 덮쳐 왔다.

〈이거나 처먹어라!〉

잠깐 묶인 순간.

불망을아씨가 던진 불꽃이 남자의 얼굴로 똑바로 날아왔다.

주먹만 한 크기의 불꽃은 남자에게 부딪치는 순간 연쇄적으로 터져서 집채만큼이나 커졌다.

스스로 증식하며 타오르는 불꽃은 반경 이십여 미터에 샛노란 화환을 피워 올린다.

주위의 공기가 모조리 빠직거리며 노란 폭력으로 빨려가고.

그림자들은 훌쩍 뒤로 물러나서 그 광경을 바라보는 순간.

- 서걱.

당하는 순간 멍하니 입을 벌리고 저주에 최대의 타격을 받게 되는 ‘입을 벌리는 그물’을 썼던 망령은 입에 칼이 꽂혀 사라지고.

목과 사지를 각각 반대 방향으로 잡아당기는 ‘찢기기 쉬운 춤사위’를 시전한 망령은 몸이 다섯 조각으로 찢겨 사라지고.

한번 박힌 이상 끝까지 추적하는 '비릿하게 베는 낫’을 던진 망령은 도망치다가 안쪽에서부터 온몸이 온 방향으로 베여 죽고.

어디로 움직여도 속박이 점점 더 강해지기만 하는 ‘닦아세우는 올무’를 시전한 망령은 알 수 없는 압력에

사방에서 짓이겨지고 있었다.

자아를 유지하던 열 마리의 망령이 사라졌다.

도망가는 색동옷의 그림자를 쫓아, 남자는 자기를 태우던 불꽃을 밟고 뛰어왔다.

그리고 허리에서 빼든 칼을 들고 휘둘렀다.

또 하나의,그림자가 죽었다.

〈저게 대체 뭐야……?>

〈양팔을 잘랐던 놈인데…….>

〈뭐? 누군데?〉

〈3년 전이다.>

〈맛있어 보이던 인간이잖아.>

〈강하기는 했는데… 말도 안 돼!>

기억이 계속 살아나고 있었다.

3년 전을 넘어.

그 이전까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놀라운 모습을 보이면서도.

남자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에 모든 것을 건 것 같지는 않았다.

아득한 기억 속에 있던 집요함.

자신을 배 위에서,동굴 앞에서,

산장으로 쫓아왔던 집요한 광기.

자신을 베고,부숴 왔던 그것이 사라진 상태로도 남자는 차분하게 거리를 좁혀 온다.

오히려 그편이 더욱 두려웠다.

이게 상대에게는 특별한 움직임이 아니라는 사실이.

어쩌면 자신을 이해한다는 듯이, 기묘한 눈빛으로 나를 향해 차분히 다가오고 있었다.

원한도,증오도, 복수도,분노도. 담겨 있지 않았다.

망령들에 대한 이해로.

검기조차 없이 휘두르는 검으로,

그림자를 먹고 다시 꽃을 피운다.

‘이대로라면 위험한데.’

一 저벅.

인벤토리를 허공에 펼쳐 밟으면서 걸어 올라갔다.

다시 느껴지는 안정된 부유감.

‘3년 동안 뭘 했는지 몰라도.’

이 위치라면 나는 공격받지 않고, 일방적인 유린이 가능하다.

인벤토리를 겹치고,겹쳐.

한 자루의 창으로.

원뿔의 형태로 집중시킨다.

‘5배.’

단 한 번의 공격.

뭐에 당했는지도 모르고 녀석이 만신창이가 되었을 때보다 한층 더 영역을 집중시켰다.

‘7배.’

가장 단순하고 효과적인 형태로.

10배.’

최대한으로 짙어진다.

오래 유지하기 어려울 만큼 높게 압축된 인벤토리가 쏘아진다.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공간.

조용히 뻗어 나가는 ‘파괴.’

이거라면 단 한 번에 부스러기로 전락해 버리겠지.

멈추지 않고 다가오던 남자는.

그 영역을.

왼손에 든 평범한 철검으로,

一 서걱.

베어냈다.

영역이 조각났다.

왼손의 철검을 한 번 휘둘렀는데,

내 영역이 다섯 조각으로 갈라져, 위로,둘씩 옆으로 흩어졌다.

상대를 파괴하는 창을 상상했다.

내 영역에 대한 권리는 나에게만 있을텐데.

‘말도 안 되는……!’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다.

‘착각인가?’

- 과과과과과광!

서둘러 뇌전의 영역을 만들었다.

공기의 절연조차 일어나지 않는

뇌창雷槍이 수십 발 날아갔다.

“아까가 훨씬 나았다.”

- 스륵.

한 걸음 앞으로 발을 내디디며, 남자가 칼을 휘둘렀다.

번개를 묶고 있던 ‘매듭’이 베이며 수십 발의 뇌창이 허공에서 산산이 흩어진다.

그 너머로,

딛고 서 있던 ‘영역’마저도 잘려서 바닥에 떨어졌다.

완전히 예상하지 못한 추락으로

튀어오른 홁이 몸에 묻었다.

흙은 몸을 일으키자 흘러내렸다.

하지만 남자가 방금 뭘 베었는지 알아차리고 느낀 경악은 어디로도 흘러내리지 못하고 깊숙이 박혔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저 거리에서 내 영역을 베어냈다.

베려 한다면 벨 수 있다는 건가? 정말로?

나를.

내가 만들어 내는 영역이라는 건, 절대적인 게 아니었던가.

‘아니……

깨닫는다.

절대적인 게 아니다.

영역이 조각나며,

내 영역이 힘으로 밀렸던 기억이 솟아난다.

‘바싸고……

마계의 침식지역에서.

마왕의 압박은 내가 만든 영역을 짓이기며 밀려왔었다.

보이지 않는 압박의 틈에 끼어서 앉지도 서지도 눕지도 못한 채로 영원히 갇혀 있을 뻔했다.

비참하게.

‘그렇다면 설마,저 녀석이……

눈앞의 인간이.

제3좌의 마왕처럼.

내 영역을 부술 수 있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그건 별다른 기준도 의미도 없는 상식이란 걸 완전히 부숴 버렸고, 그 너머로,

- 서걱.

왼팔이 잘렸다.

‘이런 게……!’

가능한 공격인가?

어떻게 베였는지도 알 수 없었다.

너무 빨라서인가?

아니다.

방금 닿은 공격은 속도가 문제가 아니었다.

직선이나 곡선의 문제도.

방향의 문제도 아니다.

마치,그냥.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소리도 없고.

빛도 없었는데.

- 서걱.

다리가,베어졌다.

a | ”

황급히 인벤토리를 딛고 직감으로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면 몸 전체가 두 조각으로 갈라졌을 것이다.

“모여라!”

초롱너울이 소리친다.

- 서걱!

어깨가,무릎이,옆구리가 공격에

잘려지지만.

잘린 팔,잘린 다리에.

그림자들이 뭉쳐서 새로운 사지를 만들어 낸다.

- 서걱.

그림자로 만들어진 팔다리는 다시 잘리고,뭉쳐지고,잘리고,또다시 뭉쳐지고,또다시 베여 버린다.

두개골을 베이는 것만은 영역을 집중시켜서 피하고 있지만.

이대로라면 방어 일변도.

〈영역〉을 공격에 사용할 여력이

사라진다.

‘…떠올려라.’

어떻게 벗어났더라?

잊고 중요한 무언가.

‘단검……

기스-제-라이에게 받은 세 자루의 단검이 떠올랐다.

용의 힘을 가지고 봉인시킨 단검.

흑백의 단검을 쥐었더니 폭주해서 모든 게 끝나 버렸다.

‘그건 안 되고……

그림자가 뭉쳐 만들어진 네 번째 손으로 붉은 단검을 쥐었다.

단검에 힘을 불어넣는 방법이.

기억 속에서 떠올랐다.

용의 잔흔殘疫이라는 단검.

마왕에게도 먹히던 힘이,

[용종이 몹시 혐오하는 대상에게 목숨을 걸고 ‘숨결 개방’에 성공한 전력이 있습니다.]

[용종과의 친화도가 상당히 높은 수준입니다.]

[용종으로부터 본능적인 호의를 받고 있습니다.]

- 콰르르르르르르!

단검에서부터,그림자로 만들어진 네 번째 손을 거쳐,팔이,어깨가, 가슴까지 붉은 고대어가 긴 문장을 이루어 뒤덮었다.

M |,,

[용종의 힘을 가장 올바른 목적에 사용합니다.]

[개방 조건이 완화됩니다.]

[‘죽음을 순종시키는 불꽃’을 검의 형태로 개방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투명한 푸른 상태창 너머로.

-콰과과과과!

한껏 아가리를 벌린 노랗고 파란 불꽃이 남자를 향해 날아갔다.

칼을 휘둘렀지만.

불꽃은 완전히 베어지지 않았다.

달빛에서 꽃을 피우고 영역마저 베어 버리던 남자였지만 이 공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듯 불꽃에 쥐어뜯기고 씹혔다.

〈이 불꽃…….>

〈신성과 상극입니다……!>

〈신살에 최적화된 불꽃이라니 이런 터무니없는…….>

불꽃은 허공에서 내리쬐는 달빛과 꽃을 피워내는 메마른 나뭇가지를 동시에 포박하고 있었다.

불꽃으로 물어뜯거나 씹는 차원이 아니 었다.

공간 자체에 엉겨붙고 속박해서 〈소각〉으로 정의해 버린다.

‘이건……!’

경악이 차오른다.

기스-제-라이가 사용했을 때보다 강한 위력에 말을 잊었다.

그녀가 찾아 헤매던 용이라는 건, 원래부터.

마왕보다도.

신을 죽이기 위한 존재였던가.

용의 목적.

기스-제-라이의 목적.

‘마왕에 도전하는 네크로멘서……

그녀의 권역에서 떠오른 상태창.

‘마왕을 사냥한다는 게 아닌가?’

‘설마……

남자의 오른손에 들린 나뭇가지는 까맣게 그을리며.

오른팔이 희미해졌고.

‘기스-제-라이 덕분인가……

그녀에 대한 기억이 선명해진다.

시체에서 찾아낸 단검.

건네줬던 열쇠.

황금빛 모형.

어째서?

왜 나에게 그걸 줬지?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뭘 하고 있는 거지?’

〈비장의 한 수가 있었군!>

〈괴… 굉장했어!>

〈어마어마해! 말도 안 됐어!〉

〈방금 같은 거,혹시 더 없어?>

달빛도 꽃도 사라진 상태에서.

몸의 절반이 그을렸지만.

一 저벅.

남자는 앞으로 걸어왔다. 비틀거리지도,머뭇거리지도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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