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9화 주머니 속의 칼 (3)
‘수련……
예전에 1만 번 검을 휘둘러서 검술 레벨을 올렸던 기억이 떠오른다.
퀘스트가 떴고.
상태창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랐다.
검술 Lv.l이었나.
제대로 된 스킬을 익힌다는 것에 설레어 한 번 한 번 제대로 칼을 휘둘렀다.
반투명한 푸른 창 위에 떠오르는 메시지들이 확실한 이정표를 내게 제시했기에.
뼈가 부서질 때까지.
움직여지지 않을 때까지 검격을 반복했다.
아무 부담도 고뇌도 없었다.
알기 쉬운 보상과 길.
1만이라는 숫자에서 3만,9만,27만, 81 만으로.
칼을 휘둘러야 하는 숫자는 점점 늘어났지만.
촘촘한 징검다리처럼 놓여 나를 인도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것 따위는 떠오르지 않고.
오로지 나의 상상.
온전한 나의 계획이며 의지다.
심지어 퀘스트 따위가 뜨더라도 휘둘릴 생각은 없다.
가만히.
허공을 노려본다.
'단순한 반복은 아니야.'
이 정도 수준에 온다면.
그런 식으로 알을 깨고 나가기는 어렵다.
가장 좋은 방법은 뭘까.
‘〈재현〉이 목적이라면……
그때 상황까지 모두 재현하는 게 최적이지 않을까.
내가 깨달았던 때의 ‘상황’을.
그 세계를 그대로 이곳에 구현해 본다면.
‘인벤토리.’
- 우우응.
수백 발의 탄두를 무시하고.
하늘에 떠서 해안가로 다가오는
공작을.
수많은 요괴를.
요괴들로 만들어진 그림자 군단을 뚫고 나를 베러 걸어오는 레안드로를 ‘상상"했다.
본래대로라면.
치밀한 계산과 검토로써 짜이고, 증명되고,연습되는 수식.
단단한 틀 속에서 굳어서.
또 하나의 ‘현실’로 이미 자리잡은 정형화된 마법이 아니라면.
상상의 구현,기억의 구현 따위는 현실 앞에 찰나조차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겠지만.
인벤토리.’
그 본령은 상상과 구현을 위하여 최적화되어 있으며.
루-륨.
무한한 마력으로 받쳐 주는 이상.
천천히〈현실〉에 한 가닥 한 가닥 스스로의 상상을 짜 넣을 수 있다.
있을 터였다.
그러나.
‘이런……
- 파삭.
마력의 공급은 넘치지만.
문제는 다른 데서 나왔다.
상상의 유지.
조금만 정신을 흩트리면.
빈약하게 유지하던 상상이 푸스스 무너지고,흩어지고,휘발된다.
게다가.
상상의 원천인〈기억〉마저.
실제의 공작과,실제의 요괴들과, 실제의 레안드로와도.
아득하게 거리가 먼 단편적이고 어렴풋한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걸 상상에 집중하며 깨닫는다.
‘방향이 틀렸나.’
목적은 환경 구현이 아니다. 그때의 공격을 구현하는 것.
마력 이 나,
인벤토리가 아니라. 상상력이야말로 한정된 자원.
아이작이 괜히 내게 상상의 폭을 좁히라고 말한 게 아니었다.
‘원하는 걸 상상하기 위해서는…… 다른 부분이 채워져 있어야 한다.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직접 만들어 볼까.’
실제 정물들을 활용해서 그때의
환경을 재현하자.
재료를 찾으러 지하실을 뒤지기 시작했다.
반경 300미터의 드넓은 은신처는 풍부한 식량과 오락거리,상하수도 시설 외에도 무척 갖추고 있는 게 많았다.
‘이런 게 있군……
한쪽 벽에 놓인 거대한 자루들에 모래가 꽉꽉 채워져 있었다.
어마어마한 양이다.
뭐라도 키우려고 한 걸까?
- 스륵.
모래 포대를 그대로 쏟아부었다.
수십 포대 분량의 모래가 깔리며 해안가의 백사장을 만든다.
‘떠올라라.’
확인해 본다.
단순히 허공에 띄우는 것 자체는 이제 뭐든 어렵지 않다.
불타 새하얀 재가 된 채 해안으로 떨어지는 인간들을 만들고.
묶여 있던 레나를 빚어낸다.
조악한 모래 인형이지만.
레나라고 생각하자 감정은 생생히
되살아난다.
‘시나리오가 아니었다면… 그녀가 나를 좋아했을까?’
레나는 나에게 줄곧 이상하리만치 집착했다.
한시라도 떨어지지 않으려 했고 뭐든 다 해주려고 했다.
젊은 인간 여자라면 해골을 보고 기겁이나 공포의 반응을 보이는 게 마땅할 텐데.
‘부자연스럽지.’
처음부터 그랬지만.
새삼 그런 생각이 들었다.
딱히 잘해 준 것도 아니다.
레나의 나에 대한 감정도 모조리 시나리오가 조작한 걸까?
그런 게 가능할까?
과거를 돌이켰다.
‘상관없어.’
설령 조작된 감정이었어도 레나는 더없이 소중한 존재다.
함께했던 순간들은.
누가 끼어들었고.
어떻게 시작되었더라도.
내가 느낀 그녀의 진심들은 모두 영원으로 남는다.
하나하나를 떠올릴수록 마음속
파문은 커져 간다.
나는 레나를 소중히 간직하지만.
세계는.
공작의 검은 구슬은 그녀를 찰나에 먹어 버렸다.
그녀는 어디로 던져진 걸까.
‘다시… 살려야 해.’
보고 싶었다.
그게 아니라도 적어도 이 세계에 존재하게 하고 싶었는데.
또 하나의 영원을 꿈꾸던 생각은 날카로워지고.
그림은 점점 잔혹해진다.
공작과 레나. 죽음 직전의 연극.
공작의 밑그림 위에 인벤토리를 한 올 한 을 덧씌운다.
몸을 반투명하게 만들어서 피하는 녀석을 ‘기억’하고.
다른 위상으로 도피하면 추적해서 소멸시키는 일격을 ‘구현’한다면.
一 좌악!
내부에서부터 작은 하나의 공간이
터져 나갔다.
그 강한 반동으로 주위 300미터에 달하는 해안이.
나흘 동안 만든 그때의 재현이 한 번에 사라진다.
깨끗해진 허공을 바라봤다.
‘…이건가.’
허공은 터트렸지만.
확실히 그때의 공격을 구현했는지 알 수 없었다.
아직 미묘하다.
‘방향은 괜찮은 것 같은데.’
확실히.
이런 환경을 그려 놓는다면.
하나의 상상에 집중할 수 있다.
‘다시 해 보자.’
충격으로 흩어진 모래들을 다시 빚어내기 시작했다.
한번 빚어 보니 빨라져서 그런지 두 번째는 사흘 만에 완성.
- 콰앙!
‘…잘 날아가는군.’
세 번째는 이틀 만에.
- 과앙!
네 번째는 하루 만에 만들어 낼 수 있었다.
- 콰앙!
일곱 번째부터.
해안가을 만드는 시간은 반나절로 급격히 짧아졌다.
이제 굳이 백사장의 풍경을 전부 만들어 낼 필요는 없었다.
역설적으로.
머릿속에 있는 걸 바깥으로 꺼내 만들면 만들수록.
머릿속에 담긴 이미지는 점점 더 견고해졌다.
레나와 공작.
그 둘을 만드는 것만으로 감정과 감각을 끌어올리기 충분했다.
대신 그 둘은 더욱 정밀해졌다.
한 가닥,한 가닥.
공작의 심상을 구체화했다.
이빨 하나.
손가락 한 마디.
한을 한을을.
인벤토리로 짜 넣는다.
모래 인형의 손이 움직이고.
눈이 나를 바라본다.
더 이상 ‘소녀 공작’이 아닌.
로랑스 타르티에를 먹어 버린 자와 눈이 마주쳤다.
기스-제-라이를 찾던 두 눈.
그 눈은.
누구의 눈이지?
머리가,가슴이,온몸이 핏물로 변해 터져 나가면서도.
냉소를 지어 보이던 눈.
‘죽어라.’
- 과과광!
* * *
공작과 후작을 번갈아 그려 가며 터트리기를 반복했다.
아흔아홉 번째.
- 좌르륵.
터져서 가루가 된 몸을 다시 이어 붙이는 공작을 구현했다.
‘이미 깨달은 능력이야.’
폭파에 가속이 붙는다.
한나절에서.
네 시간까지 간격이 줄어든다.
삼백일 번째.
모래인형이 저 스스로 움직이면서 공격을 회피하기 시작했다.
팔백마흔다섯 번째.
정적.
더 이상 폭음은 없다.
깔끔한 ‘덮어씌우기’가 내부에서의 소음까지 모두 소멸시켰다.
공작 인형을 구성하던 ‘모래’들은.
흩어진 게 아니라 그 존재가 모두 완벽하게 사라져 있었다.
‘이제… 된 건가.’
처음부터 공격에 적중한 상태를 그리고.
완벽히 성공시켰다.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필사적으로 집중해야만 발동하던 권능을.
최소한 형식을 깔끔히 따라 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넓혀 볼까.’
- 스르르르..
주위 허공에 수십 구의 모래 인형을 만들어 낸 뒤.
동시에 덮어씌우고.
터트렸다.
정적.
반경 수십 미터의 영역.
그 안에서 모두 소멸한 수십 구의 모래 인형.
깨끗하게 사라진 모래알과.
눈앞의 고요한 공허空虛를 보면서 확신했다.
이제.
이 힘은 내 거다.
그나저나.
‘3개월인가……
세 번 돌린 1개월짜리 모래시계가 다해 가는 모습을 바라봤다.
처음에는 성실히 하루짜리도 계속
돌렸지만,나중에는 후작과 공작의 인형을 베어내는 데 맛이 들려서 하루짜리는커녕 일주일짜리 시계도 뒤집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스킬 이름은 없나.’
애슈턴이나 시스템의 인식 밖의 힘인지는 몰라도.
뭘 습득했다는 메시지는 허공에 떠오르지 않는다.
‘…필요 없겠지.’
어차피 공작을 소멸시키지도 못한 어중간한 힘이니까.
기술 이름 따위는.
녀석을 벨 힘을 얻고 나서 지어도
충분하다.
나름대로 성과가 있긴 했지만.
곰곰이 생각하다가 수련의 전후가 뒤바뀌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형태는 있지만.’
과연 이 모래인형들이.
실제 공작과 후작의 몇 퍼센트나 구현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5%? 10%?
그것도 너무 과하게 친 거다.
흐물흐물한 형태는 만들어져 절로 움직이지만.
그들의 본질을.
역량을.
욕망을 얼마나 담아냈을까.
‘1%… 2%도 안 되겠지.’
후작이 보여 준 세 걸음의 간격을 진심으로 베려고 한다면.
상상하는 내가.
그것부터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결국,이제부터로군.’
그렇게 다시 한 달이 지났다.
하지만 녀석이 보여 준 ‘세 걸음’은 아예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솔직히 상상도 잘 안 되네……
뭐가 보이는 게 있었어야지.
‘제일 쉬운 것부터 해 볼까.’ 본질이라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바람.
자연스럽게 발밑에서 터지며 그를 솟아올리 고.
왕꽃게의 몸통 전부를 두드리던 투명한 검기의 바람.
광역 공격이라면 그만한 권능도 드물다.
‘나도 금방 할 수 있을 텐데.’ 어차피 인벤토리의 응용이니까.
한 달이 지났다.
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회상하며 깨달은 건 하나.
녀석은 바람을 일으키지 않았다.
주위를 맴도는 바람결에 검기를 깃들게 한 걸로 보인다.
‘대체 어떤 감각인 거지……
조금씩 간질간질하게라도 진전이 있다면 희망을 가져 볼 텐데 아예 느낌이 오지 않았다.
‘미치겠군.’
심지어 검기를 얻기 위해 스스로 동굴 속에서 수련할 때 느껴지던 막막함과도 차원이 달랐다.
이대로는 1년을 수련해도.
10년을 수련해도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직감이 든다.
실마리라도 잡으려 버둥거렸지만 전혀 느낌조차 없었다.
‘그놈은 어떻게 한 거지?’
분명히 배 위에서 한 번 본 다음 따라 한 것 같은데.
'어떻게든 찾아내서 멱살이라도 붙잡고 물어볼까?’
정말 진지하게 그런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물론.
어째서인지 이 세계선에서 후작은
사라져 버렸기에 불가능한 망상에 불과하지만.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그럴 생각은 전혀 없다.
애초에 수련만이 목표는 아니다.
관찰.
30년 뒤 무슨 꼴이 나는지 볼 거다.
벽면에 빼곡한 올빼미의 부조를 흘끗 바라보며 다짐했다.
‘너보다 오래 살 거다.’
심지어 전혀 성장하지 않더라도 버틴다.
그나저나.
수련이 티끌만 한 성과도 없으니
정신적인 피로가 쌓인다.
- 털썩!
나는 한쪽에 놓인 거대한 소파에 주저앉았다.
‘책이나 읽을까.’
인벤토리에 가득한 캐빈 애슈턴의 책을 점검했다.
이제 경계하기로 결심한 존재.
캐빈 애슈턴의 책이지만.
담긴 정보나 성향 같은 걸 떠나서
책 좀 읽는다고 손해 볼 건 하나도 없지 않겠는가?
인벤토리에 있는 동방에서 얻은 황금빛 열쇠를 잠깐 들여다보다가, 애슈턴의 책을 한 권씩 꺼내어 다시 읽으려고 할 때였다.
“ •••응?”
지하로 내려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실수로 호출 신호를 보냈나 싶어 레버를 살펴봤다.
다섯 달 동안 소란스럽게 수련에 열중하긴 했지만.
두꺼운 철판 차단기 뒤에 자리한 레버는 그대로였다.
‘어떻게 된 거지?’
기척은 멈추지 않고 지하를 향해 똑바로 내려오고 있었다.
묵직한 경계심이 올라온다.
발각된 건가.
혹시 넥스몬드에게 넘긴 동방의 유물들이 화근이 되어 누군가에게 추적당한 걸까?
최악의 경우는… 공작에게.
하지만 넥스몬드 선장이 그렇게 허술할까.
혼자만 나를 알고 싶다고 했으니 여기저기 떠벌리진 않았을 텐데.
하지만 공작의 터무니없는 능력과
영향력을 생각하면 결코 안심할 수 없었다.
나는 1년짜리 커다란 모래시계를 바라봤다.
아직 절반도 돌아가지 않았는데. 설마 여기서 끝나는 건 아니겠지? 일정한 발걸음 소리.
一 저벅. 저벅. 저벅…….
가까워진다.
폭발음이나.
거칠게 부수는 소리.
기관장치가 작동하는 소리 따위는 한차례도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