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0화 주머니 속의 칼 (4)
‘대체 누구지?’
불안했다.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정확히 기척이 느껴지는 거리는 아니었다.
조금 전까지 레안드로의 기술을 연마하고,계속 생각하고 있어서 그런지.
혹시 녀석이라면 어떨까 싶었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추측이다.
애초에 레안드로 폰 바티엔느는 세계선에서 완전히 사라진 상태다.
역시 빙의된 공작일지도 모른다.
위상까지 넘나드는 능력을 가진 녀석인 데다.
공작의 지위로 유령도 자연스럽게 부릴 수 있다.
5개월 동안 찾아내지 못할 것도 없겠지.
저번 생이야 공작에게 추적당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동방이 아니다.
공작의 손이 내게 뻗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지금 자살해 버릴까?’
죽는 거야 죽으면 되지만.
능력을 추출당하거나 오래 붙잡혀 더 험한 꼴을 당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그러고 싶진 않았다.
공작이 내려오면 어떻단 말인가? 설령 눈앞에 나타난다고 해도.
‘죽을 시간은 있어.’
무한히 재생한다고 해도.
최소한 녀석을 한차례 터트려서 자살할 시간은 만들 수 있다.
해 봤던 일이다.
그때의 힘을 수련으로 되새겨서
얻어냈으니까.
그 경우에도 대처는 가능하다.
‘어쩌면……
사방에 조각된 올빼미들이 눈을 부라린다.
의외로 아몬일지도.
‘애초에 이곳의 주인이었지.’
마왕 강림까지 10년은 남았지만 모를 일 아닐까?
이미 제국 남부 지하에서 마계의 침식은 활발히 일어나고 있다.
연합이라고 안전할 리는 없다.
티는 나지 않지만.
어쩌면 이곳도 침식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아몬이 내려올 가능성에 대비해 자살해야 할까?
‘아니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바싸고에게서도 벗어났어.’
회색빛 구의 형태로 간접 강림한 녀석에게도 벗어났다.
용의 단검에 깃든 힘을 사용한다면 마왕이라도 타격을 줄 수 있다.
그 힘에 휘말려서 나까지 부서져 버렸지만.
어차피 마왕과 조우한다면 자살이 목적이니까.
최악의 경우를 다 상정해 본 나는 기척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리고.
감지될 만한 거리에 들어왔을 때, 나는 모든 긴장이 탁 풀려 버렸다.
‘뭐야,넥스몬드잖아……
그가 혼자서 기계장치를 부드럽게 해제하면서 내려오고 있었다.
온갖 억측을 다 해봤지만.
정작 가장 당연한 경우는 생각하지 않았다.
‘녀석인 게 가장 자연스럽지.’
아무리 은신처를 구했어도.
5개월이나 연락 없이 숨어 있으니 궁금했겠지.
이번 기회에 찾아을 필요 없다고 말해 줄까 싶다.
- 드르륵.
부드럽게 문이 열리고 넥스몬드가 모습을 드러낸다.
“오랜만이군.”
“잘 계셨습니까?”
“뭐… 평온하긴 한데.”
“혹시 필요한 건 없으십니까?”
“딱히.”
어디서 후작을 구해 줄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녀석과 여기에 머물며 수련한다면 엄청난 효율로 강해지겠지.
물론,그런 건 무리다.
“그렇군요……
우스운 상상을 하며 고개를 젓는 나를 보고 선장이 말을 흐렸다.
안색이 묘하게 어둡다.
필요한 게 없다고 해서 그런가.
아니,처음에 문을 열 때부터.
무언가 고뇌에 빠진 듯 분위기가 별로 좋지 않았다.
“무슨… 다른 할 말이라도 있나? 이곳에는 왜 온 거지?”
온갖 상상에 빠져 긴장하던 일이 민망해서 괜히 녀석에게 딱딱하게 물었다.
“갑자기 방문드려 죄송합니다만, 상황이 조금 곤란해졌습니다.”
“곤란하다고?”
“곤란하달까……. 고객의 판단 없이 결정할 수 없는 사안으로 생각되어 확인을 얻으러 왔습니다.”
‘뭐야?’
대충이라도 예상되는 건 조금도 없었다.
빤히 바라보자 넥스몬드가 이마를 살짝 흠쳤다. 손등에 식은땀이 얕게 맺혀 나왔다.
그가 고개를 앞으로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를 믿고 맡겨 주신 임무이니만큼 제 선에서 깔끔하게 처리하고 싶었습니다만……
“은신처에는 만족하고 있는데.”
만족 이상이다.
오히려 생각보다 훨씬 더 훌륭한 장소를 얻었다.
하지만 넥스몬드는 숙인 고개를
좀처럼 들지 못했다.
“절대 찾을 수 없어야 은신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혹시… 카린 크렉소르라는 여자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으음?”
물론 기억하긴 하지만.
갑작스럽다.
왜 그 여자 이름이 튀어나올까.
시나리오도 방치하고 경매장에서 깔끔하게 무시하고 왔는데.
나랑 아무런 상관이 없을 터다.
“카린 크렉소르가 왜?”
얼마나 잠을 제대로 못 잔 걸까.
아래쪽까지 다크서클이 내려앉은 눈가를 살짝 어루만지며.
“그 여자를 슬슬 죽일까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몹시 피곤한 목소리로 넥스몬드가 중얼거렸다.
“… 뭐라고?”
“뒷감당이 쉽지만은 않겠지만…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밑도 끝도 없이 황당한 소리였다.
“정리하자면.”
간략한 설명을 들은 나는 한층 더 황당한 기분이 되었다.
“카린 크렉소르가 5개월 전부터 내 뒷조사에 몰두하고 있다고?”
넥스몬드가 무겁게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간히 시달린 듯하다.
“뒷조사라기보다 아예 앞조사라고 말하는 편이 정확하겠군요. 아니, 앞뒤 조사라고 할까……
“그때 경매장에서 헤어지신 후로, 카린 크렉소르는 일정을 변경하고 이 항구에 머물며 곳곳을 들쑤시고
있습니다. 인맥을 부르고 재산을 탕진하며 밤낮으로 애타게 손님만 찾고 있지요.”
어이가 없었다.
“이유가 뭐지? 경매장에서 잠깐 얽힌 게 전부 아닌가.”
아니.
합해서 3시간도 안 되는 시간을 경매장에서 보냈을 뿐인데 그런 걸 얽혔다고 말하기도 무리다.
그게 뭐라고 이렇게 질척인다는 소리인가?
“모르겠습니다. 지금 상황이 무척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긴 합니다.
연합과 제국 사이의……
“전쟁?”
그럴 때가 됐다.
이제 반년도 남지 않았으니까.
“알고 계시는군요. 이제는 기정 사실화된 단계죠. 전쟁을 대비해서 다양한 세력이 인재를 모으는데… 그 명목으로 손님을 찾고 있기는 합니다.”
기억에 따르면 의회 결산위원회 소속인 그녀는 최고 참전위원으로 최정예 기갑여단과 동행한다.
‘전쟁이 목전이라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텐데.’
경매장에서 잠깐 만난 나에 대해 대체 뭘 안다고 시간을 소비한다는 이야기인가.
‘처음 만났을 때도 아니고.’
그때에는 아이작의 지휘를 받아 전장에서 신화적인 전과를 올리게 만들어 줬다.
그때라면 이런 집착이라도 충분히 이해되지만.
이미 아득히 멀어진 세계선이다.
전쟁도,전과도.
아이 작도.
〈없었던 것〉이 되어 버렸다.
내 기억에서만 존재할 뿐.
나는 씁쓸하게 물었다.
“짐작 가는 것도 없겠지.”
“•••예.”
씁쓸한 어조를 질책으로 착각했는지 넥스몬드가 머리를 더 숙였다.
“미행도 붙이고,도청도 계속해 봤습니다만,합리적인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그나마 추측하기로는……
넥스몬드가 민망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간다.
“아마… 그녀의 뭔가를 단단히 건드리셨나 봅니다.”
“대체 뭘 건드렸단 거지?”
“승부욕이랄지, 모욕감도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손님을 찾아도 찾아도 실마리조차 나오지 않으니, 이제는 거기서 한층 흥미를 느껴, 찾는다는 행위 자체에 사명감까지 가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본인도 설명하며 말이 안 된다는 걸 느꼈는지 표정이 점점 어두워진다.
계산적인 성격의 명문가 의원이, 몇 시간 마주친 상대를 5개월 동안 필사적으로 찾는다니.
“저희에게도 의뢰가 들어왔습니다. 아직은 말단 점조직에 선이 닿은 수준입니다만. 만약 카린이 자존심을 버리고 가문에 본격적으로 도움을
청하고,크렉소르 가문이 그것을 받아들인다면,상인 연합 수뇌부에 닿을지도 모릅니다.”
이게 얼마나 위험한 건지 선장이 설명을 이어 간다.
크렉소르 가문은 의회 내에서도 하나로 뭉치지 않고 여러 파벌이 나뉜 녀석들이다.
도움을 요청한다면.
거기 응하는 건 피도 눈물도 없는 가주家主,부친이 아니다.
후계를 경쟁하는 피붙이들이 모두 기꺼이 달려와 도와준다.
나약함을 드러낸 그녀를 상속에서
한참 뒤로 미는 걸 목표로.
‘하긴……
카린이 공을 세우는 걸 가로채려 움직였던 크렉소르 가의 사병들이 떠오른다.
전쟁이 코앞에 닥쳤는데 이상한 데 정신이 팔린 카린을 부각할 기회.
일이 시끄러워질 거다.
“저희 수뇌부 가운데는 이 장소의 존재를 아는 녀석들도 있습니다. 손님이 여기 계신 건 물론 저 혼자만 알고 있습니다만… 이 도시에서 귀신같이 사라지신 이상 아무래도 이쪽을 집중해서 찾아보겠죠.”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
무엇보다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며
들쑤시고 다니는 게 크다.
제국까지 소문이 퍼지면.
공작이 관심을 보일지도 모른다.
녀석이 이 도시로 오는 결과만은 결코 사양하고 싶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시나리오를 방치하면… 발목을 잡는다는 건가?’
어쩌면 이건 캐빈 애슈턴의. 시스템의 의도일지도 모른다. 시나리오의 강제적인 진행.
‘아니,꼭 그런 것만은 아닌가.’
루비아를 떠올려 보면 굳이 그녀를 영주로 만들 필요는 없었다.
루비아를 영주로 만들지 않았다고 위협받거나 발목이 잡히는 일 따윈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끊임없이 고통받을 뿐.
내 입장에서만 본다면 시나리오를 관두는 편이 오히려 훨씬 편했다.
‘지금은,반대로……
시나리오를 하지 않기 위해서.
카린이라는 여자를 살해해서 입을 닫아야 하는 걸까.
‘싫군.’
음울한 감정이 치밀어 올라온다.
나와 상관도 없는 여자의 생명에 가치를 두지는 않는다.
그런 것보다야 당연히 내 30년이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하다.
하지만.
〈별 상관도 없다>는 부분이 묘한 불쾌함을 넘어 분노를 일으킨다.
별 상관도 없는 여자의 모든 게.
이성도,감정도,운명도 내 쪽으로 모조리 휘말려 버렸다.
고귀한 가문인 그녀에게 처음으로 함부로 대해서?
경매장에서 쉽게 낙찰을 받아내는 모습이 인상적이라?
5개월 동안 모든 일을 내버리고 매달릴 정도로?
어지간한 넥스몬드도 당황할 만큼 집착하는 걸 당연하게도 정상으로 볼 수는 없다.
시나리오화.
그녀가 내게 꽂힌 건 시나리오의 농간이다.
애슈턴이 만든 시나리오 때문에, 얼굴도 본 적 없는 내게 집착하는 카린 크렉소르는 얼마나 나약하고 슬픈 존재인가.
애초에 마음이라는 게 정말 있기는 한 것인가?
굳이 그녀를 동정하지도 않지만.
죽이고 싶은 마음은 더욱 없었다.
“그녀와의 만남을 주선해 줘.”
그 말을 들은 넥스몬드의 표정이 갑자기 확 밝아지더니,한순간에 다시 어두워졌다.
“뭐야 그 표정 변화는?”
내장의 절반이 기계장치인 선장이 머쏙한 표정을 짓는다.
“별건 아닙니다. 5개월 동안이나 카린 크렉소르가 애타게 찾던 분을 데려온다면… 카린은 제 능력을
무척 신뢰할 겁니다.”
“그래서?”
“…장래성이 있는 거래처 하나가 생기는 셈입니다. 하지만 손님이 다시 은신하고 싶어 하시면,저를 신뢰하는 카린을 죽여야 하겠죠. 그 생각에 조금 찝씹했습니다.”
나는 손을 저었다.
“…안 죽일 테니까 그런 걱정은 접어 둬.”
결정을 내렸다.
일단 이 시나리오는 끝낸다.
나에게 휘말린 녀석들.
시스템에서 이식받은 가짜 호감을,
가짜 집착을,가짜 애정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피해자들이.
쓸쓸하게 죽어 나가는 모습까지는 결코 보고 싶지 않다.
심지어 내가 살해하는 일 따위는 생각하기도 싫다.
애슈턴의 농간이든.
뭐가 됐든.
빨리 끝내 버리자.
세계의 미래를 보기 전까지.
내가 진행하는 마지막 시나리오가 될 것이다.
- 달그락.
자리에서 일어났다.
굳이 지체할 이유는 없다.
“바깥은 좀 어떻지?”
대략의 역사는 알고 있지만.
상인 연합 간부의 시선은 상황을 다른 각도로 볼 수 있게 해 줄지도 모르니까.
“일단 제국도 연합도 최전선에 설 철인을 확보하기 위해 난리입니다….”
뭔가.
위화감이 느껴진다.
“으음? 제국이?”
제국은 원래 철인 따위를 전쟁에 사용하지 않았다.
검주와 그들을 따르는 기사들이 최전선에 섰고.
그 뒤를 마법사들이 받쳤다.
‘숨겨 놓은 게 있기는 한데……
비역 지하의 숨겨진 타이탄들은 전선이 밀릴 대로 밀린 상태에서도 숨겨진 상태였다.
제국을 넘어.
인류를 팔았다고 공언한 지하층의 〈동료> 들.
그런 걸 제국의 전력으로 칠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의문을 표하기도 전.
이어지는 넥스몬드의 말을 듣고, 나는 기껏 일어선 자리에 석상처럼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습니다. 연합은 일곱 가문의 주도하에,제국은 준 초월급 타이탄 〈오베론>의 파일럿 데서리 바티엔느의 주도 아래에 철인 여단을 편성하고 있지요. 이들의 격돌이 전쟁 초의 향방을 가를 겁니다.”
“데서리… 바티엔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