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397화 (397/458)

481화 주머니 속의 칼 (5)

데서리 바티엔느.

그 이름을 듣자 충격을 감출 수 없었다.

‘후작의 모친이잖아?’

정작 레안드로의 입에서 들은 적은 없지만.

레나가 후작에게 접근하기 전에, 뒷조사를 할 때 그의 가족에 대해 자세히 말해 줬다.

근위기사단장 데서리 바티엔느는 후작이 아홉 살 때 사망했다.

‘어떻게 아직 살아 있는 거지?’

원래의 세계선보다 무려 20년이나 오래 살아남아 있다.

게다가 타이탄의 파일럿이라니.

이런 극적인 변화라면.

후작이 존재하지 않는 게 영향을 끼친 효과라고밖에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왜 그러십니까?”

문득 머릿속에 한 가지 가설이 스쳐 지나갔다.

“준초월급 타이탄은… 얼마나 강한 거지?”

넥스몬드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미 아는 정보를 왜 묻냐는 듯한 눈빛이다.

“타이탄에 대해서는 정말 몰라. 말해 줘.”

전쟁에 개입했을 때.

철인들과는 질리게 싸워 봤다.

무수히 부숴도 봤다.

하지만.

〈동력 엔진에 루-름도 거의 보급 되지 않은 채거든. 진짜는 다 따로 있다는 소리지.〉

철인들의 시체에서 소량의 루-름을

흡수하던 때 아이작이 하던 말이 떠오른다.

기계공학과 생물학.

연금술과 마도의 정수를 한곳에 집결한 마장기魔裝機인 타이탄과는 정작 제대로 싸워 본 적 없다.

제국 비역에서 레안드로와 함께 숨겨진 타이탄들에게 칼을 맞대긴 했었지만.

내부가 ‘텅 비어 있던’ 타이탄들이 과연 몇 할의 위력을 발휘했는지 확신하기는 곤란하니까.

“그럼… 일단 설명드리겠습니다. 데서리 바티엔느가 탑승한 오베론은 순수 물리력만 최정예 기사단 하나와

맞먹습니다.”

“한… 기가?”

“그렇습니다. 기체에 내장된 마력은 거칠게 계산해서 아쥬라의 마법사 열 명 분은 충분히 되고요.”

보통 규격의 철인은 마법 같은 건 사용하지 못한다.

동체를 움직이는 데만도 루-름을 모두 소진해 버리니까.

그런데 마법사 열 명분이라니.

'대체 얼마나 차이가 나는 거지?’ 기스-제-라이와 맞서던 아쥬라의 마법사들 한 명 한 명을 떠올렸다.

가짜 황제라고는 해도.

황제를 호위하는데 고작 셋밖에 따르지 않던 수준의 녀석들이다.

기스-제-라이조차 그들의 존재를 신경 써서 안티 디바인의 만다라를 세심하게 그려 놓았다.

그런 마법사들 열 명분의 마력이 하나의 쇳덩어리에 깃들어 있다고, 넥스몬드는 설명하고 있었다.

“…또한 타이탄 오베론은 영혼을 갖고 파일럿과 공명하며 성장하는 존재입니다. 파일럿의 영혼과 서로 연결되어 성장에 영향을 받기도 하고, 반대로 오베론이 파일럿에게 영향을 주기도 하죠. 즉 파일럿은,오베론의 영향으로 성장이 빨라지는 동시에,

그 성장이 오베론 자체에도 영향을 끼쳐 두 배로 강해집니다.”

압도적인 성장력까지.

모든 사실이 하나를 가리킨다.

“검주 한 명 이상이겠군.”

“…물론입니다.”

“데서리 바티엔느가 오베른 개발에 어떤 역할을 한 거지?”

“개발 자체는 할비 팔커스 남작이 주도했습니다. 부인과 육체와 혼에 완벽에 가깝게 싱크로되는 기체를 만들기 위해 일생을 갈아넣었죠. 다른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고, 오직 데서리만 탑승 가능한 기체.

그들은 오베른을 완전히 살아 있는 자식으로 생각합니다.”

부친은 개발자.

모친은 파일럿.

우연일까?

레안드로의 자리를 그의 양친이 대신 충실히 메우고 있었다.

‘어쩌면……

이 세계에는.

관성이 존재하는 걸까?

변경사항에 대한 자체적인 보정으로 제국과 연합의 균형이라든가.

어떤 힘의 총량을 유지하는지도 몰랐다.

자리를 차지하는 이들의 이름만 바뀐 채로 큰 흐름은 계속 그대로 흘러가도록.

‘하지만……

다른 빠진 것과 바뀐 것이 문득 머리에 떠오른다.

나냐우와 레나가 사라졌을 때.

T&T는 트로핀 여단으로 대체되어 존재했는데,제국에서는 그 지부가 아예 사라져 버렸다.

‘메꿔진 건……

제국에서 그녀들의 자리를 메꾸는 존재 따위는 없었다.

그대로 사라진 채였다.

세계의 흐름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존재라서 그런 걸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무엇보다 큰 세계의 흐름이라면 단연 마왕 강림이다.

하얀 후드를 만났을 때.

녀석은 마왕 강림이 10년이 아닌 2년 뒤에 일어난다고 말했다.

지하의 마계 침식 상황을 본다면 하얀 후드의 말은 충분히 신뢰해도 될 것이다.

‘세계선에서 아이작이 사라졌기에 일어난 결과겠지.’

주술사 아이작이 생전에 적대했던 상대는 여신들만이 아니다.

자신의 교단이 아닌 무리.

다른 마왕을 승배하는 무리들과 갈등이 생기면 가차없이 유린해서 약화시켰다.

제단을 파괴됐고.

강림을 위해 흘러들어 가던 마력을 봉쇄했다.

그런 존재가 사라졌기에 강림이 당겨졌을 터인데.

‘보정되지 않았어.’

아이작은 그 무엇으로도 메꿔지지 않았다.

세계의 ‘보정’이라는 것은 어쩌면, 마왕 강림이 빨라지는 방향일 때는 발동하지 않는 게 아닐까.

이번 경우도 그럴지도 모른다.

‘레안드로 자신은 참전하기 전에 사망하지만……

녀석이 손수 키워낸.

제국 최강의 푸른 사자 기사단이 빠져 버린다면.

아무래도 두 국가 사이의 전력의 균형이 무너지고.

한쪽으로 힘이 쏠리면 마왕들이 곤란해진다.

지금은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를,

T&T 제3 본부장 사슴 아에자르를 떠올렸다.

〈바로 그분에게! 인간들의 피와 절규를 바칠 생각이라네. 제사는 준비되어 있어. 공양받은 왕께서 강림하시면… 인간은 끝이라네.>

어느 쪽도 빠르게 무너지지 않는 싸움이어야 마왕 강림에 필요한 피가 충분히 흐르기에.

이 세계선에서 레안드로의 모친이 아들의 자리를 메꾸고 있다.

‘물론,상상일 뿐이지.’

어차피 지금 단계에서는 뒷받침할 아무런 증거도 없는 막연한 추측에 불과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십니까?”

“아… 그냥.”

앞에 넥스몬드를 세워 놓고 다른 생각을 너무 오래 하고 있었다.

“연합도 타이탄이라는 녀석들을 가지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사실 타이탄 전력은 전통적으로 연합 쪽이 더 강하죠. 공식적으로 존재하는 건 열셋……. 하지만 각 가문이 오랜 세월 동안 숨긴 것까지 합한하면 얼마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타이탄이라.’

머릿속에 생각이 튄다.

연합에서 활동한다면 그들에 대해 자세히 파악할 수 있을거다.

레안드로가 사라진 세계선이다.

이 세계선이 유지된다면.

타이탄이라는 녀석들이 활약하는 모습을 앞으로 계속 보게 되겠지.

알아서 나쁠 건 전혀 없었다.

“데서리 바티엔느가 탑승하는… 오베른은 연합의 타이탄들에 비해 강한 편인가?”

넥스몬드가 단호히 끄덕였다.

“크렉소르의 가주가 가진 기체만 제외하면 모두 오베른보다는 출력 자체도 약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팔커스 남작이 기적을 일으켰지요. 실전에서 중요한 동기화 수준까지 데서리 바티엔느가 다른 파일럿들보다 훨씬 더 뛰어나고요.”

“흐음……

그 이야기를 듣자 이번 시나리오는 역시 충분히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사단 하나에,마법사 열 명……

만만한 상대는 아니지만.

그다지 어렵지도 않다.

비록 요괴들은 남아 있지 않지만 달의 권능까지 가지고 있다.

공작을 핏물로 만든 인벤토리는 두꺼운 특수 합금에도 먹히겠지.

연합 최강의 타이탄이라도 내가 압도할 수 있다.

루비아 시나리오도.

레나 시나리오도 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했지만.

그때와 지금의 힘은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르다.

‘중간에 빠져도 되고.’

전혀 생각하지 못한 변수가 생겨 상황이 꼬이거나 위험할 것 같으면

사라지면 된다.

카린에게 이제 나를 찾지 말라고 설득하고 잠적하거나.

말을 듣지 않을 것 같으면 납치해 이곳에 가둬 버릴 수도 있다.

어차피 카린 본인으로서도 마왕 강림을 바깥에서 맞이하는 것보다 지하실에서 갇혀서 책이나 보는 게 훨씬 낫겠지.

의원 신분으로 실종되고.

바깥에서 마왕들이 다른 크렉소르 가문의 후계자들과 의원들을 모두 죽여 버리면 시나리오가 자동적으로 클리어될지도 모른다.

과한 생각은 아니다.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루비아도 숨길 수 있으면……

한번 나가기를 결심하자 밖에서 에라스트 영주를 하고 있는 그녀가 역시 마음에 걸린다.

〈이 세계선의 루비아〉를.

과연 끝까지 무시하고 여기 숨어 있을 수 있을까.

얼마나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지 생생하게 그려지는데.

‘둘 다 납치할까?’

물론.

루비아라면 순순히 따라을 거다.

꿈의 형태로 기억이 남아서.

어쩌면 지금도 나를 그리워하면서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 돼.’

그녀를 영원히 세계에서 적출될 위험에 처하게 하는 일이다.

공작의 시선이 먼저 닿는 곳은, 물론 제국이다.

더군다나 관심 지역인 에라스트의 영주가 사라진다면.

본인이 당장 추적에 들어가리라.

기스-제-라이는 이미 죽고,나나우도 레나도,아이작도,레안드로도 뽑혀

나간 세계다.

루비아까지 사라진다면 비어 버린 세상에서 버둥거리는 느낌이 들 것 같았다.

잃고 싶지 않다고 끔찍한 고통을 〈이 세계의 루비아〉에게 떠넘기는 나는 사악한가,혹은 비겁한가.

방치가 어리석은 선택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루비아를 생각하면 언제나 어딘가 아득해진다.

맑게 생글거리던 얼굴과 목소리를 생각하면 종말이 닥쳤을 때 그녀가 지을 표정이 겹쳐져 괴로웠다.

- 달그락.

실감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머리를 털어냈다.

일단은.

“넥스몬드 선장.”

“예.”

“카린 크렉소르를 만나러 가자. 지금 그녀는 어디 있지?”

* * *

‘오랜만이군.’

긴 칼을 허리에 찬 채로 문 옆에 시립한 푸른 머리칼의 인간이 나를 빠르게 훑었다.

얼음으로 조각한 듯한 인상이다.

태어날 때부터 저 자세인 것처럼 시립이 몹시 익숙해 보이지만.

어쩐지 못마땅함이 뚝뚝 묻어나는 표정은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고서, 제 표정을 의식한 듯이 당황하며 아주 잠깐 두 볼이 붉어진다.

“어머,여기예요!”

문을 밀고 들어가자마자 카린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앞에는 동양풍으로 장식한 작은 주전자와 한 모금 비운 찻잔이 있었다.

“카린 크렉소르예요.”

시나리오가 개시됐으니 상태창을 보라는 듯이 〈카린 크렉소르〉라는 글자가 그녀의 머리 위에 떠올랐지만, 묘한 반감에 일부러 그 반투명한 메시지를 외면했다.

어차피 호감도 따위나 띄우겠지.

“제가… 어째서 당신을 찾았는지 궁금하셨죠?”

살며시 옆으로 몸을 기댄 카린은 가느다란 다리를 꼰 채 유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가만히 그녀를 바라봤다.

'궁금이 라.’

카린에게 궁금한 건 별로 없다.

알고 있는 건 시나리오라는 흐름에 끌려가고 있다는 사실.

그거면 충분하다.

다른 세계선에서 나를 이용해서 엄청난 전공을 쌓았던 기억이 남아 있을 수도 있겠지.

“글쎄.”

생각보다 미지근한 반응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그녀가 한층 더 짙은 미소로 말을 이었다.

“크렉소르 가문은 언제나 인재를 환영한답니다. 그게 어떤 인재든지 말이죠. 가문의 등용 담당으로서, 당신처럼 훌륭한 감식안을 가진 분이 꼭 저희 가문의 일원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그런데… 뭐라고 부르면 될까요?”

고혹적인 외모와 확신으로 가득 찬 태도,선명하고 아름다운 목소리는 아마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심장을 졸깃하게 만들 것이다.

하지만 나에겐 심장이 없다.

“그냥 그쪽이라고 부르면 된다.”

“그쪽… 이요?”

자신만만하던 표정이 아주 잠깐, 하지만 명백하게 일그러진다.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감정도,생각도 시나리오에 묶여 있는 상대다.

앞에서 보는 것만으로 무언가에 짓눌리는 기분이다.

“카린 크렉소르,의회 예산결산 위원회 간사,크렉소르 가문의 미래 정책특별위원회 부위원장. 아는 건 이 정도인데… 일단 여기서부터 시작하지. 누구를 제거해야 당신이 크렉소르 가문의 첫 번째 상속자로 올라가지?”

“뭐… 라고요?”

여자는 벙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나는 크렉소르 가문이 아니라, 너를 위해 일할 거다. 네 앞에 놓인 상속자들을 어떻게 치울지,그리고 네가 자유 연합 의회 의장이 되는 데 장애물이 뭔지 설명해라.”

살짝 벌린 그녀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그게 무슨… 무슨… 말씀이죠?”

“모든 과정에서 내 조건은 둘이야. 하나,나의 존재에 대해서 철저히 침묵할 것. 그리고……

- 스르륵

나는 인벤토리에서 황금빛 벌레 모형을 꺼내 들었다.

“둘. 이런 걸 손에 넣으면 나에게 즉시 넘겨라.”

카린이 떨리는 입술을 꾹 깨문다.

분노하는 걸까?

하지만 일일히 그녀를 설득해 낼 자신도,의지도 없다.

여기서 판이 엎어지면…….

‘그냥 납치해야겠군.’

은신처에 가둬 놓고 다시 수련에

들어갈 생각이다.

카린이 깨물었던 입술을 천천히 다시 벌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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