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399화 (399/458)

483화 주머니 속의 칼 (7)

‘마왕… 이라고?’

그 단어를 듣자마자 가지고 있던 자신감이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나는 지금까지 다양한 경로를 통해 몇 번이고 마왕들을 접해 왔다.

첫 번째 생에는 바알의 군단병으로 부려졌고.

지금은 아몬의 제단을 은신처로 삼아 지내고 있으며.

말파스의 가장 총애하는 대제사장 아이작과 오랫동안 함께 모험했다.

바알의 권속 이굴쿠가 가진 힘을 강제로 램프로 흡수해 버렸고.

지하의 마계침식지역에서는 수많은 마왕의 스카우터가 앞다뤄 나를 섭외하려고 했다.

그곳에서 심지어 바싸고 본인의 간접 강림체에 봉인당할 뻔하다가, 간신히 용의 단검으로 자폭한 덕에 빠져나온 적도 있다.

‘나만큼 잘 아는 녀석도 없겠지.’

하지만.

아는 만큼 긴장할 수밖에 없다.

마왕은 지금의 내 힘으로도 결코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상대들이다.

“•••바알을 필두로 한 16마왕을 이야기하는 건가?”

진지하게 경계하는 내 모습을 보고 카린 크렉소르가 두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맞아요! 역시 잘 알고 계시네요. 그들을 알더라도 보통은 전설 속의 존재로 생각하지만,이 세계에는 마왕들을 섬기고,인간을 실제로 공양하면서 마왕의 강림을 바라는 무리가 다수 존재한답니다.”

물론 그것도 자세히 안다.

다른 세계선에서 푸르손을 섬기던 무리와 조우했었고.

그들에게 당해 레나와 죽은 적도 있으니까.

하지만 굳이 아는 티를 내기보다 상대에게 말하게 하는 편이 낫다.

굳이 앞질러 갈 필요는 없다.

“그러니까,요청부터 말해 봐.”

재촉 정도면 괜찮겠지만.

이게 시나리오고.

퀘스트라면 할 일이 뭔지 들으면 그만이다.

눈앞의 꼭두각시는 제가 꾸던 꿈을 실현하고.

나는 다시 조용한 지하로 수련하러 들어가면 된다.

그녀의 한쪽 눈썹이 못마땅한 듯 잠깐 꿈틀거렸다.

“혹시… 저를 빠르게 해치워야 할 뭔가로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게 중요한가?”

카린은 분한 듯 입술을 짓깨물고 천천히 말했다.

“알았어요. 그럼… 중요한 퀴즈를 하나 내볼게요. 알아맞혀 보세요. 저희 가문에 타이탄이 몇 대라고 생각하세요?”

- 과드득.

민감한 질문인가.

옆에 선 호위의 꽉 쥔 주먹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글쎄.”

하지만 나에게는 선문답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갸웃거리자 카린이 하얀 손가락으로 탁자를 매만지며 채근한다.

“저랑 대화하는 게 그렇게까지… 귀찮아요? 비밀 얘기 해드릴테니, 추측해 주세요.”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자유연합이 보유한 타이탄 숫자가 공식적으로 열셋이라고 했었지.’

넥스몬드의 말을 떠올렸다.

‘주요 가문은 일곱.’

‘크렉소르는 유독 강한 편이니… 두 기에서 세 기일까?’

‘숨겨 놓은 전력이 있다고 하면 네 기에서 다섯 기 정도.’

“네 기에서 다섯 기?”

“와,맞아요. 아주 정확하세요.”

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보이도록 굉장히 노력하고 있거든요.”

노력이라고?

“사실은 몇 기인데?”

가문이 숨겨 놓은 전력이 그것보다 훨씬 더 많다는 걸까.

여섯 기? 일곱 기?

의회에서 압도적 위치를 차지하는 크렉소르 가문이라도.

한계라는 게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카린의 입에서 나온 것은 아예 상상조차 못 한 숫자였다.

“0기예요.”

“뭐?”

루이 클로드가 살짝 고개를 떨꿨다.

말하고 마는 건가,싶은 눈빛이었다. 조금 전에 녀석도 가주의 타이탄이 어쩌고 하지 않았나?

“지금 무슨 소릴……

“최강인 척하는 저희 가문은… 사실 타이탄 한 기도 가지고 있지 못해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넥스몬드조차 데서리 바티엔느와 그녀의 타이탄 오베론을 이야기하며, 크렉소르 가주가 보유한 타이탄과 자연스럽게 비교했다.

‘그렇다면……

연합의 타이탄 전력은 제국에게

완전히 밀린다는 걸까?

‘두 세력 사이의 균형은 어떻게 되는 거지?’

머리가 복잡했다.

“아까부터… 듣고 계신… 거죠?”

날카로운 시선이 꽂힌다.

일그러진 얼굴을 억지로 피려다 괴상한 표정이 되어 버린 카린이 나를 보고 서 있었다.

“물론이다. 설명해 줘.”

너무 무시하고 있었나.

넥스몬드도 모르는 정보다.

집중해야 한다.

카린이 설명을 시작했다.

“이 이야기는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전전대.

현 가주의 어머니가 가주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때.

크렉소르 가문은 연합 역사상 랭킹 20위 안에 들어갈 만큼 강한 타이 탄을 무려 4기나 소유했다.

제국이나 다른 가문에 두려움을 지나치게 조장할까 싶어서 일부러 스펙을 낮춰 발표했지만.

당시 가주가 탑승하던 타이탄은 이미 특급을 훌쩍 넘어서.

〈타이탄 세 기를 50%의 출력으로 제압할 수 있어야 한다.〉

해당 조항을 가볍게 충족한 덕에, 준초월급으로 불리기 충분했다.

그야말로 크렉소르의 최전성기.

다만.

그들의 유지와 훈련을 위해서는, 보통의 기체보다 훨씬 막대한 양의 미스릴이 필요했다.

카린이 말을 이었다.

“미스릴은… 신성한 금속입니다. 미스릴 광산은,특히 깊은 광맥은

말 그대로 여신의 신성력으로 덮여 있지요.”

과장이나 수사가 아니다.

순수하게 단어 그대로 신성력이 광맥을 뒤덮고 있다.

물리적으로 곡괭이를 휘두르 기는커녕 신성력에 밀려서 광맥 근처로 걸어갈 수조차 없다.

“보통은 깊은 광맥까지 건드리지 않습니다. 바깥쪽의 얕은 맥들을 조금씩 캐내다 보면 광맥은 스스로 충전되곤 하니까요.”

“하지만 당시 크렉소르 가문은, 재정 위기까지 겹쳐 자금이 지독히 부족했었죠. 어떻게든 미스릴을 더

캐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미스릴 광맥을 덮고 있던 신성력은 만만하지 않았다.

타이탄들이 투입되었지만 순수한 물리력으로 뚫기는 요원했다.

최대 출력으로 광맥을 공격해 봤자 허무하게 튕겨지기만 할 뿐이었다.

“그래서… 신성력과 배치되는 힘, 신성력을 중화시키는 힘을 구하기 시작합니다.”

마왕을 섬기고.

그들의 힘을 부여받은 사교도들을 찾아 나선다.

“마왕의 힘을 타이탄에 부여해 줄

사교도들을 구한 것이죠.”

가만히 듣고 있던 나는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아까부터 계속 마왕,마왕이라고 했는데… 정확히 누구의 신도들을 이야기하는 거지?”

카린이 이름을 떠을리려는 듯 살짝 미간을 찌푸린다.

“무르무르…. 마왕 무르무르예요.”

“다른 녀석은?”

“다른… 마왕…. 아니에요. 그때 부른 건 모두 무르무르를 추종하는 무리였어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바알이나 아몬,바싸고처럼 상위 마왕도 아니다.

푸르손이나 레라지에처럼 신도가 많은 마왕도 아니다.

빙의의 무르무르는.

따져 보면 열여섯 마왕 가운데서 가장 약한 편이다.

단순히 우연이었을까?

“어둠의 속성이 부여된 네 기의 타이탄은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깊은 광맥을 뚫어 냈지요.”

신을 모독하는 난폭한 채굴.

재정 따위는 100년 정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네 기의 타이탄 전체를 개조하고 무장을 장착할 만한 양의 미스릴이 크렉소르 가문에 들어온다.

“그렇게,개조가 시작됩니다.” 장갑부터 메인 엔진.

조종석의 코어 플러그까지.

사교도들은 무장을 사용할 때마다 파일럿의 정신이 마에 젖어들도록 회로를 구성했다.

“기존의 궤를 벗어나 강해질 때마다 파일럿들은 깊숙히 마왕의 노예가 되어 갔던 것이죠.”

“그래서?”

“가주를 제외한 세 명의 파일럿은

신성력을 부수는 과정에서 차례로 이성을 잃어버렸고,그들을 어떻게든 제압하려던 당시 가주마저 무리한 오버클럭 과정에서 돌이킬 수 없이 마기에 침식되어 갔습니다.”

초월을 눈앞에 둔 가주의 타이탄은 가문의 철인 50기의 도움을 받아서, 미스릴 광산의 무저갱에 폭주하던 다른 세 타이탄과 몸을 던지고.

광산은 봉인된다.

여기까지 설명한 카린 크렉소르가 길게 한숨을 내쉰다.

봉인된 광산은 크렉소르 가문이 가진 두 개의 미스릴 광산 가운데 하나다.

그것도 가문의 핵심만 그 존재를 알도록 비밀리에 관리되던 쪽.

어떻게든 미스릴을 늘리려던 시도는 역설적으로 장기 생산량을 반으로 토막 내 버렸다.

그것도 의회에 공개하지 않으며 몰래 가져갈 수 있는 쪽의 광산이 사라진 것이다.

“천벌이라도 받은 걸까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천벌은 아무나 받는 건 아니다.

마왕이 강림해도 나타나지 않은 여신들은 게으르기 짝이 없으며, 아이작쯤 되지 않으면 천벌 같은 건

받지 않는다.

어쨌건 가슴 찢어지는 상황이다.

네 기의 타이탄까지 매장된 탓에, 크렉소르 가문은 무려 50년이라는 세월을 압도적인 무력을 숨긴 듯 허세를 부리며 아슬아슬 버텨 왔다.

“타이탄을 쓸 일이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어요.”

봉인된 광산은 50년 동안 가주의 고민거리였다.

어떻게든 타이탄을 회수하고.

광산을 활용하고 싶지만.

네 기의 타이탄이 마성에 젖은 채 밖으로 을라온다면 그 피해는 결코

감당할 수 없다.

크렉소르 가문의 절반 이상이.

어쩌면 가문 전체가 날아갈지도 모른다.

소란이 생겨 다른 가문이 이 일을 알게 되는 순간 문제가 된다.

이 일의 전모가 드러난다면.

자유 연합에서 크렉소르 가문의 위치는 훨씬 약해질 게 뻔하다.

“저희 가문의 가장 비밀스러운 일을 말씀드렸습니다. 크렉소르의 이름을 달고 경쟁하는 이들의 절반 이상이 이 일을 알지 못해요.”

카린은 정말 큰 비밀을 말했다는 듯

심각하면서도 후련한 표정이다.

‘뭔가… 묘한데.’

긴 이야기의 여기저기서 위화감이 풍겨 온다.

카린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건 아니 었다.

다만.

이 이야기의 이곳저곳에 커다란 고리가 빠져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아니……

고리 몇 개가 빠진 수준이 아니라 사슬 전체가 진실과는 꽤나 거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가 정말인지.

아니면 위장을 위해서 만든 썩은 새끼줄인지는 당겨 봐야 알겠지.

나는 이야기의 사슬을 살짝 더듬듯 카린에게 물었다.

“타이탄이라 해도 안의 파일럿은 인간일 텐데. 50년이면 당연히 죽지 않았을까? 먹을 것도 없을 거고. 아무리 값지다 해도 미스릴을 먹고살 수는 없겠지.”

인간의 수명에도 한계가 있다.

광산에서의 50년.

어떤 인간을 그걸 버틸까.

굶주림이 아니라 늙어 죽더라도 진작 죽었을 기간이다.

그런데 열지 못한다고?

“으음… 그게……

카린이 말을 더듬거린다.

“안에 처박힌 네 기의 타이탄이 부린 난동은 그만큼 가문에 깊은 상흔을 남긴 모양이라서……

“뭔가 숨기고 있나?”

카린의 눈빛이 짧은 순간 굳었다.

“아니에요. 사실 그 안에 어떤 게 있는지,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저도 정확히 모르거든요. 하지만 폐쇄 이후 가문이 미스릴 부족과 타이탄 부재로 아슬아슬한 상태를 유지하면서도 못 여는 걸 봤을 때,

사정이 있다는 것밖에는

‘준초월급 타이탄이라.’

그게 어느 정도의 전력인지 이미 넥스몬드에게 들은 바 있다.

거기서 추가로 마왕의 힘을 얻어 강해졌다고 해도.

내가 상대하지 못할 정도는 결코 아닐 거다.

처음에는 마왕 이야기가 껄끄럽긴 했지만.

‘봉인당할 정도의 힘이야.’

침식이 이뤄지고.

만약 마왕의 일부가 간접적으로라도

강림했다면.

애초에 크렉소르 가문이 봉인을 해냈을 리가 만무하다.

‘타이탄 같은 걸 두려워할 거라면 연합에서 그림자로서 활약하는 건 포기하는 게 낫지.’

나는 카린에게 물었다.

“이 일을 해결하면 어떻게 되지? 가문에서의 네 지위 말이다.”

카린이 살짝 마른 입술을 핥으며 조곤조곤 말했다.

“만약 그렇다면… 저희 가문은 다시 봉인된 미스릴 광산을 얻겠죠. 깊은 광맥의 신성력은 이미 한번

부숴 버렸고,50년 동안 방치해서 입구부터 풍성해진 광산을 말이죠. 그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이득인데, 만약에 버려진 타이탄을 네 기나 회수하는 것까지 합쳐진다면……

작게 침 삼키는 소리가 울린다.

“그 이상의 업적은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당연하게도 제가 가문의 1순위 상속자가 되는 거고,어쩌면 가주의 죽음 이전에 후계자를 저로 발표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좋아,해 주지.”

옆에 선 호위가 소리 죽여 몰래 긴 숨을 들이쉰다.

녀석은 내 힘을 알아볼 수 있다.

이게 얼마나 현실성 있는 대화인지 체감할 수 있을 거다.

카린의 상기된 뺨 위로 기대감이 떠오른다.

“하지만… 난관이 있어요 제가 대략적인 위치는 파악하고 있는데, 그 미스릴 광산은 굳게 봉인되어 있거든요. 그곳을 제가 열 수 있게 허락받는 일이 어려울 거예요.”

“가주께서야 충분히 귀공의 힘을 알아보실 겁니다만,그 과정에서 원치 않게 꼬리를 다실 수도……

나는 청흑의 두 여자를 한 번씩 돌아보며 물었다.

“허락을 왜 받지?”

“예……?”

“위치를 안다면서? 그냥 부수고 들어가서 다 해결하고 난 다음에 보고해. 굳이 시간 끌 것도 없다. 지금 당장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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