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401화 (401/458)

485화 주머니 속의 칼 (9)

트로핀 여단.

T&T가 대체된 정보 길드다.

나냐우와 레나가 사라진 세계선.

트로핀 여단은 제국 수도 지부마저 사라졌지만.

〈달리아크>의 정보 경매상은 엠버와 연합에 트로핀 여단의 지부가 있다고 이야기했다.

‘역시… 이렇게.’

다른 곳에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카린이 트로핀 여단이라고 말한 검은 후드의 남자는 이런 일에 몹시 능숙해 보였다.

“돈을 주고 고용한 건가?”

산을 내려가며 카린에게 물었더니 그녀가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아니요. 트로핀 여단이 무상으로 제공하는 서비스예요.”

“무상으로……?”

“트로핀 여단은 저에게 투자하고 있거든요.”

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건가.

“네가 크렉소르의 가주가 될 거라고

배팅하는 건가?”

“배팅이라……. 그렇긴 한데…… 카린이 혀로 입술을 살짝 핥았다.

“저에게만 배팅한 건 아니에요. 이만큼 밀착 서비스는 아니더라도, 조직이나 자잘한 정보 지원 정도는 선두 그룹은 전부 다 받고 있어요. 아까 보신 음침하게 생긴 놈에게는 전속 비서까지 지원하고 있고요.”

“그렇게까지……?”

흠칫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크렉소르 가문의 후계 구도에.

트로핀 여단이 아예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달리아크에서〈보이지 않는 비〉가

말했던 간부들의 이름을 떠을렸다.

나냐우가 사라진 이후에도 페르산, 스티글리츠,샤루니안 같은 쟁쟁한 능력자들은 모두 다 트로핀 여단에 남아 있었다.

나냐우와 레나가 사라졌어도 결코 약한 집단이 아니다.

약하기는커녕 여전히 세계 전체에서 손꼽히는 세력이겠지만.

‘그래도……

자유연합에서 가장 강력한 가문을 밀착 관리한다는 건 웬만한 일이 아니다.

“지원을 받아서 가주가 된 뒤에는

뭘 약속하지?”

역시 돈일까.

아니면 정책이나 기술?

하지만.

예상과 전혀 다른 답이 돌아왔다.

“트로핀 여단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아요. 아무것도 약속받지 않고요. 350년 전 트로핀 라즐로라는 남자가 길드를 세운 뒤부터 줄곧 그랬지요.”

‘트로핀 라즐로……

기억난다.

그런 이름이었다.

T&T가 트로핀 여단으로 바뀌며

그런 이름의 남자가 시조가 됐다. 나냐우는 이 세계에 없고.

그 사실은 강철처럼 견고하다.

“트로핀 라즐로… 죽었겠지?”

“물론입니다. 300년도 훨씬 전에 태어난 인간이니까요.”

쫓아가서 트로핀 나냐우에 대해 물어볼 수도 없고.

4T&T……

둘 다 같은 트로핀이다.

원래 길드 이름이 T&T였으니까, 어쩌면 둘이 세운 길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간다.

라즐로는 나냐우의 친족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는 물론이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그걸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나저나.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는다고? 그럼 대체 왜 도움을 주지?”

“간단한 이야기죠.”

카린이 걸으며 대답했다.

“요구하지 않고 약속받지 않아도, 뭐라도 된 이후에는 트로핀 여단을 위해서 움직이니까요.”

설명이 이어진다.

방금처럼 편안하게 트로핀 여단의

도움을 받다 보면 어쩔 도리 없이 거기에 길들여지고.

인형사라는 녀석처럼 아예 전속 비서까지 지원받을 정도라면.

크렉소르의 가주가 된 이후에도 그대로 트로핀 여단에게 긴밀하게 의지하게 된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함께해 오며 트로핀이 쥐고 있는 신임 가주의 비밀들은 말할 것까지도 없다.

안락함과 두려움을 함께 느끼는 상대가 되어 버린다.

크렉소르의 가주는.

트로핀 여단이 뭘 원하는지.

어떻게 하면 즐거워하는지 언제나 진심으로 살필 수밖에 없다.

“모든 가문에 다 그러나?”

정말 그렇다면 자유연합은 의회가 아니라 트로핀 여단에 지배당하는 꼭두각시라고 볼 수밖에 없었지만.

레나도 나냐우도 없는 상황에서 가능할까 싶은 생각이 든다.

카린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아요. 트로핀 여단이 될 만한 패에 전부 걸기는 하지만, 그건 철저히 우리 크렉소르 가문 내부에서의 배팅이죠. 그러니까… 트로핀은 연합의 열세 가문 가운데

크렉소르에 건 셈이랄까요.”

“크렉소르에만?”

의아했다.

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가문은 단연 최고니까요. 자금줄과 기술력은 물론 시민들의 존경과 신뢰까지 얻고 있거든요.”

뭐가 이상하냐는 듯.

자부심 넘치는 눈빛이다.

그것만으로.

이렇게까지 트로핀 여단이 이렇게 깊숙히 가문에 관여하고 있는 걸 납득하는 걸까?

주요 후계자들을 하나하나 전부 챙길 정도라면.

트로핀 여단으로서도 몹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이야기다.

내부자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걸까.

‘기묘하군.’

똑똑한 여자인데도 불구하고.

가문에 대한 자부심에 조금 눈이 흐려진 걸까.

어쩌면.

챈들러 가문의 경우처럼.

핏줄에 흐르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과대 해석일까.

안갯속을 헤메는 것처럼 모호한 기분의 정체를 알아내고 싶어 계속 질문을 던졌다.

“외부인들을 끌어들이는 걸 싫어하는 녀석도 있을 텐데. 처음부터 얽히는 걸 꺼릴 수도 있고.”

카린이 고개를 끄덕인다.

“350년 동안 독 따위는 없었고, 줄곧 달콤하기만 했던 사과지만, 먹는 게 싫을 수도 있죠. 하지만 싫어도 먹어야 해요.”

트로핀이 내미는 손길은 반드시 잡을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 사과를 한입도 안 먹겠다고

우긴다면 표적이 되어 버리거든요. 트로핀은 구애한 상대방이 거절하면 결코 깔끔하게 놓아주지 않아요. 잠재적인 적이라고 판단해서 아예 말려죽이죠. 그건 돕는 것보다도 훨씬 더 쉬우니까요.”

“그렇게까지……

역시 이상하다.

이 이야기까지 듣고 보니 한층 더 확신이 든다.

트로핀 여단은.

분명히.

크렉소르 가문에 집착하고 있다.

‘어째서지?’

정보 길드에 접촉해야 할 텐데.

트로핀에 대해 알아내려고 그들과 접촉하는 건 어불성설이고.

‘상인 연합?’

넥스몬드를 통해 볼까.

하지만 상인 연합도 예전 세계선의 트로핀 여단인 T&T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 관계가 지금도 유지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달리아크밖에 없나……

달리아크의 경매장으로 찾아가서 〈보이지 않는 비〉를 만나야 한다.

‘여기서는 좀 멀군.’

일단은,미스릴 광산이라는 곳을 향하기로 했다.

* * *

각자 말을 타고 계속 북서쪽으로 달려가던 도중.

냇가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는데 카린 크렉소르가 옆으로 다가온다.

“식사는 마지막으로 언제 하셨어요? 촉촉한 육포 좀 드시겠어요?”

승마는 제법 익숙한 걸까.

피곤한 기색은 없다.

계속 주변을 감지하기는 했지만, 미행이나 암살이 붙을지 모르는데 이런 황무지에서 불안한 표정 하나 짓지 않는 대담한 여자다.

“혼자 먹지?”

“저희는 처음 뵐 때 이미 든든히 먹었어요.”

“나도 먹었다.”

“정말요? 그럼 디저트 드릴게요. 가나슈랑 헤이즐넛 가루를 넣은 뒤 얇게 껍질을 입힌 건데……

하얀 초콜릿 볼이 잔뜩 들어 있는 커다란 통이 배낭에서 나온다.

언제 저런 걸 챙겼지.

그럴 틈이 없을 텐데.

“•••그 통,항상 가지고 다니나?”

“네……? 네. 이상… 한가요?”

“아니,뭐.”

100개 정도는 들어 있는 것 같다. 물론 나와는 상관없다.

“•••많이 먹어라.”

어쩐지 시무룩한 기색이다.

카린이 초콜릿 통을 다시 가방에 넣어 버린다.

“주군,혼자라도 드시죠.”

옆에 있던 푸른 머리칼의 호위가

다가와서 낮게 속삭인다.

“아니야.”

“드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호위는 나를 흘끗흘끗 바라본다.

뭔가 짚이는 게 있는 건가.

안목은 있는 녀석이니까.

“이런 걸 먹어 봤자 괜히 살밖에

더 찌겠어?”

뭔가 묘한 오해를 산 것 같다.

“안 찌십니다. 사람…마다 소화할 대사량은 다르니까요.”

“혹시, 엄청 강해지면 아무것도 안 먹어도 되는 거야?”

“필요하다면 극단적인 소식으로도 살 수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가……

대화하는 둘을 흘끗 바라봤다.

별로 지금 정체를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시나리오가 끝날 때까지 정체를 드러내지 않아도 좋지 않을까?

어쨌거나.

거짓말은 아니다.

레안드로가 밥 먹는 모습은 거의 못 봤던 것 같으니까.

- 다그닥! 다그닥!

중간부터 각자 말을 타고 달렸다.

마차를 갈아탄 날로부터 이틀째.

도로가 사라지고.

산과 숲과 강과 안개가 나타났다.

인간의 기척은 사라지고.

짐승과 곤충들의 기척만 빼곡하게 느껴진다.

할비 산이 있다는 곳에 접어들자 차가운 안개가 낀 거대한 봉우리들이 보였다.

워낙 짙은 탓에 얼어붙은 구름처럼

보이는 안개가 사방을 다 덮은 데다 수풀들마저 음침하게 우거져 있어, 대낮인데도 수 미터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몇 번씩 지도를 확인하던 루이가 카린과 나를 보고 말했다.

“여깁니다.”

“아쉘이 실종되었다는 장소?”

바닥의 모래 가루를 한 움큼 주워 만지작거던 카린이 물었다.

“네.”

나는 카린을 바라봤다.

“아쉘이 누구지?”

“이곳을 알려 준 사촌 언니예요.

상속 경쟁자이긴 했는데,아무와도 엮이고 싶어 하지 않았어요. 저랑 둘이서만 친했죠. 탐험과 여행을 좋아하던 순수한 언니였는데……

카린이 침울한 표정으로 바닥을 바라보고 말을 이었다.

“살해당했어요. 나서는 자가 없고, 이득을 본 게 특정되지 않은 탓에 누구에게 당한 건지는 모르지만… 경쟁자인 인형사 같은 놈이었겠죠. 제가 가주가 되면 조사해서 철저히 처벌해 줄 거예요. 본인이야 죽으면 끝이지만 제 기분이 더럽거든요.”

망자의 이야기를 들어서일까.

짙은 안개가 수의처럼 느껴졌다.

“7번 봉우리는 여기서부터인데… 천천히 전체를 뒤져 봐야겠군요.”

주위를 돌아봤다.

산맥은 꽤 북쪽에 있는 것에 비해 수풀이 과할 만큼 우거져 있었다.

거쳐 온 지역들보다 위쪽이고.

해안가도 아닌데.

습도와 기온 자체가 근본적으로 더 높은 느낌이었다.

밀림에 살 만한 커다란 거미나 뱀, 박쥐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산은 정말 그저 산이었다.

어떤 마법적인 은폐의 장막이나 주술도 진법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이 봉우리를 더욱 수상하게 만들었다.

내가 숨어 있는 아몬의 은신처도 비슷한 느낌이다.

아무도 찾지 않는 버려진 장소.

어디 있어도 딱히 이상하지 않을 산이면서.

은폐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두 여자와 계속 봉우리를 탐색하고 있을 때였다.

- 탁! 타닥!

카린의 가방에서 작은 초콜릿볼이 떨어져서 수풀로 흘러갔다.

가나슈 어쩌고 하며 특히 아껴먹던 하얀색 초콜릿이었다.

“아,귀중한 식량이……!”

一 좌악!

카린이 바닥에 떨어진 초콜릿볼을 주우려는 듯,수풀을 오른쪽으로 확 밀어젖히자.

- 파드드드득!

커다란 석상에서 주먹만 한 박쥐들이 파닥파닥 튀어나왔다.

석상이 입으로 박쥐들을 토하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꺄아악! 루이! 얘네 뭐야!”

옆에 서 있던 호위가 몸으로 카린을 가리며 박쥐 한 마리를 잡아챘다.

하지만 어쩐지 굉장히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루이의 장갑 낀 손에 잡힌 박쥐가 날개를 파닥대며 입을 벌려 한차례 하품을 했다.

까만 두 눈이 빛났다.

작은 강아지 같은 얼굴이었다.

“어머, 박쥐야? 이렇게 작아?”

“성체가 아닙니다. 애기들입니다.” 호위는 손에 쥔 박쥐를 바라보며

살짝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카린이 그녀를 보고 큭큭거렸다.

“루이는 동물은 다 좋아하지?”

호위가 시선을 피했다.

“이런 작은 구멍인데도 사는 거야? 성체의 크기는 어느 정도인데?”

“청귤박쥐들은 전부 자라면 양쪽

날개 너비가 1미터 정도는 됩니다. 다른 곳에 새끼들을 낳은 성체가 출입할 만한 구멍이 있을 겁니다.”

“다른 곳이라……

나는 석상을 바라봤다.

작은 구멍이 있다는 사실은 물론 파악하고 있었다.

이곳에서도 물론 마법이나 주술의 흔적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나치게 그런 것만 신경 썼는지도 모른다.

‘마법적인 은폐의 흔적은… 이미

볼 만큼 봤고.’

다른 데 집중할 차례다.

“동굴들을 확인해 보자.”

바깥에서는 아니라도.

산 곳곳의 동굴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간 다음 새롭게 느껴지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찾는 건 광산이니까.

“습하네요……

푹푹 찌는 숲속을 카린과 루이가 앞장서서 걸어간다.

아무래도 이곳의 환경 그 자체가 다가오기 싫은 훌륭한 장벽일지도 모른다.

한나절이 지난 뒤.

우리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고작 봉우리 하나에 무슨 동굴이 이렇게 많아?”

처음에는 마법적인 은폐나 진법과 결계만 신경 써서 실제 동굴 따윈 신경 쓰지 않고 지났는데.

하나씩 확인해 보니 동굴이 무려 서른 개가 넘는다.

이걸 다 들여다보다간 두 여자가 가져온 식량부터 동날 판이다.

지쳐 쓰러지거나.

‘인벤토리에도 먹을 건 없는데.’

혼자 보]•야 되나?

그때 였다.

“서른둘……

루이가 눈동자를 반짝였다.

“많죠……. 그러니까,아무 구멍에나 들어가도 될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야?”

“한 봉우리에 구멍이 이렇게까지 많다면 내부가 모두 이어졌을 확률이 높습니다.”

푸른 머리칼의 여자가 살짝 목을 가다듬었다.

“무엇보다 청귤박쥐는 폭 5미터, 높이 30미터,길이 3킬로 이상인 동굴에서만 새끼를 낳으니까요.”

“으음……. 박쥐들도 집이 넓어야 번식을 한다는 거구나.”

루이 클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좋아,그럼 들어가 보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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