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405화 (405/458)

489화 주머니 속의 칼 (13)

“어머,넌 뭐니?”

〈크렉소르 가문의 비서 노바입니다. 질문자의 호흡에 높은 혈당이 감지 됩니다. 현재 전력 부족으로 제세동 기능은 제공되지 않으므로 본인의 심장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초콜릿 때문인가.”

작게 중얼거리는 내 말에 답하듯 로봇이 음성을 출력했다.

〈크렉소르는 운동 부족과 방만한 식생활로 심부전 발생률이 일반인 대비 57% 높은 것으로…….>

“나는 그렇게 안 먹거든!”

얼굴을 살짝 붉힌 카린이 빠르게 말을 돌렸다.

“우리 가문에 이런 게 있었다니. 비밀 비서라고?”

〈그렇습니다. 비밀 비서 노바는 크렉소르 가문에 전해지는 미스릴 광산 지원 유닛으로,옛 ‘유산’의

복제품입니다. 귀하의 수행원 역시 낮은 등급의 복제품을 소유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걸 말하는 것 같군요."

루이 클로드가 옷 아래 감춘 회색 망토를 펄럭였다.

망토 아래로 마른 쇄골이 보인다.

그녀를 처음 만날 당시의 나조차 망토를 쓰고 있는 녀석을 제대로 감지하지 못했다.

[옛 ‘유산’의 열화판. 복제품이지. 하지만 어설프게 베끼려고만 해도

상당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아이 작도.

[유산이야. 옛 시대의 마법이지.]

[절대 네가 갖게 해 줄 수 없어. 유산은 레드 플레이크가 관리한다.]

별빛청여우도.

[이건 레드 플레이크가 유산이라고 부르는 물건일지도 모른다. 밖에서 사용한다면 녀석들이 개입하겠지. 내 힘으로 그 기괴한 놈들을 전부

감당할 수는 없다. 일단 철저하게 숨겨 두자.]

엠버메어의 글로리아도 일지에서

‘유산’을 언급했다.

유산이라는 건 대체 뭘까?

엠버의 기술력으로조차 놀랄 만한 무언가.

아니,애초에.

그 기술의 근간이자 원전인 것.

그리고.

‘자유 연합이라… 기술의 편차가 상당히 크다고 봐야겠군.’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고.

기술의 평균값을 낸다면 분명히 엠버보다 낮지만.

의회의 여러 가문 중 하나.

그 후계자 가운데 한 명에 불과한 카린이 망토를 소유하고 있고.

조금만 그 어둠을 파내려가 보면 이런 로봇까지 튀어나온다.

‘뭐가 나와도 놀라지 말아야겠어.’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옆에서 살짝 들뜬 목소리가 울렸다.

“어쨌건 비밀 비서라니 잘됐네요. 저희에게 이 광산에 대해 자세하게 알려 줄지도 몰라요.”

“O으”

고개를 끄덕였다.

광산에 대한 정보뿐만 아니라.

어쩌면 트로핀 여단이나 궁금했던 유산에 대한 깊은 정보까지 넣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카린의 첫 질문은.

“그런데 누구한테서 내게 권한을 이전한다는 거니?”

〈현재 보안 레벨로 들을 수 없는 정보입니다.>

거절당했다.

그녀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보안… 레벨? 그러면 미스릴이 어디에 모이는지 말해 줘. 여기까지 오면서 고작 가루 몇 낱밖에 보지 못했거든.”

〈현재 보안 레벨로 들을 수 없는 정보입니다.〉

“어이,고철.”

슬쩍 끼어들었지만.

〈본 비서 노바는 크렉소르 가문의 질문에만 응답합니다.〉

“음,아까 움직이던 기계 팔들은 어떻게 된 거지?”

〈현재 보안 레벨로 들을 수 없는 정보입니다.>

카린이 인상을 찌푸린다.

“뭐야,권한 이전이나 받으라고?”

〈그렇습니다. 현 크렉소르 가문

가주가 권한 이전 대상이나,귀하의 혈통과 수행인의 아티팩트 보유, 현 포인트 진입 능력과 남은 전력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판단합니다. 권한 이전을 승인하십시오.〉

“좋아. 네 주인이 되어 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

〈맞습니다. 어렵지 않지요.〉

자그마한 키로 카린을 을려다보던 로봇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먼저 사용자의 성명을 인식시켜 주십시오.〉

“카린 크렉소르.”

〈노바의 임시 사용 권한이 카린 크렉소르에 게 이 전되 었습니 다.〉

“그래,너는 뭘 할 수 있지?”

〈‘가문의 일원’의 보안 권한으로는 크렉소르 가문의 역사와 역대 가주의 활약에 대한 간략한 해설 청취가 가능합니다.〉

카린은 어릴 때 배운 그 따분한 내용을 반복해서 들을 생각은 전혀 없는 듯했다.

“•••좀 재밌는 거 없어?”

〈내장된 ‘고대의 유혹어’를 현재 상황을 분석해서 효과적인 형태로 알려 드릴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 적용하시겠습니까? 광산에서 몇 주씩 일해서 꼬질꼬질해진 상태더라도, 이 유혹어만 있으면!〉

까만 판 위에 떠오른 눈이 당황한

표정의 호위를 곁눈질했다.

“필요 없어. 이 녀석,지금 도대체 무슨 소릴 지껄이는 거야?”

카린이 머리를 짚으며 물었다.

“이 광산의 비밀 같은 거 몰라? 전 가주님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분이 탔던 타이탄은 어디 있고? 이 뒤로 가면 뭐가 있지?”

〈임시 보유자의 접근이 허가되지 않은 정보입니다. 적합한 코드를 입력하십시오.〉

“뭐? 권한을 이전했다면서. 이거

어이가 없네. 루이,혹시 어디서 코드 같은 거 들어 봤어?”

호위가 고개를 저었다.

혹시나 하는 눈빛이 나까지 홀끗 향하지만 물론 모른다.

“네가 나를 도와야 여기서 우리가 빨리 나갈 수 있다니까?”

설득이 이어졌지만.

〈접근이 허가되지 않은 정보입니다. 코드를 입력하십시오.〉

“여기서 부숴 버릴 수도 있는데.”

〈코드를…….>

협박도 먹히지 않는다.

이 부분에서는 자율적인 판단력을 가진 인공지능이 아니라 공식화된 알고리즘을 가진 기계인 것처럼, 코드를 입력하라는 말만 계속해서 반복할 뿐이었다.

“하아,쓸모없네.”

〈비서 노바는 쓸모없지 않습니다. 카린 크렉소르 귀하는 노바의 권한을 이전받았습니다. 완전한 정비와

가문 복귀에 분명한 책임이 있습니다. 책임을 완수하십시오.〉

“깡통이 시끄럽네. 확 따 버릴까?”

〈귀하에게 크렉소르 가문의 일원 으로서 고급 언어를 사용할 것을 권장합니다.〉

“그럼 고급 정보를 내놓든지.”

〈코드를•"….>

“놓고 가야겠어.”

〈임시 소유자 카린 크렉소르에게 권고합니다. 비서 노바는 최고급 인공지능입니다. 비서 노바가 임시 소유자를 버릴 때까지 함께하기를 권고드립니다.〉

“…역시 분해가 답인가.”

“해 줄까?”

로봇의 머리 위에 손을 올려놓자 기계는 흠칫 진동을 일으키면서도 꿋꿋이 말했다.

〈노바를 한번 분해하면 재결합은 어렵습니다. 현재 크렉소르 가문 수준의 기술력으로는 다시 쓸 수 없음을 알려 드립니다.〉

“어휴,아니에요. 일단 데려가죠.”

카린이 고개를 저었다.

아래로 깊숙이 내려가도 노바는 계속 뒤를 따라왔다.

〈진입하지 않기를 권고드립니다.>

“시끄러. 지름길이라도 말하든지.”

〈코드를 입력하십시오.〉

덜덜대서도 계속 쫓아오는 노바가 중얼거렸다.

알고리즘에 따른 반응일 뿐이었고 나는 무시하면서 길을 안내했다.

지형 탐지로 가야 할 길은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어차피 크게 갈래길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깊이 들어가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확실히 인간이 온 지는 수십 년이 지난 걸까.

광산에서 사용하는 배수펌프도 바싹 말라 있었고.

아예 생명체의 흔적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가파른 경사를 빙빙 돌아 아래로 내려갔을 때.

어떤 조명도 소음도 없는 고요한 광장이 나타났다.

한 점도 불지 않는 바람이.

고요히 아우성치는 것 같은 장소.

이곳의 분위기는 지금까지 지나온 어떤 장소보다 훨씬 더 음산했다.

앞으로 걸어가자 풍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불꽃이 서서히 장소를 밝히는 순간 오히려 어둠으로 덮이는 것 같은 지독한 풍경.

내려오며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인간의 해골이 모두 여기 있었다.

철제 침대에 수많은 해골이 머리에 잔뜩 전극이 달린 모자를 덮어쓴 채 몸이 단단히 묶여 있었다.

살도,피도,근육도.

내장도 모두 썩어서 사라졌지만.

고통스러웠다는 감정만은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기스-제-라이를 만난 던전에서, 검게 녹슨 새장 수십 개에서 느낀 그 음산함처럼 고통이 흔적이 되어 이곳에 남아 있었다.

놓인 건 묶인 인간의 해골만이 아니다.

지금껏 지나쳤던 현장.

잔해 위를 지나다니던 철인들의 팔,다리,몸통.

그러나.

예외 없이 모두 누락되어 있었던 그 머리들이.

단단한 외피가 벗겨지고 해체된 채 굵은 케이블에 연결되어 있었다.

어떤 배선으로 설치된 건지.

어떤 신호를 보내는 건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파악할 수 없었고.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그때 였다.

뭔가에 홀린 것 같은 표정으로,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카린이 졸졸 따라오던 로봇에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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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분한 낭독이 이어진 뒤.

〈비밀 코드 입력됨. 보안 레벨을 상향 조정합니다.〉

“예?”

“그걸 대체 어떻게 알았지?”

당황한 나와 루이를 보며.

카린이 천장을 손으로 가리켰다.

“저기 써 있네요.”

카린이 읊은 문자열이 천장 위에 커다랗게 적혀 있었다.

“코드를 버젓이 적어 놓는다고?”

여기까지 을 만한 인간들.

근무하는 인간들은 복잡한 코드를 굳이 기억할 필요 없이 읊으라는 듯 거대하게 새겨진 코드는.

50년의 세월이 지나도 알아볼 수 있도록 그 자리에 그대로였다.

“결국 사람은 편한 걸 찾으니까요. 비슷한 짓거리를 한두 번 본 것도 아니고요.”

카린은 노바를 향해 살살 손짓하며 물었다.

〈노바,이제 설명해 봐. 이 장소는 뭘 하는 곳이지?〉

〈현재 가동 중단된 실험시설로…….>

코드가 입력된 노바는 해골들이 나란히 놓인 철제 침대를 보면서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영혼 적출 실험입니다.>

“영혼…적출?”

기계음의 설명이 이어진다.

육체의 기계화.

근육을,팔다리를.

내장을 교체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었다.

결국 뇌에는 수명이 있고.

태어난 순간부터 신경과 뇌수는 금세 늙어 간다.

명성을 얻고,천금을 얻고.

영화를 누리면 무엇하나.

그 불꽃은 금세 꺼져 버린다.

꽃이 지기에 꽃이라고 생각하는 건 결국 찰나를 살아갈 수밖에 없는 패배자들의 자기위안일 뿐.

죽음이,끝이 결국 정해져 있기에.

오히려 모든 게 허무해져 버린다고 믿는 자들의 수는 적지 않았다.

죽음을 버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영과 육의 완전한 분리.

그것이 이 실험의 목적이었다.

〈분리한 혼을,철인들에게…….>

기계는 무수한 해골들의 반대편에

놓인 철인의 머리들을 가리킨다. 두 실험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나약한 몸에서 영혼을 분리해서.

일단 오른쪽에 연결된 철인들의 ‘머리’에 혼을 넣는 게 이 실험의

첫 번째 단계였다.

〈실험은 실패했습니다.〉

온전한 영혼의 분리.

전이는 한차례도 제대로 일어나지 못했다.

철인 전체를 놓고 인간의 영혼을 전송하려고 했으나,전기적 자극을 통한 영육의 분리 시도는.

영혼을 잘기잘기 찢어내 철인들의 몸에 흩어 버리는 데 그치고.

〈특히,‘팔’과 ‘손’에 찢긴 영혼이

박혔습니다.>

“그럼 지나면서 봤던 팔들에……

루이가 미간을 찡그린다.

인간의 정신이 금속에 박혔다는 사실에만 전율하는 것은 아니다.

온전한 영혼이 아니라 파편이라고 할지라도.

금속에 박힌 채 발버둥 친다,라는 느낌조차 주지 않고서 기계적으로 광맥을 캐는 움직임을 보이려면.

자동화된 채굴 장비처럼 착각할 정도에 도달하려면.

그 안에 든 혼은 50년간 얼마나

마모되었다는 이야기일까.

기계의 설명을 들을수록 실험실의 온도는 점점 내려가는 것 같았다.

“이 실험들은… 누가 다 한 거지?” 길게 숨을 뱉은 카린이 메스꺼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겐콘 크렉소르가 장소를 제공하고, 트로핀 여단이 주도했습니다.〉

“…전 가주님이군요.”

루이의 침음성에 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50년 전 타이탄과 함께 무저갱에

떨어졌다는 전 가주의 이름이다.

“트로핀 여단이 크렉소르 가문에 밀착해 있던 이유 중에 하나겠군. 비밀스러운 실험을 진행하기에는 여기만 한 장소가 없었을 테죠.”

육체와 영혼의 분리.

‘트로핀 여단이 원래 이런 실험을 하던 녀석들이었나?’

나냐우의 부재가 트로핀 여단의 이런 왜곡을 불렀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지만.

‘바뀌지 않는 건… 있는 걸까.’

조금 더 생각해 보면.

트로핀 여단은 어느 세계선에서나

비슷한 걸 추구하는지도 모른다.

나냐우가 존재하는 세계선에서, 그녀는 개인의 영생을 부분적으로 달성했으니까.

나냐우와의 첫 만남.

레나 앞에서 손끝을 찌르고 은빛 핏방울을 홀려,본인을 증명하던 모습을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그래,코드도 입력했으니까 이제 차례대로 털어놔 봐. 전 가주님은 어디 있는 거지? 그분이 탑승했던 타이탄은?”

끼리릭,하는 소리와 함께 로봇이 고개를 돌렸다.

〈원 권한자 겐콘 크렉소르는 현재 노바와 위치 공유를 단절했습니다. 하지만 겐콘 크렉소르가 원격으로 전달합니다.〉

〈다,죽일,거야.〉

〈다, 죽일,거야,라고 반복하고 있습니다.>

“설마 50년 동안 이곳에서 살아 계셨다는 겁니까?”

“가주님이… 나를 죽인다고?”

두 인간이 동시에 의아한 외침을 토해 냈다.

〈겐콘 크렉소르는 후손을 인식할 지능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권고합니다. 탈출하십시오.〉

빠른 속도로 음성을 출력해 대는 로봇에게 나는 어깨를 으쏙했다.

“내가 이길… 텐데?”

〈과도한 자신감으로 추측됩니다. 설령 진실이라고 해도 그 과정에서 부수적인 대미지로 인한 비밀 비서 노바의 손상이 극히 우려됩니다.〉

“…결국 싸움 나면 너가 다칠까 봐 겁난다는 이야기잖아. 안 그래?”

트라우마라도 있는지 전 가주를 과하게 두려워하는 로봇을 가만히 바라봤다.

50년 전에 여기 처박혔다는 게, 어떤 녀석인지도 만나 보고 싶고.

그때 였다.

〈미스릴을 원하십니까?〉

“으응?”

옆에서 듣고 있던 카린의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탈출 거절에 대한 대안으로 겐콘 크렉소르가 도달하지 못하는 곳에 안내하겠습니다. 광산의 미스릴이 모두 모이는 장소입니다.〉

“뭐야,사기 치는 거 아니지?”

“수락… 해도 되죠?”

카린이 침을 삼키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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