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5화 주머니 속의 칼 (19)
- 과드득!
거대한 장갑을 뜯어냈다.
맞을 대로 맞아서 방어 마법이나 결합고리도 모두 풀린 상태.
은빛의 거신이 흉측한 기계전갈을 차분히 해체하는 모습은 종교화에 나을 만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 o 으”
장갑 아래의 복잡한 부품을 보자 막막해진다.
뭘 어떻게 해야 할까.
- 파직! 파지직!
거대한 크기를 반영하듯 동력기관도 곳곳에서 작동하며 스파크를 튀기고 있었다.
이것저것 죄다 이어붙인 것 같은 모양새지만 나름대로 묘한 규칙도 느껴지고.
마치 피처럼 내부의 회로 곳곳을 흐르는 유동액도 있었다.
-- O • -- O • -- O •
실린더 안쪽에서 움직이는 수많은 피스톤링에서 소음이 울려 퍼진다.
관절 부위의 마찰음과 방열기의 팬 소리를 들으며 내부 이곳저곳을 들여다봤다.
“육체는 소멸된 상태인가?”
〈그렇습니다. 현재 내부에 유기체 반응이 감지되지 않습니다.〉
“ o 으”
-- T그 •
- 우우우웅…….
아포플라도 눈을 감고 집중한다.
[반경 30미터… 탐지.]
[반경 40미터… 탐지.]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건가? 네게 습득한 탐지를 해 봐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육신 같은 건 여기 없다. 너도 해 봐라.]
“진작 했다고.”
우스꽝스러운 녀석.
물론 마주할 때부터 기계 전갈의 내부는 이미 탐색하고 있었다.
말랑말랑한 인간의 육체 같은 건 역시 탐지되지 않는다.
노바에게는 확인차 물어봤을 뿐.
겐콘 크렉소르의 영혼이라는 게 있었다면.
완전히 기계 안에 들어가 버렸다는 이야기다.
- 철컥. 철컥. 철컥
모두 다 금속뿐이다.
타이탄들의 몸이 결합된 거대한 기계덩어리지만 정작 타이탄들의 콕핏은 모두 다 분해되고 녹아 버린 상태다.
여기서 뭘 얻어낼 수 있을까.
이 미스릴 광산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볼 수 있을까?
천계에 대해서 물어본다면 뭐라고 대답할까?
이 수상한 광산.
물어볼 상대는 오직 녀석뿐이다.
50년 동안 이 광산의 핵심이었던
있었던 크렉소르의 전대 가주.
그가 모르면 아무도 모르겠지.
‘뭐라고 말을 걸까.’
우선.
말을 걸 대상을 찾아야 한다.
〈이곳을 비트십시오.>
과연 플라즈마 대포를 쓸 수 있게 할 만큼 연산 능력이 뛰어난 건지, 노바는 이 기괴한 기계의 구조도 어렵지 않게 파악해 낸다.
- 끼긱. 끼기긱.
〈이곳은 단순 내부 장갑입니다. 비틀어서 뜯어내십시오.>
- 우드득!
〈뽑아 버리십시오.〉
- 빠직! 파직! 파지직!
〈분석 중. 잘라 버리십시오. 유동액 9.7리터의 유출이 예상됩니다만
기동에는 무관합니다.>
비밀 비서 노바.
조금 잔혹한 녀석인지도 모른다.
- 서걱! 좌아악!
피처럼 뿜어지는 유동액 안쪽으로 동그란 형태가 보였다.
〈도달 성공〉
〈내부 코어로 파악됩니다.>
“이거로군.”
동그란 코어는 한눈에 보더라도 메인프레임이라고 느껴지는 장소에 박혀 있었다.
무게 중심과 간격의 정중앙에.
마치 이곳을 보라는 것처럼.
이게 전갈의 핵이고.
코어라는 것처럼 중심부에 단단히 자리잡고 있었다.
복잡하게 케이블이 얽힌 동그란 연산장치는 아포를라의 머리 정도 크기였다.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손으로 잡자 웅웅거리는 울림이
깊게 전해진다.
- 크르르르르…. 크르르르릉..
- 구궁. 구르릉. 쿠구구궁…….
- 갸오오오오오오오!
- 케륵! 케륵! 케르르륵……!
밀고 당기는 듯한 격렬한 박동과 짐승의 응얼거림이 들려온다.
“노바,너는 이 녀석이랑 소통이 가능하다고 했지.”
〈겐콘 크렉소르는 이지를 상실한
상태지만, 단순한 의사와 감정의 파악은 가능합니다. 분노와 공포, 좌절된 폭력성이 감지됩니다〉
“O으”
- T그 •
겐콘 크렉소르라는 인간에 대해 생각했다.
‘왜 미친 거지?’
곳곳에 박힌 타이탄의 머리들을 바라보면서.
지금까지 지나온 실험의 광경을 떠올리며 맞춰 본다.
‘원하는 걸 이룬 건데.’
겐콘 크렉소르는.
정신과 육체의 분리를 성취했다.
고작 전갈 형상의 기계에 정신이 익숙해졌다고.
이런 몸에서 수십 년을 생활했다고 이지를 상실했을까.
‘이게 정말 미칠 일일까.’
50년은 긴 세월이지만.
아이작은 300년을 형태조차 없는 정신체로 버렸다.
아이작이 결코 일반적인 예시가 될 수야 없겠지만.
겐콘 크렉소르라는 인간 역시나,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 해도 대단히 비범한 부류다.
육체를 가지고 있을 때에도 이미 준초월급 타이탄 파일럿이었고.
정신과 육체의 분리를 성공시킨 광기의 과학자이며.
마왕의 추종자들을 타이탄 강화에 이용하고.
지금은 전투력으로 본다면 초월급 타이탄 이상인 존재를 만들어 내어 훌륭하게 조종하고 있다.
어느 면으로 보나 당대의 천재.
‘쉽게 정신이 무너질 만한 존재는 아닐 텐데.’
이지를 잃어버린 건 어째서일까.
50년의 세월이라든지.
타이탄의 형태와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코어는 하나만 있는 거지?”
〈그렇습니다.>
‘흐음……
노바의 말도 그렇고.
- 콰직!
여기저기 뜯어봐도 마찬가지.
- 우득! 우드득!
〈수호자,더 이상 겐콘 크렉소르를 파손할 이유가 감지되지 않습니다. 현재 이상의 파괴 목적은 가학심의 충족으로 간주하겠습니다.〉
“•••이제 안 할 거다.”
역시.
멀쩡한 이성이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숨겨진 코어 같은 건 없다.
“아포플라,노바.”
나는 두 녀석을 불렀다.
“내가 이 전갈이랑 소통하는 데 도움 될 만한 정보 없어?”
〈없습니다.〉
[•••없다.]
좌우의 스피커에서 각각 즉답이 날아온다.
아는 척조차 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부자연스럽지만.
거짓말로 생각하는 건 아니다.
묘하게도.
이 순간에는 아포를라와 노바에게 도움을 얻을 수 없으리라는 직감이 스쳐간다.
이들은 모른다.
겐콘 크렉소르가 미치게 된 계기, 천계의 접속,특정한 시기를.
마치 그 부분만 기억에서 사각사각 도려내어진 것처럼.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느낌.
높이도 맞은편도 문도 없는 벽을 마주한 것 같다.
도와줄 동료는 없다.
루비아도,레나도,기스-제-라이도,
아이작도 없다.
저번 생까지 함께했던 후작이나, 그 꿍꿍이를 끝까지 알 수 없었던 초롱너울마저 없다.
혼자 헤쳐 나가야 하는 순간.
온전히 홀로 해내야 하는 선택.
새삼스럽게 느끼는 외로움이 문득 우스웠다.
‘대체 언제부터 동료를 당연하게 여긴 거지?’
혼자 움직이기로 결심한 이유마저 잊어버린 걸까.
내 눈앞에서.
그들이 어떻게 사라졌는지.
어떤 일을 겪어 왔는지.
지금 내가 왜.
무엇을 위해서 움직이는지조차. 정신이 확 들며 현실이 끼쳐 온다. 하지만.
여전히 갈피를 잡을 수 없다.
뭐든 의견이 듣고 싶었다.
‘조언……
문득 잊고 있던 게 떠오른다.
- 人근른
인벤토리에서 자그마한 펜던트를
꺼냈다.
레나의 펜던트.
꽤나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다.
사용할 때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굳이 꺼내고 싶지 않았다.
만지작거릴 때마다.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그녀가 떠오르니까.
손끝에서 좌우로 흔들리는 줄을 홀린 것처럼 바라본다.
죽은 게 아니다.
죽은 채 이 세계가 고정된 것조차 아니다.
어떤 흔적도 없고.
아무도 그녀를 기억하지 않는다. 세계 바깥으로 뽑혀 나간 채. 오직 내 기억 속에서만 존재한다.
레나라면 뭐라고 했을까?
정확하게 날 이끌어 줬던 그 모든 순간이 파리한 꿈처럼 느껴진다.
‘되찾아야 해.’
서성거리며 추억을 되새기다 다시 주먹을 쥔다.
어쨌거나.
‘이 펜던트……
실용적으로만 생각해 보면 어째서
쓰지 않았는지 이상할 정도다.
시나리오 클리어의 보상.
레나가 감지 가능한 수준에서지만, 위기를 회피할 수 있고,조언까지 건네줄 수 있는 아티팩트다.
펜던트를 목에 걸었다.
경고는 없다.
앞에 닥친 위기는 없다는 이야기.
좀 더 적극적으로 써 봐야겠다.
‘지금… 발동하면?’
앞으로 7일 동안은 봉인되겠지.
하지만 어차피 계속 쓰던 녀석도 아니니까.
이런 방식으로 쓰는 건 처음이다.
과연 무슨 조언이 나올까.
괜히 떨려온다.
마치 사라진 레나의 혼을 이곳에 강령시키는 것 같은 기분이다.
긴장 반 설렘 반으로.
‘발동.’
펜던트에서 약한 빛이 홀러나오기 시작했다.
어떤 조언을 줄까.
그리고.
[직접 생각하세요! 당신은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떠오른 메시지는 당황스러웠다.
‘혼자 생각하라니……
이런 것도 조언이 되나.
하지만.
묘하게도 불쾌한 감정은 조금도 들지 않는다.
레나가 나를 믿는다면서 옆에서 지켜봐 주는 것 같은 느낌이다.
‘하긴.’
확실히 바른 조언일지도 모른다.
펜던트가 실체화하는 것은.
레나라는 인간이 살아온 경험으로 만들어졌던 직감.
하지만 쌓인 경험의 양과 수준을 생각한다면 이제 내가 압도적이다.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무수한 경험을 쌓았는데 판단을 못 내린다는 편이 우습지 않을까.
그 많은 일을 겪으며 성장하지 못했다는 게 부자연스럽다.
통찰도, 직감도.
캐빈 애슈턴의 시나리오에.
떠오르는 상태창의 안내에 과하게 의존하지 않기로 했으면서.
어째서 누군가의 조언에는 아직도
기대려고 하고 있을까.
- 털석.
콕핏 안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아 생각한다.
떠을려라.
타이탄에 대해.
이 기계에 대해 내가 뭘 아는지.
방금 아포를라를 조종하면서 겪은 경험들.
그리고.
기억이 달린다.
타이탄에 관한 책을 읽은 것.
‘사람을 흉내내는 인형,이었나.’
그 둘을 관통하는 공통점이 금방 엮여진다.
‘공조 현상……
자아를 갖는 타이탄은 공조 현상을 일으키면 힘을 빌려준다.
파장이 맞으면 파일럿이 약해도 조종을 허락하고.
본신의 능력이 뛰어나도 타이탄이 거절하면 타지 못하지만.
‘내가 그런 수준은 넘었다는 건 방금 경험했지.’
억지로 마력을 불어넣은 강제적
공조를 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좋아,억지로 도와주게 만들자.’
강제로 마력을 불어넣어 타이탄이 어쩔 수 없이 허락하게 하자.
아포플라에게 했던 것처럼 하면 답이 나올 거다.
형태는 다르지만.
비슷한 전투력의 타이탄.
아포플라와도 사전 교감 따위는 전혀 없었지만.
제압하고 코어에 마력을 쏟아붓자 동조율이 올라가고.
녀석이 보유한 공학의 지식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들어 왔다.
‘가능할 거야.’
저항할 엄두도 나지 않게 빠르게
해치워 버리자.
“노바. 아포플라. 잠시 내린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너라면야.]
- 철컥.
열린 콕핏을 넘어 밖으로 나간다. 아포플라에 탑승한 상태라면. 정신이 섞일지도 모르니까.
내리는 편이 깔끔하다.
- 달그락.
코어를 내 손으로 직접 잡는다.
一 콰아아아아앙!
손에 잡은 코어에 그때처럼 다시 마력을 불어넣는다.
코어를 넘어 기체 전체에 마력이 범람한다.
- 동조율 21%
코어에서 기계음이 울려퍼지면서 내부의 뒤틀린 구조가 바로잡힌다.
어딘가 날카롭게 날이 서는 느낌.
나에게 공격당한 것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이미 그전부터 뒤틀리고 부러지고 녹은 것 같은 기계 내부에 마력이 홀러넘친다.
흘러넘치는 머리,흘러넘치는 팔, 흘러넘치는 철인의 굵은 손가락들, 흘러넘치는 복합 압축 관절들 위로 내 마력이 폭주하면서.
- 동조을 31%…….
역시.
동조율은 빠르게 올라가면서.
머릿속으로 기억이 흘러들어 오기 시작한다.
영상으로, 소리로.
깨끗하게 흘러드는 기억.
‘이런 식으로도 되는 건가?’
스킬이 생겨나던 아포플라 때와는 사뭇 다른 경험이다.
하지만 애초에 타이탄과 공조해 본
경험은 한차례밖에 없다.
‘공조’가 일괄적이라는 규칙 따윈 당연히 들어 본 적도 없으니까.
- 동조율 44%…….
흘러든 기억이 차례대로 풀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