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6화 주머니 속의 칼 (20)
항상 독보적이었던 어린 시절. 귓가에 천사가 속삭이는 것처럼. 소년에게는 모든 문제에 간단히 답이 나왔다.
〈이런 분은 다시 없을 겁니다.>
모두가 입을 모아 말했다.
활을 잡으면 백발백중.
검과 창을 잡으면 그것도 잘했고,
마법의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마력에 감응했다.
수학에도 독보적으로 뛰어난 데다, 작곡까지 뛰어나고,작곡한 곡을 스스로 연주하는 악기 실력마저도 명인의 경지.
물질의 합성,분해,변환을 다루는 연금에도 탁월한 감각을 보인 데다, 재단의 재능까지 있었다.
인형을 다루는 조종술마저 탁월해 모두를 놀라게 했으며.
망치와 톱을 잡으면 그것까지도 잘 만들었던 데다.
무엇보다 그가 누군가를 축복하면 정말 좋은 일이 벌어졌다.
- 쏴아앗!
열네 살의 소년이 왼손을 들자 모두가 주목했다.
허공에서 춤추는 바람이 실습실의 인형들을 베어 냈다.
〈도련님,방금은 영창조차 들리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신 겁니까?〉
교사는 괜한 허세를 부리지 않는다.
쓸데없는 권위 같은 건 내세우지
않는다.
겐콘 앞에서 그런 건 어떤 의미도 가지지 못했다.
애초에.
그는 ‘배우기’ 위해 이곳에 있는 게 아니니까.
겐콘 크렉소르가 참가하는 수업은 그 목적이 교육에만 있지 않다.
하나의 목적이 더해진다.
참가하는 다른 크렉소르 가문의 자제들이 겐콘의 압도적인 재능을 목격하고,납득하고,모두 승복하게 만드는 과정.
- 동조을 55%…….
스무 살.
한 명의 반대도,경쟁자도 없이.
전대 가주는 그에게 편한 얼굴로 가문을 물려주었다.
크렉소르의 새로운 가주로서 그는 의사당에 섰다.
세대의 천재라는 그에게 호기심을 갖는 사람들을 내려다본다.
때로는 체제의 관료들이.
혹은 어떤 뜨거운 사상이 시대를 이끌어 가지만.
지금의 가문을.
자유 연합을 이끌어 가는 건 바로 겐콘 크렉소르였다.
〈신임 크렉소르 가주,거절할 수 없는 제안만 하는 남자야.>
〈함께 있으면 의석이 아닌 함정에 앉아 있는 것 같다니까.〉
〈그래도 손을 잡을 수밖에 없지.>
그는 의회를 이끌어 버려진 땅을 개간하고,운하를 건설해서 늘어난 작물의 유통을 크게 개선했다.
무엇보다.
〈가주,이 예산은 너무 과한 것 아닙니까? 감당할 수는 있겠지만… 시장의 물가가 지나치게 흔들릴지도 모릅니다.〉
〈시장의 물가는 열세 가문이 모두 나눠 짊어지는 부담이죠.〉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우리는 가장 부유한 가문입니다. 분노가 일어나면 크렉소르가 우선 타깃이 될 겁니다. 분노는 한곳에 쏠리기 쉬우니까요.〉
겐콘은 담담한 표정으로 원로를
바라봤다.
가만히 침묵하고 있을 때조차도 그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그러나 크렉소르가 자선 사업에 앞장서고,빈곤층의 지지를 얻으면, 다른 가문들이 빈곤층의 눈치를 봐야 할 때 역설적으로 가장 부유한 우리의 눈치를 보게 될 겁니다.〉
그렇게 시장에서 버려진 자들에게 기본 소득을 제공하고.
자선 사업을 시행했고.
덕분에 안정시킨 치안으로 평민층은
물론 자기 돈을 쓰기 싫었던 일부 부유층의 지지마저 동시에 얻었다.
- 동조을 66%…….
하지만 그는 인간들 사이의 일에 금세 흥미를 잃어버렸다.
〈이제부터 저도 실험에 적극적으로 참여할까 합니다. 크렉소르의 현직 가주에게 그 정도 지분은 있으리라 생각하고.〉
언제 어디서나 어떤 표정을 쉽게
만들어 보였던 연기자.
겐콘은 그 어떤 것도 얹지 않은 무표정으로 말한다.
협상의 여지는 없지만.
어차피 양쪽의 이익이 들어맞는다.
〈가주님이라면 물론 대환영이지요. 바쁘지만 않으시다면 저희 쪽에서 항상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습니다. 당장 실험실의 모든 접근 권한을 드리겠습니다.〉
제국과 엠버까지 세력이 미치는 정보길드.
트로핀 여단의 간부들은 진심으로 그를 환영했다.
- 철컥.
광산 문이 닫히고.
크렉소르는 안으로 들어간다.
그때부터.
겐콘 크렉소르의 기억은 대부분 미스릴 광산에 집중되어 있었다.
실험,실험,실험.
의회의 배경.
가문의 배경은 잘 보이지 않는다.
보내는 시간도 시간이지만.
겐콘 크렉소르의 관심사는 대부분 실험에 쏠려 있었다.
〈가주님.〉
〈가주님…….>
〈의원님.>
〈위원장님…….>
들리지 않는다.
금기를 범하는 혼과 영생에 관한 연구보다.
흥미로운 게 무엇이 있겠는가.
트로핀 여단에게 실험의 장소를 제공하면서도,역대 가주들은 모두 허황된 일이라고.
돈과 정력이 남아도는 녀석들의 일이라고 생각하며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고.
실제로도 300년간 줄곧 실패해 온 일이지만.
〈가능하다.〉
겐콘 크렉소르에게는 그 실험의 뚜렷한 가능성이 들여다보였다.
잡힐 듯 말 듯.
지하 광산의 실험은 다방면으로 속도를 더해 가고.
- 동조율 77%..
〈이런 놀라운 작품을……!>
〈가주께서,정말 이런 걸 만들어 내신 겁니까?〉
〈탑승해 봐라.>
〈제가 어떻게 감히……!>
〈충분히 가능하다. 여기 세 대는 탑승자의 기준을 너희들 수준으로 낮춰 놓았으니까.〉
역사상 랭킹 20위 안에 들어갈 만한 타이탄을 4기나 만들어 낸다.
그리고,그때부터.
기억은 텅 비어 있었다.
보이지 않는다.
‘으음?’
마왕에 관한 이야기도.
천계에 관한 정보도 전혀 나오지 않는다.
한동안 영상은 텅 비어 있을 뿐.
심지어 혼자 천계에 대해 생각하는 모습조차도 없다.
부자연스럽다.
- 동조을 95%…….
묘한 저항감.
동조율이 좀처럼 오르지 않는다.
‘기억은 여기서 끝일까?’
- 파직...
- 파지직.
공허한 기억 속.
작게 스파크가 튀며.
- 동조을 100%.
기억 전체 동조를 달성하지만.
뭔가 개운하지 않다.
‘이게 100%라고?’
- 고오오오오…….
계속 마력을 불어넣었다.
코어뿐만이 아니라.
거대한 기계전갈의 몸 구석구석에 마력을 주입한다.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
혼을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면.
겐콘 크렉소르라는 녀석이 굳이 하나의 코어를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그냥 이 기계 안에 제 혼을 넣어 버리면 되는 거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이 코어에 담긴 건 겐콘이 가진 기억의 일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 파직! 파지직
기억 속에서 계속 스파크가 튀다,
기계 전갈의 기억.
그 풍경 속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기 시작했다.
‘으응?’
기억 속 공간에 스파크가 튀다가 불이라도 붙은 걸까.
우스꽝스러운 생각까지 든다.
아지랑이처럼 떠다니던 검은 연기는
계속해서 짙어지고.
이리저리 휘고,자라고,춤을 추며, 차지하는 공간이 점점 커져 갔다.
기억 속 풍경 구석구석 스멀거리며 타고 다니는 검은 연기.
연기는 순식간에 곳곳으로 퍼지며 스며들고,스며든 그곳에서 동시에 더 넓게 뿜어졌다.
질척하고 끈적거리는 검은 기운.
보이지 않는 작은 벌레 수억 마리가 꿈틀거리는 것 같다.
분명히.
어디선가 본 느낌이다.
‘이건……
알고 있다.
마왕 무르무르.
시체가 된 그렘린들이 엉겨붙어 우리에게 달려들게 만들었던 바로 그때의 질감이다.
기스-제-라이의 듀라한.
길라우트와 함께 침식 지역에서 맞서 싸운 상대들.
무르무르의 힘을 사용했던 적들이 떠오른다.
머리 없는 그렘린이 손을 뻗어서, 떨어진 머리를 다시 목에 붙이게 만들고.
시체와 시체를 타고 다니며.
시체들이 머리로,어깨로, 등으로, 내장으로 일어나 엉겨 붙으며 달려 들게 했던 그 검은 연기다.
고기로 만들어진 안개와 싸우는 것 같던 그때의 기분이.
그때의 연기가.
겐콘 크렉소르의 기억을 잠식하고 있었다.
‘이게 왜 여기서 나와?’
기억을 덮은 연기.
혹시.
‘마왕의 저주에 당한 걸까?’
동조율은 100%.
그럼에도 겐콘의 기억에 마왕은 없지만.
카린이 알고 있는 이야기에서.
겐콘 크렉소르는 마왕을 추종하는 무리를 모았다고 했다.
위험한 계약을 한 겐콘 크렉소르는 무르무르에 침식당한 탓에 이렇게 이지를 잃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마왕과 엮인 자의 말로라고 할까.
- 달그락.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문득 모순이 느껴진다.
‘말이 안 돼.’
마왕의 연기가 이렇게 피어오를 정도라면.
무르무르와 엮였을 때의 기억이 반드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가짜 기억이다.’
* * *
검은 연기는 기억의 경계를 넘어
기계전갈의 거대한 몸 곳곳을 이미 잠식하고 있었다.
겐콘 크렉소르가 여기 먹혔다면.
혹시.
나까지 먹혀 버리는 건 아닐까?
하지만.
계속 마력을 쏟아부었다.
그렇게 불길한 기분은 들지 않는다.
저런 것 정도에 당할 정도로 내 정신은 나약하지 않다.
불안하다면.
한 번에 밀어붙인다.
- 쿠구구구구…….
몸에 가득한 마력을 끌어모은 뒤.
- 우응! 우우우우웅!
슬쩍 몇 바퀴 돌리고.
버티기 힘들 때까지 하나의 선에 집중시켜서.
‘간다!’
- 쿠과과과과과과과과!
플라즈마 대포를 사용할 때보다도 한층 강한 마력이 폭풍처럼 한 번에 사출되면서.
- 콰광! 콰광! 콰광! 콰과과과광!
그리고.
- 쨍그랑.
더 이상의 폭발을 견디지 못하고 무언가 깨져 버리는 순간.
- 동조율 100%
- $_A] 율 0%
- 동#* @及[email protected]율 @[email protected]($
- 동조율 {#@%&
- 동조율 24%… 40%… 70%… 81%……!
‘81%라고?’
그 순간.
- 파앗.
시야가 밝아진다.
‘나,는……
아니,어두워진다고 해야 할까.
지직거림 없이 또렷하게 보이던 지금까지의 기억과는 다르게.
여기저기 실금이 끼고 군데군데 훼손된 영상이지만.
‘나는……
모든 게 가까워졌기에.
밝아진 것으로 착각한 것이다.
손을 내려다본다.
보인다.
창백한 피부에 흐르는 푸른 핏줄.
손을 들어.
어깨와 무릎을 만져 본다.
갸날픈 몸.
“겐콘!”
‘겐… 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앞을 바라본다.
냇가에서 밝은 얼굴로 다가오는 소년이 보인다.
환하게 웃으면서 똑바로 이쪽을 부른다.
주위를 둘러보지만.
소년과 나 외에는 아무도 없다.
“어딜 보는 거야! 거기 있어!”
‘내가… 겐콘 크렉소르?’
그 남자아이는.
벌써 추적추적 시들어 버린 4월의 목련을 밟고.
며칠 되지도 않는 수명이 다해서 냇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하루살이 시체들을 건너 나에게 다가온다.
- 우을.
가만히 쉬던 숨이 역겨워진다.
“괜찮아? 겐콘? 겐콘?”
아홉 살의 겐콘 크렉소르는.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수없이 많은 하나하나의 멸종에 대해 생각했다.
‘저 아이도,나도.’
죽는다.
영원히 닫혀 버린다.
‘싫어.’
그걸 생각하는 것만으로 지독한 혐오감이 일어난다.
살아남으리라.
끝까지.
그게,겐콘 크렉소르의 첫 번째 감정이었다.
* * *
가주가 되고.
가문의 입지를 넓히면서도 겐콘 크렉소르는 끊임없이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닫히고 싶지 않았다.
시들어 버리고 싶지 않았다.
“다음 안건은……
“이번에도 크렉소르 가문이……
들려오는 의원들의 목소리에서, 그는 비스듬하게 몸을 돌린다.
‘공허해.’
어떤 명예를 얻고,이득을, 권력을 얻더라도.
자신이라는 세계가 닫혀 버리는 걸 생각하면 허무해질 뿐이다.
겐콘 크렉소르가 느끼는 공허함이 정신을 쭉쭉 찢으며 난폭하게 밀려 들어온다.
피어나는 꽃을 볼 때마다,바쁘게 살아가는 모든 것을 볼 때마다 역설적으로 느껴지는 깊은 적막감.
지금 저렇게 뛰는 심장들이.
화려하게 피어나는 꽃들이 얼마나 앙상히 메마를 것인가.
시체가 될 것인가.
그것이 숙명이 아닌가.
고통의 나날.
‘가주님,괜찮으십니까?’
‘…타이탄을 만들어 보겠다.’
그나마 강철의 기계를 볼 때에는 허무가 조금씩 잊혔다.
그리고.
가문에 있는 유산.
“노바.”
〈현 가주,겐콘에게 응답합니다.〉
“너는 언제 죽지?”
〈본 유닛은 살아 있지 않습니다만, 질문을 기능의 유무로 추측합니다. 전력이 계속 공급되는 한 노바는 기능합니다. 일시적으로 셧다운이 일어나더라도 복구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정기적인 보수가 본 유닛의 안정성을 상승시킬 것입니다.>
‘노바?’
겐콘 크렉소르의 시선으로 보는 고대의 유산.
가주의 처소에 곱게 모셔져 있는 ‘원본’은.
불리는 이름도,목소리도,모습도.
상체의 검은 면에 가 있는 미묘한 실금까지.
모두 광산에서 발견한 내 옆의 ‘복제품’과 완전히 똑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