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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골병사는 던전을 지키지 못했다-414화 (414/458)

498화 주머니 속의 칼 (22)

카린만큼은 아니더라도.

루이 클로드.

그녀 역시 가주의 목소리에서 지독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완전히 같은 목소리인데… 대체 누구지?’

하지만 호위에 불과한 자신.

내부에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몰라도.

감히 크렉소르의 가주를 추궁할 수는 없다.

그저.

카린과의 거리를 벌릴 뿐.

“당신 누구냐니… 지금 가주에게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나는… 네 아버지다. 네가 무조건적으로 복종해야 할 가주다.”

망토에서 뻔뻔하게 울리는 목소리.

그 순간.

카린의 눈빛이 번득인다.

“어휴,우리 다정하신 아빠! 아빠 딸이 벌써 몇 살인데. 매일 저 아카 데미 끝나는 시간마다 맞춰서 마중을 나오던 때랑 다를 게 없으시네요! 그때도 저만 무조건 보호해야 한다며

난리를 피우던 거 다 기억나시죠? 똑같네요,정말!”

방금까지만 해도.

경계심으로 잔뜩 얼어붙어 있던 카린의 목소리가.

“세상에서 제가 제일 좋아서,저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다던 그때랑 정말 하나도 다를 게 없어요. 저랑 그렇게 헤어지기 싫어요? 스무 살이 넘어서도 그러시더니…. 저도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지만,이제 적당히 좀 하시는 게 어때요? 후후훗.”

순식간에 애정이 꾹꾹 눌러담아진 애교 넘치는 목소리로 변한다.

‘무슨 일이지?’

루이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아닌 척하지만 이제 참기 힘드셨구나. 그런데 저에게 목소리만 들려주시는 건가요? 앞에 나타나서 모습을 보여 주실 수는 없나요? 저도 보고 싶네요. 어때요, 제가 보고 싶다고 하니까 엄청 설레죠?”

편파적인 사랑이 자신에게 무한히 쏟아지라는 걸 확신하는 목소리.

한 자 한 자의 음성이 둘 사이의 관계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주,주군……

혹시 미쳐 버린 게 아닐까.

난데없이 애교를 부리는 주군의

목소리를 듣고 루이 클로드는 걱정 스러웠다.

이곳까지 오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법도 하지만.

저렇게 미칠 정도였을까?

자신의 목을 조른 망토에서 울리는 목소리보다도 주군의 그런 변화가 더욱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존경하는 주군은 오히려 그런 루이를 이상하다는 것처럼 바라본다.

“어머? 루이? 왜 모르는 척을 하고 그래. 나만 매일매일 손잡고 놀아 주셨던 바로 그 아빠잖아. 수십 년

동안 선물도 나한테만 챙겨 주고, 산책도 나랑만 가셨잖아. 기억 안 나?”

“예……?”

“나만 세상에서 제일 아끼고 사랑해 주시는 분이잖아. 루이도 잘 알면서.”

“그랬… 습니까……?”

당황스러웠다. 이들 부녀가 대체 언제부터 그런 관계였다는 말인가?

현 가주는 핏줄과 철저하게 거리를 두는 사람이었다.

수많은 상속자 모두와 거리를 유지 했다.

그럴수록 자신의 힘이 강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전형적인 크렉소르

가문의 가주.

‘주군도… 마찬가지일 텐데.’

추측이 아니다.

곁에서 보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카린도 마찬가지다.

부친에 대한 애정이나 신뢰 따위를 보인 적은 지금껏 한 번도 없었다.

아니, 그렇지만.

너무나 자연스럽다.

혹시 자신이 모르던 무언가가 있었 을까?

365일 24시간 카린과 붙어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인생에 대해 호위 따위는 모르는 게 이것저것 있었을지도 모른다.

현 가주와의 은밀한 관계도,혹시. 터무니없게도.

미묘한 배신감까지 느끼는 순간.

카린이 루이를 똑바로 바라본다.

언제나처럼 사람을 잡아끄는 듯한 시선.

조금의 퇴행도 애교도 느껴지지 않는 눈빛으로.

그녀가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우리 아빠는 내 말이라면 뭐든 다 들어주시는 분인데 무슨 긴장을

하고 그래? 여기서도 우릴 도와주러 오신 거잖아. 그런 분인걸.”

‘그런 분…. 뭐든 다 들어준다고…? 아……

눈의 찡긋거림을 보고.

그제야.

루이도 공기를 읽을 수 있었다.

눈치가 느린 편은 아니지만 그만큼 카린의 연기는 극적이었다.

그 어조만으로도,조금 어색했던 상황의 변화를 완전히 장악해 버릴 정도로.

가주와 카린 사이의 관계가 그런 게 ‘정상’이라고 누구나 믿게 할 만큼

빠르고 완고한 변환.

‘억지를 쓴다’ 같은 차원이 아니라.

‘혹시 미친 게 아닐까’에서.

자신이 묘한 배신감까지 느끼기 시작하게 만드는 압도적인 연기력.

여기에.

저 ‘가짜 가주’가 속아 넘어가지 않을 리 없다고 루이는 확신했다.

“물론이죠. 가주님이 카린 님 부탁 이라면 뭐든지 다 들어주시는 분이 라는 건 크렉소르 가문에 모르는 사람이 없지요. 그런 자가 있다면 스파이입니다,스파이! 완전히 외지인 이죠! 가문뿐만 아니라 의회 안에도

다 소문이 났는데! 그걸 모른다면 제국의 간첩이 아닐까요?”

목에 걸린 망토가 침묵한다. 혹시 좀 과하게 말한 건 아닐까? 루이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침착하자.

잠깐의 적막 뒤.

“으음…. 그래…. 나는 너를 아끼는 아버지다…. 그러니까 너도 순순히 내 말에 복종하도……

“그럼요! 당연히 들어야죠! 저도 아빠를 사랑하니까요. 하지만,아빠

말대로 여길 폭파하기 전에 잠깐만 구경하고 싶은 게 있어요. 저를 사랑하는 아빠라면,항상 그랬던 것처럼 당연히 들어주시겠죠? 네?”

더없이 달달한 말투.

무엇보다.

이걸 들어주지 않으면 어색하다는 전제.

두 부녀의 가공된 역사가 공기에 깔린다.

이 작은 극에서.

가주의 역할은 당연히 딸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

“ O 으.”

망토에서 울리는 목소리는 조금 혼란스러워하는 기색이었다 .

“그래…. 내 딸…. 어쨌거나....

내가 시키는 대로 이곳을 폭파하는 건 맞겠지?”

“그럼요! 멀리까지 가지도 않는걸요!”

“알았다……

즉석에서 말로 친 그물.

얇고,불안정했지만.

굳이 찢을 이유를 주지 않았기 때문일까.

‘걸려들었어.’

정체불명의 상대가.

카린이 짠 극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 * *

- 달그락.

천천히 고개를 내저으면서.

내가 망가뜨린 거대한 기계전갈에게 대답했다.

“여긴 크렉소르의 미스릴 광산이다.

너에게도 익숙한 장소일 테지.”

50년 동안이나 있었으니까.

이지를 상실한 채로.

인간의 몸이 아니라 기계전갈의 몸으로 살아오긴 했어도.

겐콘 크렉소르는 바깥보다 20년은 더 오래 이곳에서 존재해 왔다.

광산 구석구석은 전부 다 그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그 많은 다리를 붙였으나 결국 어느 곳에도 가지 못했구나.”

강철과 묵철,엔진과 스프링,휠, 거대하고 흉측한 무기들로 만들어져 있는 기계전갈이 마치 예민한 시적 감수성을 가진 소년처럼 중얼거렸다. 하나에 2미터가 넘는 여덟 갈래 발톱으로 동굴 암반을 파고든 채였다. 하지만 그 모습이 어쩐지 부조화나

불균형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흠…. 미친놈이 왜 저리 점잖게 말하지?]

오랜 세월 광산을 양분한 적.

아포플라는 그 말투에 적응이 안 되는 모양이었지만.

“미안하네,스스로 각성한 타이탄이여. 마기에 스스로를 숨겼던 탓에 수치 스러운 모습을 보였다네. 그대는 사건 당시에 자아를 갖추기 전이라 영향을 받지 않은 모양이로군. 다행이야.”

[으흠! 아포플라는 광기 따위에 휩쓸리지 않는다!]

“인간은 몸도 정신도 나약하지. 이해를 바라겠네.”

[•…".]

아포플라가 조용히 물러나고.

나는 곧 대화를 이어 갔다.

“천계로 가고 싶었던 건가? 네 기억을 읽었다.”

잠시 침묵하던 겐콘 크렉소르는 상황을 파악하고 나를 바라봤다. 아직 부서지지 않은 기계전갈의 눈이 깜빡거렸다.

“그렇다네. 자네는,강제 공조로 내 의식이 숨어 있던 마기를 모두 걷어냈단 말인가?”

“정답.”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끼릭. 끼리리리리릭.

기계전갈의 진동이 느껴진다.

명백한 동요다.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마력이로군. 제국의 탑주들도 그런 건 꿈도 꾸지 못할 텐데. 알려진 마왕들 가운데 자네 같은 자는 없었고. 혹시 제1좌, 바알의 군단장 같은 존재인가?”

아쥬라의 탑주들은 물론.

마왕에 대해서까지 상당한 공부를 한 걸로 보이는 녀석이다.

하지만 은근히 정확하게 바알을 꼬집어 말하는 게 당황스러웠다.

왜 하필 그놈의 군단장인지.

좋지 않은 기억들이 떠올라서 괜히 반발심이 들었다.

“그딴 거 아니다. 잘못 짚었군.”

“그렇다면… 이 세계에서 신이 되지 못하고 잊힌 피안의 존재들인가?

“피안의 존재들?”

“금서들은 이 세계에 마계도 천계도 아닌 초월자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내게 알려 주었지. 원래 신으로 만들어졌으나 알맞은 자리에 들어가지 못한 탓에 봉인된 존재들 말일세.”

묘한 이야기였다.

‘초월자들이라.’

나도 짚이는 자들이 없는 건 아니다.

마계의 경계를 아무렇지 않게 지나 가고.

인벤토리에 매듭을 묶어 줬던 하얀 후드나.

캐빈 애슈턴 같은 존재가 거기 속할지도 모른다.

‘아니면,비역에서 만난 자들.’

내가 그들 중 하나라고 우기기에는 조금 부족한 면이 있다.

하얀 후드는 그가 가진 두 개의 매듭으로도 내 인벤토리에 극적인

변화를 심어 줬다.

‘그런 게 106개나 더 있다고 했자-.’

비슷한 수준이라고는 도저히 말하기 힘들다.

“거기까진,아니다. 그냥 크렉소르의 조력자라고 생각해라. 유망한 네 후손을 도와주고 있었지.”

“내 후손을 돕는 데 그치지 않고 나를 암흑에서 구해 주다니……. 이 고마움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알려 주게.”

겐콘 크렉소르의 말투는 묘하게 고풍스러웠다. 끊임없이 세계의 비밀을 찾기 위해 읽어댔다던 수많은 금서에서 받은 영향일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고마움을 갚을 방법이라.’

내가 겐콘에게서 원하는 건 확실히 있었다.

녀석의 기억에서 무엇보다도 신경 쓰였지만.

과도한 개입 때문에 오히려 기억이 깨져 버렸던 부분이 떠올랐다.

“네가 의도했던 대로 천계에 간다면… 이 세계에서 사라진 영혼들을 데려을 수 있게 되는 건가?”

- 끼릭. 끼리리릭.

둔탁한 금속음.

마찰이 묘한 리듬을 만들어 낸다.

마치 기계전갈의 희미한 웃음소리 같았다.

“노바는 그렇게 말했다네, 은자여. 하지만 그걸 검증하려는 단계에서 천계의 저주에 튕겨서 지금의 내가 되어 버렸지.”

지금의 나,라는 말에서 명백한 자조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 씁쓸함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희미한 자부심이 잔불 처럼 남아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비록 미치기는 했지만.

겐콘 크렉소르는,그토록 바라던 불사에 성공했으니까.

어쨌건 그건 녀석의 사정이고.

자세히 캐묻고 싶은 게 있었다.

“혹시,평범하게 죽은 게 아니라, 이 세계에서 뽑혀 나간 존재들도 천계에 가면 만날 수 있게 되나?”

레나나 아이작,나냐우는 단순히 죽은 게 아니다.

“그 존재가 완전히 없었던 것처럼 역사나,모든 사람의 인식 속에서 지워져 버린 경우에도 천계에 가는지 알고 싶어.”

세계선에서 영원히 사라진 존재들을

복구시키는 일.

지푸라기라도 잡을 수 있다면 잡는다.

중요한 정보가 될지도 모르는 하나 하나를 소홀히 넘길 수 없다.

“뽑혀 나간 존재들이라……

거대한 기계전갈이 고개를 갸웃 거렸다.

“어떤 걸 말하는지 모르겠네. 기껏 물었는데 제대로 된 답을 주지 못해서 미안하군.”

기억을 읽으며 알긴 했지만.

겐콘도 나 같은 경험은 해본 적 없는 모양이었다.

그는 잠시 침묵한 뒤 말을 이었다.

“은자여,내가 아니라 저 녀석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어떤가?”

기계전갈의 꼬리가 노바의 코어가 박혀 있는 곳을 가리켰다.

“노바에게……?”

“그렇다네. 노바도 저주에 휩싸여서 대부분의 데이터를 상실하고,자신을 복제품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저게 바로 내 영자학의 스승이었던 노바라네. 천계접속모듈이기도 하고. 복제품 따위는 없지.”

역시 기억 속에서 본 것과 같은 존재였던 건가.

“노바?”

나는 무심코 녀석을 불렀다.

〈겐콘 크랙소르는 여전히 광기에 젖은 것으로 판단됩니다. 의도적으로 정제된 말투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노바에게 천계에 대한 정보는 입력 되어 있지 않습니다.〉

노바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렇다는데……

“복구하게나.”

〈폭력 성향이 사라졌지만,겐콘 크렉소르는 환자입니다. 겐콘 크렉 소르를…….>

중얼거리는 노바를 무시하고.

대화에 집중했다.

“복구라고?”

상상도 하지 못한 단어다.

“천계의 저주를 받았는데, 그런 게 가능한 건가?”

아포플라에 끼워 넣는 과정에서 한차례 마력을 불어넣어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걸로 뭐가 달라지는 것 같지는 않았다.

“써 본 적은 없지만,가주의 기밀실에 노바를〈초기화>하는 장치가 있다네. 역대 가주들은 관심도 없었고,나도 그동안 나눴던 기억이 모두 사라질까 봐 두려워 감히 사용하지 않았지. 그거라면 노바가 ‘원래 알고 있던’ 걸 자네도 들을 수 있을지 모른다네.”

“관심이 있다면,〈천계진입모듈〉로서 노바를 사용할 수도 있겠지. 자네가 탔던 타이탄은 트로핀 여단이 오랫 동안 개발해 오던 초월급 타이탄으로 보이니……. 저기에 노바를 끼우면 자네는 갈 수 있을지도 몰라.”

천계 진입.

겐콘 크렉소르는.

자신이 실패했던 시도를 나에게 권하고 있었다.

“내 기억을 읽었으면서도 거기 남은 광기를 견뎠다면,자네야말로 적합한 자일지도 모르지.”

‘완전히 견딘 건 아닌데.’

빠르게 동조율을 떨어트리고 물러 났으니까.

하지만.

세계에서 사라진 자들.

지금까지 그들을 복구할 어떤 실마리도 얻지 못했다.

‘이게 처음이야.’

따라갈 수밖에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밖에 천계에 대해 말해 줄 건 없나? 어떤 거라도 좋으니까……

하나라도 더 정보를 캐내기 위해 말을 걸었을 때였다.

- 저벅.

‘응?’

안에 남겨 뒀던 두 인간.

카린과 루이가,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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