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1화 주머니 속의 칼 (25)
루비아가 비브리오에게 신체를 개조당한 직후의 세계선.
나는 복수를 결심했다.
후작에게 빛의 유물이 어디 있는지.
비브리오의 비밀 아지트로 향하는 폐하수도가 어디 있는지 알려 줬다.
의도대로 레안드로는 일리엔의 눈물을 가지고 보티스의 결계를 파괴했고.
후작이 눈엣가시가 된 황실은 비브 리오 대신 후작을 남부로 내려보냈다.
‘물론 이번 세계선은 아니지만.’
혹시라도 먹힐지 모른다.
발각되더라도 어차피 지금보다 더 상황이 나빠질 것 같지는 않다.
이 녀석을 흔들어 놓지 않으면 여기서 나가는 건 곤란하다.
["•….]
“일리엔의 눈물이,자신을 숨기는 마왕 보티스의 결계를 무력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걸 가지고 제가 제국 수도 아래의 마경을 모두 소각했습니다! 그로 인해 일리엔
님에 대한 신앙이 엄청 상승했을 겁니다!”
음습한 폐하수도.
지름 3, 4미터에 높이가 20미터는 훌쩍 넘을 것 같은 열주들.
그 깊고 어두운 구멍에서 움직이던 비브리오의 본체가 떠올랐다.
그리고 녀석이 만들어 낸 광장.
아직 살아 있는 인간들로 만들어 낸 시계탑이 떠올랐다.
그걸 생각하며 치밀어 오르는 역겨 움이 목소리에 실렸다.
[흠……. 완전히 거짓은 아닌 것 같구나…….]
녀석은 별 반응이 없다.
하지만.
주위를 감돌던 저주는 분명히 한층 약화된 상태.
“정말입니다! 게다가 사적으로 욕심을 내지 않고 그 유물을 다시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확인해 보셔도 좋습니다!”
그야,쓴 적이 없으니까 당연히 제자리에 있을 거다.
“저, 이제 가도 될까요?”
슬쩍 한 걸음 옆으로 빠졌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빛이 응얼 거리기 시작했다.
[눈물… 이라…. 두 눈이 모두 감긴 지금 그걸 확인할 수도 없고…. 사실… 나와는 별로 상관도 없는 녀석들이지만… 일단 죽이진 않으마….]
“감사합니다!”
[거짓이면… 일리엔의 모든 부위가 너에게 영원히 저주를 내릴 것이다….]
“그럼요! 비르폰과 예메라의 저주 까지 다 내려도 됩니다.”
그딴 건 두렵지 않다.
아이작도 다 받았다는 저주.
일단 여기서 빠져나가는 게 중요하다.
망토의 ‘목소리’가 돌아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큭큭…. 주제에… 건방진 소릴…. 그런데… 내가 내버려 두면 여기서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맹랑한 녀석… 나도 힘든 금제들이다••.]
비웃음이 역력한 음성이 울려퍼졌다.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쨌든 저는 존경하는 분과 부딪치지 않는 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그래…. 몸을 던져… 저 녀석들의
금제에 불타 보거라…. 멋대로… 버둥거려 보거라….]
- 과드드드득!
끓어오르는 빛은 나에게서 관심을 거두고 망토를 향해 집중적으로 이글거리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가는 건 포기한 걸까. 망토에 있는 힘을 빼앗으려는 걸까.
어쨌거나.
거기에 신경 쓸 여유는 없다.
내 영역에 달라붙으려던 빛이 사그라 들자 한층 행동에 여유가 생겼다.
나는 둥글게 주위를 두른 글자 앞에 섰다.
〈아 무 도 여 기 를 벗 어 날 수 없 다.〉
“끄으으……
글자들에 가까이 다가가자 카린과 루이가 고통스러운 듯 힘겹게 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실신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떠난다는 행위 자체에 의식을 잃은 몸이 거부감을 느끼며 발작하고 있었다.
‘부숴야겠군.’
아이작과 나나우가 홉수당했던 비역.
이건,그때 허공에 띄워진 것과 같은 부류다.
인간을 한참 초월한 그들마저 구속 하던 글자들.
‘저 일리엔의 왼손도 못 벗어난다고 할 정도면……
엄청난 금제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본체가 자리를 비운 상태에서.
빛에 공격당하는 탓일까.
눈앞의 ‘글자들’이 내리는 구속은
그때보다 훨씬 약해진 상태였고.
나는 이미 비역에서 이 글자들에게 저항한 적이 있었다.
단순히 힘으로 밀어내는 게 아니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상태창>에 나는 다른 존재들 보다 훨씬 더 적은 영향을 받는 것 같았다.
‘언젠가… 너희들의 본체도 반드시 부숴 주마.’
- 우우우응.
인벤토리로 눈앞의 글자들을 동시에
움켜쥐고.
- 파삭.
전체를 내 영역 안에서 완전히 터트렸다.
열 두 글자가 부서 지 자.
무채색으로 갇혀 있던 세상에 다시 생생한 색이 돌아온다.
[뭐… 뭐…. 뭐야…? 이 녀석…!
뭘 어떻게 한… 거냐…!]
“콜록
기절해 있던 인간들이 물속에 잠겨 있다 밖으로 나온 것처럼 힘겹게 숨을 쉬었다. 글자들에 받던 압박이 풀렸는지 얼굴이 희미하게 화색이 돌았다. 내쉬는 숨에서 살아 있는 온기가 느껴졌다. 둘을 옆에 끼고 앞으로 달려갔다.
[어…. 여길 어떻게…. 빠져나가는 거냐? 이놈…. 멈춰라…. 아니…. 나도 같이 나가자….]
‘내가 미쳤다고 멈추냐!’
응응거리는 빛을 뒤로하고 밖으로 달려 나가며.
뒤를 홀끗 돌아봤다.
〈아 무 도 여 기 를 벗 어 날 수 없 다.〉
[크윽…. 이게 무슨….]
꿈틀거리며 다시 조립되는 글자들이 빛을 얽어떴다.
빛은 다시 글자들과 실랑이를 벌였다.
‘다행이군……
빛이 겐콘 크렉소르에게 강림해서 만들어진 폐허는 혐오스러웠다. 기계전갈의 몸에서 터져나간 부품들이 동굴을 마구 파헤치고 뒤틀어 놓고 있었다.
- 팟!
폐허를 뒤로하고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광산 내부는 마치 허물이 벗겨진 것처럼 무너진 암벽이 기계 잔해와 엉켜서 춤을 추고 있었다.
돌이 불을 뿜으며 용암이 되어 흘러 내렸고 돌무더기가 강철 관절을 가지고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광기가 핥고 간 표면들을 슬쩍 피해서 앞으로 나아갔을 때였다.
- 쿠구구구구구!
광석을 캐던 철인의 팔들이 끈적한 빛에 휩싸여 떼로 달려들고 있었다.
‘귀찮군……
앞을 가득 메우고 달려드는 그 군체는 피할 공간도 없었다.
나름대로 절도 있게 움직이던 모습은
간데없었다.
기계 팔들은 여기저기가 녹아내린 채,한 덩어리로 뭉쳐서 촉수처럼 꿈틀거리며 덮쳐오고 있었다.
강림한 빛에 먹혀 버린 겐콘의 정신과 연결되어 있었던 탓인지.
한 번에 빛의 영향을 받는 것 같았다.
“꺼져라!”
- 과광!
걸음을 멈추지 않고.
나는 한 번에 녀석들을 쳐내 버렸다. 나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았지만, 인벤토리로 보호받으면서도 저것들의 광기를 마주 보는 게 힘든지 카린과 루이는 몸을 덜덜 떨어대고 있었다.
‘정신 보호……
인벤토리로 그런 권능을 발현해 보려고 했지만.
‘안 되는 건가.’
두 여자는 흰자가 드러나서 눈은 더 하얗게.
눈밑은 까맣게 죽어 가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얼어라!”
- 서거거거격!
한 번에 눈앞의 공간이 얼어붙었다. 거칠게 출렁이는 바다도 얼렸던 냉기였다. 꿈틀대던 철인들의 팔은 공간이 통째로 얼어붙는 걸 피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당했다.
“이거나 먹어라!”
- 쿠과과과과과과!
얼어붙은 앞쪽의 공간에 인벤토리에 묶여 있던 하얀 후드의 매듭을 아예 확 풀어 버리듯 사용했다. 사방 수십 미터로 허공에 번개가 터져 나갔다. 얼어붙은 철인들의 팔이 강렬한 전압으로 깨져 나갔고,동굴이 무너질 것처럼 울렸다. 깨진 기계들과 하얀 얼음이 폭풍이 되어 흩날렸다. 안에 강림한 빛과 직접 싸울 수는 없지만 이런 부스러기들 정도는 내 상대가 아니었다.
- 팟!
깨져 나가는 녀석들을 치우며 밖으로
나가긴 했지만,머리가 복잡했다.
힘겹게 숨을 유지하는 카린과 루이가 보인다.
추적당하지는 않을까?
게다가 현 가주인데,카린이 가문에 이대로 복귀할 수 있을까?
단순히 여기서 도망치는 걸로 문제가 해결될까?
뒷감당이 걱정스러웠다.
빛도 빛이지만.
글자를 남기고 간 녀석이 다시 돌아왔을 때.
나와 두 여자가 모두 사라지고 없는 걸 몹시 수상하게 생각할 거다.
〈으음? 이건 또 뭐야? 언령에 뭐가 걸리네? 해골?〉
흠칫하던 망토의 목소리가 떠오른다.
‘녀석이 급하지 않았더라면…… 분명히 무슨 조치를 취했을 터.
돌아와서 내가 사라진 것까지 알면, 본격적으로 신경을 쓸 게 분명하다.
‘벌써,세 번째야.’
비슷한 녀석들에게 벌써 세 번 눈에 띄었다.
비역에서 마주쳤던 둘.
로랑스 공작에게 빙의한 존재.
망토의 목소리.
정보가 공유된다면.
내가 눈에 될 가능성이 높다.
수상하다고 생각하겠지.
투명한 손아귀가 나를 조금씩 조여 오는 것 같다.
불안감이 치밀었지만 당장 어쩔 수는 없었다.
여기서 도망갈 수밖에.
입구 쪽으로 달려 나가고 있을 때였다.
- 과과과과과광!
입구 쪽에서 엄청난 폭음이 들려왔다.
‘정말… 끝이 없군.’
한 걸음 한 걸음이 순탄치 않았는데.
이번에 입구에서부터 울려오는 거대한 진동은 심상치 않았다.
멀리서 달려오던 철인의 다리들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서로 뒤엉켜 쓰러질 정도의 충격.
영역을 강화해 충격으로부터 루이와 카린을 보호했다.
입구 쪽.
머릿속에 떠오르는 존재가 있었다.
‘브람의… 복제?’
〈반복합니다. 물러나 주시겠습니까? 제 앞의 부하를 퇴거해 주십시오. 퇴거하지 않으면 폭파하겠습니다.〉
입구를 지키던 모래정령.
브람의 7년 치 전투데이터를 복사한 녀석이,트로핀 여단과 실랑이를 벌이던 끝에 그냥 광산을 폭파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모래정령이.
입구를 뚫으려는 무언가를 감당할 수
없기에 입구에서 폭파를 결심했다면.
이대로 계속 달려 나갈 경우 그것과 부딪치겠지.
위험하다.
감지 영역을 최대로 활성화하고.
걸음을 멈춘 순간이었다.
[폭압 계측 완료!]
[진입 준비!]
[아포플라는 우리 트로핀 여단의 실험체다!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
[타이탄을 훼손하기 전에 이쪽의 폭압으로 저지한다!]
[폭파!]
확성기라도 쓰는 건지.
암반 너머에서 크게 대화하는 목소 리가 들려오고.
- 과광! 콰광! 콰과과과광!
연쇄적인 충격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입구가 아니라 옆쪽이었다.
‘두 군데서……?’
트로핀 여단은.
이 광산을 아예 날려 버리려는 걸까.
- 콰과과과과과과광!
‘아포플라는… 이미 없는데…… 허무한 시도였지만.
폭발력 만큼은 어 마어 마했다.
[젠장! 끄아아아악!]
[감도가 너무 높았습니다!]
[문지기의 폭파가 생각보다 더 강했어!]
[다 갈라진다! 물러나! 물러나!]
- 쿠구구구구!
천장과 벽 이곳저곳에 금이 가며 암석들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치지 않고 연달아 울리는 충격은 얇게 만들어진 금을 순식간에 깊고 넓게 벌렸고,천장을 무너뜨리고 바닥까지 뒤집어 놓았다.
게다가 2차로 더 강력한 진동이 다가오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이대로라면……!’
인벤토리를 최대로 강화해 카린과 루이를 끌어당겼다.
천장과 바닥이 동시에 쩍 갈라지는 충격이 덮쳐 왔다. 영역 안에서 그녀들을 보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카린과 루이가 입과 코에서 줄줄 피를 흘려대고 있었다. 폭파에 이은 진동 때문인지도,치료받지 못한 정신적 충격 때문인지도 몰랐다. 이대로 더 있으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다.
‘묻힌다.’
나는 괜찮더라도.
아무리 인벤토리로 보호하더라도,
숨을 쉬지 못하고 질식해 버릴 확률이 높다.
움직여야 했다.
입구는 아직 멀고.
폭파의 근원지이기도 하다.
‘그래도……
거기로 달릴까?
짧게 고민하던 나는 결정을 내렸다.
‘아니,이걸 그냥 이용해 버리자.’